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로 돌아가는 길
슬램덩크 호열대만호열 / 오랜만에 양호열을 만난 정대만
2023.04.27
눈을 뜨고 보니 알고 있어야 할 천장이 아니다. 그런데 또 익숙하기도 했다. 보통 저런 천장을 마주하면 풍겨야 할 냄새도 있었을 텐데? 소독약이라던가 침대 시트에서 밀려오는 특유의 표백제 냄새와 같은 것. 그러나 그보다도 훨씬 먼저 맡아본 것은 알고 있는 기억과 다르다. 알싸하면서도 향긋한 냄새. 이 또한 어딘가 맡아본 기억이 있음에도 장소와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몇 번 눈을 깜빡여 본 정대만은 익숙한 천장 아래 퍼뜩 떠오르는 기억 탓에 몸을 일으켰다. 억! 머리야! 뒷골을 싸하게 후려치는 듯한 통증에 아찔함을 느꼈던 것도 잠시일 뿐, 긴 다리를 침대 아래로 내리며 오로지 뱃심만으로 벌떡 일어난 정대만이 주변을 둘러본다. 아, 여기가 어디야? 병원인가? 맞네, 병원이겠네……. 그런데 나, 멀쩡한 거 같은데. 나 혹시 나이롱환자로 입원한 건가? 보험……뭐, 그런 거? 아, 엄마!
사위가 고요했다. 먼지 한 톨도 묻어날 것 같지 않은 벽이며 물결 모양의 천장 타일 중 어느 곳 하나 때 묻거나 얼룩진 곳은 없어 보인다. 넓은 일 인실, 하얀 벽, 하얀 천장, 그 천장을 뒤집어 둔 듯한 하얀 바닥. 침대 하나, 새하얀 시트, 비어 있는 간이침대. 하얀 미닫이문, 하얀 창틀, 하얀 커튼……. 얇은 천 밑자락 사이로 비껴들어 온 햇빛마저 하얗게 보인다. 누군가 이미 깨끗이 정리해 둔 듯한 공간은 지나치게 정갈하면서도 불편하지는 않았다. 시린 눈처럼 하얗기만 한데도 포근하다. 있어 본 기억이 있어서 그럴까? 그게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닐 텐데.
병원이 원래 이렇게 깨끗했던가. 일 인실에 혼자 누워 본 기억이 아득한 바람에 곧 복잡할 것도 없을 머릿속은 단순한 결론만을 내렸다. 뭐, 병원이 더러우면 그게 더 큰 일이지!
침대를 벗어나 움직여 보기 전 무의식적으로 제 팔뚝을 먼저 내려보았다. 링거 줄이 꽂힌 흔적은 없다.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을지도……. 삐용삐용 울리는 사이렌 소리며 죽을 만큼 아팠던 통증이나 여기저기 산발하는 비명으로 귀가 따가웠던 소란 치고는 허우대 멀쩡하게 눈을 뜨고 있으니. 뭐라도 꽂혀있을 줄 알았던 팔뚝마저 깨끗한 걸 보면 소란 치고는 별달리 다친 것도 없었나 보다. 진짜 나이롱환자인 거 아니야, 나? 이거 보험 사기로 걸려서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걸릴 일은 없겠지?
아무런 흔적도 없는 팔을 문지르며 마지막으로 침대 머리맡을 살피던 정대만의 눈에 그제야 뒤늦게 발견된 것이 있었다. 뭐라도 꽂혀있지 않았다면 눈치도 못 채고 지나칠 뻔한 사소한 물건 하나.
뭔, 꽃병 정도는 좀 색이 있어도 괜찮은 거 아닌가? 빨간 색이라던가, 초록색도 좋고, 아니라면 파란색……보다는 조금 밝은 정도라던가. 역시 많이 어둡지 않은 파란색 정도가 좋을 지도 모르겠다. 하늘을 담은 푸른 바다색. 혹은 바다를 닮은 하늘색. 가까이 한 적이 드문 색이었음에도 별안간 가장 보기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랜 시간 정대만의 취향 속 한몫을 차지했다. 언제부터였더라, 꼭 가랑비에 옷자락 젖는다는 옛말처럼 어느 날 문득 좋아지게 된 색. 그 색과 함께 떠오른 이름 하나만으로 웃음이 나왔다. 혼날 지도 모르겠다. 웃는 낯으로 나직하게 ‘대만 군.’이라고 부르면서. 뭐 어쨌거나.
