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명헌] 러브러브 데이트 서비스-中

괜찮지… 않으려나…?


어느 운동부가 그러지 않겠느냐마는, 산왕공고 농구부는 특히 부지런하기로 유명했다. 공해 없이 높은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물들기 시작할 무렵. 해 머리가 산등선이 너머로 겨우 고갤 내미는 시간이 되면 기숙사 건물 앞으로 삼삼오오 익숙한 낯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아직 꿈속에 한쪽 발을 담그고 있는 듯, 눈을 채 뜨지 못한 이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우성은 양팔을 벌리고 눈 감은 채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 물처럼 파란 공기가 몸속 깊숙한 곳까지 닿아 잠을 몰아내도록. 포근한 잠자리에서 막 빠져나와 물먹은 솜처럼 축축 처지는 몸이 가벼워질 때까지 반복해서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쉰다. 밤새 부쩍 자라느라 고단했던 팔꿈치와 무릎, 발목 같은 관절을 푸는 것도 잊지 않는다. 폭우나 폭설이 쏟아지지 않는 이상 매일 반복했던 일과의 시작이었다. 

"정우성이, 일찍 나왔는데."

동그랗게 깎인 머리통을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툭 치고 지나가는 손길에 고갤 꺾어 돌아본 우성이 가볍게 고개 인사를 건넸다. 침대 밖으로 빠져나온 지 오 분도 채 지나지 않은 듯, 잠기운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의 신현철이 입을 쩍 벌려 하품해 보였다. 아, 형! 매너 좀. 매너는 자식아. 가벼운 투덕거림이 오가는 동안에도 하나둘씩 내려온 부원들이 각각 제 자리를 찾아 몸을 풀었다. 

아침 구보는 학년순으로 오와 열을 맞춰 진행된다. 인원수와 낙오자를 빠르게 확인하기 위해서다. 학기 초라면 몰라도 인터하이를 앞에 두고 있는 인제 와서는 특별한 사유가 있지 않은 이상 낙오자가 나오지 않고 애초에 가볍게 몸을 데우는 수준으로만 강도를 조절하기 때문에 정규 훈련 때보다 풀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형들은요?"

"곧 나올 거다.“

목을 좌우로 꺾어가며 스트레칭하던 현철이 저 나오네, 하고 고갯짓했다. 계단 아래로 터덜터덜 걸어 나오는 익숙한 얼굴들을 무심히 훑어보던 정우성이 쩍 얼어붙었다. 누가 등줄기에 얼음이라도 한주먹 집어넣은 것처럼. 

"형?"

우성은 꽉 졸린 목구멍에서 힘겹게 소리를 끄집어냈다. 음이 기묘하게 비틀려 목 졸린 새소리 같은 게 났다. 신현철이 흠칫 놀라 돌아봤다.

"왜?"

"저 옆에 있는 사람, 누구예요?"

이게 밤에 이상한 꿈이라도 꿨나. 늘상 구박하고 괴롭히지만 누가 봐도 정우성을 예뻐하는 게 티 나는 현철이 표정을 슬쩍 일그러트렸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에 따라 고갤 돌려 시선의 방향을 맞춰봤지만 특별한 건 발견하지 못한 듯 고갤 기우뚱 기울인다. 

"무슨 소리야. 김낙수?"

"아뇨, 그 옆에."

"정성구."

"말고요."

“최동오.”

“빼고.”

신현철이 하, 하고 헛숨을 터트렸다. 이놈이 뭐 하자는 거야?

"이명헌 말하는 거냐?"

정우성은 그만 꽥하고 소리를 질러버렸다. 근처에서 몸 풀고 있던 몇 명이 기겁하고 돌아봤을 정도로 크게. 바로 옆에서 그 소릴 들어버린 신현철은 바윗덩이처럼 거대한 몸뚱이가 움찔 튀도록 놀랐다가 그 사실이 자존심 상한다는 듯 정우성의 등짝을 철썩 후려갈겼다. 신현철은 대부분은 좋은 선배였고, 나아가 좋은 사람이었지만 종종 제 힘을 가늠하지 못하고 손을 놀리는 나쁜 습관이 있었다. 제 말로는 죽순처럼 쑥쑥 자라는 동안 덩달아 근육량이 는 탓이라고 변명했지만. 

등허리를 붙잡고 몸을 비틀며, 이번에는 악 소리도 못 내고 괴로워하고 있는데 그사이 가까이 온 정성구가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아침부터 무슨 난리야? 넌 눈 뜨자마자 애를 잡고 그러냐.”

“별로 세게 안 쳤는데, 짜식이 엄살은.”

“소리 저쪽에서도 들리더라. 살살해. 얘 없으면 경기는 누가 뛰냐?”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내내 괴로워하던 정우성이 머리를 퍼뜩 치켜들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새까만 눈과 딱 마주쳤다.  끝이 쳐졌지만, 결코 유순해 보인다 말할 수 없는 눈매. 두터운 쌍꺼풀과 깊게 팬 눈두덩. 그 가운데에 새까만 구멍이 뚫려있었다. 사람의 속내를 꿰뚫어 보기라도 할 듯 휘어짐 없는 단단한 시선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바로 어제 코앞에서 본 것이므로. 본래라면 제 시선 아래에 위치했을 눈이지만 등허리의 고통에 몸을 꽈배기처럼 비비 꼬다가 마주쳤기 때문에 우성이 올려다보는 꼴이었다. 검은 구멍이 눈꺼풀 안쪽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드러났다. 끔뻑. 

정우성이 다시 고함을 지르거나, 혹은 삿대질하거나, 아무튼 뭔가 행동을 취하기 전에 어깨 위로 두꺼운 팔이 둘렸다. 반쯤 접혀있던 몸이 억지로 펼쳐지는 고통에 아야야 죽는소리를 내는 사이 앞에 서 있던 운동화 한 쌍이 열의 가장 앞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따라 정성구와 김낙수, 신현철까지 아쉬움 없이 자리를 찾아 어슬렁 사라졌다.

흩어져있던 물건들이 정돈되는 것처럼 분란하고도 일정한 간격으로 서고 나면 웅성거림이 잦아든다. 부원들의 인원 확인이 끝나고 구보가 시작된다는 의미였다. 정우성은 뭔가 따지거나 묻지도 못하고, 뱃속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것 같은 구호 선창을 따라 앞으로, 앞으로 따라 걷는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게 제자리인 것처럼 보였다. 딱 하나 빼고. 

저 사람이 왜 여기서 나와…?

아침 구보가 끝나고 땀 범벅이 된 빡빡이들 사이에서 신현철을 찾아낸 우성은 이번에야말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를 자판기 뒤쪽으로 끌고 갔다. 아, 뭔데! 신경질을 내면서도 순순히 따라온 현철은 당장 소금기를 씻어내러 가고 싶은 눈치로 연신 땀을 훔쳤다. 혹시나 지나가는 사람들이 들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우성은 몇 분이 지나 아무도 없단 확신이 들고나서야 숨죽인 목소리로 물었다.

“형, 아까 그게 무슨 소리예요? 형이 이명헌…형을 어떻게 알아요?“

눈썹산이 뚜렷한 이마가 슬쩍 밀려 올라갔다. 질문의 의미를 되묻는 표정이었다. 조금 입버릇이 얄밉고 되바라진 구석이 있지만 멀쩡한 선배를 이유없이 모른체 할 녀석은 아닌데, 하는 눈치로 바라보는 시선에 정우성이 울상을 지으며 네? 하고 재촉했다. 

“명헌이를 어떻게 아냐니, 나야말로 묻고 싶다. 너 요즘 진짜 이상한 거 아냐.”

“대답부터요, 형.”

현철은 헛소리하는 후배 놈에게 레슬링 기술로 정신을 일깨워주는 친절을 베풀까 말까 고민하는 듯 몇 초간 뜸을 들이다가 두꺼운 팔로 팔짱을 끼며 턱을 치켜올렸다. 한 번은 봐주겠다는 의미였다.

