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발적 행동양식 (1)

슬램덩크 호열대만호열

rootless tree by 마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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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1

양호열은 비밀을 좋아하지 않는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라던가, “날 속였어!” 같은 말을 듣게 되는 작금의 상황이란 겪을 때마다 꽤 성가신 경험이었기 때문에. 하여 말해야 할 것이 있을 땐 한다. 그다지 각오가 필요한 영역의 일일 것도 별로 없어 봤으니 고민할 필요도 없다. 양호열은 늘 의연했다. 늘 그랬던 대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한번 비밀이 없는 사실임을 확인해준다.

“응. 문제 될 거라도 있어?”

알던 것과는 다르게 꽤 솔직한 편임을 자신했다. 스스로 양심을 챙겨 주변 사람에게 주장할 수 있을 정도의 솔직함이었고 그랬기에 매번 그다지 비밀이라고 여겨본 적 없을 사유 중 하나는 늘 꼭 말해두곤 했었는데.

“그걸 이제야 말해?”

팡! 테이블이 흔들릴 지경으로 내리치며 벌떡 일어선 상대의 반응은 양호열이 예상하던 범위에서 또 벗어나지 않았다. 익숙한 반응이 고루한 탓에 무어라 화를 내는 여성의 목소리는 안중에도 없이 다른 생각만 굴러갔다. 이번엔 타이밍이 문제인가? 그런 건 아닐 테고. 저번엔 초장부터 이야기 했더니 시작부터 나가리 되었잖아.

이제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 이쪽이 무엇이 되겠냐는 둥, 믿고 있었는데 배신을 당한 기분이라는 둥, 상처를 받았다, 거짓말쟁이,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르다는 둥. 속사포로 이어지는 서운한 말들에 양호열이 고개를 든다. 가만히 상대의 말을 복기하며 머릿속으로는 변명이 아닌 솔직한 마음을 나열했다. 사귀는 사이니까 이야기했다. 등쳐먹을 생각이 없었으니 배신도 아니다. 상처를 줄 생각은 당연히 없으며 솔직히 말하면 이 상황에 상처를 받아야 할 사람은 이쪽이 아닌가 싶다. 물론 상처를 받은 것은 아니다. 거짓말을 한 적은 없으니 거짓말쟁이도 아니다. 겉과 속이 달랐던가? 이 또한 사실과는 꽤 다르다. 아마도……. 가만히 눈을 마주하자 상대가 멈칫하며 표정을 일그러뜨린다.

우는 건 아니겠지? 울만한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서운한 표정으로 보기엔 지나치게 흉흉하다. 실망감은 차치하고 거의 화가 난 표정이었다. 비밀 없이 사실을 말했다고 해서 이게 뭐 대단치는 않은 내용이었다. 적어도 양호열에게는. 그러나 표정을 보아하니 이번에도 애석하게 되었다.

그래도 꽤 잘 맞지 않았나 싶었는데. 아쉬운 마음에 나직이 한숨을 쉰 양호열이 말했다.

“그럼, 끝낼까?”

짝! 불꽃이 튀었다. 따갑다기 보다는 일순 불에 덴 것처럼 한쪽 뺨이 뜨겁다는 정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예상한 범위에서는 조금 벗어났다. 우와, 주먹이 아닌 걸로 따귀를 맞아 본 건 처음이야.

“넌……. 넌, 너무 비밀이 많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양호열은 비밀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랬으므로 굳이 변명하지는 않았다. 매몰차게 등을 돌린 여성이 다시 돌아볼 기미도 없이 그대로 카페 출구를 들이받듯 어깨로 밀고 떠나버렸다. 양호열 보다 머리 하나하고도 한 뼘은 족히 작아 보일 정도의 작고 아담한 체구에 주변에서도 너나 할 것 없이 귀엽다고 했던 미인이었다. 이목구비가 어쩌고 손이 어쩌고, 주변의 평가와는 별개로 양호열 또한 참 예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웃는 게 예뻤고, 대화도 재밌고. 고집도 있고 강단도 있다. 좋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미처 예상하지 못한 바가 있었다면 손바닥만으로도 불꽃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은 저 패기로 하여금 정말 따귀에 불을 옮기는 듯한 날렵한 스냅이라고 해야 할까. 작은 체구와 비례하게 마찬가지로 작고 하얀 손이었지만 그 손맛 만큼은 아주 화끈했다. 미인은 또 손이 예쁜 법이라고, 대남이었는지 구식이었는지가 낄낄대며 이야기했던 게 생각났다.

