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웅른 / 루른

[백호태웅호열] 단풍 아파트 101동 110호 (1)

왜 그렇게 웃냐?

  • 백호태웅호열 / 호열태웅백호

  • 현대 / 한국

  • 대학생(2학년) 시점

강백호. 그는 친구가 많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지인' 정도로 불렀을 관계도 그는 허물없이 친구로 만들어 버린다. 자신의 벽을 낮추고, 타인의 벽은 깨부수었다. 그렇게 부정하더니 학년이 바뀔 즈음 되어서는 서태웅도 슬쩍 친구 보따리에 집어넣었다. 호열이도 친구, 여우 녀석도 친구. 친구 셋이 같이 살면 친구X3. 최고. 이 모든 일을 단숨에 진행해 버린 강백호에겐 그 정도 생각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강백호는 저렴한 데다 학교에서도 가깝고, 심지어 꽤 넓기까지 한 좋은 매물을 발견하고는 친구 둘과 함께 살 생각에 이미 마음이 붕붕 떠다녔다.

서태웅과 셋이서 살자는 강백호의 제안에 양호열은 잠시 고민하더니 곧 흔쾌히 승낙했다. 서태웅을 꼬시는 건 꽤 어려웠다. 서태웅은 기숙사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는 강백호의 동거 제안에 생각해 보겠다더니 한참을 고민했다. 제일 큰 방 줄게, 기숙사 살아보면 별루다?, 통금 얼마나 불편한지 아냐?, 친구끼리 자취하면 재밌잖냐! 강백호의 끈질긴 구애는 일주일 후 승낙의 문자로 결실을 맺었다.

그렇게 개강이 2주도 남지 않은 겨울날, 셋은 동거를 시작했다. 

대학가 중심의 한 생맥주집. 대학생들은 종강의 여운에 사로잡혀 맥주잔을 부딪치며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강백호의 종강 소식에 서울에 집결한 백호군단 역시 그중 하나였다. 인천에서 아버지 가게 일을 돕고 있던 노구식, 강백호의 대학과 1시간 거리의 전문대를 다니고 있는 이용팔, 인천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고 있는 김대남. 고등학교 졸업 후 1년간 각자의 자리에서 제 할 일을 하느라 만남이 잦지는 않았으나, 그들을 여전히 백호 군단이었다. 조금 늦는다는 양호열을 뺀 나머지 친구들이 제 근황을 털며 회포를 풀어내었다.

"그래서 열심히 찾아봤거든? 근데 너무 비싼 거야!"

강백호가 맥주잔을 탕, 내려놓으며 소리를 높였다.

"투룸은 가격이 애매하더라구."

"서울 집세 비싸지."

"그러다 내가 진짜 괜찮은 곳 찾았는데... 좀 오래된 아파트고, 쓰리룸이란 말이지. 방 두 개에 거실 하나 있는 거."

"방 두 개면 딱 좋은 거 아니냐?"

노구식의 말에 강백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투룸에서 한 명 거실, 한 명 방 이렇게 살랬단말야. 둘이서 쓰리룸은 비싸거덩."

"그럼 어쩌냐?"

"그래서 한 명 더 구했다, 이 말씀!"

"오... 오?"

강백호의 말에 나머지 셋이 서로를 바라본다.

"너냐?"

"아닌데... 용팔이 너 아니냐?"

"아니, 나는 너무 멀지!"

강백호가 그들의 의문을 단숨에 해결하려 나섰다.

"여우가 미국에서 돌아온대. 우리 학교로 편입한다길래, 내가 바로 낚아챘지!"

강백호가 뿌듯한 미소를 짓는다.

"여우? 서태웅?"

"엉. 방학 중에 돌아온다던데."

"... 호열이는 괜찮대?"

"당연하지! 좋다던데?"

셋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또다시 강백호를 뺀 나머지가 서로를 바라본다.

"호열이 좀... 사람을 가린다 해야 하나? 다른 사람 불편해하잖냐."

"엉?"

백호 군단은 중학생, 고등학생 시절의 양호열을 떠올렸다. 타인을 대할 때 양호열의 말투, 표정이 눈앞에 생생히 그려진다.

"아아, 그런 거 있지. 왜, 호열이가 자주 짓는 그 사회성 웃음 아냐?"

"크하학, 알지! 그거 잘 보면 좀 무섭다?"

"어휴, 우리가 친구라 다행이지."

그들의 대화에 강백호만 동떨어져 따라가지를 못했다. 사람을 불편해하는 양호열? 사회성 웃음? 저들과 같은 학창 시절을 보냈는데 혼자만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뭐냐, 그게 무슨 소리..."

"아, 다들 왔네?"

강백호의 말을 가르며 양호열이 등장했다. 덕분에 강백호는 의문을 풀지 못한 채 그를 반길 수밖에 없었다.


