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료

과랑과랑 펠롱펠롱

태섭대만

비행중 by 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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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년 10월 대운동회에서 위탁 판매한 태섭대만 소설 『과랑과랑 펠롱펠롱』을 웹발행합니다. 1~3편까지는 무료입니다

  • 수중 묘사, 해상사고 및 교통사고, 가까운 이의 죽음, 악플에 관한 묘사가 있습니다

과랑과랑 펠롱펠롱

1.

정대만은 물을 좋아한다. 물은 안전하고 따뜻하다. 넘어져서 다칠 일도 없고, 아프지도 않다. 몸에 서늘하게 달라 붙는 감각이 좋다. 무릎 부상을 입었을 때 받은 수중 재활 프로그램의 영향이리라. 매일 한 시간씩 대만은 전용 수영장에서 수중 걷기 훈련을 했다. 맨바닥 위에서 걷는 것보다 훨씬 힘들었지만 익숙해지자 오히려 물속이 더 편했다. 농구를 그만두면서 자연히 훈련도 중단했지만, 그 이후로도 대만에게 있어 물속은 편안하고 아늑한 곳이었다. 나약하고 무방비한 자신을 보여도 괜찮은 공간.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안전지대.

은퇴 전에도 대만은 주말마다 물을 찾았다. 시즌 중에는 오전에 집 근처 체육관 수영장에서 한 시간씩 수영을 했고, 비시즌에는 스쿠버다이빙을 즐겼다.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마음에 대학생 땐 없는 시간을 쪼개 다이빙 자격증을 땄다. 후배 하나는 바다가 그렇게 좋냐며 살짝 아니꼬운 눈을 했지만 대만은 바다가 좋다기보단 물속에 몸을 담그는 느낌을 좋아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대답했더라.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은퇴 후 제주도로 내려온 대만의 아침 일과는 항상 똑같다. 오전 일곱 시에 기상해 세수를 마친 후 수경만 챙겨 집을 나선다. 봄이면 유채꽃이 피는 한산한 길을 10분 정도 걸어가면 작은 항구가 나온다. 부지런한 해녀와 어부는 진작 먼 바다로 나가 보이지 않는다. 대만은 가볍게 몸을 푼 다음 슬리퍼를 벗어두고 물속으로 들어간다.

오랜 다이빙 경력과 선수로서의 삶 덕분에 대만은 남들보다 호흡이 길었다. 천천히 발을 저으며 더 깊은 곳으로 향한다. 물질이 목적이 아니므로 바닥까지 내려가진 않는다. 제주 바다에는 다양한 어종이 산다. 화려하고 깨끗한 바다. 서해와도 동해와도 다른 남해의 절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대만은 그것들을 소중히 보며 다시 천천히 올라간다.

수면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휙, 하고 휘파람 비슷한 소리를 낸다. 그 유명한 숨비소리다. 처음 맨몸 다이빙을 했을 땐 갈라진 소리만 짧게 나왔는데, 이제는 제법 멋진 숨비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뒤에서 똑같지만 좀 더 노련한 숨비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니 이 마을 대장 해녀가 수경을 벗으며 그를 보고 있었다. 그의 바구니는 해삼이며 멍게로 꽉 찼다. 오늘 물질이 아주 잘 되었나 보다. 그가 엄지손가락을 척 들었다. 멋진 소리라는 뜻일까. 대만은 멋쩍게 웃은 뒤 방파제 끄트머리를 잡고 몸을 일으킨다. 조금 숨을 골랐다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간다.

30분 동안 수영을 즐기다가 정박지로 올라간다. 수건은 챙기지 않는다. 시멘트 바닥에 사지를 벌리고 누워 햇볕에 몸을 말린다. 하얀 살은 땡볕 아래에 한 시간을 서 있어도 빨개지기만 하고 타지 않는다. 미국으로 간 후배 둘은 멋지게 탔는데 자신은 잘 안 된다. 누구는 그래서 문신을 박는다고 하는데 대만은 아픈 거라면 질색이었다. 야, 스포츠는 쇼맨십이야. 같은 대학 팀에서 뛰던 선배가 한 말이었다. 그 선배는 졸업 후 구단에 들어가자마자 어깨를 다 덮는 거대한 문신을 박았다. 그래도 대만은 몸에 바늘을 대고 먹을 집어 넣는다는 게 여전히 꺼려졌다. 하지만 물속에선 아플 일이 없다. 뭍에서 아프기보단 물에서 조금 숨이 차는 게 훨씬 낫다.

무방비하게 늘어져 있으니 누군가 다가온다. 방금 전 만난 대장 해녀다. 그는 통에 수확물을 붓고는 물었다.

“볼 때마다 바당에 와있언게. 이디가 경 좋으나?”

이제 간단한 제주어는 그럭저럭 알아듣지만 연세 있는 분들이 쓰는 제주어는 여전히 외계어 같다. 대만은 느리게 숨을 뱉었다.

“네, 좋습니다.”

“누구는 바당이 영 저프다던디. 청년은 겁도 없는 거 닮다게.”