조용한 카페 내부의 몇 없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슬쩍 바라보니 얼른 고개를 돌린다. 뭐, 쳐다봐도 어쩔 수 없긴 한데. 그렇다 해도 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다. 아, 네네, 쳐다 보세요.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진실만을 말하다가 방금 따귀 맞고 차였답니다. 다 식어 빠진 커피를 마시면서 혼자서 히죽 웃기까지 했다. 별안간 우스운 생각이 떠오른 바람에 본능처럼 입꼬리를 올렸을 뿐이지만 제 눈빛이 어떤 모양새를 하는 가는 차마 알지 못했다.

어릴때는 강백호가 오십 번이나 차이더니 다 커서는 그 웃긴 일이 이쪽이 되어버렸다. 물론 고백 직후 차이는 건 아니었고 고백을 했던 적도 없으므로 상황이 다르다는 변명을 얹어볼 수도 있겠으나 그래봐야 다소 무르익은 청춘의 술자리에서 안줏거리 될만한 것이 하나 더 추가되었을 뿐이다. 얄궂게도 이번이 딱 오십 번째였다. 그 녀석들, 이야기 들으면 배를 잡고 구르겠네. 그 강백호는 오십 번째 끝에 결국 연애에 성공했었는데. 나도 그러려나? 모를 일이다.

이번 이별은 좀 뜨겁네. 슬쩍 매만져 본 한쪽 뺨에 열감이 올라온다. 상처는 없겠지만 부을 지도 모르겠다.

소싯적 주먹 꽤 질러보고 그만큼 두들김 당했던 경험도 있는 맷집 좋은 양호열에겐 딱 그 정도의 감상이었다.


주변에서 암암리 추측하던 것과 다르게 양호열에겐 사실 그다지 비밀로 할 것이 많지 않다. 학창 시절 때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누가 물어보지 않아서 말하지 않았을 뿐 구태여 본인의 이야기를 내어놓을 성격은 아니었던지라. 기회를 찾을 생각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다. 말 하지 않는 비밀은 없고, 말인 즉 슨 말 할 필요를 찾을 것도 없는 일상일 뿐이다. 이것저것 해코지 잡힐만한 몇 가지 일상을 소거하고 나면 결국은 그저 평범한 사람. 그러할 뿐이기는 한데.

양호열에게 형성된 비밀스러운 부분의 이유라면 아마 그 주변 그의 절친한 친구들이 무겁지 않게 발휘해준 배려 탓이라고 해야 했다. 고맙기는 했지만 사실 딱히 별로 상관 없기도 했다. 상관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성질을 내며 가장 큰 소리로 제일 많은 서운함을 내비칠 친구 탓에 티는 내지 않았다. 이를테면 지금 보다 좀 더 젊었을……이라고 표현하기엔 그냥이고 마냥이고 한참이나 어렸던 시절부터.

“양호열 어디 있어?”

“누구냐 넌? 양호열 없어.”

해동중학교 3학년이던 해, 봄이 시작되고 그 후로 조금 더워졌을 때부터 양호열은 한 달에 한 번 비자발적으로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한 달일 때도 있고 두 달일 때도 있었다. 원래 초반엔 그런 불안정한 시기를 거친다나 뭐라나. 정착이 되면 두 달이기를 바랐다. 비자발적 결석은 자발적이지 못하다는 면에서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중학교를 거치는 동안 그간의 땡땡이는 자신의 의지였으니 자발적이지 못한 결석이란 말 자체가 모순이기는 했어도. 그러나 양호열은 아주 가끔 사고를 쳐서 근신 처분을 받을 때와 지루함에 못이긴 그의 친구들이 대낮에 교복 바람 상태로 상점가 배회를 제안하는 것만 아니면 제법 성실하게 출석에 임하던 학생이었다.

여하간 중3 때부터 남은 학기 동안 한두 달에 한 번 양호열의 비자발적 결석이 무려(무려!) 선생님의 허락하에 이루어졌었다는 것 또한 주변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사실이기도 하다. 예외라면 강백호는 그 이유를 알았다. 아마 다른 친구들도 알고 있었다고, 그 사유를 강백호가 말했든 말하지 않았든 모두 이해했다. 물어보지는 않았으나 그의 친구들이 이유를 묻지 않았기에 결국은 알고 있구나, 하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 외를 제외하면 같은 학년을 비롯하여 학교 안팎으로 아무도 양호열의 결석 사유에 대해서 상세히 알지는 못했다. 알게 모르게 해동중 주먹짱으로 알려진 양아치의 자리 비움 사유랄 것을 시시콜콜 따져봐야 별것이 있겠냐마는.

