宮城

태섭대만

비행중 by 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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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츠이가 결혼을 앞두고 성씨 문제로 할아버지와 싸웁니다

  • 사망 소재 주의



미야기는 지금 가시방석에 앉아 있었다. 가시방석도 아니고 모든 면과 모서리가 가시를 세우고 자신을 콕콕 찌르는 기분이었다. 미야기의 곤란함을 이해하는 미츠이의 친척들이 그를 부엌으로 불러내 음식을 먹이고 있었다. 우리 동서가 가지미 구이를 정말 기가 막히게 하거든. 이 돼지연골조림은 어때? 히사시가 좋아하는데. 미야기 군은 요리 좀 할 줄 아나? 무슨 요리를 잘 해? 긴장을 풀어주려는 의도인 건 알겠는데, 무슨 신부 수업을 받는 기분이었다. 예비 장인집안 사람들이 쑤셔넣는 대로 받아먹으며 미야기는 적절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네, 진짜 맛있네요. 아, 저도 알아요. 돼지연골조림 잘하는 가게가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일주일 내내 가자고 조르곤 했거든요. 저는 요리는 솔직히 자신 없는데…. 대신 청소는 잘 합니다.

조용히 소란스러운 부엌과 달리 거실은 냉랭 그 자체였다. 미야기는 오하기떡을 주워먹다가 거실을 보곤 바로 시선을 돌렸다. 쳐다보기도 무서운 공기가 한 시간 째 돌고 있었다. 부엌보다 조용한데 미야기는 침묵 속에 잠겨 죽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저 부산스럽게 시끄러운 선배가 대체 어떻게 한 시간 씩이나 뿔 난 노인의 성화를 받아주고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다소곳이 꿇고 있는 무릎이 걱정되는 건 말할 것도 아니었고.

침묵이 이어지면 한 가지 법칙이 생긴다. 기싸움에서 진 사람이 먼저 입을 연다. 그 기싸움의 승자는? 바로 미츠이의 조부였다.

「난 반대다.」

「저도 반대입니다.」

「누가 꼬박꼬박 말꼬리 잡고 늘어지라고 가르쳤든?」

「제 의견을 말한 겁니다.」

「유명세 좀 벌었다고 기고만장해지긴. 성을 바꾼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인 거 같냐?」

「그걸 알면서 미야기에게는 성을 바꾸라 하시겠다고요?」

어유, 또 저러네. 미츠이의 어머니의 오촌 당숙이라는(미야기는 상상도 못할 촌수였다. 그러면 미츠이 상과는 대체 몇 촌인 거지?) 사람이 혀를 차더니 읏차, 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식구들도 슬슬 눈치를 보더니 음식 바구니를 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미츠이네 작은 할아버지의 손녀 분이(미츠이보단 세 살이 많다고 한다. 바로 작년에 결혼하셨다) 절로 가자며 미야기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몸싸움에서 절대 밀리지 않기로 유명한 애리조나의 빅 웨이브 미야기 료타 씨는 어어, 하면서 순순히 끌려갔다. 안방 문을 통해 희미하지만 조용한 실랑이가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걔가 데릴사위로 들어오라고 해라. 싫습니다, 전 미야기 쪽으로 할 겁니다. 결국 그 이야기다. 미야기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결국 그게 문제였다. 누가 누구의 성을 다를 것인가.

사건의 발단은 미츠이네 가족을 만날 때였다. 하필이면 잡은 날짜가 미츠이네 할아버지의 생신 근처였던데다, 연애에 시큰둥하던 막내가 결혼 상대를 데려온다는 소식에 할아버지는 물론 온 친척이 미츠이네 집에 모였다. 손도 적은데다 지금은 다 소식이 끊겨 혈육이라곤 가족이 전부였던 미야기는 미츠이 대가족을 보고 순간 얼어붙었다. 고장이 난 제 예비 신랑을 보고 한바탕 웃은 미츠이는 한 사람씩 소개시켜 주었다. 세상엔 친인척을 지칭하는 말이 수없이 많았고, 그것을 일일이 외우고 있는 미츠이가 더 이상 바보처럼 보이지 않았다.

