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 바르셀로나!

올라, 바르셀로나! (1)

동오대만

비행중 by 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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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위터 썰 기반

  • 펜슬 이벤트용

  • 스페인으로 유학을 간 동오를 만나러 간 대만이

「스페인? 진짜 간다고?」

대만이 입에 물고 있던 수저를 조심스럽게 내려 놓으며 물었다. 동오는 여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전, 감독님이 대만과 동오를 불러 조심스럽게 스페인 유학 이야기를 꺼냈다. 그들의 학교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모 대학 농구팀과 자매결연을 맺어 매년 학생 두 명을 해당 학교로 보낸다. 올해에는 슈팅 가드 하나와 포워드 하나를 보내기로 했는데, 동오와 대만이 슈팅 가드 후보로 올라갔다며 어떻냐고 하셨다. 대만이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스페인은 유럽권에서 농구 강호로 유명한 국가다. 미국만큼은 아니지만 그런 곳에서 농구를 배울 수 있다는 건 두 번 다신 오지 않을 행운이자 기회였다. 생활이나 언어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갈 수 있는데 마다할 이유가 딱히 없었다.

대만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으나 동오는 잠시 망설였다. 그의 부모는 동오가 대학에 가서도 농구하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의 부모는 보수적인 타입이었고 동오가 유명한 농구 선수가 되기 보다는 취직이 잘 되는 학과에 들어가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는 것을 선호했다. 설령 당첨된다 하더라도 그분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머뭇거리고 있는데 대만이 등을 떠밀었다. 네가 가고 싶으면 가는 거지, 일단 저지르고 보는 거야! 그 말에 홀린 것처럼 동오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고 싶습니다. 한 번 해보겠습니다. 감독은 두 사람에게 서류 몇 개를 주면서 다다음 주까지 제출하라고 했다. 챙겨야 할 것이 많아 시간이 촉박하게 느껴졌지만 그들은 침착하게 여기저기에서 필요한 서류를 떼고 주말에 모교를 들락거리면서 유학을 준비했다. 학교 근처 행정복지센터에서 등기등본을 떼던 대만이 동오를 보며 물었다.

「부모님껜 말씀드렸어?」

「음…. 아직. 붙고 나서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도 너 대학까지 뛰는 거 허락해주셨잖아. 어떻게든 되겠지.」

그런데 너도 참 답답하게 군다. 붙고 나서 말한다니. 난 어제 본가 가자마자 스페인 유학 갈 수도 있다고 공수표 날렸는데. 대만이 먼저 나온 제 서류를 챙기며 히죽 웃었다. 동오도 제가 보수적인 편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집에서 장남으로 자랐기 때문이리라. 대만의 해맑은 얼굴을 보면서 동오는 다시 한 번 농구를 계속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달 뒤, 드디어 결과가 나왔다. 최종 합격된 사람은 동오였다. 두 사람 다 뛰어난 선수였으나 고등부 이력이 압도적으로 좋은 동오가 선발되었다. 하긴 그 산왕의 주전이었는데 평가가 안 좋으면 그것도 이상하지. 대만은 동오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래도 난 산왕 이겼지롱> 하면서 놀리는 건지 자랑하는 건지 모를(아마 둘 다였으리라) 말을 중얼거렸다. 그 사이에서 얌전히 숟가락을 놀리던 명헌이 물었다.

「부모님은 어떻게 설득할 거냐삐뇽.」

「이제부터 생각해봐야지.」

「삐료옹.」

명헌이 의미를 알 수 없는 한숨을 쉬었다. 너 뭐라고 한 거냐. 대만이 옆구리를 찌르며 독촉하자 명헌이 대꾸했다. 점점 정대만을 닮아간다는 뜻이었다삐뇽. 그거 설마 욕이냐? 뾰롱. 명헌은 대만의 추궁에 또 의미불명 의성어를 뱉은 다음 먼저 식판을 들고 일어났다. 대만은 별로 아쉬운지도 않은지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다시 눈앞에 있는 동오에게 집중했다.

「어쨌든 축하한다. 그래서 언제 가?」

「유럽권은 대체로 9월에 학기가 시작되니까…. 적응하고 등록하고 하려면 못해도 8월 1일에는 가야 하지 않을까?」

「아, 진짜? 뭐 아직 5월이니까 시간은 넉넉하네. 기숙사는 제공되는 거 맞지?」

「제공되긴 하는데, 기숙사가 아니라 하숙집일 수도 있다고 하더라.」

「아, 진짜? 그럼 스페인어 공부 바짝 해야겠다. 바쁘겠네.」

대만이 동오의 접시에 있던 비엔나 소시지 한 점을 가져갔다. 동오는 제지도 않고 아예 한 점 더 대만의 그릇에 나눠주며 말했다.

