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난 해 질 녘 노을처럼
태웅대만
z3님(@z3_1114)님 태웅대만 회지 『꽃이 필 때까지』에 드렸던 축전입니다
해당 회지 발간 이후 내릴 예정입니다
제목은 ‘자전거 탄 풍경’의 노래 ‘너에게 난 나에게 넌’에서 따왔습니다
너에게 난 해 질 녘 노을처럼
농구 시즌이 끝났다. 대만이 먼저 북산 단체 채팅방에 글을 올렸다. 날도 더운데 산골에 가서 2박 3일로 놀고 오자는 내용이었다. 그의 친척이 강원도 어디 시골에서 농사를 하는데, 여름에 시원해서 지내기 좋단다. 숙박비가 공짜라는 것이 무엇보다 농구부의 마음에 들었다. 치수와 준호는 동행이 확정된 상태에서, 태섭과 백호, 호식이, 달재, 신입 두 명에 마지막으로 태웅까지 참가 의사를 밝혔다. 너도 가게? 태섭은 태웅의 가고 싶다는 말에 놀란 눈치였다. 태웅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섭이 신기하단 듯 중얼거렸다. 넌 왁자지껄한 게 취향이 아니니까 남을 줄 알았는데. 그와 달리 대만은 안 될 게 뭐가 있냐며 호쾌하게 끼워주었다.
대만의 친구가 아주 많이 온다는 소식에(사실은 친구라기보단 농구부 후배들이지만) 대만의 작은할아버지는 아예 별채를 내주었다. 시끌벅적하고 혈기 왕성한데다 한 덩치하는 운동부 남고생을 다 집어 넣어도 남을 만큼 커다란 별채였다. 대만이 보내준 사진을 보고 백호가 감탄했다. 대만군, 진짜 부잣집 도련님이구나. 대만은 그렇게 잘 사는 집 아니라고 끝끝내 부정했다.
티를 내지 않을 뿐 태웅의 집도 별채를 몇 개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태웅이 그곳에 가는 일은 별로 없었다. 휴가철이 되어도 그는 바다나 산으로 놀러가기보단 뜨거운 볕 아래에서 농구하는 걸 좋아했다. 그런 곳에는 낡은 야외 코트조차 없었다. 애초에 태웅은 완벽한 인도어파였다. 집 근처도 아니고 먼 곳으로 돌아다니는 건 취향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실내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었다. 농구에 모든 에너지를 다 쏟는 사람처럼 태웅은 코트를 떠나면 늘 잠만 잤다. 태웅의 가족은 그러려니하며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 그래서 저녁 식사 시간에 태웅이 다음 주에 농구부 애들과 시골로 놀러간다고 말했을 때, 모든 가족이 동그란 눈으로 태웅을 쳐다봤다. 아버지는 숟가락까지 떨구었다.
호기심 많은 누나는 그로부터 놀러가는 날까지 태웅을 붙잡고 조잘댔다. 어디를 가느냐, 누구누구 가느냐, 뭘 할 거냐, 웬 바람이 불었느냐. 태웅은 누나의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했다. 몰라, 아홉 명 정도, 몰라, 그냥. 제대로 된 대답은 아니었지만 누나는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즐겁게 놀고 오라며 용돈을 찔러 넣어주었다. 어머니는 비상시에 필요하다며 대만과 태섭의 연락처를 받아갔다. 그렇게 온 가족이 막내의 첫 여행을 위해 조용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행은 금요일 아침에 대만의 집 앞에 모였다. 대만과 치수가 차를 끌고 와 기다리고 있었다. 대만의 차는 4인승 소나타였고, 치수는 6인승 봉고차를 가지고 왔다. 대체 어디에서 저런 차가 났느냐고 하자 치수는 아버지에게 빌렸다고 말했다. 태웅과 호식, 준호와 신입생 하나가 대만의 차에 타고 나머지는 치수의 차에 탑승했다. 어떻게 가는지 아느냐고 준호가 묻자 대만은 내비게이션이 다 해줄 거라면서 큰소리쳤다. 그 대답에 탑승자 둘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태웅은 별 생각 없었다. 헤매든 말든, 목적지에 도착하기만 하면 된다. 태웅은 안전벨트를 매자마자 숙면에 들어갔다.이 좁은 데서 잘도 자네. 준호가 중얼거렸다.