양호열과의 교우관계를 이어온 지 자그마치 8년 차. 강백호는 이제 그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생각했었다. 약 두 달 전, 백호 군단과의 술자리가 있기 전까지는. 강백호가 아는 양호열은 웃음이 많았다. 시도 때도 없이 실실 웃고 다닌다기보단, 사람을 대할 때 늘 웃으며 대하는 친구였다. 당장에 양호열의 얼굴을 떠올려 보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그의 웃는 얼굴이었다. 밝고 든든한 친구. 강백호는 여태 양호열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양호열이 타인을 불편해한다니? 사회성 웃음은 또 뭐야? 그날의 술자리 이후 잊고 있던 그 말들이 이사 당일, 불현듯 떠올랐다. 

강백호, 양호열, 서태웅. 셋의 동거가 결정된 건 2달 전이었으나, 막상 셋이 한자리에 모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이사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그들은 텅 빈 집에 가구와 짐을 채워놓고는, 당연하다는 듯 중국 음식을 시켜 주방의 식탁에 둘러앉았다. 강백호는 짜장면을 입안 가득 채워 넣으며 그날의 대화를 곱씹었다. 마침 맞은편에 앉은 양호열의 얼굴이 노란 주방 등 덕에 훤히도 보였다.

"태웅아, 자취는 처음이던가? 미국에선 어떻게 살았어?"

양호열은 제 짬뽕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서태웅에게 말을 거느라 여념이 없었다. 조금 올라간 양쪽 입꼬리, 예쁘게 접힌 눈매. 강백호가 항상 보던 그 웃음이었다. 노란색 조명 탓인가? 조금 더 예뻐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미국... 대학교 기숙사 있었어."

서태웅이 탕수육을 우물거리며 찬찬히 답해준다. 서태웅의 대답에 양호열의 눈매가 반달 모양으로 접힌다. 별거 아닌 대답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저렇게까지 웃는 건가 싶다. 아, 저게 애들이 말한 그 사회성 웃음인가?

"아아. 그럼, 자취는 처음이겠네?"

"응."

"그럼 집안일은 좀 서툴겠다, 그렇지?"

양호열이 젓가락을 대충 짬뽕 그릇에 쑤셔놓곤 한쪽 턱을 괸다. 예쁜 미소가 여전히 서태웅을 향했다. 서태웅의 우물거림이 멈추고, 그 작은 입이 열릴 때까지 양호열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 조금."

"나는 작년에 혼자 자취했었거든. 내가 청소 같은 거 할 테니까 태웅이는... 빨래할래? 여기 건조기도 있더라고. 건조대에 빨래 널 필요는 없겠다. 개는 건 같이 할까?"

"나도 청소 할 수 있어."

"알지. 그래도 내가 자취 경력이 있으니까,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

강백호가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서태웅과 대화하는 양호열을 보고 있으니 왜인지 모르겠지만 속이 끓었다.

"야, 호열이 너 짬뽕 안 먹냐! 그럼 나 주든가!"

괜히 성내고는 뒷말을 덧붙인다.

"그리고 여우 넌 주방엔 얼씬도 말아라. 너 가정시간에 요리랍시고 망쳐놓던 꼴 다 기억난다고!"

아. 나 빼고 둘이 얘기해서였나. 둘의 시선이 저를 향하니 강백호의 끓는 속이 조금 진정되었다.

"하하. 그럼, 백호가 요리하고, 내가 청소하면 되겠네. 태웅이는 빨래. 괜찮지?"

"엉."

"... 그래."

서태웅을 향하던 미소가 강백호에게도 도달했다. 여전히 예쁘게 웃는다. 덕분에 강백호는 다시 헷갈렸다. 대체 뭐가 사회성 웃음이란 거지?

강백호의 양호열 관찰기는 이틀 만에 끝났다. 도무지 서태웅을 향한 양호열의 표정에서 별다른 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평소와 조금 다른 부분이라면 좀 더 자주, 더 활짝 웃는다는 것? 돌이켜 생각해 보면 중학생 시절의 양호열이 저렇게 자주 웃었다. 고등학생이 되고는 조금 차분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셋이 살다 보니 즐거운 모양이었다. 실제로 강백호도 친구와 함께하는 첫 자취에 신이 나 있던 상황이었으니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백호는 그들과의 자취생활을 만끽하느라 웃음이고 뭐고, 결론 나지 않는 복잡한 문제는 기억 저편으로 날려버렸다.

