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되었든 올해도 크리스마스

호열대만

비행중 by 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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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댐 크리스마스 합작

"뭐? 노구식 너도 못 와?"

양호열은 당황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왼손으로 행주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물잔을 닦던 아르바이트생이 이쪽을 흘깃대는 것이 느껴졌다. 전화기 너머에선 노구식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자영업자인 친구를 타박하고 있었다.

"하긴, 자영업자가 회사원의 고충을 어떻게 알겠냐. 우린 연말이 지옥이야, 지옥. 연말 정산도 해야 하지, 남은 프로젝트로 후딱 마감해야지, 들었냐? 이용팔 걔는 지금 3주째 새벽에 집에 들어간단다. 김대남은 아예 여벌옷에 속옷이랑 이불까지 챙겨 간다는데."

"아니, 둘 다 바쁘다고만 얘기해서 그 정도일 줄은 몰랐지. 너네도 고생이다. 우리도 연말에 장난 아니긴 한데."

"하긴, 네 가게는 연말마다 예약으로 미어 터지잖냐."

노구식이 힘내라고 짤막하게 응원하다가 남은 한 명의 소식을 물었다.

"그런데 백호는? 걘 올해도 12월에는 못 들어오나?"

"크리스마스에 올스타전이 있어서 못 온대. 게다가 서태웅이나 송태섭이랑 일정 맞추어서 들어오려다 보니까, 올해는 아무리 빨라도 29일 즈음일 거 같다고 하더라."

"하여튼 걔도 서태웅 얼굴 볼 때마다 싸우면서 그런 건 꼬박꼬박 챙겨. 응? 미국에 한 명 더 있다고 하지 않았냐?"

"아, 그 산왕 밤톨머리? 그러고 보니 걔도 이번에 올스타전에서 만나서 같이 들어온다고 했던 거 같기도 하고?"

양호열은 작년 자신의 가게에서 만난 정우성을 떠올렸다. 맞다, 이름이 정우성이었지. 무슨 중학생 같은 해맑은 얼굴로 강백호에 뒤지지 않게 먹어서 기겁을 했다. 이러다가 네 사람이 모레 분까지 다 먹겠다 싶어 한 시간만에 쫓아냈지. 작년의 해프닝을 떠올리고 킥킥 웃자 노구식이 수상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우리 안 온다는 게 그리 좋냐? 너 이자식 숨겨둔 애인이라도 있는 거 아냐?"

"애인이라니. 이왕 말 나온 거 너네 회사에 예쁜 연상 있으면 소개 좀 시켜줘라. 나도 이참에 총각 딱지 한 번 떼자."

"꺼지세요옹~."

20년지기답게 노구식은 구수한 욕설을 한 번 뱉어주었다. 애초에 피차 생각없이 한 말임을 알기에 양호열도 웃어 넘겼다. 마지막에는 으레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이 붙었다. 전화를 끊고 3초 후, 일을 마친 아르바이트생이 주저하며 물었다.

"저, 이제 가봐도 될까요?"

"응? 아아, 그래. 오늘도 수고했어. 내일 은행 점검 때문에 알바비는 바로 못 줄 거 같고, 모레에 얹어줄게. 친구든 애인이든 만나서 맛있는 거 먹어."

"아, 네. 감사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되세요."

"그래, 너도 메리 크리스마스."

