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를 좋아하시나요
호열대만
10년 만에 같은 빌라 주민으로 만난 호열대만
직장인 밴드하는 양호열 x 프로 농선 정대만
주말 아침, 그러나 직장인 양호열은 쉴 틈이 없었다. 일단은 일주일 동안 쌓인 각종 쓰레기를 버려야 한다. 집에 붙어 있는 시간이 별로 없어 그다지 많이 쌓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다음 주로 미루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버린다. 호열은 더 자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재활용 쓰레기를 모아둔 통과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챙겨 빌라 아래로 내려갔다.
그가 사는 빌라는 매주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재활용 쓰레기를 분리배출한다. 음식물 쓰레기는 화요일에 수거하지만 주중엔 따로 쓰레기 버릴 시간도 없어 주말을 빌려 처리해야 한다. 그나마 종량제 봉투는 재택근무일인 금요일에 버리면 되어서 편하다.
호열은 무지 반팔 티셔츠에 애착 기모후드 집업을 걸친 채 빠르게 작업을 마쳤다. 쓰레기를 버리고 나면 남는 특유의 찐득한 냄새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젔다. 빨리 집에 돌아가서 눕고 싶다. 아, 아니구나. 오늘은 화장실 청소도 해야 하는구나. 모든 일이 귀찮기만 하다. 대체 왜 사람은 21세기가 된 지금도 직접 청소를 해야 할까. 청소 전담 안드로이드는 대체 언제 나올까. 호열은 속으로 잔뜩 구시렁대며 빌라로 들어갔다.
「어억. 죄송합니다.」
훤칠한 남자가 빌라 밖으로 나오다가 부딪치자 빠르게 사과했다. 그의 손에도 쓰레기가 잔뜩 들려 있었다. 호열과 달리 고무장갑까지 알뜰하게 끼고 있다. 직장인이라 주말밖에 시간이 없나 보다. 호열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대꾸했다.
「아뇨, 괜찮습….」
「엥? 너 양호열이었냐?」
상대가 갑자기 아는 체를 하며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뭐지, 동창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다가 호열도 똑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고교 선배, 정대만이 밝은 얼굴로 호열을 보고 인사했다.
「무슨 일이야. 진짜 오랜만이다 너.」
소열은 떨리는 입꼬리를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대꾸했다.
「그러게, 진짜 오랜만이다. 대만…, 선배.」
호열은 익숙하게 <대만군>이라고 부르려고 했다가 급히 호칭을 바꾸었다. 무려 10년 만이다. 그 사이 대만은 유명한 농구 선수가 되었다. 감히 양호열 같은 사람은 섣불리 말을 놓을 수 없을 만큼. 그러나 대만은 자신의 유명세가 뭐 그리 대단하다는 양 호탕하게 미소지었다.
「야, 닭살 돋게 선배가 뭐냐. 그냥 너 편한 대로 불러라. 대만군, 이라고.」
예나 지금이나 정대만은 이상한 곳에서 눈치가 빨랐다. 호열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대만군>이라는 능청스러운 호칭이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만은 멋쩍게 양손을 들어보였다. 미안, 내가 보다시피 양손이 꽉 차서. 아마 어깨를 두드리거나 안아보려고 한 모양이다. 호열은 괜찮다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너 여기 살았구나. 신기하네. 너 몇 호 살아?」
「아…. 301호요. 대만군은요?」
「엥? 301호? 나 401호 사는데?」
같은 빌라에 사는 것도 신기한데, 심지어 위아랫집이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냐며 대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네요, 어떻게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가 있을까. 호열은 복잡한 심정으로 대만을 쳐다봤다. 이미 대만은 한껏 들떠서 이따가 놀러가도 되느냐는 말이나 하고 있었다. 호열은 망설이다가 또 고개를 끄덕였다. 와, 큰일났다. 나 아직도 마음 못 접었나 보네. 호열의 마음속에 긴급 사이렌이 울렸다. 사이키델릭한 리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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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열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의 한 물륫센터에 배달기사로 취직했다. 원체 몸이 튼튼한 편이었기에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한 달이 지났을 때는 이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새벽까지 차를 몰아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주말이나 휴일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못했다. 잠을 아무리 많이 자도 다섯 시간 이상 취침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금방 적응하는 체질 덕분에, 호열은 이 일에도 금방 익숙해지고 나름의 요령을 만들었다. 회사 측에선 성실하게 일하는 양호열이 마음에 들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직으로 채용했다. 태어나 컴퓨터 파일이라곤 한글밖에 만져본 적 없었지만, 사수가 인내심을 갖고 가르쳐준 덕에 이제는 엑셀 함수 정도야 아무렇지 않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택배기사로 3년, 사무직으로 3년을 지나고 대리가 된 지는 어언 4년이 되었다. 몇몇 사람들은 이제 돈은 충분히 모았을 테니 대학을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지만, 호열은 여전히 배움에 뜻이 없었다. 그의 중고등학교 동창들도 대학에 간 녀석은 백호밖에 없었다(그 녀석도 공부보다는 체육전형으로 들어간 거지만). 대신 다른 취미가 생겼고, 그것에 재미를 붙였다.
