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안에 연인에게 차이는 법 上
우성태섭 영화합작 참여작 / 10일 안에 남자친구에게 차이는 법 (2003)
※ 이 작품은 2003년도 개봉작인 <10일 안에 남자 친구에게 차이는 법>을 모티브로 하고 있으며 지금의 시대상과는 맞지 않는 표현과 설정이 다수 반영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2. 우성 정
마감을 앞두고 여유롭게 원고의 90% 정도 완성한 정우성(28세, 패션 잡지 ‘컴포저’의 칼럼리스트)은 현재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거리를 걷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울리는 핸드폰을 확인하며 빠르게 걸은 우성이 목적지인 아파트 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분명히 30분 전까지만 해도 내일 자 NBA 경기 티켓(무려 닉스VS킹스 챔피언 결정전 1차전이다!)을 들여다보며 행복에 젖어 있었던 우성은 땀을 뚝뚝 흘리며 헐떡이고 있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내 계획은 오늘 있을 편집장과의 면담을 잘 마치고 일찍 집에 돌아가 피부 관리 루틴을 끝내고 내일 함께 경기를 보러 갈 사람 겸 새 애인을 구하러 나가는 거였는데. 역시 인생은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는 거구나. 턱을 따라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602호 문 앞에 선 우성이 문을 두드렸다. 잠시의 기다림 끝에 문이 열렸고 눈물로 젖어 엉망인 미셸의 애처로운 얼굴을 마주한 우성은 여기까지 달려오면서 차곡차곡 쌓았던 분노를 한 번에 날려버렸다.
“우성…….”
“못 살아, 진짜.”
헤일리에게 미셸을 만났다는 문자를 보낸 우성이 미셸을 밀고 들어갔다. 주말 내내 집에 처박혀 울기만 했는지 집 안 꼴이 가관이었다. 우선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연 우성이 다시 침대로 가서 누워버린 미셸에게 성큼성큼 걸어가 사무실에서 챙겨 온 예쁜 연녹색의 가디건을 내밀었다.
“빨리 옷 갈아입어, 미셸. 40분 후엔 편집장님 면담 들어가야 해.”
“난 이제 아무 의욕이 없어, 우성. 이대로 영원히 잠들고 싶어.”
“미셸…….”
우성이 한숨을 쉬며 침대에 걸터앉자, 눈물을 뚝뚝 흘린 미셸이 우성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평소였다면 절대 봐주지 않았을 일이지만, 우성은 우정의 힘으로 실연의 상처로 무너진 여자에게 넓고 탄탄한 가슴을 빌려주었다. 커다란 손으로 마른 등을 토닥인 우성이 미셸의 어깨를 잡아 강제로 침대에서 끌어 내렸다. 얼떨결에 침대에서 내려온 미셸이 눈을 깜빡이는 사이 우성이 그의 옷장을 열어 자신이 가져온 가디건과 잘 어울리는 블라우스와 치마를 꺼내 미셸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침대 위에서 굴러다니는 티슈 케이스에서 티슈를 몇 장 뽑아 눈물로 젖은 뺨을 닦아주며 말했다.
“미셸, 난 네가 직장을 잃게 내버려둘 수 없어. 고작 열흘짜리 남자 때문에 실직자가 되는 건 너무 가혹하잖아.”
“우성……!”
“자, 그러니까 빨리 옷 갈아입어.”
아프지 않게 미셸의 어깨를 두드린 우성이 뒤돌아섰다. 등 뒤에서 훌쩍거리던 미셸이 뭐라고 웅얼거리며 투정을 부리다 힘없이 화장실로 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화장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몸을 돌린 우성이 빠르게 움직이며 미셸의 집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우울을 물리치려면 일단 씻고 깨끗한 방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우성의 지론이었다.
언제 퉁퉁 불어 터진 만두 꼴이었냐는 듯 말끔하게 씻고 나온 미셸이 깨끗해진 집을 보고 비명을 질렀지만, 우성은 그가 감탄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빨리 나와, 미셸. 빨리! 먼저 현관까지 가 본인이 코디한 옷과 어울리는 신발을 꺼내놓은 우성이 끊임없이 미셸을 재촉했다. 편집장 면담까지 남아있는 시간은 15분뿐이었다.
✂
택시에서 구르듯이 내린 우성은 회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헤일리가 내민 커피를 받았다. 고마워, 헤일리. 우성의 말에 찡긋 윙크한 헤일리가 뒤따라 내린 미셸의 손에 커피를 쥐여주었다. 남은 시간은 5분. 지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딱 맞을 시간이었다. 발을 질질 끌며 느리게 걷는 미셸을 재촉하던 우성은 갑자기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미셸을 보고 경악한 얼굴이 되었다. 아니, 진정한 거 아니었어? 헤일리의 눈빛에 우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정된 줄 알았지. 두 사람의 긴급한 시선 교환을 보지 못한 미셸이 눈물을 닦으며 웅얼거렸다.
“나는 도대체 뭐가 문젤까?”
“미셸…….”
“우린 분명히 좋았는데, 갑자기, 갑자기 이렇게 돼버렸어! 열흘 만에! 너무 짧잖아.”
미셸의 말에 무언가 위로를 하려던 헤일리는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지 입을 꾹 다물고 우성을 힐끔 쳐다봤다. 미셸이 연애를 이상하게 해서 남자가 버티다 못해 도망치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기에 두 사람은 차마 미셸의 편을 들어 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애매한 표정을 보지 못한 미셸이 걸음을 옮기며 하소연을 시작했다.
“섹스도 엄청 좋았단 말이야. 진짜 너무 좋고 우리가 통했다는 게 좋아서 끝나자마자 막 울어버릴 정도였는데.”
“……울었다고? 그냥 눈물 한 방울 흘린 정도지?”
“내 감정은 그렇게 가벼운 게 아니었어!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나서 엉엉 울다가 그를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영원히 함께 하자고 고백할 정도였다고. 아주 로맨틱한 순간이었지.”
“그 짓, 아니, 그 행동을 만난 지 며칠째에 한 거야?”
“닷새.”
망설임 없는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우성이 미셸 정도면 오래 참았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사실은 이틀째에 했어.”
“뭐?!”
여상한 얼굴로 엘리베이터를 누르던 헤일리가 참지 못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질렸다는 표정을 간신히 숨긴 우성이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남자는 뭐라고 했어?”
“대답하지 않았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전부 말하고 있었어. 우리는 같은 마음이라고.”
꿈꾸는 것 같은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미셸 몰래 시선을 교환한 두 사람은 입을 꾹 다물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우성은 여상한 얼굴로 그와 자신이 얼마나 잘 맞는 사이였는지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미셸의 목소리를 배경음 삼아 오늘 저녁에 뭘 먹을지 고민했다. 두 사람이 자기 말을 듣든지 말든지 이야기 하던 미셸이 한숨을 푹 쉬며 웅얼거렸다.
“그렇게 잘 맞았는데, 열흘째 되던 날 연락 두절이 된 거야. 그래서 전화를 받을 때까지 계속, 계속 걸었는데…….”
“계속 걸었다고? 몇 번이나?”
“어제 보니까 350통 정도 걸었더라고.”
“뭐……!”
그건 스토킹이라고 외치려는 우성의 입을 틀어막은 헤일리가 애써 웃으며 미셸의 어깨를 두드렸다. 뭔가 사정이 있어서 안 받은 거겠지. 헤일리의 다정한 말에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미셸이 기운 없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사실 난 그가 왜 날 떠났는지 알아…….”
