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바르셀로나
동오대만
『올라, 바르셀로나!』 증보판 수록 외전 일부
대만과 동오가 헤어진 상태입니다
「자, 안첼로 스쿱샷을 하지만 여기서 막히네요. 엔더슨의 손을 맞고 공이 반대쪽으로 떨어집니다 양팀 뛰어야 해요.」
「그리고 이 공을 네, 초이가 잡습니다. 초이 바로 라인 확인하고, 파드리스가 달려오지만 이미 늦었네요.」
「자 그대로 쏩니다 자세 좋고요, 당연히 들어갑니다. 이 샷은 안 들어갈 수가 없는 각도였습니다. 이렇게 87대 83, 바르셀로나 FC가 이제 넉 점으로 달아납니다.」
「아직 넉 점 차이기 때문에 바르셀로나는 방심하면 안 됩니다. 요하네스도 지금 컨디션이 최상이기 때문에 언제든 3점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경기장은 말 그대로 살얼음판이었다. 바르셀로나 FC와 발렌시아 BC 양팀 모두 목이 터져라 팀을 응원하고 있었다. 좌석 예매에 실패한 대만은 발렌시아 쪽 자리에 앉아 홀로 치열하게 바르셀로나를 응원했다. 바르셀로나 유니폼을 가방 안에 넣어서 다행이다. 들켰으면 상하좌우에 있는 모든 발렌시아 팬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대만은 양손을 꼭 잡고 동오를 지켜봤다.
전 애인이자 같은 농구선수로 보았을 때 최동오의 컨디션은 상대측 슛터인 요하네스보다는 살짝 떨어진다. 그러나 코트를 종횡무진하여 상대방을 잘 따돌리고 있다. 후반전에 투입된 덕에 체력 소모도 1쿼터를 뛰다가 3쿼터에 다시 나온 요하네스보단 적다.
하지만 공이 불안하게 들어간다. 아군의 리바운드가 잘 되지 않으면 림이나 백보드를 맞고 튕겨져 나갈 것처럼 아슬아슬하다. 최동오, 넌 이런 선수가 아니잖아. 컨디션에 상관없이 항상 좋은 골을 보여주는 게 네 플레이 스타일이잖아. 한 건 보여줘야지. 상대가 방심하게 만들었다가 네 타임을 가져가는 거야. 대만은 팔짱을 끼고 동오를 바라봤다. 코트를 뛰지도 않는데 제가 다 초조해지는 기분이다. 어느 새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거리고 있었다.
바르셀로나에서 턴오버가 나왔다. 가드가 공을 너무 길게 뿌렸다. 당연하게도 발렌시아의 센터가 중간에서 커트하고 속공으로 이어갔다. 그러나 그의 앞에 이미 동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센터에 비해 작은 키를 이용해 드리블 하는 순간 옆에서 공을 끌어왔다. 다시 바르셀로나에게 공격권이 돌아왔다. 공을 옮기는 안첼로 옆에서 파워 포워드 둘이 달렸다. 그보다 조금 뒤에서 동오는 포인트를 확인하면서 뛰어왔다. 이미 상대가 골밑을 점령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없었다. 안첼로가 포워드로 공을 보내는 척을 하며 뒤로 보냈다. 상대는 페이크에 완전히 당했다. 뒤늦게 컨테스트를 시도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대만이 중얼거렸다.
「저건 들어간다.」
이번에는 스위시로 들어갔다. 드디어 영점이 맞추어진 모양이다.
「초이 선수, 현재까지 총 10번 3점을 시도해서 일곱 번을 성공했습니다. 오늘 컨디션이 좋은데요.」
「이래서 흐름을 탄 슈터가 굉장히 무서운 겁니다. 방금 전엔 자세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는데도 스위시로 들어갔거든요.」
해설을 들으며 뿌듯한 미소를 짓다가 대만은 급히 표정을 감추었다. 왠지 동오가 이쪽을 쳐다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만은 더욱 모자를 눌러 썼다. 혹시라도 그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이쪽을 쳐다보더라도 그게 정대만임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경기는 98대 87, 바르셀로나가 끝까지 리드를 지키면서 끝났다. 결승 골을 넣은 사람도 동오였다. 0.3초를 앞두고 덩크를 시도했는데 무려 인유어페이스로 성공했다. 4년 만에 나온 덩크라고는 믿기지 않을 화려한 퍼포먼스였다. 동시에 바르셀로나는 결승 진출을 확정지었다.
바르셀로나 팀은 열광의 도가니에 사로잡혔다. 리가 엔데사 결승에 진출하면서 몇 년 만에 정상에서 레알 마드리드와 정면승부를 치르게 되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총 40회 우승하며 명실상부 리그 최강자가 된 반면, 바르셀로나는 간판 선수 은퇴 이후 침체기에 접어들어 결승은커녕 준결승에 진출하지 못하게 된 지 꽤 되었다. 그러나 절치부심한 바르셀로나가 외국인 선수 기용과 선수 육성에 아낌없는 지원을 하면서 점차 전성기의 모습을 회복해 가더니, 올해는 동오가 최전성기에 접어들면서 강자가 되었다.