있는 집이라 보수적인 가풍이라 생각하고 긴장했는데, 의외로 미츠이네는 막내의 남자 애인을 보고도 별 반응이 없었다. 그보다는 미야기의 호구조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는 쪽이 더 맞겠다. 고교 후배, 같은 농구부 후배에 현재 미국 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말에 몇몇 친척의 눈에 불이 들어왔다. 아버지는 안 계시고, 어머니가 남매를 뒷바라지했다는 이야기에는 지금까지 수고했다는 말까지 들었다. 미야기가 한 일이라곤 어머니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고 죽어라 농구만 한 것밖에 없는데. 역시 어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입신양명이 맞는 모양이었다. 미츠이네처럼 보수적인 집안이라면 더욱.

예비 신랑이라고 데려왔으니, 당연히 그 문제를 피할 수 없었다.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미츠이의 큰아버지였다.

「그러면 우리 집안 전통대로 미츠이 쪽으로 성을 옮길 건가? 미야기 군은.」

아마 미츠이네 부모님의 파란만장한 연애 및 결혼을 떠올리고 한 말이었으리라. 카나가와에서 제일 잘 나가는 집안의 귀한 막냇딸이 별 볼 일 없는 회사원에게 빠져 결혼을 하네 마네 반대하네 마네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결국 미츠이네 아버지가 데릴사위로 들어오는 식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그놈의 성씨가 대체 뭐가 중요하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직 일본 사회에선 결혼을 하면 반드시 누군가가 성을 바꾸어야 했으므로, 이는 이른바 주도권 싸움이었다. 누구네 집이 입김이 더 센가, 누구네 집이 더 우위인가.

미야기는 이런 싸움이 무의미하고 귀찮은 일이라 생각하는 편이었던데다 둘 다 지금까지 그 문제를 깊게 생각해본 적 없었으므로, 미야기는 대충 그래야지 않겠느냐고 대답할 생각이었다. 성에 무게와 가치를 두지 않는 미야기였기에 누구의 성을 따르는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도 역시 미츠이랑 결혼하려면 이쪽의 비위에 맞춰주는 편이 더 편하니까. 그래서 웃어 넘기려고 했는데, 여태 생글생글 대며 친척에게 애교를 부리던 미츠이가 갑자기 정색을 하면서 대꾸했다.

「아뇨? 제가 미야기 쪽으로 들어갈 건데요?」

할아버지가 찻잔을 놓쳤다. 바야흐로 미츠이 가 제2차 결혼 논쟁이 시작되었다.

宮城

오늘도 미츠이는 할아버지와 한바탕하고 집을 나갔다. 씩씩대는 미츠이와 해탈한 미야기의 손에는 친척들이 싸준 음식이 한가득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른 어른들이 이 사안에 말을 얹지 않는다는 점일까. 아무래도 가장 큰 어르신이자 미츠이의 직계인 할아버지께서 제일 크게 화를 내고 미츠이와 다투니 끼어들기 어려운 구도긴 했다.

수십 번 들을 잔소리 한 번만 들으면 되는데다 미야기는 아무런 피해도 없으니 편했지만, 미야기는 미츠이가 걱정되었다. 가장 아끼는 막내딸의 외동아들이 태어난 날, 할아버지는 온 동네에 떡을 돌리며 자랑을 했다고 한다. 히사시도 당신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 특히 미츠이가 농구를 시작했을 때는 경로당에 갈 때마다 우리 손주는 나중에 농구 국가대표가 될 거라고 그렇게 말을 하고 다녔단다. 그렇게 아끼고 싸던 손자가 근본도 없는 녀석의 성으로 갈아타겠다고 저리 억지를 부리니, 속이 안 타들어갈 리가.

