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카

태섭대만

비행중 by 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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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섭비님(@song7ryota) 썰 기반

  • 조카에게 아낌없이 퍼주는 태대 부부

태섭은 의자에 앉아 정신 사납게 다리를 떨고 있었다. 그만 좀 하라고 핀잔을 주기에는 대만 역시 앉아 있질 못하고 분만실 앞을 뱅뱅 맴돌고 있었다. 오히려 향미 씨가 더 침착한 표정으로 문 위에 켜진 불이 꺼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을 거야, 엄마도 너희 아무 문제 없이 낳았거든. 바로 어제 혹시라도 잘못될까 걱정하는 아라를 다독이며 어머니가 한 말을 되새겨봐도 태섭은 진정을 할 수 없었다. 두 형님이 긴장을 한 바가지씩 먹은 탓에 오히려 아라의 남편 우진 씨는 상대적으로 평안해 보였다. 오히려 부산스럽게 복도를 왔다리 갔다리 하는 대만을 달래느라 바빴다.

「아이, 형님. 다 괜찮을 겁니다. 의사도 그랬잖아요, 산모랑 아기 모두 건강하다고.」

「동서, 며칠 전에 뉴스 난 거 몰라? 출산 중 사망하는 산모가 아직도 50%에 육박한다잖아. 안 그래도 태섭이 닮아서 쬐끄만대. 아니 어떻게 그 몸으로 1kg가 넘는 애를 낳는다는 거야. 거의 농구공 두 개를 낳는 거잖아. 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야?」

대만이 긴장하면 둘 중 하나다. 화장실을 가거나 말이 많아지거나. 오늘은 후자였다. 역시 처제 네의 경사를 간발의 차로 놓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그가 태어날 때 아버지는 홀에 있는 tv 프로그램을 시청하다가 출생 순간을 놓쳤고, 그 일로 약 10년 동안 어머니에게 소박 맞았다고 한다). 우진 씨는 예민해진 대만의 대꾸에도 설설 웃으며 말했다.

「아이, 무려 그 느바송의 여동생인데 의사들이 더 긴장했을 걸요? 무조건 괜찮을 거예요.」

「당연하지 잘못되면 이 병원 의사들 싹 다 고소할 거니까」

태섭이 숨도 안 쉬고 대답했다. 대만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그를 가리키며 우진 씨에게 일렀다.

「어어 동서 저기 태섭이 말려 봐라 애가 아주 눈깔 돌아가기 일보직전이다.」

<눈깔>이라고 뱉어놓고 향미 씨의 눈치를 본다. 대만은 항상 태섭의 가족에게 착하고 다정한 모습만 보이려고 안달이었다. 몇 년이 지나도 그저 귀엽기만 한 행동이었다. 다들 대만이 학창 시절에 한 따까리 하던 사람인 걸 얼추 눈치채고 있을 텐데. 그럼에도 아무도 쓴소리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만을 <맛있고 비싼 간식 턱턱 사주는 물주> 정도로 인식하던 아라는 대체 어쩌다가 저런 좋은 사람을 오빠 같은 사람이 만났느냐며 신기해하기까지 했다. 상견례 자리에서 처음 만난 우진 씨도 형님의 아주머니(지금은 물론 둘 다 형님이라고 한다)가 그 정대만인 거냐고 놀라워하기만 했다. 지금 보면 태섭의 곁에는 항상 좋은 사람이 있었다. 어머니도, 아라도, 우진 씨도. 학교 선후배도. 그중에서 태섭이 만난 가장 좋은 사람은 당연 정대민이었다.

마침내 분만실 불이 꺼졌다. 네 사람은 순식간에 문 앞으로 모였다. 문이 열리고 가장 먼저 아이를 안은 간호사들이 나왔다. 그 뒤를 이어 아라가 침대에 누운 채 분만실을 나왔다. 간호사가 포대기에 싸인 아기를 보여주었다.

「조카에요, 잘생긴 왕자님입니다.」

기다리는 동안 가장 초연해 보였던 향미 씨와 우진 씨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대만은 입을 틀어막으며 핸드폰 카메라를 켰다. 태섭은 머뭇거리며 조카에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우아아, 칭얼거리던 아기가 검지를 움켜쥐었다. 손아귀 힘이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너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 아이가 되겠구나. 태섭은 직감했다. 왜냐하면 저 아이도 송씨 네니까.

「태섭아,」

잔뜩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리길래 고개를 돌리니 불어터진 만두가 되기 일보직전인 대만이 보였다. 태섭이 웃어야 할지 달래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사이 대만이 더 울먹이면서 말했다.

「어떡하냐…, 우리 조카 너무 귀엽다.」

급기야 대만은 복도 한복판에서 서러운 아이마냥 울음을 터트렸다. 태섭은 다독일 생각조차 못했다. 그 순간 대만이 제 손을 잡은 조카만큼이나 사랑스럽게 보인 까닭이었다.