“정말?”
네가 정말 아는 게 맞냐는 기색이 역력한 헤일리의 표정에 웃음이 터질 뻔한 우성이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막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탔다. 미적거리다 가장 늦게 엘리베이터에 탄 미셸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너무 뚱뚱해서 그런 거야.”
그리고 미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성과 헤일리가 얼굴을 험악하게 구기며 소리를 질렀다.
“너 안 뚱뚱하다고!!”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내내 우성과 헤일리가 네가 얼마나 말랐는지에 대해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열변을 토했지만, 미셸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시무룩한 얼굴로 둘의 말을 듣고 있던 미셸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런 미셸을 보고 한숨을 푹 쉰 우성이 말했다.
“미셸, 내가 매번 말하잖아. 비욘세나 케이트 블란쳇이어도 그렇게 나오면 다들 도망간다구. 만난 지 오래된 것도 아니었잖아.”
“사랑의 깊이는 만난 기간과 비례하지 않아!”
“그건 맞는 말이지만, 나는 네가 너무 빠르다는 이야기하고 싶은 거야.”
“……우성 너한텐 아무도 안 그러잖아. 너 같은 미인이 5분에 한 번씩 전화하면 다들 진저리 치기는커녕 더 전화해달라고 빌 걸?”
“미셸. 그건 굉장한 오해야. 누가 해도 그건 싫은 일이고 일단 나는 그런 짓 안 해.”
눈을 동그랗게 뜬 우성의 대꾸에 미셸이 뭐라 대답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우성의 말이 틀린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입술을 삐죽대던 미셸이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옆에서 헤일리가 왜 그렇게까지 말하냐는 표정으로 눈치를 줬지만, 우성은 억울했다. 아니, 맞는 말 한 거잖아! 자신의 등 뒤에서 이뤄지는 두 사람의 조용하지만, 치열한 공방을 모르는 미셸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니, 나도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사랑하는 사람만 생기면 조절이 안 돼.”
연애할 때만 아니면 정말 성실하고 상냥한 사람의 정석 같은 미셸이었다. 미셸의 말에 우성과 헤일리는 속으로 알면 조절 좀 해봐……. 라는 말을 중얼거렸지만 절대 입 밖으로 내진 않고 편집장 실로 들어갔다.
최근 동양의 ‘명상’이라는 것에 심취한 편집장, 라나는 회의 시간에 꼭 신발을 벗고 있게 했다. 혈액 순환 어쩌고 하는 이유였는데, 우성에게 이 ‘명상’은 늘 자신의 옆에 앉는 제이크의 발냄새 때문에 괴로운 시간이었다. 오늘도 우성이 제이크의 발냄새를 참으며 필사적으로 표정 관리를 하는 사이 다들 자신의 작업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경과보고를 했다. 자신의 차례를 무사히 넘긴 우성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미셸을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원고를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한 미셸은 자신의 차례가 되자 우물거리며 라나의 눈치를 봤다.
“미셸? 설마 원고가 없나요?”
“……죄송합니다.”
“미셸이 최근에 실연당했어요.”
회사 내 최고의 촉새이자 발냄새 왕인 제이크가 냉큼 미셸의 이야기를 떠벌렸다. 미셸이 제이크를 죽일 것 같은 눈으로 노려봤지만, 제이크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라나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매우 슬픈 소식을 들은 사람처럼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저런, 미셸. 마음은 잘 추슬렀나요?”
“네, 이제는 좀 괜찮아요.”
“그래요.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나 보죠? 살이 많이 빠졌네요. 아주 보기 좋아요.”
“차인 후로 계속 굶어서 그런 가 봐요……”
라나가 저렇게 살가운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아는 미셸의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 미셸을 보고 방긋 웃은 라나가 말을 이었다.
“그걸 칼럼으로 쓰는 게 좋겠어요.”
“네?”
“효과적인 다이어트 방법 시리즈가 멈춘 지 좀 됐죠? 당신의 경험을 녹여서 후속 칼럼이 나오면 되겠네요.”
“제 사생활을 칼럼으로 쓸 순 없어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미셸이 큰 소리를 내자 놀란 라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셸을 쳐다봤다. 씩씩거리는 미셸을 물끄러미 보던 라나가 부드럽게 눈을 휘며 웃었다.
“그래요. 역시 자기 사생활을 칼럼으로 쓰는 건 어렵겠죠.”
편집장의 말에 미셸이 안도하려던 찰나였다.
“그럼, 미셸의 이야기로 후속 칼럼을 작성할 사람? 이번 달 마감에 맞춰서 나왔으면 좋겠는데요?”
“저요!”
“제가 하겠습니다.”
편집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손을 드는 걸 본 미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차라리 자기 손을 거치면 말끔하게 정제해서 내놓을 수라도 있지, 남들의 손을 거치면 자신의 이야기가 얼마나 자극적으로 편집 돼서 나올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제 손으로 사생활을 팔아넘기는 건 거부감이 너무 심했다. 미셸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앉아 있는 걸 안쓰럽게 쳐다보던 우성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할게요.”
“우성!”
당황한 미셸이 우성을 불렀지만, 우성은 미셸을 돌아보지 않았다. 우성과 미셸 그리고 헤일리가 친한 사이라는 걸 아는 라나가 의외라는 듯 우성을 쳐다봤다. 우성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지금 쓰고 있는 원고가 마음에 안 들던 차였어요.”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음…….”
라나의 질문에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우성이 웃으며 말했다.
“다들 미셸을 보세요. 미셸을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착하고 성실하고 남에게 공감도 잘 해주죠. 다들 회사에 한두 명씩은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미셸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직 못 만나 봤어요.”
“그래서요?”
“그런 미셸은 연애만 시작하면 크고 작은 실수를 해서 관계를 길게 유지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문제는 뭐가 실수인지 모른다는 거죠. 그건 우리 독자들도 마찬가지예요. 저에게 오는 사연 엽서의 대부분이 연애 관련 상담이거든요.”
도대체 우성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하며 쳐다보던 동료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걸 이렇게 엮는다고? 친구인 미셸의 봉변을 무마하기 위해 억지로 손을 든 거라 생각했는데, 플롯이 꽤 훌륭했다. 편집장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계속해 보라는 듯 한쪽 턱을 괴며 웃었다.
“그러니 제가, 음, 다른 사람을 사귀면서 미셸이나 다른 사람들이 연애할 때 감정이 앞서 흔히 하는 실수만 골라서 저지른 후에 차이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기록하면 그건, 그러니까, 데이트할 때 절대 하면 안 되는 지침서가 되는 거죠.”
“호오.”
“제목은……. 그러니까……. 뭐가 좋을까…….”
팔을 등 뒤로 숨긴 우성이 도와달라는 듯 헤일리와 미셸 쪽으로 손을 파닥거렸지만, 둘도 좋은 생각이 나질 않아 곤란한 표정으로 우성을 쳐다만 봤다. 아, 여기서 괜찮은 걸 내놔야 편집장님이 나한테 칼럼을 줄 텐데!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나는 걸 느끼며 우성이 눈을 질끈 감은 순간이었다.
“제목은 ‘10일 안에 연인에게 차이는 법’이 좋겠네요. 좋아요. 우성이 써 봐요.”
편집장의 낭랑한 목소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우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 편집장님. 왜 10일이죠?”
