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수 없는

동오대만

비행중 by 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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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z3님(@z3_1114) 회지에 축전으로 드렸던 글입니다

  • 회지 판매 완료 시 삭제 예정입니다

  • 던전물 현대판타지 AU

돌아갈 수 없는

「자, 최동오야. 여기가 어딜까.」

「글쎄, 나도 통 감이 안 잡히는데.」

대만과 동오는 어떤 문 앞에 서서 멀뚱히 문패를 쳐다봤다. 문패에는 알 수 없는 말이 적혀 있었다. 문자는 분명 영어인데, 읽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도 우스꽝스러운 발음이 나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세계어 기능 있는 사람을 데려오는 건데. 대만이 뒤통수를 벅벅 긁으면서 투덜거렸다. 동오는 흠, 하고 팔짱을 낀 채 문패를 한참이나 쏘아보다가 무심코 말했다.

「혹시 라틴어 아냐?」

「라틴어?」

대만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아니, 대한민국 한복판에 나타난 던전에서 웬 라틴어? 사람이 로마에 왔으면 로마 법을 따라야지. 이러면 라틴어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 알고 진입하라는 거냐. 대만은 끝도 없이 투덜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동오는 문패 왼쪽 끄트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도 긴가민가했는데, 저 끝에 있는 문자 보니까 알겠다. 숫자야.」

「숫자면, 같은 방이 몇 개 더 있다는 거지?」

동오의 설명에 대만은 갑자기 침착해져선 물었다. 페어로 다닌 지 3년 째지만 동오는 여전히 갑자기 끓고 갑자기 식는 대만의 타이밍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그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대만은 더 골치 아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우리가 라틴어를 모르니 무슨 히든 스테이지인지 알 길이 없네. 나중에 다른 사람이랑 같이 와보기로 하고, 다른 스테이지를 찾아볼까?」

「음, 아니. 사실 어떤 곳인지 짐작이 가서.」

「짐작이 간다고? 너 대학교에서 라틴어 배웠냐?」

동오의 확신 없는 말에 대만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그럴 리가. 동오는 3년 동안 공략해온 던전의 특징을 고려했을 뿐이다. 이 던전은 사람들의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그들이 지금까지 본 영화, 드라마, 소설, 만화가 베이스가 되고, 그들의 경험이 스테이지로 구현된다. 그렇다면 이 히든 스테이지 역시 그들의 기억을 재료로 만들어진 곳이리라. 동오는 대만을 돌아보며 물었다.

「너 혹시 『해리포터』 읽어본 적 있어?」

뜬금없이? 대만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초등학생 시절 또래 사이에선 『해리포터』 광풍이 불었다. 안 읽어봤으면 말도 섞지 말라는 말이 나올 만큼 인기가 대단했다. 대만 역시 어린 시절 『해리포터』를 읽으면서 퀴디치에 대한 로망을 안고 자란 사람이다. 그런데 왜 여기에서 갑자기 그게 나와? 의문 가득한 눈초리로 묻자 동오가 설명했다.

「거기에 보면 필요의 방이 나오잖아. 그거 아닐까?」

「아아~. 하긴 던전은 그런 부분이 많으니까. 그런 거라면 화살이나 좀 나와줬으면 좋겠네. 나 이제 열 발밖에 안 남았어.」

대만이 텅 빈 자신의 화살꽂이를 가리키며 투덜댔다. 대만이 쓰는 화살은 일반 양궁용이나 국궁용이 아닌 컴파운드라 기껏 화살을 구해도 규격이 맞지 않아 버리기 일쑤였다. 그냥 남들 쓰는 거 쓰라고 주변에서 타박을 해도 이게 손에 맞아서 어쩔 수 없다고 항의하다가, 동오에게 쫄래쫄래 다가가 귓속말했다. 사실 그냥 이게 더 세서 그래. 사정거리도 길고 파괴력도 석궁 수준이고. 그러면 그냥 석궁을 쓰는 게 더 낫지 않나 싶었지만 장전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답을 듣고 그냥 대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로 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게 나온다면 뭐가 나왔음 좋겠냐?」

「글쎄. 일단 중형 몬스터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동감. 피 뒤집어 쓰고 귀환하긴 싫다.」

대만은 찝찝한 표정을 지으며 왼쪽 문고리를 잡았다. 동오도 따라 오른쪽 문고리를 잡았다. 셋 세면 당긴다. 하나, 둘, 셋! 둘은 동시에 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후텁지근한 공기. 사람들의 환호성. 농구화가 바닥과 마찰하는 소리와 드리블 소리. 곧게 내뻗는 팔과 뒤따라오는, 골이 들어가는 소리.

