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 바르셀로나!

올라, 바르셀로나! (3)

동오대만

비행중 by 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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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정말 좋다.」

대만은 카사 바트요의 옥상 테라스에 앉아 바르셀로나 시내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떠 모든 것이 선명하고 밝게 보였다. 동오는 노점상에서 산 코크와 맥주를 가져와 대만 앞에 맥주를 내려놓았다. 비행기를 타고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이 술을 마셔도 되나 싶었지만, 대만이 한 달 동안 술은 입에도 못 댔다며 투덜거리는 소리에 넘어갔다. 대만은 맥주를 컵에 던 뒤 동오에게 내밀었다. 짠 해야지? 동오는 웃으며 콜라 캔을 들어 건배했다. 적당힌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대만이 웃음을 머금고 동오를 돌아보며 말했다.

「고맙다, 데려와줘서.」

「더 가고 싶은 곳 잇으면 말해. 너무 먼 곳은…. 내가 면허가 없어서 못 데려다주지만.」

동오가 크트머리에 멋쩍어하며 덧붙이자 대만이 파하 웃었다.

「너 나한테 면허 있는 거 까먹었지?」

「국제면허는 없잖아.」

「그거 그냥 신청하면 다 줘. 몰랐어?」

정말로 몰랐다. 따로 따야 하는 면허인 줄 알았지. 동오가 콜라를 홀짝이며 대답을 회피하자 대만이 폭소를 터트리며 동오의 어깨를 때렸다. 그래, 실컷 웃어라. 동오는 자포자기하며 캔을 비웠다. 내가 한국 돌아가자마자 면허 따고 만다.

이제 곧 수업을 갈 시간이었다. 동오가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대만은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 학교를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동오는 잠시 고민하다가 안 될 건 없다고 판단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건너편에 있는 초콜렛 가게는 아쉽지만 뒤로 미루기로 했다.

동오가 재학 중인 바르셀로나 대학은 이곳에서 트램을 타고 일곱 정거장을 가야 한다. 오늘은 자리가 많아 동오와 대만은 나란히 앉았다. 대만은 창밖으로 거리를 구경하고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캠퍼스를 느긋하게 안내해줄 시간이 더 있었으면 좋을 텐데. 동오는 내심 아쉬웠다. 다행히 대만이 돌아가기 전날이 공강이었다. 그날 느긋하게 구경시켜주자. 동오는 캘린더에 메모했다.

1450년에 지어진 학교답게 건물은 바로크풍으로 중후한 이미지를 자아냈다. 대로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공원과 운동장이 있었고, 학생들은 그곳에서 스포츠를 즐기거나 누워 낮잠을 자거나, 혹은 테이블에 앉아 토론을 하고 있었다. 대만은 학교 풍경을 기웃거리느라 몇 번이나 동오의 손에 이끌려 끌려갔다.

인문학과를 지나가는 중에 누군가가 동오를 부르며 달려왔다. 같은 하숙생인 제니퍼였다. 동오는 제니퍼에게 사정을 설명한 다음 대만을 맡겼다. 대만은 더 구경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자신이 수업하는 동안 혼자 돌아다니다가 미아가 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한 자리에 앉아 있어도 누군가 말을 걸거나 세큐리티에게 들키면 에스파냐어를 하나도 모르는 대만이 난처해질 수 있다.

대만은 제니퍼와 이야기하는 동오를 가만히 바라봤다. 유학 준비할 때만 해도 어렵다고 하더니. 이제는 제법 능숙하게 스페인어를 한다. 된소리가 많이 섞여 나는 거친 소리는 동오의 얼굴과 어울려 살짝 에로틱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 진짜 어떻게 저런 얼굴이 세상에 있을 수 있지. 대만은 속으로 침을 삼켰다.

동오가 죽이도록 섹시한 건 별개로, 눈앞의 여성과 친해 보이는 것이 대만은 어째 켕겼다. 그래, 자신이 좋아하는 최동오는 헤테로라고 암시를 주는 장면같아 보였다. 그걸 인정하기 싫어서 대만은 슬쩍 고개를 틀어 딴청을 부렸다.

「잠깐, 대만아.」

「응.」

그러나 잠깐 한국어로 <대만이>라고 불러주었다고, 대만의 꽁한 감정은 또 사르르 녹아버렸다. 이렇게까지 줏대가 없어도 되나 싶지만 어쩔 수 없다. 저 목소리로 제 일므을 불러준다는 게 기껍기 그지 없었다. 동오가 제니퍼를 가리키며 말했다.