“1학년 때부터 같이 뛴 동기에 우리 주장인데 어떻게 몰라.”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모든 게 이해되면서도 모든 게 어그러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땀이 식으면서 나는 오한인지, 혹은 괴담을 듣고 나면 으레 들곤 하는 생리적 현상인지 모르겠지만 등허리가 섬짓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더 말을 해봤자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건 제 쪽일 것이다. 신현철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침 구보 때 구호를 선창하던 낯선 목소리에 반응하는 건 오직 저뿐이었으므로. 다른 선배며 후배들도 약속이나 한 듯 당연하단 얼굴로 뛰고 있었다. 

가지런하게 정렬되어있던 바둑알들 사이로 생판 다른 것이 끼어들었는데 그것의 정체를 저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는 게 환장할 노릇이었다. 우성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럼 주장이라고요.”

“그래. 내가 지금 걔랑 만난 첫 만남까지 구구절절 설명 해야 하는 뭐 그런 상황인 거냐 지금?”

현철은 시간을 가늠해보는 듯 하늘과 학교 건물을 번갈아 봤다. 샤워하고 조식을 조진 다음 수업까지 늦지 않게 들어가기 위해서는 슬슬 움직여야 했다. 이상하게 구는 이유는 부활동 시간에 (약간의 암바를 곁들여) 물어보면 될 일이고. 그는 솥뚜껑 같은 손으로 정우성의 작은 머리통을 움켜쥐고 북북 문지른 다음 먼저 들어가겠다고, 정신 차리고 빨리 오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운동부의 아침 구보가 끝나고 샤워와 조식 시간이 연달아 있는 만큼 학교 전체가 들썩이며 깨어나고 있었다.

지난밤 찾아왔던 비현실이 기어코 현실로 들어섰다. 

 

***

 

그날 훈련은 엉망진창이었다. 내용에 집중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고 공을 등짝으로 받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평소라면 불호령이 내리고 개인 면담까지 할 일이었으나 근 며칠간 애가 좀 이상했다는 주변 사람들의 증언으로 거기까지 가지는 않았다. 정신이 빠진 채로 뛰어봤자 스코어를 떠나 자칫 잘못했다간 다칠 수도 있다는 이유를 들어 내려진 벤치형 선고까지 피할 순 없었지만. 

감독님은 기복 있는 어린 에이스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고민인 듯 눈썹사이와 관자놀이를 이어 문지르다가 고민이 있으면 찾아오라는 말만 남기고 우성을 풀어주었다. 감독님, 감독님 제자 중 한 명이 뭔가 이상하다니까요! 마음 같아선 검지 손가락을 치켜들고 삿대질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미쳤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다음 경기 참가에 문제가 생길 게 분명했다. 우성은 얌전히 고갤 숙이며 넵 대답한 다음 개인 연습 표를 쥐고 터덜터덜 코트 가장자리로 향했다. 거기 서 있던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 우성을 흘끔 바라봤다가 다시 코트 위로 시선을 돌렸다. 들이받아도 옴짝달싹 안 할 것처럼 꼿꼿한 자세로 뒷짐을 지고서.  앞뒤 좌우까지 살핀 우성이 살그머니 그 옆에 가서 섰다.

“뭐에요?”

따지고 드는 말투에 태연스러운 대꾸가 돌아왔다.  

“뭐가, 뿅.”

“왜 그쪽이 여기 있는 거냐고요. 원래 있던 사람인 척. ”

우성은 아무렇지 않은 척, 그냥 농구부 선배에게 조언을 구하는 후배인 척 보이려 애썼지만, 자꾸만 몸이 그쪽으로 움찔움찔 기울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 뿅쟁이 영업직원 어깨를 움켜쥐고 흔들며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묻고 싶었다. 화장실에서 발견한 낙서에 호기심이 동해 전화 한 통 걸었다고 이런 황당한 일을 겪어야 하나.

우리 어제 계약서 쓰고 당분간 볼 일 없던 거 아니었어요? 수많은 물음표가 동동 떠다니는 눈으로 옆태를 빤히 쳐다보고 있으려니 이명헌이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자로 잰 것처럼 반듯하게 세워져 있던 자세가 우성의 반대쪽으로 살짝 기울었다. 누가 봐도 명백히 귀찮아하는 기색이었으나 우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기요 형. 형이라고 부르면 되는 거죠? 어제… 암튼 그것 때문에 온 거예요? 다른 사람이 올 줄 알았는데. 제 말 안 들려요? 오늘따라 연습에 영 집중 못 하던 어린 에이스가 주장 옆에서 알짱거리고 있으니 하나둘씩 시선이 모이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시종 모른 채로 일관하는 모양새에 인내가 다 닳은 정우성이 기어코 큰 소리를 냈다.

“그럼 저 형이랑 사귀어요?”

농구화 미끄러지는 소리, 공 튀기는 소리, 서로 외치는 고함이 버튼 눌린 것처럼 퍽 꺼졌다. 

퍼뜩 놀란 정우성이 코트 쪽으로 고갤 돌렸다. 연습 시합을 하고 있던 사람도 프레스 연마에 집중하던 사람도 너 나 할 것 없이 살인사건이라도 목도한 얼굴을 하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퉁, 퉁…누군가의 손에서 떨어진 농구공이 하프라인 바깥으로 넘어가는데 아무도 그걸 주울 생각을 못 했다. 지금 쟤가 뭐라고 한 거야. 나 잘 못 들었는데. 방금 진짜 어이없는 말로 착각했다니까. 정우성이 주장한테 우리 사귀는 거냐고 물어보는 줄 알았지 뭐냐. 아 착각한 게 아니라고. 진짜 그렇게 말한 게 맞다고. 저게 농구만 하더니 돌아버렸구나 결국. 내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정우성은 슬슬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사람들에게서 어렵사리 시선을 돌려 삐걱삐걱 이명헌을 바라봤다. 이명헌은 두꺼운 입술을 벌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동요하지 않을 것 같던 낯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난데없이 고백 공격받은 선량한 선배처럼 보였다. 우성은 억울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은쪽은 제 쪽이었으니까. 

정신 못 차리고 헛소리한다는 죄로 코트 끝까지 밀려난 정우성은 농구공을 쥐는 것조차 금지당했다. 트랙 위주의 훈련에 이어 개인 훈련 시간까지 스텝만 죽어라 밟았더니 땀에 흠뻑 젖었는데도 체력이 남아돌았다. 맹세코 설렁설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농구공을 쥐고 안 쥐고는 땅과 하늘만큼이나 달랐다. 무엇보다 즐겁지 않았다. 훈련에 재미가 어디있엄마 그냥 하는 거지. 현철이 들었다면 귀가 따갑게 잔소리했겠지만,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의 차이가 극명한 건 우성의 천성이었다. 광철과 미사도 어쩌지 못한 고질병이기도 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주장, 그러니까 이명헌 앞에 정렬해 수고하셨다고 쩌렁쩌렁 외치는 동안에도 우성의 입이 비죽거렸던 이유다.

“우성.”

딱히 크지도 않은데 귀에 박히는 목소리였다. 오래 써서 자꾸만 흘러내리는 아대를 끌어올리며 걸음을 옮기다 뒤를 돌아보는데 명헌이 한마디 더 덧붙였다.

“오늘 남아 뿅.”

사람들은 다들 납득하는 눈치였다. 훈련 시간에 집중 못 한 것으로도 모자라 하극상(이라고 부를 수 있나?)까지 벌인 후배에게 주장이 긴히 좋은 말씀 전해주겠거니. 명헌은 우성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3학년 주전들에게 먼저 가라 말하며 라커룸 쪽으로 걸어갔다. 비디오 좀 돌려보고 나면 꽤 늦을 테니 기다리지 말라는 말에 수긍한 3학년들이 우성을 스쳐 지나가며 한 번씩 툭툭 건드리고 갔다. 위로 반, 근데 네가 먼저 잘못했으니 달게 벌 받으라는 의미 반. 