「할아버지랑 그만 좀 싸워요. 나 이제 친척들 얼굴 보기 무서워지려고 그래.」

「네가 싸우는 것도 아닌데 뭘.」

그리고 그분 그래봤자 나중엔 내 편 들어줄 걸. 미츠이는 사과 박스를 트렁크에 넣으며 말했다. 설마 지금 그거 믿고 떼를 쓰는 건 아니겠지? 상대가 미츠이라 제법 그럴듯한 추리였다.

「그리고 우리 그 문제 한 번도 얘기한 적 없잖아요.」

「왜 없어. 내가 몇 번 말했잖아.」

「그러니까 대체 언제…. 아.」

트렁크 문을 닫으니 떠올랐다. 막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이가 다 썩을 정도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연애 초반. 미국으로 놀러온 미츠이가 미야기의 자취방에서 뒹굴거리다가 그렇게 말했다.

<나 그냥 너네 집에 양자로 들어갈까?>

<얼씨구. 또 무슨 바람이 불어서요?>

<아니, 들어봐봐. 동성 결혼이 법제화되지 않은 해외에선 그런 식으로 가족이 되는 경우가 흔하대. 그게 더 빠르고 쉽댔나?>

<됐어요. 그리고 형이 내 양자로 들어오면 부자 관계인데, 아들이랑 침대에서 뒹굴고 싶진 않…, 아! 왜 때려요!>

<이게 입은 발랑 까져선!>

<그리고 꼭 일본에서 할 필요 없잖아요. 여긴 그거 되니까.>

그러곤 밖에 나가 야구 경기를 보러 간 기억이 있다. 그땐 그냥 둘 사이의 농담 따먹기인 줄 알았는데. 그럼 이 사람은 그때부터 미야기가 되려고 생각했던 거야? 어이가 없어 운전석에 앉으며 한숨을 쉬자 미츠이가 입술을 비죽이며 투덜댔다.

「뭐, 왜, 너 내가 진짜 아무 마음 없이 그런 말 한 줄 알았어?」

「아니, 난 형이 그냥 농담처럼 한 말인 줄 알았지. 형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기특하네.」

「어 계속 그렇게 입 털어봐라.」

「그럼데 굳이 내 쪽으로 성을 합쳐야 해요? 딱히 그럴 필요는 없는데.」

미야기가 중얼거리자 미츠이가 오만상을 지었다. 또 뭐가 마음에 아 들어서. 미야기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봤지만 제 발언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궁금할 수도 있잖아. 우리가 무슨 사이인데. 그러나 미야기는 그런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미츠이에게 말해주지 않은 것이 아직도 많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미야기는 미츠이의 자취방 앞에 내려주었다. 추발하려는데 미츠이가 운전석 문을 사납게 두드렸다. 창문을 내리고 고개를 내밀자 미츠이가 쪽 하고 기습 키스를 했다. 동그랗게 뜬 눈을 심술맞게 쳐다본 미츠이는 메롱, 하고 열 살짜리 초등학생처럼 혀를 내밀었다.

「미야기 바보.」

「여전히 모르겠다 미츠이 상.」

「그래서 너는 안 해줄 거야?」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미야기는 다시 고개를 내밀어 미츠이의 입술에 입술 도장을 찍어주었다. 그리곤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갔다.

자취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나에게 전화가 왔다. 안나는 3년 전 연상의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그런데 남편을 두고 오빠에게 전화를 하다니, 사안이 조금 심각한가 본데. 미야기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왜 안나.」

「오빠, 혹시 주변에 이름 잘 짓는 사람 있어?」

아, 미야기는 바로 안나네가 전화한 이유를 깨달았다. 바로 작년에 안나가 아이를 가졌다. 저번에 임신 7개월이라고 했던가, 별 문제가 없으면 미야기가 결혼한 후에 태어날 것이다. 그래서인지 안나는 요즘 새 식구를 맞이할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아기 용품을 사고, 먹는 것, 마시는 것 하나까지 신중하게 골랐다. 조카가 태어날 거라는 소식에 미츠이도 덩달아 신이 나 아기 신발부터 시작해 배냇저고리며 손싸개 등등을 계속 보내다가, 이러다 집이 터지겠다는 안나의 잔소리에 하루종일 삐져 있기도 했다.

