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전적

태섭대만

비행중 by 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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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섭대만 야구선수 AU

  • 2024년 이전 프로야구를 기반으로 작성했습니다

  • 유격수 송태섭 x 투수 정대만. 두 사람이 다른 팀입니다

  • 주의 : 악플 묘사

출근 시간부터 선수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만전에 만전을 가해 준비했다는 게 표정에서부터 보였다. 특히 오늘 선발투수인 대만은 그 누구보다 심각한 상태였다. 아마 그의 인생 최대 라이벌이 선발로 출장한다는 제보를 받았기 때문이리라. 2주 전 주중 시리즈화, 수, 목에 열리는 경기를 이르는 말에 부상을 입어 1군 말소가 되었다더니, 목요일 시합에서 9회 초에 대타로 8번 타석에 서더니 1타점 적시타에 도루까지 기록했다. 그날 저녁 다른 팀 경기를 보며 순위를 계산하던 후배 3선발이 대만의 어깨를 팔꿈치로 쿡쿡 건드리면서 도발했다. 형, 오랜만에 송태섭이랑 붙겠는데요? 그래, 정말 오랜만에 상대하게 되었다. 대만은 순식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절반을 비우면서 속으로 이를 갈았다.

대만이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라커룸으로 들어가자마자 여기저기에서 야유와 환호가 섞였다. 주장이 대만의 머리통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말했다. 대만아, 송태섭 잡겠다고 150키로 던지다가 5회에 퍼지면 니 승투승리 투수. 리드를 잡기 직전에 투구한 투수에게 부여한다. 선발투수의 경우 최소 5이닝을 던져야 한다. 날아가는 거야. 한마디로 송태섭만 신경 쓰지 말고 네 플레이를 하라는 뜻이다. 대만은 당당하게 웃으면서 건성으로 말했다.

“네에, 야수들이 득지득점 지원. 투수의 투구 이닝 동안 타자가 내는 점수. 득지에 따라 승리투수 요건이 달라지기 때문에 투수에겐 매우 중요하다 10점 내준다는 소리죠? 알겠습니다아.”

하여튼 재수 없는 자식. 주전 1루수 선배가 벌떡 일어나더니 암바를 걸었다. 이게 아주 오냐오냐 키웠더니 버릇이 없어졌어. 이번에는 투수조 조장에게 불똥이 튀었다. 에이스가 구박을 받든 말든 투수조장은 허허 웃으며 콩트를 구경할 뿐이었다. 겨우 암바에서 벗어난 대만이 야수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당연히 이겨야죠. 그 자식한테도, 그 팀한테도.”

이래야 우리 투수조 에이스지! 가장 나이가 많은 베테랑 투수가 박수를 치며 대만에게 기를 불어넣었다. 그제야 투수조장도 대만에게 덕담 한마디를 했다.

“그래, 대만아. 이 경기에 우리 팀 단독 2위와 네 시즌 6승이 달려 있다.”

“아 이건 덕담이 아니라 부담이잖아요!”

대만이 조장을 바라보며 앙탈을 부리자 그는 산적처럼 으하학! 웃음을 터트렸다. 대만이 입술을 비죽이며 구시렁거리려던 때, 워밍업 명령이 떨어졌다. 선수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여전히 토라져 있는 대만을 무시하고 밖으로 나갔다. 대만은 한숨을 푹 내쉬고 팀원들을 따라 몸을 풀러 나갔다. 선배들은 송태섭보다 승수와 팀 성적을 챙기라고 했지만, 어떻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있을까. 송태섭, 그 얄미운 자식과의 상대전적을 말이다.

송태섭은 메디컬 체크를 마치고 오느라 다른 이들보다 조금 늦은 시각에 출근하고 있었다. 송태섭의 선발 소문에 혹시나 하고 기다리던 팬들은 멀리서 익숙한 갈색 곱슬머리가 보이자마자 반가움에 손을 흔들었다. 태섭은 그들에게 손을 흔든 다음, 지각임에도 불구하고 정성스럽게 사인을 마쳤다. 이럴 때마다 자신이 1군에서 많은 이의 사랑을 받으며 야구를 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제 번호를 마킹한 팬에게 사인을 해주는데 유니폼의 주인이 물었다.

“브꼴, 들었어요? 오늘 선발 정대만이래요! 대박!”

태섭의 손이 멈추었다가 다시 유려하게 움직여 사인을 마무리했다. 태섭은 프로의 웃음을 보이면서 팬에게 다정하게 대꾸했다.

“그래요? 보통 사이클이면 내일 아닌가?”

“아 그게요, 원래 오늘 선발이 일이 생겨서 정대만 선수랑 순서를 바꾸었다고 하더라고요. 바로 어제 저녁에 소식 떠서 저희도 놀랐다구요.”