 

우리 조카

 

대만은 요즘 얼굴에서 웃음꽃이 가실 날이 없었다. 은퇴식 날 영구결번을 받았을 때보다 더 행복해 보였다. 아직 선수 생활을 하고 있는 선후배 동기들은 대만을 만날 때마다 한마디씩 했다. 야 너 은퇴하고 나서 얼굴이 더 폈다? 감독직 제안이라도 들어왔냐? 대만은 그때마다 고개를 저으면서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갤러리가 죄다 아기 사진을 꽉 차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이 쳐다보면 대만은 다시 흐흐 웃으며 말했다.

「우리 조카 태어났잖냐.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 며칠 전에는 뒤집기 성공했대. 진짜 대단하지 않냐? 막 잘 때는 발가락 꼬물대는데, 아니 그 조그마한 데에 손가락 발가락 다 붙어 있다는 게 신기하지 않냐? 얘 발이 아직 내 새끼손가락 만 해.」

아, 예. 한 번 물어보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조카 자랑에 질린 일부 선수들은 다른 사람이 요즘 무슨 일 있느냐고 물으려고 하면 그 사람의 입을 막아버리는 신공까지 발휘했다. 주접과 가장 거리가 멀어버리는 사람이 조카 얘기에 껌뻑 죽으니 더 어색했다.

영혼을 빼고 조카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그렇게 좋느냐고 물어보면 대만이 입술을 비죽이면서 말했다.

「아니 당연한 거 아냐? 우리 태섭이의 여동생이 낳은 애란 말야. 얼마나 귀여워. 나 얘 태어나는 날 같이 산부인과도 가서 받았다고.」

그러면서 왜 애 이름은 안 물어보냐, 우리 조카 백 일 되면 알아서 용돈 보내라 이런 말을 했다. 듣는 사람만 어처구니 없어지는 말이었다.

태섭은 조카가 태어났음에도 아무렇지않아 보였지만 사실 이쪽도 제정신이 아니긴 마찬가지였다. 조카가 태어나기 6개월 전부터 산부인과 전문이의 동영상과 강의를 빠짐없이 섭렴하고는 산모에게 좋다고 하는 것만 아라네 집으로 보냈다. 8개월 째가 되었을 때는 베냇저고리며 발싸개 손싸개 만드는 법을 검색하고, 이미 그들의 집에는 아기 침대와 모빌, 자장가 CD 등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누가 보면 아라가 아니라 송태섭 네가 아기를 가졌다고 착각했으리라.

모임을 파하고 돌아오니 태섭은 양손으로 뜨개거리를 쥐고 유튜브를 보면서 열심히 모자를 뜨고 있었다. 어디서 들었는데 신생아는 머리카락이 별로 없어서 머리 보온이 안 된대. 한 달 전에 그 말을 하더니 온갖 털실과 대바늘을 공수해 와 널럴한 비시즌 시기를 노려 모자를 뜨고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서너 개를 한 번에. 이번에는 무늬가 들어간 모자를 뜨겠다며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대만이 그 옆에 앉아 조잘조잘 말을 걸었다.

「야 이거 올이 너무 듬성듬성한 거 아니냐?」

「아기들은 땀 조절이나 체온 조절이 잘 안 돼서 너무 촘촘하게 하면 땀띠도 나고 피부 호흡도 잘 못한다고 해서요.」

「오올~. 역시 아기는 세심하게 대해야 하는구나.」

난 아무래도 육아 하면 안 되겠다. 나 하는 꼴 보면 네가 잔소리 오지게 할 듯. 대만은 여상하게 대꾸하면서 분주히 움직이는 태섭의 손을 구경했다. 태섭은 아직 아이를 입양하거나 양육할 생각이 없었다. 아직은 대만과 보내는 시간이 소중한 신혼부부였기에. 하지만 제 조카라면 뭐든지 다 해주고 싶었다. 그 조그만 아기가 이제 곧 있으면 세상에 나온 지 백 일이다. 처음 봤을 때는 쭈글쭈글한 감자처럼 생겼던 녀석이 하루가 멀다 하고 예뻐졌다. 아라와 아버지를 반반씩 빼닮아 눈은 처졌는데 코는 오똑했다. 송가 네에서 가장 인물이 훤했다.

「태섭아, 너 8월 9일 날 시간 비지.」

대만이 태섭의 허벅지를 베고 누우며 물었다. 태섭이 싱긋 웃었다.

「안 비어도 무조건 거야죠. 우리 조카 백 일잔치인데.」

「뭐 준비해 가는 게 좋지? 나 일단은 신발 하나 주문해 뒀는데.」

「어이구, 정대만 씨. 보통 아기들은 돌 즈음 되어야 걸어요. 그 쯤이면 선배가 사준 신발 안 맞아서 새로 구해야 할 걸?」

「엥? 진짜? 아, 지금 배송 중인데. 어쩔 수 없다. 장식품으로 쓰라고 해야지.」

「대신 턱받이 하나 준비해줘요. 백 일 지나면 이유식 먹을 테니까.」

제 자식도 아닌데 작은 조카만 보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조카바라기가 되나 보다.

태섭은 동영상을 멈추고 모자를 뜨개 가방 안에 넣었다. 조카 사랑이 대단한 것도 좋지만, 조카에게 푹 빠져 최근 대만이든 태섭이든 상대에게 소홀하지 않았나 싶은 감은 있었다. 하물며 이제야 겨우 둘이 같이 있을 시간이 늘어났는데. 난 아직 형이 최고인데, 이런 소리를 하면 백 일도 안 된 애한테 질투하냐는 소리를 들을까봐 차마 뱉을 수 없었다.