「같은 하숙집 쓰는 제니퍼야. 여기에서 하숙집까지 데리고 가줄 거야.」

대만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제니퍼에게 올라, 하고 인사했다. 제니퍼 역시 인사했다. 대만이 헤어지기 전 동오에게 물었다.

「언제 돌아와?」

「연습이 다섯 시에 끝나니까, 아마 한…, 다섯 시 반에 도착할 거야.」

「다섯 시에?」

한국에선 오후 여덟 시에 연습이 끝나고, 필요에 따라 밤 10시까지 야간 훈련을 하기도 한다. 와, 유럽이나 미국은 모든 게 일찍 끝난다더니 진짜인가 보네. 동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런데 훈련 강도는 더 빡세. 한동안은 귀가 후엔 팔다리가 후들거려서 아무것도 못했다니까.」

동오는 가볍게 웃고는 대만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따가 보자. 대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니퍼를 따라 대학을 나왔다.

올라, 바르셀로나! (3)

제니퍼는 바로 하숙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돌아다니며 마을의 편의시설에 대해 알려주었다. 여기에서 몇 번 트램을 타고 가면 어디로 갈 수 있는지, 여기에서 가장 싼 과일가게는 어디인지, 식당은 어디가 괜찮고 어디는 별로인지, 편의점과 일밤 마트의 위치까지 알려주었다. 대만은 제니퍼가 알려준 것을 빠짐없이 머릿속에 저장했다. 대학교에서 하숙집으로 돌아가는 트램은 35번, <올라도피자> 앞에 잇는 정류장에서 여섯 정거장을 가야 한다. 트램에 앉아 제니퍼가 물었다.

「그럼 이제부터 뭐 할 거야? 계획해둔 거 있어?」

「음, 솔직히…. 아직 없어. 그냥 동오 보러 온 거라. 오늘 카사 바트요를 가긴 했는데.」

「올랄라. 멋진 곳이지. 혹시 축구에 관심 있어? 그러면 바르셀로나 FC 경기를 보러 가는 것도 좋을 텐데.」

「음, 축구는 그닥 흥미가 없어서. 대신 근처에 농구 경기장은 없어?」

대만을 빤히 쳐다본 제니퍼가 말했다.

「농구밖에 모른다더니 초이 말이 사실이었네.」

「내 이야기 많이 했어?」

대만은 일말의 기대감을 갖고 물었다. 내가 보고 싶어한 만큼 걔도 나를 그리워는 하고 있었을까? 그러나 제니퍼는 고개를 저었다.

「음, 아니? 초이는 자기 고향이나 친구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어. 우리가 한국 대학교는 어떠냐고 졸라야 겨우 친구들 이야기를 해줬는데, 그때 몇 번 들은 정도?」

그랬구나. 하긴 최동오, 어디 가서 자기 이야기 잘 안 하는 편이지. 대만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실망해야 할지 안도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타고난 성격 때문에 말을 하지 않은 것임을 알면서도, 그다지 자신을 보고 싶어한 것 같지는 않아 실망이었다. 실망할 자격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그랬다.

「그런데 너랑 하는 농구가 그립다고 한 적은 있어.」

하숙집 근처에 도착해서야 제니퍼가 말했다. 마침 트램이 정차했고, 제니퍼가 벨을 누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만은 제니퍼를 따라 교통카드를 찍으면서도 실실 웃었다. 나와 한 농구가 그립다고 했다. 그 별 거 아닌 말 하나로 꽁했던 기분이 다 풀렸다. 대체 최동오가, 짝사랑이 뭐라고.

열심히 돌아다녔으나 아직도 호텔 체크인 시간까지는 한참 남아 있었다. 마르타 아주머니가 저녁까지 먹고 갈 거냐고 물었고, 대만은 그러겠다 대답한 다음 동오의 방으로 들어갔다. 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마르코가 대만에게 말을 걸었다.

「너 농구 잘한다면서? 초이가 그렇게 내 칭찬을 하던데.」

「제니퍼는 내 이야기를 별로 안 했다고 했는데.」

대만이 의아해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러자 마르코가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웃었다.

