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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섭은 어떻게 바다가 되었는가

〈더 퍼스트 슬램덩크〉 속 바다의 상징.

바닷가, 모래사장, 파도.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가장 많이 표현된 자연은 단연 이 세 가지이다. 2시간이라는 한정적인 러닝타임에서 제작팀은 굳이 ‘바다’를 세밀하게 표현했다.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송태섭을 표현하기 위한 배경적 묘사라고 하기엔 영화 내에서 바다가 차지한 비중이 적지 않다. 적어도, 그 ‘상징’은 작지 않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이야기가 크게 두 가지 갈래로 진행된다. 하나는 가족의 죽음을 인정하고 떠나보내기까지의 과정이 담긴 ‘추모’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주인공 ‘송태섭’이 어떤 과정을 통해 어른이 되었는가의 과정이 담긴 ‘성장’에 대한 이야기다.

 

송태섭과 송준섭은 시간이라는 궁극적인 지점에서 다르게 된다.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는 망자의 영역인 송준섭과 계속 변화하는 생자의 영역인 송태섭. 송태섭이 성장하려면 과거의 형상인 형 송준섭을 놓아주어야 한다.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을 놓는다고 그들을 잊는 것은 아닌데, 우리는 항상 슬퍼하지 않으면 죽은 자를 잊었다고 착각하고는 한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바다는 크게 세 가지의 형태로 묘사된다. 첫째는 송태섭의 어머니 ‘미야기 카오루’(현지화 성명이 없는 관계로 이후 ‘어머니’로 서술한다.)가 바라보는 파도, 두 번째는 송태섭이 돌아간 고향에서 보았던 잔잔한 ‘바다’, 세 번째는 엔딩에서 송태섭이 동생 ‘송아라’와 함께 장난을 친 ‘해변’이다.

 

기억.

 

첫 번째 파도는 모두가 기억하듯 꽤나 의미심장하게 등장한다. 송준섭을 잃고 그들이 고향에서 도망치듯 떠난 후 어머니는 홀로 파도를 바라보는 시간을 가진다. 탑뷰에서 보여지는 파도는 해변가로 밀려 들어왔다가 몇 초 채 되지 않아 모래를 쓸고 나간다. 그러나 파도가 쓸려나간 흔적은 항상 그림자처럼 모래를 물들이고 남는다. 가족을 잃어도 그 기억은 잃을 수 없듯, 어머니는 시간이 지날수록 해지는 기억이라도 붙들고 놓아주지 않으려 한다.

어머니에게 파도는 ‘잃어버린 가족’, 특히 ‘송준섭에 대한 기억’을 상징한다. 파도(시간)에 모래알(기억)을 뺏기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기억할지언정 가족을 추모하지는 못한다. 추모는 곧 죽음을 인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에는 실질적으로는 유해조차 수습하지 못한 너무도 갑작스러웠던 죽음의 문제가 있겠고, 내부적으로는 도저히 그녀가 인정할 수 없는 아이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없는 어머니의 바다에서는 꽤나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영화에서도 표현되듯 어머니는 홀로 바다, 파도를 바라본다. 사망한 가족(남편과 아들)에 대한 기억이 가장 뚜렷할 텐데도 그녀는 기억을 누군가와 나누지 않고, 기억이 마모되는 것을 마치 파도를 바라보듯 지켜보기만 한다. 뛰어들어 기억으로 추억하고, 추모할 용기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에만 머무르는 어머니의 바다(송준섭에 대한 기억)는 존재하기만 할 뿐, 새로운 ‘기능’을 갖지는 못한다.

 

추모.

 

그렇다면 송태섭의 ‘바다’는 어떨까. 송태섭에게 형 송준섭은 극복해야 하는 벽이자 그를 농구와 이어준 잊을 수 없는 은인이다. 어린 시절에는 ‘형의 그림자’가 그를 압박했고(‘형만 한 아우는 없다’는 시퀀스와 어머니가 형의 비디오를 보는 시퀀스를 통해 표현된다.) 나이가 든 후에는 형의 모습이 투사된 정대만에게 실망하고 오토바이 사고와 농구부에서의 배척 등으로 농구에 차질이 생기며 ‘농구’ 자체에 싫증을 느낀다. 송태섭이 농구화를 굳이 포장해둔 이유에는 이러한 감정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재활 이후 농구를 다시 하려 했다면 굳이 테이프까지 붙여 포장해둘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송태섭은 고향을 찾아가 옛집에서 형의 기억을 떠올리고, 최종적으로 형과의 추억을 발견하면서 바다(형에 대한 기억)를 새로 마주한다. 형과의 은신처로 들어가기 전에는 강한 비가 내려 바다를 어지럽힌다. 송태섭이 고향을 떠난 후 방황했던 사실과 형으로 겹쳐보았던 정대만에게 크게 실망했던 부분을 생각하면 비가 내리는 혼란한 바다는 송준섭에 대한 송태섭의 불안정한 감정, 기억의 불안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그러나 형의 유품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발산’을 통해 송태섭은 형의 죽음을 인정한다. 형의 손목 보호대를 착용하는 행위는 그 나름대로 선택한 형에 대한 ‘추모’이다.

 

위로.

 

송아라가 다른 가족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은 바로 ‘인정’과 ‘위로’에 있다. 작 중 준섭과 태섭 형제의 생일 장면에서 송태섭은 송준섭의 나이를 묻는 동생에게 간단하게 ‘현재 스무 살이다’라고만 언급하고, 케이크를 주문했을 어머니는 굳이 송준섭의 이름까지 쓰인 케이크를 준비했다. 둘에게 송준섭은 아직 죽지 않은 ‘실종 상태’일 뿐이며 마치 그가 현재까지도 살아 있는 듯한 문법으로 대화한다. 이 도피를 깨고 나오는 것이 바로 ‘살아 있다면?’의 송아라이다.

추모가 죽음을 인정하는 행위라면 추억은 죽은 자를 곁으로 불러오는 행위이다. 어머니가 기억에서 나올 수 없었다면 송태섭은 그의 죽음을 인정하는 추모의 단계까지 왔으나, 근본적으로 죽은 자를 죽은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산 자들끼리 위로하는 ‘추억’은 실행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엔딩에서 송아라가 송태섭을 바다로 밀어 넣는 지점이 중요해진다. 바다가 송준섭에 대한 기억이라는 상징을 갖게 된 순간 송아라의 장난은 단순 물놀이가 아닌, 가족 모두를 기억으로 끌어와 ‘추억을 통해 산 자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죽은 자를 긍정적으로 떠나보낼 수 있게 돕는’ 역할이 되기 때문이다. 마침내 송준섭의 죽음을 인정하고 가족 모두가 그를 추모하며 기억을 나눌 수 있을 때 바다는 비로소 사람들이 가득 모인 즐거운 ‘해변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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