그 사이 호열은 천천히 첫사랑을 잊어가고 있었다. 슛을 쏠 때 웃는 얼굴이 예쁘던 사람. 한심한 모습과 듬직한 모습을 오가는데 이상하게 자신보다 더 소년 같아 보이던 사람. 그러나 졸업한 후로는 그와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도 호열도 아주 바쁜 삶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야 겨우 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인생이라는 건 그리 속 편하게 흘러가지만은 않는다고, 호열은 손쉽게 제 방에 들어오는 대만을 보면서 생각했다.
「너 되게 깔끔하게 하고 지낸다. 러그도 깔았네.」
「여기 난방 되게 늦게 돌잖아요. 난방비 조금이라도 아껴보려고 깔아뒀어요.」
「아아, 안 그래도 전기 난로 쓰니까 전기료 많이 나와서 고민 중이었는데.」
「청소할 때도 들고 베란다 나가서 털기만 하면 돼요.」
「그거 엄청난 장점인데.」
대마니 눈을 반짝였다. 대만 군, 우리 10년 만에 만난 건데 왜 이렇게 친근하게 말을 걸어요? 라고 쏘아주고 싶었으나, 그의 말을 다 받아주고 있는 자신이 낯설고 또 나쁘지도 않아 입을 다물었다. 대신 주방으로 들어가 작은 냉장고를 열었다.
「대만군 아침 먹었어요? 난 아직 안 먹었는데.」
「아, 아침 조깅 하고 나서 샐러드 좀 먹었어.」
그렇구나, 좀 아쉽네. 호열은 뭐가 아쉬운지도 모르고 입맛을 다셨다. 대만은 호열의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침대에 기대 앉으며 말했다.
「뭐 먹을 건데? 혹시 집에 과일 같은 거 있어?」
「혼자 사는 사람이 사치스럽게 무슨 과일이에요. 대신 그릭 요거트는 있는데.」
호열의 말에 대만은 살짝 의기소침하여 <그래?>라고 중얼거렸다가, 그릭 요거트는 있다고 덧붙인 말에 바로 눈을 반짝였다. 단순하기가 무슨 강아지보다 더하다. 호열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쩐지 바보 같은 그의 순수함에 감탄하면서도, 전기세를 걱정하는 주제에 태평하게 1인 가구에게 과일이 있느냐고 묻는 그의 어딘가 이상한 감각을 따끔하게 지적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호열은 오랜만에 만나는 상대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 대신 얌전히 숟가락과 요거트를 내주는 쪽을 택했다.
불을 올린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식빵을 굽는다. 베이컨이나 양상추 등을 올려먹으면 든든한 샌드위치가 되겠지만 장을 본 지 꽤 되어서 식재료가 없다. 아쉽지만 땅콩버터로 만족하기로 한다. 그들은 나란히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호열이 조금씩 땅콩버터를 얹어 토스트를 베어먹는 동안 대만은 작은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열심히 그래놀라를 붓고 휘저어 요거트를 먹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태섭은 어쩐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고등학생 때는 시답잖은 게임 내기를 한 후에 맥도날드나 라멘 집에서 저녁을 때우는 게 일상이었던 거 같은데. 아침으로 샐러드를 먹고 입가심으로 요거트를 먹는 대만이라, 안 그래도 멀어졌던 사이가 더 멀어진 것 같다. 호열은 그 서운한 말을 뱉기 전에 서둘러 토스트를 입안에 욱여넣었다.