「워, 그거야 그렇지만. 걔 농구할 때 눈깔이 얼마나 돌아가는데. 아주 그냥 농구하려고 태어난 새끼나 다름없다니까. 아무튼, 걔가 그러던데. 너 농구 잘 한다면서?」

대만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대학부에서 그만큼 실력이 되지 않는 선수였으면 국가대표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미 각종 스포츠 뉴스에서는 정대만, 이명헌이라는 대학부 최대어를 어느 구단이 데려갈 지가 최대 관심사였다. 대만은 담백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겠지? 내년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니까.」

「올랄라. 장난 아닌데?」

마르토가 씩 웃길래 대만도 따라 웃었다. 마르코가 하숙집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에 농구 코트 하나 있는데, 한 판 할래?」

「오, 농구 좀 했나 봐?」

「나도 유소년 국가대표였거든?」

마르코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대만은 금방 신이 나 잠시만 기다리라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시차 적응은 덜 되었지만 대만은 그저 몇 시간 만에 공을 만질 생각에 신이 나 있었다. 대만은 흥얼거리며 더블팩에 수건만 한 장 넣고 그대로 챙겨 나왔다. 마르코 역시 자기 방에서 농구화와 수건, 물병을 챙겨 나왔다. 그 역시 오랜만에 제대로 된 상대와 일대일을 할 생각에 들떠 보였다.

그들은 영어로 조잘거리면서 코트로 향했다. 오후 두 시, 가장 더울 때였으나 건조한 바람 덕분에 그리 뜨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대만은 발에 맞게 농구화를 조인 다음 가볍게 발을 굴렀다. 마르코도 농구화로 갈아 신은 다음 농구공에 공기를 채웠다. 3점 라인 근처에 서 있는 대만에게 마르코는 드리블을 하며 다가갔다. 마르코가 공을 손 안에서 굴리며 물었다.

「5점 내기? 먼저 5점을 낸 사람이 이기는 걸로.」

「그러면 제가 먼저 이길 걸요? 제가 3점이 주특기인데.」

「그래? 엄청 자신 있나 보네. 그러면 10점 내기 오케이?」

대만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르코가 공을 넘기고 바로 수비 자세를 취했다. 대만은 가볍게 드리블을 치며 빈틈을 노렸다. 유소년 국가대표였다는 말이 허풍은 아니었는지 마르코는 정석적으로 자세를 낮추어 계속 팔을 뻗었다. 언제라도 대만의 공을 뺏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상대를 조급하게 만들어 파울을 유도하거나 섣부른 슛을 유도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대만은 대학 리그의 명실상부한 에이스였다. 훤히 보이는 수작에 당하지 않는다.

대만은 일부로 몸을 뒤로 뺐다. 3점도 중요하지만, 일대일에서 중요한 점은 압박을 빨리 벗어나 안정적으로 득점하는 방법이다. 대만이 물러나는 몸짓을 취하자 마르코가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그 틈을 노려 대만은 왼발에 힘을 주어 오른쪽으로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마르코가 바로 따라붙었지만 한 번 브레이크가 걸린 몸은 쉽게 대만을 따라가지 못했다. 대만은 그대로 레이업을 올렸다. 역시나 공은 안정적으로 림 안으로 들어갔다. 벌써 2 대 0이다.

마르코가 <이거 봐라?>라는 식으로 대만을 쳐다봤다. 대만은 뿌듯하게 웃으며 손을 까딱였다. 마르코가 헛웃음을 짓더니 금방 웃음기를 지우고 공을 크게 튕기며 다가왔다. 대만도 따라 몸을 낮추었다.

장장 20분 동안 게임이 이어졌으나 승부가 쉽게 나지 않았다. 아직 점수는 7 대 5로 대만이 조금 더 앞서고 있지만 절대 방심해선 안 되는 점수차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5점 내기 하자고 했을 때 받아들일걸. 대만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후회했으나 집중력을 흩트리진 않았다. 앞에서 보란 듯이 가볍게 드리블하던 마르코가 비웃듯이 말했다.

「뭐야, 벌써 포기한 거야?」

「그럴 리가. 난 포기를 모른다고.」

대만이 다시 웃으면서 달려들었다. 마르코는 이리저리 대만의 압박을 피하다가 3점 라인 바깥으로 나가서 공을 쏘아 올렸다. 그러나 마르코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고, 대만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저건 들어가지 않는다.

예상대로 공은 림 가장자리를 맞고 튕겨져 나왔다. 마르코가 아쉬워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대만은 능숙하게 튕겨나온 공을 낚아채 바깥으로 뺐다. 마르코가 바짝 뒤쫒아왔다 그들은 3점 라인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마르코가 계속 손을 뻗어 슛을 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대만은 침착하게 그의 컨테스트가 흐트러질 때를 기다렸다. 슛을 쏘는 척 자세를 잡자 기다렸다는 듯이 마르코가 손을 뻗었다. 그러나 대만은 다시 공을 내린 뒤, 마르코의 팔이 떨어지는 순간 다시 팔을 들어 림을 향해 쏘았다.