관중석에서 동오를 연호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초이, 초이, 초이! 성공신화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는 팬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하다가 빈 자리 하나를 발견했다. 분명 경기 종료까지 낯이 익은 사람 하나가 앉아 있었는데, 휘슬이 불림과 동시에 나갔는지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그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설마, 준결승전이라고 그가 왔을까. 경기가 끝난 직후보다 더 크게 심장이 울렸다.
―프로 농구 바르셀로나 FC가 무려 5년 만에 정상에서 레알 마드리드와 격돌하게 되었습니다. 바르셀로나 FC 감독 마르세유는 선수들의 몫이 컸다며 주전 선수들을 응원했는데요, 과연 바르셀로나가 15년 만에 통합 우승을 할지 아니면 이번에도 레알 마드리드의 연승 신화가 이어질 수 있을지. 파울로 코넬리타 기자가 전해드리겠습니다.
바르셀로나는 하루종일 결승 진출 소식이 흘러나왔다. 대만은 무심코 가게에 걸린 텔레비전을 보았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필이면 자료화면으로 동오가 3점을 넣는 장면이 나왔다. 동오는 이번 준결승 전에서 무려 70%에 육박하는 3점 성공률을 보여주며 <어썸 초이>라는 자신의 별명을 확고히 했다.
지금 이 가게에도 동오의 등번호를 마킹한 바르셀로나 팬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바르셀로나와 동오 초이의 팬이 들락거리는 가게에 홀로 앉아 있는 동양인은 당연히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대만은 최대한 구석에 들어가 와인을 홀짝였다.
누군가가 어깨를 건드렸다. 설마 두유 노를 시전하진 않겠지. 이미 여기까지 오면서 수많은 <두유 노우 초이?>에 당한 대만은 이제 여기에 일일이 대꾸할 힘이 없었다. 그냥 적당히 한국인 아닌 척 하고 지나가야겠다. 어차피 유럽인은 동양인 얼굴을 구분하지 못하니까. 안일하게 생각하면서 대만은 저를 건드린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이거 두유 노우보다 질이 안 좋은데.
대만은 상대의 시선을 읽자마자 그의 목적을 알아챘다. 바르셀로나에 올 때마다 종종 있는 일이었다. 혼자 있는 동양인에게 쓸데 없이 플러팅을 걸고 그루밍을 시도하면서 하룻밤 재미 좀 보려는 작자들. 동오ㅘ 사귈 때에는 그가 알아서 커트해주었지만 이제 그는 제 곁에 없다. 다행히 대만은 3년 동안 동오 없이 지내왔고 혼자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되도 않는 플러팅에 대응하는 방법을 백서른아홉 가지 정도 익혔다. 상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멀리서 온 거 같은데, 혹시 한국?」
「글쎄, 맞춰볼래?」
「그런 말 하는 거 보니 한국인이네. 일본인이나 중국인은 그런 말 들으면 화를 내거든.」
니네도 프랑스에서 왔냐고 하면서 길길이 날뀔 거면서. 대만은 속마음을 삼키고 그를 관찰했다. 남자는 바텐더가 내준 잔을 슬쩍 대만에게 내밀었다. 설마 내가 이걸 곧이독대로 받아먹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남이 주는 술은 절대 마시지 말라. 특히 바텐더를 통해 주는 술이라면 더더욱. 유럽을 여행할 때 반드시 머릿속에 넣어둬야 하는 상식 중의 상식이다. 대만은 그러나 작게 웃으면서 잔을 받았다. 마시는 척하면서 바닥에 쏟아버리려고 하는데 등 뒤에서 갑자기 손이 나타났다. 대만은 손을 보고는 혀를 차고 말았다. 아, 타이밍 죽여주네. 상대는 대만의 등 뒤에서 나타난 사람을 보고는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그가 사내를 가리키면서 말을 더듬었다.
「초, 초이? 유 초이?」
「올라.」
동오는 짤막하게 인사한 다음 상대가 건넨 잔을 멀리 치워버리고는 대만과 상대 사이에 앉았다. 아니 내가 알아서 잘 하는데 대체 왜 끼어들고 난리람. 대만은 그를 아니꼽게 쳐다봤다. 도무지 3년 전까지 서로 사랑해서 죽고 못 사는 관계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차가운 눈빛이었으나 그 눈빛의 의미를 읽어낸 사람은 그 펍에 없었다.
초이가 있다는 말에 손님들이 눈을 반짝이면서 이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초이에게 이번 경기를 묻기도 했고 사인을 해달라며 자기 옷과 모자, 신발 등을 내밀기도 했다. 한순간에 소란스러워진 펍 때문에 주인장이 나서서 줄을 세워야 했다. 사장은 그의 옆에 뚱하게 앉아 있는 대만을 보고 물었다.