“그야 뭐 당연하잖아. 찾으니까 없다고 말해주고, 왜 없냐는 이유는 안 물어보니까?”

물어보지도 않는데 뭐 말할 것도 없지. 언젠가 양호열이 물었을 때 강백호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했다. 강백호답게 단순한 만큼 시원한 답이었다. 아마도 군단의 인상을 따져보면 물어보지 않은 게 아니라 못 물어봤던 게 아니었을까……. 그런 솔직한 감상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건 아마도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도 변하지 않겠지, 하고.

예상은 언제나 틀리지 않았다.

“백호야, 어제 나 찾았다던 애한테는 혹시 또 뭐라고 대답했어? 날 뭐 귀신 보듯 보던데.”

막 고등학생이 된 지금도 이어지게 될 비자발적 결석이다. 한두 달에 한 번, 사나흘씩 비자발적 합법 결석을 이루고는 하는 양호열.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신입생, 여전히 그럴 예정인 양호열. 그 시작이 하필이면 새 학기 초반에 덜컥 걸렸던지라 어찌 보면 양호열은 학기 초반부터 대쪽 같은 기백으로 자리를 비워버리는 깡다구 충만한 해동중 출신 핵주먹 양아치 이미지가 되어버렸다. 아무튼 새 학기 시작 후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당당하게 자리를 비워버린 양호열의 행방을 굳이 물어볼 사람이라면 아마도 학급의 반장을 맡은 녀석이거나 중학교 시절 어딘가에서 껌 좀 씹어봤을 동년배의 시비였을 수도 있다. 후자가 더 나으려나? 전자라고 해서 딱히 다를 것도 없지만 그래서 물어본 거였다. 

“어어? 그냥 없다고 했지!”

천연의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 그 머리카락을 더더욱 튀어 보이게 하곤 했던 헤어스타일과 삐죽 솟은 키, 그리고 덩치. 가릴 것도 없이 평소처럼 대꾸했을 목소리도 꽤 한몫을 차지하며 일궈냈을 강렬한 인상. 양호열에게야 익숙하다 못해 절친한 친구의 평범한 모습 중 하나였을 뿐이지만 상대가 느끼기엔 아마도…….

음. 한동안 강백호가 양호열을 묻었다가 꺼낸 줄 알겠네.

‘양호열 없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순수하게 진실만을 고했을 강백호의 목소리와 표정을 오해한 채로 ‘양호열? 없앴어.’로 듣지나 않았을 지. 해동중학교 1학년 초반 때에도 딱 이런 경험이 있었다. 그때와 다를 바가 없이 북산고 새 학기 첫 시작이 얼마 지나지 않아 고작 며칠 동안 이런저런 소란의 중심인 강백호와 그의 군단이었으니 뭐…….

양호열은 개중에서도 유독 이미지가 나았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실질적인 리더라더라 들었던 속칭에 별 상관은 안 하고 있어도 이따금 싸움을 걸어오는 비슷한 급의 무리 중에서도 눈썰미가 좋은 녀석들은 양호열의 기량을 알아차리곤 했다. 이런 경우만 제외하면 알만한 사람들은 해동중 출신 그 학교 일진 짱이었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입에 올렸으면서도 백호 군단이라는 명명 하에 앞에 붙인 명칭이 어떠한들 그가 그 안에서 어떤 식으로 무리를 어르고 달래어 보는 지에 관해서는 딱히 상상하지도 않은 듯하다. 어디서 이런 조합이 나왔나 싶게 각양각색 튀어버린 제 친구들 덕택에. 저 멀리 명왕성에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친구들과 함께하다 보니 일반적으로는 양호열의 돌주먹이든 그의 주기적인 대범한(다시 말하지만 다소 웃기게 형성된 오해다.) 결석 같은 것들은 양아치니까 당연한 일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그냥 묻어 지나가는 것이다. 아무리 친구라지만 객관적인 시선을 따져보면 그러는 것도 납득이 되었다.