조금까지 열기와 소음으로 가득했던 체육관은 사람이 빠져나간 것만으로 썰렁한 기운이 감돌았다. 한창 뛰고 있을 때는 난방이 필요 없을 정도로 후끈했는데. 어차피 명헌을 기다려야 한다는 이유로 뒷정리를 자처한 정우성은 온종일 만지지 못했던 한풀이라도 하듯 농구공을 하나하나 꺼내 헝겊으로 훔치기 시작했다. 지문에 새겨진 듯 익숙한 촉감의 가죽 공을 쥐고 있으려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어젯밤 우성의 방안으로 성큼 쳐들어왔던 비일상은 이제 방을 나서 기숙사, 체육관, 학교 본관까지 침범하기에 이르렀다. 난데없이 나타난 낯선 얼굴과 목소리에 관해 이야기해볼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훈련 시간 내내 지켜본 결과,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학생들은 물론이고 감독님까지 ‘듬직한 주장’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같았다. 의욕이 쑥 빠져나간다. 이 상황에서 진실을 말해봤자 믿어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침 구보까지만 해도 멀쩡해 보이던 이명헌은 몸 상태가 안 좋다며 연습에 참여하는 대신 견학하길 자처했다. 물을 마시거나 땀 닦으러 나오는 부원들에게 뭔갈 물어보기도 하는 것 같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선 바깥에서 보냈고 무서울 정도로 바라만 봤다. 이따금 노트에 뭔갈 적던 모습은 우성이 보기에도 영락없는 농구부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원래 농구부원이 아니다. 수상쩍은 회사의 직원이지. 어떻게 사람들을 기억을 주물러놓았는지는 모를 일이나, 평범한 고등학생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했다. 아니, 인간인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세상 어느 인간이 하루아침에 온 학교에 최면을 걸 수 있단 말인가.

그 정체에 대해 고민하며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농구공을 닦고 있는 와중, 어깨 위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와악! 우성이 자지러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펄쩍 뛰어올랐다.

“사람들 앞에서 연애 발표까지 해놓고 간이 작다 뿅.”

이명헌은 처음 만났을 때 봤던 반소매 티셔츠에 체육복 바지 차림으로 멀뚱하게 서 있었다.

“그런 거 한 적 없거든요?”

“노린 거 아니였냐 뿅? 난 우성이 생각보다 대담했다고 느꼈는데 뿅.”

어찌나 태연자약한 표정이던지, 이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할 도리가 없었다. 우성은 어깨를 늘어트리며 겠냐고요, 하고 중얼거렸다.

“갑자기 나타나서 원래 있던 사람처럼 구는 거 보고 놀라서 그런 거예요. 대답도 안 해주고. 진짜, 왜 이렇게 말을 안 해주는 거예요?”

새삼스레 억울해진 우성이 입을 비죽거렸다. 명헌은 그러거나 말거나 몸을 숙여 발치까지 굴러온 농구공을 집어 들었다. 조금 전까지 우성이 광나도록 박박 문질러 닦고 있던 것이다.

“농구 잘하는 사람이 취향이라면서.”

그제야 제가 어제 적어 제출한 설문지에 생각이 미쳤다. 확실히 그렇게 적긴 했다. 키는 조금 크고, 연상에 농구를 잘하거나 적어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이제 보니 비일상을 농구부까지 끌고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우성인 모양이었다. 암만 그렇다고 해도 누가 사람들을 세뇌해가며 농구부 주장으로 들어올 거라 예상했겠냐고. 기껏해야 프로농구팀 어디 어디를 응원하고 있다거나 제 농구 경기를 보러오는데 거리낌 없는 사람이 올 줄 알았지. 

말문이 막혀 눈만 깜빡거리고 있으려니 명헌이 공을 튀기기 시작했다. 손힘이 어찌나 센지 공을 칠 때마다 탕탕 소리가 아니라 사람 가죽 패는 소리가 났다. 저런 소리는 현철이 형한테나 나는데. 말을 고르는 동안 곁눈질로 내려다보니 손 자체가 두껍고 컸다. 키가 크진 않은데 작지도 않았고, 뭣보다 체구가 좋았다. 가드 잘 보겠다. 무게도 있어 보이니 스크린 설 때 밀리지도 않을 테고. 저도 모르게 뜯어보고 있는 게 느껴졌는지 명헌이 보일 듯 말 듯 한 얼굴로 픽 웃었다.

“마음에 드냐, 뿅?”

“네? 아뇨? 아니, 그게 아니라. 좋, 은건 아닌데. 그저 그런데요?”

이게 뭔 바보 같은 소리야. 혀라도 깨물고 싶은 심정이 되어 눈을 질끈 감는데, 정작 당사자는 기분 나쁜 기색도 없이 그러냐고 했다. 키도, 연상이라는 점도, 얼굴도 뭐. 눈에 띄는 미남은 아니지만 어디 가서 못났다는 말은 안 들을 상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서 튀는 부분이 없는 얼굴. 아니다. 튀는 부분이 아주 없지는 않네.

“농구를 잘하긴 해요?”

우성이 두툼한 입술에서 시선을 떼려 노력하며 패스해달란 의미로 가볍게 손짓했다. 연습하는 것처럼 느리게 드리블하고 있던 명헌이 한쪽 눈썹을 슥 올리더니 불시에 공을 던졌다.

“요청사항에 맞추는 건 프로라고 말 안 했나 뿅?”

조금 전까지 다른 사람이 쥐고 있던 공은 체온이 옮아 미지근하다. 문득 비죽 웃음이 나오려고 하는 건 가슴 정중앙에 던져진 패스가 자로 잰 듯 정확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내 혼자 연습하다 누군가와 공을 주고받았기 때문일까. 둘 다일 수도 있겠지만, 둘 다 아닐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어젯밤부터 다른 사람 페이스에 말려들고 있으면서도 기분이 나쁘진 않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예요? 세뇌? 홀렸다고 해야 하나.”

시범이라도 보이듯 공을 두어 번 튀기고 손목을 이용해 높게 던졌다. 머리 위로 넘기는 롱 패스. 

“형 뭐 그런 거예요? 악마나 귀신?”

오늘 아침 구보 때 명헌을 마주하고 내내 고민하고 추론한 끝에 낸 결론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젯밤 기숙사 복도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순간부터, 혹은 난데없이 나타나 제 방에 쳐들어왔을 때부터였나.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으니 비상식적인 쪽으로 생각하게 되는 게 당연하다. 

우성이 오컬트적으로 박식한 건 아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수상한 존재가 어떠한 거래를 제안한다는 토대 자체는 국적 불문 시대 불문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 아닌가. 누구나 다음 이야기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흔해빠진 스토리. 그 속에서 나오는 비인간적인, 예를 들어 악마 같은 존재들은 인간성을 실험하는 거래를 제안한 다음 그 대가를 요구하곤 한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면 금은보화를 선물한다던가, 소원을 들어준 다음 영혼을 빼앗아 간다던가…. 

“그런 게 실제로 존재할 리 없잖아 뿅. 현실을 살아, 우성.”

이명헌은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나 어렵지 않게 공을 받아낸 다음 떨떠름한 표정으로 멈추어 섰다. 그게 뭔데 씹덕아….

“씨, 그럼 뭔데요.”

기껏 내놓은 정답을 단숨에 부정당했다. 미안한데 지금까지 그쪽이 보여준 것 중에서 현실적인 건 하나도 없거든요. 귀신이나 악마가 아니라면 그건 그것대로 납득이 안 갈 지경으로. 우성이 불만스러워하거나 말거나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맹하게 서 있던 이명헌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손안에서 공을 두어번 굴렸다. 뭐라고 해야 할지 말을 고르는 낌새였다.

“외계인 뿅.”

“뭐요?”

“외계인이라고.”

고민 끝에 한다는 답이 고작 외계인이란다. 

농담이느냐고 되묻는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명헌은 제 입으로 말해놓고 한층 더 확신을 가진 듯 반복해서 말했다. 외계인이 귀신이나 악마보다야 현실적이긴 한… 가?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입만 뻐끔거리던 우성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귀신은 소금을 뿌려 쫓아내고 악마는 성경 구절을 외워 퇴치할 수 있다고 한다. 외계인도 그런 게 있었나. 우성이 외계인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이라곤 그들이 동그란 비행접시를 이동 수단으로 삼으며 무작위로 사람들을 납치해 해괴한 인체실험을 자행하거나 광활한 밭에 의미불명의 도형들을 그려 넣는 둥 괴상한 취향을 가졌다는 것 말곤 없었으니까. 하지만 눈앞의 명헌은 녹색 피부를 갖고 있었는지도 않았고 비행접시를 타고 다니지도 않았다. 외계인이란 단어와 매치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말끝마다 붙이는 뿅뿅정도. 어쩐지 말이 안 통한다 싶었는데 다른 행성 출신이셨다.