「유 사인 투?」
대만은 고개를 젓고는 새로운 술을 주문했다. 팬미팅이 일어나고 있는 옆자리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은 그냥 바르셀로나의 슈퍼스타다, 나는 초이와 아무 관계가 없다. 대만은 되뇌이면서 잔을 깔끔하게 비웠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재빠르게 문자가 왔다. 사인회 중간에 시간이 있었는지 동오가 보낸 것이었다. 대만은 여전히 팬미팅 중인 동오를 쳐다보고는 문자를 열었다.
전화번호 아직 안 바꿨네. 다행이다
이참에 전화번호 바꿀까. 대만은 충동적으로 생각했다. 대만은 잽싸게 계산을 마치고 바를 나왔다. 그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게 부담스러웠다.
동오는 짤랑 소리를 내면서 닫히는 문을 쳐다봤다. 모자에 사인을 받은 팬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방금 앉아 있던 손님이랑 아는 사이에요?」
「음, 사실 대학교 시절 친구거든요. 그런데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못 알아보네.」
동오는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뒤에서 손을 내밀어 잔을 낚아챘을 때, 대만의 어깨가 작게 튀었다. 그는 분명 상대가 동오임을 알아봤다. 알았으나 인사하지 않았다. 아마 어색하고 미안해서 그런 거겠지.
그들이 헤어진 건 대만의 탓도 동오의 탓도 아니었다. 그저 8시간이라는 시차와 묘하게 맞지 않는 리그 일정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동시에 깨어 있으면서 농구를 하지 않는 시간은 극히 짧았고 한 쪽이 비시즌이면 다른 한쪽은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하는 중이었다. 그 어긋남이 5년 동안 쌓여 결국 이별로 이어졌을 뿐이다.
다르게 보면 두 사람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이별이었다. 전화할 수 있는 시간, 얼굴 볼 수 있는 시간이 짧더라도 이어지는 사람은 이어진다. 시간이 없다는 건 그저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애인보다 농구가, 커리어가 더 중요했기 때문에 서로 속 편하게 이별을 선택한 거 아닌가. 동오는 때때로 그 생각을 했고, 그래서 5년 간의 연애가 끝난 것에 미련을 갖지 않으려고 했다. 미련을 갖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치곤, 그 후에 연애를 일절 하지 않았지만.
대만은 어땠을까. 소규모 사인회를 마치고 바에서 나온 동오는 가장 먼저 그 생각을 했다. 당당하게 동오의 경기를 보러 왔으니 아마 비시즌일 테고, 사귀거나 만나는 사람도 없을 테다. 걔는 나와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났을까? 아마 그러지 못했으리라. 동오는 대만을 잘 안다. 선수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아마 그는 자신의 첫사랑이 완전히 실패했다고 깔끔하게 인정하고, 왜 실패했는지 머릿속으로 열심히 생각한 다음(어쩌면 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농구 외의 부분에선 둔감하니까), 자신에겐농구가 너무 소중함을 꺠닫고 그렇기에 아무도 만나지 않으리라 다짐했으리라.
전화가 울렸다. 혹시 대만일까 생각했다가 어림도 없는 짐작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걔는 지금 내 번호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텐데. 역시나 수신인을 확인하니 매니저였다. 동오는 지하철로 향하면서 여유롭게 전화를 받았다.
「네, 동오입니다.」
―동오!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네 이야기로 지금 sns가 난리가 났는데!
벌써 그렇게 소문이 퍼졌나. 동오는 이런 이야기륻 들을 때마다 자신의 인기를 실감했지만, 그것이 기쁨이나 행복, 만족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물론 자신을 사랑하는 팬들에겐 늘 감사한 마음뿐이지만,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그렇게 유명하지도 않았던 시절 대만이랑 함께 할 때는 이것보다 훨씬 가슴이 뛰었는데 말이지.
사인은 좋지만 술집은 자주 가지 마라, 이상한 요구를 하는 녀석이 있으면 바로 경찰을 불러라, 잇달아 잔소리를 하고 나서야 매니저는 전화를 끊었다. 그냥 경기장에서 대만을 본 거 같아서 추억여행 차 온 것인데. 동오는 가볍게 웃었다. 이 바는 동오가 2군에서 뛰던 시절 대만이 스페인에 올 때마다 찾았던 단골 가게이다. 이젠 사장도 동오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그걸 바라고 온 건 아니라서 상관없다. 여기에 있었다는 건 근처에 묵고 있다는 뜻일 텐데. 동오는 대만이 어디에 숙소를 잡았을지 짐작이 갔으나 찾아가진 않았다. 그건 대만이 결정해야 하는 일이다.
때마침 문자가 도착했다. 역시나 예상이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동오는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택시를 잡고 주소를 불렀다. 대만이 처음 스페인에 온 날 잡았던 에어비앤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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