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 = MA

우성명헌

비행중 by 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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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팽이님(@spinning_09) 회지에 축전으로 드렸던 글입니다

  • 회지 판매 완료 시 삭제 예정

 

F = MA

 

 

 

 

산왕공업고등학교. 농구 명문 고등학교로 유명하지만 강원도 권에서 가장 성적이 높은 곳이기도 하다. 원래 공고와 상고가 엘리트 학교로 유명하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산왕공고는 말 그대로 문무양도의 학교였다. 그러나 학업과 스포츠 성적이 우수하다고 하여 모두가 양쪽 모두에 재능이 있는 건 아니었다. 이명헌은 신입생 정우성의 중간고사 성적을 보고 까무러칠 뻔했다. 실제로 신현철은 뒷목을 잡았다. 이런 성적은 초중고를 통틀어 처음이었다. 이 놈은 모든 머리를 농구에 올인했나? 우성이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그래도 저 이번에 나름 노력했는데요.”

“농구 머리 10분의 1만 써도 이 성적은 안 나오겠다.”

“처참하네.”

지나가던 낙수는 우성의 성적표를 보고 짤막하게 말했다. 누구는 성적표에 비가 우수수 떨어진다는데 이놈은 무슨 양갓집 규슈인지 ‘양’과 ‘가’가 빼곡했다. 그나마 봐줄 만한 것은 국어 성적이었다. 그것도 ‘우’는 아니라 ‘미’였지만. 심지어 전공 과목인 기계설계는 ‘가’였다. 어디 가서 공고 다닌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결과에 선배들은 할 말을 잃었다.

현철과 낙수의 잔소리에 우성이 어깨를 움츠렸다. 선배들에겐 유감이지만 정우성은 태어나 처음으로 공부라는 것을 해봤다. 이렇게 진득하게 책상에 앉아 있었던 것도(그래봤자 고작 하루 세 시간이었다) 인생 최초였다. 그러나 공부는 덜 떨어지는 놈들과 하는 농구 시합보다 더 재미가 없었다. 아무리 연필을 손에 쥐고 굴려도 골은 들어가지 않았고, 문제를 들여다봐도 길이 보이지 않았다. 시험 문제를 상대로 일대일을 신청하는 건 바보짓이었다. 모든 게 명쾌하게 떨어지는 농구와 달리 공부는 정답지가 나오기 전까지 이게 맞는지 아닌지 알 길이 없었다. 우성이 공부에 흥미를 잃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연필과 책에서 손을 떼고 농구공만 죽어라 튕긴 결과, 명헌은 다음과 같은 진단을 내렸다.

“기말고사 성적도 이러면 전국대회 출전 불가다영.”

“네에?”

우성은 기겁을 했다. 농구랑 공부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성적 가지고 출전 여부를 결정해? 우성은 억울해서 항변하고 싶었지만 그의 앞에 있는 2학년 선배들은 모두 전교권에서 노는 사람들이었다. 다섯 명 중 제일 머리가 나쁘다는 성구도 입학 이래 전교 50권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우성의 사고방식이 더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들은 산왕공고, 문무양도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는 학교의 학생이자 농구선수이다. 농구로도 학업으로도 남에게 뒤처지면 안 된다. 그게 그들의 방식이었다. 선배들이야말로 저 돌머리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낙수가 말했다.

“역시 시험 기간 일주일 전에 우리가 들러붙어서 어떻게든 낙제는 면하게 해줘야 하나.”

“저놈이 공부를 안 한 건데 우리가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허얼. 저 없으면 전국 우승 힘들 텐데요.”

“너 없던 작년이랑 재재작년에도 산왕이 이겼어영.”

명헌은 그 한마디로 우성의 칭얼거림을 차단했다. 우성은 입을 꾹 다물고 선배들을 노려봤다. 물론 눈 하나 까딱하는 사람은 없었다. 성구와 동오도 이번만은 절대 봐줄 수 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미간에 내천 자를 새겼다. 진짜 내 편이 없다고? 여기에서? 하늘과 땅이 동시에 꺼지는 기분이었다. 우성은 절대 물러날 수 없었다. 체육특례생으로 입학한 농구 명문인데 낙제점을 받아서 출전 정지를 받았다? 광철이가 죽어라 놀릴 거다. 씨이, 이러는 게 어디 있냐고. 우성은 냅다 명헌을 끌어안고 갖은 떼를 다 썼다.