우성이 입을 닥치고 있자 그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명헌이 보다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이 우주에 지성체가 지구인밖에 없을 거란 생각은 오만이다 뿅. ”

지난 시간 동안 러브러브 데이트 서비스를 이용했던 고객들의 출신 행성만 따져봐도 열 손가락이 훌쩍 넘는다는 말과 함께, 데이트 서비스 제공은 생각보다 보편적이며 다양한 지성체의 전반적 사회정보는 여러모로 쓰임새가 많다, 지금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뿐이지 지구인 고객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는 비상식적인 이야기를 상식적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 걸 듣고 있자니 사실 상식적인 건 이명헌쪽이고 편협한 상식을 갖고 있던 건 상식적이지 못한 그러니까 비상식적인 정우성쪽인 것 같다는 비상식적인, 아니, 상식적인 착각이 드는 한편으로 상식이란 뭘까 보편적으로 아는 지식이란 건 사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기 마련이므로 사실 상식이라는 단어의 규정 자체가,

“아으으으!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그럼 형들이나 선생님들이 다 형을 원래 있던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도….”

명헌이 고갤 끄덕였다.

“범우주적 사업을 운영하려면 이 정도 기술은 필수 뿅.”

“지난 시간이라니, 그럼 형 대체 몇 살인 거에요?”

“연상이 좋다며?”

“그건 그렇지만!”

우성은 이명헌을 만난 이후로 빡빡이란 사실이 자주 억울해진다고 생각했다. 쥐어뜯을 머리카락이 없다는 건 굉장히 불편한 일이구나. 이런 건 모르는 편이 좋았을 거라며 괴로워하는 꼴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명헌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대꾸했다.

“원한다면 계약이 끝날 때 지워줄 수도 있다 뿅.”

“기억을요?”

“어차피 다른 사람들 기억도 조작해놓고 가야 하니까. 당사자 동의만 있다면 한 명 정도 더 지우는 건 일도 아니다, 뿅.”

“형은 뭐 그런 말을 반찬가게에서 덤 얹어주듯 말해요.”

이명헌은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어깨를 한 번 들었다 놓았다. 그리고 몸을 약간 틀더니 농구공을 바닥에 한 번 튀겼다. 그리고 이어지는 깔끔한 점프슛. 공이 손끝을 떠나기도 전에 들어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정도로 깔끔한 자세였다. 오늘 보였던 태도와 외계인이라는 진술을 종합해본바 농구란 걸 접한 게 처음인 것 같았는데도. 백보드나 림을 두드리지 않고 그물을 스치는 소리에 등줄기로 가벼운 소름이 돋았다. 

이명헌의 단단한 얼굴 아래로 기분 좋은 기색이 물감처럼 퍼지고 있었다. 위쪽으로 쭉 뻗은 손을 내리지 않고 그대로 주먹을 한 번 쥐었다가, 제 손바닥을 내려다본다. 혹시 방금 그게 처음 한 농구였을까. 우성은 제가 처음 골대에 골을 넣었을 때를 떠올렸다. 지금보다 절반은 더 작았을 무렵이었고, 골대는 어린이용이라 본격적인 물건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도 체감상 까마득했던 높이였다. 매번 에어볼이 되거나 림을 맞고 튕겨 나오기나 했던 공이 그물을 통과했던 그 짜릿한 순간, 광철이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넣어 높이 들어 올려주었던 일, 평생 갈 사랑의 시작이었다. 어쩌면 이명헌도 지금 그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자 공연히 기분이 들떠 아무렇게나 입을 열었다.

“그럼 진짜 형이랑 하는 거예요? 그 연애라는 거.”

그 자신도 골이 성공할 거라 예상하지 못한 건지 잠시 제자리에 굳어있던 명헌이 돌아봤다.

“싫어 뿅?”

종전의 ‘기쁨’이 전부 우성의 착각이기라도 하다는 듯 고새 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외계인과의 연애라니, 그것도 백팔십 언저리의 농구부 선배라는 설정이라니 농담이어도 과하다. 우성이 궁금했던 건 평범하고 보편적인 연애였지, 무슨 소설에나 나올법한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싫은 건 아니고요. 오히려 외계인이란 설명 듣고 나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어진 것 같기도 하고. 어차피 전 상대가 누구든 크게 상관있을 것 같지 않거든요. 남자는 예상 못 하긴 했지만, 외계인이라는데 성별 같은 게 중요한가 싶어요. 그리고 형, 나 때문에 농구 열심히 배운 것 같은데 아깝잖아요. 농구 재밌죠?”

코트 바깥으로 굴러가는 걸 쫓아가며 조잘조잘 떠들던 우성이 공을 튕겨 잡고 뒤를 돌아봤다.

언제 다가왔는지 명헌이 코앞에 서 있었다. 심장이 튀어 나갈 뻔했다. 무슨 사람이 인기척 하나 없어. 이것도 외계인이라 그런 건가. 그 동네 사람들은 다 이렇게 조용하게 사람을 보고, 물내가 나나. 우성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심장을 주워 삼키느라 울대를 꿀꺽였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미적거리며 대화하는 동안 시간이 한참 흘렀다는 걸. 

체육관의 창으로 들어온 달빛이 이명헌의 왼쪽 뺨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침에는 깊은 구멍처럼 보였던 눈이었는데, 빛을 받으니 어둡다 뿐이지 반들반들 빛이 났다. 이명헌이 왔다던 우주처럼 보는 사람을 아뜩아뜩하게 만드는 검정이었다. 눈을 까막거리며 바라만 보고 있자 명헌이 부드럽게 공을 뺏어갔다. 우성은 저항 없이 공을 넘겼다.

“다행이네.”

늦었다 뿅. 돌아가자. 볼 캐리어 쪽으로 걸어가는 까만 뒤통수를 보고 있으니 딱 하나가 명확해졌다. 얼마든지 기억을 지워줄 수 있다고 했지만, 아마 우주의 기술로도 이 기억은 지우지 못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쉽고 간단하게 잊힐 리가 없었다.

 

***

 

정우성의 첫 연애가 시작되는 것에 맞추어 본격적인 무더위가 찾아왔다. 태양은 태양대로 이글거리고 하루가 멀다하고 소나기가 쏟아지는 날씨는 운동부에게 쥐약이나 다름없다. 

실내운동인 농구부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널찍한 체육관은 찜통과 차이점을 찾기 힘들었고 부원들은 그 안에서 뜨끈뜨끈 익어갔다. 이열치열이라는 말은 대체 누가 만든 걸까. 단언컨대 그 사자성어를 만든 사람은 한여름의 트레이닝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게 분명하다. 그 사람이 산왕에 와서 딱 일주일만, 아니 삼일만 농구부 훈련에 참여한다면 그런 사자성어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텐데. 지역 수비 코스를 막 끝낸 부원들 몇 명이 바닥으로 널브러지자마자 벼락같은 호통이 내리쳤다. 

“쉴 거면 코트 밖으로 나가서 쉬어라, 뿅. 자, 다음!”

갓 태어난 새끼 고라니처럼 후들거리는 다리로 반쯤 기어나가는 친구들을 바라보던 우성이 혀를 빼물고 가쁜 숨을 골랐다. 턱 아래 우묵한 곳까지 땀이 흥건했다. 물기를 듬뿍 흡수해서 무용지물이 된 아대까지 축축 처지는 기분이다. 평소보다 높은 훈련 강도였지만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터하이가 코앞이었으므로. 

보통 사람이었다면 따라오는 것만으로 허덕였을 훈련이었는데 우주에서 온 이명헌은 한평생 농구만 하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개인 훈련에서도 높은 기량을 보이는 한편으로 다른 부원들과도 손발이 척척 맞았다. 무엇이든 조건에 맞추는 것은 프로라고 장담했던 게 허풍이 아니었던 셈이다. 