정대만과 송태섭의 매치라. 아마 지금 스포츠 기자와 도박꾼들은 초흥분 상태일 것이다. 투수 정대만 대 야수 송태섭. 그들의 상대전적은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디 팬인지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는 기록이었다. 오늘 과연 그 기록이 깨질 것인가, 혹은 그 기록이 팽팽하게 이어질 것인가. 그것은 태섭도 궁금했다. 나는 과연 투수 정대만을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오랜만에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이번 전반 시즌에는 태섭과 대만이 마주할 일이 별로 없었다. 대만이 발목 부상으로 한 달 동안 선발로 뛰지 못했고, 태섭 역시 새로운 주전감 후배와 교체로 출전하느라(그래서 감독을 욕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붙박이 주전이 떡하니 있는데 무슨 교체 출전을 하느냐고) 타석에 자주 서진 못했다. 게다가 대만이 복귀한 후에는 부상 때문에 2주를 내리 쉬었으니,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태섭은 미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구장으로 들어갔다.

역시 라커룸에 들어오니 다들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태섭을 발견하자마자 달려들어 에워쌌다. 먼저 말을 건 사람은 내야조 조장이었다.

“야 대박이다 태섭아, 어떻게 네 복귀전에 선발이 정대만이냐.”

“야 이건 하늘이 내려준 기회다. 이번에 상대전적 한 번 바꿔보자. 3타수 3안타 부탁한다.”

“뭔 오버를 이렇게 떨어요.”

태섭은 너스레를 떨면서 겸손하게 굴었으나 사실 심장이 요란하게 뛰고 있었다. 슬쩍 구석을 보니 2주 동안 풀타임으로 뛴 유격수 후배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8회마다 대수비를 내보낸 보람이 있는지 그동안 후배는 태섭의 빈자리를 완벽하게(까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준수하게) 메워 주었다. 주전 유격수가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게임차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이 후배 덕분이다. 태섭은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나 없는 동안 고생 많았다 수빈아.”

“기다리고 있었어요 선배.”

그들은 주먹을 콩 맞부딪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곧 웜업 시간이 되었고, 모두 기다렸다는 듯이 그라운드로 나갔다.

이미 홈팀인 건영 브라더즈는 그라운드에 나와 몸을 풀고 있었다. 태섭의 팀인 상암 드래곤즈는 외야에서 러닝을 시작했다. 옆에서 나란히 달리던 2루수 지태가 태섭의 옆구리를 찌르며 마운드 쪽을 가리켰다.

“야 즌대만 오늘 뽈 좀 즥이는데? 니 저거 칠 수 있겠나.”

인천으로 올라온 지 벌써 5년 째지만 여전히 경상도 사투리가 진하게 남은 어투로 그가 말했다. 태섭도 그를 따라 마운드 위에서 공을 던지는 대만을 응시했다. 선발이 하루 앞당겨 졌는데도 투구가 안정적이다. 저렇기 때문에 2번이나 국가대표로 발탁이 되었겠지. 게다가 멀어서 확인이 잘 되진 않지만 직구의 테일링과 변화구의 브레이크도 상당하다. 경기가 시작해봐야 알겠지만 체력도 버텨 준다면 충분히 7이닝까지 마운드를 지킬 듯하다.

문득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는 기분이 들어 대만은 뒤를 돌아봤다. 상대팀이 외야에서 러닝을 하고 있었다. 점처럼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이가 있었다. 작은 키에 비해 단단한 몸, 곱슬머리를 위로 올린 투블럭 헤어스타일. 운동선수보다는 불량아에 가까워 보이는 인상. 유격수 송태섭이 저를 쳐다본 듯했다. 아마 이쪽의 상태를 가름해보고 있었던 거겠지. 대만은 신경쓰지 않고 다시 포크볼을 던졌다. 이번에도 완벽하게 떨어진다. 대만은 의기양양하게 태섭을 돌아봤다. 그도, 자신도, 그리고 모든 팀과 팬들도. 의식하고 있었다. 그들의 상대 전적을.

상대 전적

타자 송태섭 대 투수 정대만. 3년 간 타율 4할 8푼 8리에 무사사구볼넷, 즉 존에서 빠지는 공이 네 개 이하이며 몸 맞는 공이 없다는 뜻. 볼넷과 사구는 무조건 출루라는 패널티가 주어진다이중 절반인 2할 4푼 4할이 2루타 이상.

투수 정대만 대 타자 송태섭. 3년 간 아웃 비율 5할 2푼 2리에 무사사구. 이중 절반인 2할 6푼 1리는 삼진 아웃.

