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 바르셀로나!

올라, 바르셀로나! (5)

동오대만

비행중 by 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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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지갑 사정으로는 경차가 최선이었다. 좌석을 최대한 뒤로 밀었지만 그래도 다리를 구깃구깃 접어야 탑승할 수 있었다. 운전할 수 있겠냐고 물었더니 대만은 문제 없다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브레이크나 액셀을 제대로 누를 순 있는지 걱정이 들었다. 다음에 올 때는 돈 좀 넉넉하게 모아서 와야지. 대만은 네비게이션을 켜고 시동을 걸었다.

바르셀로나 FC 경기장에서 가장 가까운 바닷가까지 대략 20분 정도 걸렸다. 원래라면 15분 정도 걸릴 거리지만, 대한민국과 교통 체계가 다른 낯선 나라에서 이 정도면 얼마 걸리지 않은 축에 속했다.

도착했다는 말과 동시에 대만이 기어를 주차로 바꾸어 놓고 자리에서 내렸다. 동오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펼쳐진 풍경에 탄성을 작게 뱉었다. 동해나 남해에서는 볼 수 없는 빛깔이었다. 물이 파랗지 않고 초록빛이었다. 반짝이는 옅은 보석 같은 빛깔의 물결이 바람을 따라 일렁댔다. 물살에 부딪치는 윤슬이 하얘서 눈이 멀 것 같았다.

운이 좋아 해안가에는 둘을 포함해 여섯 명 정도밖에 없었다. 대만은 바로 신발을 벗고는 동오의 손을 끌었다. 야, 빨리 가자. 동오는 대만에게 질질 끌려가며 겨우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운 모래가 발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이따금 부서진 조개 껍질이나 둥글게 깎인 조약돌 따위가 밟혔다. 대만은 모래 속에 발가락을 밀어 넣고 꼼질거려 보기도 하고, 물 가까이에 다가갔다가 몰려오는 파도를 피해 달아나는 등 유치한 장난을 쳤다. 옆에서 동오도 파도가 달려올 때마다 웃으면서 멀리 도망갔다. 그러다가 다시 바다를 약올리듯 한껏 물러난 선 근처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러다 타이밍을 잘못 잡으면 파도가 발등을 덮쳤다. 아, 수건 안 가져왔는데 큰일났다. 동오가 한숨을 뱉자 대만이 옆에서 태연하게 말했다. 괜찮아, 내가 챙겨왔어. 알고 보니 경기를 보러 갈 때부터 바다를 구경하러 갈 심산이었다. 동오는 헛웃음을 지었다가 장난기가 발동해 대만을 불렀다.

「대만아.」

「응?」

「에잇!」

「아! 야 최동오오!」

대만이 돌아봄과 동시에 수면을 발로 차올렸다. 거세게 튄 물방울 몇 개가 대만의 하얀 셔츠에 점을 찍었다. 촉촉해진 셔츠에 순간 얼굴을 가렸던 대만이 장난조로 짜증을 냈다. 나 갈아입을 옷은 안 챙겼단 말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동오는 양손으로 바닷물을 퍼 대만에게 뿌리기 시작했다. 대만은 멀러 도망가지 않고 똑같이 물을 퍼올려 동오에게 사정없이 뿌렸다. 금방 온몸이 엉망으로 젖었다. 둘은 서로를 손가락질하며 꼴이 대단하다며 허리를 젖혀가며 웃었다. 아무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롯이 그들의 시간이었다.

물놀이 끝난 후에는 햇볓에 말린다는 핑계로 해안가를 따라 걸었다. 저 뒤로 두 사람의 발자국이 남았다. 오른쪽이 조금 더 깊이 파인 쪽이 대만이고, 깊이가 고르지만 보폭이 제멋대로인 쪽이 동오였다. 그들은 느긋하게 걷다가, 갑자기 인터벌 훈련을 한다며 좌우로 뛰다가, 지쳐서 돗자리를 깔 생각도 못하고 모래바닥에 주저앉기도 하면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옷이 젖든, 모래로 엉망이 되든 그건 이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지중해의 햇살에 살이 타는 것도 아무렇지 않았다.