태섭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대만이 억 소리를 내면서 소파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태섭이 바로 손을 뻗어 대만의 머리를 받쳐주었다. 오, 땡큐. 실실 웃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태섭이 양 다리를 잡아 당기더니 허리와 엉덩이를 받치고 번쩍 안아 들었다. 미친, 얘 왜 아무렇지도 않게 드는데. 태섭이 미국에서 힘과 근육을 엄청나게 키웠다는 걸 이런 식으로 실감할 때마다 대만은 까닭도 없이 두근댔다. 익숙하게 태섭의 허리에 다리를 척 감고는 몸을 기대며 물었다.

「뭐야, 우리 송태섭이. 어디에서 불끈하셨을까.」

「형, 우리도 그냥 애 하나 만들까요?」

「뭔 소리야. 남자 임신이 어떻게 가능, 아, 야!」

말을 다 듣지도 않고 그대로 침실로 들어가버렸다. 입으로는 내내 칭얼거리면서도 대만은 버둥대지 않았다. 이래서 내가 형을 사랑한다니까.

 


 

「백 일 잔치한 지가 언제인데….」

「헉. 형 주연이 이쪽 본다. 주연아~.」

조카 주연이가 오만상을 쓰며 열심히 걸음을 떼고 있었다. 대만은 핸드폰으로 이 영광의 순간을 찍고 있었다. 이럴 줄 알고 내가 최신 기종으로 바꿨지. 대만은 10년 동안 굴린 핸드폰을 떠올리며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태섭은 그 옆에서 열심히 손뼉을 치며 조카를 부르고 있었다. 조카가 한 발을 뗄 때마다 삼촌들이 더 유난이었다.

잘 걷던 주연이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부모를 돌아보며 울먹였다. 앞에서 야단법석을 떠는 삼촌들이 부담스러웠는지, 태섭이 달래는데도 결국 주저앉아 우앙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급히 우진 씨가 주아를 안아 토닥였다. 아이고, 우리 주연이 많이 힘들었어요? 대만이 급히 소파에 있던 애착 딸랑이를 가져와 아라에게 쥐여주었다. 아라가 옆에서 흔들며 아이를 진정시켰다. 태섭이 대만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한소리했다.

「그러게 내가 카메라 너무 들이대지 말라고 했죠.」

「옆에서 시끄럽게 박수 치던 인간이 누구더라.」

「얼씨구.」

니가 더 못했네 마네를 따지는 철부지 삼촌들을 향해 아라가 한마디했다. 우진 씨가 토닥이는데도 주연이는 울음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가 안절부절못하자 소파에 앉아 구경하던 향미 씨가 손을 내밀었다. 향미 씨가 주연이를 조심스럽게 안아 토닥이면서 좌우로 흔드니 얼마 지나지 않아 눈물이 멈췄다. 아라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엄마는 어떻게 애를 잘 재워?」

「아라 너도 이렇게 좌우로 흔들어주면 잘 잤어. 태섭이도 그랬고.」

향미 씨가 부드럽게 웃으며 태섭을 쳐다봤다. 태섭은 그랬나, 중얼거리면서 시선을 돌렸다. 대만만 볼 수 있는 뒷목이 새빨갰다. 대만이 태섭을 가리키면서 거들었다.

「얘 요즘도 그래요. 잠투정 하고 있을 때 어깨 잡고 살살 흔들면 금방 자…. 아 아프다고!」

대만은 입방정을 떤 대가로 또 태섭에게 등짝을 맞았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다. 우렁찬 짝! 소리에 향미 씨는 눈을 휘둥그레 떴고, 아라는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 앞에서 형을 때려버린 태섭은 당황한 표정으로 굳어버렸다. 와중에 대만으 또 태섭을 놀렸다. 와 송태섭 어떻게 어머님 보는 앞에서 날 때리냐. 내가 때릴 때가 어디 있다고…. 결국 태섭은 대만을 데리고 잠시 바깥으로 나가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향미 씨는 잠시 닫힌 현과문을 바라보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둘이…. 아직 사이 좋은 거지?」

「아, 몰라요. 케이크나 먹어야겠다.」

아라는 딴청을 피우며 냉장고로 다가갔다. 조카는 할머니의 품에 안겨 옹알댔다.

집을 나온 김에 근처를 산책하던 태섭과 대만은 그 와중에도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아니, 진짜라니까? 너랑 주연이 엄청 닮았는데. 아라 딸이 아니라 네 딸처럼 보일 만큼.」

「그 말 아라랑 우진 씨 앞에서 하지 마요.」

「아냐, 묘하게 눈썹 짝짝이인 게 비슷해. 그렇게 유전이 될 수도 있나?」

그러더니 태섭을 홱 돌아보면서 가만히 얼굴을 쳐다봤다. 왜, 왜요. 태섭이 움찔하며 투덜거리자 대만이 태섭의 눈썹을 엄지로 쓸면서 말했다.