「뭐, 그래도 내가 하고 싶어서 선택한 일이니까. 후회는 안 할 거야. 더 열심히 할 거고.」

「그래, 누구를 제치고 가는 건데 잘 해야지.」

대만이 동오가 건네준 소세지를 입안에 쏙 넣으면서 씩 웃었다. 그제야 마음의 짐이 한결 가벼워지는 걸 느끼면서 동오도 따라 옅게 웃었다. 응, 고마워. 미적지근하게 대답하고선 동오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식판을 퇴식구에 넣은 후 나란히 다음 강의실로 향했다. 동오가 준비해야 하는 것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사이, 대만은 핸드폰을 열어 수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야, 오늘 바쁘냐. 나랑 술 좀 마시자.

 

한편 시간이 달라 먼저 점심을 해결하고 동아리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수겸은 핸드폰 진동에 인상을 쓰다가 대만의 메시지를 보고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어디 갈 거냐.

왕서방 뒷고기집.

그래, 여덟 시에 나와라.

 

수겸은 볼일을 마치자마자 다시 안대를 내리고 눈을 감았다. 지금은 시즌 중이고, 누구보다 자기관리에 예민한 대만이 먼저 술을 마시자고 한 적은 손에 꼽을 만큼 드물었다. 다른 동기들이 마시자고 할 때도 영 내키지 않는 얼굴로 끌려가는 녀석이 이런 연락을 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판단을 마친 수겸은 그를 꾸중하는 대신 장단에 맞춰주는 쪽을 택했다. 물론 시답잖은 이유라면 엉덩이를 아주 찰지게 때려줄 생각이었다.

오후 연습 시간에 대만과 동오가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동기들과 선후배가 우르르 몰려 정말 스페인에 가는 거냐고 물었다. 수겸도 오늘 과방에서 3학년 포워드인 남형식에게 얼핏 들어 알고 있었다. 앞으로 그와 동오는 18개월 동안 스페인에 가 농구를 배울 것이다. 외국에 나가 배울 만큼 실력이 뛰어나다는 방증이니, 다들 부러워하는 게 당연했다. 특히 동오와 마지막까지 유학 자리를 두고 겨루던 사람이 대만이었기에 동기들은 소문이 돌던 한 달 전부터 대만이 가느냐 동오가 가느냐를 두고 소소한 내기를 했다.

동오는 팀메이트에게 둘러싸여 진땀을 빼고 있었다. 옆에서 대변해주던 대만이 빨리 연습하라고 잔소리를 한 뒤에야 그들은 삼삼오오 흩어져 연습을 재개했다. 대만은 후배에게 받은 공을 튕기며 동오에게 말했다.

「우린 원온원이나 하자.」

「뜬금없이?」

「왜애,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잖냐.」

대만이 너스레를 떨면서 씩 웃었다. 수겸은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후배에게 피드백을 해주면서 생각했다. 그 가게에서 가장 도수가 높은 술이 뭐였더라. 차라리 중식당을 가자고 하는 게 나으려나.

 

올라, 바로셀로나!

 

학기가 끝나고 동오는 바로 본가로 돌아갔다. 시즌이 끝나진 않았지만 유학 준비를 해야 했기에 학교에서 배려를 해주었다. 부모님은 동오의 결정에 이래라저래라 말을 얹진 않았다. 아버지는 내내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다가 방으로 들어가버렸지만 사흘 뒤 스페인어 교재를 구해오시더니 일주일 후에는 돈 봉투를 건네시며 유럽에서 사는 데 이 정도면 충분하느냐고 물어보셨다. 한 달 용돈치고는 유럽 물가를 감안하더라도 꽤 많은 돈이었다. 동오는 스페인 유학 소식을 전할 때보다 더 깊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바로 옆나라도 아니고, 1년 이상을 살다 오는 일이다 보니 준비할 것이 산더미였다. 부랴부랴 이민용 캐리어를 구해 옷을 챙겼다. 스페인은 1년 내내 온화하다고 하니 봄가을 옷과 여름옷만 챙겨도 된다는 게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기숙사가 아니라 학교에서 마련해준 하숙집에서 생활하게 되어 정말로 옷과 농구 용품, 그 외 기타 자잘한 것만 챙기면 끝이었다. 하지만 짐정리가 아니라도 해야 할 일은 아주 많았다. 여권을 확인하고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여기저기 전화를 걸고 환전을 하며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시간이 흘러갔다. 중간에 대만이 짐 싸는 거 도와주러 가도 되냐고 연락했으나 동오는 제 힘으로도 충분하다고 대답했다.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왕복 네 시간인데, 시합 준비를 해야 하는 녀석에게 폐를 끼치고 싶진 않았다. 어째선지 그러냐고 대꾸하는 목소리가 풀이 죽어 있었지만,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두 달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동오가 스페인으로 떠나는 날에는 모든 농구부원이 나와 배웅해 주었다. 대만은 어디에서 묵주 키링 하나를 가져와 동오의 더블팩에 묶어주었다. 너 거기 가서 다치지 말고 잘 하라는 뜻이야. 대만은 제가 묶은 키링을 툭툭 치며 시원섭섭한 얼굴로 동오를 바라봤다.