미지근한 물로 수분을 보충한 우성이 다시 코트 안 제 자리로 뛰어 들어갔다. 공을 집요하게 쫓던 까만 눈이 순간 이쪽을 돌아봤고, 뭘 어쩔 틈도 없이 딱 마주쳤다. 

지구인이랑도 못 해본 연애를 외계인이랑 한다는 사실에 밤잠 못 이루며 긴장했던 것은 우성뿐인 듯, 걱정한 게 무색하도록 하루하루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하게 지나갔다. 처음에는 명헌이 근방 1m까지 접근할 때마다 움찔거리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과하게 반응했던 우성도 이젠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네거나 말을 붙이곤 했다. 심지어 어느 날은 종일 농구만 하고 마주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침대에 누워 사실 이명헌이 우주 밖에서 온 존재며 자신과 연애하는 중이란 사실이 전부 착각인 게 아닐까 고민했다. 사실 명헌은 이전부터 산왕의 주장이었고 함께 농구를 해왔던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했었노라고 말하는 날이면 이명헌은 등쳐먹기 좋은 타입이라는 얄미운 소리와 함께 기꺼이 우성의 착각을 깨트려주었다. 가끔 은근히 부딪쳐오는 체온으로, 아무도 없을 때 손바닥 안쪽을 간질이듯 겹쳐 쥐는 손바닥으로, 마주칠 때마다 반들거리는 눈동자로. 그것으로도 모자라 가장 최근 습득한 기술까지 아낌없이 사용했다. 

“올라가 올라가!”

“더 빨리 뛰어야지!”

뼈라도 부러트릴 듯 맹렬하게 덤벼오는 몸을 피해 반 발자국 물러나 그대로 턴. 얼마 전 바꾼 농구화 밑창이 코트에서 미끄러지며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온몸의 근육이 터질 듯 팽팽해졌다. 한 치의 틈도 허락하지 않으려 팔을 뻗지만 그보다 우성이 더 빨랐다. 빡빡한 디펜스를 벗겨내고 선 앞에 멈춰서고 나면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

있어야 할 장소에 정확한 도착했다는 것. 기다렸다는 듯 손에 감겨드는 공 끝에는 어김없이

있다, 이명헌이. 

흉통 안쪽을 울리는듯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코트에 흩어져있던 팀원이 달려들어 서로의 어깨를 얼싸안고 주먹을 치켜들었다. 정우성은 마지막 클러치 샷을 성공시킨 죗값으로 잠깐 사이에 등짝을 스무 번 정도 얻어맞았다. 마지막까지 점수 차이가 아슬했었던 만큼 기뻐하고 아쉬워하는 얼굴들 사이를 두리번거렸다. 

형! 정우성이 목줄 풀린 개처럼 뛰쳐나가 이명헌을 끌어안았다. 땀으로 흠뻑 젖은 뜨거운 몸이 응답하듯 팔을 뻗었다. 마주 닿은 몸에서 쿵쿵 심장이 울렸다. 몸 안쪽에서 누군가가 농구공을 튀기는 것 같은 박동이었다. 맨어깨에 코를 묻고 숨 쉬고 싶은 살 비린내와 땀 냄새가 운동 후의 아드레날린을 가속했다. 

“이명헌 터지겠다, 정우성. 한 번만 더 이기면 뽀뽀까지 하겠네.”

“뭔 소리예요, 진짜.”

정성구가 우스갯소리를 하며 어깨를 두드린 다음에야 우성이 머쓱한 얼굴로 떨어져나왔다. 이명헌은 이렇다 저렇다 대꾸하는 대신 다른 부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코트 바깥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원래 경기가 끝난 이후 과격한 스킨십을 하는 이들은 언제나 있었으므로 우성과 명헌을 특별히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눈치 빠른 3학년 몇 명이 정우성이 요즘 이명헌을 잘 따른다고 말하긴 했지만. 

잘 따르는 게 아니라 사귀는 중이거든요. 

진짜 사귀는 건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과 별다른 것 없는 것 같지만.

유니폼으로 아무렇게나 땀을 훔치며 뾰족해지는 입매를 감췄다.

그렇다. 최근 우성의 고민이 있다면, 이게 데이트 서비스인지 농구 서비스인지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직접 해본 적이야 없다지만 연애하면 심장이 터질 듯 뛰고 (농구를 하고 나면 엄청나게 뛰긴 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 즐겁고 (잘하는 포인트가드와 하는 농구는 늘 즐겁지) 어디든 닿고 싶어 안달이 나며 (이기면 기분 좋으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있어 가장 특별한 존재라는 걸 실감할 때면 온 세상을 가진 것 같다던데. (계약서 쓴 사이면 특별함에 들어가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손을 겹치거나 부러 어깨가 닿게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눈 적이야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데이트라고 부를만한 거라고 해봤자 최근 아대를 사러 같이 나가잔 이야기가 나온 것 정도. 그나마도 알콩달콩은 무슨, 용품사러 간다는 말에 너나 할 것 없이 제 몫의 쇼핑도 부탁하는 바람에 그냥 잔심부름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훈련이 끝나고 한 명도 빠짐없이 줄 맞춰 정렬한 앞에, 이명헌이 뒷짐을 지고 섰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뱃속을 긁는 것 같은 목소리에 이어 후창하며, 정우성은 오늘이야말로 꼭 무슨 말이든 해봐야겠다 다짐했다. 

오래 머무르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지만 마음을 다스리는 덴 도움이 되는 법이다. 시간을 쓴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우성은 그를 이해했다. 그게 주장의 일이라면, 우성에게 기다림은 큰일이 아니었다. 

늦도록 뒷정리할 명헌을 제외하면 남아있는 사람이 없는 건물은 스산하게까지 보였다. 고개를 들면 먹구름이 군데군데 꺼멓게 뭉친 하늘이 보였다. 아침만 하더라도 잠잠했던 하늘은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어두웠다. 우성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비가 쏟아지기 전에 형이 나와야 할 텐데. 그는 공연히 바닥에 내려둔 가방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죽였다.

“가자 애기야, 뿅.”

그러고 있노라면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와 거의 동시에 등허리 어딘가가 강하지 않게 쿡 찔렸다.

“어엇.”

가볍게 휘청거린 우성이 곧 중심을 잡고 서서 명헌을 돌아보았다. 명헌은 예의 그 무덤덤한 표정으로 우성을 마주했다. 귀신 같다니까. 

우성이 손을 내밀자 명헌이 자연스럽게 그것을 마주 잡았다. 둘만 남게 되면 손을 마주 쥐는 게 습관처럼 자리 잡은 지 며칠 됐다. 손은 운동을 끝마친 몸 특유의 미묘한 온기를 나눈다. 비가 오기 직전의 습윤함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단단히 잡고 나면, 자연스럽게 기숙사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오늘 잘했죠? 칭찬 안 해줘요?”

“에이스가 그 정도 하는 건 당연하지 뿅.”

“형은 칭찬이 너무 짜요.”

우성이 은근히 기대하는 얼굴로 명헌을 힐끔거렸지만, 명헌은 내도록 정면만을 바라보며 걸었다. 저 앞에 불이 드문드문 들어온 기숙사 건물이 있었다. 우성은 본래 보폭이었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했을 거리를 몇 분이나마 늘려보겠다고 의식적으로 걸음을 늦추었다. 명헌은 그것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니, 아마 알면서도 맞춰주는 것일 터였다. 부활동은 그렇다 쳐도 다른 학년인 만큼 단둘이 있을 기회라곤 아침 구보 전, 저녁 자율 훈련 이후뿐이었으니까. 부활동때의 이명헌은 엄격한 주장이었지만 체육관을 빠져나오면 사람이 은근히 허술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고집부리면 들어주고. 조르면 넘어가주고. 

아니다. 사실 정우성에게만 그랬다. 코트 위에서는 그러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조금만 유심히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우성에게 무르게 굴었다. 다른 형들이 에이스 귀여워하는 거야 알겠지만 너무 티 나게 하지 말라 언질 주는 것도 봤고. 하지만 그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닌가. 난 에이스고, 명헌이 형이랑 사귀고 있는데.