스태프 실로 들어간 아르바이트생은 빠르게 환복을 마친 후 가게를 나섰다. 문을 닫자마자 핸드폰을 켜더니 어딘가로 빠르게 연락을 넣었다. 분명 저 애도 오늘 밤이나 내일 만날 사람이 있는 거겠지. 혹시라도 친구들이 올 줄 알고 일찍 가게를 닫는다고 공지를 올렸는데.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겪은 일이지만 양호열은 미련 넘치는 사람처럼 혹시나 하며 매해 이맘 때마다 조기 영업 종료를 공지하고 혼자 서운해했다. 그나마 모두가 취준생일 때는 북산 고등학교 앞 단골가게에서 만나서 술을 마시곤 했는데. 아, 옛날이여. 쓸쓸함과 함께 양호열은 가게 간판을 거꾸로 달기 위해 스툴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문 앞엔, 누군가와 통화하면서 열을 내는 사람이 하나 서 있었다. 아니, 남의 가게 앞에서 무슨 저런 짓을. 양호열은 눈살을 찌푸리며 상대를 보았다. 양손에 종이봉투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사내는 계속 상대방에서 떼를 쓰고 있었다. 아하, 약속이 쫑난 거군. 양호열은 바로 사태를 파악했다.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만나기로 며칠 전, 길게는 몇 달 전에 약속을 다 해놓고 정작 당일날 온갖 사정을 들이밀며 일방적으로 취소 통보를 보내는 사람들. 그러기라도 하면 양반이다. 세상엔 아예 연락도 없이 잠수 타버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의 이야기를 듣는 취미는 없지만, 어쨌든 가게 문을 닫아야 하기 때문에 양호열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선명하게 귀에 박히는 익숙한 목소리.

"야 영걸아 너마저 안 되면 난 누구랑 만나서 놀라는 거냐아."

"…대만군?"

"떠헉."

정대만은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양호열을 돌아봤다. 저 볼이 빨간 건 분명 찬바람을 맞아서일 텐데, 이상하게 제게 들켜 부끄러워하는 홍조처럼 보였다. 전화기 너머에서 이영걸이 물었다. 대만아? 무슨 일이야? 정대만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황급히 대꾸한 후 어물쩍 전화를 끊었다. 아무튼 알았어, 그럼 너 진짜 날 되는 날 부르면 그때 갈게. 엉 너도 메리 크리스마스. 띡 하고 전화가 끊기자마자 양호열이 물었다.

"…일단 안에 들어올래요?"

"어? 어 그러면 나야 땡큐지. 그런데 너 가게 문 닫으려고 지금 나온 거 아냐?"

정대만은 불이 다 꺼진 식탁 쪽과 문고리에 달린 'open' 팻말을 가리키며 물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쪽으로는 눈치가 귀신같이 좋네. 양호열이 음, 하고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그럴려고 했는데, 괜찮겠지 뭐. 뭐라도 좀 먹을래?"

양호열은 아주 자연스럽게 정대만은 자신의 가게 안으로 들였다. 근 10년 만의 만남이었다.

어찌 되었든 올해도 크리스마스

정대만도 사정이 자신과 비슷하긴 마찬가지였다. 딱 하나 차이가 있다면 3개월 전에 정대만의 집에서 파티를 하기로 3학년들과 약속을 했는데, 그들이 줄줄이 취소를 했다는 것 정도일까. 작년에 가정을 꾸린 권준호는 그렇다 치고, 채치수, 이영걸까지 죄다 크런치가 걸려버린 것이다. 대학교에서 붙어 다니던 세 명에게는 연락해 보았느냐고 묻자 '그놈들은 시즌 중에 아무것도 안 하는 미친 것들'이라는 욕설이 돌아왔다. 말은 저렇게 해도 정대만 역시 시즌 중에 마냥 놀러다니진 않았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농구가 간절한 사람이니까. 아니나다를까 정대만이 바로 변명하듯이 웅얼거렸다.

"나도 뭐 시즌 중엔 술 마시거나 어디 놀러다니거나 하진 않는데. 그래도 크리스마스잖아. 연말 최대 공휴일인데 좀 놀아도 되지 않냐?"

"응, 그래서 속상했구나 대만군."

"아니 그렇다고 막 속상해서 눈물이 난다 그 정도는 아니고."

"그 정도는 아니라고 말한 것치곤 아까 이영걸에게 엄청 떼쓰는 것 같았는데?"

"아니, 콩알만 한 게 말은…."

"그래요, 여기 닭꼬치 나왔어요."

"오, 땡큐."