「여기 진짜 조용하다.」

대만이 중얼거렸다. 그가 귀국한 뒤에 동오는 그들이 갔던 해안을 검색했다. 알고 보니 바르셀로나에서 유명한 휴양지 중 하나였다. 그런 곳에 사람이 거의 없을 때 놀러가다니, 운이 따라줬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바람은 조용했고,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만 주변을 가득하게 메웠다.

「행복하다.」

동오가 중얼거렸다. 대만이 파도소리를 따라 고개를 까딱였다. 나도.

 

올라, 바르셀로나! (5)

 

푹 젖은 옷을 입고 대학교로 복귀할 수는 없었다. 동오는 어쩔 수 없이 하숙집으로 돌아갔다. 시간이 이미 오후 1시에 가까웠다. 숙소까지 바래다주고 온다더니 한참 동안 소식이 없던 동오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만의 손을 잡고 젖은 채로 들어오자 남아 있던 하숙집 멤버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독일인 유학생인 프리드리히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너네 대체 뭐 했냐?」

「그냥 거기에서 자고 바다 보러 갔어. 아무것도 아니야.」

동오는 속사포로 영어를 뱉어내고는(프리드리히는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데도 그렇데 대답했다. 사실상 가만히 있으라는 무언가의 압박이었다) 대만과 함께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우리 하숙집에 드디어 정체성을 깨달은 녀석이 생겼군. 프리드리히는 지극히 철학적인 말을 중얼거리고는 제 방으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는 대로 학교로 향할 줄 알았는데, 동오는 가방을 챙기다 말고 향수병을 집어 들고는 대만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거 진짜 별로였어?」

「어?」

대만은 예상 못한 질문에 잠깐 답을 하지 못했다. 모든 오해와 사건의 원흉인 향수병을 노려보던 대만이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 그렇게 나쁘진 않았어. 좀 더 무거운 게 너랑 잘 어울리긴 해도.」

와중에 또 <무거운 게 어울린다>고 강조하는 것을 보니 대만의 취향이 어던지 짐작이 갔다. 동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다행이다. 난 이런 거 잘 모르니까. 설마 너한테 별로였나 싶어가지고.」

「그때는…. 너한테 호감 있는 다른 사람이 골라준 줄 알았으니까….」

더듬더듬 말하던 대만은 결국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동오의 베개에 얼굴을 박았다. 귀엽기 짝이 없는(명헌이나 수겸이 들었다면 콩깍지 좀 빼라고 기겁할 생각이었다) 행동에 동오는 비실비실 웃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 골라준 향수를 좋다고 뿌리고 다녀서 질투 났다는 뜻 아닌가. 자기는 모든 사람의 질투와 선망을 한몸에 받으면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누가 침을 발라놓았나 안절부절못하는 정대만이라니. 도저히 상상이 안 가는데 눈앞에서 보니 사랑스럽기만 했다. 동오는 온몸으로 대만을 깔아뭉개며 놀렸다.

「그랬구나, 질투했구나.」

「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

대만이 빽 소리를 질렀다.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 나오는 버릇이다. 그 모습을 보고 확신이 선 동오는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아닌데, 정대만 질투쟁이네. 아 진짜 그런 거 아니었다고! 한국어로 고집을 부리면서 투닥대는 게 아래층에까지 들렸다. 너네 연애 놀음하는 건 좋은데 제발 같은 집 사는 사람에게 민페는 부리지 말아라. 마르코가 커피를 마시면서 속으로 말을 삼켰다. 와중에 마르타 아주머니는 동오가 친구가 오더니 아주 활기차졌다며 당신이 다 뿌듯해하셨다.

다이닝 룸에서 간단하게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대만은 바르셀로나 FC 경기 이야기를 했다. 굉장히 흥미진진했으나 역시나 속도감으로는 농구를 따라갈 수 없다는 게 대만의 평이었다. 일부 축구팬들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으나 대만이 바르셀로나의 경기력을 이야기하자 바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아니 거기에선 패스를 하는 게 더 성공률이 높은데 왜 굳이 자기가 차 넣으려고 하냐고! 오프사이드 자리도 아니었는데!」