“5일은 너무 짧고 11일 뒤에는 인쇄니까요.”
편집장은 이 이야기는 끝이라는 듯 우성이 더 반박할 수 없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 미친 10일이라니. 차여야 하는 것도 짜증 나는데, 차인 후에 밤새워서 원고를 작성해야 할 판이었다. 여유롭게 원고를 마무리하고 느긋하게 지낼 생각이었던 우성은 갑자기 다 무너진 계획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우정을 지켰으니 된 거 아닐까. 눈물을 삼킨 우성이 미셸 쪽을 힐끗 봤다. 우성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미셸이 입을 벙긋거리며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별거 아니라는 듯 윙크를 날린 우성이 속으로 한숨을 푹푹 쉬었다.
회의가 끝나고 편집장의 뒤를 따라 내려오던 우성은 사무실 한가운데 서 있는 낯선 여자를 발견했다. 편집장의 손님이었는지 여자는 편집장을 보자마자 반갑게 웃으며 두 사람에게로 걸어왔다. 정작 편집장은 여자가 누군지 감도 못 잡은 눈치였으나 여자가 내민 명함을 받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엘렌 광고사의 클레어 베넷이에요.”
“반가워요. 그런데 우리 약속은 2시 아니었나요?”
“아, 제가 ‘컴포저’의 팬이거든요. 컴포저와 함께 일한다고 생각하니까 설레서 조금 일찍 도착했어요.”
아부일 게 분명한 말이었지만, 편집장의 귀에는 아주 듣기 좋은 말이었는지 아까보다 얼굴이 훨씬 부드러워졌다. 그런 편집장을 보며 웃던 클레어의 시선이 뒤에 서 있던 우성에게 닿았다. 농구 선수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훤칠한 키와 두툼한 몸에 눈을 깜빡인 클레어가 편집장에게 물었다.
“뒤에 계신 분은 모델이신가요?”
“응? 아, 아니에요. 가끔 모델 일을 해주기도 하는데, 우리 직원이랍니다. 인사해요. ‘비법 특강’ 칼럼을 연재 중인 우성 정이에요.”
“아, ‘비법 특강’! 저 그거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사연도 몇 번 보내봤는데 채택은 안 되더라구요.”
“아무래도 자극적인 사연 위주로 고르게 되니까요. 독특한 일을 겪으면 꼭 보내주세요. 당신의 것을 고를 수 있게 이름도 써서요.”
우성의 우스갯소리에 웃음을 터뜨린 클레어가 물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다음 칼럼 내용이 뭔지 미리 조금 들을 수 있을까요? 팬으로서 궁금해요.”
“아, 다음은…….”
“우성은 ‘10일 만에 연인에게 차이는 법’이라는 칼럼을 준비하고 있어요. 그리고 곧 칼럼의 희생양을 찾아 떠날 예정이죠. 안 그래, 우성?”
“……맞아요. 저와 만날 사람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요.”
“정말 잔인하고 흥미로운 칼럼이 되겠네요. 기대할게요.”
클레어의 말을 끝으로 라나가 그를 데리고 다시 편집장실로 올라갔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우성이 눈을 질끈 감았다. 빨리 희생양을 구하러 가야 했다.
-1. 태섭 송
요란한 오토바이 배기음 소리에 회사 정문 앞에서 출근길에 산 잡지를 보고 있던 클레어가 고개를 들었다. 완벽하게 주차를 마친 거대한 오토바이에서 내려 헬멧을 벗는 저 남자는 클레어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헬멧 때문에 눌려있던 곱슬곱슬한 머리를 쓸어 넘긴 남자, 태섭이 클레어를 발견하고 방긋 웃으며 걸어왔다.
“클레어.”
“이제 오토바이는 지긋지긋하다고 지하철 출근한다더니?”
“지하철은 너무 느리더라고.”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던 태섭이 클레어의 손에 들려있는 잡지를 발견하고 한 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컴포저’? 드디어 광고 에이전트 일이 네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걸 인정 하고 이직 준비를 하는 거야? 팀에 얘기해서 네 퇴사 파티 준비를 해야겠는걸.”
태섭의 말을 들은 클레어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파티광인 네게는 아쉬운 일이겠지만, 이직이 아니라 시장 조사 중이야. 항상 경마장에 처박혀 있는 네 잠재고객들과 달리 내 고객들은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잡지인 ‘컴포저’를 읽거든.”
생글생글 웃은 클레어가 다 읽은 잡지로 태섭의 가슴을 꾹 눌렀다. 얼떨결에 잡지를 넘겨받은 태섭이 뭐라 말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클레어가 조금 더 빨랐다. 태섭에게서 한 걸음 물러난 클레어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도 ‘제대로 된 광고’를 맡고 싶다면 이런 걸 읽는 게 좋을 거야. 난 회의가 있어서 이만.”
또각거리는 구둣발소리와 함께 멀어지는 클레어의 뒷모습과 자신의 품에 안긴 잡지를 번갈아 쳐다보던 태섭이 헛웃음을 쳤다. ‘제대로 된 광고’라니. 역린을 제대로 건드린 단어를 곱씹은 태섭이 잡지를 옆구리에 끼고 성큼성큼 걸어 회사 건물로 들어섰다.
자신의 이름이 박힌 사무실에 들어가 책상에 잡지를 던지듯이 내려놓고 몇 번 심호흡한 태섭은 일단 거울을 들여다보며 머리를 세웠다. 화가 난 것과 별개로 오늘은 거래처와 면담이 있는 날이라 공들여 머리를 만져야 했다. 머리를 예쁘게 올리고 입고 온 티셔츠를 벗어 상의를 탈의한 채로 사무실 옷걸이에 예쁘게 다려져 있는 두 셔츠를 쳐다보며 고민하는 태섭의 뒤로 아트 디렉터인 윤이 나타났다. 하늘색이 예쁜데요. 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태섭이 셔츠를 입으려던 순간이었다. 밖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어 온 칼이 헐떡거리며 비명처럼 외쳤다.
“태섭, 혹시 그거 들었어?”
“닉스가 결승전에 올라가서 네가 나에게 20달러를 줘야 한다는 거? 당연히 들었지.”
태섭이 벙찐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두 사람에게 손을 내밀며 웃었다.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져 20달러를 꺼낸 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게 아니라, 델라 다이아몬드가 새 광고 에이전트를 찾는대. 대표님이 만나러 갔어.”
“그거, 오늘 들은 말 중에 가장 행복한 말이군.”
두 사람에게서 받은 40달러를 주머니에 쑤셔 넣은 태섭이 콧노래를 부르며 셔츠를 걸쳤다. 마치 다이아몬드 광고가 자신의 몫인 것처럼 즐거워하는 태섭을 보고 칼과 윤이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서로 쳐다봤다. 두 사람의 표정을 보지 못한 태섭이 셔츠 단추를 느릿하게 잠그며 노래하듯 말을 이었다.
“5번가에는 널린 게 다이아몬드라 다들 거들떠보지도 않아. 하지만 물건은 어떻게 공급하고 광고 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기 마련이잖아. 상품을 특별하게 만들면 소비자는 그 ‘특별함’을 사기 위해 달려들게 되어있어.”
거울에 비친 본인을 보며 옷매를 가다듬고 말끔하게 잘 올라간 머리도 다시 한번 확인한 태섭이 말을 이었다.
“델라는 전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을 지배하는 회사야. 내가 이걸 따내면 업계 전체를 잡는 거라고.”