둘의 차이는 단 0.034, 거의 절반에 가까운 상대전적이지만 대만에게 조금 더 유리한 비율이다. 그러나 고작 0.034이기에 언제든 뒤집어질 수 있는 격차. 건영 브라더스와 상암 드래곤즈의 경기가 있는 날 선발이 대만이고 라인업에 태섭이 있으면 모두의 관심사가 이쪽으로 쏠린다. 과연 이들의 상대전적은 갱신될 것인가?

그러나 둘의 라이벌전이 시작된 지 3년 째가 된 지금까지 저 비율은 깨지지 않고 있다. 어쩌다가 태섭의 상대전적이 4할 9푼이 되거나 5할이 될 때도 있었지만 그러면 바로 다음 선발에서 대만이 균형을 맞춰버렸다. 특히 발이 빠른 태섭에게 단타로 3루타를 허용한 다음이면 대만은 150km가 넘는 공을 뿌려대며 3타수 무안타에 삼구 삼진 퍼레이드로 태섭을 돌려세웠다. 대만이 먼저 삼구삼진으로 아웃 비율을 5할 3푼으로 올리면 태섭이 바로 다음 타석에서 내야 안타를 선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태섭이 대만을 상대로 친 안타가 득점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잘 없었다. 사실 이건 태섭이 테이블세터1번, 2번, 3번 타자를 이르는 말. 출루해서 득점의 기회를 만드는 것이 이들의 주 역할이다인 탓이 크지만, 일부 호사가들은 이것을 빌미로 태섭은 대만을 상대로 영양가 없는 안타만 친다는 음해를 뿌려대기도 했다. 정적 태섭도 대만도 그 말을 신경쓰지 않는데 말이다.

계절은 벌써 여름에 접어들었다. 원래라면 6시 30분에 경기를 시작해야 하지만 주말 시리즈에 생방송이 겹쳐 한 시간 이른 5시 반에 경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하여튼 방송국 놈들, 돈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아요. 선배 포수인 영준이 카메라를 세팅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코웃음을 쳤다. 그는 대만을 돌아보면서 눈썹을 들썩였다.

“대만아, 이런 경기에서 한 건 해야 해, 말아야 해.”

팀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영준은 이런 식으로 후배를 놀리기를 좋아했다. 솔직히 말해 대만과 맞는 타입은 아니다. 하지만 투수 리드와 수 싸움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포수이기도 하다. 그러니 대만도 경기 관련해서는 그의 리드를 따라가는 편이지만, 사석이라면 조금 다르다. 대만은 살짝 경직된 표정으로 대꾸했다.

“리드 부탁드립니다.”

쯧, 정이 없기는. 얌마 너 그러니까 자꾸 다른 팀 선수들이랑 사이 안 좋다는 소문 나는 거야. 프로가 소문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데. 곧바로 영준의 잔소리가 뒤따랐다. 대만은 네, 하고 대꾸하고는 덕아웃 밖으로 향했다. 먼저 보여 있던 주장이 대만의 등을 토닥이면서 조언했다.

“대만아, 영준이 형이랑 잘 지내야 해. 알고 있지?”

“충분히 잘 지내고 있다니까요.”

주장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대만을 쳐다봤다가 모든 선수가 모이자 지난 경기 브리핑을 시작했다.

“일단 이 자리에 없지만 우리 희원이, 어제 잘 던졌다. 수고!”

팀원들은 급하게 광주로 내려간 희원을 위해 박수를 쳤다. 어제 희원은 8이닝까지 공을 던지며 과부화된 불펜중간 계투와 마무리 투수를 아울러 표현하는 단어에게 간만에 휴식을 주었다. 덕분에 대만은 오늘 쓸 수 있는 불펜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 편히 던질 생각은 없다. 대만의 제 1 목표는 언제나 퀄리티 스타드선발 투수가 6이닝 이상을 3자책점 이하로 막은 경기를 이르는 말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구 한구 전력으로 던져야 한다.

“그리고 어제 4득점 해준 민성이도. 덕분에 한시름 덜었다.”

박수를 받은 민성은 부끄러워 하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최근 7타수 무안타에 그쳤던지라 그 누구보다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제 6회 초에 기적의 싹쓸이 3타점을 기록해준 덕에 8.6%였던 승리 확률을 86%로 끌어올려 역전승할 수 있었다. 주장은 마지막으로 대만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 오늘 선발인 대만이가 파이팅 한 번 가자.”

모두가 손을 모으고 대만의 말을 기다렸다. 대만은 3루 쪽을 바라봤다. 저쪽도 태섭이 파이팅 구호를 외쳤다. 이기자 이기자 파이팅! 원정 팀의 높은 목소리가 이쪽에까지 들렸다. 대만은 심호흡을 하고 외쳤다.

