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 바르셀로나!

올라, 바르셀로나! (4)

동오대만

비행중 by 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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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 내내 대만은 체할 거 같은 기분을 받았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아침과 달리 대마네게 집요하다 싶을 만큼 질문을 던졌다. 이건 그리 버겁지 않았다. 대만은 사교적인 편이었고,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를 즐기는 편이었다. 조금 무례한 질문들도 섞여 있었지만 못 알아들은 척 하면 더 묻지 않았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였느냐, 바로 제 옆에 앉은 최동오였다. 제게 직접적으로 말을 걸지 않으면서 스페인어로 들어오는 질문은 모두 통역해서 들려주었다. 제가 생각했을 때 이상하다 싶은 것은 대만에게 전달하지 않고 바로 스페인어나 영어로 반박했다. 마치 자신을 배려하는 듯한 태도에 대만은 또 짜증이 났다. 내가 무슨 열 살 일곱 살 어린 애도 아니고. 그냥 쟤한테 나는 챙겨줘야 하는 녀석에 지나지 않는 건가. 대학 때도 어느 정도 그런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그다지 설레지도 않는다. 이렇게 첫사랑 겸 짝사랑이 깨지는 걸 실시간으로 느껴리고 스페인에 온 게 아니었는데. 속상해서 무슨 음식에서 무슨 맛이 나는지도 모르고 흡입했다.

속이 불편한 상태에서 무작정 먹었으니 체기가 올라오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대만은 최대한 티를 내지 않게 노력하면서 짐을 챙겨 나왔다. 조금이라도 안 좋은 티를 내면 착해 빠진 최동오는 분명 약국에 들러 소화제를 쥐여줄 것이다. 그게 더 싫었다.

동오는 크리스티앙에게 대만의 숙소 주소를 보며주면서 뭐라 말하고 있었다. 크리스티앙이 동오를 한 번 째려봤다. 뭐지? 대만은 그것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동오가 몇 마디 하자 금방 수긍하는 크리스티앙을 보면서 명치 께를 엄지로 꾹꾹 눌렀다. 그것을 보고 제니퍼가 물었다.

「정, 왜 그래? 속이 안 좋아?」

「아냐, 괜찮아.」

대만은 떡 받아먹듯 대답했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괜히 성을 내는 건가 싶어서 솔직하게 털어놨다.

「좀 급하게 먹었나 봐. 꽉 막힌 기분인데.」

「그래? 잠시만 기다려봐. 남은 복통약이 있는지 한 번 찾아보고 올게.」

제니퍼가 자리를 비우자 크리스티앙이 다가왔다. 지금 출발할 건데, 무슨 문제 있어? 대만은 영어로 대답했다. 속이 좀 안 좋아서, 제니퍼가 복통약이 있는지 찾아보겠다고 했어. 대화하는 중에 동오의 시선을 느껴졌으나 애써 무시했다. 크리스티앙이 낯빛을 흐리더니 마지막 남은 복통약은 어제 자신이 먹었다고, 대신 숙소 근처에 약국이 있으니 거기에 들르는 게 어떠냐고 했다. 제니퍼에겐 미안하지만, 약이 없다면 그 쪽이 나을 거 같다. 대만이 고개를 끄덕이자, 크리스티앙이 차키를 손에서 굴리며 현관으로 나갔다. 대만이 뒤를 따라갔고,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동오가 같이 나왔다. 대만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 혼자 옮길 수 있다니까. 안에서 쉬어.」

「나도 숙소 가는 길을 알아야 내일 너 마중 나가지.」

「와, 내일은 뭐 할 건데?」

그냥 농담하듯이 가볍게 물어봤을 뿐인데, 동오가 품에서 표 두 장을 꺼냈다. FC 바르셀로나의 경기 표였다. 대만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동오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여긴 농구도 유명하지만 축구도 인기가 많으니까…. 같이 볼까 싶어서 예매했는데. 내일 컨디션 안 좋을 거 같으면 취소할까?」