눈앞엔 바다색도 하늘색도 무엇도 아닌 하얀 색의 병이 있었다.
목이 긴 하얀 화병에 꽂힌 식물이 있다. 이 병실에서 유일하게 색채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병문안 선물로 누군가 가져다 둔 것 치고는 참 삐죽빼죽 못나기도 했다. 큰 키를 숙여 자세히 살펴본 못난 풀때기 사이엔 이것도 꽃송이라고 모양새는 갖추었나 싶은 가냘픈 꽃잎들이 몇 송이 붙어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천장을 마주하고 맡게 된 향기의 출처가 바로 이 못생긴 식물이었나보다. 진짜 어디서 맡아보기는 했던 냄새 같은데. 이런 병원이 아니라 예약 잡은 다이닝에서 고기 썰어 볼 때. 고기는 거 00 호텔 쪽이 맛있었는데. 야경도 죽여주고. 아 그때 재밌었지.
따위의 생각을 하며 대충 침대 아래 슬리퍼를 꿰어 신은 뒤(신고보니 환자의 사이즈를 고려하지 않아 터무니 없이 작았지만 꿋꿋하게 쑤셔 넣어 신었다.) 병실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먼지 하나조차 없는 조용한 병실의 하얀 문은 생긴 것과 비슷한 감상으로 소리도 없이 밀렸다.
불쌍할 지경으로 우그러든 슬리퍼를 거의 억지로 끼우다시피 한 커다란 발이 하얀 복도 위를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어째 꽤 조용한데. 여기가 어느 병원이지? ○○○○○○? 아니면 XXXX? 눈에 익은 복도의 구조라지만 이렇게 다 새하얗지는 않지 않았을 텐데. 음. ○○○○○○병원인가 보다. 마지막으로 방문 했던 기억이 대략 오 년 전 여름이었으니 그 사이 뭐라도 보수작업을 했을 수 있겠다. 그러네, 그 병원이구나. 얄궂게도 이 병원을 또 오게 된다. 교통사고 전문인가? 하얀 모퉁이를 돌아 다시금 새하얀 계단을 밟으며 떠올린 생각이었다. 그럼 분명 옥상에 정원이 있었을 텐데. 정원이라고 해봐야 잔디 깔린 넓은 공간에 벤치 몇 개, 아무리 옥상이라지만 이래도 될까 싶게 담배를 태우는 환자들과 방문객이 자발적으로 형성해 버린 흡연 구역일 뿐인 곳이었다. 아무렴 어떠냐. 정대만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을 오 년 전, 단 하루만 머물고 나서게 되었던 이 병원의 어딘가에서 속이 답답할 때마다 옥상에 오르곤 했다. 잔디 밖에 없을 옥상이었으니 볼 것이라고는 하늘 아니면 까마득한 저 아래의 도로밖에 없고, 담배는 태우지 않았음에도.
마지막 계단, 가장 꼭대기의 하얀 문. 설마 옥상까지 새하얀 건 아니겠지. 잔디도 새하얀 애들이 있으려나? 실없는 생각을 하며 하얀 철문을 밀어 젖힌다. 보수를 하며 문도 손을 본 것인지 묵직한 철문은 기억과 다르게 소리도 없이 열렸다. 문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퉁, 하고 등 뒤로 가볍게 닫히는 소리만 작게 울렸을 뿐이다.
오, 풀이다. 아까 봤던 못생긴 풀. 잔디는 온데간데없이 삐죽삐죽 낮게 자란 풀때기들이 옥상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거 누가 컨셉 잡은 거야? 취향이 너무 독특한 거 아니냐……. 잔디 보다는 훨씬 웃자란 뾰쪽해 보이는 풀들은 마찬가지로 작은 꽃망울을 달고 있다. 보기엔 거칠어 보여도 종아리에 닿는 잎이 억세지는 않았다. 향긋하면서도 알싸한 향내가 때마침 부는 바람을 타고 콧속으로 밀려든다. 병실을 나서기 전 화병에 꽂혀있던 풀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정대만은 엥, 하고 맥 빠진 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다.