해녀의 말에 대만은 웃기만 했다. 겁이 없다. 대만의 플레이를 본 사람들이 흔히 내리는 평가였다. 정대만 선수는 정말이지 겁이 없군요, 컨테스트가 바짝 붙은 상태에서도 침착하게 슛을 시도하고 성공시킵니다. 저래서 라인에 선 정대만은 건드리지 말라는 말이 있는 거겠죠. 네, 파울이라도 했다간 점수를 내주게 되니까요. 언젠가의 경기 중 해설위원과 캐스터가 한 말 떠올랐다. 노련하고 약삭빠르게 파울을 유도하고, 그러다 코트 위에 굴러도 아랑곳않아 하는 농구 선수 정대만을 보면서 사람들은 ‘투혼’이라는 단어를 언급하곤 했다.

내가 그런가?

정작 정대만 스스로는 그런 평가에 회의적이다.

그는 세간의 평과 달리 겁이 많고 긴장도 잘 했다. 중요한 경기가 있는 날이면 항상 아침에 배탈이 났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더 이상 농구가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봐, 그 사실을 마주하는 게 두려워 코트로 돌아가지 않고 2년이나 방황했다.

다만 그는 포기가 싫었을 뿐이다. 손에서 무언가를 놓치는 감각. 돌아갈 수 없다는 것. 그 무력했던 시절로 돌아갈 바에야 코트에서 구르고 넘어지고 쓰러지는 게 낫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 노력이 무색하게 또 코트에서 내려오고 말았지만.

대만은 그쯤에서 생각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카락이 덜 말랐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대만은 슬리퍼를 다시 발에 꿰고 집으로 돌아갔다.

대만의 제주집 담장은 현무암을 이리저리 올려 쌓아 예스럽고 토속적인 맛이 있었다. 그 사이로 난 유채꽃을 보는 게 요즘 대만의 소소한 낙 중 하나다.

담장을 돌아 대문 앞에 선 순간 대만은 눈살을 찌푸렸다. 누군가 그의 마당 안에 서 있었다. 그가 이 시간마다 자리를 비운다는 걸 아는 이웃들은 정오 전에는 방문하지 않는다. 사람 없다고 아무렇게나 들어오는 분들이 아니라서 안심하고 문단속을 안 했는데. 꼬박꼬박 대문을 잠그고 다니는 습관을 들일 걸 그랬다.

설마 육지에서 온 관광객인가. 민박집이나 폐가로 착각했을까. 여긴 볼 것도 없는데 왜 왔대. 대만은 제 집 앞에서 물기가 남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망설였다. 육지에는 그를 아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래서 일부로 제주에서도 연세 지긋하신 분들이 많은 곳에 자리잡았는데. 대만은 침입자를 노려봤다. 곱슬머리에 가무잡잡한 피부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오른쪽 어깨에 박은 코요테 문신이 눈길을 끌었다. 제주도에도 조폭이 있었던가? 대만은 바짝 긴장해선 사내를 다시 살폈다. 다행히 그런 쪽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위협적인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옷차림은 관광객이라기보단 현지인처럼 자연스러웠다. 신발은 대만과 같은 슬리퍼였다. 가볍게 산책 나온 분위기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낯이 익지?

대만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그 원인을 깨달았다. 남자는 키가 유독 작았ㄷ. 눈대중으로 봐선 170cm가 겨우 넘을까 말까했다. 저렇게 작은 사람은 고등학교 후배들 빼곤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나.

대만은 이만 사내를 쫓아내기로 했다. 얼굴이 팔리든, 여기저기 소문이 돌든 일단은 집에 들어가는 게 우선이다. 바다에 뛰어드는 감각은 좋지만 몸에 쌓인 소금기 때문에 찝찝하다. 어서 욕조에 물을 받아 개운하게 씻고 싶다. 대만이 입을 열려는데 사내가 대만을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뭐해요, 집주인이. 안 들어올 거예요?”

대만은 할 말을 잃었다. 눈에 익다 했더니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대만은 바보처럼 입을 벌리지 않게 턱에 힘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덩치가 커서 미처 못 알아봤다. 얼굴을 보니까 알겠다. 뭐 저 놈은 10년 동안 안 자랐다냐. 그때 그대로네. 대만은 침을 삼켰다.

자그마치 7년이다. 태섭이 미국으로 떠난 지 벌써 11년이 지났고, 국가대표로 함께한 지는 7년이 지났다. 20대를 지나 서른이 된 태섭은 덜 여문 열매 같았던 10대 소년, 20대 청년 때보다 더 단단하고 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어딜 가든 놓지 않겠다는 집착도 어른거렸고. 대만은 사냥감이 된 듯한 기분에 침을 삼켰다가, 곧 울컥했다. 아니 내가 왜 내 집에서 쫄아야 하는데?대만은 입술을 앙다물고 대문을 넘어 마당으로 들어왔다.

드디어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섰다. 태섭은 차분이 대만을 훑었다. 운동을 아예 놓진 않았는지 현역 때보단 적지만 살이 찬 팔다리 사이로 잔근육이 잡혀 있었다. 목에 건 수경을 보고 태섭은 그가 바다를 다녀왔다고 짐작했다. 그런데 묘하게 상태가 언발란스했다. 몸과 옷은 바짝 말랐지만 머리카락에는 물기가 남아 햇빛이 닿을 때마다 은빛으로 반짝였다. 다이빙을 하는 것 같긴 한데, 그렇다기엔 아무 장비도 없었다.

