우성태웅 / 사와루

[우성태웅] 나 너 좋아해

정우성 찾아 삼만리

  • 한국 현대 배경

  • 서태웅 가족 날조 조금 있음

주말연습 없는 토요일이었다. 2주에 한 번 있는, 귀한 자유시간이었지만 산왕공고의 체육관은 영업 중이었다. 본가 갈 사람들이 우르르 빠지고 남은 인원은 10명도 채 안 되었고, 정우성도 그중 하나였다.

사실 정우성은 외박신청서까지 제출했다. 그러니 이른 새벽부터 몸을 풀고, 남은 형들과 함께 아침 훈련을 하고 있을 계획은 전혀 아니었다. 이토록 상쾌한 토요일 아침에, 울고 잔 바람에 퉁퉁 부어버린 눈을 하고 농구공을 튕길 생각은 없었다는 뜻이다.

정우성은 체육관을 스캔했다. 이명헌, 신현철, 최동오, 김낙수... 주전들은 얼추 남아있었다. 성실한 사람들. 그는 이 답답하고 불안한 심정을 토로할 상대를 찾고 있었다. 명헌이 형은... 아니야. 도움 안 돼. 현철이 형은 암바나 걸 것 같고. 동오 형... 음. 괜찮나? 낙수 형은 무서우니까 제외. 그는 판단을 마치고 목표물을 향해 걸어갔다.

"동오 형."

"어어. 왜?"

정우성은 몰랐다. 어제 이불 밑에서 펑펑 울던 걸 기숙사생 전원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선배들 사이에서 저 뒤처리가 누구 담당일까 하는 얘기가 오갔다는 사실도. 최동오는 이명헌에게 걸었지만, 불행히도 선택받아버렸다.

"저 고민이 있는데요...."

"그렇구나."

정우성이 체육관 구석 비품실을 힐끔힐끔 훔쳐봤다. 단 둘이 얘기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최동오는 상냥했기에, 그의 의도대로 움직여주었다.

정우성은 비품실 문 앞에 서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땅이 꺼져라 연달아 내쉰다.

"애인이랑 싸웠어요."

"애인?"

최동오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최근의 그 이상한 행동들 -시도 때도 없이 실실 웃고 다닌다거나, 전혀 안 그러던 애가 틈만 나면 휴대폰을 만지작거린다거나-이 연애의 징후였다니. 김낙수가 '걔 연애하는 거 아니냐'라고 했을 때 다들 입 모아 그럴 리 없다고 부정했었는데.

"네... 사실 만난 지 얼마 안 됐어요."

그건 안다. 만나기 시작한 시점은 아마 다들 알 것이다. 그가 이상 행동을 하기 시작하자, 정우성이 미쳤나 봐용. 하고 이명헌이 회의를 소집했으니까.

"후우...."

정우성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세상의 모든 시련을 껴안은 듯한 표정이다.

"어쩌다 싸웠어?"

최동오가 운을 떼준다. 정우성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내뱉는다.

"아니, 어제 온종일 연락이 안 되는 거예요! 카톡에 답장도 없고, 전화도 안 받고... 걱정 되잖아요, 그렇죠?"

"어... 그렇지?"

"밤에 겨우 온 답장이 뭐였는지 알아요? 잤어. 잤대요!"

"아이고."

"걔가 원래 대답을 단답으로 하긴 해요... 말할 땐 그렇게까진 아닌데. 평소엔 괜찮았는데, 어젠 제가 너무 답답했나 봐요. 그거 가지고 화내버렸어요..."

최동오의 팔이 안으로 굽기 시작했다. 대충 달래만 주자는 마음가짐은 이미 날아갔다.

"그래도 잤다는 핑계는 너무했네."

"그렇죠! 온종일 자지는 않았을 거 아니에요! 하... 그래서 원래 오늘 만나러 가려고 외박신청서까지 썼는데 못 갔잖아요."

"멀리 살아?"

"조금요. 인천이에요."

그러고보니 2주 전에도 정우성이 외박을 했었다. 인천이면 많이 먼데, 정우성만 만나러 나가나? 성의 없는 단답에 직접 오지도 않는 애인. 최동오는 걱정됐다.