「맞아, 너 아직도 백호랑 연락하냐?」
요거트를 절반 즈음 비웠을 때 대만이 물었다. 그때 호열은 토스트를 네 입 만에 해치우고 접시를 싱크대에 담고 있었다. 호열이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대만이 역시, 하며 말했다.
「그럼 다음 주에 백호가 들어온다는 것도 알겠네?」
농구 리그는 어느 나라든 10월 중순에 시작하여 이듬해 3~4월에 끝난다. 덕분에 북산고 농구부 회식은 대체로 오뉴월에 잡힌다. 하필이면 택배회시가 연말연초, 명절 다음으로 가장 바쁜 시기이기 때문에 호열은 이 모임에 참여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어쩌다 시기가 딱 맞아 떨어져 호열이 참가할 때면 대만의 구단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해서 얼굴을 통 볼 수가 없었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이래저래 자주 만났지만, 특이하게 대만만은 우연으로도 의도적으로도 만나질 못했다. 바로 아랫집에 사는 사이였음에도.
「그때 맞추어서 정기 모임을 하자고 얘기가 나왔거든. 준호가 먼저 말했는데. 올 수 있겠어?」
지금은 6월이니 시간이야 충분히 있다. 아직 연차가 9일 가량 남아 있으니 회사야 별 문제는 없다. 다른 문제가 있어서 그렇지. 호열은 속으로 다음 모임이 언제였는지 계산했다. 호열은 흠, 하고 아무 의미 없는 소리를 내며 의자에 기댔다가 말했다.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네. 다른 약속이랑 겹칠 수가 있을 거 같아서.」
「그러냐….」
대만이 눈에 띄게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씨, 이러면 마음이 약해진다고요. 호열은 머리라도 쥐어뜯고 싶었다. 호열이라고 대만을 만나기 싫은 건 아니다. 다만 그에겐 조금 더 중요한 문제가 있을 뿐이다. 호열은 다급하게 구차한 변명을 붙였다.
「일단 그 동호회 사람들이랑 시간 조율을 한 번 해볼게요. 이번에는 꼭 나갈게.」
「아니, 농구부 모임에서 나만 너를 못 봤길래 해본 말이었는데…. 그런데 너 무슨 동호회 하냐?」
아, 말실수했다. 호열의 얼굴이 굳어졌다. 동호회는 아직 군단 애들이나 다른 농구부 일원에게 말한 적 없는 사소한 비밀이었다. 거창한 이유는 아니고, 아직은 누군가에게 자랑할 만한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어쩔 줄 몰라하는 호열을 보고 대만이 오호, 하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이거 이거, 무슨 일을 하고 있길래 이렇게 당황하실까.」
「아니, 정말 별 거 아니야. 그냥 심심풀이 삼아서 가끔….」
「가끔이라기엔 너무 진지한 표정 아니냐, 양호열이.」
대만이 딱밤이라도 놓으려는 듯이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붙여 호열의 이마에 댔다가 피식 웃었다. 호열은 부지런히 눈동자를 굴리다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다른 사람들에겐 말하지 않을 거지?」
「당연하지. 내가 입이 얼마나 무거운데.」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신빙성이 전혀 없었지만, 들킨다면 차라리 대만이 나을 거 같았다. 군단 애들이 이 소식을 알면 놀리기 바쁠 테고, 다른 농구부원과는 그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으니. 게다가 대만과는 위아랫집 아닌가. 언젠가 들킬 거라면 차라리 그가 제 집에 들어와 있는 지금 고백하는 게 더 나을 거 같았다. 호열이 테이블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따라와요. 직접 보여줄게.」
대만은 얌전히 일어나 호열을 따라갔다.
이 빌라엔 총 두 개의 방이 있다. 하나는 일반 아파트의 큰방보다는 작고, 두 번째 방은 그럭저럭 괜찮은 크기였지만 침실로 쓰기에는 조금 빠듯하다. 때문에 이 빌라에 입주한 사람 대부분은 이 작은 방을 사무용이나 창고로 쓰곤 한다. 대만처럼 운동하는 사람이라면, 운동 기기를 잔뜩 넣어두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호열은 이 방을 조금 다르게 꾸몄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대만이 감탄을 터트렸다. 호열은 방문 앞에 서서 부끄러운 사람처럼 쭈뼛거리기만 했다. 대만이 호열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너 밴드하는구나? 멋진데. 다 네가 직접 구하고 한 거야?」
호열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규직이 되고 한 달이 지났나, 옆자리에 앉아 있던 권 사원이 점심시간 직전 호열에게 슬쩍 물었다.