「어, 아냐 아냐. 나 괜찮아. 보러 가자.」

낮에 제니퍼에겐 축구엔 관심이 없다고 대답했던 주제에 동오가 자신과 보고 싶어서 표를 예약했다고 하니 마음이 가볍게 뒤집혔다. 방금 전 다정하기만 해서 싫다던 정대만은 어디로 갔나. 방금 전에 정대만이 죽이고 돌아오는 길이다. 오로지 나를 위해서 준비한 표라니 설레지 않으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깡똥이다. 사람 기분이 이렇게 휙휙 바뀌어도 되나 싶지만 코트에서 내려온 대만은 단순하기 짝이 없어 그런 걸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차를 타고 가니 숙소까지는 금방이었다. 동오가 트램으로 가면 좀 복잡하다고 했는데. 역시 직통 노선이 없어서 그런가. 크리스티앙은 숙소 앞에서 대만과 동오를 내려주며 꼭 약을 챙겨먹으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가 지나간 뒤 동오가 대만을 보면서 물었다.

「어디 아파?」

「어…. 그냥 오늘 저녁밥을 급하게 먹었더니 체했나 보더라고. 지금은 괜찮은데.」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 우물거리며 대답했더니 동오의 얼굴이 금방 어두워졌다. 다급하게 <그래도 지금은 나아진 것 같기도?>라고 덧붙여봤자 소용이 없었다. 동오는 대만이 에어비앤비 주인에게 도착했다고 연락하는 동안 1층 로비에 있는 약국에 들어가 소화제를 샀다. 밖에 나오니 대만이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멀뚱히 동오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저렇게 보나 했더니, 대만의 더블팩을 든 채로 약국에 갔다온 것이었다. 하마터면 짐을 들고 튀었다고 오해를 받을 뻔했다. 동오가 약과 더블팩을 대만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미안, 정말 까먹어서 그랬어.」

「최동오, 그렇게 안 봤는데 말이지.」

「아니, 진짜 그런 거 아니고…. 내가 미안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까지 올라가는 내내 동오는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가만히 듣다 못한 대만이 충분히 알아 들었으니 그만하라고 단호하게 이야기를 하고서야 동오는 입을 다물었다.

대만의 숙소는 614호였다. 문앞에서 손 흔들고 헤어질 줄 알았는데 동오는 기어코 대만의 방까지 들어왔다.

「아니, 굳이 들어올 필요 없다니까.」

「너 묵는 방이 궁금해서 그래. 그냥 보고 갈 거야.」

일단 제가 밀어내기야 했지만, 그냥 보고 갈 거라는 말에 대만은 내심 서운했다. 차라리 자고 간다고 하지. 그러면 엉큼하다고 놀리면서도 속으로 쌍수 들고 환영했을 텐데. 호텔 키를 대자 띠리릭, 익숙한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렸다. 대만이 문을 열고 동오가 문을 더 열어주며 안으로 들어갔다.

가정집을 개조한 에어비앤비라 그런지, 거실과 방이 나뉘어져 문을 하나 더 열고 들어가야 했다. 2인용 침대에 테이블 하나, 옷걸이가 놓여 있는 깔끔한 방이었다. 부엌에는 가스레인지가 있었지만 조리는 불가능하다는 안내문이 스페인어와 영어로 적혀 있었다.

동오가 시설을 살피는 동안 대만은 방에 캐리어와 더블팩을 내려놓았다. 캐리어를 펼쳐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밖으로 나오며 어색하게 물었다.

「그으, 기왕 여기까지 온 거….」

「내가 오늘,」

말이 겹쳐졌다. 둘은 한참 네가 먼저 하라며 눈치를 살폈다. 아무리 친구 사이라도 이왕 온 거 야식이라도 먹으라는 말은 너무 속이 보이지 않나. 문득 제가 생각한 멘트가 구리다는 판단이 들어 계속 동오에게 턱짓했다. 기세에 밀린 동오가 쭈뼛대면서 입을 열었다.