「기껏 얻은 기회잖아. 실컷 뛰고 와. 대신 나보다 못하면 죽는다?」

이 정대만을 제치고 네가 대표로 가는 거잖아. 그 장난스러운 말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동오도 웃음을 터트렸다. 나중에야 어렴풋이 알게 된 건데, 그때 대만은 동오를 질투하기보단 그와 헤어진다는 사실 자체가 아쉬운 듯했다.

동오는 산뜻하게 작별 인사를 나눈 다음 비행기에 올라탔다. 직항 항공편은 너무 비싸서 중국을 경유해 가는 노선을 택했다. 상하이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경유를 기다리는 중에도, 그리고 스페인 바로셀로나로 향하는 중에도, 동오는 대만이 선물해준 묵주를 계속 만지작댔다.

하숙집 주인인 마르타 아주머니와 크리스티안 아저씨는 장난기가 많은 분들이었다. 그들의 하숙집에 살고 있는 모든 학생들이 그랬다. 이곳엔 딱 두 가지 규칙만 있었다. 오후 11시 이후에는 정숙할 것, 아침 식사는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 다 같이 먹는 것. 소란스러운 것은 취향이 아니었지만 그들을 보면서 한국에서 대만, 명헌, 수겸과 다니던 때를 떠올리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오지랖 넓은 그들이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며 적응시켜준 덕에 동오는 빠르게 학교와 주변 마을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동오는 대만과 대학에서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강원도에서 나고 자란 동오는 서울의 대중교통과 복잡한 골목길을 마주할 때마다 끙끙댔다. 그때마다 대만이 이것도 못 찾느냐고 놀리면서 익숙해질 때까지 같이 다녔다. 동오가 서울에 빨리 적응한 데에는 대만의 몫이 가장 컸다.

스페인 유학생 생활은 무엇 하나 쉬운 게 없었다. 영미권 학생이나 교수가 하나도 없는 탓에 영어를 쓰면 불통이 되기 일쑤였다. 일부 수업은 영어로 이루어졌으나 대부분은 스페인어를 썼다. 두 달 동안 스페인어를 익혔다지만 회화가 전부였던 동오는 팀원과 소통하랴, 수업 진도 따라가랴 정신이 없었다. 바로 옆방에서 생활하는 프랑스인 줄리안이 이해한다며 프랑스 과자 몇 개를 찔러주었다. 동오는 이런 호의가 기꺼웠으나, 그보다 한국에 두고 온 제 단짝 친구들이 많이 그리워졌다. 그럴 때마다 동오는 묵주 키링을 만졌다. 나 대신 가는 거니까 못하면 죽는다던 말. 그 말이 동오를 알게 모르게 지탱해주었다.

두 달이 지나자 제법 스페인 생활에 익숙해졌다. 동오가 가족과 친구들에게 이메일을 보내던 것도 이 무렵이었다. 아무리 세상이 좋아졌다지만 해외 우편은 시간이 걸렸고 무엇보다 분실 위험이 높았다. 반면 이메일은 주소만 알고 있으면 언제든 보낼 수 있었다. 동오는 그날그날 있었던 일이나 감상 등을 메일로 보냈다. 그러면 다들 답장을 보내주었다. 그것을 읽는 것도 동오의 또다른 삶의 낙이었다.