설마 이 인간, 맨몸 다이빙 하나?

태섭은 주먹을 꾸득 소리날 정도로 쥐었다. 대만이 그 기에세 잠깐 주춤했다. 태섭은 당장 대만을 꿇어앉히고 잔소리를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다가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나?태풍이 부는 철마다 해일로 사람이 쓸려 나가는 뉴스가 나오는데?정말 겁대가리가 없는 거야, 아니면 죽어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태섭은 오랜만에 만난 사람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대만의 질린 표정을 보자 이성이 돌아왔다. 태섭은 주먹을 풀고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일단 집으로 들어가요. 아침인데도 햇볕이 따갑다.”

2.

송태섭은 물을 싫어한다. 싫다기보다는 선호하지 않는다. 그 수많은 물 가운데서도 태섭은 바다가 제일 어려웠다. 아버지와 형을 데려갔다는 치졸한 이유는 아니었다. 태섭은 언제나 자신이 예측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다. 바다는 영 변덕스 러워 언제 파도가 얼마나 몰아칠지 가늠할 수 없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 중 태섭이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곁을 내주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정대만이 유일무이했다. 좀 예측불능이긴 해도 저 사람도 나도 평생 농구를 할 거라고 생각했기에 태섭은 생활에 여유가 생기기 전까진 그를 내버려두기로 했다. 그러나 대만은 또 예상을 빗나갔다. 그는 태섭이 붙잡을 새도 없이 종적을 감추었다. 나이를 먹어도 그는 바다처럼 굴었다. 태섭의 손바닥에 쉬이 올라와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싫지 않다니 참 이상한 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태섭은 물을 좋아해 바다로 뛰어드는 대만을 이해할 수 없다. 바다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데. 사고가 얼마나 많이 그리고 자주 일어나는데. 매해 스쿠버다이빙 사망자 혹은 실종자 통계 수치를 보여주어도 대만은 눈살을 찌푸리며 ‘우리 부모님도 뭐라 안 하는 걸 네가 왜 난리를 치냐’고 말했다. 그러니 정말로 할 말이 없어서 반박을 포기했다.

“미안, 여기 오고 누구한테 대접하는 건 처음이라.”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말에 대만은 즉석에서 샐러드볼을 만들어 태섭 앞에 내밀었다. 아보카도, 아몬드와 으깬 호박, 방울토마토와 닭가슴살. 각종 베리와 그릭 요거트를 섞어 야무지게 만들었다. 한가득인 태섭의 그릇과 달리 대만의 그릇에 든 건 별로 없었다. 입 짧은 건 여전하네. 무슨 <리틀 포레스트> 촬영하나. 마침 더워서 식욕도 죽은 참이었기에 태섭은 얌전히 숟가락을 들었다.

의외로 정대만제 샐러드볼은 맛있었다. 고기라곤 닭가슴살밖에 없는데 이렇게 맛있으면 반칙 아닌가. 아니면 만든 사람이 정대만이라 내가 콩깍지가 낀 건가. 태섭은 조용히 열 입 만에 그릇을 비웠다. 한 번에 많이 먹는 건 여전하네. 대만은 눈을 꼭 감고 오물대는 태섭을 보고 생각했다. 쟤는 왜 밥 먹을 때 눈을 감을까. 어린 애도 아니고. 대만은 빈 그릇을 쳐다보며 물었다.

“더 먹을 거야?”

“그보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태섭은 수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새끼, 빠져나갈 틈도 안 주네. 대만도 따라 수전을 놓고 해 보란 듯이 팔짱을 꼈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주인 없는 집에 멋대로 침입해서 밥도 얻어먹은 주제에 태섭은 대만의 행동이 마음에 차지 않았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한 번 보자는 심정으로 태섭 역시 팔짱을 끼고 몸을 등받이에 기댔다. 후텁지근한 바람이 부엌으로 들어왔다. 태섭이 입을 열었다.

“왜 은퇴했어요.”

“몸이 예전만 못해서 그랬다, 왜.”

예민한 주제에 대만은 가급적 온건하게 넘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태섭이 봐주지 않았다. 누구 마음대로. 태섭은 악착같이 물고 늘어졌다.

“형 이제 겨우 서른하나에요. 남들은 아직 현역으로 활약할 때라고.”

“몸이 먼저 무너졌다고 쳐.”

“형 대학생 때도, 프로 뛸 때도 치명적인 부상 입은 적 없었잖아요.”

“허리랑 손목 문제로 병원 자주 왔다갔다했어.”

“시즌아웃해야 할 만큼은 아니었죠.”

대만은 미간을 찌푸렸다. 계속 미국에서 뛴 녀석이 이런 얘기는 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채치수가 몰래 알려줬나?치수는 그가 자주 다녔던 물리치료센터에서 근무한다. 친구가 일하는 곳이라서 다닌 건 아니다. 치수 역시, 대만이 그 병원의 단골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취직한 건 아니다. 치수가 입사하고 한 달 뒤에 대만이 팀원의 소개를 받아 찾아갔다. 다시 인연이 생긴 동창이 반가워 치료를 기다리는 동안 잡담하곤 했는데. 채치수, 아무리 후배라고 해도 그렇지 예민한 문제를 아무 생각없이 알려주다니. 값싼 자식 같으니라고.