푸른색의 반소매 셔츠. 야무지게 벨트를 동여맨 허리춤 사이로 넣어둔 셔츠가 바람에 부풀고 있다. 보통은 흔들릴 일 없이 말끔하게 넘기곤 했던 머리카락은 어쩐 일인지 바람에 나부껴 흩날리고 있다. 어? 엥? 잉? 언어가 되지 못한 정대만의 감탄사도 뭣도 아닐 멍청한 음절이 흩어졌다. 못생긴 풀들의 한복판에서 저 너머 난간에 기대어 햇빛을 받고 있던 한 남자가 곧이어 그 얼빠진 목소리에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입을 벌린다. 어?
“뭐야, 너 왜 여기 있어?”
“왜 여기 있어요, 대만 군?”
벌린 입 속으로 이름 모를 풀꽃의 향기가 밀려들어 온다. 엥? 어? 왜? 내가 물었잖아. 나도 물어봤거든?! 제법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음에도 두 사람은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같은 말을 했다. 그 사이로 바람이 분다. 계절감도 없을 바람 안엔 향내만 가득했다.
생각해보니 괘씸했다. 환자복 입은 사람 얼굴을 봐 놓고 왜 여기 있냐니? 그것보다 훨씬 괜찮을 법한 흔한 인사도 많지 않나? 몸은 괜찮냐, 아픈 곳은 없냐고 묻는 말이라던가. 그것 말고도 더 의미 있는 말들. 뭘 생각해도 보살피는 말 같은 것 말이다. 아픈 곳이 단 하나도 없었기에 괜하게 툴툴거리게 된 심보란 것은 알고 있다. 혹은 약간의 서운함과도 같은 것. 하여간 허여멀건 귀염상인 얼굴로 매번 심통 날 만한 소리만 한다. 만약 저 얼굴에 웃는 낯이 아니라 찌푸린 인상으로 말했다면 심통이 났을 게 아니라 식은 땀이 났겠지만. 그거야 그렇다 치고.
“난 환자잖아!” 괜히 얼굴을 붉히며 버럭 지르는 정대만의 목청을 두고도 양호열은 여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묻는 거잖아요. 환자가 왜 벌써 여길 와요? 얌전히 누워 있는 게 다행이지.”
“아니 뭐……. 딱히 다친 건 없어 보이고. 아까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오히려 가뿐하던데. 병원에서 뭐 잘 해줬나 봐. 안 그래 보이냐?”
“대만 군이 또 사고를 쳤대서 헐레벌떡 와본 사람한테 할 이야기는 아닌 거 같아요.”
“사고를 치긴 뭘 쳐! 사고가 난 거지.”
하여간 넌 좀 걱정을 하더라도 좋은 소리로는 안 해. 버릇처럼 삐죽인 입술을 두고 양호열이 웃었다. 늘 상 멋 내며 넘겨 올리곤 했던 앞 머리카락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나부꼈다. 그 아래로 부드럽게 휘는 눈매였다. 이는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까만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본다. 정말이지, 저렇게 웃으면 심술이 났다가도 금세 푸스스 가라앉아버리곤 했던지라.
“……잘 지냈냐.”
당연할 인사말이 어색했다. 스스로 뱉은 말에 정대만도 결국은 웃어 보인다. 우리 참 인사를 늦게도 한다, 그렇지?
양호열은 제 안녕을 전하는 것 대신 정대만의 안부를 묻는다.
“대만 군은?”
“나도.”
나도 잘 지냈지. 부러 훤히 치아를 드러내며 시원스럽게 웃어 보인다. 양호열이 좋다고 했던 웃음이었다. 멋쩍음에 뒷머리를 긁적였다. 반가운데 쑥스럽고, 그 쑥스러움이 생경한 바람에. 마치 봄날의 어느 때 속마음을 밝혔을 때처럼 두근거린다. 그때의 심장 소리와 지금이 과연 같을 수 있을 지는 몰라도.
“천하의 양호열이 이 정대만 한 명 다쳤다고 얼굴을 다 비추고.”