김대남은 중학교 3학년을 거쳐지나 가면서 훌쩍 키가 커버렸다. 군단 내에서는 강백호 다음으로 키가 컸던 셈이다. 설상가상으로 머리카락은 시종일관 밝게 탈색해 둔 채로 멀리서 보면 꼭 노란 등을 켜둔 것 같이 다녔다. 노구식은 안 그래도 연식이 되어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얼굴에 별안간 콧수염까지 길러 붙인 채로 돌아다녔다. 옆머리를 바싹 붙인 리젠트와 더불어 나름의 멋이니 개성이란다. 이용팔의 경우엔, 본인이 별로 상관 안 하기에 역시 그냥 지를 수 있는 말이지만 더더욱 우람해졌다. 중학생 때도 그랬지만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강백호보다도 조금 웃돌게 모든 것을 먹어 치울 수 있을 위장과 체력마저 거뜬했다. 강백호? 강백호는 일단 크다. 키도 목소리도 크다. 그리고 빨갛고.

그리고 양호열은, 싸움을 좀 하는 양호열이다. 좀 하다 보니 잘 하게 되었다. 그것 말고는 튀지 않았다. 역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나쁘게 말하면 지나치게 튀어버린 주변에 묻혀 이미지가 희석되었던 것일 수도 있고, 좋게 보면 개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순해 보였다는 의미다. 순해 보인다고 평가 받는 점에 대해서는 조금 시큰둥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는 싸움을 잘 하는 해동중 짱 출신 핵주먹 양호열이었으므로, 고등학교에 와서는 약간의 신빙성 있는 오해마저 덧붙여진 채 그저 무단결석과 땡땡이는 당연히 아무렇지 않을 양아치 양호열이 되어버렸다. 대외적으로 양아치인 건 맞았으니 이 또한 별로 억울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약간의 불만이 있다면,

“킁. 근데 호열아. 너 아직 열이 있는 거 같다.”

이렇게 코를 벌름거리면서 체온을 운운하는 게 우스우면서도 강백호가 무얼 말하는 지 알 수밖에 없을 본인의 사유에 있다. 그럴 때마다 어깨를 으쓱이던 양호열은 눈꼬리와 입꼬리를 동시에 올려 짓궂게 씰룩이며 말하곤 했다.

“백호야. 고등학생이 되었으면 코가 좋은 만큼 머리도 계속 좋아져야 할 텐데. 너 47번 째로 차였을 때는 그 애가 바보는 싫다고—”

꽝!

눈앞에 별이 번쩍 튄다.

강백호의 박치기는 천하의 양호열도 잠깐 기절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위력이 있다. 뒤로 벌렁 자빠질 뻔했던 것을 멱살을 틀어쥔 강백호가 그대로 잡아 끌며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간다.

으아아악! 강백호가 양호열을 진짜 없앴다! 아냐 이 자식들아! 강, 강백호가 지, 진짜로 묻으러 간다! 아니라고 이것들아! 주변의 진심 어린 경악에 콧김을 뿜고 삿대질을 하며 착실히 반응해 주는 강백호가 웃겼다. 저를 끌고 재빨리 향하는 곳이 어딘지는 뻔하기도 했고, 저렇게 일일이 날뛰며 반응하는 모습이 재밌기도 하고. 그리고 1교시는 반드시 땡땡이일 예정. 양아치 다운 면모를 발휘할 무단 행위를 일삼으며 아마도 그는 제 입으로 말한 양호열의 ‘열’이 마저 가라앉을 때까지 함께 옥상에 처박혀 있을 것이다.

“으하하! 이것 좀 놔봐라, 백호야.”

“시끄러워 인마! 다 너 때문이잖아!”

참으로 불필요한 땡땡이일 수도 있었는데.

그게 또 그렇게 싫지는 않은 때였다.

고등학교 1학년, 잊을 수 없이 특별한 여름이 지났다. 강백호가 부재한 중에도 양호열의 비자발적 결석은 계속되고 있었다. 얄궂게도 한두 달이었던 것이 자꾸만 한 달 간격으로 이어진다. 그해 가을이 되어 나흘의 결석 이후 등교했을 때, 교복은 다시 춘추복으로 바뀌었다. 너나 할 것 없이 긴팔을 차려입은 학생 무리 속에서 혼자 하복을 입고 등교하는 불상사는 없었다. 집에 있는 나흘 동안 한 번 걸려 온 노구식의 전화 덕이었다. 너 나올 때 춘추복 입고 와라. 백호는 오늘도 팔팔하더라. 뭐 그런 이야기들.