“그, 태섭.”
“왜.”
나갈 준비를 마친 태섭을 다급하게 잡은 칼이 윤과 다시 시선을 교환했다. 어쩐지 심상치 않아 보이는 두 사람의 표정에 태섭이 걸음을 멈추고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야?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말하라는 태섭의 재촉에 잠시 머뭇거리던 칼이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델라 건, 이미 담당자가 정해졌어.”
“뭐라고?”
“클레어가 가져가기로 했어.”
“말도 안 돼! 아직 따오지도 않은 일에 담당자를 벌써 배정했다고?”
눈을 동그랗게 뜬 태섭이 외치자, 윤이 어깨를 으쓱했다.
“보석은 여자의 것이니까 클레어에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이 있었대.”
“도대체 누가 그런 말을……?”
“모르지. 어쨌든 클레어가 맡은 건 확실해. 아까 ‘컴포저’로 미팅하러 갔거든.”
윤의 말에 인상을 구기고 서 있던 태섭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방긋 웃었다. 그 얼굴을 마주한 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태섭이 저렇게 웃을 때는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거라는 뜻이었다. 사무실을 빠져나가려는 태섭의 앞을 가로막은 칼이 벌벌 떨며 외쳤다.
“뭐, 뭐 하려고!”
“대표님과 직접 담판을 지을 거야. 이렇게 큰 건을 뺏길 순 없지.”
“그건, 그건 맞는 말이지만 이미 늦었어. 대표는 지금 비행기 안이고 귀국 하자마자 저녁에 클레어와 만난다고 했다고.”
“어디서?”
“멀린스겠지, 뭐. 술도 마시고 회의도 하기 좋은 분위기잖아.”
“알겠어.”
“‘알겠어’?”
태섭은 사색이 돼서 그게 무슨 의미냐고 물으며 쫓아오는 칼을 무시하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옷깃을 붙잡으려는 칼을 따돌린 태섭이 가볍게 달려 막 문이 닫히려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느리게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칼과 윤을 향해 손을 흔든 태섭이 씨익 웃었다. 그런 태섭을 허망하게 쳐다보고 있던 칼이 두 팔을 벌리며 절망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태섭! ‘알겠어’가 도대체 무슨 의미냐고!”
✂
대표인 엘렌과 함께 예약석으로 걸어가던 클레어는 예약석에 앉아 있는 익숙한 얼굴을 보고 인상을 구겼다. 클레어보다 한발 늦게 불청객을 발견한 엘렌이 황당하다는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태섭?”
“두 분이 늦으신 게 아니라 제가 일찍 온 거니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뻔뻔하게 웃은 태섭이 웃으며 벌떡 일어나 엘렌의 의자를 뺐다. 자연스럽게 태섭이 빼준 의자에 앉은 엘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클레어의 의자를 빼주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 태섭을 쳐다봤다. 태섭의 도움을 거절한 클레어가 미간을 찌푸리고 태섭을 노려봤다. 왜 여기 나타났는지 다 안다는 매서운 얼굴에 어깨를 으쓱한 태섭이 자신의 자리인 엘렌의 맞은편에 앉아 서버를 불러 술을 주문했다. 엘렌의 취향에 맞는 술을 주문한 태섭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델라는 잘 만나고 오셨어요?”
태섭의 말에 그제야 왜 여기 나타났는지 알겠다는 표정이 된 엘렌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튼 태섭 팀의 정보력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감사합니다.”
“그리고 델라 건은 이미 클레어에게 주기로 결정했어. 클레어 팀이 보석 쪽은 전문가잖아. 태섭이 아무리 물건을 잘 팔고 내 취향을 귀신같이 맞춰도 그건 바꿀 수 없는 일이야.”
장난스럽게 웃은 엘렌이 술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면전에서 너에게 주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태섭의 얼굴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이 반갑다는 듯 환하게 웃기까지 했다.
그 얼굴을 본 클레어가 초조하게 볼 안쪽 살을 깨물었다. 엘렌의 거절 한 마디로 태섭이 물러날 거였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을 거였다. 그가 여기까지 왔다는 건, 델라 건을 가져가겠다는 통보나 마찬가지였다. 태섭은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아주 적은 말로 사람을 설득하는 것에 도가 튼 인간이었다. 여기서 이야기가 길어지면 엘렌은 태섭에게 넘어갈 게 분명했다. 어떻게든 저 인간의 입을 막아야 했다.
클레어의 생각을 모르는 태섭이 엘렌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하지만 델라 쪽에 담당자를 아직 알려주진 않으셨잖아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11일 뒤에 있을 파티에서 클레어를 소개할 생각이야.”
“그럼, 그전까지는 제게도 기회가 있는 거 아닌가요?”
태섭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하자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엘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클레어가 태섭의 말을 끊으려고 했지만, 태섭이 좀 더 빨랐다. 태섭은 오는 내내 엘렌을 설득하기 위해 생각했던 말을 줄줄 풀어놓기 시작했다.
“다이아몬드 산업은 줄곧 남자를 노리고 있었죠. ‘다이아몬드로 당신의 변하지 않을 사랑을 고백하세요.’라고. 하지만 다이아몬드는 남자를 위한 게 아니에요. ‘다이아몬드는 여성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말처럼 여자를 위한 거죠.”
“흠.”
“언제까지 여자를 남자가 주는 다이아몬드를 받는 사람으로 상정하고 남자에게만 다이아몬드를 팔 거죠? 사실 보석은 여자가 주요 소비층이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야.”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가는 클레어를 힐끗 쳐다보며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어에게 기울어져 있던 엘렌의 몸이 자신의 쪽으로 조금 움직인 걸 본 태섭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그래서 ‘모두의 다이아몬드’라는 카피를 붙이는 게 어떨까 싶어요. 언제나 어디서나 당신의 곁을 지키는 영원한 친구. 당신이 원하면 언제나 구매할 수 있는 아름다운 친구. 다이아몬드. 다이아몬드는 내가 구매하기엔 비싸고 좋은 자리에만 하고 나갈 수 있는 보석이라는 심리적인 장벽을 낮추는 겁니다.”
“그건 안 돼요.”
태섭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클레어가 싸늘한 목소리로 태섭의 말을 잘랐다. 당황한 태섭이 클레어를 보자 클레어가 차분한 목소리로 엘렌을 보며 말했다.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특별함’에 있어요. 특별한 날, 특별한 순간에 특별한 사람과 함께 할 때 착용해 나를 돋보이게 해주는 도구라구요. 그런 도구를 평범하고 흔한 것으로 전락시키면 도대체 누가 다이아몬드를 사죠? ‘특별’하지 않은데?”
“클레어의 말도 맞네.”
“여자가 주요 소비층이라는 태섭의 말이 맞아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다이아몬드가 더더욱 특별해야 하는 거예요. 그 특별함이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이런 보석을 가져왔다는 행복을, 그리고 아무나 하지 못하는 보석을 내가 걸고 있다는 만족감과 허영심까지 충족시켜 주죠. 선물 받는 여자의 심리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태섭이 여자가 주요 소비층인 보석을 어떻게 팔려고 하는 건지…… 전 이해가 안 되네요.”