「궁금하다. 네 애는 널 얼마나 닮을까.」

나는 다른 게 더 궁금한데. 태섭은 그 틈을 타 대만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정대만은 누구라도 친하게 지내고 싶어할 만큼 잘생긴데다가 키도 훤칠한 남자다. 넉살도 좋고, 낯을 가리는 자신과 달리 시원시원하고 어떤 사람과도 친하게 지내면서 자기만의 선이 확고하다. 종종 아라는 태섭과 대만을 번갈아 보면서 <대체 왜 우리 오빠를 좋아하는 거예요?>같은 질문을 던졌다. 아라에겐 조용히 하라고 했지만 사실 태섭고 궁금했다. 이 잘난 사람이 대체 뭐 때문에 나를 선택한 거지. 그러나 지금까지는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왠지 그 이유를 알게 되면 정대만과 헤어질 거 같았다.

태섭은 대만의 오똑한 코와 잘 정리된 이목구비, 깊은 눈과 오를브색 눈동자를 천천히 쳐다봤다. 아마 대만의 자식은 아들이든 딸이든 그를 빼닮아 한 미모 하는 사람으로 자랄 것이다. 성격도 한 성질 하면서 의외로 말랑한 부분이 있어 사람들이 좋아할 테고. 어디 하나 모난 곳 없이 좋은 사람으로 자랄 것이다. 대만이 좋은 사람이니까. 막연히 그런 믿음이 있었다.

「형. 우리가 만약에 애를 갖는다면.」

「응?」

대만은 태섭의 뜬금없다 싶은 이야기에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 사소한 행동이 기꺼웠다.

「날 닮았으면 좋겠어요, 형을 닮았으면 좋겠어요?」

음? 대만은 뜬금없어 하면서도 금방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태섭은 제 신발코에 시선을 고정했다. 멀리서 농구공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대만이 그 사이로 말을 흘렸다.

「나는 딱 반반이었으면 좋겠는데.」

대만이 태섭을 쳐다보면서 웃었다. 태섭이 눈썹을 들자 대만이 반문했다.

「그렇지 않아? 난 우리 애 요모조모 뜯어보면서 어디가 널 닮고 어디가 날 닮았는지 찾아보는 재미가 있을 거 같은데. 아 물론 우리가 애를 낳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데려온 애도 왠지 서로를 닮을 거 같지 않냐? 그치?」

태섭이 다시 조용해지자 대만도 덩달아 입을 다물고 눈치를 봤다. 왜 저러지, 쟤 저러면 빡쳤거나 정색하거나 둘 중 하난데. 태섭의 분위기를 살피던 대만은 이내 꼼지락대기 바쁜 손가락을 발견하곤 빵 터져버렸다. 태섭이 시뻘개진 얼굴로 웃지 말아요! 라며 등짝을 때렸다. 그렇지만 태섭아, 그렇게 대놓고 설렌다는 티를 내면 웃을 수밖에 없지 않냐? 대만은 태섭의 타는 속과 귀때기도 모르고 맞으면서 웃기만 했다. 태섭이 아무리 때려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둘이 극적인 화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집안은 주연이가 무아지경으로 뜯어놓은 휴지로 난리가 나 있었다. 부엌에 있던 세 사람은 대만의 비명 소리를 듣고 거실로 돌아왔다가, 온통 하얗게 뒤덮인 바닥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특히 청소 담당인 우진 씨가 온 얼굴로 절규를 뱉었다. 역시 아이 돌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태섭이 아이를 다그치진 못하고 가만히 안고 있는 부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형 우리 아이 데려오는 건 좀 찬찬히 생각해 보기로 해요.」

「찬성. 왠지 우리 애기는 더 크게 사고칠 거 같지 않냐.」

「형 안 닮은 애 데려오면 돼요.」

「얼씨구, 넌 사고 안 치고 다녔냐.」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둘은 습관처럼 또 투닥댔다. 숙련자인 향미 씨만 말없이 휴지조각을 주웠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두 남정네가 거실 청소에 가담했다.

 


 

주연이가 부루퉁한 얼굴로 영상통화를 걸었다. 울기라도 했는지 눈가가 빨갰다. 태섭은 운동 기구를 내려놓고 조카를 달래주었다.

「아이고, 우리 주연이. 누가 이렇게 울렸어, 응? 엄마야? 아빠야?」

「있자나, 삼촌.」

「어엉.」

여섯 살이 되었는데도 주연이는 삼촌을 <삼춘>이라고 발음했다. 아마 어머니의 입버릇이 옮은 것이리라. 분한 듯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아무래도 단순히 울어서는 아닌 것 같다. 태섭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벤치에 앉았다. 주연이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내가아, 애들한테, 우리 삼촌 어엄청 유명한 농구선수라고 했는데에, 승헌이가 거짓말이래.」

승헌이는 주연이의 이야기에서 종종 나오는 남자애였다. 마치 만화에 나오는 심술쟁이 꼬마처럼 짓궂은 말만 골라서 하는 아주 성질머리 고약한 녀석인데 유독 주연이와 말다툼이 잦다. 아무래도 주연이가 삼촌 자랑을 하자 그럴 리가 없다며 거짓말쟁이 취급을 했나 보다. 그래서 주연이가 저렇게 화가 났나. 태섭이가 주연이의 편을 들었다.