“스윕승3연전을 모두 이기는 것. 반대로 3연전 모두 지면 스윕패라고 한다가자!”

“어잇!”

팀원들이 모두 손을 아래로 내리면서 따라 외쳤다. 드디어, 주말 시리즈의 첫 번째 게임이 시작되었다.


클리닝 타임이 되었다. 전광판에는 댄스타임과 키스 타임으로 환호하는 관중이 비쳤다. 선수들은 모두 덕아웃과 불펜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다들 에어컨 앞에 옹기종기 모여 땀을 닦고 열기를 식히느라 분주했다. 각 팀의 감독과 코치들은 다음 선두 타자와 투수들에게 피드백을 전달하고 있었다. 기록원이 기록을 살펴보면서 흥미로운 미소를 띠었다.

“오늘 경기 난타전으로 갈 거라고 예상했는데, 예상 외의 투수전이 되었네요.”

“드래곤즈에서 대체 선발로 나온 구원중이 생각보다 호투 중이니까요. 왜 이런 선수를 여태 패전조로 썩히고 있었지?”

“드래곤즈는 워낙 베테랑 투수가 많으니까요.”

“그래서 드래곤즈가 요즘 침체기잖아. 번듯한 뉴비를 못 키우고 베테랑에 의존하고 있으니.”

선배 기록원이 안타깝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말했다. 후배가 기록지를 정리하면서 대꾸했다.

“그래도 근 2년 동안은 선수 육성이 잘 되고 있지 않아요? 송태섭 선수도 그렇고요.”

“솔직히 송태섭 선수는 장타가 잘 안 나와서 문제지, 수비 하나만 놓고 보면 충분히 국가대표로 뽑힐 만도 하지.”

“그런데 재미있는 게 송태섭 선수, 선발이 정대만 선수인 날에는 유독 장타가 자주 나와요. 벌써 2루타도 나왔어요.”

후배가 기록지를 보여주자 선배가 흘끗 쳐다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면 뭐 하냐, 후속 타자를 정대만이 삼진이나 뜬공 아웃으로 깔끔하게 요리해버리는데. 참 어떻게 된 사이인지 몰라.”

“이 정도면 전생에 원수 아니었을까요?”

“나도 방금 그 생각했다.”

두 사람은 깔깔 웃었다.

6회 초, 드래곤즈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역시나 대만이 마운드에 올랐다. 현재 그는 5이닝 2실점으로 호투 중이다. 그 중 1점은 피자책으로 이 정도면 퀄리티 스타트를 기대해볼 만한 상태다. 그러나 득점 지원은 좋지 못한 상태. 기록원의 언급대로 상대 대체 선발이 예상 외의 삼진 퍼레이드를 하는 바람에 현재 스코어는 2대 1로 초접전이 펼쳐지고 있다. 여기에서 상대가 2득점을 하면 대만의 승투는 물론 퀄리티 스타트도 날아가는 셈이 되고, 무실점으로 마무리 하더라도 6회 말에서 득점 지원이 터지지 않으면 시즌 6승 째는 무산되는 상황. 이래저래 대만에게 불리한 상황이다.

타석은 7번 타자 이우재로 시작한다. 7번과 8번을 잡지 못하면 최악의 경우 다시 송태섭을 마주해야 한다. 벌써 2루타와 내야 안타, 도루를 기록한 이상 송태섭으로 타순이 넘어가는 것은 곧 실점으로 연결되는 상황. 홈팀 관중석에선 삼구삼진이 타져 나오고 있었다. 대만은 천천히 숨을 고르다가 포수의 사인을 확인했다. 오늘 배터리투수와 포수를 동시에 이르는 말는 유독 슬라이더와 스플릿을 많이 요구한다. 선발 루틴을 바꾼 탓인지 오늘은 직구 구속이 평소보다 많이 나오지 않는다. 그걸 의식하고 포수는 삼구삼진보다 맞춰 잡는 아웃을 많이 만들어내자고 하고 있다. 그러나 대만은 오늘 공에 자신이 있었다. 오늘 변화구와 직구를 섞어 만든 스트라이크 삼진 비율이 꽤 높다. 그중에는 루킹 삼진도 있었다. 이 타이밍에서 초구로 직구를 던져보는 것도 나쁘진 않은 선택 같은데. 대만이 한 번 고개를 젓자 이번에는 직구 사인을 내준다. 대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립을 잡았다. 응원소리만 이어지는 가운데 대만이 공을 던졌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오늘 7번 타자로 나온 이우재는 후반기에 접어든 지 한 달이 지난 오늘까지 타율이 2할 3푼에 홈런도 4개밖에 없었다. 통산 홈런도 같은 5년 차들에 비하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심지어 발도 느려서 2루타성 타구에도 1루까지밖에 나가지 못하는 선수였다. 상대전적에서도 대만이 압도적으로 유리했고, 구장도 투수 친화적이라 홈런이 많이 나오지도 않는다. 그런데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모두가 입을 벌리고 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공을 쳐다봤다. 캐스터가 흥분하여 외쳤다.