"매번 만나러 가는 거 힘들지 않아?"

"괜찮아요. 제가 좋아서 가는 거예요."

"아... 애인이 혹시 바람을 핀다거나..."

"... 그럴 리 없어요! 걘 절 좋아해요!"

정우성이 버럭 소리 질렀다.

"전! 농구를 잘 하잖아요!"

최동오는 할 말을 잃었다. 그 말이 여기서 왜 나오는데.

"그런데... 제가 어제 화낸 걸로 저한테 질렸으면 어쩌죠?"

정우성이 급 울상을 지었다. 감정이 아주 롤러코스터다.

"그렇게 걱정 되면 만나러 가던 가용."

불쑥, 이 자리에서 들려선 안될 목소리가 들렸다. 비품실 문이 열리며 이명헌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며, 명헌이 형! 이거 침해예요! 프라이버시!"

"우성. 문도 다 안 닫고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면 체육관 밖 고양이도 들어용."

명헌의 옆으로 형들의 얼굴이 주르륵 보인다. 아, 다 망했어! 정우성이 소리치며 달려 나갔다.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서태웅은 연례행사처럼 꼭 매년 여름에 감기를 크게 앓았다. 올해는 그게 어제였다. 아니, 정확히는 그제 밤부터였다. 주말에 걸리면 다행인데, 그제는 목요일, 어제는 금요일. 서태웅은 학교도 거르고 온종일 집에서 감기와 싸웠다. 자다가 잠시 일어나서 죽 먹고, 약 먹고, 다시 자고. 몽롱한 정신으로 하루를 보내다 보니 저녁쯤 되어서는 괜찮아졌다. 늘 심하게 앓아도, 금방 나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우성의 연락을 본 건 저녁 9시가 다 되어서였다. 저녁 식사 후 또 잠을 잤더니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서태웅은 그제야 책상 위에 방치되어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부재중 전화 4통, 카톡 알림 19개. 정우성의 걱정이 숫자로 보였다.

알록달록한 하트가 미리보기에 가득했다. 정우성이 슬쩍 바꿔놓은 저장 명이었다. 서태웅은 서둘러 답장을 입력했다.

-감기 걸려서 잤어

직관적이고 담백한 사실 전달이었다. 전송 버튼을 누르려다, 서태웅은 답지 않게 망설였다. 그러지 않아도 이미 정우성을 온종일 걱정시켰는데, 아팠다고 하면 더 걱정할 게 틀림없었다. 서태웅은 토독토독 앞의 문장을 지웠다.

-잤어

전송. 5초도 안 되어 1이 사라졌다.

온종일 자긴 했지. 서태웅이 숨김 없이 답을 했다.

-응

바로 읽어놓고는 정우성에게서 답이 없다. 답장을 기다리며 화면을 노려보다 보니, 곧 우다다 답장이 쏟아졌다.

서태웅은 차마 손을 움직이지 못하고 멍하니 화면을 응시했다. 정우성, 화난 건가? 정우성과 알아가고 연애하며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많이 걱정 되었나. 많이 속상했나. 서태웅이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었다. 서태웅은 정우성을 좋아했다.

-응

답장을 적던 손을 멈췄다. 또 응이라고 대답하면 상처받을까. 그런데 난 정우성이 좋은데. 그럼 뭐라고 해야 하지. 토독. 글자를 지웠다, 다시 썼다, 서태웅은 한참을 고민했다.

-모르겠어

서태웅이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러곤 곧장 다음 문장을 입력하려 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그러나 그 문장은 전송되지 못했다. 차마 적기도 전에 정우성이 다시 말들로 서태웅을 몰아붙였다.

쏟아지는 메시지에 정신이 없었다. 정우성은 화만 더 난 것 같고, 너무 빠른 답장 때문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할 시간도 없다. 서태웅은 본인이 계속 대화를 꼬이게 하는 것 같아 신경 쓰였다. 안 되겠다. 전화하자. 말로 하면 괜찮을 거야. 서태웅이 급하게 전화를 요구했다.