대만의 짐작과 달리 태섭의 정보통은 북산 올드비가 아니라 정대만의 경기 영상과 관련 스포츠 뉴스였다. 반나절 가까이 나는 시차에도 태섭은 꼬박꼬박 대만의 경기를 실시간으로 보았다. 여건이 되지 않으면 인터넷 방송으로 시청했다. 경기가 끝나면 하이라이트 영상을 돌려보고 실시간 검색어와 기사를 확인했다. 대만이 활약한 날이나 그의 팀이 좋은 성적을 얻은 날 올라온 기사는 남김없이 북마크했다. 송태섭은 정대만의 별명도 다 읊을 수 있다. 불꽃남자, 위대한 승부사, 클린샷의 달인, 국민 슈터. 그중 태섭이 제일 좋아하는 별명은 ‘위대한 승부사’였다. 대만은 그저 믿는 존재였다. 언제 어떻게 공을 던져도 항상 점수를 벌어줄 거라는 믿음을 준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금방 돌아오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항상 중요한 순간에 승부수를 띄워 열기를 더한다. 그가 서 있는 코트는 지루하지 않다. 3점슛 라인 밖에서 뛰어오르며 아름다운 호를 만드는. 내키는 대로 제멋대로 날뛰는 그를 어느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런 그가 코트를 떠났다. 농구복을 입지 않고, 농구화를 신지 않는다. 공을 잡지 않고, 슛을 던지지 않는다. 아주 조용히 숨어버렸다. 마치 전부 질렸다는 것처럼. 회피하는 것처럼.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은퇴 속보를 들은 그날 태섭은 속으로 반박했다. 상상 속 송태섭은 대만의 멱살을 틀어쥐고 윽박지르고 있었다. 당신은, 정대만은 농구가 있어야 숨 쉴 수 있는 사람이잖아. 농구부를 박살내겠다고 의기양양하게 들어와놓곤, 농구가 하고 싶다고 존심 다 내팽개친 채 우는 사람이 당신이었잖아.

태섭의 데이터베이스가 맞다면 은퇴 발표 기사가 나기 전까지 그런 징조는 전혀 없었다. 대만은 한 달 전득점왕을 차지하며 팀을 정규 시즌 2위로 올렸다. 구단이나 KBL 협회 간 갈등도 없었다. 정확히는 그런 조짐이 없다는 쪽이 맞겠다. 은퇴 경기에서 보인 기량도, 도저히 오늘 코트에서 내려오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날 대만은 무려 3점슛을 8개나 성공시켰다.

그러면 왜 은퇴를 결심했는가?

태섭은 미치도록 궁금했으나 대만은 다른 사람에게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태섭은 대만을 노려보다가 한 발 물러나기로 했다. 헐렁한 듯 싶지만 선이 확실하고 고집이 세서 자기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결코 입을 열지 않는 사람이다. 태섭이 한숨을 쉬자 대만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자기가 잘못한 줄은 아나 보지. 태섭이 눈썹을 삐뚜름하게 치켜들며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나가려는 기세에 거북하단 듯이 굴던 건 언제고 대만이 급히 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묵을 곳은 있어?”

“옛집에서 자면 돼요.”

“옛집이라니?”

“내가 말 안 했던가?저 제주도가 고향이에요.”

“말 안 했어. 한 번도.”

“그랬나.”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말한 적 없는 것 같다. 숨기려던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고등학생 시절 그들은 농구하느라 바빴다. 사담을 나눌 시간에 연습을 해야 했고 애초에 자기 이야기를 떠벌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가족 이야기, 농구 외 취미, 최근의 관심사,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그들에겐 이런 자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농구가 그들의 유일한 연결고리였다. 대만이 그 끝을 놓아버린 이상, 그들은 새로 관계를 구축해야 했다. 농구가 아닌 다른 것으로.

“바다가 그렇게 좋아요?”

태섭이 물었다. 대만의 새 집은 어디에서나 바다가 보인다. 부엌 식탁에 앉아서 조금만 몸을 틀면 열린 통창과 담장 너머로 푸른 바다가 펼쳐진다. 언제든지 바다로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대만이 컵을 매만지다가 뜨끔했다. 내가 매일 다이빙하는 건 어떻게 알았지?덜 젖은 머리카락으로 털레털레 걸어왔으면서 진지하게 고민한다. 대만은 눈치를 보며 마른 침을 삼키다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어…, 바다, 가 좋다기보단…. 그냥 물이 좋은데.”

주말마다 수영을 다닌 건 바다 대용이 아니었구나. 태섭은 오늘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물이 좋다니. 태섭으로선 이해가 가지 않았다. 태섭은 질문을 바꾸었다.

“물이 왜 좋은데요?”

“왜 좋냐고?”

안전하니까, 아늑하니까, 포근하니까. 감싸주니까. 모든 이유를 설명하기엔 말주변이 없었다. 애매한 답이 나왔다.

“따뜻하니까?”

“물이 따뜻해요?”

“그렇…, 지 않아?”

대만이 순진하게 눈을 깜빡이며 태섭에게 되물었다. 태섭은 팔짱을 끼고 대만의 대답을 곱씹었다. 물이 따뜻하다.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태섭에게 물은 매정하고 차가운 공간이었으므로. 태섭은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요.”