이사 3일 차. 집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강백호는 서태웅과 함께 체육관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도 함께였다. 서태웅과 나란히 걷자니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아직은 낯선 현관문을 열면, 먼저 귀가한 양호열이 둘을 맞이한다. 1인분이 아닌, 3인분의 저녁을 준비하는 건 굉장히 즐거웠다. 셋이 식탁에 앉아 그날 하루를 얘기하며 수다가 반인 저녁 식사 시간을 가졌다. 씻고 정리하다 보니 어느샌가 셋 다 강백호의 침대를 등받이 삼아 거실에 널브러져있다. 밤이 채 깊어져 가기 전, 서태웅의 하품이 5분에 한 번으로 잦아진다. 눈도 슬슬 감기더니, 결국 꾸벅거리며 졸기 시작했다. 양호열이 티비 소리를 안 들리다시피 낮춰버렸다.

"엥, 호열아 나 저거..."

"쉿."

강백호의 불만은 양호열의 손짓에 단숨에 막혀버린다.

"태웅이 깨겠다."

"여우는 이런 걸로 안 깨."

강백호가 툴툴거리든 말든, 양호열은 서태웅의 흔들리는 머리를 뒤로 기대주는 데에 집중하였다.

"그냥 깨워서 방에 보내는 게 낫지 않냐?"

양호열이 멈칫한다. 그러더니 곧 조용히 반론한다.

"조금만 놔두자. 이렇게 곤히 자는데 어떻게 깨우냐."

"호열이 너..."

강백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런 애가 무슨 사람을 가려.

"역시 너무 착하다니까."

양호열이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한 시간이 지나 서태웅이 자력으로 일어날 때까지, 거실의 티비는 무음에 가깝도록 조용했다.

그들이 새로운 집에 아직 완벽히 적응하기도 전, 손님들이 찾아왔다. 강백호, 서태웅과 같은 대학교에 다니는 북산고 선배, 정대만과 권준호였다. 일이 있어 저녁 늦게 돌아오는 서태웅을 빼고도 집들이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강백호는 나름대로 구색을 맞추느라 배달 음식을 여럿 준비해 놓고 자취를 축하하러 와준 손님들을 맞이했다. 정대만이 들고 온 휴지와 권준호가 들고 온 와인 한 병. 맛있는 음식들과 좋아하는 선배들, 가족 같은 친구. 강백호의 텐션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아져 갔다.

"백호야, 여기 묻었다."

양호열이 제 볼을 콕 찌르며 웃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던 강백호의 입이 그제야 닫혔다. 그는 볼을 문질러 닦으며 양호열을 마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선배들과 떠들기 바빠서 양호열을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온 지 한 시간이 넘어간다. 그런데 양호열이 입을 열긴 했나?

"호열이는 어때? 태웅이랑 같이 살 만해?"

권준호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강백호가 조용한 틈을 타 양호열에게 말을 건다. 양호열의 시선이 권준호에게로 옮겨간다. 

"아아. 네, 좋아요."

양호열이 권준호를 보고 웃는다. 강백호는 그 웃음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무언가 달랐다. 양호열의 표정을 뜯어봤던 지난날이 생각난다. 서태웅을 향한 미소, 저를 향한 미소. 강백호가 본 양호열의 웃음은 그 둘을 향한 것밖에 없었다. 강백호의 관찰 데이터에 새로운 사람이 추가되었다. 그는 새로운 데이터를 열심히 분석했다. 분명 달랐다. 그런데 뭐가 다른 건지 모르겠다.

"난 너희 셋이 같이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특히 강백호랑 서태웅. 쟤네가 워낙에 투닥거렸어야지."

"뭐. 그랬었죠."

이번에는 정대만. 양호열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다. 그런데도 왜인지 늘 보던 그 예쁜 웃음과는 다른 느낌이다. 조금 올라간 양쪽 입꼬리. 그리고, 조금도 접히지 않은 딱딱한 눈매. 눈? 강백호가 손을 들어 올려 시야에 들어오는 양호열의 입을 살짝 가렸다. 아. 이제야 알겠다.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이거였구나. 애들이 말한 양호열의 사회성 웃음. 왜 여태 몰랐을까.

강백호의 깨달음의 순간,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태웅이 돌아왔다. 양호열의 고개가 빠르게 현관 쪽으로 향했다.

"태웅아, 왔어?"

양호열이 활짝 웃는다. 딱딱하던 눈매가 예쁘게 접힌다. 언제나의 그 웃음. 직전과 비교하니 더욱 예뻐 보인다.

덮어두었던 의문이 드디어 풀리고, 강백호에게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사회성 웃음'을 짓는다면, 양호열은 왜 서태웅에게 저렇게 웃지?


3편까지는 프롤로그 비슷한 느낌일 것 같아요. 사실 이 글이 저의 슬램덩크 첫 글이었답니다. 임시저장글에 있는 글 쪼가리를 열심히 다듬어서 가져왔어요. 오래 묵힌 만큼 애정도 많은 글이라, 부디 읽으시는 분들께도 재밌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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