“이 타구! 멀리 갑니다! 좌중간, 좌중간 멀리! 아직도 갑니다! 담장~~~~~~~~~!”

가운데로 몰리지도 않았다. 제구가 안 된 것도 아니었다. 절묘하게 오른쪽 구석으로 빠지는 코스. 루킹 스트라이크나 헛스윙 스트라이크를 노릴 수 있는 최적의 공이었다. 볼로 선언된다 하더라도 조금 더 안쪽이나 위쪽으로 올리면 되는 궤적이었다. 아니, 볼이 될 확률은 거의 0에 가까웠다. 이우재는 대만을 상대로 헛스윙 비율이 높은 타자였으니까.

“넘어~~~~~갑니다~~~~!!! 기선제압 솔로포! 드래곤즈가 경기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 놓습니다!!!”

아, 진짜 최악이다. 그 말은 대만이 아닌 태섭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날 경기 결과, 8대2 드래곤즈 우승. 승 구원중, 패 정대만, 5와 3분의 1이닝 3실점 1피홈런 2피자책 4k.

정대만, 시즌 6승 실패. 그리고 브라더스와 순위 경쟁을 하던 타 팀이 이날 승리를 거두면서, 브라더스는 4위로 추락한다.


제목 : 정대만 2군으로 내려라

정대만 투같새투수 같지 않은 새끼. 벤치클리어링 도중 감독이 상대 투수에게 ‘투수 같지도 않은 새끼’라고 폭언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야 어떻게 이우재한테 홈런을 대주냐 니가 그러고도 국대감이라고 할 수 있냐

└와 투같새 발언 개 오랜만임ㅋㅋ 정대만이 투같새요?

└솔직히 이건 너무 억까 아님? 개떡 같은 공 던진 것도 아니었는데

└ㄹㅇ 그걸 넘긴 이우재가 잠깐 미친 놈 접신한 거임

└그런데 솔까 이우재한테 대준 건 좀 그렇다 차라리 송태섭한테 대주지

└다른 거 다 떠나서 이번 경기는 타자들이 개에바였음ㅋㅋㅋㅅㅂ 타석에 들어와서 우웅? 안타가 뭐예요? ㅇㅈㄹ하고 있는데 단독 2위는 무슨ㅋㅋㅋ그냥 해체해라

제목 : 이번에 진 이유 총정리

1. 정대만이 6회에 포수 사인 한 번 무시하고 직구 승부함. 코스는 좋은데 구속이 좋지 않아서 타격감 올라오는 중인 이우재가 넘겨버림

2. 타자들이 득지 안 해줌. 솔직히 그때 홈런 맞았어도 계속 점수 내줬으면 이딴 식으로 질질 안 끌려갔음. 오히려 솔로포 이후에 드래곤즈가 기세 가져오면서 7회에 빅이닝 만듦

3. 6, 7회에 올라온 투수들 상태가 안 좋았음. 투코 새끼 정대만이 7회까지 막아줄 거라고 생각하고 불펜 안 풀어둔 게 분명함

4. 솔로포 맞고 정대만 바로 강판해버림. 계속 점수를 내주든 이후에 정신 차려서 삼진 잡든 6회는 대만이 정리해야 했는데 몸 덜 풀린 불펜 올라와서 연속 볼넷 내줌. 이때 병살 안 만들었으면 점수 차 더 벌어졌음

5. 투코 좀 잘라라 불펜 때문에 말아먹거나 아슬아슬하게 이긴 게 벌써 몇 번 째냐 타자들 이제 빠따 식을 때 되었다고 내가 백 번도 넘게 말했다

“이야, 지금 브라더즈 분위기 완전 살벌하겠는데.”

회식 중 열심히 고기를 집어먹던 우재가 웃음을 터트렸다. 결승타를 터트린데다 수훈선수까지 받은 우재는 지금 기분이 매우 들떠 있었다. 구태여 회식 중에 상대 팀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싶었지만 최근 부진하던 우재의 날이니 다들 눈 감아주었다. 모두가 우재를 응원하고 축하하는 자리에서 태섭 한 명만 떨떠름한 표정으로 맹물을 들이키고 있었다. 옆에서 백업 선수인 달재가 소곤소곤 조언했다. 태섭아 제발 표정 좀 풀어라…. 결국 태섭은 우재에게 걸리고 말았다. 알딸딸하게 취한 우재는 태섭의 어깨에 팔을 둘으며 말했다.