“하긴 다들 물이 차갑지 왜 따뜻하냐고 하더라.”

“혹시 다이빙 자격증 딴 것도 그거 때문이에요?”

“응. 수영장도 나쁘진 않은데, 바다가 좀 더 만족스럽더라. 탁 트여서 그런가.”

그보다는 아마, 재활 치료를 받을 때 사방이 꽉 막혀 있던 수중 훈련소가 생각나서 그런 거겠지만.

“그럴 리가요.”

태섭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래, 대만은 싱겁게 대꾸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같이 해볼래?마음 같아서는 권유하고 싶었지만 태섭은 대학생 시절에도, 국가대표로 만났을 때도 대만의 물사랑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 사이에 거대한 협곡이 있어 이해와 납득을 가로막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농구가 아니었으면 스치듯 만날 일도 없었겠구나.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대만은 관계를 재정립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보다는 현재의 관계, 즉 고교 선후베 관계에 남아 있고 싶었다. 애시당초 우리 관계에 뭐가 더 있나. 기껏해야 고등학교 선후배, 아니면 국가대표 동지인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은퇴 후 평생을 제주에서 보내기로 결심하면서 태섭과 재회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그를 그리워하기도 했고 미련도 조금 남았지만 구질구질하게 굴고 싶지 않았고, 만날 마음도 없었다.

그런데 웬걸. 기껏 아무 연고 없는 제주도로 왔더니 송태섭 고향이 여기란다. 미리 알았으면 절대 이 섬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울릉도로 갈걸. 거긴 제주보다 배가 더 안 들어오니까. 아, 파도는 더 세려나. 생각해 보니 편의시설도 여기보다 열악하네.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데 태섭이 먼저 물었다.

“그럼 다이빙도 물이 좋아서 하는 거겠네요.”

“그야 그렇지. 그런데 수영장보단 바다에서 하는 게 좀 더 기분이 좋더라.”

“난 왜 기분 좋은지 모르겠던데.”

태섭이 다시 자리에 앉더니 상체를 기울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근육이 더 많아졌다. 사춘기 애도 아니고 얼굴에 열이 몰렸다. 얘는 왜 나이를 먹을수록 몸이 단단해지냐. 대만은 시선을 피하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몰라하며 태섭의 갈색 눈을 쳐다봤다. 태섭이 눈앞에서 속삭였다.

“물이 좋은 이유, 형이 가르쳐주면 안 돼요?”

넘어가지 말자. 대만이 물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선배니까요.”

태섭이 빙긋 웃었다.

3.

어째서인지 태섭은 대만의 집에서 자겠다며 버텼다. 대만이은 늦은 밤까지 태섭을 설득했다 야, 너 옛집 있다며 아깐 거기서 묵겠다며. 태섭은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해 지기 전에 다녀와봤는데 그 집에 이제 다른 사람이 살고 있더라고요. 후배의 뻔뻔함에 대만은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아니 그냥 놔두고 온 줄 알았더니 집을 팔고 인천에 이사왔냐고. 그럼 당연히 안 팔린 이상 다른 사람이 가서 살지. 폐가여도 그거 불법이다 인마.

한참 잔소리를 쏘아대던 대만은 한숨을 쉬며 후배에게 순순히 집을 넘겨주었다. 그래도 방을 사수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설마 억지로 엉덩이 붙이고 앉은 주제에 뻔뻔하게 침대까지 내놓으라고 뻗댈 생각은 아니지 경계하는 목소리로 묻자 태섭은 어깨를 으쓱이며 소파에 누웠다. 그제야 대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막상 모두가 잠들고 깊은 밤이 되자 대만은 그냥 내 방에 데려와서 제울 걸, 하고 후회했다. 이른 새벽에 목이 말라 대만은 거실로 나왔다가 소파에 구겨져 자는 인영을 보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3초가 지나고서야 대만은 송태섭이 놀러왔으며, 거실에서 자라며 제가 이불과 베개를 준 것을 떠올렸다. 아이씨 깜짝이야. 곰이 기어들어온 줄. 대만은 태섭을 쳐다봤다. 이불은 자면서 걷어 찼는지 아래에 떨어져 있었고 잠옷으로 입은 셔츠는 위로 말려 올라갔다. 단단한 종아리 근육이며 복근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였다. 에이씨, 저놈은 미국 가서 몸이나 키웠나. 어쩐지 엄한 걸 본 어린애마냥 얼굴이 홧홧해졌다. 정신 차려라, 정대만. 쟨 그냥 네 후배야. 대만은 애써 태섭의 몸에서 시선을 거두고 찬물을 들이켰다.

탕 소리나게 물컵을 내려놓았다가 아차 싶어 뒤를 돌아봤다. 그새 몸을 뒤척였는지 대자로 팔다리를 벌린 채 자고 있었다. 윗옷이 더 올라가 배가 훤히 드러났다. 대만은 이마를 짚었다. 키도 작은 게, 대만은 찬물을 한 번 더 마신 다음 엉거주춤 태섭에게 다가가 티셔츠를 내리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감기 걸리거나 배앓이할까 봐 걱정되서 이러는 거다. 보는 내가 남사스럽거나 민망해서가 아니라…. 대만은 속으로 한참동안 변명하면서 방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대만은 묘한 꿈을 꾸었고, 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거실로 비척비척 나와 태섭을 멍하니 쳐다봤다가 단단한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악! 뭐하는 거예요?”

