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웅른 / 루른

[백호태웅호열] 단풍 아파트 101동 110호 (2)

왜 나를 싫어했어?

  • 백호태웅호열 / 호열태웅백호

  • 현대 / 한국

  • 대학생(2학년) 시점

서태웅은 친구가 적다. 아니, 적다고 하기도 민망하다. 서태웅의 친구는 단 한 명, 강백호뿐이었다.

그는 주변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서태웅은 무수한 관심을 받으며 살았다. 외모, 키, 농구 실력. 어디 하나 눈에 띄지 않는 요소가 없다. 그는 자신을 향한 무수한 관심 표현을 모두 튕겨냈다. 그게 호의든, 적의든, 알 바 아니었다. 일방적 관심으로는 친구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서태웅은 친구가 없다.

서태웅의 인간관계는 농구를 중심으로 뻗어간다. 농구는 5명의 팀 스포츠. 서태웅은 그 사실을 잘 안다. 어딜 가든 홀로 둥둥 떠다니던 서태웅이, 농구코트 안에서는 제 몸을 구겨 넣고 팀원 사이에 맞물린다. 오로지 농구를 매개체로 해야지만 서태웅과 엮일 수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딱 농구부원, 거기까지다. 그 이상의 무언가, 친구라면 으레 그러하듯, 사적 영역을 공유하려 들지 않는다. 서태웅은 그런 사람이구나. 보통은 그렇게 지나가는 인연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단 한 사람, 강백호만이 달랐다.

강백호의 관심은 요란했다. 서태웅의 단단한 벽이 깨질 때까지 지치지도 않고 관심을 퍼부었다. 제아무리 서태웅이라 해도 강백호의 끊임없는, 구애에 가까운 그 행위를 버텨내지 못했다.

여우, 뭐 해?

여우야, 너 주말에 시간 있냐?

여우! 어디가!

여우, 너 밥 먹었냐?

야, 서태웅! 우리 친구잖아, 그렇지?

강백호의 일방적 관심 표현이 결실을 맺었다. 서태웅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친구가 생겼다.

서태웅은 첫 친구가 소중했다. 한 번은 잃을 뻔도 했기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 강백호가 동거 제안을 했을 때 오래도록 고민했다. 친구랑 같이 살면 싸운다던데. 이제 와 싸움을 걱정하기엔 둘의 과거가 너무나 화려했지만, 서태웅은 진심이었다. 강백호랑 멀어지기 싫었다.

"아, 맞다. 호열이도 같이! 셋이서 사는 거야."

강백호가 뒤늦게 붙인 조건은 서태웅을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양호열, 그가 누구인가.

농구 없이 서태웅의 관심을 받았던 유일한 사람.

'양호열은 나 싫어하는데.'

인간관계에 연연치 않아 하던 서태웅이 신경을 쓰던 유일한 사람.

"양호열은 괜찮대?"

"당연하지! 친구끼리 자취하면 재밌잖냐! "

서태웅이 먼저 친해지고 싶어 했던 유일한 사람.

그게 양호열이었다. 

집안일 분담은 평화로운 동거생활의 첫걸음이다. 강백호는 요리와 설거지, 양호열은 청소 전반, 서태웅은 빨래. 셋의 역할은 이사 첫날, 양호열의 의견 80퍼센트와 강백호의 의견 20퍼센트를 반영해 5분 만에 정해졌다. 서태웅은 별생각 없었다. 그렇구나. 나는 빨래 담당이구나. 잦은 빨래는 운동부의 숙명이다. 미국에서 사는 2년간 빨래는 이미 통달했다. 셋이 살아서 그런지 3일 차쯤 되니 벌써 빨래 바구니가 한가득이다. 그는 제 일을 해내기 위해 움직였다.

서태웅은 제 방 맞은편, 양호열의 방문을 두드렸다. 서태웅의 추리에 의하면, 양호열의 방엔 빨랫감이 있을 게 분명했다.