이름도 그 준비 중 하나였다. 어머니는 물론 남편 쪽 사람들까지 작명소를 들락날락하며 좋다는 이름을 받아왔으나 안나의 마음에 딱 꽂히는 이름이 없었다. 며칠 전에도 가족 채팅방에 <엄마는 우리 이름을 어떻게 지었어?>하면서 하소연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얼씨구, 아직도 못 정했어?」

「아 진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아니면 후보 보내줄 테니까 오빠랑 밋짱 마음에 드는 거 하나씩 골라볼래?」

대범하고 발랑까진 안나는 세 살 더 많은 미츠이를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밋짱>이라고 부르더니 아직도 버릇을 못 고쳤다. 단 한 번도 제지하거나 혼내지 않은 미츠이 탓도 있었다.

그런데 안나, 곧 <밋짱>이라고 못 부를 텐데. 그 사람은 미야기를 하겠다고 자기 할아버지랑 싸우고 있거든. 생각이 짬시 다른 길로 빠졌더니 안나가 호통을 쳤다.

「료짜앙~! 듣고 있어?」

「어? 어어, 듣고 있지. 나중에 한 번 보내 봐. 미츠이 상이랑 열심히 고민해서 정해볼게.」

「진짜? 아싸! 고마워!」

「그런데 안나.」

「왜?」

「너는 왜 <카나메>가 되기로 한 거야?」 

「그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료짱?」

료짱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안나가 목소리를 깔며 물어 미야기는 헛웃음을 지었다. 누가 안나를 보고 눈치가 없다고 하는가. 오히려 안나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야기 가에서 가장 눈치가 빨랐다. 다만 막내 특유의 발랄함과 낙관적인 마인드로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건네서 다른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할 뿐. 미야기가 벽에 기대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미츠이가 요즘 할아버지랑 싸우고 있거든. 자긴 미야기를 할 거라고. 그런데 할아버지는 내가 미츠이 가에 들어와야 하는 거라고 하시네. 안나는 진지하게 미야기의 말을 듣다가 말했다.

「밋치가 료짱을 엄청 사랑하나 보네.」

「그런가?」

「응. 료짱의 가족이 되고 싶다는 거잖아?」

「그거야 결혼하면 가족이 되는 거 아닌가. 내가 미츠이가 된다고 그게 바뀌는 것도 아니고.」

「료짱, 눈치가 이렇게 없으면서 어떻게 밋치랑 연애를 한 거야?」

안나가 끌끌끌, 하고 혀를 찼다. 시끄러워, 장난스럽게 한마디 하니 안나가 다시 진중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밋치의 <가족이 되고 싶다>는 말이야 료짱, 미야기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얘기야.」

미야기를 사랑하니까 미야기가 되고 싶다. 미야기의 일원이 되고 싶다. 미야기뿐만 아니라 미야기 네의 식구가 되고 싶다. 미야기는 그런 뜻으로 이해했지만 여전히 미츠이의 결정이 선뜻 납득이 가지 않았다. 굳이 우리 식구가 될 필요가 있나? 미야기에게 미츠이는 두 번째 형 같은 느낌이고, 아마도 안나도 비슷한 기분을 받았을 테지만, 그렇다고 미츠이를 소짱 대신으로 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둘은 결이 완전히 다르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미츠이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텐데.

미야기는 다시 안나에게 물어보려고 했으나, 안나가 급히 전화를 끊었다. 아, 류짱 왔다. 나 전화 끊을게! 미야기는 씁쓸하게 웃으며 끊긴 전화기를 쳐다봤다. 이젠 오빠보다 자기 남편이 더 중요하다 그거지. 그게 당연한 건데 왠지 서운했다.

