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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내려온 서태웅이 하는 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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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혹은 소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분명하게 긴 시간은 아니었으나 그가 길거리의 상자 더미 사이에 앉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짧은 시간 또한 아니었다. 소년의 교복은 아직 흐릿한 오전의 햇빛 아래에서 반짝거렸다. 그것은 정대만에게도 익숙한 교복으로, 이곳에 있을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열한 시. 소년이 진정 그의 후배라면 교실에서 고개를 꾸벅거리거나 점심 메뉴를 떠올리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대중교통으로 편도 4시간 거리에 떨어진 그의 자취방 근처에서 멀뚱멀뚱하게 길거리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 아니라.

정대만은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이 근처에 그의 모교와 비슷한 디자인의 교복을 입는 고등학교가 있는가? 없었다. 북산 고등학교는 건물의 칠이 바랠 정도로 오래되었음에도 제멋대로인 학생들이 넘쳐나 일부러 제복을 닮아 불편한 교복을 입힌다는 루머가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나 구식이고 귀찮은 교복을 입는 학교는 손에 꼽았다. 그렇다면 평일 오전부터 그를 찾아올 정도로 각별한 후배가 있는가? 없었다. 그의 후배들도 전부 졸업하여 각자의 위치로 떠났다. 정대만을 아는 북산의 학생이라곤 농구부이거나, 농구부였을 것이다.

농구. 정대만의 시선은 소년의 뒤, 철제 박스의 위로 올라갔다. 도저히 불가해한 자전거의 위치와 그 안장에 매달린 검은 가방, 그리고 흑백 사진 같은 소년의 인상 중 유일하게 색을 가진 붉은 색의 나이키 농구화 키링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만으로 농구부라 짐작하기는 어려웠지만, 정대만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쭈그려 앉아 있어도 그 체구가 실감 나는 길이와 근육, 그리고 떡하니 넓은 어깨는 그의 주변에서 익숙하게 봐왔던 체형이었다.

하지만 고양이도 발견하면 일단 그 자리에 놔두라고 하지 않던가? 정대만은 마침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고 날이 더웠으며 간식거리가 딱 떨어졌을 뿐이었다. 입에 하드 바를 하나 물고 새우깡 같은 거나 몇 봉지 사 올 짬이었지 거대한 미성년자를 주워올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지나쳤고, 5분이 지나 동일한 곳을 걸어갈 때 즈음이면 사라졌겠거니 생각했다. 지나칠 때까지만 해도 멍하니 졸고 있던 소년이 이제는 자신의 얼굴을 뚫어질 만치 빤히 볼 줄은 몰랐단 말이었다.

정대만은 앞니로 아이스크림을 물고 있다가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고 마침내 소년의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평일 오전 애매한 시간에는 등교하는 대학생도 안 보였고 소년을 주워갈 만한 공무원도 안 보였다. 두 번이나 지나치기에는 소시민적인 양심이 따갑게 그를 찔러왔다. 적어도 교복이 아니었더라면, 자전거나 농구화 키링이 없었다면, 소년이 그를 보지 않았더라면 눈 딱 감고 지나쳤을 것이다. 그야, 길거리에 나자빠진 사람을 줍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고 정대만은 간택이라는 단어만을 겨우 떠올렸다. 나무 손잡이를 잡고 하드 바를 입에서 뱉은 뒤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길게 자란 앞머리 안에 숨어 있던 눈이 비슷한 눈높이를 맞추고서야 비로소 선명해졌다.