언제 창백하게 질렸냐는 듯 여유를 되찾은 클레어가 얄밉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 젠장. 클레어에게 완전히 말렸다는 걸 깨달은 태섭이 어색하게 웃으며 엘렌을 쳐다봤다. 엘렌의 몸은 다시 클레어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져 있었다. 여기서 입을 다물면 델라 건은 완전히 클레어에게 넘어갈 게 분명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태섭이 마른침을 삼켰다. 뭐라도 해보자.
“지금 우리가 굳이 ‘여자’와 ‘남자’로 분리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사실 여기서 중요한 건 다이아몬드가 받는 사람의 만족감과 행복감 그리고 허영심까지 채워줘야 한다는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모두의 다이아몬드’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태섭.”
“그래요. 보석의 특별함은 내가 간과한 부분이에요. 하지만 여자도 여자에게 진짜 사랑을 고백하는 세상이니, 과거에 쓰던 방식보다는 이런 카피가 어울린다고 봐요. 여자는 남자의 선물을 받기만 한다는 차별적인 메시지와 오직 이성애자의 결합만을 노리는 낡고 보수적이라는 이미지도 벗을 수 있고요.”
순식간에 말을 바꾼 것도 모자라 자신을 낡고 보수적인 사람으로 바꿔버리는 태섭의 혓바닥에 클레어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흥미진진한 얼굴로 두 사람을 보던 엘렌은 태섭이 여기까지 끌고 올 줄 몰랐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렌의 마음이 기울고 있다는 걸 기민하게 눈치챈 클레어가 억지로 웃음을 꾸며내며 말했다.
“태섭의 말도 옳아요. 좋은 조언 고마워.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의문이 들어요. 연인과 일주일 이상 관계를 유지해 본 적 없는, ‘진짜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고 입에 달고 사는 태섭이 진짜 사랑을 맹세하는 다이아몬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긴 한지……. 자신이 광고하려는 물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좋은 광고를 만들지 못한다는 건 기본적인 상식이잖아요, 엘렌.”
“호오. 클레어, 좋은 지적이야.”
“다이아몬드는 네가 찾는 ‘욕정’이 아니야, 태섭. ‘진짜 사랑’이지. 그리고 네 평소 행실을 보면 너는 그게 뭔지 모르는 것 같네.”
여기서 클레어가 비겁하게 평소 행실을 걸고넘어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태섭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불행히도 클레어의 말이 맞았고 ‘진짜 사랑을 모르겠어.’는 엘렌이 알 정도로 태섭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똑같이 클레어의 사생활을 걸고넘어지자니 클레어는 보기 드문 바른 생활 사람이었다. 7년을 사귀고 결혼을 앞둔 번듯한 애인까지 있는. 당황한 태섭이 입만 벙긋거리자, 클레어가 승리감에 가득 찬 표정으로 태섭을 쳐다봤다. 그 얼굴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보던 태섭이 긴장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등 뒤로 감추며 말했다.
“……내가 진짜 사랑을 찾아온다면?”
“뭐?”
“내가 델라 다이아몬드와의 회동 전에 진짜 사랑을 찾아오면 어떡할 거냐고.”
뭘 어떡해; 그냥 찾은 거지; 황당한 얼굴의 클레어가 한마디 하려는 순간 옆에 앉아 있던 엘렌이 밝은 표정으로 박수쳤다.
“정말 재미있는 내기야!”
“엘렌?”
“좋아. 태섭이 11일 뒤에 있는 델라의 파티 전에 진짜 사랑을 찾아오면 델라 건을 재검토하겠어.”
“감사합니다.”
클레어가 반발하기도 전에 태섭이 잽싸게 감사 인사를 했다. 분노와 억울함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클레어를 본 엘렌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냥 하면 태섭에게 너무 유리하니까, 상대는 클레어가 정하는 걸로 하자. 그래, 이 장소에 있는 사람 중에 자기가 원하는 사람으로 한 명 골라.”
“좋아요.”
이번에는 클레어가 더 빨랐다. 반발하려던 태섭이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어깃장을 놓으면 간신히 끌어온 엘렌의 흥미가 식을 가능성이 높았다. 태섭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엘렌이 더 신난 얼굴로 플로어 쪽을 내다봤다. 저 여자는 어때? 저 남자는? 엘렌이 가리키는 사람들을 보며 애매한 미소를 흘리고 있던 클레어의 눈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훤칠한 키와 눈부신 외모의 남자는 오늘 오전 ‘컴포저’에서 만났던 이였다. 이름이 우성이랬나. 심드렁하게 시선을 돌리려던 클레어의 머리에 컴포저 편집장이 했던 말이 스치고 지나갔다.
“우성은 10일 만에 연인에게 차이는 법이라는 칼럼을 준비하고 있어요. 그리고 곧 칼럼의 희생양을 찾아 떠날 예정이죠. 안 그래, 우성?”
“……맞아요. 저와 만날 사람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은 클레어가 태섭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초조한 얼굴로 바닥만 보고 있던 태섭이 고개를 번쩍 들고 클레어를 쳐다봤다. 클레어가 사람을 정한 걸 눈치챈 엘렌도 누굴 고를지 궁금하다는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천천히 손을 든 클레어가 정확히 우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남자.”
“……저 키 크고 잘생긴, 누가 봐도 이성애자인 것 같은 남자 말이야?”
“응. 그리고 이성애자 아닐 거야. 조금 전에 다른 남자 손등을 쓸어내리는 걸 봤거든.”
물론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우성이 게이라는 사실은 업계 내에서 유명했으니 완전한 거짓말도 아니었다. 클레어가 안 가고 뭐하냐는 눈으로 눈을 깜빡이자 잠시 망설이던 태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약속 잊지 마세요.”
“물론이지, 태섭.”
“화이팅.”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두 여자의 시선을 등에 업은 태섭이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고 술잔을 든 채로 플로어로 걸음을 옮겼다. 항상 남이 말을 걸어오는 것만 받아 줘봤지, 먼저 다가가는 건 처음이라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다이아몬드. 다이아몬드만 생각하자, 송태섭. 넌 할 수 있어. 태섭은 스스로를 다독이며 클레어가 지목한 남자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태섭이 잘할 수 있을까?”
엘렌의 물음에 태섭에게서 시선을 떼고 서버를 부른 클레어가 웃으며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델라 건을 저에게서 뺏으려면 잘해야지 어쩌겠어요?”
태섭이 해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찾아볼 수 없는 평온한 클레어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던 엘렌이 어깨를 으쓱했다. 기실 클레어와 태섭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유능한 직원이었기에 누가 이기더라도 엘렌에게는 손해 볼 것이 없었다. 해서 엘렌은 태섭의 성공 여부보다 클레어와 먹을 요리에 집중하기로 하고 태섭에게서 시선을 뗐다.
0. 첫 만남
“우성, 넌 성공 못 할 거야. 너 같이 매력적인 남자를 도대체 누가 차겠냐고!”
“두고 봐. 오늘 밤 남자를 물고 내일 불을 붙인 다음, 열흘 뒤엔 울면서 헤어지자고 빌게 할 거니까.”
자신만만한 우성의 말에 한숨을 쉰 헤일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퇴근 후 집에 갔다 온 우성은 ‘날개옷’이라고 부르는 셔츠에 다리 라인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살짝 달라붙는 슬랙스를 입고 나왔다. 우성이 신나게 떠들며 움직일 때마다 절개된 셔츠 자락이 휘날리며 그가 공들여 가꾼 등 근육과 허리 라인이 드러나고 그의 매력적인 엉덩이에 바지가 붙었다 떨어졌다. 거기다가 그사이에 피부에 무슨 짓을 했는지 온 얼굴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힐끗거릴 정도로 환상적인 미모의 우성을 물끄러미 본 미셸이 황당하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사이코패스 살인마라도 너랑 안 헤어지려고 할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소리야. 사람들이 연애하면서 하는 실수만 하면 누구라도 차일 수 있어.”