「그으, 나 없을 때 향수병 만졌더라고.」

「아, 그랬지.」

대만이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선물로 받은 것, 혹은 자기 물건을 함부로 건드렸다고 성을 내려나? 안 그렇게 생겨선 의외로 예민한 녀석이니 충분히 그럴 만 했다. 대만은 바로 미간을 풀고 사과했다.

「미안. 그냥 그런 거 안 뿌리던 녀석이 웬일로 향수를 쓰나, 싶어서. 누가 선물해준 거야?」

「어, 아니…. 어제 급히 샀는데…. 너 온다고 해서….」

동오의 목소리가 작아질수록 대만의 눈동자가 커졌다. 누가 선물한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산 것도 아니고. 그냥 나 온다는 말에 부랴부랴 샀다고? 눈앞에서 동오가 온갖 변명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뭐야, 우리 그냥 친구 아니었어? 그런데 왜 날 신경 써? 마치 내가 너한테 뭐가 된 것 같잖아. 괜한 희망을 품게 되잖아.

동오가 고개를 들어 대만의 눈치를 슬며시 살피면서 말했다.

「그, 혹시 너 별로였으면….」

「별로 아니었어.」

대만이 동오의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왔다. 동오가 사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대만은 벌개진 귀를 숨길 생각도 못하고 고개를 틀면서 웅얼거렸다.

「그런데, 넌 그런 향보단 조금 묵직한 게 어울리니까…. 내일 향수 가게 가서 내가 골라줄 테니까….」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동오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대만은 동오를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올라, 바르셀로나! (4)

 

끝내주는 밤이었다, 고 하면 너무 속물적인가?

대만은 침대에 드러누워 상의를 벗은 채 단잠에 빠져 있는 동오를 쳐다봤다. 쟤가 일어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기에는 둘 다 맨정신이었고,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가만히 어젯밤 역사를 복기하던 대만의 정수리에서 김이 새어나왔다. 미쳤지, 정대만. 대만은 고개를 휘휘 저어 망상을 물리친 다음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걷는 내내 윽 소리가 잇새로 흘러나왔다. 최동오 미친 새끼, 사람 몸을 이렇게 조져놔? 대만은 하루 아침에 짝사랑 상대에서 미친 놈으로 격하된 제 동창을 바라봤다. 옆자리가 허전한지 동오가 손으로 빈 자리를 더듬었다. 동오가 깨기 전에 대만은 옷가지를 챙겨 화장실로 들어갔다. 저놈의 아침잠이 이렇게 감사했던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뽀송한 몸에 깨끗한 몸을 걸치고 나오니 동오가 여전히 멍한 얼굴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보나마다 대만을 찾는 중이리라. 역시나 대만을 발견하자마자 동오의 눈이 반짝였다. 일단 당황하거나 놀란 것 같진 않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설마 자신과 다른 마음으로 홧김에 한 거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 걱정은 잠시 덜었다. 대만이 먼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조식 먹으러 갈 거야?」

「응? 어, 먹어야겠지. 그런데….」

아, 그런데 지금 아홉 시라 조식 못 먹겠네. 대만이 중얼거리는 사이 동오가 바짝 다가왔다. 슬쩍 보니 사고 친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이다. 설마 어젯밤 일은 실수니 그냥 넘어가자고 하면 어쩌지? 대만은 콩닥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동오를 기다렸다. 그러나 동오가 내뱉은 말은 대만의 예상보다 훨씬 깜찍하고 발칙했다.

「그럼 우리 이게…. 애인이야?」

「엉?」

애인이냐고? 일단 서로 마음도 얼추 확인하고 같은 침대에서 자기도 했으니 오늘부터 1일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최동오는 크리스천이었고, 대만은 무교지만 보수적은 부분이 있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근본적인 물음에 부딪쳤다.