나흘 동안 잠만 꽤 잤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축축 처지는 게 꼭 계절이라도 타는 것 같다. 등교 직후 홀로 오른 옥상에서 당연하게 1교시 땡땡이를 마음먹고 벌렁 누웠을 때였다.

“뭐냐. 없어서 와봤더니 알아서 잘 와있네.”

나른한 잠기운이나 마저 물릴 겸 눈을 감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높은 하늘에 적당히 뜨끈하게 내리 쬐던 햇빛을 가리고 선 기다란 그림자였다. 강백호보다는 협소한 듯하게 만들어진 그늘 아래에 마찬가지로 음영이 진 얼굴이 이쪽을 내려다 보고 있다.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이 조금 아래로 다가왔다. 한쪽 입술을 씰룩인 채 이쪽을 살피다가 곧 숙였던 몸을 일으킨 정대만이 말했다.

“야. 넌 봤으면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말 안 걸었으면 온 줄도 몰랐어요. 막 자려고 했는데. 대만 군이 여긴 어쩐 일이야?”

땡땡이? 묻는 말에 어이없는 듯 답한다.

“……이제 그런 거 안 하거든? 그냥 잠깐 올라온 거야.”

잠깐이라면서 곧 누워있는 옆으로 털썩 주저앉은 꼴이 도무지 잠깐 머물다 갈 생각은 없어 보인다. 양호열은 도로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땡땡이 맞네.”

“아니라고! 누굴 낙제생으로 만들 셈이야?”

“꼬박꼬박 출석해도 낙제생이잖아요.”

“아니라니까!”

긁으면 긁는 족족 되돌아오는 반응이 꼭 누구 같아서 재밌다. 더 놀릴까 입을 열었던 양호열은 문득 뒤늦은 의문에 다른 말을 했다.

“내가 여기 있을 줄 알았어요?”

“어? 아니 뭐. 강백호 그 녀석이 하도 말하길래. 그냥 혹시나 했지.”

양호열의 가을맞이 결석이 있던 나흘 동안 어느 한 번은 강백호의 병문안을 갔었나 싶다. 강백호의 부상으로 딱히 발길 닿을 일 없는 병원을 밥 먹듯이 드나들던 양호열이었고, 그러는 매일 꽤 자주 얼굴을 비추는 사람이 있다면 농구부 3학년들 중에서도 정대만이었다. 올 때마다 환자의 기호도는 단 하나도 생각하지 않은 과일이며, 음료며, 간식이며, 농구 잡지나 재활 서적 따위를 던져두고는 했고 기호도를 고려하지 않은 과일과 음료와 간식은 강백호가 모두 먹어 치웠다. 농구 잡지는 기호를 따질 일이 없다. 책과는 거리가 먼 강백호도 농구 잡지를 볼 때는 눈을 반짝였다. 두고 보라고 만만이! 겨울엔 이 천재도 벌떡 일어나서 뛸 테니까! 외치며 펄떡대는 강백호를 두고 답지 않은 잔소리를 하기도 했다. 재활 의욕에 불을 붙이기로는 농구 서적이 과연 좋은 장작이었다. 강백호가 몇 번 뒤적거리고 곧 지겨워했던 재활 서적은 몇 번인가 양호열이 대신해서 읽었다. 그리 어렵지 않은 말이어도 강백호는 곧잘 지루해했기 때문에.

아무튼 양호열이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또 강백호의 병문안을 다녀왔을 정대만이었다. 다리를 뻗고 팔자 좋게 주저앉은 정대만의 얼굴 대신 그의 무릎을 보았다. 그가 필요 이상으로 병원에 얼굴을 비추는 이유 정도야 묻지는 않아도 짐작할 수는 있는 일이기에 딱히 의아함을 가진 적은 없다.

“백호가 뭘요?”

“네 녀석 옥상에서 심심해할 거 같다고.”

“잠이나 자려고 올라온 건데.”

“뭐, 그런 거면 상관 없고.”

그리고 다시 눈을 감으려고 했을 때였다. 기다란 손이 뻗어온다. 무어라 할 사이도 없이 정대만의 커다란 손바닥이 양호열의 이마를 덮었다. 다른 한 손은 제 이마를 덮는다. 뭐 하는 거야? 어처구니가 없어 손가락 사이로 눈을 깜빡였다. 서늘하다. 열이 많은 사람처럼 보였는데.