“크~송태섭이. 정대만과의 상대전적 갱신하나 싶었는데 우짜냐. 내가 바로 홈란 빵~하고 쳐서 정대만이 내려가버렸네?”

“네, 좀 씁쓸하네요.”

“이 자식 대답하는 꼬라지 봐라? 너 지금 상대전적 갱신할 기회 안 줬다고 나한테 이렇게 서운하게 굴기냐? 그러게 먼저 홈런을 치지 그러셨어.”

우재의 말이 길어질수록 태섭의 표정은 더더욱 험악해져갔다. 옆에 앉은 달재는 더 불안해졌다. 같이 긴 시간을 지낸 만큼 왜 태섭의 기분이 안 좋은지 달재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표정관리 해야지!

“그런데 넌 정대만 상대로 2루타 3루타는 간간히 치면서 왜 홈런은 못 때리냐? 그 새끼 완전 밥이더만, 빌빌대는 게 아주 눈에 훤히 보여서는….”

달재야, 내가 이것도 참아야겠냐? 태섭이 눈빛으로 물었다. 달재는 그래야 한다고 말도 못하고 눈만 꾹 감았다. 어차피 안 된다고 해도 저 눈빛을 띤 이상 태섭을 말리기란 불가능하다. 그는 그저 앞으로 다가올 일을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예상대로 기어코 사달이 났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관계자들만 알 테지만, 국민들은 다음날 아침 스포츠 뉴스 1면에 장식된 기사를 보고 대략적인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상암 드래곤즈 송태섭, 같은 팀 이우재와 몸싸움…


제목 : 송태섭 완전 나락갔네

한창 물 오르고 전성기라고 불릴 때에 8년차 선배한테 죽빵을 꽂았으니 이제 주전이랑 인기는 물 건너갔네

└그런데 송하극상은 대체 어디에서 풀발하셔서 꽝우재한테 죽빵을 날렸대

└지가 홈런 떄리고 싶었는데 꽝우재가 선빵 쳐서

└송하극상이라는 단어도 아깝다 송쪼잔이라고 해라

└아니 그런데 진짜 왜 때린 거임? 꽝우재 부활하셔서 신우재 되었는데 축하해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님?

제목 : 얘들아 지금 우리끼리 이런 소리 할 때가 아니다

지금 정대만이 송태섭 집 문 두드리고 있다는데? 뭐임?

└? 뭐임 설마 맞짱 뜨러 간 거임?

└KBO 최초 그라운드 밖 벤치클리어링 가나요

“야 송태섭 개새끼야!! 문 열어!”

대만은 이른 아침부터 송태섭의 집 문을 두들겨대고 있었다. 얼굴 가릴 생각조차 못 했는지 아니면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식인지 모자도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였다. 덕분에 그의 이웃들은 아침부터 소란을 피우는 상대가 누구인지 인상을 쓰면서 문을 열었다가 정대만의 얼굴을 보고 슬며시 제 집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온갖 짓을 다 하고 있느데도 태섭은 문을 열지 않았다. 어, 그래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지? 나도 수가 다 있어. 대만은 이를 빠득빠득 갈다가 심호흡을 했다. 니가 백날 틀어박혀 있어봤자지, 내게는 마법의 주문이 있다 이 말씀이다. 대만은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리면서 외쳤다.

“태섭아! 나 배고파!”

“아오!”

역시나 2초 만에 문이 열렸다. 나시티 하나에 밴딩 반바지 하나 달랑 걸치고 있는 태섭이 신경질을 내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10분 동안 문 두드리느라 팔 빠지는 줄 알았던 사람이 누군데 지가 생색을 내고 앉아 있어. 태섭이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길래 대만도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태섭이 눈썹 하나를 쓱 들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이번엔 또 뭔데요.”

“나 진짜 배고파.”

“또 아침부터 지랄이시네 이 양반.”

“아니 나 진짜 배고프다고! 내 집에서 너네 집까지 얼마나 걸리는 줄 아냐! 게다가 나 아침도 못 먹었어!”

아침 못 먹은 게 자랑이다 이 인간아. 오늘 선발 아니라고 이렇게 막 굴어도 되나? 태섭은 대만을 한심하게 쳐다보다가 일렁거리는 눈을 보고는 포기했다. 그래, 내가 저 눈을 어떻게 이기겠냐. 태섭은 훨씬 누그러진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들어와요.”