그러나 대만은 단 한 번도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일주일 정도 지나자 아무렇지 않아졌다. 뭐 바빠서 그런가 보다, 아니면 이메일 정리를 안 하는 편이거나. 예민한 편이지만 결국 평범한 운동부 남학생이었던 동오는 그 다음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고향에 있는 친구 걱정을 하기엔 지금 동오의 상황이 더 급급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하며 농구하고, 수업을 듣고, 스페인어를 배우고, 근육을 증량하던 어느 날. 대만에게 첫 메일을 보낸 지 정확히 2주가 되었을 때, 대만에게서 처음으로 전화가 왔다.

스페인 시각으로는 오전 일곱 시, 한국 시각으로는 오후 세 시였다. 전화음과 함께 잠에서 깬 동오는 발신인을 보고 처음엔 눈을 의심했다. 메일이나 편지도 아니고 대뜸 전화라니, 순간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겼을까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동오는 심호흡을 한 뒤, 통화가 끊기지 전에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대만이야?」

「동오야, 내일 새벽 5시까지 바로셀로나 공항으로 나와라.」

「뭐?」

대만은 동오가 자초지종을 묻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다급하지만 정확하게 대만은 일방적으로 통지했다.

「나 이따 한…, 15분? 뒤에 비행기 타고 갈 거야. 나 너네 하숙집 주소 알긴 하는데 가는 길은 잘 몰라. 그러니까 네가 마중나와야 한다?」

「아니, 무슨 일,」

동오는 정신줄을 다잡고 물어보려고 했으나 대만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동오는 허망한 눈으로 휴대폰을 한 번, 달력을 한 번 쳐다보고는 얼이 빠진 얼굴로 방밖으로 나왔다. 조깅을 마치고 온 미카엘이 동오의 보기 드문 표정을 보고 물었다.

「뭔 일이야? 여친이 헤어지재?」

「여친 없어. 친구가 내일 새벽에 온대.」

「올랄라.」

미카엘이 휘파람을 불면서 호응했다. 동오는 벌써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기분을 느꼈다. 10월이면 대학 농구 정규 시즌은 끝이 나지만, 아직 학기 중이다. 그런데 수업을 다 제끼고 스페인을 온다고? 바보 같은 짓을 밥먹듯 하지만 미친 짓은 일절 하지 않는(오히려 이런 정신나간 짓은 명헌의 주특기였다) 대만이라서 더 얼떨떨했다. 아니, 그 전에 비행기표는 어떻게 산 거지? 그거 편도만 해도 60만원인데?

멍하니 식탁에 앉아 있는 동오를 봄녀서 다른 하숙생과 주인 내외가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했고, 그때마다 미카엘이 똑같이 대답했다. 친구가 내일 새벽에 바로셀로나로 온대. 오, 멋진 친구를 두었구나. 숙소는 잡았대? 마르타 아주머니는 이곳에서 묵어도 된다고 흔쾌히 말씀해주셨지만 동오가 거절했다. 대만의 성격 상 무조건 이들과 시끌벅적한 시간을 보낼 게 분명했다.

솔직히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수업도 빼먹지 않고 연습에도 집중했지만 땅바닥이 아닌 구름 위를 밟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일이면 정대만이 온다고? 14시간이나 날아서 여기까지 온다고? 말도 안 돼. 만나면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정규 리그 우승 축하한다? 학기도 안 끝났는데 왜 온 거냐? 아니, 이건 몇 달 만에 보는 사람에게 할 만한 이야기가 아닌 거 같은데. 왜 여태 답장이 없었냐? 그동안 잘 지냈어? 이건 너무 상투적이지 않나. 마치 아무 사이도 아닌 것처럼.

최대한 집중하고 있다고 해도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으니 슛 성공률이 좋을 리 없었다. 코치는 동오가 제 리듬을 잃은 것 같다며, 쉽게 가라고 조언했다. 동오는 그의 조언에 귀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그 문제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제 친구가 온대요. 고등학생 때 전국대회에서 한 번 붙고, 대학에서 같은 팀이 되었는데. 그 애랑 잘 맞았거든요. 제가 들고 다니는 묵주 키링을 선물한 걔에요.

연습이 끝나고 라커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팀원인 안토니오가 은근슬쩍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인데. 애인이 헤어지재?」

아침에 미카엘이 한 질문과 똑같은 물음이었다. 내 꼴이 지금 실연한 사람처럼 보이나. 동오는 고개를 저으며,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느닷없이 연락이 와 새벽 다섯 시에 공항에 마중을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안토니오가 감탄을 뱉으며 말했다.