「그랬어? 승헌이 걔 진짜 나쁜 애네. 주연이 말도 안 믿고.」

주연이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아빠가아, 삼촌들은 이름 대면 다들 안다고 했는데에.」

「그치그치, 삼촌들 이름 모르는 사람 대한민국에 아무도 없지. 그런데 애들은 몰라서 섭섭했구나, 우리 주연이가.」

태섭은 소파에 기대 앉아 주연이의 재잘거림을 듣다가 허리를 세우며 물었다.

「내일 삼촌이 데리러 갈까?」

「삼촌 올 거야?」

「응. 우리 주연이 삼촌이 누구인지 보여줘야지~.」

태섭이 너스레를 떨자 주연이의 목소리가 금방 밝아졌다. 꼭 올 거지? 진짜 올 거지? 나 아빠한테 말해도 돼요? 태섭은 글대ㅗ 된다고 했고,주연이의 자랑을 들은 우진 씨가 전화를 받았다.

「아, 네. 형님. 정말 내일 오시게요?」

「응. 우리 주연이 기 살려줄 겸 오랜만에 얼굴 보려고. 요새 둘 다 바빠서 못 갔잖아. 주연이가 많이 보고 싶어하던데.」

「그건 그렇지만…, 번거롭지 않겠어요? 안 그래도 형님 이번 주 금요일에 또 무슨 촬영 가야 한다면서요.」

우진이 다른 방으로 들어왔는지 문을 닫는 소리가 났다. 태섭은 우진의 이런 섬세함이 마음에 들었다. 혹시 몰니 아이가 들리지 않을 곳에서 걱정해주는 세심한 배려가. 우진이 까다로운 대만과 태섭의 존프레스를 뚫고 아라와 결혼에 골인한 비결이었다. 태섭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하루만 촬영하는 건데. 대만이 형도 시간 괜찮다고 하면 같이 갈게.」

「그러시면 저희야 좋죠. 식사도 하실 거면 제가 준비해 둘게요.」

「어, 그럼 내일 봅시다.」

「늘 감사합니다, 형님.」

전화가 끝나자마자 대만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저녁 운동을 마친 대만이 문고리에 걸린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물었다.

「무슨 전화야? 우진 씨?」

「주연이가 자기 삼촌들 엄청 유명하다고 했는데 아무도 안 믿어서 속상했다는데요.」

「어이구, 애들이 뭘 알겠어. 우리 조카 기 살려주러 가야겠구먼?」

대만이 태섭과 똑같은 말을 했다. 태섭은 대만에게 갈아입을 옷과 속옷을 건네주며 말했다.

「안 그래도 내일 아침에 아라네 가서 주연이 하원할 떼 데리러 가려고요. 형은 어때요? 시간 괜찮아요?」

「어, 오전엔 회의 있어서 힘들 거 같은데…. 저녁은 갗이 먹을 수 있을 듯? 내가 끝나자마자 갈게.」

「너무 무리하진 말고요. 그러면 우진 씨에겐 형도 간다고 말할게요.」

「그래. 아, 주연이 데리러 갈 때 뭐 입어야 하지? 야, 보통 부모님들은 애기 하원할 때 뭐 입고 간다냐?」

누가 농구계 패셔니스타의 남편 아니랄까 대만은 화장실로 들어가 씻는 내내 무슨 옷을 입을지 궁리했다. 역시 무난하게 입고 가는 게 다른 분들 보기에 안 불편하려나…. 아 그래도 우리 주연이 기 살려주려고 가는 건데. 씁, 헤메코 하고 선글라스 쓰는 정도는 괜찮겠지? 집에 무난한 향수가 있던가? 오만 가지 쓸데 없는 고민을 하고 나온 대만은 익숙하게 식탁에 앉았다.

매주 월화수는 태섭이 식사 당번이다. 오늘 저녁 메뉴는 바질에 버무린 닭가슴살을 얹은 메밀면 포케였다. 아보카도가 들어있는 쪽은 태섭의 것이다. 잘 먹겠습니다, 태섭을 향해 환히 웃으면서 대만은 젓가락으로 면을 가득 떠 입안에 넣었다. 역시 운동 후 먹는 저녁밥이 진미였다. 그들은 마주 보고 앉아 하룻동안 있었던 일이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은 가십 따위를 이야기했다. 대만이 올리브를 젓가락으로 집으며 말했다.

「아, 이번 아시안게임 올림픽 국대로 정우성 올 수도 있다.」

「걔가요? 아겜은 시시하다고 안 나가려고 했던 놈이 웬일로.」

「이명헌이 이번에 참가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거든.」

우성과 명헌은 십여 년 사이 벌써 20번을 넘게 깨지고 붙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깨진 게 지난 4월이었다. 이명헌의 결혼 찌라시 때문에 우성이 혼자 토라져서 한 달 동안 연락을 안 했더니 그래도 헤어진 상태가 되었단다. 그렇게 미워했으면서 이명헌이 국대로 나간다는 이야기에 소집에 응할 거라고 하는 우성이 태섭은 그다지 신기하거나 하진 않았다. 서로 맞다이까지 간 상대랑 결혼을 한 정대만과 송태섭이라는 사례가 있어서인가.