우려와 달리 대만은 길 한 번 헷갈리지 않고 무사히 도착했다. 오히려 치수 네가 길을 잘못 들었다. 중간에 화장실이 가고 싶다는 백호 때문에 휴게소에 들어갔다가, 대만에게 알리는 것을 깜빡해 그만 놓치고 만 것이다. 그래도 어찌저찌 모두 대만의 작은할아버지 집에 모이는 데는 성공했다. 대만의 작은할아버지는 오래만에 보는 조카아들에 웃음꽃이 피셨다. 그는 가장 큰 별채로 일행을 안내했다. 짐을 풀고 마당에 모여 앉아 점심을 먹었다. 백숙을 세 그릇씩 해치우고 나니 햇볕이 한풀 꺾인 오후 4시가 되었다. 일부는 낮잠을 자고, 일부는 마당에 줄을 그어놓고 어디서 주워온 공으로 족구를 하고 있었다. 태웅은 잠깐 잤다가 족구를 구경하다가, 할 일이 없어 주변을 산책할까 했다. 털레털레 본채로 가자 툇마루에 앉아 작은할아버지와 대화하다가 태웅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태웅이 가까이 다가가자 대만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잘 됐다. 너 나랑 읍내에 좀 나가자. 장을 봐야 한다네.”
“네.”
“작은할아버지! 뭐 필요하다고 하셨죠?”
“돼지김치찜 먹을 거다! 술이랑 고기랑 잔뜩 사와라! 목살로!”
“네에! 가자, 태웅아.”
대만이 어깨에 걸친 손을 내려 자연스럽게 태웅의 손을 잡았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나는 계절이건만 대만의 손은 뽀송했다. 태웅은 손가락을 살며시 말아 조심스럽게 손을 잡았다. 대만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맞잡은 손을 허공에 크게 붕붕 흔들었다. 그 탓에 발박자가 조금 어긋났지만 그마저 즐거운지 계속 큭큭댔다. 태웅은 여전히 말없이 선배의 옆얼굴을 볼 뿐이었다.
대만은 자신의 차가 아닌 작은할아버지의 차에 시동을 걸었다. 올 때와 달리 이번에는 태웅이 조수석에 탔다. 읍내까지 30분 정도 걸리니까, 그도안 눈 붙이던가 해. 대만이 그렇게 말하며 액셀을 밟았다. 뭔가 덜컹거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차는 매끄럽게 출발했다. 태웅은 턱을 괴고 창밖을 쳐다봤다. 추수가 얼마 남지 않아 벼가 황금빛으로 익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바람을 따라 금빛이 너울거렸다. 창문 열어줄까? 대만의 물음에 태웅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창문을 확 내리자 후텁지근한 여름바람이 차 안으로 들어왔다. 시원하지? 대만이 태웅을 보면서 말했다. 태웅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잠들지는 않았다.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자면 안 된다는 걸 아는 나이는 아니었지만, 그냥 잠이 오지 않았다. 농구공도 아닌데, 대만이 옆에 있으면 오던 잠도 싹 달아났다.
좁은 시골길에선 속도를 마음껏 낼 수 없었다. 딱 30분이 되자 읍내 마트에 도착했다. 이 근방에 유일한 대형 마트라 그런지 사람으로 북적댔다. 대만은 카트를 끌고 익숙하게 장을 보기 시작했다. 자취를 한다더니 살림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대만은 목살과 삼겹살을 양껏 담은 다음(백호 흉을 보는 건 덤이었다) 주류 코너로 갔다. 아, 여긴 애기 출입금지다. 자기도 1년 전까지는 못 들어갔던 주제에 아저씨 같은 말을 하며 코너 입구에서 태웅을 기다리게 했다. 태웅은 아무 말도 않고 묵직하게 대만을 기다렸다. 기다리라고 하고선 대만이 태웅을 깜빡해 길이 엇갈리는 해프닝이 있었다. 대만이 헐레벌떡 태웅을 찾으러 왔을 때도 그는 그 자리에 붙박인 듯 가만히 있었다. 야 너는 선배가 안 오면 연락을 하든가 찾으러 다니던가! 대만은 툴툴대다가도 어디 안 간 덕에 빨리 찾았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꼭 제가 태웅의 보호자라도 된 듯한 태도였다.
이것저것 주전부리도 담고, 수박도 두 통 사고 나니 카트가 꽉 찼다. 영수증 길이를 보고 대만은 작은할아버지께 효도해야겠다, 는 말을 중얼거렸다. 운동부 남고생 아홉 명의 식비, 그것도 한 끼에 5인분은 거뜬히 먹는 놈이 끼어 있는 운동부 아홉 명의 식비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러나 여기엔 후배들과 놀러왔다며 신나서 이것저것 담은 대만의 탓도 있었다.