「그 자식이 널 어지간히 좋아하는 거 같은데?」

「그런가?」

「올랄라, 친구, 지금 한국도 학기 중일 거 아냐? 항상 사랑하고 아끼라고!」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나 나올 법한 말투를 구사하는 안토니오는 동오의 등을 툭툭 치곤 먼저 라커룸을 나갔다.

하숙집으로 돌아가니 마르타 아주머니가 여학생들과 함께 분주하게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숙생들의 먹성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오늘 저녁에 다 먹을 만 한 양이 아닌데다 딱 봐도 기념일에나 먹을 법한 음식들이었다. 웬일이냐고 물어보니 한국에서 온다는 친구를 위해 준비한 음식이라고 한다. 에스파냐 음식을 잔뜩 먹이고 보내야지. 마르타 아주머니는 오랜만에 신이 잔뜩 난 표정이었다. 마르타 아주머니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그를 하숙집에 한 번 데려와야겠다고 동오는 생각하면서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아주머니 옆에서 거들던 조세핀에게 물었다.

「맞아, 죠세핀. 혹시 이 근방에 있는 볼거리나 유적지 같은 거 알아?」

「응? 몰랐어? 여기에서 시내로 나가면 바로 카사 바트요(Casa Batlló, 가우디가 죠셉 바트요가 소유한 건물을 재건축하며 설계한 작품. 그의 독창적인 자연주의 건출 철학이 두드러지는 디자인이 특징이다) 인데.」

「뭐? 이 근처에 카사 바트요가 있다고?」

「맞은편에는 초콜릿 가게도 있어. 단 거 좋아한다면 추천해.」

「아, 걔가 단 걸 좋아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추천 고마워.」

동오는 방으로 돌아가 바로 노트북을 켰다. 부랴부랴 카사 바트요를 비롯한 fc 바로셀로나의 경기 일정을 파악하고, 티켓 예약까지 마쳤다. 새벽 다섯 시에 와서 시차 적응이 되지 않은 사람을 배려하지 않은 일정인가 싶었지만, 대만이 언제 돌아가는지 모르니 최대한 오늘 안에 좋은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한창 일정을 짜는 중에 옆방의 니키타스가 슬쩍 문을 열고 들어왔다.

「초이, 혹시 국제운전면허증 있어?」

「아니.」

동오는 한국에 있을 때도 운전면허증을 따지 못했다. 몇 번 도전했으나 실기에서 네 번이나 미끄러졌다. 와 넌 그냥 우리가 모는 차 안전하게 타고 다녀라. 네 번째 탈락 소식을 전했을 때 대만이 혀를 내두르며 한 말이었다. 남이 그런 말을 했으면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했을 텐데. 이상하게 대만이 그 말을 했을 때는 능청스럽게 그래야겠다 대꾸했다.

동오의 솔직한 답에 니키타스가 내일 하루종일 동오와 대만을 태우고 다니겠다고 말했다. 이젠 지리도 잘 알고 트램을 타고 다니면 된다고 거절했더니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왜애? 둘이서 무슨 진한 짓을 하려고?」

「그런 사이 아이야. 그냥 친구라니까.」

「글쎄에. 진짜?」

노골적으로 놀리는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니키타스를 밖으로 밀어냈다. 눈치 없는 니키타스는 계속 키득대기만 했다. 동오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두어 번 가볍게 두드린 다음 다시 하던 일에 집중했다.

 


 

동오는 초조한 얼굴로 게이트 쪽을 흘끔댔다. 새벽 네 시 45분. 동오는 니키타스의 차를 타고 공항까지 왔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다니는 택시가 없던 까닭이었다. 니키타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동오를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차를 마치고 돌아온 니키타스가 옆자리에 앉아서 종알댔다. 그 애 이름은 뭐냐, 언제부터 알고 지냈느냐, 남자냐 여자냐(대체 이건 왜 묻는 건지), 어떤 녀석이냐. 동오는 혹여 대만이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에 예민함이 극에 달해 모든 질문을 단답으로 받아쳤다. 이름은 대만이고, 대학 동기고, 남자고. 그러다가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는 숨을 한 번 삼키고는 대답했다.

「유쾌한 녀석이야. 나보다는 더 재밌는 녀석이야. 사람들이랑도 금방 어울리고.」

「올랄라. 좋은 녀석이네.」

좋은 녀석이지. 내 분에 맞지 않을 만큼. 동오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게이트 쪽에 시선을 두었다. 대만은 출발하기 직전 동오에게 비행기표 사진을 보내주었다. 13번 게이트라고 했으니, 여기가 틀림없을 텐데. 시계를 보니 여전히 새벽 네 시 오십 분이었다. 시간이 더럽게도 가지 않는다. 동오는 나지막히 한숨을 뱉었다.