태섭은 아침잠이 많았다. 눈꺼풀 사이로 조금이라도 햇빛이 들어오면 오만상을 쓰면서 잠투정을 부렸다. 선수촌시절엔 매일 밤마다 태섭이 몇 시에 식당으로 내려올지를 두고 국가대표끼리 내기하기도 했다. 그런 태섭이 한 번에 깰 정도였으니, 그만큼 대만의 손이 매워졌다는 뜻이리라.

대만은 황당해하는 태섭을 보면서 짜증을 부렸다.

“태섭아, 그냥 침대에서 같이 자자. 내가 도저히 못 봐주겠다.”

“뭐가요.”

태섭도 같이 눈살을 찌푸렸다. 니가 너무 섹시해서 내 마음이 심란하다…. 고 어떻게 말하냐 진짜. 대만은 울고 싶었다. 갑자기 굴러들어온 완숙한 후배를 째려보다가 대만은 태섭을 억지로 일으켰다. 아직 잠이 완전히 깨지 않아 태섭은 어리둥절해하며 순순히 일어났다. 대만은 그대로 태섭의 등을 떠밀어 방안에 억지로 집어넣었다. 태섭은 헛웃음을 지었다. 형, 방은 들어오지 말라며?어이가 없었으나 항변하기도 전에 문이 세차게 닫혔다. 아침 준비할 테니까 씻고 나와! 문 너머에서 대만이 일갈했다. 이제 와서 내외하나. 그냥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이왕 들어온 김에 태섭은 대만의 방을 구경했다. 미국 유학을 가기 전 태섭은 종종 대만의 집에 들렀다. 그가 기억하는 대만의 방은 모든 게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으면서도, 그 나이 또래 남자처럼 어수선한 감이 있었다. 아무렇게나 던져둔 가방이나, 책상 위에 쌓인 농구 잡지. 굴러다니는 연필 등이. 빼곡하게 차 있지만 좁다는 느낌은 없는 아늑한 곳이었다.

제주도에 내려온 정대만의 방은. 너무 휑했다. 그때에 비하면 작은 평수인데도 지나치게 넓게 느껴졌다. 단정한 게 아니라 아무것도 없어서 사실상 정리하거나 청소할 필요 자체가 없이 느껴졌다. 침대 아니면 못 자는 도련님인 줄 알았는데, 눕는 자리에는 요와 이불만 덜렁 펼쳐져 있었다. 책상도 좌식이었고, 책장도 낮았다. 모든 걸 다 비워내버린 사람처럼, 혹은 아무 미련이 남지 않아 언제든 홀연히 사라질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여백이 너무 많았다.

방뿐만이 아니다. 이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태섭은 이 공간이 불편하기만 했다. 거실에도, 부엌에도, 가구가 별로 없었다. 텔레비전은 아예 없었고 책꽂이 두 개와 소파, 낮은 탁자가 전부였다. 그 책꽂이도 상당히 비어 있었고. 부엌도 필수 조리기구와 그릇, 수저 몇 개를 제외하면 별 것 없었다. 그나마 수저가 두 짝씩 있어서 태섭은 어제 무사히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냉장고는 다행히 각종 반찬과 식단 재료로 어느 정도 사람 사는 듯한 구색을 갖추었다. 이웃이 반찬을 자주 갖다 주는 모양이다. 그나마 밥은 잘 먹고 다니는 것 같아서 안심이었다. 하긴 선수 시절 때도 입이 짧아 고생하면서도 끼니는 푸짐하게 차려먹던 양반이니. 그 점은 감사히 여기기로 했다.

태섭은 이불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이 형은 대체 여기까지 와서 무얼 하고 싶었던 걸까. 아예 이대로 묻혀 사라지길 바랐던 걸까. 대체 무엇 때문에?생각이 복잡해졌다. 태섭은 상체에서 힘을 빼 뒤로 드러누웠다. 이불에서 햇볕 냄새가 났다. 대만이 문을 두드렸다.

“야, 밥 다 됐어. 나와라.”

“아, 잠시만요.”

“너 설마 아직도 안 씻었냐?”

목소리에서 어이없음이 느껴졌다. 예나 지금이나 이상한 데에서 감은 좋다. 태섭은 부정하면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찬물로 세수하고 나오니 차려진 아침 식사가 그를 맞이했다. 오늘 아침은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였다. 대만이 포크와 젓가락을 양손에 들고 물었다.

“어느 쪽 쓸래?”

“파스타면 당연히 포크죠.”

대만은 태섭의 앞에 포크를 놓고 자기는 젓가락을 가져갔다. 어제 샐러드볼은 괜찮았는데. 태섭은 포크에 면을 돌돌 말아 조심스럽게 한 입 했다. 면은 우선 합격이었다. 설익지도 너무 푹 퍼지지도 않고 적당했다. 간도 알맞았고 소스도 진하게 배어 심심하지 않았다.

태섭은 샐러드에 파스타를 얹어 흡수하듯 먹었다. 천천히 먹어라, 체하겠다. 대만이 웃으면서 우유를 건넸다. 태섭은 그것도 한입에 삼키고 식사를 이어갔다.