“좋으면 좋다고 하지? 대만 군.”
“그 동안은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서운했어요?”
발치에 부딪히는 이름을 알 수 없을 풀과 꽃송이를 내려다보았다. 좋은 냄새가 물씬 올라온다. 아마도 풀의 향기. 서운하다, 라는 단어를 입에 굴려본다. 문자의 의미는 쓸쓸하고 외로운데도 입으로 굴리는 단어는 향긋했다. 정대만이 말했다.
“아냐. 우리가 자주 보면 그게 더 큰 일이지.”
“어른이 다 되었네요, 우리 대만 군이.”
“그러는 너는 여전히 작고 말이지.”
매번 말했지만, 농구선수들에 일반인 키를 비교하면 빈정 상한다고요? 어깨를 으쓱이는 양호열의 앞으로 성큼 다가간 정대만이 두 팔을 벌렸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양호열이 정대만을 올려본다. 몇 걸음 다가가지도 않았는데 가까워진 얼굴이 신기하다. 이렇게 가까운데 말이지. 얼굴 한 번 보기가 힘들어, 양호열. 자주 보면 큰일 이라고 방금 말한 사람이 누구더라. 삐죽거림과 빈정거림을 가장한 살가운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렇게 감동하면 곤란한데요.”
“감동 아니야, 인마. 난 너 오랜만에 보는 거라고. 넌 나 안 반가워?”
“정대만 씨 얼굴은 TV에서도 볼 수 있으니까.”
“네 입에서 나오니까 진짜 재미 없는 농담이다. 됐고, 안아봐도 되냐.”
양호열의 눈매가 둥글게 굽어졌다. 여전히 앳되고 어딘지 어른 같으면서도 결국은 이른 성숙에 그친 모습으로.
양호열의 웃음엔 여러 종류가 있다. 눈매를 반달로 만든 채 헤벌쭉 보란 듯 웃어 보이는 놀리는 웃음, 입꼬리는 올라갔으면서도 눈꼬리 만큼은 한결 같이 치솟아 있는 화난 웃음, 잠에서 깬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햇빛에 눈을 찌푸리다가도 온기를 찾아 침대 위를 꾸물대며 지어 보이는 바보같이 풀어 보이는 웃음, 박장대소 하고 싶지만 딴에 눈치를 찾아 조용히 목울대를 넘기며 숨 삼키듯 꿀꺽 숨겨버리는 바르르 떨리는 웃음. 그리고 지금과 같이 눈썹을 내리고 눈꼬리를 찡그린 채 오른쪽 입꼬리만 살짝 올려 보이는 웃음 같지도 않은 웃음. 정대만이 좋아하는 웃음이다. 어쩔 수 없어 하는 웃음이기도 하고. 부탁을 거부할 수 없어 곤란해 하는 웃음. 그 곤란함을 퍽 좋아했던가. 결국 바라는 것을 내어주기 위해 내려놓는 그의 곤란함을 좋아했던가. 여기엔 양호열도 모르는 애정이 담겨 있을 테다. 질금질금 새어 나오는 감정을 와르르 쏟아내지 않기 위한 그 자그마한 노력이 못내 사랑스러웠던 바람에. 사랑이 담긴 웃음이었기에 정대만은 양호열의 그 미소를 좋아했다.
양호열이 그렇게 웃고 있다. 그들이 헤어지던 어느 여름날의 그때처럼.
“여전하네요, 대만 군…….”
“나이 먹었다고 바뀔 거 같아? 다 너 때문이라고.”
답지 않게 부려보는 투정에 결국 양호열이 두 팔을 넓게 벌렸다.
안아줄 거에요? 아니면 안길 거에요? 따져보면 오십보백보 일 것 같은 얼토당토않은 물음까지 던지면서.
“아오! 안아주라, 그냥.”
그 말에 양호열이 팔을 둘러 정대만의 등을 감쌌다. 정대만은 팔을 감아 양호열의 뒤통수와 어깨를 감쌌다. 누가 누구를 안아 주고 안겼는지 모를 모양새다.
양호열의 정수리에서는 풀냄새가 났다.
“되게 늦은 말이긴 한데……. 이렇게 보면 존나 큰일 날 것 같긴 한데 반갑긴 하다.”