「와 이것들 다 얼이 나갔네?」

「그 새끼는 옛날부터 스타병이 있어 가지고 글렀어.」

「아니, 패스를 안 해도 자기가 성공률이 더 높으면 달려가서 골을 넣는 게 맞지. 그런데 그렇게 잘 차는 것도 아닌데 왜 굳이 자기가 하겠다고 하냐고! 아 내 고등학교 동창 중에 그런 녀석이 하나 있었는데 걔는 저희 팀 에이스였거든? 믿고 보는 에이스. 그래서 패스 플레이를 안 해도 그래 너는 넣는 녀석이니까 마음대로 해라, 그랬는데.」

그 말을 시작으로 대만은 화제를 바꾸어 고등학교 때 있었던 사건사고를 풀어놓고 시작했다. 팀원들 이야기부터 잠깐 농구를 쉰 이야기, 주전 네 명이 사이 좋게 낙제점을 받아서 재시험을 쳐 겨우 경기에 출전했다는 이야기와 자기와 동오가 전국대회에서 상대 팀으로 만났는데 1점 차이로 자기 팀이 이겼다는 것, 그런데 바로 다음 경기에서 완패해 경기장을 떠났다는 사실까지. 대만이 털어놓는 이야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던 크리스티앙이 동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때 만났던 라이벌이랑 지금은 같은 학교에서 뛰고 있고?」

「그치! 나 첫 날 쟤 얼굴 보고 놀랐다니까! 그런데 사실 머리카락이 길어져서 못 알아봤어. 쟤네 학교는 다 빡빠이었거든.」

「빡빡이가 얼마나 멋진 헤어스타일인데!」

고등학교 시절 동오처럼 반삭을 한 페더스가 발끈했다. 대만은 페더스의 이야기를 가볍게 무시했다.

「뭐 고등학생 때는 모르지만 지금은 같은 팀이잖아. 그리고 난 그 경기에서 쟤가 인상 깊었단 말이야. 그래서 인사했는데 어떻게 했는지 알아?」

「왜, 욕부터 박았어?」

「나 그렇게 성격 더럽진 않아.」

「무시당했어.」

「와 이거 완전 쓰레기였네!」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동오를 손가락질했다. 이 자식 항상 젠틀맨인 척 하더니 안 되겠네! 우우 최악이다 동오 초이. 쏟아지는 온갖 야유 속에서 혼자 항변하던 동오는 문득 대만을 보았다. 대만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옆자리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복수에 성공해 격하게 기쁜 얼굴이었다. 내가 어쩌다가 저 얼굴에 넘어가서…. 동오는 기가 막힌데 대만은 능청스럽게 눈물을 닦는 척하며 말했다.

「뭐 괜찮아. 지금은 베스트 프렌드니까.」

베스트 프렌드가 아니라 보이 프렌드 사이잖아, 대만아. 여전히 공세를 받고 있는 동오는 더욱 억울해졌다.

간단한 점심을 해결하고 그들은 어제에 이어 바르셀로나 대학으로 향했다. 오후 수업을 듣는 학생이 많은지 작은 트램이 만원이었다. 더 들어가면 압사당할 것 같은 느낌에 동오와 대만은 자전거를 대여해 타고 가는 것을 택했다. 요즘은 유럽에서도 공공 자전거 대여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어서 편해졌다는 동오는 유럽 생활에 완벽 적응한 것처럼 보였다. 대만은 방금 전 하숙집 멤버들에게 둘러쌓여 놀림을 받으면서도 꼿꼿하게 무고함을 주장하던 동오를 떠올렸다. 낯선 것을 싫어하는 녀석인데, 잘 지내서 다행이다. 이제는 한국으로 돌아가더라도 걱정을 덜 수 있겠다.

동오는 트램 시간에 맞추어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백팩 없이 더블팩만 메고 있었다. 수업이 없는 날인가? 아니면 사물함에 교재를 두고 다닌다거나. 어제 봤을 땐 아닌 거 같았는데. 대만이 현관을 나서는 동오에게 물었다.

「오늘 수업은 몇 시에 끝나?」

「오늘? 음, 사실 지나갔어.」

「뭐?!」

천하의 최동오가, 루틴이라면 죽어도 못 사는 최동오가 수업을 빠졌다고? 대체 언제? 몇 시 수업이었지? 굳이 오전에 있는 경기 일정을 잡은 걸 보면 그리 이른 수업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아닌가? 윌 일어날 때가 수업 시간이었나? 머리를 쥐어뜯기 일보직전인 대만을 보고 속으로 웃은 동오가 순순히 정답을 알려주었다.