“명헌이 형 그럼 형이 저 좀 도와주세요 어차피 같은 전공이잖아요 산왕의 귀여운 에이스가 이대로 고교 인터하이 데뷔전을 못 치르게 손 놓고 구경할 수는 없잖아요 네?”

정우성은 래퍼에 빙의해 숨 한 번 안 쉬고 우다다 뱉어냈다. 싸늘한 선배들의 마음을 돌리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다행히 우성은 보는 눈이 정확한 편이었다. 명헌이 먼저 2학년 주전에게 눈짓을 보냈다. 다섯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아싸, 명줄이 제대로 일을 한다. 우성은 한시름 놓았다. 역시 형들은 나를 너무 아끼고 사랑하는 듯.

“우성.”

“네.”

“앞으로 연습 끝나고 3학년 기숙사 휴게실로 와영. 일대일 강의를 해주겠어영.”

“명헌이 형이요?”

명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성은 속으로 활짝 웃었다. 명헌이 형이랑 단둘이 과외라니. 흔한 로맨스물 클리셰 아닌가. 그러나 정우성의 세상은 리얼 다큐멘터리였다. 그의 앞에 예정된 것은 로맨스가 아니라 강행군이었다.

 


 

우성은 교과서에 고개를 처박았다.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지났는데 머리가 멍했다. 농구 전술이나 파울 규칙이면 모를까 이걸 다 머릿속에 집어 넣으라고요? 차라리 드리블 200회나 3점슛 200회가 더 낫겠다. 3점슛은 던지는 대로 들어가기라도 하지 이건 뭐 뚫어져라 쳐다봐도 답을 적는 족족 빨간 줄이 쫙 그어진다. 명헌의 딱밤은 덤이었다.

“우성, 집중해영.”

“명헌이 형 저 포기할래요.”

“포기하면 시합 못 나가영.”

“네에.”

우성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다시 문제를 보았다. ‘윗글의 밑줄 친 부분이 틀린 이유와 올바른 표현이 바르게 짝지어지지 않은 것은?’ 우성은 제시문을 좀 더 자세하게 훑었다. 1번은 주어와 술어의 호응이 맞지 않아서 이렇게 고치는 게 맞고, 2번은 부자연스러운 표현을 사용했고, 3번은 능동 표현을 써야 하는 곳에 피동 표현을 썼네. 5번은 높임이 잘못되었는데 시제 이야기를 하고 있네. 그러면 답은 당연히 5번!

호기롭게 5번에 동그라미를 쳤더니 다시 딱밤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또 왜요! 우성이 작게 항의했다. 명헌은 밑줄 친 부분과 5번을 연필 끝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5번은 왜 틀렸지영.”

“높임이 잘못되었는데 시제가 틀렸다고 하잖아요. 봐요, 아버지가 주체인데 ‘께서’를 안 썼잖아요.”

“우성, 이 말을 듣는 사람이 누구지영.”

“할아버지요. 아, 설마 압존법 때문에 맞은 거예요?”

명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 요즘 누가 압존법을 써요. 우성은 머리를 부여잡고 낑낑댔다. 명헌은 우성을 다그쳤다.

“하지만 교과서에 나와 있잖아영. 1학년 국어 선생님이 이런 문제를 자주 내영. 작년에도 이거 때문에 틀린 사람 많아서 단체로 항의하러 갔는데 정정 안해줬어영.”

“와 선생님 진짜 너무하시네.”

우성의 입술이 댓발 튀어나왔다. 기출 문제집에 들어갈 것처럼 몸을 구부리던 우성이 다시 몸을 빳빳하게 펴며 물었다.

“아, 그럼 정답이 뭐예요?”

“4번이에영.”

“왜요?”

“4번에 보면 ‘중의적인 문장’이라고 나와 있지영? 거기까진 맞아영. 그런데 고친 문장에도 중의적인 표현이 있어요. ‘나와 동생이’ 삼촌을 만난 건지 ‘내가’ 동생과 삼촌을 만난 건지 구분이 안 가잖아영.”

우성은 명헌이 짚어준 대로 다시 문장을 보았다. 이상하게 방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오류가 지금은 또렷하게 눈앞에 들이밀어졌다. 아, 그렇네. 우성은 뒤통수를 긁으며 5번에 가위표를 하고 4번에 동그라미를 쳤다. 빨간 줄이 반원이 되었다. 1쿼터를 뛴 것처럼 텁텁한 숨이 저절로 나왔다. 우성이 몸을 쭉 펴며 말했다.