「호열 씨, 혹시 밴드할 생각 없어요?」
알고 보니 이 지역에 모여 사는 직장인들이 만든 밴드가 있는데, 최근에 베이스를 맡은 한 명이 전근을 하게 되어 탈퇴하게 되었다고 한다. 안 그래도 베이스는 치는 사람이 부족해서 사람 구하기도 난감했는데, 프런트맨이 차라리 베이시스트 하나를 키우자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멤버들에게 자기 회사에 락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잘 할 것처럼 생긴 사람, 혹은 기타를 쳐본 적 있는 사람이 있으면 가리지 않고 잡아오라는 지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으, 제가 잘 치게 생겼나요? 죄송한데 전 그쪽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호열은 떨떠름해 하며 대꾸했다. 애초에 호열은 다른 사람들이랑 어울려서 하는 활동에 관심이 없었다. 특히 밴드처럼 멤버끼리 합이 잘 맞아야 하는 취미라면 더더욱. 해동중 아이들하고 친구를 맺어 몰려다니고 쌈박질을 한 이유는 순전히 서로 생각이나 성격이 잘 맞았기 때문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호열은 그보단 혼자 하는 스포츠가 더 재미있었다. 택배기사로 일할 때에도 주말에 쉬는 시간이 있으면 근처에 있는 볼링장을 찾기도 했다. 그 볼링장이 폐업한 후에는 일상이 재미가 없었다.
호열의 말에 권 사원은 어라? 하면서 물었다.
「그래? 난 또, 매일 점심마다 오아시스 노래를 듣길래 락을 좋아하나, 싶었지.」
「이거 부른 사람이 밴드에요?」
호열은 정말 몰랐다. 어느 날 퇴근하던 중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던 노래가 마음에 들어 제목을 검색해 핸드폰에 저장해 매일 들었을 뿐이었는데. 호열이 순수하게 몰랐다는 표정으로 되묻자 권 사원이 재밌다는 눈으로 말했다.
「물론이지. 60년대에 비틀즈, 70년대에 퀸이 있었다면 90년대는 그야말로 오아시스의 시대였다고.」
권 사원은 사내 메신저로 어떤 링크를 넘기고 일어났다. 그 노래도 한 번 들어봐. 우리 밴드에서 연주했던 거야. 권 사원이 나가고 호열은 주변을 흘끗거리다가 링크를 열었다. 해당 밴드 동호회의 유튜브 채널이 열리고, 익숚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라이브 연주인데다, 아마추어라서 원곡에 비하면 어설펐지만, 그 노래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큼은 다르지 않았다.
몇 명밖에 남지 않은 사무실에서 주먹밥을 먹으며, 동영상을 보면서 호열은 백호를 생각했다. 농구를 좋아하게 된 그녀석이 그 여름과 겨울에 더 정밀한 슛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던졌는지. 그리고 정대만을 떠올렸다. 농구를 짝사랑하는 것에서 끝내지를 못하고 직접 코트 위로 돌아와 필사적으로 뛰어다니고 공을 던지고 점수를 올리면서, 그 찰나에 눈을 반짝이던 사람을.
좋아하는 것을 직접 할 수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호열은 다소 충동적으로 권 사원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그 동호회에 들어가고 싶다고.
그날 저녁 호열은 퇴근하자마자 작은 방을 열었다. 짐이 간소한 편이었기에 그 방은 항상 텅 비어 있었다. 호열은 줄자를 가져와 방의 치수를 재고, 인터넷을 열어 방음벽 공삭 견적을 알아보고, 앰프와 베이스 가격을 알아봤다. 아직은 연봉이 높지 않아 사양이 좋은 장비를 살 수 없어 중고 위주로 골랐다. 중고도 생각보다 값이 만만치 않았다. 회사가 식사비를 지원하는 곳이라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당분간은 주먹밥과 우유로 점심을 때워야 했지만.
대만은 호열의 베이스를 보더니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왜요, 하고 호열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그것을 가리키며 해맑게 웃었다.