「우리 바다 갔을 때. 그때 수업 시간이었어.」

「아….」

「잘 봐라. 사랑이 저렇게 사람을 또라이로 만든다.」

프리드리히가 동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 거 아니야. 동오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스페인어로 프리드리히의 말을 반박했다. 와, 저 얼굴에 저 목소리로 스페인어를 하니까 제법…. 대만은 침만 꼴깍 삼켰다. 대만은 동오를 흘긋 보았다. 다행히 동오는 아직 제가 무슨 상상을 하는지 눈치채지 못한 모습이었다. 대만이 다시 물었다.

「그럼 바로 연습 가?」

「음, 그렇지? 똑같이 여섯 시에 마치고 올 거야.」

「그럼 나도 같이 갈래.」

「어?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동오가 당황하며 시게를 보았다. 다행히 트램이 오기까지는 3분 정도 남아 있었다. 대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농구화를 챙겨 올 요량이었다. 대만이 다급하게 말했다.

「나도 구경할래. 스페인 농구가 어떤지 알아야 다음에 올림픽에서 마주쳤을 때 대응하지. 안 그래?」

「오, 올림픽 선수가 된다는 보장은 있고?」

마르코가 대만의 높은 포부에 휘파람을 불었다. 대만이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응수했다.

「내가 대학 리그에서 좀 잘 나가는 몸이시거든. 그래서, 나 가? 아니면 말아.」

「가, 가자. 코치님께 내가 말씀드려볼게.」

여기에서 안 된다고 하면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몰라 동오가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대만은 승자의 기분을 만끽하며 동오의 방으로 빠르게 올라가려다가, 중간에 터덜터덜 내려왔다. 모두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고 대만을 쳐다봤다. 대만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방금 전과 달리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농구화 숙소에 두고 왔다.」

그럼 그렇지. 동오는 한숨을 푹 쉬었다. 하숙 멤버들이 거실 따나가라 웃었다.


 

오전 수업은 결석, 농구 연습은 지각. 아주 환상적이었다. 이래저래 대만의 충동과 비위에 맞추어준 탓이었다. 그럼에도 이 녀석이 밉지 않은 이유는 뭘까. 아마 얼굴 때문이겠지. 이상하게 저 얼굴을 보면 복잡하게 얽힌 모든 심사가 말끔하게 풀어지다 못해 깨끗하게 소멸하는 느낌이 들었다.

동오는 코치와 감독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이미 동오의 친구가 한국에서 온다는 걸 알고 있었던 그들은 흔쾌히 견학을 허락해주었다. 아마 같은 농구선수라서 쉽게 허가가 난 듯하다. 동오는 멀찍이서 기다리고 있던 대만을 손짓해 불렀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다가가자 동오가 서로를 소개했다. 대만은 동오의 스패니쉬를 들으면서 또 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오, 최동오 스패니쉬 되게 섹시한데. 나중에 귀국해서도 한 번씩 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서로 악수를 할 때는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들은 감독을 따라 체육관으로 들어갔다. 바르셀로나 농구팀은 제3체육관을 사용한다. 국제 규격보다 조금 넓은 농구 코트에선 이미 연습이 한창이었다. 코치가 여분 농구화를 가지러 창고로 간 사이 동오는 라커룸으로 사라졌다. 졸지에 홀로 남겨졌지만 대만은 크게 무섭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타고난 사교성을 십 분 발휘해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슨 포지션이지?」

「슈터요.」

「아, 그랬지. 저번에 서류에서 봤다.」

대만은 스페인어가 서툴고 감독은 영어가 어색했기에 문장은 짧게 짧게 끊어졌다. 아, 이 사람이 서류를 확인했구나. 대만은 다시 물었다.

「동오는 좋은 선수인가요?」

질문의 의중을 파악하듯 감독이 눈썹을 꿈틀거리다가 물었다.