대만의 공은 정확히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10대 5, 대만의 완벽한 승리였다.

승을 확정짓자마자 대만이 코트 바닥에 누웠다. 어우 힘들어, 대만이 투덜거리며 가슴을 들썩이자 마르코도 옆에 누워 거친 숨을 내뱉었다. 내색하지 않아서 몰랐는데, 마르코도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한참 숨을 고른 뒤 그들은 수돗가로 가 머리를 적신 다음 수건으로 대충 몸을 말렸다. 등 위로 지중해의 날카로운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마르코가 셔츠 자락을 펄럭이다가 머리를 닦는 대만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꽤 하는데? 괜히 국가대표가 아니네.」

「거 봐. 내가 뭐랬어.」

대만은 고개를 사납게 흔들어 물기를 다 털어냈다. 그 상쾌한 행동과 무덤덤한 말투에 마르코가 중얼거렸다.

「초이가 안달낼 만 하네.」

「어? 미안. 잘 못 들었어.」

그러나 마르코는 바로 낯빛을 고치고는 개구지게 웃었다.

「비~밀.」

「아, 뭐야 그게.」

동오가 입술을 쭉 내밀곤 투덜거렸다. 돌아가는 길에 나란히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었다. 대만은 끈질기게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 추궁했지만 마르코는 하숙집에 돌아오자마자 제 방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대만만 어리벙벙한 채로 거실에 서 있다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한결 뽀송해져서 나오자 마르타 아주머니가 물었다.

「정, 저녁 먹고 갈 거니?」

「음, 그럴려고요 동오가 다섯 시 반에 온다고 해서요」

「그래. 우린 여덟 시에 저녁 먹을 거야. 그 동안 시내 구경이라도 하지 그러니?」

「여덟 시요?」

대만은 살짝 놀라서 물었다. 한국에서는 여섯 시~일곱 시 사이에 저녁을 먹곤 하니까. 늦게 퇴근한 직장인이나 여덟 시에 밥을 먹을까. 오븐에서 무언가를 꺼내던 마르타 아주머니가 호호 웃었다.

「그럼, 날이 저렇게 밝은데 일곱 시는 너무 이르지 않니? 아니면 같이 낮잠 자는 건 어떠니? 방이 없어서 초이 방에서 자야 하겠지만.」

그러면서 마르타 아주머니가 동오의 방이 있는 2층을 가리켰다. 대만은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동오가 쓰는 스킨과 향수 냄새가 났다. 새끼, 한국에서는 비누 냄새 같은 것만 풍기더니. 대만은 슬쩍 동오의 책상 위를 보았다. 낯선 브랜드로 보아 스페인에서만 파는 향수인 듯하다.

대체 누가 선물한 걸까. 대만은 향수병을 만지작거리며 이것을 선물해주었을 사람을 상상했다. 아마 동오를 좋아하는 여성일 것이다. 너한테 잘 어울릴 거라며 사다 주었겠지. 동오는 그런 호의와 사심을 잘 구분하지 못하니까 그저 고맙다며 썼을 것이다. 그랬다가 향이 마음에 들어서 계속 썼을 테고.

 대만은 얼굴을 찌푸리며 탁 소리 나게 향수병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동오의 침대로 돌아가 마구 뒹굴거렸다. 마치 자신의 냄새를 주인에게 묻히려고 하는 강아지처럼. 그렇게 한참 뒹굴거린 뒤에야 대만은 만족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아침부터 강행군을 한 덕인지 금방 잠이 몰려왔다. 대만은 제가 잠든지도 모른 채 골아 떨어졌다.

꿈에서 대만은 동오와 함게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 스페인으로 가고 있었다. 동오가 대만을 보면서 조금 들뜬 얼굴로 말했다. 스페인은 어떤 곳일까. 우리 거기에서도 잘 할 수 있을까? 대만은 깨달았다. 우리는 함께 스페인으로 유학을 가고 있다. 그러나 그는 동오처럼 신이 난 얼굴로 조잘거리지 못했다. 왠지 그에게 자신은 친구 이상도 이하도 되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그저 맞잡은 손을 꼭 잡을 뿐이었다.