“이런 걸 어떻게 1분 만에 알아채는 거예요. 진짜 대단하다.”

설마 내년에도 낙제점을 받아서 주전으로 출전할 수 없는 건 아니겠지? 불안감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명헌이 우성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연필 끄트머리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우성.”

“네.”

“성적을 단기간에 올리는 방법을 알려줄게영.”

성적을 단숨에 끌어올리는 방법? 우성이 눈을 반짝이며 상체를 기울였다. 지금 우성에게 그 무엇보다 필요한 기술이었다. 명헌은 비급을 알려주는 도사처럼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따라 몸을 기울였다. 이마가 맞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명헌이 우성에게 물었다.

“우성, 처음으로 덩크에 성공한 게 언제였어영?”

“덩크요?”

공부 얘기하는데 웬 농구? 우성은 기억을 더듬었다. 처음 아버지와 일대일을 한 것이 4살 때. 그리고 어린이용 골대에서 처음으로 덩크에 성공한 게 초등학교 3학년 때니까.

“열 살 때요.”

“성공할 때까지 얼마나 연습했어영?”

“그야 엄청 많이 했죠, 셀 수 없을 만큼요! 매일 최소한 100번은 골대로 달려갔을 걸요?”

여덟 살에 우성은 처음으로 몸을 띄워 덩크를 시도했다. 당연하지만 실패했다. 우성에겐 아직 그만한 기술과 경험이 없었다. 아버지는 골대 앞에서 나자빠지는 우성을 보고 허허 웃다가 점프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코트를 앞꿈치로 밀어낸다는 느낌으로. 누군가가 내 정수리에 실을 달아 쭉 끌어올린다는 듯이. 그날 저녁 아버지는 아이한테 위험한 거나 가르친다며 어머니에게 바가지를 박박 긁혔다.

우성은 아버지의 표현을 가슴에 새기고 그 감각을 깨우기 위해 매일 아침저녁으로 골대를 향해 도약했다. 기억은 제대로 나지 않지만 비디오가 남아 있었다. 비디오 속 우성은 드리블을 하며 뛰어와 도약했다가 한참 모자란 높이에 공을 넣지도 못하고 고꾸라지길 반복했다. 그 다음에는 골대 근처에 닿는 데에 성공했으나 공이 들어가지 않았다. 우성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일어났다. 이제 90개 째야! 열 개만 더 해보자! 화면 밖에서 아버지가 말했다. 아마 손도 흔들었을 거다. 우성은 울지도 않고 결연한 표정으로 공을 주워 다시 하프라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드리블, 도약, 슛!

95번 째에 우성이 처음으로 덩크에 성공했다. 골대에 두 손으로 매달린 우성을 보고 아버지가 흥분해 카메라를 내팽개치고(그 당시 가격으로 매우 비싼 비디오 카메라였다. 당연히 나중에 어머니에게 물건 아낄 줄 모른다고 혼이 났다) 달려갔다. 우성이! 우리 아들! 해냈어! 굴러다니는 카메라 화면에는 잡히지 않지만 우성은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자신을 꽉 껴안던 아비저, 가쁘던 호흡, 따가운 무릎과 손, 주체하지 못하고 쿵쾅대는 심장. 아버지는 우성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느낌이야. 잊지 말도록 해. 그리고 오늘 덩크를 성공하기 위해 네가 뛰어오르고 깨지던 순간들도. 너의 노력도.”

우성은 명헌을 보았다. 명헌은 표정 하나 없이 노트에 수식 하나를 쓰고 있었다. 저항과 전류의 관계에 관한 수식이었다. 이것을 교과서를 보지 않고, 갑자기 쓸 수 있을 만큼 외울 수 있게 될 때까지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 상대를 보지 않고도 안정적인 패스를 줄 수 있도록 연습한 것처럼, 이 수식도 그렇게 연습을 했겠지. 그 결과가 지금 우성의 눈앞에 있었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완성한 하나의 식.

“공부도 마찬가지영. 당장 안 되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손 놓으면 결국 아무것도 풀 수 없어영. 풀릴 때까지, 외울 때까지, 그래서 이 지식과 풀이 방법이 내 몸의 일부가 될 때까지 노력하는 수밖에영. 슛이나 덩크, 패스처럼영.”