고등학생?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턱이 움직일 때마다 길게 자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새까맸다. 이보다 더 짙은 흑색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검은 머리카락이었다. 살짝 흰 피부 때문에 소년의 흑색은 더욱 도드라졌다. 가까이서 본 소년은 슬쩍 보았던 것보다 아름다웠고, 강렬했다. 누군가를 훔쳐보는 취미는 없음에도 자꾸만 눈이 가는 얼굴이었다. 정대만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지 날카롭게 서 있던 갈색 눈이 슬며시 아래로 내려갔다. 말이 없으면 눈을 돌리는 짓이나 슬쩍 튀어나온 아랫입술이나 얼굴과 달리 소년의 행동은 모로 봐도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정대만은 무릎에 팔을 걸치고 곁눈질로 그의 몸을 가늠했다. 가만히 마주하니 내려다볼 때보다 더 거대한 몸이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이런 체구로 바닥에 구겨져 있을 수 있다는 점이 신기했다. 문제점이라면 그런 소년이 왜 이 길바닥에 앉아 있는가,였다.

너 북산고 아니야?

맞아요.

근데 왜 여기 있어.

소년이 입술을 조금 더 삐죽 내밀었다. 잠시간 숨 막히는 시간이 이어졌다. 대답하기 어려운 것인지 싫은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소년은 표정이 없었고 말은 더욱 없었다. 대만은 차가워진 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5월치곤 날이 더웠고 한 번 그의 입이 닿은 하드 바는 열기에 더 빠르게 무너졌다. 잇자국이 남아 있는 곳에서 푸른 설탕물이 몽글몽글하게 솟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흘러 떨어지리라. 소년의 앞에서 그는 다리를 쪼그린 채 하드 바를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잡았다.

······기억이 안 나요.

정대만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무슨 말인고. 웃느라 몸이 흔들리자 기어이 녹은 설탕물이 보도블록 위로 툭 떨어졌다. 가출도 아니고, 자신을 찾아온 것도 아니고. 그나마 하는 변명이 기억이 안 나요라니. 가출한 게 쪽팔려서 거짓말하는 건가? 그러나 소년은 나름대로 심각한 표정이었다. 아이스크림은 더욱 빠르게 녹아내렸다. 한 번 물이 흐르니 그 길을 따라 흘러내리는 양은 매초 늘어났다. 정대만은 팔을 들어 올려 소년의 입가로 움직였다. 아이스크림이 다가오자 소년의 머리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의 눈이 녹아내리는 하드 바에서 정대만의 손, 팔, 그리고 얼굴로 움직였다. 그는 잔뜩 품은 의심을 굳이 가리지 않았다.

일단 이거 먹어. 교복도 그렇게 껴입고, 덥잖아.

정대만은 한 번 더 말을 덧붙였다. 나 혼자 먹기 미안해서 그래. 그제야 소년의 입이 벌어졌다. 한 입. 가까이 다가온 얼굴이 바삭 소리를 내며 아이스크림을 물었다. 그는 뒤로 물러나며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통풍의 여유 따위는 없는 검은 자켓을 정대만도 잘 알았다. 단추를 목까지 채웠는데 이 날씨에 덥지 않을 리가 없었다. 소년은 아이스크림을 우물거리며 삼켰다. 빠른 속도였다. 정대만은 하드 바를 통째로 내밀었다. 소년의 손이 느리지만 정확하게 막대를 건네받았다.

너가 북산고인 건 기억이 나고?

네.

이 먼 거리까지 자전거를 타고 왔을 리는 없잖아, 그렇지?

아마도요. 근데 잘 모르겠어요.

이름은 뭔데.

······태웅이요. 서태웅.

서태웅. 역시 모르는 이름이다. 정대만은 우적우적 아이스크림을 씹어 먹는 소년을 눈앞에 두고 고민했다. 내버려 두고 가기엔 이미 개입한 지 오래였다. 내일 송 형제랑 약속이······ 미뤄야 하나. 또 난리 칠 텐데. 태웅이 아이스크림을 아작내는 동안 그는 손가락을 접어가며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일단 오늘은 느긋하다. 하루 정도면 그를 돌려보낼 수 있을 테니 얼빠진 후배 하나를 돌봐줄 시간으로 그 정도면 충분했다. 태웅은 그새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손가락 사이로 굴리며 대만을 기다렸다. 눈치를 보거나 따로 계획을 세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맑은 눈으로 생각 없기도 쉽지 않은데. 그는 그런 편인 듯했다.