 

 ꔚ

 

성을 누가 바꿀지는 여전히 정해지지 않은 채, 결혼 준비는 착착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혼인신고는 추후에 성 문제가 해결된 뒤 미국에서 하기로 하고 일단은 일본에서 식을 올리기로 했다. 예산은 미츠이의 주장에 따라 미야기 네에게 부담이 가지 않는 선으로 조율했다. 나도 벌 만큼 번다고 미야기는 주장했지만 미츠이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건 어른 말 듣는 법이다, 그렇게 말하는 본인도 진짜 <어른>은 아닌 주제에.

결혼식이 두 달 남은 시점에서 미츠이와 할아버지는 서로 만나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를 설득하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은 조부 댁에 들렀는데, 요즘은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 이러다 정말로 식을 앞두고 절연하는 거 아닌가 싶어 미야기가 슬쩍 물었더니, 그 사이 건강이 악화되어 요양원에 들어갔다고 대답했다. 미야기가 의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게 속 좀 적당히 썩이지 그랬어요. 우리 첫 상견례 할 때도 몸이 안 좋으셨다면서요.」

저녁 여섯 시. 그들은 카페에서 결혼식 회의를 하다가 나와 식사를 하러 가던 중이었다. 미츠이가 조수석 문을 열면서 말했다.

「작년부터 편찮으셨어. 치료하면 호전될 수 있는데, 할아버지께서 갈 날 얼마 안 남은 늙은이한테 쓸데없는 돈 낭비하지 말라고 고집을 부리셔서. 치료 기간을 많이 놓쳤지.」

「여러 모로 대단하신 분이네요 미츠이 상네 할아버지.」

「그치? 너무 고집불통이셔서 걱정이야.」

「아무래도 그 고집을 미츠이 상이 물려받은 거 같은데요.」

「뭐 임마?」

「아니 뭐, 맞는 말이잖아요. 미츠이 상 고집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미츠이 상 핸드폰 울리는 거 같은데.」

「어, 진짜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자마자 미츠이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미야기도 숨을 죽이고 전화의 내용을 들으려고 애를 쓰지만 음량이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았다. 네, 네, 네. 알겠습니다. 굳은 목소리로 <네>를 반복하던 미츠이가 전화를 끊었다. 미야기가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 아프대요?」

「미야기.」

미츠이는 파르르 떨리는 숨을 뱉더니 재빠르게 번호를 누르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미야기를 흘긋 바라봤다. 억지로 울음을 참는 것처럼 눈가가 빨갰다.

「시간 비워 놔. 할아버지 돌아가셨대.」

귀하게 키운 막내손자의 결혼을 앞두고, 미츠이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곧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미츠이 쪽 구단의 감독이었다. 네, 감독님. 미츠이입니다. 제 할아버지께서 금일 돌아가셔서. 네. 네. 감사합니다. 아마 나흘 뒤에는 복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미야기는 핸들을 꺾어 미츠이의 집 방향으로 돌렸다. 그가 전화를 마치자마자 미야기는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장례식장 어디래요?」

미츠이의 집에서 급히 세면도구를 챙긴 다음, 미츠이가 알려준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장소는 후쿠오카의 한 병원이었다. 겨우 도착하자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미츠이의 가족들이 두 사람에게 상복을 건네 탈의실로 안내했다. 새하얀 복도를 따라 줄줄이 이어진 조문 화환이 낯설게 느껴졌다. 분명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한 번 본 광경일 텐데. 마치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들은 방에서 새어 나오는 곡소리를 뒤로 하고 침묵 속에서 검은 옷으로 갈아 입었다.

먼저 옷을 갈아입고 나온 미야기가 집에 연락을 남겼다. 미츠이 상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 주소를 보내줄 테니 시간 될 때 오라고 하자 어머니가 안타까워하며 내일 첫 차를 타고 내려오겠다고 답했다. 전화를 끊고 탈의실로 돌아가자 주섬주섬 옷을 챙기는 미츠이가 보였다. 내려오는 내내 미츠이는 정신이 빠진 사람처럼 굴었다. 아직도 현실 같지 않은가 보다. 미야기는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도 아버지와 형이 없어졌을 때(당시 열 살도 채 되지 않았던 미야기는 아버지가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현실감이 없었으니까. 미야기가 미츠이의 어깨를 다독이고 속삭였다.