"어, 어... 잠시, 아니, 들어와!"

양호열은 침대에 걸터앉아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고 있었다. 까만 드로즈 한 장만 입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서태웅을 맞이한다. 서태웅은 푹 젖은 까만 머리칼을 보며 잠시 과거로 돌아간다. 비가 무섭도록 쏟아지던 날. 양호열은 혼자였고, 서태웅도 그랬다. 그때의 양호열도 편의점 앞에서 비를 피하며 젖은 머리를 털어내고 있었다. 늘 깔끔하게 넘긴 머리만 봐왔다. 그렇게 축 늘어져 이마를 덮고 있으니 아주 딴 사람 같았다. 서태웅은 비를 피할 생각도 않고 젖은 몸으로 자전거를 끌고 가는 중이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한다. 양호열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처럼. 곧 표정이 빠르게 바뀌었다. 당황한 건가?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 서태웅, 잠시만. 다급히 그렇게 외치곤 편의점으로 뛰어 들어갔다. 다시 나온 양호열의 손에는 우산이 하나 들려있었다. 자. 감기 걸려. 양호열이 빗속에서 우산을 건넸다. 머리를 털어낸 보람도 없이, 까만 머리가 축축하게 젖어 든다. 너는? 서태웅의 물음에 그가 어떻게 대답을 했더라. 그 끝은 기억난다. 양호열은 다시 편의점의 어닝 아래에서 머리를 털었고, 서태웅은 우산을 펼쳐 들고 집으로 향했다. 

"태웅아?"

양호열의 부름에 번뜩 지금으로 돌아온다. 그때와 다른 건, 저거. 그는 이제 성을 떼어내고 한껏 다정하게 부른다.

"빨래 할 건데. 옷."

서태웅이 양호열의 발치에 뭉쳐진 옷더미를 가리킨다. 그는 분명, 양호열이 샤워를 하는 새 화장실 앞에 널브러져 있던 옷들을 봤다. 그런데 잠시 방에 들어갔다 나오니 양호열과 함께 옷마저 감쪽같이 사라졌다. 서태웅은 뒤늦게 추가 빨랫감이 발견될 때의 허무함을 안다. 그래서 직접 수거하러 온 것이었다.

"아... 응. 여기."

옷 뭉치를 건네받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양호열이 그를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다 하면 갖다줄게."

서태웅이 휙 돌아 나간다. 제 맡은 바를 해내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그들이 동거한 지도 이제 3일 차. 양호열이 청소하고, 강백호가 요리하는 동안 서태웅은 하릴없이 기웃거리는 게 다였다.

"양호열. 청소기 내가..."

"어어. 태웅아, 가서 쉬고 있어. 저기, 백호 옆에서 같이 티비 봐. 내가 할게, 응?"

"... 응."

그렇게 거절당하고,

"야, 멍청이."

"어 여우... 여우? 야! 내가 주방에 들어오지 말랬지!"

"... 흥."

그렇게 쫓겨나고.

빨래는 온전히 서태웅의 몫이었다. 저도 모르는 새 쌓인 설움을 청산할 때가 온 것이다. 서태웅은 야무지게 색깔별로 옷을 분류까지 한 후 세탁기 버튼을 눌렀다. 시간이 지나, 세탁이 끝난 흰옷들을 건조기에 돌려놓고는 나머지 옷들도 세탁기에 넣는다. 별 힘든 일은 아니지만,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는 동시에 돌아가는 세탁기와 건조기를 뿌듯하게 바라보곤 거실로 돌아왔다. 과자를 집어 먹으며 침대에 늘어져 티비를 보고 있는 강백호 옆에 낑겨 눕는다.

"악, 여우! 방에 들어가서 누우라고! 좁아!"

"안돼."

"뭐가 안 되는데!"

"세탁기."

"세탁기가 뭐!"

"끝나면 건조기 돌릴 거야."