...싫어?

서태웅은 예상치 못한 거절에 어쩌지 못하고 또 가만히 액정을 응시했다. 정우성은 안되는 이유를 줄줄이 설명해주었다. 서태웅은 결국 응, 하고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곧 화들짝 놀라 메시지를 삭제하고 답장을 새로 했지만.

'응이라고 하면 화내니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우성은 답장을 읽지 않았다.

서태웅은 오고 간 대화를 반복해서 읽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감기 기운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의자에 걸터앉아 곱씹고 또 곱씹었다.

-너 나 좋아하긴 해?

저 문장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정우성은 서태웅을 좋아한다. 서태웅은 그걸 잘 알았다. 틈만 나면 보고 싶다고, 좋아한다고 계속해서 말해줬다. 서태웅도 정우성을 좋아한다. 그런데 서태웅도 정우성처럼 사랑을 표현했나?

서태웅은 기억을 더듬었다. 늘 인천까지 찾아와 원온원 상대를 해주던 정우성. 좋아한다고 터질 것 같은 얼굴로 고백하던 정우성. 손 잡고 걸으며 행복한 얼굴로 웃던 정우성. 헤어지기 싫다고 버스 정류장에서 어리광 부리던 정우성. 모르겠다. 서태웅은 도무지 자신이 정우성을 어떻게 대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정우성 얼굴만 떠올랐다. 보고 싶었다.

서태웅은 가슴이 찌르르 아파지는 걸 느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슬픈 건가. 슬픔이라고, 그렇게 단순히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저런 말을 한 걸 보면, 정우성은 많이 불안했을까. 그리고 많이 힘들었을까. 내가 정우성을 힘들게 한 건가?

서태웅은 당장 정우성에게 말하고 싶었다. 좋아한다고. 그 말을 하지 못한 게 후회되었다. 그러나 이미 기회는 건너갔다.

-일단 내일 연락하자

-내가 연락할게

평소의 서태웅이라면 그냥 내일 연락하자는 거구나, 하고 지나갔을 문장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서태웅은 다르다. 저 문장들을 포함한 대화 전문을 몇번이나 읽으며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러니 저 말은 그거다.

'내가 연락할 때 까지 연락하지 마.'

서태웅은 카톡 창을 꺼버렸다. 그러곤 인터넷을 켰다. 연락을 못 한다면 방법은 하나. 만나러 가야 한다.

서태웅. 나이는 만으로 15살. 어엿한 고등학생이었지만, 놀랍게도 혼자 대중교통을 이용한 경험이 전무했다. 학교는 늘 집 근처. 멀어봤자 자전거로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서울이라던가, 부산이라던가, 친구랑 멀리 놀러 가본 적도 없다. 서태웅은 주말이나 방학을 늘 집 근처 코트에서 보냈다. 친척 집에 갈 땐 아빠 차를 탔고, 서울에 있는 형의 자취방에 갔을 땐 누나만 졸졸 따라갔다. 근처 학교와 연습 시합? 버스 대절이 아닐 때에는 우루루 몰려서 다른 부원들 따라 티머니를 띡- 찍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 서태웅에게 인천에서 속초까지라는, 무려 4시간에 달하는 대장정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서태웅은 열심히 정보의 바다를 탐색했다. 인터넷은 너무 많은 정보를 알려준다. 추천 경로가 13개. 서태웅은 열심히 하나하나 눌러보았다. 헷갈렸다. 그래서 서울고속터미널에서 타란 거야, 인천고속터미널에서 타란 거야? 결국 서태웅은 옆방 문을 두드렸다.

"누나. 나 태웅인데."

어어. 들어와. 서태웅이 빼꼼, 문을 열었다.

"몸은?"

"괜찮아."

"어휴, 너도 참 고생이다."

서태웅의 누나, 서태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근데 왜?"

"나 가고싶은 곳이 있는데."

서태웅이 방에 들어서 제 손에 든 핸드폰을 내민다. 서태연이 대충 폰을 스캔한다.

"산왕공업고등학교? 강원도네? 혼자?"

"응."

"혼자 간다고? 강원도를? 왜?"