「백호랑 태웅이는요?」

「글쎄? 걔가 나간다고 했으니까 당연히 간다고 하겠지? 아니 같은 팀으로 뛰는 건데 왜 호승심을 불태우냐 걔네는.」

「뭐 너를 제치고 내가 선발로 풀출전을 하겠다 그거겠죠. 걔네 북산 때도 그랬잖아요.」

「하여튼 이제 삼십이 넘었으면서 철이 안 들었어.」

「철 안 든 건 선배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내가 왜?」

태섭이 손을 뻗어 대만의 입가에 묻어 있던 참깨를 뗐다. 엇, 뒤늦게 제 입을 더듬던 대만이 머쓱하게 웃었다. 야 나 설마 저번에도 이렇게 막 묻히고 먹었냐. 입가를 쓸며서 묻는 말에 태섭은 이번만 그렇다고 말을 하까, 아니면 항상 그랬다고 놀릴까 고민하다가 붙어 있던 참깨를 먹으며 물었다.

「왜요, 그런 거 신경 안 쓸 거 같은 분이.」

「아니, 좀 멋있어 보이고 싶으면 좀 덧나냐.」

대만이 우물거리면서 마저 면발을 삼켰다. 왜 사람이 나이를 먹을수록 귀여운 것만 늘지? 다들 10년 이상 얼굴을 보면 질린다는데, 먼저 식사를 마친 태섭은 대만이 수저를 내려놓을 때까지 가만히 그가 먹은 것을 지켜봤다. 대만이 시선을 알아채고 슬쩍 젓가락을 내리며 쏘아붙였다.

「그렇게 좀 보지 마라 새꺄.」

「내가 내 거 본다는데 왜요?」

「난 내 거거든?」

대만이 호통을 치면서 젓가락을 탁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태섭은 아랑곳않고 그릇을 흘끗 보면서 물었다. 다 먹었어요? 보울 안에는 면이 조금 남아 있었다. 의도가 뻔히 느껴지는 질문에 대만은 얼굴을 구기다가 벌떡 일어났다. 태섭도 따라 일어나 대만에게 다가왔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멱살을 잡고 거칠게 키스했다. 한참을 쪽쪽대던 대만이 피식 웃으며 이마를 맞댔다.

「너 아보카도 맛 나.」

「형은 메밀 맛 나요.」

「그거 안 넣으면 안 돼? 느글거린단 말이야.」

「생각해 보고.」

지근거리에서 속삭이던 태섭은 대만을 끌어안아 침실로 향했다. 대만이 으학! 하고 즐거운 소리를 내면서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다음날 태섭은 무난한 검은 셔츠와 하얀 바지를 입고 점심 시간에 맞추어 대만을 데리러 그의 구단 경기장으로 향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문자하니 바로 답장이 왔다. 타이밍도 참 좋지, 대만도 방금 막 회의가 끝나고 정리하던 중이었다. 태섭은 1층 홀에 있는 벤치에 앉아 대만을 기다렸다. 그를 알아본 직원들과 선수들이 익숙하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태섭 선수님. 정대만 감독님 기다리십니까?」

「아, 네. 수고하십니다.」

「선수님도 수고하십니다.」

몇 번 인사를 주고받으니 우당탕 소리를 내면서 대만이 대리석 복도 위에서 미끄러지며 등장했다. 어이구, 저러다 미끄러질라. 도무지 철이 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남편 때문에 태섭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 태섭을 발견한 대만이 성큼성큼 경보로 다가왔다. 대만이 흐트러진 넥타이를 바로하며 물었다.

「많이 기다렸어?」

「얼마 안 기다렸어요. 빨리 가요. 주연이 기다리겠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감독님~.」

「네, 수고하십시오!」

대만이 사근사근 인사하고는 태섭의 손을 잡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대만은 태섭이 제 키에 맞추어준 조수석에 앉으며 말했다.

「얼마나 걸린대?」

「얼마 안 걸려요. 40분 정도? 선배 뭐 안 먹고 가도 돼요?」

「아라네 근처 가서 뭐 좀 먹고 들어가자. 거기 가는 길목 항상 막혀서 먹고 가면 한 시간 동안 갇혀 있어야 한단 말이야.」

태섭이 고갤르 끄덕이면서 시동을 걸었다. 대만은 피곤한지 금방 곯아 떨어졌다. 태섭은 부드럽게 차를 몰아 아라네로 향했다.

대만의 예상대로 아라네 집 코앞에서 20분 동안 도로에 갇혀 있어야 했다. 겨우 도착했을 때는 1시 20분이었다. 거의 한 시간이나 걸렸다. 대만은 배가 고파지면 예민해지는 태섭을 위해 예전부터 자주 다니던 맛집으로 안내했다. 고등어 정식을 갈끔하게 해치우고 차 안에서 가글까지 한 후에 그들은 아라와 진우 씨가 사는 아파트로 향했다.