한 번 같이 밤을 보냈다고 애인이라고 할 수 있나? 정대만의 답은 이러했다.

「아직 고백 안 했잖아.」

고백하지 않고 사귀다니 정대만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누군가가 들으면 꼰대 바런이라고 매도하겠지만 서로 확실하게 마음을 확인하지도 않고 사귀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대만에게는 더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다. 대놓고 기가 죽은 얼굴을 하고 있는 동오에게 대만이 쐐기를 박았다.

「어, 그런데…. 동성연애도 혼전순결 위반으로 치냐?」

「대체 어디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건데 대만아.」

동오는 아주 많이 난감해졌다. 동시에 자신의 모태신앙이 처음으로 원망스러워졌다. 대체 어떤 놈이 먼저 동성애는 죄악이라고 퍼트려 가지고. 동오는 최대한 침착한 얼굴로 최근 가톨릭은 동성애자에게도 세례를 내리는 등 소수자를 포용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그것을 제외하고서라도 나는 너를 좋아한다고 긴 시간을 들여 대만에게 설명했다. 장황하고 긴 설명에 알았다며 동오를 살짝 밀어낸 대만은 슬슬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굳이 감추진 않았다. 아무튼 간에, 이 녀석도 나 만큼이나 나를 그쪽으로 좋아한다는 뜻이지? 그런데 왜 고백을 안 해? 괘씸한 자식. 대만이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미니 동오는 또 자신이 실수를 한 건가 안달이 났다. 이제야 자신이 대만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알게 되었는데 고백하기도 전에 차이는가. 그래도 나보다 먼저 좋아했다면 기회를 좀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동오가 입술을 말아 깨물며 대만을 쳐다보자 대만이 턱을 괴며 추궁했다.

「그럼 지금 고백해봐.」

「고백하면 받아줄 거야?」

「어떻게 하는지 보고.」

아, 제발. 동오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남중남고 운동부 루트를 착실히 밟은 최동오는 인근 학교 여학생에게 고백을 받았으면 받았지 제가 먼저 첫눈에 반했다며(딱히 지금도 그렇진 않지만) 고백한 적은 일절 없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한참 머릿속으로 고민하던 동오의 눈에 대만이 들어왔다. 턱을 괴고 심드렁하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지만 올리브색 눈이 지나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냥 최동오를 좀 골려주고 싶었 던 모양이다. 열이 받지만 제가 먼저 잘못한 짓이 있어(딱히 이것도 최동오의 과실 100퍼센트라고는 할 수 없지만) 불만을 얘기할 수도 없었다.

동오는 자신이 쓸 수 있는 카드가 무엇일지 고민했다. 그의 주머니 안에는 FC 바르셀로나 경기 티켓 두 장이 들어있다. 내일은 공강이므로 대만에게 대학을 구경시켜주거나 새 농구부 멤버를 소개시켜줄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또, 뭐가 있지? 바르셀로나에서 뭘 할 수 있는지 머리를 굴려봤지만 생각나는 게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운전면허증 딸걸. 그랬으면 저 밑에 바다라도 1박 2일로 놀러갈 수 있었을 텐데.

동오의 고민이 길어질수록 대만도 초조해졌다. 아이씨, 여기까지 왔는데 고백 안 할 생각은 아니겠지? 대만이 슬쩍 고개를 기울여 동오의 밤갈색 눈을 보았다. 시선이 다시 마주치고, 동오가 볼품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내년엔 바다 보여줄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쟤는 여태 다른 애들이 자기한테 고백할 때 무슨 말 했는지 기억도 못하나? 대만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떼고 쳐다보자 동오의 말이 주절주절 길어졌다.

「내가 운전면허증 딸 테니까, 이번에는 동네 둘러보는 것밖에 못하지만…. 내년에 오면 바다 보러 가자. 스페인 바다도 예쁘대.」

아, 이거 백 퍼센트 망했다. 나라도 짝사랑 상대가 이딴 식으로 맥아리 없이 고백하면 단칼에 거절하겠다. 동오는 욕이라도 뱉고 싶었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들리는 것은 경쾌한 웃음소리와.