서태연이 질문을 쏟아냈다.

"친구 만나러 가."

"오..."

서태연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서태웅을 훑었다. 제 동생이 저 멀리 강원도에 있는 친구를 혼자서 만나러 간다니, 이상했다.

"혹시... 뭐 인터넷 친구... 같은 건 아니지?"

"아니야."

"그럼?"

"농구 시합 했어."

"아아."

농구하면서 사귄 친구구나. 서태연은 겨우 납득했다. 그래도 그 서태웅이 친구 만나러 강원도까지 간다니. 여러모로 찝찝했지만, 서태연은 굳이 파고들지 않았다.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주말에 친구 만나러 가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고.

"그래서,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어서?"

"응. 찾아봤는데 헷갈려. 도와줘."

"어엉. 줘봐."

서태연이 서태웅의 폰을 만지작거렸다. 서태웅은 그의 누나가 찾아볼 동안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웅. 봐봐."

서태연이 화면을 보여줬다. 하나하나 짚으며 설명해준다.

인천종합터미널까지 시내버스를 타고, 거기서 고속버스를 탄다. 속초고속버스터미널에서 내려서는, 거기서 또 산왕까지 버스로 20분. 역시나 복잡했다.

"인천종합터미널까지 가는 거, 환승 해야 해. 여기 보이지? 집 앞에 큰 도로에서 15번이나 28번 타고, 여기서 22번으로 갈아타는 거야. 티머니에 돈은 있어?"

"응. 있어."

"잘 찍고 내리고. 고속버스는 미리 예매해야겠는데. 몇 시로 할래?"

서태연은 손수 고속버스 앱까지 깔아서 배차 시간을 보여줬다. 8시 20분, 9시, 10시, 12시. 소요 시간이 3시간이고, 도착해서도 20분 더 가야 하니까. 적어도 9시 버스는 타야 점심 즈음엔 도착할 수 있었다.

"8시 20분."

"일찍도 가네."

서태웅은 조금이라도 빨리 정우성을 만나고 싶었다. 서태연은 예매까지 다 해주곤 폰을 다시 쥐여줬다.

"어떻게 하는 건지 봤지? 돌아오는 건 직접 해."

"응."

"아."

서태연이 책상 위에 던져져 있는 지갑을 뒤적거린다. 조금 꾸깃한 오만원권이 손에 잡혔다.

"자. 가서 친구랑 맛있는 거 먹고."

"응. 고마워."

"웅아, 뭔 일 있으면 연락하고. 알지?"

"알았어. 조심해서 다녀올게."

"오냐."

서태웅은 정보 획득과 조금의 금전적 이득까지 성공적으로 쟁취해내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일찍 잠자리에 누웠다. 거의 낫긴 했지만, 내일 아프면 안되니까. 푹 자서 감기를 떨쳐내고 내일 일찍 출발해야 했다. 불을 끄고 눈을 감았는데도 정우성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빨리 보고 싶었다.

인천 종합터미널까지 예상 소요 시간은 47분. 서태웅은 늦지 않으려 7시에 집을 나섰다. 주말에, 연습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이른 시간에 외출하는 건 처음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잠시 고민했다. 연락하지 말랬는데, 그렇다고 아무 말 없이 불쑥 찾아가도 되는 걸까. 서태웅은 카톡 창을 열었다.

-너 보러 갈게

-출발했어

어떤 말을 보낼지 고민하며 한참을 씨름하다, 결국 용건만 간결하게 보냈다. 그러고 있자니 곧 버스가 도착했다. 주말 아침이라 그런지, 버스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서태웅은 구석 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꺼내 들었다. 조용한 버스. 좋아하는 음악. 그리고 감기약. 졸음이 몰려왔다.