이 형이 이렇게 요리를 잘 했던가?태섭은 볼에 한가득 면을 넣고 우물대며 생각했다. 예전에도 이렇게 잘 했던가?태섭은 기억을 곱씹어 보았지만 대만이 요리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으니 알 길도 없었다. 대학생 시절에는 보통 배달 음식을 시켜 먹었고, 선수촌에서는 식당에서 끼니를 때웠으니까. 태섭이 미국에 유학갔다가 완전히 정착해버린 뒤로는 그의 집에 갈 일도 없었다. 그의 귀국 일정은 대체로 매우 짧았기 때문에, 재회는 보통 한 끼를 같이 먹거나 근처에서 한 잔 하는 정도에서 끝났다. 그러니 대만의 요리 실력을 알 기회가 없었다.

“왜 그러냐. 설마 면 덜 익었냐?”

대만이 불안해하는 눈으로 수저를 멈추며 물었다. 이상하다, 내 건 잘 익었는데. 접시에 담긴 걸 한입 먹어보곤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내가 진짜 미쳤지. 저 멀대만 한 서른한 살 남정네가 귀여워 보인다니. 태섭은 열심히 우물거리며 말했다.

“아뇨. 선배가 요리 이렇게 잘했던가 싶어서.”

“아, 당연히 단골식당 사장님들한테 배웠지.”

허술해 보이지만 자취 경력이 길어 생활력은 남못지 않은 정대만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요리를 배우기로 결심한 것은 사실 태섭 때문이었다. 그들은 대만이 스물네 살일 때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뽑혀 선수촌에서 재회했다. 미국 음식이 너무 느끼해서 적응하기 힘들었다는 태섭의 말에 그가 안쓰러웠다. 쟤가 여기 머무는 동안 맛있는 거, 좋은 걸 먹이고 싶다. 그런 마음에 자주 다니는 식당 사장님이나 친하게 지냈던 사람에게서 간단한 요리 팁을 얻었던 게 시작이었다.

정작 먹이고 싶었던 사람은 아시안게임이 시작하자마자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집에서 같이 먹을 날을 기다리며 요리 실력을 쌓아왔다. 그게 이제야 실현되었다는 것에 힘이 빠지기도 하고, 그래도 계속 배워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나 집가면 선배가 해준 밥 생각날 거 같은데.”

“아부가 너무 심한 거 아니냐.”

말은 그렇게 해도 입꼬리가 살풋 올라가 있는 것이, 태섭이 좋아해줘서 기뻤던 모양이다. 태섭은 묵묵이 그릇을 비웠다. 대만도 천천히 식사했다. 먼저 그릇을 비운 태섭이 물었다.

“파스타 더 있어요?”

“어, 미안. 나 여기 오고 2인분은 처음 만들어서. 양 조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곘더라고. 그게 끝이야.”

아, 그럼 제주도 정대만이 만든 요리를 먹어본 사람은 지금까지 나밖에 없었다는 거네?태섭은 묘한 만족감을 느끼며 충분하다고 대답했다.

태섭은 그릇을 싱크대에 넣고 마당으로 나가 아침 스트레칭을 했다. 하루에 수십 번씩 바뀌는 것이 제주의 날씨라지만 오늘 아침도 햇볕이 과랑하다. 하늘을 쳐다볼 때마다 펠롱대는 빛 때문에 눈살이 찌푸러졌다. 대만은 그릇을 씻으며 몸을 푸는 태섭을 구경했다. 집에 다이빙 도구가 남아 있던가. 대만은 뒤뜰에 있는 작은 창고로 향했다.

뭉친 몸을 풀고 오니 대만이 보이지 않았다. 형? 태섭은 대만을 찾아 집안 곳곳을 돌아다녔다. 방 하나에 거실과 부엌밖에 없는, 가구도 몇 없는 집에 어디 숨을 곳이 있다고 대만은 아주 꼭꼭 숨어 나오지 않았다.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거실을 서성거리는데 부엌에 난 작은 문이 보였다.

저런 데에 문이 있다고?태섭은 문고리를 당겼다. 끽 소리를 내며 뒤뜰이 나타났다. 태섭은 홀린 듯이 마당으로 나갔다. 오른쪽에 창고가 하나 있었다.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처분하지 못한 짐을 모아둔 곳인가 보다. 태섭은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갔다. 문을 살짝 열자, 오랫동안 닫혀 있었는지 끼익 하고 녹이 슨 소리가 났다. 창고 안이 밝아지면서 대만의 목소리가 들렸다.

“허어억! 아, 씨. 깜짝이야. 너였냐.”

“그럼 나 말고 여기에 또 누가 있어요. 뭐 찾아요?”

“어, 다이빙 물건. 분명 안 버린 게 남아있을 텐데.”

“진짜 나 다이빙 시키려고요?”

“네가 해보고 싶었다며?이제 와서 딴소리냐.”

대만은 심드렁하게 대꾸하면서 열심히 잡동사니를 뒤적였다. 태섭이 안으로 더 들어갔다. 벽에 휴대용 손전등을 걸어 놓았으면서 대만은 맨눈으로 잡동사니를 뒤지고 있었다. 빛도 없이 어두운 데에서 뭘 찾겠다고. 태섭은 손전등을 잡고 스위치를 켰다. 딸깍, 소리가 나면서 안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어, 아. 거기 손전등 있었구나?”