“넌 기복이 너무 심하고. 시합 때도 그러면 벤치다 뿅.”

“그럴 일 없다고요…….”

기 좀 세우기가 무섭게 얄짤없는 멘트가 들어왔다. 아무튼, 방심을 못 하게 한다니까. 에이스와 기복이란 전혀 동떨어진 두 단어가 우성을 쿡 찔렀다. 우성은 티가 나도록 입술을 비죽거렸다. 모처럼 둘만 남았는데, 경기도 잘 치렀고 기다리기까지 했는데.

“근데…….”

명헌의 시선을 따라 앞을 보던 우성이 도로 명헌의 옆얼굴을 눈에 담았다. 문득, 정말 문득 생각났다는 듯.

“형이 농구 잘하는 것도 외계인이라서 그런 거예요?”

우성은 자칫하면 발음이 샐 수도 있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이상하게 목소리 끝이 떨렸다. 

“나한테 패스 잘해주는 건 나랑 여….”

큼, 짧게 이어지는 헛기침.

“연애하는 중이라 그런 거예요?”

이런 질문은 너무 촌스러운가? 문득 뒷덜미가 뜨거워진다. 근 며칠간 고민했던 질문이었는데, 입 밖으로 내어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더 유치하고 촌스럽게 들렸다. 상대방에게도 썩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 같았다. 슬쩍 명헌의 표정을 엿보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무표정이었기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우성은 이 정도는 궁금해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되묻듯 뒤늦게 뻔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금쯤 부끄러워하거나, 아니면 웃기라도 해주면 죽기라도 하나. 공연히 골이나 눈썹을 꿈틀거리고 슬쩍 어깨를 붙여 툭 밀었다. 통나무 같은 몸통이 밀릴 정도로, 건방지단 말은 나오지 않을 만큼만. 

“데이트 서비스 뿅.”

“아무튼 간에요.”

“농구에 서비스가 어딨냐 뿅. 우성이 잘하니까 해주는 거지.”

또, 또, 또…… 저 덤덤한 목소리. 우성은 바보처럼 웃을 타이밍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또 무력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릴 수밖에는 없었다. 얄쌍한 입꼬리가 동그랗게 말려 올라가며 뺨이 폭 패였다. 다른 형들이 ‘개 표정’이라 명명한 얼굴이었다. 배알 빠진 놈처럼 헤실거리는 우성에게 명헌의 시선이 도르륵 굴러온다. 눈이 마주쳤다. 또 그 눈이다. 새까만 눈. 아득해지는 눈. 눈꼬리가 휘어지거나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어쩐지 이명헌이 살짝 웃은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착각이겠지만. 

우성은 에이스라는 자리를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다. 정우성은 농구를 잘한다. 그건 불변의 진리였다. 우성은 늘 한눈에 들어오도록 농구를 잘했다. 주니어 시절에도, 막 키가 크기 시작했을 때도, 그 산왕의 1학년 때에 에이스라는 꼬리표는 떨어진 적이 없다. 그게 정우성이었다. 그런데 이건 뭔가 다르다.

이명헌이 말하는 에이스라는 단어는 특별하다.

정우성은 어디서나 누군가의 눈에 드는 일이 익숙한데도 그랬다. 한 번에 시선을 사로잡지 못한다면 튀어나온 못처럼 구는 남자다. 팔이나 골반을 스치고 아프게 만들어 ‘나 여기 있어요’를 드러낸다. 의도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타고났다. 코트 위에선 가장 잘하는 놈을 보는 게 맞으니까. 상대 팀을 가장 아프도록 후비는 그 못, 그 튀어나온 못을 주목하는 게 타당하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이명헌이 코트 위에서 정우성을 에이스로 여긴다는 사실, 서비스니, 연애니 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없이 농구만으로 판단한다는 사실은 우성의 마음을 두드렸다. 이것도 외계인의 능력인 걸까. 누구든 상관없는 게 아니라 꼭 그 사람이면 좋겠다는 마음이 낯설었다. 

이게 특별하게 여긴다는 거라면. 

“제가 잘하니까요.”

우성이 읊조렸다. 특별하다. 무심하게 따라붙는 시선이나 코트 위에서 달군 돌처럼 데워지는 걸 본 순간부터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명헌에게도 정우성이 특별한가? 아마 그럴 것이다. 계약서에 정우성 이름 석 자를 넣었으니까…. 

그러니까, 그게 전부에요, 형? 어쩐지 맡겨놓은 거라도 있는 양 조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지 않게 애를 썼다. 

“제가 잘하니까….”

“그래, 우성. 잘하니까. 몇 번을 말하는 거냐 뿅.”

재수 없어지려고 그래. 명헌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우성은 아직 밝혀내지 못한 무언가가 있음을 느꼈다. 지금 막 고개를 내민 새순 같은 것. 조금만 더 다가가면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았다. 잡은 손에 힘을 주면 명헌의 손끝이 움찔거린다. 겹친 손바닥은 충분히 따뜻해져 있었다. 이 손이 얼마나 뜨거워질 수 있는지를 떠올리자 귀 뒤쪽에서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농구공이 튀기는 소리. 우성을 기분 좋게 만드는 소리다. 조금만 더. 그런 생각에 몰두하고 있을 때, 문득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

나무가 많은 지역에 비가 내리면 그런 소리가 난다. 우듬지가 비에 두들겨 맞고 그 아래 어린 가지가 흔들리며 뒤엉키다 보면, 산 너머에서부터 학교까지는 파도 소리로 가득해지곤 했다. 잔잔히 해안가로 밀려드는 그런 게 아니라, 바위에 부딪히고 하얗게 부서지는 소리. 초록과 흙이 젖어 나는 비린내까지 더해지면 영락없이 바다에 온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이명헌을 처음 만났을 때 맡았던 냄새도 이것과 닮았던 것 같다. 만지면 축축하게 묻어나올 것 같은 냄새. 생긴 건 건조하기 짝이 없는데 습기가 어울리는 건 어째서일까. 

잡념에 빠질 틈도 안 주고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쏴아아, 삽시간에 주변이 뿌연 물보라로 흐려진다.

좀체 놀라는 법이 없던 명헌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이 물방울은 물줄기가 되었다. 우성은 기숙사까지의 거리를 가늠했다. 지금이라도 뛰어가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초를 달리하며 거세지는 물줄기와 순식간에 어깨 아래까지 몽땅 적시는 비바람에 사그라들었다. 소나기를 이길 수 있는 이가 어디 있으랴. 귀여운 동물보다는 어떤 덩어리, 짐승들에나 비유되는 덩치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도망치는 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형, 비 그치는 거 기다렸다 가요.”

결국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전에 없던 표정을 짓는 명헌의 손목을 잡아챈 우성이 어쩐지 비장하기까지 한 말투로 말했다. 명헌은 이번에도 거절하지 않았다. 순순한 걸음으로 우성의 힘에 따랐을 뿐이었다. 잡은 손목 안쪽에서 맥박이 팔딱팔딱 뛰는 것 같아서, 우성은 자꾸만 이상해지려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야만 했다. 일단 비부터 피하는 게 우선이었다. 거센 비가 이마며 광대를 죽죽 긋고 때리는 통에 정신을 집중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일 분도 되지 않는 사이에 얼굴이며 몸이 다 젖은 명헌은 말이 없었다. 우성은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가까운 곳에 있는 체육 창고를 발견하자마자 그 뒤에 딸린 폭 좁은 처마가 떠올랐다. 종종 체육 시간이면 뜨거운 햇빛을 피해 서 있곤 하던 공간이었다. 다 큰 사내애 둘이 서 있기엔 좁겠지만, 아슬아슬하게 비를 맞지 않을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빨리 와요. 우성이 빗물로 축축한 손목을 끌었다.

“아으…. 무슨 비가.”

우성이 폭싹 젖은 어깨와 바짝 깎은 머리를 수선스럽게 털어냈다. 가만히 벽에 등을 붙이고 서 있던 명헌도 나란히 머리를 털었다. 개가 물기를 터는 것처럼 사방으로 물방울이 뿌려졌다. 

“차라리 기숙사로 바로 갈 걸 그랬나. 근데 비 내리는 거 보니까 금방 그칠 거예요. 원래 이맘때가 그래요.”