정우성은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 오전 내 농구공을 튕겼다. 후회와 불안이 뒤죽박죽 엉켜 들었다. 화내지 말걸. 태웅이가 말주변이 없어서 그렇지, 거짓말하는 애는 아닌데. 전화 하자고 했을 때 할 걸 그랬나? 아니 그런데 좋아하냐고 물었는데 모르겠다는 건 대체 뭐지? 진짜 모르겠다는 거야? 아닌데 태웅이 나 좋아하는데... 아닌가? 착각인가? 근데 내가 말을 좀 차갑게 하긴 했어... 태웅이도 화났을까? 갑자기 몰아붙였으니까. 아니면 진짜 질려버렸을까. 아 연락 해보긴 해야 하는데 뭐라고 하지... 태웅이가 헤어지자고 하면 어쩌지?

"정우성."

"으아아아!"

"아 깜짝이야."

정우성이 없는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저 차이면 어떡해요!"

"차이는 거지."

"낙수 혀어엉!"

"시끄러워. 점심 먹으러 안 가?"

"... 먹어야죠."

정우성은 형들을 따라 라커룸으로 향했다. 벌써 점심이라니. 이제 서태웅도 일어났을 텐데. 정우성은 제 사물함 문을 벌컥 열었다. 오전 내 멀리한 핸드폰이 얌전히 놓여있었다. 정우성은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폰을 집어 들었다.

'혹시 연락 와있을까. 에이, 설마. 이제야 일어났을 텐데.'

정우성이 홈 화면을 켰다. 미리보기 알림이 2개, 서태웅에게서였다. 다행히 걱정하던 이별 통보는 아니었으나 그만큼 놀랄만한 내용이었다.

"보러 온다고?"

정우성은 저도 몰래 소리 내 말했다.

"애인 온대?"

"오. 정우성 이별 통보 받는 건가."

"우성. 포카리 사둘게용. 많이 울면 수분 보충 해야 하니까 뿅."

정우성은 형들의 장난에 반응해주지 못했다. 재빨리 답장하고 보니, 시간이 이상했다. 7시에 출발했으면 11시 반이면 도착하는데. 고속버스 앱을 확인해보니, 8시 20분 차를 탔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11시 20분에 터미널 도착하고, 여기까진 20분쯤? 그럼 11시 40분에는 도착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 시간이 12시 10분이었다. 30분이나 더 늦어질 수 있나. 길 잃은 거 아니야? 아니, 그런데 왜 답장이 안 와? 정우성은 불안한 마음에 카톡을 몇 개 더 보냈다.

최동오가 정우성의 어깨를 툭툭 친다. 심각해 보이는 표정에 다들 장난기를 접어두고 슬쩍 뒤로 빠져있다.

"우성아. 무슨 일 있어?"

"출발했대요... 출발했다는데..."

"애인이?"

"네 근데 그게 7시예요. 지금 이미 도착했어야 하는데! 카톡도 안보고..."

"조금 헤맸을 수도 있잖아. 전화라도 해봐."

정우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를 건다. 그러곤 곧 하늘이라도 무너진 듯 절망에 빠진 표정을 짓는다.

"... 전원이 꺼져있대요! 어떡하죠!"

"충전 하는 거 까먹었나 보지. 기다리면 어련히 오지 않을까."

김낙수가 평온한 얼굴로 답했다.

"그래. 애도 아니고... 좀 기다려 보자."

"얘는 애예요! 애기라고요! 미아 되면 어떡해요!"

정우성이 울먹거렸다.

"그... 우성아."

"설마 중학생이냐 뿅."

"와, 혹시 초등학생?"

"최악. 뿅."

비난이 쏟아졌다. 정우성은 억울함에 급히 정정했다.

"아니, 고 1이거든요!"

"...그게 뭐가 애기냐."

"다행뿅."

"그러게. 신고해야 하나 했잖아."

다들 정우성 놀리기에 다시 열 올리던 와중, 지켜보던 김낙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네 애기 오고 있을 테니까, 일단 점심 먹으러 가자."

김낙수가 시계를 가리켰다. 12시 20분이 넘었다.

"제가 지금 밥이 어떻게 넘어가요!"

"굶든가."

김낙수가 앞장서 나갔다. 그를 따라 부원들이 줄줄이 나간다.