우성의 대답에 헤일리가 웃으며 말했다.
“매달리고, 집착하고?”
“끈질기게 굴고. 넘치는 사랑을 조절하지 못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공유하고 그 사람의 것도 알아내려 하고.”
“그게 뭐가 나빠?”
갑자기 끼어든 미셸의 목소리에 깔깔거리며 대화를 나누던 우성과 헤일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셸을 쳐다봤다. 갑자기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에 놀란 미셸이 눈을 끔뻑이다 어색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농담이야.”
“제발, 미셸.”
“아니, 진짜 농담이야.”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미셸을 부른 우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옆에서는 헤일리가 심각한 얼굴로 진짜 농담이길 바란다는 말을 덧붙였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미셸이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고 유리문을 밀었다.
화요일 밤의 멀린스는 언제나처럼 붐볐다. 테이블에는 점잖게 앉아 식사하며 사업적인 이야기를 떠드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플로어는 술잔을 들고 대화 상대를 찾아 떠다니는 사람들로 소란스러웠다. ‘술 한 잔으로 당신이 원하는 전문가를 찾고 싶다면 멀린스로 가라’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멀린스는 업계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 서로의 직업적 특성을 이해하는 상대를 찾기에는 이곳보다 좋은 곳이 없었다. 우성은 들어가자마자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느끼며 방긋 웃으며 친구들을 돌아봤다. 과장을 조금 보태 ‘컴포저’의 우성 정을 모르는 업계 사람은 신입이거나 퇴직 직전의 영감뿐이라는 말을 체감한 미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재빨리 우성에게서 떨어진 헤일리가 술을 가져오겠다며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하, 촉이 왔어.”
“무슨 촉?”
“오늘 분명히 희생양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촉.”
헤일리가 가져온 잔을 받아 든 우성이 미셸에게 윙크를 날렸다. 우성의 호언장담에도 미심쩍은 얼굴로 술을 홀짝이는 미셸을 살짝 안았다 놓은 우성이 헤일리에게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걸음을 옮겼다. 우성이 다가올 때마다 잔뜩 기대하는 얼굴이 되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보던 헤일리가 작은 목소리로 미셸에게 속삭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성은 헤어지는 단계에서 실패할 거야.”
“내 말이.”
두 친구의 속삭임을 모르는 우성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얼굴로 꽤 오랜 시간을 보낸 우성은 여섯 번째 남자와의 대화를 끝내고 뒤돌아서자마자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 어떻게 괜찮은 남자는 다 이성애자거나 유부남이야? 각박한 인생이여. 속으로 투덜대며 술을 한 모금 마신 우성이 매의 눈으로 플로어를 훑어봤다. 우성의 까다로운 기준을 통과한 남자들과는 한 번씩 다 대화를 나눠봤던 터라 더 이상 말 걸 사람이 없었다. 남은 건 테이블 쪽인데, 아무리 넉살 좋은 우성이라도 처음 보는 사람의 테이블에 가서 엉덩이를 붙일 용기는 없었다.
“아, 어떡하지…….”
좀 별로여도 말 걸어봐야 하나.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서 있던 우성이 눈을 질끈 감고 외모가 별로라 보자마자 탈락시켰던 남자에게 가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였다.
“아.”
우성에게 말을 걸려고 했던 듯, 어정쩡하게 손을 들고 있는 한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성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그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우성은 속으로 잭팟을 외치며 귀신같이 웃지 않기 위해 이를 꽉 깨물었다. 뭐야! 이런 귀염둥이가 어디 숨어 있다가 이제 나타난 거지? 말끔하게 넘긴 머리와 작은 얼굴 안에 오밀조밀하게 자리 잡은, 약간은 날티나 보이는 이목구비, 예쁘게 잘 구워진 피부 그리고 슬림하지만, 근육이 가득 차 있을 게 분명한 몸까지 한 번에 훑은 우성이 호의적인 미소를 지었다. 우성이 제게 호감을 품었다는 걸 눈치챘는지 맞은편의 남자도 사르르 웃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괜히 의미 없는 웃음을 몇 번 주고받은 두 사람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부딪힌 것에 놀란 우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웃으며 태섭의 손을 잡았다.
“우성 정이라고 해요.”
“저는 태섭 송이에요.”
“태섭? 예쁘네요.”
“……고마워요.”
“이름 말이에요.”
장난스럽게 웃은 우성이 덧붙인 말에 남자, 태섭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약간 붉어진 작은 귀와 매끈한 목덜미를 탐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우성은 태섭이 다시 고개를 들자 언제 그렇게 봤냐는 듯 해사하게 웃었다.
“칭찬, 두 번 고마워요.”
태섭의 말에 코를 울리며 웃은 우성이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
“혼자예요?”
“지금은요.”
“나도요.”
“놀랍네요.”
혼자 서 있는 거 보고 왔으면서 놀라워? 귀염둥이가 앙큼한 소리를 하네. 조절할 수 없이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삼킨 우성이 살살 눈웃음을 쳤다. 곱게 휘어지는 우성의 눈매에 시선을 빼앗긴 것처럼 가만히 있던 태섭이 작게 헛기침하고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배고파요?”
“엄청요.”
“나가죠.”
“지금?”
“지금.”
태섭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던 우성이 피식 웃었다. 꽤 적극적인 귀염둥이였다. 아, 10일 만에 차버리기 너무 아까운 사람이다. 하지만 이 사람 말고는 선택지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기에 우성은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기다려줄래요?”
“출입구 앞에 있을게요.”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한 태섭이 우성의 술잔을 받아 갔다. 음, 매너도 좋아. 뒤돌아서서 만족스럽게 웃은 우성이 헤일리와 미셸 쪽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팔을 벌려 다른 쪽을 보며 떠들고 있던 두 사람의 어깨를 감싸 안은 우성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간다.”
“뭐야. 마지막에 얘기한 남자 유부남이었잖아.”
“말고 다른 사람이야. 출입구 쪽에.”
우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의 시선이 출입구 쪽에 서 있는 태섭에게로 향했다. 헤일리는 작게 휘파람을 불었고 미셸은 탄식을 내뱉었다. 야, 칼럼용으로는 너무 아깝다. 아까워서 미칠 것 같다는 표정으로 우성을 돌아보며 하는 말에 우성이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클러치에서 차 키를 꺼내 미셸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어쩔 수 없지……. 일단 간다. 연락할게.”
“화이팅.”
“조심하고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
응응. 염려 섞인 말을 건네는 미셸과 헤일리의 뺨에 뽀뽀를 남긴 우성이 태섭에게로 걸어갔다. 제게로 걸어오는 우성을 보고 웃은 태섭이 우성을 에스코트했다. 항상 남을 에스코트 하는 입장이었던 우성은 제 어깨까지밖에 안 오는 남자의 매너에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대는 걸 느꼈다. 멀린스 앞에 주차된 차 중 이 남자의 건 어떤 걸까 궁금해하며 태섭의 손에 이끌려 걸어간 우성은 오토바이 앞에 서는 태섭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연스럽게 헬멧을 든 남자가 우성을 돌아봤다가 어딘가 떨떠름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혹시 오토바이 무서워해요? 아니면 머리 망가지는 거 많이 싫어하나?”