「그건 네가 더 잘 알지 않나?」

「스페인에서 요구하는 <좋은 선수>의 기준이 다를 수 있잖아요.」

대만의 말에 감독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틀린 말은 아니라고 했다. 다행히 동오는 이곳에서도 좋은 선수였다. 감정이 얼굴로 다 드러나는 것만 제외하면 팀 베팅을 할 줄 아는 플레이어라고 감독이 극찬했다. 무엇보다 3점 성공률도 다른 놈들보다 좋아. 농구에선 중요하지. 대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 녀석은 고등학생 때도 표정을 못 숨겼어요. 둘은 동시에 웃었다.

코치와 동오가 거의 동시에 돌아왔다. 대만은 농구화로 갈아신고 연습에 합류했다. 감독이 휘슬을 불어 종료를 알린 뒤 선수들을 집합시켰다. 감독은 스트레칭 중인 대만을 가리키며 말했다.

「초이 친구다. 같은 대학에서 농구 선수로 활약 중이지. 오늘만 잠깐 같이 연습하기로 했다. 외국의 플레이 스타일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적극적으로 임하도록.」

몇몇 놈들이 눈을 반짝였다. 대만의 일방적인 통보를 받은 날 멍 때리고 있는 동오에게 말을 걸었던 이들이다. 특히 안토니오가 열렬한 관심을 보냈다. 팀을 정하는 중에 대만에게 슬쩍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너 오기 전날에 초이가 얼마나 멍청해졌는지 알아?」

「멍청해졌다고?」

「그래, 날아오는 공을 못 보고 그대로 맞았다니까. 쌍코피가 아주 쫙 터지는데.」

안토니오가 양쪽 검지 손가락으로 쌍코피가 터지는 흉내를 냈다. 대만이 그 꼴을 보고 키득키득 웃었다.

「걘 항상 나한테 약해.」

「오….」

안토니오의 눈빛이 바뀌더니 의심에 찬 눈으로 대만과 동오를 번갈아 보았다. 아무래도 둘을 연인 사이로 판단한 모양이다. 정확하게 봤네, 새끼. 안토니오가 방금 전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랑 초이는 다른 팀이고 우린 같은 팀이었으면 좋겠다.」

「왜?」

「그래야 네가 미인계를 써서 초이를 방심시킬 거 아냐?」

오호라, 안토니오는 꽤나 짓궂은 사람이었다. 그 말에 대만이 웃기 무섭게 동오가 그들을 쳐다봤다. 허튼 얘기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게 느껴질 만큼 살벌했다. 어휴, 무슨 말도 못해. 안토니오는 엄살을 부리면서 대만에게서 떨어졌다. 대만이 조언했다.

「조심해, 저 녀석 은근 질투쟁이야.」

「올랄라, 저 젠틀맨이 질투쟁이라고?」

「그렇다니까. 지금도 봐. 너랑 얘기하니까 바로 쳐다보잖아.」

「오우, 이건 너무 심했다.」

키득거리는 둘을 보고 동오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 저 표정 정말 좋은데. 대만은 제가 다 나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진짜로 질투한 사람은 자신인데.

안토니오의 바람대로 동와 대만은 팀이 갈렸다. 반대로 안토니오는 동오의 팀이 되었다. 연습 경기 전 안토니오가 동오의 어깨에 팔을 걸며 경고를 주었다.

「초이, 정이 무슨 수작을 해도 절대 넘어가지 마. 미인계를 써도 쳐내라고. 이건 게임이니까.」

「아니, 무슨 미인계야.」

「올랄라, 초이, 네 애인이 얼마나 귀염둥이인데! 조심해, 모든 사내와 여자들이 네 적이니까.」

「애, 애인?!」

동오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목소리가 좀 컸는지 자기 팀은 물론 대만 쪽도 자신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급히 대만의 안색을 살피니 동오를 빤히 쳐다보면서 엉큼하게 윙크를 날렸다. 아무래도 미인계에 안 넘어가는 건 불가능할 거 같은데. 동오가 헛웃음을 짓는 사이 안토니오는 잔뜩 기가 죽어서 중얼거렸다.