그래, 태웅아. 그래도 집에 가야지. 너 집 주소는 기억해?

네.

태웅이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말을 하다 만 모습이었다. 대만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태웅의 손가락 사이에 들린 아이스크림 막대가 빠르게 회전하며 손가락 사이를 굴렀다. 태웅의 고개가 내려갔다. 긴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그의 눈이 보이질 않았다.

근데 안될 거 같아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그래요.

대만은 나오려던 한숨을 간신히 참아냈다. 이런 미친 그럼 나 보고 어쩌라는 건데. 다만 소년은 울적해 보였고, 차마 사춘기의 청소년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에라도 그가 냅다 자전거에 올라타 역시 어른은 몰라! 라고 소리치며 사라져버리면 괜히 신경 쓰여서 잠 못 이룰 건 정대만 그일 게 뻔하니까. 그러니 성인인 내가 참자. 대만은 어금니를 깨물고 코로 천천히 한숨을 뱉었다. 다행히 태웅은 몰랐다. 멀뚱한 표정으로 나무 막대를 가지고 장난치는 모습은 영락없이 아무 생각 없는 고등학생이었다. 그렇다면 일단······ 데리고 가는 게 맞겠지? 대만은 잠시 자신이 알고 있는 단어를 뒤적였다. 아마, 뭐더라? 그래. 임시 보호. 그게 맞겠다. 사람을 임시 보호한다는 건 조금 어색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맞는 말이었다. 잠깐만 맡았다가 돌려보내면 될 게 분명했다. 그래야 했다.

하······ 그럼 일단 형 집으로 갈래?

······.

야, 이상하게 보지 마라? 내가 어떻게 너가 북산고인 걸 알았겠어. 나도 북산 나왔으니까 알았지. 안 선생님, 북산 농구부. 그러니까 너 도와주려는 거야. 내 후배니까.

······이상한데요.

참 나. 됐어, 그러면. 형은 갈 테니까 넌 여기 있던지.

대만이 상체를 세우다 멈칫 굳었고 이내 무릎을 완전히 펴 일어섰다. 쪼그려 앉아 있는 동안 강해진 낮의 열기가 머리 위로 분명하게 느껴졌다. 태웅은 다리를 쭉 펴는 대만을 올려다볼 뿐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180은 족히 넘는 놈을 억지로 일으킬 수도 없고. 대만은 미련 없이 돌아서 설렁설렁 자신의 자취방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정말로 두고 갈 생각은 없었다. 떼쓰는 아이에게 여기다 두고 간다 으름장을 놓는 어머니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역시나 몇 걸음 걷지 않아 부스럭거리는 움직임에 이어 챙,하고 자전거가 바닥으로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대만이 멈춰 서자 자전거의 체인이 천천히 돌아가며 그의 뒤로 다가왔다. 태웅은 그의 반 발짝 뒤에 멈춰 섰다. 딱 적당한 거리. 대만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누르며 무심하게 돌아보았다.

뭐 인마. 왜 따라오는데.

······그냥요.

미적지근한 녀석. 변명도 없이 뚱하니 서 있는 꼴이 딱 그러했다. 그런 주제에 산만 한 덩치인 것도, 생각 외로 말을 잘 듣는 것도 제법 웃겼다. 하여간 이상한 놈이야. 날은 더워지고, 먹던 하드 바는 빼앗기고, 이상한 놈을 꽁무니에 붙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지만 아무튼 정대만은 이 상황이 웃겼다. 인생에 한 번 정도는 이해 안 될 일이 벌어지고는 하니까. 그래서 그는 작게 풋 웃었고 태웅은 자전거 핸들을 쥔 채 정대만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냥 짤짤거리며 돌아가는 자전거 체인 소리가 웃겼다는 말을 정대만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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