우성이 상체를 슬쩍 기울여 처마 바깥을 기웃거렸다. 여전히 하늘은 어두웠지만, 저 멀리는 희끗한 빛이 보이기도 했다. 군데군데 비가 내리는 곳과 내리지 않는 곳이 나뉘어 있단 뜻이었다. 비구름은 움직이기 마련이다. 영원한 비구름 같은 건 없으니까. 

생각해보니 명헌이 가장 무덥고 습한 날의 산왕밖에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조금 아쉽다. 다른 이들은 질색할 이야기긴 하지만, 우성은 산간 벽촌의 산왕에 내리는 비나 눈을 좋아했다. 얼마 전에 물어본 바에 따르면 이명헌도 비를 좋아한다고 했다. 수많은 행성을 다녀봤지만, 이토록 소란하면서도 적막하게 비가 내리는 곳은 드물다나. 

그렇다면 눈은 어떻게 생각할까. 매년 기록적인 적설량과 운동부라는 이유만으로 차출되어 끝도 없이 제설작업 하는 걸 생각해보면 싫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코끝이 빨개진 모습은 좀 궁금한데. 눈사람 같은 걸 만들기도 할 것 같다. 의외로 엉뚱한 짓을 하는 사람이니까. 우성이 다른 생각에 정신이 팔려있는 동안 명헌은 어깨에 메고 있던 더플백을 뒤적여 수건 한 장과 겉옷을 꺼내 들었다.

“역시 농구부라 다행이죠?”

부산스러운 기척에 명헌을 돌아본 우성이 씩 웃었다. 

“농구부가 아니었으면 이 시간까지 체육관에 남을 일도 없었을 거란 생각은 안 들고, 뿅.”

“그걸 또 그렇게 받네.”

우성이 콧잔등을 찡긋거리자 명헌은 그에게 건네려던 수건으로 제 머리를 먼저 닦았다. 짧은 머리의 장점이란 바로 이것이리라. 수건으로 몇 번 문지르지 않아도 금세 물기가 가신다. 우성은 그가 빗물을 전부 훔칠 때까지 기다리다 건네는 수건을 받았다. 약간 축축했지만 못 쓸 정도는 아니었다.

“우성 우산 왜 안 챙겼지 뿅.”

“아니 형은 외계인이람서 그런 뭐… 없어요? 탐지 기능?”

명헌의 말을 맞받아치니, 명헌이 우성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눌렀다. 아! 우성이 과장된 비명을 터뜨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난데없는 소나기에 온몸이 젖었는데도 기분이 나쁘긴커녕 이 상황이 웃기기나 했다. 혼자였으면 뭐가 좀 달랐으려나. 형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있었더라면. 

“없냐고요.”

“없어 뿅.”

“농구는 그렇게 잘하면서.”

“시끄러 뿅. 우산 정도는 가지고 다녀.”

형이나…. 우성은 그런 말과 웃음을 함께 삼키며 명헌이 기댄 벽 옆으로 나란히 등을 기댔다. 안 그래도 좁은 처마 밑에서 부산을 떨자니 물기를 닦아낸 보람도 없이 다시 한쪽 어깨가 젖어 있었다. 

“저 형 기다렸잖아요.”

우성이 티셔츠 가장자리를 잡고 물을 쭉 짜내며 물었다. 

“기다리는 동안 회의했죠? 어떤 얘기 했어요?”

“패턴을 바꿔야 한단 얘기 뿅.”

명헌은 내리는 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직선으로 곧게 뻗은 짧은 속눈썹이 젖어 있었다. 상상도 가지 않지만, 이명헌이 운다면 꼭 지금 같은 얼굴이 아닐까. 속눈썹만 좀 젖고 물은 흐르도록 그냥 둔 채 우는 이명헌. 제가 한 번도 못 본 이명헌. 고작 28일 가지고는 볼 일 없을 표정의 이명헌. 그가 겨울을 보지 못하고 떠나는 것처럼, 정우성도 이명헌의 수많은 시간을 못 보고 헤어지게 될 거란 사실이 새삼스레 서운했다. 형도 겨울을 보지 못하는 걸 섭섭해할까 생각하며 몰래 속눈썹과 축축한 귓바퀴를 훔쳐봤다. 

처음에는 28일이 길기만 한 것 같았는데, 정작 겪어보니 어림 없을 정도로 짧게 느껴졌다. 정이 중요하다며? 고작 4주로 무슨 정이 들어. 적어도 몇 주는 더, 하다못해 가을까지라도…아, 나 미국 가지.

“이미 다른 학교에서 분석했을 테니까. 우성에게 패스를 너무 자주 하는 것도 뿅.”

말을 마친 명헌이 고개를 돌려 우성을 바라보았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명헌과 눈이 마주친 우성이 뒷덜미를 긁적거렸다.

“신, 호까지요?”

혀끝이 버벅거린다.

“그것까지 바꾸면 헷갈린다 뿅. 우성 못 따라올걸.”

“…….”

“바보 뿅.”

“바보 아니에요.”

우성이 티 나게 눈을 찡그렸다. 명헌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조금씩만 바꿔야 우리 애들도 익히지 뿅.”

명헌이 말하는 우리 애들, 이란 단어는 귀에 감기는 느낌을 주었다. 며칠 후면 떠날 사람이면서 그렇게 말하는 건 좀 반칙 아닌가. 꼭 계속 남아있을 것처럼. 진짜 소속감이라도 느끼는 것 마냥. 계약서에 추가로 사인하지 않으면 같이 있어 주지 않을 거면서. 우성은 괜히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하나만 알려줘 봐요.”

우리 애들. 우성은 그 단어에 매몰되기 직전이었다. 빨리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야만 했다. 우성의 말에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명헌이 물기가 남아 살짝 반짝거리는 제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훑었다.

“이건….”

그리고 주먹을 말아 쥔다. 직각으로 올리면 손금에 고여있던 물이 손목을 타고 흘러 팔꿈치에 맺힌 물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에 점점이 얼룩이 수놓아졌다. 그런 행동을 할 때 명헌은 굳건해 보였다. 변하지 않는 무언가의 상징 같았다. 오래된 건축물 같기도 했고, 막 지어진 신성한 신전의 기둥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웃기는 서비스 직원인지 뭔지가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 그건 가장 기본적인 수신호 중 하나였다. 우성으로선 모를 수가 없는 그 신호.

에이스가 득점한다. 

형한테도 제가 에이스예요? 우성의 눈이 처마의 그늘 밑에서 희미하게 반들거렸다. …에이스란 건 특별한 사람이란 거죠? 되묻는 시선이었다. 빗소리가 여전했다. 처마와 바닥, 무성한 나뭇잎을 사정없이 때리는 요란한 소리가 사방을 가득 에워싸고 있었다. 명헌은 오래도록 우성의 눈을 바라보았다. 우성은 피하지 않기 위해 숨을 참아가며 그 눈길을 감내했다. 어쩌면 이명헌도 숨을 참는 것 같았는데 이것도 착각일까.

약간 젖어 숨을 쉴 때마다 반들거리는 목선이 유난했다. 이마도, 뺨도 아직은 얇은 비늘이 덮인 듯이 반짝거렸다. 예쁘다. 돌을 깎은 것처럼 뭉뚝하고 단단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그 인상은 변하지 않았는데도 나란히 있어선 안 되는 단어들이 나란했다. 외계인은 다 그런가. 우성은 새까만 가운데 맺힌 자신의 상을 보며 생각했다. 모든 의문의 끝을 형의 출신지 탓으로 돌리고 있단 자각도 없었다.

“우성은.”

명헌의 선 둥근 입술이 달싹였다. 

“우성이 구독한 서비스가 뭔지 좀 착각하는 것 같아… 뿅.”

손이 움직인다. 내내 명헌의 눈에 정신이 팔려있던 우성은 뒤늦게 깨달았다. 명헌은 손을 뻗어 움찔거리는 우성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비에 젖었는데도 따듯하다. 이상한 말이지만 우성은 그 온기로부터 명헌을 인식했다.

깊은 고동이 저 안쪽에서부터 울리기 시작했다.