대만은 태섭의 집 거실을 차지한 각종 운동기구를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이 자식 뭘 하길래 몸이 저렇게 단단하나 싶었더니 집에서도 쇠질을 하냐고. 저러니까 산독기 소리를 듣지. 대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식탁에 앉았다. 태섭이 냉장고를 뒤지면서 말했다.

“지금 식단 중이라 풀떼기랑 닭가슴살밖에 없는데 괜찮아요?”

“메밀면은 없냐?”

“아, 잠시만요….메밀면 포케 해줘요?”

“어엉.”

저 인간이 가리는 건 없어서 다행이다. 아침에 처들어온 주제에 왜 풀떼기밖에 없느냐고 투정부렸으면 진심 한 대 때릴 뻔했다. 태섭은 각종 채소와 닭가슴살, 소분한 메밀면과 삶은 계란을 꺼냈다. 면을 삶는 동안 요령 좋게 야채를 자르고 고기를 찢어 섞은 다음 적당히 익은 면을 꺼내 찬물 샤워를 시키고 그릇에 올린다. 여기에 오리엔탈 소스까지 섞으면 완성이다. 태섭은 제 몫과 대만의 것을 금방 만든 다음 식탁에 두었다. 대만은 진작 수저통에서 두 쌍씩 꺼내 차려둔 참이었다. 내집처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으나 태섭은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말라는 등의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는 대만 몫의 샐러드를 내민 다음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냥 이거 먹고 꺼져주었으면 하는데 대만이 굳이 태섭을 긁었다.

“너 2주 출전 정지라며? 잘하는 짓이다.”

“아침부터 그 얘기를 하고 싶어요?”

태섭은 인상을 팍 쓰며 양배추와 닭가슴살, 방울토마토를 한 번에 찍어 입안으로 넣었다. 한참 우물거리다가 음식물을 꿀떡 삼키고 반격에 나섰다.

“그러는 선배는 2군 위기잖아요.”

갑자기 호칭이 선배로 바뀌었다. 대만은 진작 태섭아, 라고 다정하게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는 그런 사소한 호칭과 말투를 지적할 외부인이 없었다. 2군 이야기에 대만도 따라 얼굴을 구기며 대꾸했다.

“안 내려가거든. 그날 부진한 것도 아니었어.”

볼 비율이 낮았으니 부진과는 거리가 먼 성적이다. 그러나 피홈런과 6회 강판이 큰 흠이었다. 이미 커뮤니티나 SNS에선 이우재에게 홈런을 맞은 걸로 씹히고 뜯기고 있었다. 아, 이우재 생각하니까 또 장이 꼬이는 거 같은데. 태섭이 무표정하게 샐러드를 씹고 있으니 대만이 수저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야, 너 설마 그 일로 이우재랑 싸웠냐? 내가 걔는 웬만하면 건드리지 말라고 그랬지. 합의금 졸라 쎄게 부른다니까.”

“아니, 그러면.”

하아, 태섭은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 대만이 젓가락으로 태섭을 가리키면서 잽싸게 훈수를 두었다. 야 너 말하다가 중간에 끊는 거 예의가 아니다. 말을 할 거면 끝까지 해야지. 태섭은 대만의 잔소리를 무시하면서 머리를 감쌌다. 얼씨구, 이게 아주 자기 불쌍하다고 쇼를 다 하고 있네. 대만도 점점 똥 씹은 표정이 되어갔다. 결국 먼저 임계점에 달한 대만이 젓가락을 땅, 내려놓으며 호통을 쳤다.

“아 그래서 대체 뭐가 문젠대!”

“그 인간이 먼저 형 욕했다니까요?!”

태섭도 따라 고함을 뺵 질렀다. 쪼르르, 제대로 닫지 않은 싱크대 수도꼭지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태섭의 고백을 들은 대만은 아이고, 소리를 내면서 자리에 앉았다.

“내가 욕 듣는 게 어디 하루이틀이라고 그걸 못 참냐.”

“….”

태섭이 손에 쥔 젓가락이 찌그러지기 일보직진인 것도 모르고 대만은 그 발언을 한 뒤 마저 그릇을 비웠다. 빛의 속도로 면과 채소를 해치우고는 싱크대로 걸어가 그릇을 담은 다음 물까지 부어 놓는다. 방금 전부터 제 집마냥 자연스럽게 행동한다.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온 대만이 다시 태섭의 맞은편에 앉았다.

“내 걱정 하지 말고 성질이나 좀 죽이고 다녀라. 지금 온갖 곳에서 너 옛날부터 인성 안 좋았다고 찌라시 퍼트리고 있는데.”

“그건 구단에서 알아서 잘 하겠죠.”

“야, 너 리그에서 에러 가장 낮은 유격수라고 좀 자신만만한 거 같은데, 그러다가 방출되거나 트레이드 되면 끝장이야. 심지어 넌 국대 경력도 없고 연차도 짧아서….”