「그럴까?」

의외의 긍정문이었다. 동오는 퍼뜩 눈을 떠 대만을 쳐다봤다. 대만이 말갛게 웃으면서 손을 뻗었다.

계획한 시간보다 30분이나 늦게 출발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은 가벼웠다. 동오는 슬쩍 대만의 왼손을 내려다보다가, 은근슬쩍 손을 잡았다. 대만이 동오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바로 손을 풀었다. 이건 싫나, 시무룩해지려던 차에 대만이 손깍지를 끼었다. 꽃가루가 들어간 것처럼 목이 간질간질했다. 대만도 손깍지를 끼고는 부끄러웠는지 헛기침을 했다. 이제 가 볼까? 동오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오가 미리 에어비앤비에서 숙소까지 가는 트램 노선을 알아둔 덕에, 그들은 별 어려움 없이 FC 바르셀로나의 홈 경기장에 도착했다. 그렇게 늦장을 부리다 나왔음에도 경기 시작까지 무려 1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 사이에 대만과 동오는 경기장 내 카페테리아에서 브런치를 해결하고 기념품 샵까지 구경했다. 축구 선수라고는 눈곱만큼도 몰랐지만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동오는 6번 선수 경기복을, 대만은 14번 선수의 것을 골랐다. 스낵까지 알차게 고른 그들은 조금 구석진 자리로 들어가면서 바쁘게 축구 지식을 채워넣었다.

「오프사이드가 정확하게 뭐야? 나 그게 제일 헷갈려.」

「공격수가 수비수보다 앞에 있으면 오프사이드일 걸? 나도 정확하게는 모르는데.」

「엑, 왜 그러면 안 되는데? 농구엔 그런 규칙 없잖아?」

대만은 입술을 죽 내밀었다. 만약 농구에도 오프사이드 규칙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상대가 백코트하기 전에 골대 근처에서 대기해 롱패스를 받아 득점을 하는 플레이가 모두 금지될 것이다. 북산왕전에서 북산이 1점 차이로 승리한 것도 백호가 산왕보다 먼저 백코트해 최적의 자리를 선점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오프사이드로 무효가 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하기 그지없었다.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대만을 보며 동오가 말했다.

「하지만 그래서 재미있잖아. 니키타스는 골대 앞에서 수비수와 공격수가 얽히는 게 숨막혀서 좋다던데.」

「내가 봤을 때 걔는 좀 마조야.」

「그건 맞아.」

니키타스가 들었으면 경을 칠 소리였다.

웅장한 나팔 소리와 함께 선수단이 입장했다. 오늘 바르셀로나 FC가 상대할 팀은 발렌시아 CF였다.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팀이 한 자리에 뭉친 탓인지 흠 팀도 원정 팀도 만석이었다. 양쪽이 치열하게 구단기를 흔들고 있었다. 양쪽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나오고, 선수들은 경례를 마친 후 국가를 불렀다. 대만은 잘 알지 못하는 스페인 국기를 흥얼거리다가 동오에게 속삭였다.

「그런데 여기는 시구 이벤트 같은 거 없어? 농구도 가끔 스타 하나 섭외해서 슛 세레머니 하기도 하잖아.」

「…없는 거 같은데?」

「칫, 그게 재밌는데.」

「그리고 나와봤자 우리는 모르잖아.」

「그것도 맞는 말이다.」

큭큭거리던 대만은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눈을 부릅 뜨고 집중했다.