단순한 정대만은 음식이 나오자마자 투닥대던 것도 잊고 얌전히 꼬치를 집어 들었다. 덤으로 레몬 하이볼도 만들어 주었다. 대만군 말대로 연말 크리스마스인데, 술 한 잔 정도는 괜찮겠지. 뭐 프로 선수들도 회식할 때는 술 입에 댈 거 아냐? 닭꼬치 한 입에 레몬 하이볼 한 모금 홀짝인 미츠이가 배시시 웃었다.

"이야, 양호열 손맛이 기가 막히는데."

"에이,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다."

"아니야. 나 입 짧아서 한 음식 많이 못 먹는 거 너도 알잖아. 이거 하이볼? 맞지? 아무튼 그것도 다른 가게에서 주문하면 레몬맛은 하나도 안 나고 약간 텁텁하기만 한데, 여기는 괜찮네."

그런데 이거 도수가 얼마냐? 이거 몇 모금 마셨다고 좀 알딸딸하게 오르는 거 같은데? 정대만이 잔을 톡톡 검지로 치면서 물었다. 다른 손님에게도 맛있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는데, 정대만이 해주는 칭찬은 왠지 귀가 간지러웠다. 닭꼬치가 다 떨어질 때에 맞추어 양호열은 철판에 불을 올리고 야키소바를 만들기 시작했다. 정대만이 부엌을 기웃거리다가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아, 나 그거 완전 좋아하는데. 잘 됐다."

"그래요? 다행이네."

"나 혹시 짬뽕탕도 주문해도 돼?"

"메뉴판은 대체 언제 읽었대."

양호열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웃으면서도 가스레인지를 켰다. 정대만은 술이랑 매운 걸 같이 먹는 게 취향이구나. 가장 먼저 비운 닭꼬치도 매콤한 양념을 바른 것이었다. 양호열은 정대만 몰래 야키소바에도 소스를 추가했다. 미츠이는 다음 음식을 기다련서 열심히 꼬치와 다른 안주를 비워냈다. 잘 먹으니 마냥 흐뭇하기만 했다.

곧 양호열이 고대하던 야키소바를 대령했다. 대만군을 위한 특별 야키소바입니다. 양호려의 너스레에 정대만도 큭큭대면서 받아들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장난치듯이 대꾸한 정대만이 바로 젓가락을 들어 크게 야키소바를 떠먹었다. 곧 정대만의 눈이 토끼만큼 동그래졌다.

"헐, 대박."

"맛 괜찮아요?"

"야 양호열. 너 가게 차리길 잘했다."

정대만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너무 치켜 세우는 거 아니냐며 양호열이 부끄러운 티를 내자(백호군단의 다른 일원이 보았다면 저게 뭐냐고 정색을 했을지도 모른다) 정대만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진짜야. 너 이 정도면 진짜 잘 하는 거야. 야키소바도 적당히 맵네."

"그거 그냥 대만군이 매운 거 좋아해서 그런 거 아냐? 그런데 시즌 중에 매운 거 이렇게 잔뜩 먹어도 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양호열은 완성된 짬뽕탕을 건넸다. 정대만은 가득 찬 볼을 우물거리다가, 쿨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아, 다음주부터 안 먹고 식단하면 돼. 안 지킬 것처럼 말하지만 저 말대로 다음 주부터 피눈물하는 식단 관리에 들어갈 것이다. 지금이라도 연말 핑계 대면서 마음껏 먹게 해줘야지. 양호열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물었다.

"또 먹고 싶은 거 있어?"

"으음…. 아, 맞아."

우물거리며 야식을 즐기던 정대만이 허리를 숙이더니 종이가방 하나를 들어 올렸다. 한참 부스럭 소리가 나더니 안에서 작은 케이크 하나가 나왔다. 어쩐지 종이가방 로고가 익숙하다 했더니 이 근처에 있는 케이크 전문점의 크리스마스 시그니처 홀케이크였다. 초콜렛 시트와 순우유 시트를 번갈아 가며 올려서 만든 얼그레이 딸기 케이크. 아무래도 북산 3학년들과 같이 먹으려고 준비한 듯했다. 정대만이 어색한 표정으로 케이크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그, 혹시 여기 빵칼도 있냐? 이거 그냥 잘라서 나눠 먹자고."