누운 채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더니 벽과 강백호 사이에 끼여 가장 편안한 자세를 찾아낸다. 눈을 감아버린 서태웅의 귀에는 강백호의 잔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으으. 이 잠팅이 여우...."

와그작. 강백호는 과자를 하나 더 집어 먹으며 티비 볼륨을 낮췄다. 양호열이 하던 짓이 옮아버렸다. 배도 부르고, 해는 지고 있고, 곁에선 서태웅이 색색거리며 자고 있다. 이건 불가항력이다. 강백호도 그렇게, 곧 곯아떨어졌다.

서태웅이 일어났을 무렵엔 이미 해가 져 있었다. 곁에 있던 강백호는 부엌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었고, 그를 대신해 양호열이 침대에 등을 기댄 채 휴대폰을 뒤적이고 있었다.

"... 빨래."

서태웅이 벌떡 일어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빨래 젖은 채로 오래 놔두면 쉰내 나는데. 그는 눈을 비비며 어느새 제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낸다.

"태웅아, 빨래는 내가 다 해놨어. 괜찮아."

양호열이 몸을 돌려 침대에 상체를 기대더니, 서태웅을 올려다본다. 서태웅이 눈을 끔벅거린다.

"... 다 했어?"

"응."

"개는 건...."

"그것도 했지."

서태웅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린다.

"미안...."

사과를 건네는 목소리에 다소 힘이 없다.

"너 안 깨우고 해버린 건 난데. 왜 미안해? 그거 말고."

서태웅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인다. 갸웃거리는 서태웅. 양호열이 쿡쿡거리며 웃는다.

"고마워."

"... 고마워."

앵무새처럼 양호열을 따라 한다. 그는 만족한 듯 응, 하고 대답하고는 다시 몸을 돌린다. 서태웅은 양호열의 머리꼭지를 보며 결심했다. 다음엔 꼭 내가 다 해야지.

다음이 되었다. 서태웅은 성공했다. 잠에 들지 않고, 모든 빨랫감을 세탁기-건조기 코스까지 완벽히 처리했다. 바싹 마른 따끈한 옷들을 거실에 무더기로 쌓아 올린다. 섬유유연제의 포근한 냄새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양호열은 강백호의 침대에 기대어 티비를 보고 있고, 강백호는 부엌에서 저녁 준비에 열을 올린다. 서태웅은 양호열 옆에 앉았다. 이걸 다 개고 친구들에게 나눠주면 임무 완료다. 옷을 향해 뻗는 팔에 다른 이의 팔이 겹친다. 양호열이 당연하다는 듯 옷을 집어와 개기 시작한다.

"하지 마."

서태웅이 양호열의 팔목을 움켜쥔다. 양호열이 잠시 멈칫거리더니, 서태웅을 바라본다.

"어... 왜?"

"내 거야."

양호열이 제가 개던 옷을 힐끔 본다. 연회색의 맨투맨. 그제 입었던 옷.

"내 건데?"

서태웅의 얼굴에 불만이 서린다.

"빨래는 내 거야."

아아. 양호열이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지. 빨래는 태웅이 담당이지."

"응."

"그래도 같이 하면 안 돼? 난 태웅이랑 같이 빨래 개고 싶은데."

서태웅에게 잡힌 팔목을 살살 돌려 뺀다. 그 손을 다시 살짝 잡고는 예쁘게 웃는다.

"... 왜?"

"같이 이야기하면서 개면 금방 끝날걸?"

"혼자 해도 되는데."

"친구가 옆에서 혼자 빨래 개고있는데... 내가 어떻게 편하게 티비를 봐, 응?"

친구라는 단어에 서태웅이 움찔한다.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착해."

"하하. 고마워. 태웅아, 너도 착해."

"그런데 왜...."

"응?"

"고등학교 때는 나 싫어했어?"

빨래를 개던 손이 멈춘다. 양호열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서태웅을 쳐다봤다. 웃던 얼굴 그대로 표정이 굳어있다.