“흐음. 열이 있나?”

고개를 갸웃하며 손을 뗀 정대만은 이번엔 제 이마를 짚었던 반대쪽 손으로 양호열의 이마를 짚었다.

“어어. 열이 있네.”

“뭐해요?”

이 사람, 농구 하는 사람 치고는 손이 예쁘네.

“너 열 있다고. 아파서 결석한 거야?”

아무렇지 않게 툭 묻는 말이 정말이지, 구김도 없고 걱정도 없는데 염려는 담고 있다는 게 순수하기까지 하다. 강백호 녀석이 뭘 말했는지는 몰라도, 강백호를 찾아오곤 했던 정대만을 두고 양호열이 평한 감상이 있다.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만큼이나 쓸데없이 오지랖인 사람.

조금 좋은 말로는 정이 많다.

“말 할 일이 아니면 안 말해도 돼. 쌈박질 한 게 아니면 된 거지 뭐.”

말 하지 않아야 할 것도 없지 않나. 양호열은 비밀을 일궈낼 일이 없다. 그래서 그냥 말했다.

“가끔은요. 아플 때도 있는 거죠.”

“그래?”

그럼 그냥 잠이나 자라. 정대만이 말하지 않아도 양호열은 잠을 잘 생각이었다. 눈을 감으면서 쓸데없이 생각한 것이 있다면, 아마도 정대만은 1교시를 땡땡이 치지 않을까 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가 있었던가, 없었던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이후로 아주 가끔 홀로 있는 옥상엔 정대만이 함께했다. 양손을 번갈아 이마를 짚어보고 다리를 뻗어 털썩 주저앉고는 한다.

조금 성가시기는 했지만 이게 또 나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인간은 왜 자꾸 옥상을 들락거렸더라?

지나고 보면 참으로 평탄한 일상이긴 했다. 이게 다 바깥에서 날고 기어도 어렸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학교라는 공간이 그랬다. 결국 이렇다 할 계기가 필요할 것도 없이 여러 방면의 미성숙한 자아들이 섞일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까. 비밀을 만들 생각이 없어도 비밀처럼 지켜지던 시절이.

비밀을 딱히 싫어하지 않아도 되던 때. 양호열은 이따금 그 시절을 생각하면 여전히 웃기다. 조금은, 그 시절이 부럽기도 하고.

아주 가끔은 그립기도 했다.


늦은 밤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가 아주 시끄럽기 그지없다. 잠결이었지만 성가시거나 화가 나지는 않았다. 이 늦은 시간에 전화를 걸어올 사람이 몇 없기도 하고, 그 몇 없는 전화 주인공 중 한명은 절친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 야, 호열아!

왁자지껄 한 걸 보니 어디서 여럿이 모여 술자리라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미국으로 건너간 강백호의 경기 한 시즌이 끝난 때였다. 곧 귀국해서 얼굴을 볼 사이라지만 언제 만나도 어제 만난 것처럼 낯설 일이 없었다. 노구식과 김대남은 물론 이용팔을 비롯하여 모두 빈번한 연락을 주고받았다. 양호열은 비싼 국제 전화비를 대신하기 위해 이메일을 이용했다. 키보드가 자꾸 제 말을 멋대로 받아적는다며(보통은 오타라고 말한다.) 귀찮아하는 강백호는 주로 전화를 걸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메일에 적힌 기나긴 이야기를 받고 궁금함에 사무쳐 호기심을 누르지 못할 때 꼭 이러곤 했다.

양호열이 이틀 전 보낸 메일엔 얼마 전의 이별 내용이 적혀있었다. 역시 비밀이랄 것도 없으니 있었던 일을 고스란히 적어 보냈다. 백호야, 나 처음으로 여성에게 뺨 맞았다. 붓기가 하루는 가더라. 손가락이 길고 예쁜 사람들은 매운가 봐. 이런 이야기도 적고. 

— 그럼 너 오십 번째로 차인 거냐? 드디어 이제야 이 천재의 기량을 따라잡았구나.

“그게 자랑할 일은 아닌 거 같은데, 백호야. 고백 한 거랑 받은 건 다르지. 난 고백 받은 게 오십 번이었을 뿐이야.”

— 윽, 너 이 자식. 인기 많은 걸 그런 식으로 자랑해?