「아니, 난 너와 정이 그렇고 그런 사이인 줄 알았지. 그런데 진짜 아무 사이 아니야?」

「경기에 집중해, 안토니오.」

동오는 조용히 경고한 다음 도열했다. 공교롭게도 동오의 바로 앞이 대만이었다. 비슷한 포지션이라 그런 건가. 아니면 일부로 여기 섰나. 동오가 심각한 표정을 짓자 대만이 샐쭉하게 웃으면서 입만 벙긋대 말을 걸었다.

<즐겨, 최동오.>

진짜. 저 녀석을 어떡하면 좋지. 동오는 좋은 한편 곤란해졌다. 경기는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미인계에 걸려든 것 같다. 감독이 호루라기를 불었고, 공이 허공에 떴다. 양팀의 센터가 동시에 공을 잡았다. 양쪽에서 가해지는 힘을 견디지 못한 공이 다시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이쪽에는 점프력으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포워드가 있다. 그가 민첩하게 공을 낚아채 포인트 가드에게 건넸다. 포인트 가드가 크게 공을 튕겼다. 진짜 게임이 시작되었다.

내심 동오는 궁금했다. 자신이 여기에서 스페인의 농구를 익히는 동안, 선수촌에서 대만의 플레이는 얼마나 성장했을까. 지금 그의 플레이가 대만에게 먹힐까. 아니면 대만의 플레이가 그를 농락할 것인가.

<즐겨, 최동오.>

그러나 대만이 즐기라고 했기 때문에, 동오는 마음을 비우고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승패에 관계 없이, 서로의 실력과 플레이 스타일을 보고, 나의 성장을 확인하고, 보완점을 찾고, 순수하게 농구를 즐길 수 있는 지금을.

대만 쪽 포인트가드는 산왕 시절 낙수와 비슷한 전법을 구사하는 선수다. 한마디로 상대 가드를 집요하게 압박해 턴오버를 유도하는 스타일이다. 그에 반해 동오의 포인트가드는 경험이 부족한 1학년이다. 압박에 당황한 1학년은 돌파가 아닌 패스를 선택했다. 농구는 팀 스포츠이니 스스로 해결이 불가능할 때는 아군의 도움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파울을 받더라도 뚫고 나가는 쪽이 좋았다. 마음이 급한 탓에 패스가 정확하지 못했다. 센터의 왼쪽으로 빗겨 나가는 공을 대만이 낚아챘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상대편으로 넘어갔다. 대만은 현란하게 양손으로 드리블을 치며 골대로 향했다. 이쪽의 포워드가 패스를 유도하기 위해 앞쪽에서 손을 내뻗었다. 그러나 대만은 막아봤자 소용이 없다. 그는 골대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3점 라인, 혹은 그 너머에서도 득점할 수 있는 사람이 정대만이다.

대만은 공을 빼돌릴 것처럼 굴다가 자세가 잡히자마자 뛰어올랐다. 상대의 손은 공을 긁지 못했다. 대만은 고점에 다다르기 전에 공을 놓았다.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공이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경기가 시작된 지 5초 만에 대만 쪽이 3점을 쌓았다.

그러나 동오의 팀은 바로 수성전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공격은 모두 스코어러인 3학년에게, 나머지는 모두 일대일 마크. 당연히 대만의 상대는 동오가 되었다. 같은 팀이 된 후로 치열하게 대만을 분석한 동오는 그가 슛을 쏘기 전 왼발로 먼저 브레이크를 잡는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 다음부터 대만의 슛은 간간히 막히기 시작했다. 50초 만에 점수 차가 16대 24가 되었다. 언제든지 역전할 수 있는 점수차. 동오의 팀은 기세등등해지고, 대만의 팀 역시 수성전으로 들어갈 조짐을 보였다.

하지만 지역 방어만 하는 게임은 시시하지. 대만은 호기롭게 웃었다. 자고로 북산의 스타일은 난타전과, 계략, 술수이다. 한 점이라도 더 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파울이라도 심판이 못 보면 그만. 선수가 항의하면 흐름이 끊기니 이쪽에는 더 유리하다.