“나이 먹고 여전히 말투가 왜 이래?”
사위를 감싼 그 풀냄새와도 같은 향내다. 병실에서 눈을 뜬 직후 맡아보기도 했던 냄새였다.
“병실에 있던 그 풀때기 여기서 뽑아다가 네가 가져온 거야? 되게 못생겼어.”
“하여간 꼭 분위기 깬다니까, 대만 군은.”
“무슨 풀이야?”
“……말 안 할래요.”
이럴 땐 꼭 투정 부리는 소년 같기도 했다. 그들이 처음 만났던 그때와도 같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엔 제법 많이 보여주곤 했던 모습이기도 했다. 양호열은 양호열이다. 그가 자신에게 여전하다고 했던 말을 되돌려주고 싶을 심정이 들 정도로. 되려 제 입 밖으로 내미는 말이 무거운 까닭에 도로 혀를 말아 넣었을 뿐이다. 여전할 수밖에 없네, 호열아. 너에게도 내가 오래도록 여전했으면 한다. 전하고픈 말 대신 묻는다.
“지내는 곳은 어때.”
양호열은 제 몸 뉜 곳을 전하는 대신 정대만의 안부를 묻는다.
“대만 군은?”
“너도 봤냐? 눈 정말 많이 왔던 거. 뭐 몇십 년 만의 폭설이라는데……. 눈이나 비나 똑같아서 날도 추워죽겠는데 올해만 몇 번이나 쑤셨는지 모르겠어. 넌 다행인 줄 알아. 추운 거 싫어하잖아.”
두 사람은 한참 동안 그렇게 끌어안고 있었다. 무릎은 괜찮아요? 응, 괜찮아. 맞닿은 가슴팍과 이마 사이로 울리는 고동은 분명 한사람 몫일 뿐임에도 온 몸이 울리는 것만 같다. 서로의 심장이 울리는 것처럼. 정대만은 그저 시간을 끌기 위한 대수롭지 않은 질문들을 던졌다. 답변 또한 알고 있는 선택지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묻는다.
“안 추웠어?”
양호열은 엄살을 부리는 대신 정대만의 안부를 묻는다.
“춥다고 오두방정 다 떨던 건 대만 군이었어요. 많이 추웠어?”
"어어. 오지고 지리게 춥지. 겨울이 왜 이렇게 긴 거야."
대만 군은 꼭 그럴 때만 엄살이 심하다고요—. 부러 길게 말꼬리를 늘이며 하는 말에 정대만은 더욱이 힘을 주어 끌어안을 뿐이었다. 제 등 뒤를 감싸고 있는 양호열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푸른색의 반소매 셔츠, 그 아래의 하얀 팔, 작지만 단단하게 잡히는 어깨. 따끈하다. 춥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춥지 않을 것 같아서 안도한다. 정대만이 묻는다.
“어떻게 왔어?”
양호열은 제 교통수단을 전하는 대신 정대만의 안부를 말한다.
“대만 군이 사고 쳐서. 안 아팠어?”
“사고 난 거라니까! 그리고 지금은 안 아파.”
가슴팍에 묻힌 말속엔 온도가 없다. 그런데도 따뜻하고 뜨끈했다. 여름의 끝자락 마지막의 순간에도 우린 아마 안고 있었던 것 같아. 꼭 다시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그렇게 헤어졌었나. 이마가 가슴팍에 와닿았던 바람에 뜨끈뜨끈했었는데 그게 참 빨리도 식는 것 같더라. 그랬는데 아직 남아있었네. 뭉근하게 솟은 온기를 놓고 싶지 않은 바람에 정대만은 끌어안은 양호열의 머리 위 정수리에 턱을 콕 찔렀다. 그대로 누른 채로 묻는다.
“아닌가? 좀 아픈가?”
양호열은 정대만의 안부를 말한다.
“그러니까 아직 여기는 오면 안 된다고 했잖아.”
“나……. 지금 사고 쳤냐……?”
양호열이 정대만의 안부를 말한다.
“또 한 번 그래 봐. 어차피 다시는 안 올 거니까요.”
“아, 미안하다고오오오오.”