“둘 다 괜찮아요.”
거짓말이었다. 우성은 오토바이는 위험해서 싫어했고 머리 망가지는 건 극혐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우성은 방긋 웃으며 태섭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오기로 대답하는 게 눈에 보였지만, 태섭은 굳이 그걸 지적하지 않고 우성에게 헬멧을 내밀었다. 최대한 머리가 안 망가지도록 하얀색 헬멧을 쓴 우성이 잠가 달라는 듯 얼굴을 태섭 쪽으로 내밀었다. 웃음이 새는 걸 멈출 의지가 없는 태섭이 신중하게 손을 움직여 끈을 우성의 얼굴에 맞게 조였다. 가볍게 우성의 부드러운 뺨을 손가락 등으로 쓸어내린 태섭이 웃으며 헬멧을 썼다.
“잘 어울려요.”
“알아요. 전 안 어울리는 게 없거든요.”
새침한 우성의 대꾸에 결국 큰 소리로 웃은 태섭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오토바이에 앉았다. 태섭이 시키기도 전에 뒷자리에 냉큼 앉은 우성이 클러치를 자신과 태섭 사이에 끼우고 태섭의 허리를 꼭 감싸 안았다. 허리를 감는 두툼한 팔에 태섭이 숨을 들이켜는 게 고스란히 느껴져 우성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이 남자, 보기와는 다르게 좀 순진한 면이 있는 것 같았다. 일부러 밀착해서 앉으려고 오토바이 끌고 온 줄 알았는데, 밀착하니까 놀라는 걸 보니 그런 건 생각도 안 해본 것 같았다. 아, 진짜 아깝다 아까워. 속으로 끊임없이 아깝다는 말을 쫑알거리던 우성의 생각은 오토바이가 출발하기 무섭게 끊겼다.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지른 우성은 언제 여유로웠냐는 듯 태섭의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세게 끌어안으며 그에게 밀착했다. 태섭이 또 웃음을 터뜨린 것 같았지만 우성의 귀에는 자신의 비명밖에 들리지 않았다.
✂
태섭이 데려온 곳은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해산물 식당이었다.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이 가득한, 원하는 갑각류를 고르면 그 자리에서 쪄주는 방식의 식당에 자신을 앉힐 때까지만 해도 이 새끼 왜 이런 곳에 데려왔지, 싶었던 우성은 이내 생각을 고쳤다. 왜냐하면 주문을 마치고 돌아온 태섭이 장갑을 끼고 음식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온 다음, 전부 손질해 우성의 앞에 놔줬기 때문이었다. 손 하나 더럽히지 않고 태섭이 앞 접시에 놔주는 게살을 냠냠 집어 먹으며 눈만 깜빡이던 우성이 새우를 들어 태섭의 입 앞에 가져다 댔다. 새우를 까는 것에 집중하던 태섭은 갑자기 입 앞에 다가온 새우를 보고 놀란 듯 눈을 깜빡이다 얌전히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오물거리며 새우를 먹는 태섭을 흐뭇하게 보던 우성이 다시 게살을 집어 먹었다. 음, 역시 난 새우보단 게가 맛있어. 우성이 게만 먹고 있다는 걸 눈치챈 태섭이 게를 까며 말했다.
“어때요?”
“음식 말하는 거예요? 아니면 당신?”
“둘 다요.”
태섭의 물음에 눈을 데굴 굴린 우성이 대답했다.
“음식은 맛있고 당신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이런.”
“그래서 그런데, 질문 좀 해도 되나요?”
“두 개만 받아줄게요.”
장난스럽게 덧붙이는 태섭을 살짝 흘긴 우성이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냉큼 꺼냈다.
“직업이 뭐예요?”
“광고 쪽에서 일하고 있어요. 주로 맡고 있는 분야는 주류랑 운동 장비. 지금은 보석 시장에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죠.”
“아하. 알코올 중독자를 양산하시는구나.”
장난스러운 우성의 말에 크게 웃음을 터뜨린 태섭이 우성의 접시에 새로 깐 게를 올렸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해요? 태섭의 물음에 우성이 대답했다.
“전 ‘컴포저’에서 일해요.”
“아하,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패션 잡지죠. 대단한 분이셨네요.”
“감사해요. 지금은 새로운 칼럼을 위해 자료 수집 중이에요.”
슬쩍 몸을 기울여 태섭과 어깨를 붙인 우성이 속삭였다.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에 태섭은 잠시 당황한 것 같았지만, 이내 여유롭게 웃으며 자신도 우성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까보다 훨씬 가까워진 거리에 우성은 느긋하게 태섭의 얼굴을 여기저기 뜯어봤다. 아깝다, 아까워. 이미 최소 오십 번은 한 생각을 한 번 더 곱씹은 우성은 갑자기 눈을 맞추는 태섭을 보고 반사적으로 웃었다.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저를 열렬하게 쳐다보는 우성이 귀여운지 피식피식 웃은 태섭이 물었다.
“질문 한 개 남았어요.”
“아.”
“기다려줄까요?”
“아니에요.”
태섭에게 찰싹 붙어있던 우성이 허리를 곧게 펴서 앉았다. 덩치가 큰 남자 특유의 위압감이 넘치는 우성을 본 태섭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귀염둥이를 흐뭇하게 보던 우성이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 아니다 둘 중 하나로 대답해야 해요.”
“알겠어요.”
“사랑과 전쟁에선 모든 게 정당하다고 생각해요?”
우성의 뜬금없는 물음에도 태섭은 진지한 얼굴로 고민했다. 잠시 가만히 있던 태섭이 대답했다.
“그렇다.”
“아하…….”
우성은 태섭의 대답이 마음에 쏙 들었다. 저도 모르게 환하게 웃은 우성이 태섭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훌륭한 대답이에요.”
우성의 칭찬에 태섭이 과장되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우성이 킥킥대며 웃자, 식사가 끝났음을 깨달은 태섭이 손에 끼고 있던 비닐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훌륭한 질문이었어요.”
서로를 이용할 생각뿐인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
수많은 대화와 함께 해산물을 해치운 두 사람은 2차를 가고 싶다는 우성의 투정을 핑계로 삼아 태섭의 집으로 왔다. 태섭의 뒤를 따라 그의 아파트에 들어서며 우성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태섭이 생각보다 더 발랑 까진 타입인 것 같아 괜찮은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죄책감이 녹아 사라졌다. 태섭이 주방으로 향한 사이 거실을 한 바퀴 휙 둘러본 우성은 자신의 클러치를 소파의 쿠션들 사이에 내려놨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두 캔 꺼내 온 태섭이 웃으며 거실 한가운데 어정쩡하게 서 있는 우성을 쳐다봤다.
“집 구경하고 싶어요?”
“음, 그건 나중에 할래요.”