「갈아 입었으면 가요. 사람들이 기다리겠어요.」

식구가 많은 만큼 빈소를 찾는 문상객도 많았다. 모두 저녁에 급한 연락을 ㅂ다고 내려와준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예비 신랑인 미야기를 볼 때마다 같은 말을 했다. 집안 경사를 앞두고 돌아가시다니, 결혼을 앞두고 어르신이 돌아가시다니. 참 심란하겠다고.

미야기야 몇 번 본 적 없는 어르신이니 별 유감은 들지 않았지만, 미츠이가 가장 신경 쓰였다. 누구보다도 미츠이의 농구를 응원하고 지원해준 할아버지. 미츠이가 탈선했을 때도, 그래서 친척들이 수군거릴 때도 그의 부모와 더불어 유일하게 미츠이를 믿어주었다. 사실 그게 가장 중요한 건데,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성씨 문제로 한 달여 동안 말싸움을 한 것이 그들의 마지막 기억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일찍 돌아가실 줄 알았으면 역시 내가 먼저 미츠이 가에 들어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건데. 더 살갑게 다가가는 건데. 그러나 미야기는 유구하게 어른이 가장 어려운 청년이었다. 아버지와의 기억이 거의 없고 어머니와는 서먹했던 아들이라서 그런가. 단정함과 고분고분함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어른들에게 예쁨 받기 어려운 성격과 외관이기도 했지만.

미야기는 다시 미츠이를 살폈다. 미츠이는 정신없이 조문객을 받고 절을 올리고 있었다. 미야기도 엉거주춤 따라 절을 올렸다. 흘끗 본 미츠이는 그 몇 시간 사이 눈이 푹 꺼져 있었다. 괜찮은 척 해도 스트레스를 이만저만 받은 게 아닌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지. 마지막 기억이 그렇다면. 미야기는 미츠이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도 형에게 못된 말을 한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기에.

추운 날, 지하에 있는 장례식장은 환기도 안 되는데 난방을 세게 돌려 너무 더웠다. 이런 데에선 아무도 잠들 수 없을 것이다. 더운 건 싫다며 한겨울에도 살짝 낮은 온도로 보일러를 맞추고 자는 미츠이는 더더욱.

그렇다고 상주가 장례식장을 비우고 다른 데에서 잘 수도 없는 노릇이고. 미야기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미츠이의 손을 살며시 잡아주는 것뿐이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새벽 두 시가 되어서야 그들은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급하게 시래기국과 고기로 끼니를 때우고서야 장장 여덟 시간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목이며 배가 돌이 낀 것처럼 꽉 차 뭐 하나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미츠이도 사정은 마찬가지인지, 안 그래도 입이 짧은 인간이 밥을 깨작대며 먹고 있었다. 보다 못한 미야기가 미츠이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저희 잠시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여기 난방이 엄청 잘 돼서 머리가 좀 아프네요. 미야기는 처음으로 어색한 넉살을 부린 다음 미츠이를 데리고 식장을 빠져나왔다.

나오자마자 미야기는 후회했다. 지금이 한겨울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카나가와보다는 남쪽이지만 해가 저문 새벽이라 체감온도는 영하에 가까웠다. 그런 날씨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상복 차림으로 덜렁 나왔으니, 태어나 북쪽은 한 번도 밟아본 적 없는 두 사람은 새까만 추위 속에서 덜덜 떨어야 했다. 아씨, 가오 다 빠지게 이게 뭐냐. 미야기는 꽉 잡은 미츠이의 손만 주물거리다 하늘만 보았다. 운도 지지리도 없지, 하필이면 구름이 잔뜩 끼여 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래서….」

「네?」

미츠이가 뭐라고 중얼거렸다. 미야기가 더 잘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미츠이가 미야기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이래서 너 미츠이로 들이고 싶지 않았던 거야.」