과연 2010년대에 유로 월드컵과 남아공 월드컵의 우승을 거머쥔 팀닦에 스페인의 축구는 무적함대라 불리는 독일과 비교해도 만만치 않은 수준이었다. 순식간에 공수가 뒤바뀌고, 거친 허슬플레이가 이어졌다. 대만과 동오는 선수와 공에 눈을 떼지 못하고 살짝 입을 벌린 채 경기에 온전히 몰입했다. 바르셀로나가 전반 25분에 첫 득점을 올렸을 땐 관중들과 같이 벌떡 일어나 얼싸안고 뛰었다. 금방 민망함에 진정하고 자리에 앉았지만 거세게 뛰는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전반전 스코어는 1:2로 바르셀로나가 아직 앞서고는 있으나 치열한 공방이 이어지는 상태였다. 휘슬이 울리고 선수들이 휴식을 위해 라커룸으로 들어가는 사이 중계화면에 거대하게 <Baile Tiempo>라는 자막이 떴다. 무슨 뜻이냐고 동오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화면에 잡힌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 화려한 춤 실력을 선보였다. 축구 경기에도 이런 댄스 타임이 존재하는지 처음 알았다. 역시 탱고의 나라라 그런지 다들 춤사위가 예사가 아니었다. 꼬마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들 흘러나오는 빠른 노래에 맞추어 몸과 머리를 흔들었다. 대만은 조심스럽게 침을 삼켰다. 아씨, 나 통나무인데 어떡하지.

아니나다를까 화면에 떡하니 자신들의 얼굴이 나왔다. 보기 드문 동양인 얼굴이라 신기했나 보다. 망했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감싼 대만과 달리 동오는 잠깐 멋쩍허하더니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 냅다 춤을 추었다. 잘 추었으면 모를까 하필이면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말춤이었다. 대만은 아예 의자 밑으로 숨어버렸고(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친구를 부끄러워하는 광경으로 보였는지 웃기 바빴다) 동오는 점점 흥에 겨워 격하게 허리를 흔들었다. 끝에 가서는 화끈하게 헤드뱅잉까지 선보였다. 여기저기에서 휘파람 소리와 함성, 박수 소리가 터졌다. 제 차례가 끝나자마자 동오는 깎듯하게 앞뒤좌우 사람에게 인사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신나게 놀아 제껴놓고는 또 창피한지 얼굴이 빨갰다. 겨우 기어 올라온 대만이 동오를 째려봤다.

「네가 그렇게 춤추면 숨은 내가 뭐가 되냐.」

「솔직하게 말해도 돼?」

「뭐가?」

「네가 춤을 안 춰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안 그래도 허리 안 좋을 텐데.」

무슨 소리를 하는가 미간을 모으고 생각하다가 동오는 양손으로 동오의 어깨를 야무지게 때렸다. 이게 지금 미쳤냐! 동오는 어깨가 아픈 줄도 모르고 웃기만 했다.

댄스 타임 다음에는 키스 타임이었다. 화면은 남녀뿐만 아니라 남남, 여여 커플에 노부부 커플까지 잡아주었다. 그러면 다들 내빼지 않고 진하게 키스를 했다. 어떤 팀은 개그 욕심이 지나쳐 딥키스를 하다가 받아주던 상대가 자빠지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화면으로 구경하던 대만이 입맛을 짭, 다셨다.

「차라리 저런 거 걸렸으면 좋았을 텐데」

「춤 추는 건 부끄러운데 키스는 안 부끄러워?」

「야이씨 니가 춤 못 추는 사람의 불행을 아냐?」

대만이 발끈하게 외치자 동오가 눈을 토끼만큼 동그랗게 뜨더니 되도 않는 소리로 반문했다.

「그럼 키스는 잘 한다는 거야?」

씨, 맞다. 얘 상대가 편해지면 쓸데 없는 걸로도 장난치는 편이었지. 대만을 궁지에 몰아넣는 데 성공한 동오가 몸을 붙여오며 말했다.