양호열은 정대만의 안부를 전한다. 정대만은 양호열의 안부 대신 욕심을 말한다.
“……그래도 진짜 큰일 났을 땐 찾아와 주라.”
“하하하하하하하!!”
입을 벌려 웃는다. 눈을 반달로 만들고는 호쾌하게 웃는 모습이다. 웃지 마! 인마! 밀치듯 몸을 떼어내면서도 어깨를 붙든 손아귀는 떨쳐내지 않은 정대만의 붉어진 얼굴을 보고 배를 잡고 웃는다. 그게 이번인데요, 대만 군. 두 번은 없을 거라니까? 양호열은 정대만의 안부를 전한다.
“농구는 잘 하고 있고.”
“봤냐? 나 MVP 땄던 것들.”
“인터뷰 땐 왜 질질 짜요?”
“야!”
아하하하하하하! 아오 씨, 좀 멋진 것만 보라고! 멋진 것만 기억해요. 양호열이 손을 맞잡는다. 그대로 잡아 당기며 삐죽한 풀밭 사이로 주저앉았다. 끌어당겨진 정대만 또한 주저앉았다. 발 크기에 맞지 않아 터지기 직전일 불쌍한 슬리퍼를 발견한 양호열이 또 한 번 박장대소했다. 비죽이 튀어나온 뒤꿈치에 풀들이 눌려 고개를 숙였다. 꺾일까 봐 흠칫 다리를 굽히는 정대만을 보고 양호열은 가만히 그 무릎 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따지고 보면 잡초라서. 이 정도로는 꺾이지 않거든. 양호열이 정대만의 안부를 묻는다.
봄은 어때요? 가장 따뜻한 계절을 묻는다.
“서늘해.”
가을은 어때요? 가장 시원했던 계절을 묻는다.
“쓸쓸해.”
겨울은요? 가장 추웠을 계절을 묻는다.
“항상 같아.”
여름은요? 가장 눅눅했었던 그날을 묻는다.
“추워.”
그래요. 씩씩하네, 대만군. 양호열은 정대만의 안부를 염려한다. 정대만은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당연하지!
“하여간 대만 군은…….”
양호열의 기나긴 말들이 이어진다. 안부를 전한다. 양호열이 아닌 정대만의 이야기였다. 그 속에 꼭 저 자신이 품어 든 것처럼.
나중에 백호 보면 잘 달래줘요. 그 녀석 대만 군 소식 듣고 얼마나 울고불고 난리였는데. 걔 보기보다 눈물 많은 거 알아요? 어라, 방금 표정. 대만 군 질투해? 하하! 아니야? 알았어요, 그럼. 소리는 왜 지른담. 태섭 선배한테도 마찬가지고요. 그 사람 손 떨면서 찾아왔다? 아……. 그랬을 거라고요? 엄청나게 미안해하는 얼굴이네. 음, 준호 선배랑 치수 선배한테는 머리 박고 고맙다는 말부터 하세요. 고마울 일 없을 것 같아도 일단 하세요. 고마워해야 할 거 많으니까. 그리고 어머님이랑 아버님은, 말 할 것도 없고. 대만 군 보러 사람 많이 왔어요. 얼굴 보게 되면 다 미안해하고 고마워 하시라고. 대만 군이 인기가 좋긴 하더라. 고마운 줄 알아야 하니까 고맙다고만 말해도 괜찮을 거에요. 그리고 영걸 선배 말인데. 그 사람 병실 떠나가라 통곡했으니까 제발 진정 좀 시켜요.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리고 몇 번 말하는데, 오지랖 부리기 전에 한 삼십 초 뒤 상황 좀 생각해 보면 안 되요? 어이가 없더라. 누가 고양이 한 마리 구하겠다고 눈길에 미끄러지는 차 앞으로 뛰어요? 미쳤어? 뭐어어어어? 날 닮았다고? 저기, 대만 군. 종족이 틀리잖아요. 사람이 왜 그렇게 무모하지? 나는 생각 안 해요? 아무리 떠나 있어도 그렇지.