미야기는 누만 끔뻑거렸다. 할아버지의 부고와 내가 성 바꾸는 게 무슨 상관? 미츠이가 잔뜩 물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 우리 집으로 들어오면…. 나중에 죽었을 때 <미츠이 료타>로 묻히는 거잖아. 미야기가 아니라. 안나도 카나메 쪽으로 들어갔는데. 그러면….」

미츠이는 킁, 하고 소리를 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면…. 너네 어머니 쓸쓸해하실 거 아니냐.」

 아, 그래서. 이제야 미야기는 미츠이가 고집을 부렸던 이유를 깨달았다. 미츠이는 미야기가 <미야기 료타>로 게속 기억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겸사겸사 미야기 가에 <미야기>를 한 명 더 주려했던 것이다. 만일 그들이 자식을 입양한다면 미야기는 더 많아질 거다. 그러니까 미츠이는, 미야기의 사랑스러운 애인이자 에비 배우자는, <미야기>에게 가족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소중한 사람을 둘씩이나 잃고, 파편화되고 해체될 뻔한 세 <미야기>에게. 새로운 <미야기>를 더 얹어서 외롭지 않게 해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가족이라는 거, 딱히 별 미련은 없었는데. 안나가 결혼할 때도 조금 시원섭섭하기만 했는데. 사실은 미련이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누구보다도 가족을 원했던 건 결혼하자고 시종일관 졸랐던 미츠이가 아니라 미야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야기는 이별을 알기에 헤어지고 싶지 않아 자꾸 미루었던 것이다. 가족의 사별과 애인의 사별은, 같은 종류의 이별이더라도 무게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끝이 두려워 시작조차 하지 않다니 어불성설이었다. 그럴 거라면 처음부터 연애를 하질 말지.

그러나 미츠이는 포기를 몰라서, 그보다는 미야기가 원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어서. 미츠이는 고집스럽게 결혼을 밀어붙이고 미야기가 되겠다고 되도 않는 투정을 부린 것이다. 그건 자기 자신보다 남을 더 사랑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원래 인간은 이기적이어서 남을 더 내세울 수 없다. 결국에는 다 나 좋으려고 하는 일일 뿐이다. 그런데 미츠이 히사시, 이 지독하리만치 자신밖에 모르는 인간이 그것을 뛰어넘어버린 것이다. 오로지 미야기에게 가족을 주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사실 사흘 전에 할아버지 뵙고 왔어. 그때 다 얘기했어. 미야기에겐 오래 전에 잃어버린 아버지와 형이 있다고, 그래서 미야기가 되고 싶다고. 그랬더니 엄청 혼을 내시더라고. 남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만이고 실례라고. 너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애가 어떻게 그리 생각이 짧느냐고.」

미야기는 우는 것 같은 얼굴로 헤실 웃으며 미야기를 보았다. 미야기는 대체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마지막엔 그러시더라. 가족이 된다는 건 온갖 경조사를 함께 한다는 건데, 기쁜 일보다는 슬프고 힘든 일이 더 많을 거라고. 그래도 그 애랑 모든 걸 나누고 싶다면 미야기 히사시 하라고.」

미츠이가 차분히 미야기를 마주보았다. 그가 정장 주머니 안에서 사각형의 상자 하나를 꺼냈다. 성씨 문제 때문에 여즉 교환하지 못했던 청혼 반지. 미츠이가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어 반지를 보여주었다. 눈가가 시큰거렸다.

「미야기…. 내 가족이 되어줄래?」

누군가 떠난 자리에 새 가족이 태어났다. 미츠이 네는 사람 하나를 떠나 보냈지만, 혈연이므로 그들은 결코 헤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미츠이는 그 질긴 혈연의 상징이 아닌, 지금까지 한 톨의 접점도 없던 사람의 표식을 달기를 선택했다. 이 시리고 시린 날에. 프러포즈와는 거리가 먼 날에.

미야기는 울기 일보 직전인 얼굴이 되어 미츠이를 끌어안았다. 기꺼이 가족이 되어주겠다는 욕심쟁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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