“저 완전 감동했어요.”

“헛소리 그만 하고 문제나 마저 풀어영. 모의고사 반타작 나오기 전까지 안 보내줄 줄 알아영.”

“방금 완전 감동벅인 파트였는데….”

우성은 눈꼬리에 눈물을 달았다가 명헌의 냉엄한 말에 쏙 집어넣었다. 그래도 이제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다. 덩크를 연습하듯이 공부도 연습하기. 우성은 다시 연필을 들고 천천히 문제를 풀었다.

그날 우성이 낙제점을 면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다섯 시간이었다. 명헌은 타이머에 찍힌 숫자를 보더니 중얼거렸다.

“우성, 생각보다 돌머리였군영….”

“형!”

아무래도 아동기와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농구에 몰빵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2학년 인터하이가 끝나고 미국으로 가기 전까지, 우성이 낙제하는 일은 없었다. 대체로 아슬아슬한 턱걸이였지만 미국 유학을 위해 1학년 2학기부터 영어 공부를 빡세게 한 덕분에 그 과목만은 준수한 성적을 받았다. 잘 하고 와, 새벽에 전화하면 죽인다, 거기에서도 낙제는 하지 말고. 형들은 장난 반 진담 반이 섞인 인사로 공항에서 우성을 배웅했다. 그들이 마지막 간식을 사주자며 편의점으로 몰려갔을 때 우성은 명헌과 단둘이 남아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명헌은 계속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다.

형이, 이렇게 작아 보였던가. 항상 그의 에이스이자 믿음직스러운 주장이 아무 말도 없이 서 있으니 위축되어 보였다. 자신을, 조금이라도 걱정해주고 있을까. 말은 가끔 험하게 하고 무섭게 타이를 때도 있었지만 명헌은 3학년 중 우성을 제일 많이 아꼈다. 그러지 않았다면 돌머리 우성을 매 시험 기간마다 붙잡고 강의를 해주지 않았을 테니까.

“명헌이 형.”

우성이 부르자 명헌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우성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얼마나 들여다봤는지 끝이 너덜너덜했다. 우성은 한 페이지를 죽 찢어 명헌에게 건넸다. 처음으로 그가 외운 수식이 적힌 그 페이지였다.

 

F = MA

 

“안 되더라도 될 때까지. 그쵸?”

처음 농구를 배웠을 때처럼. 형이 처음으로 공부를 가르쳐주었을 때처럼. 명헌이 그제야 옅은 미소를 지었다.

“평생 철없을 줄 알았는데, 이제 좀 어른스러워졌네뿅.”

“형 진짜 가끔 분위기 초 친다는 거 알죠.”

안내 방송이 울렸다. 이제 우성은 저 비행기를 타고 타지로 떠난다. 아마 지난 인터하이 패배보다 더 충격적인 경험을 많이 할 것이다. 수없이 깨지고 부서지겠지. 그러나 우성은 두렵지 않았다. 도전이야말로 그의 인생. 노력이야말로 그가 삶을 뚫어내는 방식이었으니까. 그건 농구와 이명헌이 정우성에게 쥐여준 소중한 유산이었다.

“야 정우성! 아직 안 들어갔지!”

“네에!”

“이게 비행기 놓치면 어쩌려고 아직도 출발을 안 해?”

“마지막까지 잔소리할 거예요?”

현철이 우성의 품에 간식을 한아름 안아주었다. 성공하기 전에 돌아오면 죽어! 누군가가 주먹을 휘두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덕분에 우성은 활짝 웃으며 떠날 수 있었다.

 


 

“명헌이 형 저 좀 도와줘요….”

“미국 대학 문제를 내가 무슨 수로 풀어용. 제정신이에요?”

“그치만 이번 학기에 또 C 아래로 나오면 출전정지라고요.”

우성이 우는 소리를 냈다. 수화기 너머에서 이 시간에 한국에 전화하는 새끼가 대체 누구냐고 일갈하는 송태섭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른 방에서는 어느 미친 놈이 이 새벽에 전화를 하느냐는 정대만의 짜증 섞인 타박과, 무시하고 끊으라는 동오의 냉정한 말이 들렸다. 명헌은 한숨을 쉬었다. 우성, 정말 돌미러였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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