드이어 곧 도착인가 싶을 때 안내 방송이 울렸다. F456기의 착륙이 3분 정도 지연될 예정입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조금 더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동오는 절망에 차서 고개를 푹 숙였다. 니키타스가 옆에서 등을 두드려주었다. 괜찮아, 아마 자리가 나지 않아서 잠시 대기 중인 걸 거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그러나 동오는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대만이 탄 비행기가 착륙했다. 동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수화물 찾으러 오는 시간을 깜빡했다. 아마 절차를 다 거치면 5시 10분 즈음에야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니키타스가 안절부절못하는 동오를 보고 웃었다.

「왜 이렇게 가만 있지를 못해, 찐한 사이었어?」

「아니, 그렇게까지는 아닌….」

「으아아악! 최동오오오!」

우렁찬 목소리가 동오를 냅다 불러 제꼈다. 동오와 니키타스 모두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게이트 쪽을 쳐다봤다. 거대한 캐리어 하나와 더블팩을 이고 진 채 대만이 정신없이 달려오고 있었다. 캐리어 끄는 소리가 흡사 전차 같았다. 혹시 넘어질세라 동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대만에게 뛰어갔다. 어우, 겁나 무겁네. 세 달 만에 동오를 만난 대만이 휴, 하고 숨을 내쉬더니 환하게 웃으면서 인사했다.

「진짜 오랜만이다, 동오야.」

해도 채 뜨지 않은 새벽 다섯 시인데 공항 안에 해가 떴다고 동오는 착각할 뻔했다. 그 후련하고 상쾌해 보이기까지 한 미소 때문에 왜 여기 있냐고 타박하지도 못하고 동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진짜 오랜만이네.」

여유롭게 걸어온 니키타스가 대만과 통성명을 했다. 대만은 어눌한 스페인어에 영어와 바디랭귀지를 섞어서 니키타스와 대화했다. 올라, 아임 정. 동오 아미고. 오케이? 니키타스는 대만이 알아들을 수 없는 긴 스페인어로 뭐라뭐라 말하더니 어서 오라며 등을 두드렸다.

니키타스가 더블팩을, 동오가 캐리어를 대신 들어주었다. 대만은 동오 옆에 붙어서 석 달 동안 돈을 모으느라 개고생했다는 둥, 14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느라 죽는 줄 알았다는 둥, 상하이에서 갈아타야 하는데 항공편이 계속 연착되는 바람에 세 시간이나 공항에 틀어박혀 있었다는 둥의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가 대만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맞아, 우리 학교 정규 리그 1등했다. 어때? 너네 학교 성적은.」

「그런데 대만아, 지금 학기 중 아냐?」

드디어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이러다가 미움 받으면 어쩌지 싶었는데, 의외로 대만은 동그란 눈을 깜빡이더니 어색해하며 뒷목을 긁적였다.

「어…. 명헌이나 수겸이가 말 안 해줬냐? 나 이번이랑 다음 학기 휴학한다고.」

「…어?」

동오는 걸음을 멈추고 대만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제정신이냐, 대학 커리어가 얼마나 중요한데 한 학기도 아니고 일 년을 통째로 날리냐. 휴학 중에 잘못해서 또 무릎 나빠지면 어쩌려고 그러냐.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잔소리 끝에 대만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버럭 화를 냈다.

「아! 나 내년 아시안 올림픽 선수로 나가서 휴학해야 한다고!」

「…어?」

「나 그래서 10월에 바로 선수촌 들어갔다고. 일주일 휴가 준다길래 바로 너 보러 온 거구먼. 이럴 줄 알았으면 평생 오지 말걸.」

대만이 입술을 비죽 내밀면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드러난 뒷목과 귓불이 시뻘갰다. 동오의 얼굴에도 저것과 똑같은 빛깔의 홍조가 피어났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니키타스가 돌아봤다.

「너네 싸…. 됐다.」

니키타스는 곧바로 썩은 동태 같은 눈을 뜨고 앞장 서 걸어갔다. 아 왜 말을 하다 말아! 대만이 주먹을 휘두르며 한국어로 니키타스에게 화를 냈다. 동오는 계속 화끈거리는 제 얼굴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양손으로 가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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