「응? 어쩐지. 어제 아주 환상적이었지. 그런데 키스 잘 한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다른 애랑 해 본 적 있어?」

「야야 경기 시작한다!」

대만이 다급하게 동오의 얼굴을 잡아 억지로 필드 쪽으로 돌렸다. 그 사이 하프 타임이 끝났는지 양측 선수들이 다시 축구장으로 입장하고 있었다. 해설진이 스페인어로 떠드는 것을 동오가 주워다가 대만에게 번역해주었다.

「발렌시아의 19번 선수가 40번 선수랑 교체되었나 봐.」

「그래? 하긴 그 선수 전반 31분에 태클당한 뒤로 계속 발목 통증 호소했잖아.」

대만이 눈살을 찌푸렸다. 부상 전적이 있어 공감이 가는 모양이다. 선수의 부상을 곱씹다가 문득 궁금해졌는지 대만이 물었다.

「스페인 농구도 몸싸움 심하지? 많이 밀리진 않아?」

「확실히 한국에 비하면 엄청 심하긴 하지. 나도 여기에선 덩치가 좀 작은 편이고. 아직은 교체 멤버로 뛰고 있으니 12월까지는 몸을 키워야지.」

오, 하면서 대만이 동오의 몸을 훑듯 위아래로 살폈다. 지금 보니 몇 달 전에 비해서 몸이 많이 커진 것 같기도 하고…? 대만이 빤히 쳐다보니 또 장난기가 발동안 동오가 속삭였다.

「어제 많이 봤는데도 부족해?」

「이이익!」

대만이 다시 동오의 어깨를 때렸다. 동오는 큭큭 웃다가 휘슬이 울리자마자 경기에 집중했다. 씩씩대던 대만도 금방 경기에 빠져들어 소리를 질렀다.

「차, 차야지! 아니 왜 패스를 하냐고 뚫을 수 있잖아악!」

대만이 괴성을 지르며 머리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동오는 바르셀로나의 어이없는 실책이 나올 때마다 마른 세수를 했다가, 득점 기회가 나오거나 패널티킥을 받을 때마다 환호하며 일어났다. 덕분에 경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목이 다 쉬어서 쇳소리가 섞였다.

경기는 1:3으로 바르셀로나가 2점 차이로 이겼다. 사인을 받으려는 인파와 반대 방향으로 나가면서 대만이 말했다.

「재밌긴 한데, 의외로 점수가 금방금방 안 난다.」

「농구야 샷클락 안에 공격을 시도해야 하니까 그렇지. 그리고 공격 시간에 제한 있는 스포츠도 많지 않잖아. 양궁이랑…. 또 뭐 있지?」

「아, 그 말 해서 생각났는데. MLB에선 이젠 시간제를 도입해서 십몇 초 안에 투구와 타구를 해야 한다더라.」

「그래? 야구는 좋아해?」

「좋아한다기보단…. 부리 부모님이 이글스 시절부터 야구 광팬이어서 어렸을 때 자주 봐서 그래.」

그런데 요즘은 성적이 바닥친다고 이를 갈더라. 하 진짜 망할 놈들 그 감독일아 종신 계약을 맺었어야 하는데…. 대만은 금방 야구에 몰입해 중얼거렸다. 다음에 한국 들어가면 야구 시즌에 맞추어서 가야겠다. 그리고 대만이 좋아하는 팀 경기를 보러 가야지. 동오는 야부지게 내년 계획을 세웠다.

쓰레기를 버리고 경기장을 나온 동오는 트램을 타려고 정류장으로 향했다. 대만이 갑자기 팔을 잡더니 어딘가로 끌고갔다. 여기에 뭐가 있는지는 알고 가는 건가? 불안한 마음에 동오가 거듭 대만의 이름을 불렀다. 네 번째 불렀을 때 대만이 동오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내가 여기 근처에 렌트 카 센터 있는 거 봤거든.」

「그, 잠시만. 우리 아무것도 안 들고왔고.」

「동오야.」

당황해서 말리는 동오의 말을 가로채며 대만이 환하게 웃었다.

「우리 바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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