예상과는 다르게 더는 놀리지 않았다. 베개에 눌린 뺨을 떼어내고 반대로 몸을 모로 뉜 양호열은 여전히 소음 속에서도 톡톡히 들리는 강백호의 큰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동안 말이 없다. 얘가 어쩐 일로 고민을 하지. 한 오 초 정도 말이 없으니 망설임 없이 뛰어다니는 강백호에겐 아마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긴 고민의 시간일 것이다. 그래봐야 오 초였지만. 팔 초안에 기적을 행한 스포츠맨에게 오 초 따위는 무리도 아니다.

— 야, 나 내일모레 귀국하면, 다음 날엔 다 같이 모이기로 했걸랑.

“응. 이번에도 같이 들어와?”

— 어엉. 나는 어제 비행기 타고 가자고 할랬는데! 여우 그 자식이 예매 맡아놓겠다고 하고는 자버려서 섭섭이가, 악!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여우! 시끄러워!

달팽이관이 삐걱대는 고함에 잠시 억 하고 수화기에서 고개를 뗀 양호열이 웃었다. 주어가 빠졌지만 무엇인지는 바로 알아들었다. 북산OB들. 그렇게 콩가루 같던 농구부는 이후에도 꾸준히 정기적으로 모여 여전히 콩가루 같은 돈독함을 선보였다. 시끄럽고, 투닥거리고, 여전히 소란스럽고. 그런데도 끊어지지는 않는다. 북산고등학교 농구부는 이제 지역 명물이 되어있다. 전국대회에 진출 할 때도, 못할 때도 있지만 강백호와 서태웅마저 졸업한 이후로도 북산의 농구부는 인기가 있었다. 콩가루들이 거쳐 가더니 그 아래에는 알아서 잘 뭉치는 인절미들이 남은 기분이다.

“조심히 들어오고. 이번에는 마중을 못 나가겠네.”

아마 강백호는 귀국 때 혼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서태웅과 송태섭, 그리고 아마도 정우성. 머나먼 타국의 농구 코트 위에서 드물게 만난 동향인이었으니 자연스럽게 친해졌다고 했던가. 서태웅까지 세트로 묶어버리면 질색할 강백호였지만 어쨌든.

— 앙? 아냐 인마. 뭘 마중이냐. 바쁘다며. 그래서 말인데, 구식이랑 대남이랑 용팔이도 그렇고 우리 모일 때 너네도 와라. 괜찮지?

“그거야 상관 없기는 한데.”

어쩐일인지 북산의 농구부 모임엔 그 시절 백호 군단이 함께하는 경우가 있었다. 번듯한 농구부에 어린 시절 양아치들이 끼어들 일이 뭐가 있겠냐만, 졸업 후 몇 년 뒤 저들끼리의 술자리에서 강백호의 입부 계기가 안줏감이 되었는지 뭐였는지 자연스럽게 화제에 올라 이야기의 인물들을 궁금해하는 후배들 탓에 별안간 소환되었던 것이 계기였다. 덕분에 쪽팔린 이야기로 소환된 사람도 있었다. 쪽팔림을 제물 삼아 소환된 것도 모자라 후배들 술값까지 모조리 계산하고 억울해하던 사람이 하나.

아직도 생각하면 웃긴 일이라 웃음이 터졌다. 그러고 보니 북산 농구부 모임에 주기적은 아니어도 양호열과 그의 친구들처럼 간헐적으로 얼굴을 비추는 또 다른 과거의 양아치가 있다. 이영걸이라던가……. 강백호가 정대만의 치부를 제물 삼은 바람에 덩달아 끌려 나왔던 그 양반은 그래도 그렇게 자주 얼굴 비추지는 않는 거 같던데.

“하하하!”

— 갑자기 왜 웃고 그러냐? 아무튼, 시간 되면 오라구. 나도 너네들 보고 싶다.

양호열은 수화기를 뺨에 붙인 채로 벽에 걸린 달력을 보았다. 한 밤이라 어둠 속에 물든 벽 구석에 창 너머로 들어온 가로등 빛이 비쳤다. 희미하게 뜬 눈으로 날짜를 살펴본다.

“음……. 미안하다 백호야.”

— 어엉?

“아무래도 이번 주는 안 되겠네.”

— 엉? 아. 아아. 그러냐. 뭐 어쩔 수 없지. 그럼 다음 주는 괜찮냐?

잠시간 목소리를 높여 의문하던 강백호가 일순 답지 않게 차분한 목소리로 수긍했다. 미안. 이라고 중얼거린 양호열의 목소리를 듣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목소리를 높인다.