“지금 잔소리 하려고 이 아침부터 난리친 거예요?”

“열 시가 무슨 아침이냐?”

“나한텐 아침이라고요.”

태섭은 대만에게 일갈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똑같이 그릇을 싱크대에 넣고는 냉장고에서 당근과 사과를 갈아 만든 주스를 꺼내 대만에게 내밀었다. 먹고 이제 그만 가라는 신호였다. 대만은 그 축객령이 서러운지 호두턱을 만들고 태섭을 올려다봤다. 태섭은 팔짱을 끼고 대만이 그것을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 대만은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비죽이다가 뚜껑을 열고 천천히 주스를 마셨다. 절반 정도를 해치우고 다시 태섭에게 잔을 넘기면서 대만은 중얼거렸다.

“그럼 걱정이 안 되겠냐…. 제일 이쁜 후배가 맨날 구설수에 오르는데.”

허, 하고 헛웃음이 나온다. 지금 자기가 남을 걱정할 처지인가. 공을 한 번 던질 때마다 야유와 칭찬을 수시로 오가는 게 투수인데. 야수야 자기가 잘못한 걸로 욕을 먹지만 투수는 제 잘못이 아닌 일에도 욕을 먹는 자리다. 태섭은 자신을 향하는 욕설에 익숙해진 대만이 못내 안타까웠고 그를 두고 함부로 혀를 놀리는 자들을 도무지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다. 대만과의 상대전적으로 유명해진 후에는 자신과 대만을 동시에 자극하는 이들이 생겼다. 제가 쓴소리 듣는 거야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선수는 실력이 우선이고, 그는 컬러가 확실한 야수였으니까. 그런데 대만의 비난을 듣는 건 용서할 수가 없었다. 토종 선발 중에 정대만만큼 던지는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난 선배가 그런 소리 듣는 게 제일 싫어요.”

태섭의 갑작스런 고백에 대만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장난기가 발동한 남자애처럼 찡그리듯 웃었다. 대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태섭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자다 일어난 머리라 평소보다 더 복실복실하다. 뭐 하는 건데요, 태섭이 퉁명스럽게 말해도 대만에게는 마냥 귀여워 보일 뿐이다. 그러니까 요 조그만 머리통으로 내 걱정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이 말이지? 하여튼 고딩 때랑 변한 게 없어. 대만은 열심히 태섭을 귀여워한 다음 말도 없이 현관으로 향했다. 태섭이 강아지처럼 졸래졸래 쫓아왔다.

“그럼 다음 매치에서 상대전적 갱신해 보던가.”

대만은 도발 같은 말을 남기고 유유히 태섭의 집을 떠났다. 저 사람은 진짜, 태섭은 멍하니 현관 앞에 서 있다가 얼굴을 감싸며 주저앉았다.


“네 안녕하십니까 캐스터 정우진입니다. 상암 드래곤즈 대 건영 브라더즈 16차전 경기가 펼쳐지고 있는 이곳은 00야구장입니다. 오늘 도움말씀으로는 이순원 해설위원과 함께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십니까.”

“오늘 선발이 정대만 선수이고, 송태섭 선수도 출전 정지가 해제되어 주전으로 나올 가능성이 큰데요, 역시 이 둘 하면 상대전적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이순원 해설위원님 오늘은 이 상대전적이 깨질 수 있을까요?”

“어, 지금 송태섭 선수는 오랫동안 경기에 나오지 않아서 감이 좀 죽었을 겁니다. 맞추려고 하기보단 최근 좋아진 선구안을 활용하는 것도 좋은데요, 하지만 정대만 선수도 송태섭 선수를 많이 연구했을 겁니다. 그 전부터 계속 우타자 몸쪽으로 승부하고 있거든요. 이 공을 송태섭 선수가 치려고 할 것이냐, 아니면 참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것 같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자 건영 브라더즈 라인업입니다…. ”

1회 말, 선두타자로 나온 태섭은 방망이를 들고 나오며 대만과 눈을 마주쳤다. 연습구를 던지던 대만이 웃으면서 전광판을 가리켰다. 벌써 145를 찍다니, 정말 오늘 노히트로 끝내려고 이러나? 아침에 나눈 문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러면 이쪽은 전타석 출루로 응수해 줘야지. 타석에 들어서며 태섭은 루틴을 풀어갔다. 대만은 태섭과 한 번, 포수와 한 번 눈빛을 주고받고는 그립을 쥐었다. 넌 내가 오늘 꼭 이기고 만다. 두 선수의 눈에서 불꽃이 피었다.

“자 정대만 선수 초구를 던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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