우성이 새침하게 대꾸하며 태섭이 내민 맥주를 받았다. 목이 말랐던 터라 시원한 맥주가 절실했다. 가볍게 서로의 맥주 캔을 부딪친 두 사람은 말없이 소파에 나란히 앉아 목을 축였다. 먼저 맥주 캔을 내려놓은 쪽은 우성이었다. 자신의 눈치를 보는 태섭 쪽으로 다가간 우성이 눈웃음을 치며 태섭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미끼’를 걸기 위해서는 이 남자에게 불을 붙여야 했다. 이런 귀염둥이를 눈앞에 두고도 바로 못 하는 게 아쉽긴 하지만……. 셔츠 사이로 보이는 탄탄한 가슴을 힐끗 본 우성이 마른침을 삼켰다. 2차를 가자고 조를 때까지만 해도 어떻게 미끼를 걸지 고민이 많았는데, 망설임 없이 자기 집으로 데려온 걸 보면 이미 도화선은 마련되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태섭에게 몸을 바싹 붙인 우성이 슬쩍 태섭을 깔아뭉갰다. 우성이 미는 대로 순순히 밀려나 소파에 반쯤 누운 상태가 된 태섭이 문득 정신을 차렸는지 우성의 어깨를 살짝 밀어냈다.
“우리, 조금 떨어져서 얘기할까요? 너무 빠른 것 같아요.”
태섭의 말에 우성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우성이 몸을 바로 세우는 걸 보며 태섭은 아쉬움에 눈을 찡그렸다. 저런 미인이 하자고 덤비는데 싫다고 밀어내는 것도 도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태섭에게 필요한 건 ‘진짜 사랑’이었다. 이대로 저 유혹에 넘어가 해버린다면 평소와 다름없는 불장난이 돼버릴 게 뻔했다. 그리고 그냥 불장난으로 넘겨버리기엔 너무 괜찮은 사람이기도 하고. 태섭은 아닌 척하며 우성의 벌어진 셔츠 뒷면으로 보이는 맨 등을 훔쳐봤다. 운동을 꾸준히 하는 타입인지 바싹 붙여왔던 몸은 단단하고 위협적이었지만, 그만큼 매력적이었다. 다이아몬드 건을 따내고 난 후에도 계속 관계를 유지하고 싶을 정도였다. 아, 설 것 같아. 슬쩍 다리를 꼰 태섭이 어색하게 웃으며 우성을 쳐다봤다. 밀어낸 게 서운했는지 우성의 입술이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입술을 본 순간 태섭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씨발. 못 참겠다. 맥주 캔을 던지듯 내려놓은 태섭이 우성의 두 뺨을 움켜쥐고 입을 맞췄다.
“으응…….”
기분 좋은 신음을 흘린 우성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는 게 선명히 느껴졌다. 기다렸다는 것처럼 입을 연 우성이 태섭을 다시 짓눌렀다. 소파와 우성의 몸에 눌려 당황한 태섭이 입을 엶과 동시에 두툼한 혀가 밀려 들어왔다. 정신이 쏙 빠질 것 같은 키스였다. 태섭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우성의 셔츠를 움켜쥔 채 우성의 보조를 맞추는 것뿐이었다. 그나마도 간신히 하고 있었다. 누군가와 입을 맞추고 밤을 보내본 경험이 적지 않은 태섭이지만, 난생처음 키스가 버겁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성에게 매달려 있던 태섭이 손을 움직여 벌어진 셔츠 사이로 손을 밀어 넣어 아까부터 만지고 싶었던 우성의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몸을 파드득 떤 우성이 키스를 멈추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손을 더듬어 옷 안으로 파고든 태섭의 손을 빼내며 애매하게 웃었다.
“다, 당신 말이 맞아요. 너무 빠른 것 같네요.”
“그런가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손을 빼내는 태섭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우성이 다시 태섭에게 입을 맞췄다. 당장에라도 옷을 벗길 것처럼 달려드는 남자의 목을 감싸 안은 태섭이 앓는 소리를 흘렸다. 제 다리 사이로 파고든 우성의 두툼한 허벅지에 아까부터 바짝 서있던 성기를 문지르자, 태섭의 어깨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태섭의 셔츠를 찢을 것처럼 움켜쥐었던 우성이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열기로 가득한 우성의 눈동자를 들여다본 태섭이 피식 웃으며 우성을 끌어당겼다. 순순히 고개를 숙여 하도 물고 빨아 도톰하게 부어오른 태섭의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물었다 놓은 우성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무 빠르다니까요.”
“알겠다구요.”
성의 없이 대꾸한 태섭이 느릿하게 다리를 움직여 반쯤 발기한 우성의 성기를 문질렀다. 명백한 도발에 우성이 눈을 질끈 감으며 태섭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 예쁘장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미간 찌푸리니까 섹시하네. 속으로 생각한 태섭이 마른침을 삼켰다. 표정을 보니 조금만 더 충동질하면 넘어올 게 분명했다. 다이아몬드는 욕망이 아니라 진짜 사랑이라고 훈계하던 클레어의 목소리가 스치고 지나갔지만, 이미 흥분으로 눈이 뒤집힌 태섭은 가볍게 무시했다. 욕망 뒤에 진짜 사랑이 올 수도 있는 거잖아. 응응. 절대로 욕망 뒤에 와. 가볍게 입을 맞추며 조르는 태섭의 행동에 씨근거리며 숨을 고르던 우성이 큰 손으로 태섭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큰 손 때문에 코까지 막혀 숨을 쉬기 힘들어진 태섭이 놀라서 눈을 크게 뜨자 우성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씨익 웃으며 속삭였다.
“태섭, 나는 당신이 날 존중해줬으면 좋겠어요.”
“…….”
“알겠죠?”
“우웅.”
불분명한 소리였지만 수긍의 의미일 거라고 판단한 우성이 천천히 손을 뗐다. 급하게 숨을 들이마신 태섭이 눈을 가늘게 뜨고 우성을 쳐다봤다.
“내 마음도 존중해줘요.”
“……날 존중하는 마음을 존중할게요.”
우성의 말이 무슨 뜻인지 눈을 데굴 굴렸던 태섭이 못 살겠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을 때 살짝 찌푸려지는 미간에 꾹 입술을 눌렀다 뗀 우성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둘 다 한껏 발기한 상태라 꼴이 우습긴 했지만, 둘은 얌전히 소파에 앉았다. 각자 속으로 ‘참길 잘했다;’라고 생각 중인 건 모르는 채 둘은 조금 전 분위기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들을 나눴다.
새벽이 훌쩍 넘는 시간까지 소파에 눌어붙어 서로에 대한 이야기와 몇 번의 키스를 나눈 두 사람은 우성이 부른 택시가 도착했다는 알람에 간신히 떨어졌다. 배웅 나오지 말라는 우성의 말에 태섭은 우성이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달려가 창문을 열고 상반신을 내밀었다. 잠시 기다리자, 택시 쪽으로 걸어가는 장신의 남자가 나타났고 태섭이 큰 소리로 우성을 불렀다.
“우성, 잘 가요!”
태섭의 목소리에 놀란 듯 몸을 움찔 떨었던 우성이 고개를 돌려 창문에 거의 매달려 있는 태섭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환하게 웃는 우성의 얼굴을 보며 태섭이 웃는 얼굴을 유지한 채로 작게 중얼거렸다.
“넘어왔네, 넘어왔어. 진짜 사랑 그거 별거 아니잖아?”
태섭이 무슨 말을 중얼거리는지 들릴 리가 없는 우성도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발 헤어져달라고 울면서 빌게 만들어 줄게. ……불쌍한 것, 어쩌다 나에게 걸려서.”
자신의 의도를 모르고 헤헤 웃고 있는 가엾은 태섭에게 가볍게 손 키스를 날린 우성이 택시에 탑승했다. 우성이 탄 택시가 눈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던 태섭의 뒤로 우성이 두고 간 클러치가 반짝였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