이제는 그가 정말로 제 이야기를 많이 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동오는 연습이 끝나자마자 다른 길로 새지 않고 곧장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팀메이트는 집에 꿀단지라도 숨겨 놓았느냐고 웃었지만 동오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어제처럼 오늘도 하루종일 대만을 생각하느라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겠다. 동오는 하숙집 문을 열자마자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 중간에서 니콜라스를 마주치고 동오가 물었다.

「캘리, 대만은?」

「아, 걔? 방금 보니까 네 방에서 낮잠 자고 있던데. 그런데 잠자리를 좀 가리는 모양이더라. 엄청 끙끙거리던데.」

대만은 길거리에 던져 놓아도 알아서 푹 잘 사람이다. 다른 팀원들이 불편한 잠자리에 뒤척이고 있을 때에도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소문이 맞긴 한 건지 의심이 갈 정도로) 여덟 시간 통잠을 자고 다음날 멀끔히 일어나곤 했다. 그런데 뒤척이는 것도 아니고, 끙끙 앓는다니? 꿈이라고 꾸고 있던 건가. 동오는 고맙다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대만이 이불을 칭칭 감은 채 모로 누워 자고 있었다. 무릎에 안 좋게 왼쪽으로 고꾸라져서 자는 모습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니키타스 말대로 안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인상을 잔뜩 쓰고 가끔 뭐라고 웅얼거리기도 했다.

동오는 그가 깨지 않도록 책가방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다른 사람이 제 침대에 누워 있었다면 그냥 들어서 바닥에 내려놓았을 텐데 대만에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걸 보고 명헌은 정대만에게만 유난이라고 핀잔을 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어떡한가. 순한 얼굴로 자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뭐라도 다 주고 싶은 기분이 드는데.

동오는 대만의 어깨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좌우로 흔들었다. 몸이 풀렁이는 느낌에 대만이 끄응, 하고 신음소리를 냈다가 겨우 눈을 떴다. 잠이 덜 깼는지 대만은 한참 눈을 깜빡인 뒤에야 상대를 알아보고 입을 열었다.

「어, 왔네.」

「잘 잤어? 돌아오고 뭐 했어?」

대만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마르코랑 원온원 했어. 10점 내기. 대만은 손으로 대충 눈곱을 떼어냈다. 동오가 옆에 앉으며 물었다.

「마르코도 꽤 잘하는데, 이겼어?」

「어엉, 이겼지. 그래도 국가대표인데.」

대만이 헤실 웃으며 자신의 활약상을 자랑했다. 동오는 끝까지 진중하게 그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때로는 맞장구도 넣어주는 동오를 보면서 대만은 기분이 풀리는 것과 동시에 꼬이는 기분을 느꼈다. 다정한 최동오는 좋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친한 친구 사이에서 나오는 예의라고 생각하면 마음에 먹구름이 가득 꼈다.

결국 대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그에게는 좋은 핑계가 있었다.

「나 빨리 가야 되겠다. 이제 호텔 체크인 해야 해.」

「벌써? 아직 다섯 시 반 밖에 안 됐는데.」

동오가 시게를 가리키며 말했다. 한국 기준으로 오후 다섯 시 반은 적당한 시각이었지만 스페인에서는 아직 한창인 시각이었다. 실제로 11월임에도 해가 환하게 사방을 비추고 있었다. 이쯤이면 한국은 어둑해져서 집에 빨리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고. 이런 기후에서 두세 달 살다 보면 마음이 여유로워질 만했다. 최동오, 귀국해서 시간 맞춘다고 꽤나 고생 좀 하겠는데. 대만은 속으로 생각하면서 말했다.

「음, 그래도 미리 해 놓는 게 낫잖아. 계속 네 방에 내 짐 두는 것도 그렇고.」

「괜찮아, 나 안 불편해. 마르타 아주머니한테 저녁 먹고 가겠다고 얘기했다면서.」

서양인들은 왜 이렇게 입이 가벼워. 대만은 할 수 있다면 혀라도 차고 싶었다. 딱히 마르타 아주머니 탓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덕에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그렇다고 남이 선물한 향수를 속없이 뿌리고 다니는 최동오랑 계속 있고 싶지도 않았다. 이상하지, 최동오가 보고 싶어서 스페인에 왔는데, 그가 다른 사람의 손을 타고 있다는 걸 확인할수록 오장육부가 배배 꼬였다. 에이씨,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오지 말고 얌전히 집에서 쉬고 있을걸.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대만은 애써 괜찮은 낯을 가장하며 말했다.