초인종을 누르니 향미 씨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밥은 먹고 왔냐고 하시기에 근처에서 먹고 왔다고 하자 내심 서운해했다. 대만이 슬쩍 분위기를 살피더니 입이 심심한데 혹시 주전부리 같은 것 있느냐고 먼저 물었다. 그러자 향미 씨가 조금 밝아진 얼굴로 배를 깎아 오겠다며 두 사람을 소파에 앉히고 부엌으로 향했다. 고마워요, 태섭이 대만의 옆구리를 찌르며 속삭이자 대만이 윙크했다. 야 태섭아 내가 짱이지? 유치한 질문에 태섭은 피식 웃으며 네, 하고 대꾸했다.

대만이 향미 씨가 가져오신 배를 아삭아삭 베어 먹으면서 물었다.

「주연이 몇 시에 하원해요?」

「오후 네 시에 끝나는데, 유치원 차는 4시 반 즈음에 와. 아, 오늘 너희가 데리러 가기로 했지? 유치원까지 마중나갈 거니?」

태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연이 유치원 선생님이랑 연면도 익힐 겸 겸사겸사요. 대만을 집에 데려온 후로 태섭은 부쩍 말이 많아졌다. 향미 씨는 그래, 하고 옅게 웃으면서 빨래를 걷으러 베란다로 향했다. 대만이 벌떡 일어나 향미 씨를 쫓아가며 말했다. 아이 장모님, 저 있을 땐 저 팍팍 부려 먹으라니까요. 태섭은 대만의 살가운 애교에 밖으로 나온 어머니를 보면서 물었다.

「또 뭐 필요한 건 없어요?」

「응? 아, 조만간 김장을 새로 할까 하는데.」

「그럼 그때 다시 올게요. 근처에 방앗간 있는데 거기에서 고춧가루 빻아 올까요?」

「그래주면 고맙지.」

향미 씨는 얼떨결에 대꾸한 다음,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많이 밝아졌다, 우리 태섭이.」

「에?」

태섭은 <네?>와 <예?> 사이 어중간한 발음으로 물었다가 베란다를 바라봤다. 대만은 뭐가 그리 신났는지 흥얼거리면서 빨래를 널고 있었다. 태섭은 머쓱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게요, 형 덕분에 많이 변했네요.

세 시 반이 되자 탯버과 대만은 주차장으로 내려가 주연이를 데려올 준비를 했다. 태섭은 챙겨온 선글라스를 쓰고, 대만은 머리카락을 다시 매만졌다.

「준비됐지 송?」

「물론이지 정.」

시시콜콜한 농담을 나눈 뒤 대만이 시동을 걸었다.

주연은 들뜬 얼굴로 유치원 입구에 서서 삼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삼촌들이 데리러 올 거라고 오늘 낮에 잔뜩 자랑했더니 다른 애들도 차를 타지 않고 같이 기다리고 있었다. 꼭 와야 하는데, 한편으로는 두려움도 느끼며 주연이는 참을성 있게 삼촌들을 기다렸다.

본 적 없는 검은 SUV 한 대가 유치원 앞에 섰다. 조수석과 운전석이 열리자 아기자기한 유치원과는 어울리지 않는 시커먼 남정네 둘이 차에서 내렸다. 선글라스를 쓰고 머리를 올린 것이 딱히 성실해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촌스러운 양아치에 가깝다면 모를까. 그럼에도 하원 담당 선생님이 경찰을 부르거나 애들을 안으로 돌려보내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워낙 유명한 인사들이셔서 그랬다. 그리고 삼촌들을 발견한 주연이는 활짝 웃으며 그들에게 뛰어갔다.

「삼초온!」

「우리 주연이 잘 지냈어?」

「안녕하세요, 주연이 삼촌입니다.」

대만이 주연이를 꽉 끌어안고 예뻐해주는 사이 송태섭이 선글라스를 벗으면서 먼저 악수를 청했다. 하원 선생님은 멍한 얼굴로 손을 잡았다. 세상에, 내가 살면서 느바송을 실물로 볼 줄이야. 상대가 송태섭이면 다른 한쪽이 누구인지는 안 보고도 알 수 있다. 서너 해 전 세기의 로맨스를 찍은 크블의 슈퍼스타, 정대만 아니겠는가. 하원 선생님이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예에…. 송은희라고 합니다. 영광이에요.」

「주연이는 오늘 어땠나요? 애가한 시도 가만히 있질 않는데.」

「어휴, 오늘도 남자애들이랑 한바탕 해서 말리느라 진땀 뺐어요.」

「아하하. 그럴 거예요. 워낙 저를 닮아서.」

태섭이 뒤에서 놀고 있던 대만을 가리켰다. 대만이 주연이를 안고 선생님께 다가와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주연이 삼촌인 정대만이라고 합니다.」

「네, 네, 진짜 두 분 다 실물이 훨씬 낫네요.」

「과찬입니다.」

대만이 서비스 윙크를 하자 태섭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저 인간 또 아무에게나 끼부리고 앉았지. 태섭은 잠깐 대만을 노려보고는 바로주연이에게 인사를 시켰다.