알알이 조곤조곤 내미는 말들에 고개만을 끄덕인다. 어떤 말엔 웃기도 하고 어떤 말엔 한숨을 쉬기도 했다. 발치에 치여 풀이 꺾일까 세워 올린 무릎 사이로 정대만의 고개가 한없이 수그러들었다. 아, 알겠다니까. 하여간 잔소리 꾼이야. 너 백호한테도 늘 이랬냐? 아니, 알겠다니까. 알고 있다니까. 평이한 말들을 주고받으면서도 무릎 위에 얹어진 양호열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한참의 잔소리가 이어진 뒤 아주 잠시간 이어진 침묵이 있었다. 아직 제 무릎 사이 풀 아래 흙바닥만을 고개 숙여 바라보고 있던 정대만의 귓가에 살랑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들어온다. 풀 향기가 묻어난 목소리는 고요했으나 스치는 바람에 묻힐 작은 소리는 아니었다.
“오늘이 지나면 우리 오래도록 보지 말아요.”
푸하. 무릎 사이로 고인 풀 향기를 토해내듯 정대만이 고개를 젖혔다. 야, 이 풀때기 향 한 번 너무 독하다. 안 그러냐? 거칠게 코를 문지르며 꼭 알레르기라도 올라온 사람처럼 벌게진 눈가로 바라보는 눈이었다. 그 눈을 바라보는 양호열은 웃고 있었다. 정대만이 가장 좋아하는 그 웃음으로.
어느 여름날이었던가, 양호열은 그렇게 웃으며 떠난 뒤 오래도록 찾아오지 않았다. 참으로 오랜만인 얼굴이었는데. 여전히 그렇게 웃으며 말하는 꼴을 두고 서운한 소리를 할 수도 없다 보니. 야, 솔직히 나한테만 뭐라고 할 소리는 아니다. 너도 그랬잖아. 내 생각은 안 했냐. 투덜대며 하고픈 질문이 모두 틀렸다는 걸 안다. 그 순간에도 날 생각했겠지. 그래서 그렇게 떠날 수밖에 없었겠지. 그러니까 그냥.
“그럼 그냥 안아주라.”
마주 앉은 양호열이 팔을 벌린다. 두 무릎을 세워 몸을 일으키고 정대만의 뒷머리를 감싼다. 가슴팍에 끌어안은 채 고개를 숙인다. 눈을 마주한다. 입술을 달싹이는 정대만 대신 양호열이 말했다.
잠이 들 때까지만.
춥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정대만은 눈을 감았다. 따뜻했다.
눈을 뜨고 보니 알고 있는 천장이었다. 익숙할 수밖에 없다. 천장을 보자마자 코를 찌르는 냄새 또한 익숙하다. 소독약 냄새, 쇳내, 시트에 잔뜩 먹어버린 표백제 냄새. 윙윙거리는 귓가로 일렁이는 소란. 그리고 목덜미를 후려치고 가는 묵직한 두통이 있다. 아, 아파. 진짜진짜진짜진짜 아파! 알고 보니 뒷덜미는 물론 온 몸이 자근자근 밟혀있는 기분이 든다. 죽을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사고 쳤다고 한 거야? 진짜 억울하네! 사고 났다니까! 눈만 끔뻑거리다 보니 아픔에 눈물이 다 나왔다. 정작 몸이 아파서 저 자신이 우는 줄도 몰랐던 정대만은 그럼에도 실없이 웃기까지 했다. 하하, 하하하. 힘도 없이 흘러나오는 쇳소리 같은 웃음에 다급히 내려다보며 뭐라 외치는 얼굴이 있다. 오, 엄마네. 다행이다. 나 나이롱 아니구나…….
다시 올려다본 하얀 천장이 일렁인다. 얼룩도 있고 조금 누런 부분도 있는 오래된 병실의 천장이다.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둔 채 정대만은 어느 옥상을 가득 채웠던 못생긴 풀의 향기를 떠올렸다. 아 맞아, 호열아. 기억이 났다. 여름에. 내가 예약 잡고 내가 준비한 말을 전했을 때. 고기 먹다가 내가 잘못 씹은 풀때기 보고 투덜거렸을 때. 그때 네가 웃는 걸 보며 맡았던 그 향기였네. 아. 물어볼 걸. 그래서 너는 내 말을 듣고, 어떻게 답해줄 지.