「짐만 내 방에 넣어두고 바로 올 거야. 거기 뭐 괜찮은 식당 별로 없는 것 같더라.」

「어디로 잡았는데?」

「어, 잠시만.. 이쪽인데, 혹시 알아?」

방금까지 질투심이 폭발해 툴툴대던 건 언제고, 동오의 물음에 대만은 쉽게 제 숙소 주소를 넘겨주었다. 제가 생각해도 참 어이가 없었다. 그치만 저렇게 순한 얼굴로 부드럽게 물어보는데 어떻게 주소를 안 보여줘. 대만은 애써 자신의 양가감정을 변명하려고 노력했다. 왔다리 갔다리 하는 속도 모르고 동오는 주소를 보다가 말했다.

「좀 거리가 머네. 트램으로는 왕복이 불편할 거 같은데. 역시 그냥 저녁 먹고 가는 건 어때?」

「…많이 머냐?」

귀찮은 건 딱 질색인 대만이 눈을 흘기면서 물었다. 동오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응. 여기에서 바로 가는 트램이 없어서 갈아타야 해. 이따 일곱 시에 니키타스랑 크리스티앙이 오니까 저녁 먹고 개네한테 부탁해서 가자. 내가 같이 갈게.」

저렇게 걱정하는 듯이 말하면 나보고 어떡하라고. 그냥 홀라당 넘어오라는 거 아냐. 대만은 있을 리 없는 여우 꼬리와 귀를 찾으려고 그를 노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눈빛을 보고 동오는 등 뒤로 식은땀을 쏟아냈다. 설마 알아채진 않았겠지? 동오가 한 말을 들으면 니키타스와 크리스티앙이 기가 막힌 표정을 지을 것이다. 그냥 짐이 많으니까 차로 태워다주겠다고 하지 거리가 멀긴 뭐가 멀어. 실제로는 트램으로 15분, 도보로는 25분 밖에 안 걸리는 거리였다. 바르셀로나 대학교보다 훨씬 가까웠다. 한마디로 개수작이었다.

어째서 순간적으로 그런 거짓말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만이 호텔 체크인을 해야 한다며 침대에서 일어나자 저도 모르게 그를 붙잡고 싶어졌다. 분명 기분 좋게 카사 바트요까지 구경하고 대학까지 맛보기로 안내해주었고, 마르코랑 원온원을 해서 이겼다고 했는데, 어째선지 잠에서 깬 대만은 그닥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대만은 되도록 대만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고 즐거운 경험만 시켜준 다음에 한국으로 돌려보내고 싶었다. 누구라도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잠깐 쉬는 틈을 타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온 친구를 보면 그럴 것이다.

불만족스러운 대만을 보고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체크인을 해야 한다는 대만을 말릴 때에도 그 생각밖에 안 들었다. 내가 오늘 뭘 잘못했던가? 카사 바트요가 사실 취향이 아니었나? 혹시 내가 너무 적게 놀아줬다고 토라졌나? 저녁 이야기를 해도 대만은 일단 호텔에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불렀다. 할 수 없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걸 보자마자 자연스럽게, 인지하기도 전에 거짓말이 먼저 나왔다. 어쩌면 그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멀고 귀찮다는 말에 대만이 고집을 꺾었으니까. 동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 일단 씻고 올게. 저녁 기다리면서 니콜라스 방에 가서 게임할래? 최근에 플스4 샀다고 자랑하더라.」

「헐, 대박인데? 무슨 게임 있으려나.」

단순한 정대만은 화제를 옮기자마자 금세 미소를 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니콜라스 방으로 향했다.

동오는 갈아입을 옷을 챙기다가 책상을 보았다. 향수병의 위치가 살짝 달라졌다. 아침에 분명 탁상 달력 바로 옆에 두었는데, 지금은 달력 뒤에 있었다. 동오는 향수병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대만이가 건드렸나. 멋 좀 부린다고 어제 니키타스 추천을 받아서 급히 사다 뿌렸는데, 혹시 마음에 들었나? 내일도 뿌려야겠다. 아니다, 호텔에 데려다줄 때 은근슬쩍 물어보자. 혹시 별로일 수도 있으니까, 별로라고 한다면 무슨 향을 좋아하는지도 물어보자. 그런데 너무 추근대는 것처럼 보이면 어떡하지? 은근 둔감하니까 괜찮지 않을까?

동상이몽을 꿈꾸면서 동오는 화장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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