한껏 무거워진 카트를 둘이서 끌며 대만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트렁크를 열어 짐을 싣고 차에 탈 때까지는 모든 게 괜찮았다.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는데, 차는 부웅 소리만 낼 뿐 움직이지 않았다. 얼라리? 대만이 멍청한 소리를 내며 다시 시동을 걸었다. 이번에는 아예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대만은 급히 계기판을 확인했다. 기름이 떨어진 건 아니었다. 그러면 배터리가 방전되었나. 어쩐지 올 때 불안하더라니. 대만이 혀를 차자 조수석에 탄 태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쩌냐, 태웅아. 대만이 멋쩍게 웃었다.
“아무래도 차가 퍼진 것 같다.”
“퍼져요?”
“그러니까, 시동이 안 걸린다고.”
그제야 태웅도 사태를 파악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렇게 서 있으니 놀라서 털을 부풀린 고양이 같네. 태웅이 가득 찬 트렁크와 키가 꽂힌 차를 번갈아 보면서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떡하긴. 근처에 지나가는 차를 붙잡고 사정해야지.”
대만은 트렁크를 꽉 채운 짐을 다시 카트에 담더니 태웅을 데리고 길가로 나갔다. 마침 장날이었는지 꽤 큰 트럭 몇 개가 도로 위를 지나고 있었다. 대만은 그 차들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새하얀 트럭이 다가오자 손을 흔들며 가까이 다가갔다. 태웅이 놀라 옷깃을 붙잡았다. 대만은 아랑곳않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트럭 옆으로 가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네요, 달봉이 삼촌.”
“어어! 대만이 아니냐? 이야, 훤칠한 것 좀 봐라! 아주 남자가 됐어!”
머리가 희끗해지기 시작한 달봉 삼촌은 대만이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었는지 대만을 보고 활짝 웃으며 트럭을 멈춰 세웠다. 대만은 등 뒤에 바짝 붙어 있는 태웅을 가리키며 말했다. 고등학교 후배 태웅이에요. 이번에 방학 맞아서 농구부 애들이랑 놀러왔어요. 태웅은 여전히 말없이 고개를 꾸벅이기만 했다. 그래도 달봉이 삼촌은 대만의 후배라는 말에 호쾌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저 윗집 사는 달봉이 삼촌이다. 그래, 뭐가 또 문제냐?”
“아, 삼촌 눈치가 너무 빠르시네.”
대만이 멋쩍게 웃으면서 차가 방전되었다고, 작은할아버지 댁까지 태워다줄 수 있느냐고 부탁했다. 달봉이 삼촌은 안 될 게 뭐가 있냐며 마트 주차장 안으로 차를 끌고 들어갔다. 대만과 태웅은 장 본 것들을 하나씩 트럭 짐칸에 실었다. 설마 사흘 굶다가 왔냐는 달봉이 삼촌의 우스갯소리는 덤이었다.
태웅이 조수석에 타려고 문을 열자 대만이 짐칸에서 태웅을 불렀다. 대만은 장거리 사이에 앉아 짐칸을 두드렸다.
“너도 여기 타. 시원해.”
“그래, 좁은 데 말고 넓고 시원한 데 앉아라.”
대만의 권유를 뿌리치는 법을 태웅은 몰랐다. 태웅은 대만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곧 트럭이 부릉 소리를 내면서 느리게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 새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옅은 주황빛이 깔린 풍경이 그들을 느리게 스쳐 지나갔다. 대만은 쭉 뻗은 발을 까딱이며 오래 된 노래를 불렀다. 너에게 난 해 질 녘 노을처럼 한 편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태웅은 뭉게구름을 구경하다가 대만의 손 위에 자기 손을 겹쳤다. 잡지는 않았다. 대만이 고개를 돌렸다. 황금빛 노을이 사선으로 그의 얼굴을 죽 가르며 떨어졌다. 빛 속에서 빛나는 눈동자가 더 맑아 보였다. 대만이 노란빛 도는 올리브색 시선을 거두지 않고 말을 걸었다.
“예쁘지? 역시 데리고 오길 잘했다, 야.”
모두를 시골로 데리고 오길 잘했다는 걸까, 아니면 태웅과 장을 보러 나와서 좋았다는 걸까. 애매한 말이었지만 태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과 오롯이 단 둘이서 이 풍경을 공유할 수 있어서, 나도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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