대만과 동오는 그 자리에 붙박인 채 서 있었다.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리자 희비가 엇갈렸다. 붉은 유니폼을 입은 소년들은 고성을 지르며 서로를 부둥켜 안은 반면, 하얀 어웨이 경기복을 입은 사람들은 싸늘한 분위기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곧 열 명의 소년이 서로를 마주본 채 정렬을 하고, 각자 다른 분위기와 공기를 안고 퇴장했다.

경기장의 불이 꺼진 뒤에도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표백제를 들이부은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얘져 뭔가를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제3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자신의 청춘이 낯설기만 했다. 전생도 아니고, tv 드라마 한 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는 분명 심장이 쿵쾅대는 것 같았는데. 왜 이제는 아무 느낌도 나지 않을까. 대만은 불편한 티를 숨기지 않고 중얼댔다.

「설계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취향 한 번 더럽네.」

「…저때 어땠어?」

「어땠냐고?」

동오의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대만은 오랫동안 기억에 잠겼다. 고작 4년 전, 방금 전 눈앞에서 보기도 했던 추억인데 감정을 불러내는 게 힘들었다. 저때는 진짜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는데, 이제는 무엇 하나 제대로 쥐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골 하나, 득점 하나로 환호하고 웃던 농구선수 정대만은 죽었다. 어느 새 그는 사는 게 목표인 헌터 정대만이 되었다. 대만은 그것에 유감을 가진 적이 없었다. 가끔 아, 농구하고 싶다, 고 말하지만 농구선수로 돌아간 적은 없었다. 던전 공략 외에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기에.

「이렇게 보니까 깨달았는데, 나는 그때…. 화나기도 했지만 재밌었던 것도 같아.」

「재밌었다고?」

대만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누가 봐도 화를 주체 못하는 표정인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서 동오는 앳됨을 발견했다. 겨우 스물 네 살. 사회에 뛰어들기엔 어렵다는 말을 듣는 나이. 그래, 우리는 여전히 어리다. 어쩌다가 우리는 순수하게 기뻐하고 슬퍼하던 감각을 잃어버린 걸까. 저때는 정말 세상을 잃은 기분이었는데, 왜 지금은 네가 내 곁에 있는 게 가장 큰 행운으로 여겨지는 걸까.

「그게…. 그렇게 필사적으로 뛰었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던 거 같아서.」

「그으래. 밥먹듯이 이기던 팀에 있어서 좋았겠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농담이다 인마.」

대만이 팔꿈치로 동오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대꾸했다. 장난스러운 분위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묘한 우울을 포착한 동오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어쨌든 여기에 우리가 찾는 건 없는 거 같아. 다른 데로 가 볼까?」

대만은 동오의 손길에 스테이지 밖으로 나오면서 생각했다. 아니, 저기에 우리가 두고 온 것이 있다. 우리가 애타게 찾던 게 바로 저것이다. 실컷 웃고 울 수 있었던 순간의 감각. 대한민국 각지에 나타난 던전은 하루아침에 일상을 무너뜨렸다. 모든 던전을 공략해도 이전으로 돌아가진 못한다. 우리는 그 기쁨을 잃어버렸으므로.

그래도 이 망해버린 세상에 한 가지 위안거리를 찾자면.

네가 내 곁에 있다는 거야.

대만은 동오의 손을 꽉 잡았다. 돌아본 히든 스테이지의 팻말은 이제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바뀌어 있었다.

<기억의 방 no.6>

「동오야.」

대만이 머리를 기울여 어깨에 기댔다. 동오는 가만히 걸음을 옮기며 대만의 말을 들었다.

「너는 사라지면 안 돼.」

동오는 대만이 은근슬쩍 잡은 손을 고쳐 잡으며 속으로 대답했다. 사라지지 않아. 나는 너를 두고 떠나지 않아. 지금 내가 손에 쥔 유일한 온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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