“자기 손으로 걸어 놓고 까먹으면 어떡해요.”

“나 여기 한 번도 안 들어왔어.”

“잠깐, 그거 쓸 만한 거 맞죠?”

“어, 어. 걱정 마라. 괜찮겠지 뭐.”

“‘괜찮겠지 뭐’로 퉁칠 일이 아니니까 그렇죠! 이 인간이 누굴 죽이려고!”

“야 넌 날 그렇게 못 믿냐?”

대만이 버럭 화를 내며 안쪽에서 산소통을 찾아 끌어 당겼다. 대만이 산소통을 통통 두드리며 잔량을 확인하다가 옆으로 밀쳤다.

“저건 새로 사야 할 듯.”

“내가 뭐랬어요. 사람이 쓸 수 있냐고 했지.”

“뭐…. 시내에 다이빙 물품 파는 가게 많으니까. 거기에서 사야지.”

그 후로도 대만은 오리발과 슈트, 수경과 스노쿨링 장비를 꺼냈다. 수중 라이트까지 꺼내니 모든 게 완벽했다. 다 쓴 산소통과 달리 라이트는 멀쩡히 작동했다. 혹시 모르니 건전지는 갈고 가자고 태섭은 말했다.

“그럼 지금 시내 갈 거예요?”

“응. 어차피 오늘 장 보는 날이라 나가야 하거든. 운 좋네, 송태섭이.”

대만이 태섭의 어깨를 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가 단단한 근육에 놀라 팔을 움츠렸다. 마지막으로 선수촌에서 봤을 때도 몸 엄청 단단해졌다 싶었는데, 이놈은 근육만 키웠나. 대만은 주먹을 다른 손으로 살며시 감싸며 태섭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태섭은 어이가 없어 팔짱을 꼈다. 가슴과 팔 근육 때문에 오른손이 팔 사이로 들어가지 않았다. 철없던 이십 대라면 그게 뭔 꼴이냐며 웃었겠지만 지금은 부럽기만 할 뿐이다. 나도 쟤의 반의 반만큼이라도 근육이 좀 붙었으면.

“왜요, 또.”

“너…. 몸을 얼마나 더 키워온 거냐.”

“그래요?많이 뺐는데.”

“그게 뺀 거라고?”

“국내에서 뛰려면 몸이 가벼워야 할 거 같아서요.”

“너…. 이제 국내 리그 뛰어?”

“이 인간은 뉴스도 안 보고 사나.”

하긴 텔레비전이나 컴퓨터도 없고, 따로 신문을 구독하는 것 같지 않으니까. 태섭은 핸드폰을 들어 최상단에 떠 있는 기사를 보여주었다.

 

NBA 송태섭, 국내 이적 결정

김진일 기자

20xx. 7. 31

 

NBA 샌디에고 울프즈의 송태섭 선수(29)가 인천 와이번즈와 계약을 마쳤다. 송태섭 선수는 올해 하반기 NBA 리그가 끝나는 대로 KBL 리그로 이적해 내년 프로 리그에서 활약한다. 송태섭 선수는 국내외 최단신 농구 선수로 지난 아시안게임에 국가대표로 활동한 적이 있으며….

 

“왜?”

대만은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아서 물었다. 태섭은 NBA에서 잘나가는 선수 중 하나다. 온갖 혜택을 뒤로 하고 그보다 연봉도, 선수 대우도 떨어지는 KBL을 고르다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고요?”

태섭이 대만의 질문을 따라했다. 태섭은 대답하지 않았다.. 국가대표로 잠깐 같이 뛰는 것 말고, 열여덟 열아홉이던 그때처럼, 계속 한 팀으로, 같은 나라에서 뛰는 게 꿈이었다고 하면 당신은 믿을까?당신이 멋대로 은퇴해버린 후에도 미련을 못 놓아서 그냥 다짜고짜 돌아오기로 결심한 거라고 하면 의심할까?태섭은 대만이 싫어지려고 했다. 내가 이렇게 애타는 이유를 모르는 대만이 나빴다. 미웠다.

“몸이 더 둔해지기 전에 내 나라에서 한 번만이라도 뛰어보고 싶어서요.”

태섭은 본심을 감추고 다른 본심을 꺼냈다. 미국에서 좋아하는 농구 실컷 하느라 정작 여기 있는 가족을 제때 챙기지 못했다. 이제 머리도 충분히 여물었으니,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효자 노릇 해주려는 이유도 있긴 했으니까. 위와 같은 사심이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덧붙긴 했지만.

대만은 그 이유를 믿는 눈치였다. 아, 그러면 뭐. 잘 생각했네. 상투적인 말을 하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창고 문을 닫고 필요한 것을 챙겨 차고로 향했다. 대만이 모는 차는 용달 트럭이었다. 낡은 차를 보고 태섭이 피식 웃었다.

“진짜 시골 사람 다 되었네, 도시 도련님이.”

“자꾸 놀리면 놓고 간다.”

농담처럼 말을 걸자 대만이 잔뜩 투덜대면서 시동을 걸었다. 태섭은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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