생각해보면 이미 답은 들은 셈이다. 오래전 헤어져 잠시간 찾아온 얼굴을 보며 이번에도 역시 들은 말 없이 하고픈 이야기를 알았다.
어지러운 귓가 저 너머 쿵쿵쿵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병실의 미닫이문을 잡아 뜯었나 싶게 드르럭 벌컥 열리는 우악스러운 소란 뒤로 여러 목소리가 울린다. 대만아! 대만 선배! 형!
이 미친 인간, 뭐 하는 짓이에요? 일주일이었다고. 나 이제 자동차만 보면 트라우마 걸리겠다고!
이야. 너 우냐? 말 할 수가 없어 푸흡, 하고 웃다가 찡그렸다. 악, 아파.
젠장! 만만이! 흐엉, 만만이 고양이 내가 데리고 있어. 빨리 일어나서 데리고 가라고, 흐어헝…….
그 고양이 내 고양이 아니다……. 말 할 기운도 없어서 눈을 감았다.
수술 잘 되었대 대만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허리도 팔도 다리도 다 괜찮아. 힘들겠지만 다시 시작하면 돼.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그 방면엔 내가 또 자신이 있지.
오케이, 좋았어. 오래 보지 말자고 했지 다시 보지 말란 말은 아니었지 않냐. 두고봐라, 호열아. 내가 또 포기를 모른다. 영 심심해 죽을 때 즈음 안 찾아오고는 못 배기도록 해줄 게. 길어질 재회를 준비하는 건 까마득하지만 적어도 외롭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니까…….
한 오십 년 뒤?
……어, 아니다. 한 칠십 년 뒤로 할까.
어느 여름 양호열이 이별을 고했다. 여름이라고 하늘은 뜨거운데 손바닥이 유독 차던 날, 눅눅하게 비가 내려 온통 축축했던 날. 그런 날에 이별을 고하는 양호열을 안아주었다. 어둡고 붉게 얼룩진 푸른 셔츠 아래에 마찬가지로 온통 젖어 눅눅해져 있던 양호열. 비 때문인지 다른 것 때문인지 온통 얼굴이 젖어있던 정대만이 있다. 사이렌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도 안중에는 없이, 그냥 안아줘요, 대만 군. 하고. 마주한 눈동자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안아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입은 달싹였으면서. 말도 못했던 주제에.
양호열과 정대만은 그렇게 헤어졌다. 추워질 수밖에 없는 어떤 여름의 끝자락에서, 헤어지기엔 아직 너무 일렀던 때에 젊은 청춘을 들이받아 버린 굴러들어온 바퀴 하나에 밀려 나간 이별이었다. 참 얄궂은 일이었단 말이야. 그 순간에 네가 생각 났다. 네가 그 순간에 나를 생각했을 것과 같이. 여름이 아닌 시린 겨울, 비가 아닌 눈이 오는 차도 위로 고양이 한 마리를 감싸면서 스쳐 간 생각이다. 고양이가 꼭 네 녀석 같더라. 진심이었다. 너도 그랬구나, 이랬겠구나. 그래도 너는 춥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해마다 갱신하는 온도와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두고도 정대만은 여름이 쓸쓸했다. 계절의 온도를 머나먼 포옹 속에 안겨주고 온 정대만의 여름은 춥다. 그래도 어쩌면, 그 여름의 온도를 가지고 잠시 돌아온 사람 덕에 포옹 속의 온기는 기억할 수 있겠지. 겨울 안에 돌아온 여름의 온기를. 아주 잠깐 돌아온 온기를 이제는 잊지 않을 수 있겠다. 다시 돌아올 여름의 어느 날이 더는 춥지 않도록.
내려놓은 손 아래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비비듯 감겨오는 둥글고 포근한 것이 무척이나 따뜻하다. 안겨 오는 고양이 한 마리를 품에 묻듯 감아 올리며 생각한다. 겨울이 지났다. 봄이다. 곧 여름이 오게 된다. 이 여름은 춥지 않다. 더워서 짜증이 나고 땀이 흘러 젖더라도, 비가 와서 눅눅할지언정.
아마도 따뜻한 여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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