"애기 걱정도 식후경뿅"

정우성은 울상을 지으면서도 그 뒤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서태웅이 눈을 뜬 건, 버스에서 거의 30분 가량의 숙면을 취한 뒤였다. 시간을 보려 폰을 꺼내 들었는데 화면이 켜지지를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어폰에서 나오던 노랫소리도 끊겨있다. 당연히 내려야 할 정류장은 이미 지나쳤고, 방금 잠에서 깨 정신마저 몽롱했다. 서태웅은 무작정 하차 벨을 눌렀다. 더 멀리 가기 전에 내려야 했다.

이른 아침이라 행인이 드물었지만, 다행히 그가 내린 정류장에 근처를 지나가는 행인이 한 명 보였다. 서태웅은 머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물어볼 게 있어요."

행인은 다소 당황해하며 멈추어 섰다.

"인천종합터미널에 가고 싶어요. 길을 알려주시면 고맙겠어요."

"아... 네, 잠시만요."

친절한 행인의 도움으로 서태웅은 무사히 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이미 8시 20분 버스를 놓쳐버렸다. 또 하나, 핸드폰 배터리가 나가서 예매 표도 없다. 서태웅은 하는 수 없이 창구에서 가장 빠른 9시 버스를 다시 예매했다. 누나가 준 5만원을 가져와서 다행이었다.

어떡하지. 서태웅은 걱정되었다. 간다고 카톡까지 남겨놨는데 늦어버리게 생겼다. 또 정우성이 걱정하려나. 전원이 꺼져서 연락도 못하는데. 서태웅은 초조하게 버스를 기다렸다.

인천에서 산왕공고로 가는 길은 너무나 복잡하고 힘들었다. 버스도 여러 번 갈아타야 하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서태웅은 가는 내내 정우성을 생각했다. 폰을 만지지도 못하니, 불가항력이었다. 정우성은 매번 이렇게 먼 길을 와줬구나. 지루한 거 싫어하면서,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버스에 앉아서. 정우성과 가까워질수록 보고 싶은 마음이 커져만 갔다. 빨리 만나고 싶었다.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다. 좋아한다고, 말해줘야 했다.

길었던 여정에도 끝이 왔다. 시내버스는 서태웅을 싣고 산왕을 향해 달렸다. 저 멀리, 서태웅의 눈에도 산왕공고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까지 오는데 몇 번이나 길을 물었더라. 서태웅은 또 내릴 곳을 놓칠 새라 재빨리 하차 벨을 눌렀다. 드르륵. 뒷문이 열렸다.

정류장에는 정우성이 있었다.

"태웅아!"

와락. 정우성이 서태웅을 껴안아 왔다. 꽉 안은 양손이 달달 떨렸다.

"길 많이 헤맸어? 폰 배터리도 나갔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왔어! 배는, 배는 안 고파? 점심시간인데. 아, 일찍 출발했던데 아침은 먹었어?"

정우성이 걱정을 쏟아냈다. 서태웅은 걱정들을 온몸으로 받으며 꽈악, 마주 앉아줬다.

"보고 싶었어."

서태웅이 나직이 속삭였다. 정우성이 몸을 물리고 서태웅을 마주 봤다.

"나도... 나도, 태웅아."

정우성의 목소리가 떨렸다.

"미안해. 내가 어제 너무..."

"정우성."

서태웅이 정우성을 똑바로 바라봤다. 정우성이 동그란 눈을 깜박이며 마주 봤다.

"좋아해."

정우성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서태웅은 진정할 틈도 주지 않았다.

"너랑 같이 농구 하는 게 좋아. 같이 하면 재밌어. 손 잡고 산책하는 것도 좋아. 너는 손이 따뜻해. 그리고 너는 잘생겼어. 눈동자가 예뻐. 그 눈으로 날 볼 때 심장이 간지러워."

"......"

"머리카락 만지면 까슬하고 부드러워. 그 느낌이 좋아. 그리고 내 머리 쓰다듬어 주는 것도 좋아. 마음이 포근해져. 너랑 있으면 항상 즐겁고 행복해."

서태웅의 귀도 조금 붉어졌다.

"정우성. 나는 너 좋아해."

"...응."

새빨게져서 굳어있던 정우성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더니 다시 서태웅을 껴안았다.