“에이스는 시작과 끝.”

“…….”

“모든 작전의 핵.”

“…….”

“특별. 뿅.”

손에서 손으로 전해져 오는 힘이 진심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명헌의 낯은 너무도 무덤덤했고 음성은 고저가 없었다. 다만 우성이 확신하는 하나는 명헌이 쉽게 거짓을 이야기하지 않는단 것이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까부터 귀가 뜨거웠다. 

우성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어 달싹거렸다. 목구멍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들어앉아 콱 틀어막힌 기분이었다. 코트 안의 이야기 말고요. 좀 더 바깥쪽. 형의 가장 내밀한 구석에서요. 계약서도 농구도 다 벗어나도 형에게 특별해요, 제가? 그렇게까지 묻지 못한 이유는 명확했다. 이명헌이 반대로 물으면 당할 도리가 없었으니까. 이명헌은 코트 밖에서도 정우성에게 특별한가. 

정우성은 아직 그것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우성.”

명헌이 고개를 틀었다. 순식간에 입술이 맞물렸다가 떨어진다. 우성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방금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는 데에 몇 초가 걸렸다. 언젠가 한 번쯤은 손으로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살점은 제 상상보다 훨씬 더 무르고 축축했다. 착각했나 싶을 정도로 짧은 시간 머무르던 얼굴이 태연스런 표정을 짓는 걸 보고 휘둥그렇게 뜬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다, 다시 한번 만요.”

정우성은 제가 뭐라 말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이명헌의 손을 다급히 움켜쥐었다. 숫제 매달리는 수준이었다. 방금 건 너무 멋없었잖아. 억울함에 눈썹이 잔뜩 쳐지는 걸 본 명헌이 눈가를 움찔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순순히, 다시 한번, 제 뜻대로 입술을 겹친다. 

부드럽고 눅눅하다. 가까이서 섞이는 호흡에선 비 냄새가 났다. 우성은 눈을 감는 것조차 아까운 기분이 들어 빤히 바라보다 엄지로 손등을 살살 문질렀다. 간식 조르는 개가 정강이에 얼굴을 부벼오는 것처럼. 이명헌의 앞에서 개처럼 구는 것 정도는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근 며칠간 이어진 만남과 입맞춤은 우성의 경계심을 흔적 없이 녹였다.

“이런 거 다른 사람들이랑 많이 했겠죠. 내가….”

우성은 안 된다고 소리치는 이성을 무시하고는 숨을 흡 들이켰다.

“몇 번째예요?”

“…….”

“…네?”

명헌이 코웃음인 듯 그저 짧은 숨인 듯 오묘한 소릴 냈다.

“정말 매너 최악이다. 우성 뿅.”

명헌의 말은 대개 틀린 적이 없었다.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우성은 마르지 않은 천이 몸에 쩍쩍 들러붙는 감각에 집중하려 애썼다. 뒤통수가 따끔거리고 목이 탔다. 잡은 손이 떨어지기라도 할까 힘주어 잡는 꼴이 애잔하게 보이진 않을까 뒤늦게 걱정됐다.

“들어도 후회 안 할 자신 있냐 뿅.”

“아뇨.”

우성이 즉답했다.

“……그냥 안 들을래요!”

무슨 말을 해도 가로막히니 이길 자신이 없었다. 우성이 빠르게 눈을 굴렸다. 젖은 티셔츠가 몸에 들러붙는 것이 못내 불편한 듯, 명헌이 어깨를 몇 번 돌렸다. 미간에 아주 희미한 실금이 그어져 있었다. 조금 불만스러운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확신할 순 없었다. 

“그래, 뿅.”

명헌은 다시 비가 내리는 처마 너머로 몸을 돌렸다. 조금 전의 입맞춤 따위는 다 없던 일이라는 듯, 적어도 제게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몸에 척척하게 감기는 옷가지만 잡아당기면서. 정우성은 손으로 만져보고 싶은 부위가 더 늘어나기 전에 눈 돌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좀체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귀여우니까 봐준다.”

“에?”

쏟아지는 빗소리 사이에서 그 말이 그렇게 크게도 들렸다. 잠깐. 방금 뭐라고?

“저 귀여워요?”

우성의 얼굴 위로 삼키지 못한 웃음이 배어 나왔다. 명헌의 어깨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코끝이 젖은 목덜미에 닿을 법한 거리에서 눈썹을 들썩거린다. 조금 전까지 했던, 하나도 안 귀여운 상상은 죄 모른 척하고. 입 밖으로 안 냈으면 된 거지. 원래 상상으로는 뭘 해도 무죄인 법이랬다. 네? 저 귀여워요? 조르듯이 몇 번이고 시선을 건넨다. 묵묵하게 정면만 바라보던 명헌이 잡고 있던 손을 풀어냈다.

“아!”

놓친다. 미끄러진다. 공을 스틸 당했을 때의 느낌이 슬슬 가물가물해지는 참이었는데. 번뜩 일깨워주는 힘이란…. 우성은 손을 놓기 무섭게 제 머리에 딱밤을 내리는 힘에 눈을 질끈 감았다.

비는 우성의 예상을 거스르지 않았다. 점차 가늘어지던 빗줄기는 종래엔 완전히 끊어져 서늘한 바람에 섞여들었다. 우성은 맞은 머리를 문지르며 무어라 항변했지만, 명헌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기숙사로 마저 걸어가는 내내 젖은 몸은 그대로였고 명헌은 다시 우성의 손을 잡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건 아무래도 길들이기일 것이다. 우성은 알면서도 순순히 명헌의 뜻에 굽혔다. 명헌이 주먹을 쥔 채 손을 직각으로 들지 않는다면, 득점하려 무리하지 않는다. 그건 가장 간단하고도 절대 변하지 않는 수신호이니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지금까지 아픈 건 너무하잖아. 우성은 꿍얼거리며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젖어 꿉꿉한 몸을 잘 씻고 말렸는데도 빗속인 듯이 마음이 심란했다. 닿았던 입술과 몇 번이고 잡았다 놓았던 손 같은 것이 여전히 머릿속에 산재해 있었다. 밀려오는 파도소리, 젖었는데도 따듯했던 온기, 서로 밀치듯 주고받았던 장난들과… 귀엽다고 말하는 형. 귀엽댄다, 내가. 입매가 또 말랑해졌다.

“음….”

뒷머리를 긁적이던 우성이 침대 옆의 작은 탁자 위 올려둔 작은 달력을 들었다. 하루 이틀 셈을 해보니 테스트 기간이 총 열흘가량 남아있었다. 무료 체험까지만 해도 별문제가 없었다고 했었지. 연장계약은 안 하면 되니까 괜찮다고 위안했던 게 생각났다. 정체 모를 데이트 서비스라 해도 28일간 무슨 일이라도 생기겠느냐고. 

불현듯 서비스, 라고 말하던 입술이 불쑥 생각 사이로 튀어 오른다.

“으으음….”

두툼한 입술은 빗물에 젖어 약간 축축하고 차가웠었다. 표면만 건드리는 입맞춤이었는데도 우습지가 않았다. 말을 하는 입술보다 맞부딪혔던 입술의 감촉이 먼저 떠올리고 있단 걸 자각한 정우성이 까슬한 뒷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손잡기니 뽀뽀니, 그런 걸 못 해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느냐고 다른 형들을 매도했던 지난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죄송해요 형들. 근데 그땐 형들이 정말 저질 같았어요.

“나쁜 사람 같지는 않은데… 계약 연장해도 괜찮지 않으려나.”

우성이 중얼거리며 몸을 뒤로 풀썩 눕혔다. 천장의 등이 그 반동에 희미하게 흔들거렸다. 나랑 계속 연애해도 괜찮나. 그러고 보니까 형은 어쩌고 싶은 거지. 얕은 양각으로 격자무늬가 새겨진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던 우성이 달력을 가슴 위에 포개어 올리고는 눈을 감았다. 전등의 번쩍거리는 불빛이 눈을 감아도 빨갛게 비쳐 보였다. 연장해도 괜찮지… 않으려나…?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열흘. 딱 그만큼의 무게가 가슴을 은근하고 부드럽게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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