"그, 없긴 한데. 다른 칼로도 자를 수 있는 거지?"

"자를 수 있을 걸?"

정대만은 근거 없이 당당하기만 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바보미 어디 안 갔네, 양호열은 잠시 기다려 보라고 말한 뒤 부엌 안쪽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는 부엌칼 하나와 접시 두 개, 그리고 포크를 가지고 나왔다. 양호열이 선택한 도구를 본 정대만은 살짝 파래진 얼굴로 말했다.

"…사시미 칼은 왜 있는데."

"여기 회도 하거든요. 그냥 네 조각으로 자르면 되나?"

정대만은 무기를 쥔 자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케이를 가져간 양호열은 능숙하게 4등분을 해 가게에서 가장 예쁜 접시에 담아주었다. 정대만은 같이 온 포크를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야, 포크가 이게 뭐야."

"조용히 해요."

문제의 포크는 끄트머리에 아기자기한 고양이가 그려져 있었다. 누가 봐도 이자카야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식기였다. 그러나 3년 전 가게를 열었다는 소식에 강백호가 개업 선물이라며 사온 포크라 차마 버릴 수도 없었다. 정대만은 한참 포크로 놀리다가, 안 먹으면 자기가 가져갈 거라는 협박에 얌전히 떠먹기 시작했다. 음,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던 정대만은 흘끔 양호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넌 안 먹어?"

"뭘요?"

"뭐긴 뭐야. 이거. 케이크."

정대만이 포크로 제가 서너 입 떠먹은 포크를 가리켰다. 아, 하고 소리를 낸 양호열은 이내 불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안 그래도 제 거 자르려고 했어요. 그 목소리에 정대만은 확신하며 웃었다. 나 먹는 거 구경하느라 깜빡하고 있었네.

양호열은 정대만의 몫보다는 조금 작게 잘라 두 번째 접시에 올렸다. 그도 앙증맞은 포크로 가득 떠서 한 입에 삼켰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맛이었다. 역시 유명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나 보다. 한 번도 얼그레이 맛이 좋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생크림과 초콜렛, 딸기가 그 맛을 적당하게 잡아주었다. 딸기도 값싼 냉동 딸기를 쓴 게 아닌지 적당히 상큼하면서 달달한 맛이 오랫동안 혀끝에 맴돌았다.

켜져 있던 라디오에서 열두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그 사이 한 시간이, 하루가 지나,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었다. 그 소리에 정대만이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갑을 꺼내려 하기에 손을 저었다. 그냥 내가 해준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자 정대만은 어떻게 이리 훌륭한 음식을 먹고 돈을 안 낼 수 있냐고 성을 냈다. 혼자 길길이 화를 내는 정대만을 가만히 구경하던 양호열이 한 가지 조건을 내밀었다.

"그러면 내일 나만 초대해줘요."

"너만…?"

"네. 나만. 안 돼요?"

나는 자여업자라 언제든 시간을 낼 수도 있고, 연말에 몰아치는 일로 허덕이지도 않고, 당신 입에 맞는 음식을 언제든 만들어줄 수도 있으니까. 그 말은 삼키고 고개만 애써 주억거리자 정대만도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의심이 가는지 슬그머니 물었다.

"정말 너 초대하는 걸로 된다고?"

"응."

"은근슬쩍 말 놓지."

"우, 대만군 갑자기 왜 그래? 꼰대 같아."

그러자 둘 다 웃어버렸다. 정대만은 지갑을 도로 주머니 안에 넣고, 그 안에서 명함집을 꺼내더니 제 것을 내밀었다.

"자, 여기. 번호 적혀 있으니까 오기 전에 전화해라. 주소 알려줄게."

"아, 고마워요."

"됐어.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정대만은 양호열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둠이 그를 집어 삼켰고, 양호열은 옅은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그를 찾을 수 없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작게 중얼거린 양호열은 한 시간 만에 가게 간판을 'close'로 바꿔 달았다. 머릿속으로는 내일 정대만의 집에 가져갈 재료를 생각하면서. 그의 하루가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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