"... 뭐?"

"아니야?"

"아니야. 아니, 왜... 아닌데?"

"그래."

서태웅이 다시 빨래 개기에 집중한다. 양호열이 다급히 서태웅의 팔뚝을 잡았다.

"아니, 태웅아.... 왜 그렇게 생각했어? 나는 너 싫어한 적 없어."

그 표정에 절실함이 묻어났다.

"... 나 피했잖아. 나랑 말도 안 하고."

팔뚝을 움켜잡은 손에서 스르르 힘이 풀린다. 양호열이 제 얼굴을 양손에 파묻는다. 귀를 새빨갛게 물들이고, 한숨을 연거푸 내쉰다.

"그랬네. 응. 미안... 싫어해서 그런 건 아니야."

"그럼 왜 그랬는데."

"그, 음... 너랑 어떻게 친해질지 모르겠어서."

서태웅이 양호열의 손을 걷어냈다. 양호열은 또, 그때처럼 어색한 미소를 짓고 서태웅을 마주 본다.

"눈 마주치면 항상 피하고."

"응...."

"멍청이랑 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했을 때도 싫다고 했어."

"아니, 그건... 응...."

"미국 가기 전에, 농구부에서 파티했는데."

"그때도 못 갔지, 응."

"그리고 나 비행기 타러 갈 때 멍청이 친구들도 다 왔는데, 넌 없었어."

"... 맞아. 미안해."

"그래서 싫어하는 줄 알았어."

"응, 그랬겠다. 내가 잘못했네. 진짜.... "

양호열이 고개를 푹 숙인다.

"그래도 아니야, 태웅아. 너 싫어한 거...."

서태웅은 대답이 없다. 양호열이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어 올린다. 떨리는 눈으로 서태웅을 올려다본다. 서태웅은 반듯한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다물렸던 입술이 열린다.

"멍청이."

그 한마디에 양호열의 얼굴이 활짝 핀다. 반면에 서태웅은 더 찌푸릴 것도 없는 미간에 힘을 준다.

"왜 웃어, 멍청아."

"으응. 아니야, 안 웃어."

양호열이 얼굴을 갈무리하려 노력해 보지만, 쉽지 않다. 서태웅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 방금까지 불안이 가득했던 얼굴에 갑자기 행복이 들어찼다. 대체 왜지. 멍청이라는 말 한마디에 뭐가 그리 웃긴 지 실실거린다.

양호열이 웃는낯으로 다시 손을 움직였다. 산더미처럼 쌓인 옷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여우! 호열아! 밥 먹어라! ... 뭐냐? 아직도 다 못했어?"

강백호가 불쑥 끼어든다. 어느새 김치찌개 냄새가 거실을 가득 채우던 섬유유연제의 향을 덮어씌우고 있었다.

"야, 개긴 갠 거야? 어휴, 그렇게 손이 느려서 어뜩하냐? 둘이서 여태 요만큼 했다고? 야, 여우, 비켜 봐. 그거 이리 내."

"멍청이, 이거 내 거야."

"내 빤스거든!"

둘이 아웅다웅 다투기 시작한다. 여우! 멍청이! 여우! 멍청이! 아주 서로를 못 불러 안달이다. 양호열이 그 사이에 끼어든다.

"이러다 밥 식겠다. 태웅아, 그냥 그거 백호 주자."

그 말에 서태웅이 슬쩍 손을 놓는다. 주욱 늘어난 드로즈가 순식간에 줄어들어 강백호의 손을 때린다.

"흥."

아프잖아! 이 여우 자식이!

강백호가 씩씩거린다. 서태웅은 무시하며 다른 옷을 집어 들었다. 김치찌개가 식기 전에 이 옷들을 해치워야 했다.


안녕하세요. 다음 글이 많이 늦어버렸네요.... 3편은 꼭 빠른 시일 내에 들고 올게요! 오랜만에 왔는데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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