「아니, 베이스도 딱 너 같은 거 골랐다 싶어서.」
나 같은 게 어떤 거지. 호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열의 베이스는 고등학생 때 타고 다녔던 스쿠터처럼 분홍색이었다. 처음에 회원들에게 보여주었을 때도 취향 참 특이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대체 뭘 보고 분홍색이랑 자신이 닮았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묻지 않아도 대만이 알아서 술술 불었다.
「너 고등학생 때도 딱 이런 색 스쿠터 타고 다니지 않았냐. 하여튼 아기자기해 보이는 걸 좋아한단 말이지, 너도. 딱 지 닮아선.」
「대만군, 혹시 눈이 삔 건 아니지?」
「뭐?」
넌 어떻게 10년 만에 만나도 선배한테 눈이 삐었다느니 그런 말을 하냐!? 아니나다를까 대만이 버럭 소리를 냈다. 방음이 된 방이라 그런지 대만의 고함도 먹먹하게 들렸다. 호열은 귀를 막는 척하며 태연하게 말했다.
「아니, 보통은 나보고 아기자기하다든가 그런 말 안 하니까.」
이 사람은 혹시, 나한테 얻어 맞은 사실을 잊어버렸거나, 아니면 자기보다 작은 사람은 다 아기자기하다고 생각하나? 호열의 의심은 어느 정도 사실로 드러났다.
「그러냐. 너 의외로 동글동글하니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대만이 우물거리면서 한 말에 호열은 더 기가 막혀졌다. 동글동글하면 아기자기한 거냐고요. 짱돌도 잘 깎고 갈면 동그래지지만 흉기거든요. 왜 10년 만에 만났는데 이렇게 자꾸 쉴 틈 없이 딴죽을 걸게 되는지. 이 사람만의 골치 아픈 매력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은 편하겠지만 호열은 그의 무던함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호열은 대만에게 물었다.
「대만군은 혹시 록 좋아해요?」
「응? 난 그다지 노래엔 관심이 없어서. 대신 라흐마니노프 노래라면 좀 알아. 어머니께서 좋아하시거든.」
라흐마니노프. 고등학교 음악 시간에 들어본 적은 있는 이름이지만 그다지 관심이 없어 가물가물한 사람이었다. 대만군 네는 클래식을 좋아하는구나. 호열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대만이 덧붙였다.
「그런데 밴드 연주하는 거 보는 건 좋아해. 내 팀원 중에 매년 락 페스티벌 가는 애가 있는데, 걔가 보여주는 영상 보면 다들 열기가 장난 아니더라. 가끔은 직접 보고 싶기도 하다니까.」
그러면서 해맑게 자신을 돌아보는데, 호열은 꾹꾹 눌러두고 있던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들어볼래요?」
「어?」
「연주 보는 건 좋아한다면서요. 나 곧 있으면 여름 밴드 축제에서 공연해야 하니까 연습 도와주는 셈 치고 가끔 와서 봐요.」
그다지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호열이 뒷목을 문지르면서 멋쩍게 덧붙였다. 대만은 호열이 먼저 보러 오라고 할 줄 몰랐다는 듯이 다소 놀란 눈치로 <어…>하고 말을 늘렸다. 역시 그다지 관심 없다는 사람에게는 난감한 제안이었으려나. 모처럼 밥 먹듯이 얼굴을 볼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입속이 까끌까끌했다. 호열이 초초재하는 눈으로대만을 바라봤다. 제발, 그러겠다 해줘라. 이상하게 대만이 망설이고 있으면 안달이 났다. 그날 체육관에서도 그랬다. 안 선생님 앞에 꿇어앉아 사실대로 말할지 고민하고 있는 대만을 보고 저도 모르게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어쩌면 그때부터 꿈을 가진 그가 부러웠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때부터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사랑이 시작됬을지도 모른다.
제발, 하나 번만 고개 좀 끄덕여줘라. 호열이 침을 느리게 삼켰다.
그리고 드디어 대만이 느리게 답을 했다.
「어…. 그런데 나 시즌중이라 자주는 못 와. 주말마다 너 연습하는 거 구경해도 돼? 딱 이 시간에.」
「진짜 올 거야?」
「아니, 네가 구경 오라고 했잖아. 연습 도와달라매.」
대만은 별난 녀석을 봤단 듯 눈살을 찡그렸다. 그 얼굴이 마냥 반갑기만 했다. 대만이 호열의 베이스를 툭 건드려보더니 아예 자리를 잡고 앉으며 말했다.