"태웅아... 태웅아,"

"응."

"알아. 나도 알아. 미안해. 너도 날 좋아하는 거 아는데, 그냥 심통 나서 그랬어. 아주 조금, 불안해서 그랬어."

"불안했어?"

"조금. 진짜로, 엄청 조금."

"불안한 거 싫어. 걱정 하는 것도."

"응. 안 불안해. 걱정도 안해. 좋아해, 태웅아. 진짜 좋아해."

사랑은 신뢰에 기반한다는데, 정우성은 늘 100으로 만족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미 서태웅을 잘 알지만, 서태웅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보다 더한 확신이 필요했나보다. 서태웅은 늘 솔직했다. 그가 온종일 잤다고 하면 진짜 그런 거였다. 그가 응이라고 하는 대답에는 정말 긍정의 의미밖에 없었다. 귀찮아서 대충 대답할 거였으면, 애초에 귀찮다고 말했을 거였다. 정우성은 그런 서태웅을 알면서도 의심해버렸다. 서태웅이 아닌, 서태웅을 다 알고 있다고 믿는 자신을 의심했다.

"...정우성, 울어?"

"킁, 아니거든."

"어제는 감기 걸려서 학교 안 가고 잤어."

"감기?"

정우성이 화들짝 놀랐다.

"지금은 괜찮아? 약은? 나는 그것도 모르고..."

"괜찮아. 약 먹었어. 너 걱정할까 봐 얘기 안 했어. 그러니까 모르는 게 당연해."

"그래도..."

"모르겠다고 답한 거는 답장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뜻이었어. 나는 메시지로 대화하는 게 서툴러. 그래서 답을 잘 못했어. 미안해."

"아아... 역시 전화할 걸 그랬다. 내가 너무 몰아붙였지..."

"아니야. 네가 화가 나서 전화하기 싫으면 나도 기다릴 수 있어."

"킁, 화내서 미아내애..."

서태웅이 단호한 표정으로 정우성을 바라봤다.

"정우성. 너 사과 그만해."

"그치마안..."

"내가 말을 제대로 못 해서 일어난 일이야. 사과 계속 듣기 싫어."

"으응... 근데 내가..."

"정우성."

"응..."

"나 배고파."

정우성은 그제야 다시 활짝 웃었다.

"응! 그럴 것 같아서 나도 점심 안 먹고 너 기다렸어. 가자. 나 맛집 다 알아. 뭐 먹고 싶어?"

"음. 오므라이스?"

"오므라이스랑 돈까스 잘하는 곳 있어!"

히히. 정우성이 웃으며 서태웅을 이끌었다.

"태웅아, 나 외박신청서 냈는데."

"응."

"일요일까지 놀 수 있어. 자고 갈래?"

"엄마한테 물어볼게. 충전기 빌려줘."

"응! 밥 먹고 기숙사 들리자!"

"원온원도 할래."

"아, 체육관 열려있는데. 형들한테 말하고 거기서 원온원 하자!"

"응."

"재밌겠다! 체육복 내 거 빌려줄게!"

둘은 재잘재잘 신나게 떠들며 걸었다. 서태웅이 좋아하는, 따뜻한 손을 맞잡고서.

"정우성."

"응?"

"나는 너 만나러 오는 것도 좋아. 멀어서 오는 내내 네 생각 할 수 있었어."

"태, 태웅아..."

"응."

"그거 그만하면 안돼? 나... 심장이 너무 뛰어서 죽을 것 같아..."

"싫어."

"왜애..."

"너 얼굴 빨개지는 것도 좋아. 귀여워."

"으아아! 그만!"

정우성이 손을 놓고 저 앞으로 달려갔다. 서태웅은 그런 정우성을 보며 웃었다. 역시 만나러 오길 잘했다.


정우성이 서태웅을 사랑하는 만큼 서태웅도 정우성을 사랑해서 결국 그걸 표현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그리고 카톡 대화 만들기가 너무 재밌어서 남발해버렸어요... 전 재밌었는데 보는 입장에서는 어떨지 모르겠네요.

쓰다보니 글이 길어져버렸지만 재밌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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