「자, 우리 주연이 이제 선생님께 인사하고 가야지. 안녕히 계세요 선생님~. 하자.」

「안녕히 계세요 선생님~.」

「어어, 그래. 주연이 내일 보자.」

선생님은 웃으면서 주연이에게 인사했다. 대만은 주연이의 손을 들어 선생님께 손인사까지 시킨 뒤 차로 돌아갔다. 대만이 뒷좌석에서 카시트를 꺼내 뒷좌석에 설치한 다음 주연이를 앉혔다. 태섭이 운전대를 잡으면서 주연이에게 물었다.

「오늘은 누구랑 싸웠어?」

「호준이랑. 태성이가 나보고 호박이라고 했어.」

「그 태성이라는 애가 잘못했네. 우리 주연이가 얼마나 예쁜데.」

대만이 바로 주연이 편을 들어주었다. 주연이가 으응, 하더니 말했다.

「그래서 나도 돼지라고 했어.」

「그건….」

「그리고 내가 호준이 세 대 더 때렸어.」

「그건…. 주연이가 좀 잘못한 거 같네.」

대만이 침을 삼키며 말했다. 태섭이 즉시 대만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오 왜, 잘못한 건 잘못했다 해야지. 대만이 눈치 없이 소곤거리자 태섭이 다시 옆구리를 찌르며 주연이에게 말했다.

「괜찮아, 내일 호준이한테 사과하면 돼.」

「으응.」

「꼭 사과해야 해, 알았지? 대만 삼촌도 그래서 태섭 삼촌이랑 잘 지내는 거야. 결혼도 하고.」

「그럼 호준이한테 사과하면 나도 호준이랑 결혼해?」

주연이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태섭이 냅다 대만의 볼을 꼬집으며 수습했다.

「아냐 아냐, 꼭 그렇게 되는 건 아니야.」

「아아아아! 아파 새끼야!」

「애 앞에서 내가 욕하지 말랬죠!」

「으아아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좀 놔라!」

주연은 눈앞에서 난리를 치는 삼촌들을 한심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태섭아 나 지금 괜찮아? 너무 과하진 않아? 야 넌 머리카락 좀 흐트러놔야겠다 무슨 나이트 놀러가는 것도 아니고.」

「아오 이 살마 연식 봐. 요즘 어린 애들은 나이트 안 놀러간다고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태섭은 대만의 손길에 얌전히 몸을 맡겼다. 남이 머리카락 만지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태섭이 유일하게 허락하는 손길이 바로 정대만이다. 대만은 힘을 준 태섭의 머리카락을 적당히 흐트러트린 뒤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저녁 일곱 시, 두 사람은 진지하게 몸단장을 하고 있었다. 태섭은 대포에 가까운 렌즈와 DSLR 카메라를 챙겨 먼저 현관으로 향했다. 곧 붉은색에 금빛 줄무늬가 들어간 넥타이를 멘 대만이 미리 예약한 꽃다발을 들고 뒤따라왔다. 대만이 구두를 신으며 물었다.

「학예회 장소 어디라고 했지?」

「00문화센터요. 가는 길 알아요?」

「네비게이션 치면 나오겠지. 너 선생님께 드릴 꽃다발 챙겼지?」

태섭은 말하는 대신 꽃바구니를 들어 보였다. 대만은 고개를 끄덕이고 현관에 걸린 차키를 챙겼다. 태섭이 양손에 꽃바구니와 대만의 코트를 챙겨 뒤따라갔다.

퇴근 시간이 겹쳐 도로가 차로 꽉 막혀 있었다. 답답해하던 대만이 핸들을 틀어 골목길로 나가기 전에 겨우 문화센터에 도착했다. 무대가 시작하기 딱 5분 전이었다. 꽃바구니와 꽃다발을 전달할 틈도 없이 그들은 강당으로 들어갔다. 어두워진 좌석 자리를 헤치고 두리번거리자 아라가 손을 뻗어 흔들었다. 오빠, 여기. 두 사람은 거듭 옆자리 사람에게 사과하며 자리를 찾아 내려갔다. 아라가 으휴, 하며 이마에 땀이 맺힌 두 오빠들을 타박했다.

「그러게 내가 일찍 나오라고 했지.」

「아 더 일찍 올 수 있었는데 이 자식이 샵에 갔다온다고 난리를 쳐가지고.」

「그러는 형도 30분 동안 화장실에 틀어박혀서 머리 만졌잖아요.」

「형님들, 형님들. 지금 시작한대요.」

우진 씨가 태섭의 어깨를 툭툭 치며 무대를 가리켰다. 대만은 재빨리 카메라를 들고, 태섭은 비디오 카메라를 어깨에 얹었다.

강당 안이 깜깜해지더니, 무대 쪽 조명이 환하게 켜졌다. 짙은 붉은색 커튼이 올라가면서, 곱게 단장한 새싹반 아이들이 걸어 나왔다. 아이들은 한 달 동안 연습한 춤을 추면서 눈으로는 바삐 제 부모를 찾고 있었다. 부모님들도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제 아이의 가장 예쁜 순간을 담았다.

열심히 춤을 추던 주연이가 삼촌들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대만이 황홀한 표정으로 셔터를 눌렀다. 마치 주연이가 태어났을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바라보면서 태섭은 생각했다. 역시 이 사람과 결혼하길 잘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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