대만은 제 앞을 가로막은 동오를 가만히 바라봤다.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순수한 호승심이 그 눈동자 안에서 일렁댔다. 대만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다가, 눈웃음을 지었다. 뭐지? 최동오의 몸이 순간 굳은 틈을 타 대만이 그를 제쳤다. 동오는 놀라 심판을 바라봤지만 심판은 파울을 선언하지 않았다. 애초에 파울이 될 수도 없었다. 그 사이 대만은 이미 3점 라인까지 다가갔다. 그의 야투율을 경계한 이들이 손을 높게 뻗었으나 대만은 가볍게 무시하고 라인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3점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상대가 당황하는 사이 대만은 가볍게 레이업 슛으로 2점을 추가했다. 허망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동오를 보면서 대만이 입으로 빠끔거렸다.

<그러게 한눈 팔지 말았어야지.>

보기 좋게 미인계에 당했다. 동오는 진심으로 분함을 표출했다.

결과는 간발의 차로 동오 팀의 승리였다. 정대만은 최선을 다했으나 지금은 스페인 농구가 한국보다 우위였다. 그러나 그 수많은 점수의 과반을 대만이 쌓았다는 점에서 그 역시 대단한 선수였다. 특히 한참 먼 거리에서 공을 투포환 던지듯 쏘아 성공시키는 장투는 스페인 선수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는지 다들 감탄만 했다.

훈련이 끝난 뒤에는 으레 그렇듯 회식이 있었다. 스페인 회식이 궁금했던 대만은 뻔뻔하게 합석했다. 다들 동오의 친구라고 제지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대학 뒤쪽에 있는 바로 향했다. 단골 가게인지 사장은 <저 돼지들 또 왔군>이라는 표정으로 안주를 준비하러 사라졌다. 운동부인데다 서양인들이라 다들 먹성이 보통이 아니었다. 다들 뱃속에 강백호를 하나씩 키우는 것 같았다. 어디 가서 먹성으로는 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대만은 20분 만에 깜빠뇨 20인분을 해치우는 농구선수들을 보면서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장은 이미 달관한 듯했다.

「한국 선수들은 다 그렇게 쏘냐?」

「어, 다는 아닐걸? 심심찮게 나오는 장면이긴 하지만.」

「왜 그렇게 던지는 거야?」

「왜냐니, 이기려면 뭐든지 해야지. 그리고 그렇게 던지는 게 무효라는 규칙도 없잖아?」

대만의 당연하단 듯한 질문에 일부 슈터들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조만간 바르셀로나 대학 팀에서 장거리슛이 유행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거의 죽을 상이었던 사장은 감독이 카드를 꺼낼 때 즈음 되어서야 그나마 인상을 폈다. 그때까지도 농구부원들은 맥주를 각 세 병씩 들이키고 있었다. 누가 서양인들은 한두 잔 정도 가볍게 즐긴대. 이거 완전 고주망태가 따로 없는데. 대만은 주는 대로 받아먹다가 알딸딸하게 풀어져선 제 어깨에 기댄 동오를 째려봤다. 저 얼굴이 적당히 붉어져서 헤실대고 있으니 꽤 볼 만 했다. 저 얼굴 본 사람이 여기에서 몇 명 정도 될까. 대만은 속이 쓰린 기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정. 이제 시작인데 벌써 가려고?」

「어? 아냐 아냐. 잠깐 바람 쐬러 가는 거야. 겸사겸사 이 녀석 좀 깨우고.」

대만이 제 어깨에 얹어 놓은 동오를 가리키며 말했다. 안토니오가 웃으며 농담했다. 바람 쐬러 간다면서 키스나 하지 마라~. 대만은 저도 모르게 왁 하고 성질을 냈다. 할 거 다 했으면서 왜 이렇게 키스라는 말은 간지러운지.

스페인의 밤거리는 의외로 어두운 편이었다. 화려한 네온 사인이 없는 까닭이었다. 대신 문을 열어놓은 가게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은은한 불빛 때문에 더욱 서정적으로 느껴졌다. 아쉽게도 날이 흐려 별은 보이지 않았지만 대만은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성질이 난 최동오도 보고, 농구도 하고, 나름 데이트다운 데이트도 한 하루다. 딱 하루만 이렇게 더 놀다 가고 싶은데.

뒷주머니 속 핸드폰이 짧게 올렸다. 대만은 동오를 벤치에 내려놓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곧 대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소집일이 하루 앞당겨졌다. 내일, 대만은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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