— 아앙? 미안은 무슨 미안이야! 다음 주에 얼굴 볼 준비나 하라고 인마. 어? 어라? 야 양호열! 너 그럼 설마, 차인 거 또!

“응.”

— 얌마, 괜찮냐?

“괜찮지 않을 건 또 뭐가 있어.”

— 그 뭐냐, 그래도, 거……외롭잖냐.

강백호는 외로움을 많이 탄다. 어릴 때부터 거의 식구처럼 붙어 지냈으니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타지의 그가 그래도 얼굴 아는 이들과 함께 지내서 다행이었다. 그런데도 강백호는 이따금 군단 녀석들이 보고 싶다며 투덜거림을 가장한 그리움을 내비치기도 했다. 어느 날 꿈엔 고릴라가 나오더라, 소연이도 아니고 왜 고릴라지? 이런 말도 하면서 제가 거쳐 간 모국의 인연들을 늘 보고파 했다. 그런 강백호였기에 조금 더 머리가 자라고 철이 든 이후로는 타인의 외로움을 걱정하기도 했다. 이럴 때마다 양호열은 그냥 웃을 뿐이었다. 외롭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안 그래. 평소랑 다를 것도 없는데 뭐. 그냥 쉬는 거지.”

— 그런 거 말한 게 아니란 거 알면서 그러냐, 쳇. 뭐 네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만…….

호열아. 그럼 잘 쉬고 나서 얼굴 보자. 열 달고 나오지 말고! 전화를 끊기 전 강백호가 힘주어 말한 말엔 대답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가 끊어지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양호열은 그대로 녹아내리듯 베개 위에 고개를 묻었다. 실상 피곤한 밤이었다. 깊은 밤 걸려 온 강백호의 전화 때문은 아니다. 그냥 피곤할 수밖에 없을 밤이 찾아온 것일 뿐이었다.

비자발적 결석은 비자발적 나태로 바뀐 지 오래, 역시나 자발적이지 못하다는 면에서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하필이면 시기가 아쉽게 되었다.

북산 모임이라는 거, 시끄럽긴 해도 제법 웃기고 재밌는데 말이지. 강백호와 서태웅은 저들도 누군가의 선배이기에 후배들을 챙기는 것에 아낌이 없으면서도 제 선배들을 털어먹는 데에 재주가 있었다. 주 타깃은 역시나 저보다 두 살 위의 세 사람이었고, 개중에도 유독 가장 시끄럽게 주머니가 털리는 사람이 있다. 정대만은 북산 농구부 멤버들의 단골 가게 중 몇 군데에 적어도 구들장 하나 정도는 보탬이 되어주지 않았을까 싶게 잘 털렸다. 강백호의 말로는 채치수는 털기 전에 쏴서 안 하고, 준호 선배는 쏘면서도 무섭기 때문이란다. 결국은 골고루 털어먹고는 있다는 소리인데 유독 정대만이 잘 걸려드는 것 같다. 그 양반도 어쩌면 봐주는 거겠지.

재밌기는 할 텐데. 소음과 소란이 꼭 담장 안쪽 학교에서 굴러가던 그 시절과 같이 달라지지 않은 사람들이다. 여전히 알게 모르게 접하는 소식들로 하여금 끊어지지 않는 인연이 신기했다.

가물가물거리는 눈을 감는다. 괜히 감성적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비자발적인 고립은 유독 생각이 많아지게 했다.

외롭잖냐.

전화를 끊기 전 들렸던 강백호의 한마디가 떠올라 잠결에 웃어버렸다. 저보다 한참 오래전 사전에 오십 번 차여본 유경험자라고 괜히 덧붙인 한 마디에 담긴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어릴 땐 이쪽이 좀 더 보살피는 입장이 아니었나 했는데. 성인이 된 지 몇 년, 이제는 주변에서 이쪽을 챙기려 드는 일이 빈번해진 것 같다. 역시 딱히 필요한 일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입 밖으로는 말하지 않았다. 모르는 마음일 수가 없으며 그때와 같이 여전히 서운해할 친구를 위해.

홀로보내는 시간이란 그냥 좀 지겹고 피곤할 뿐이다. 어른이 되어 이 시간이 두 달에 한번, 사흘로 정착되어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비밀을 싫어하는 양호열은 제 감상에 어떤 거짓도 없음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외롭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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