「말 나온 김에 지금 한 번 쳐봐라. 얼마나 잘 하는지 보게.」
「엑, 지금?」
「자신 없냐?」
대만이 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아예 밖으로 나가더니 어디에서 의자를 가져와 턱 앉기까지 했다. 대만이 제멋대로 깔아둔 판 위에서 호열은 그저 그의 요청대로 움직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베이스를 들어 스트랩을 어깨에 걸었다. 앰프를 연결하고 사운드를 체크하는 일련의 과정이 자연스러웠다. 왠지 저 입에 담배라도 하나 물려야 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확인을 마친 호열은 핸드폰을 두드리더니 노래 하나를 재생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으면서도 낯선 멜로디가 흘러나오고, 호열이 그에 맞추어 줄을 튕겼다.
베이스는 단순히 낮은 음을 담당하는 세션이 아니다. 드럼과 더불어 박자를 맞추고 리듬을 넣는 역할을 하는 베이스는, 그렇기에 화려함이나 기교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노래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베이스는 음도, 사람도, 무겁다.
이어폰이나 스피커로는 들을 수 없는 베이스 음 위에 호열의 연주가 얹어지면서 그 아래에 깔린 소리들이 다가왔다.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받치면서도 한 번도 내색하지 않는 악기. 대만은 그 태도가 어쩐지 자신이 농구부를 부수러 왔다며 의기양양하게 처들어온 그날의 양호열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 후에도 호열은 자기 덕분인줄 알라느니, 나에게 빚을 진 거라느니 등 거들먹거리는 말을 일체 하지 않았다. 그는 가볍고, 언제라도 마음이 식으면 떠날 것처럼 굴지만 누구보다도 무겁다. 그리고 그 무거움을 절대로 남에게 드러내지 않는다.
길었던 연주가 끝났다. 어땠어요? 호열이 앰프를 분리하면서 물었다. 솔직히 연주 그 자체보다는 딴 생각을 더 많이 했던 대만은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두 박자나 늦게 대꾸했다.
「어…. 묘~하드라.」
「이 노래가 조금 그래요. 오아시스 노래가 전반적으로 좀 몽롱한 감이 있긴 한데.」
호열이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치길래 대만은 들키지 않은 줄 알고 안도했다. 그러나 호열은 바로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런대 대만군은 그냥 듣다가 딴생각 한 거 같더라.」
「아, 많이 티났냐?」
대만이 머쓱해하며 묻자 호열은 태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엄청 많이. 호열은 베이스를 다시 세워두고 핸드폰을 챙겼다.
「이번 여름에 무대에서 연주할 노래에요. 아직 좀 더 준비해야 하지만.」
「그러냐. 그런데 너 노래는 안 불러?」
「노래요? 제가 있는 밴드는 프런트맨, 그러니까 보컬이 따로 있어서 다른 세션은 안 하는데.」
「이거, 네가 한 번 불러 봐.」
갑작스러운 말에 호열은 눈을 끔뻑거리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대만군. 이건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꼭 네가 부르겠다고 해. 너랑 잘 어울릴 거 같단 말이야.」
호열은 농담으로 넘기려고 했으나 제 눈에 비친 대만의 눈동자가 지나치게 진지했다. 뭐지, 꼭 와서 볼 것처럼 말을 하네. 괜히 심기가 뒤틀린 호열은 입매를 굳히고 정공법을 택했다.
「부르겠다고 하면 올 거예요?」
「응.」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 사람은 마음이 가지 않는 일에 결심을 굳히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다. 농구따위 재미도 없다는 말은 거짓이지만 다신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마음도 진심이었기에 깔에 맞지 않는 양아치짓을 2년 동안 하고 다녔듯이.
이러면, 나도 조금 기대할 수밖에 없지 않나. 호열은 어른이 되고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환하게 웃었다.
「표 나오면 줄게요. 그냥 윗집 올라가서 문 두드리면 되죠?」
「응. 언제든지. 네가 편할 때.」
대만이 다시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저렇게 웃을 때면 항상 왼쪽 눈이 조금 더 많이 접혔다. 호열은 그 웃음이 오아시스 노래와 조금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내가 이 노래를 사랑하게 되었나. 당신을 닮은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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