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C

[농놀/준호치수] 시합이 끝나고 난 뒤

* ㅅ ㅑ프의 '연극ㅇ ㅣ 끝난 후'에서 영감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 치수는 조금 나오지만 준호치수입니다 ㅎㅎ


3월의 끝자락이었다. 봄은 어김없이 왔고,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졸업 역시도 그랬다. 권준호는 비현실적인 기분에 휩싸였다. 믿기지 않았다. 그토록 길게만 느껴지던 고등학교 시절이 드디어 종지부를 찍었단 것이, 더 이상 북산의 농구 코트 위를 뛰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봄 방학이 끝나갈 무렵에도 도무지 실감나지 않던 마지막의 순간은 그럼에도 왔고, 시작과 미련을 알리는 벚나무는 쉬이 만발해 온 북산의 교정을 뒤덮었다. 그렇다. 드디어 마지막이 온 것이다.

장장 4시간의 졸업식이었다. 졸업생 대표의 다정스러운 연설과 교장 선생님의 상투적인 축하 말씀이 지나고 나면 박수 세례가 파도처럼 밀려들었고 교정은 삽시간 안에 가족과 친구, 선배들을 축하하려 모인 인파로 북적였다.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였다. 웃음 소리가 부서졌다. 그 시원섭섭한 축제의 한복판에는 이따금 얄궂은 바람이 꽃을 샘내는 양 익살을 떨었고, 벚꽃잎은 흩날렸다. 준호가 그 정신 없는 축하연에서 벗어난 것은 졸업식이 끝나고도 한참 후의 일이었다.

한바탕의 축제는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치 시합이 끝난 후의 농구 코트처럼, 학교는 이례적으로 조용했다.

준호는 운동장에 남은 누군가의 발자국들을 보았다. 해를 등지고는 제 앞에 길게 드리운 그림자를 보았다. 제 주인과 꼭 닮은 그것은 준호가 발을 옮길 때마다 긴 다리를 겅중거렸다. 준호는 그 그림자 소년과 함께 익숙한 길을 걸었다. 모퉁이를 돌면 곧장 체육관으로 향하는 그 길은 언제나 조금 엉성했다. 그 동네 청소 당번들이 꼼꼼하지 못한 탓이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설프고, 귀여웠다. 준호는 그 몇몇 애들의 좀 성의 없는 비질을 상상하다가, 그 칠칠맞지 못한 길을 쭉 따라 걸었다. 

페인트 냄새가 났다. 졸업생이 빠지고 나면 그 자리를 다시 채울 신입생들을 위해 그 낡은 건물도 새단장을 한 까닭이다. 낡은 벽돌 건물 위에 가볍게 덧칠해 놓은 상아색 페인트 너머에는 여전히 다른 누군가의 자취가 남아 있었지만. 왜, 질박한 솜씨로 그린 농구공이라든가, 선생님에 대한 가벼운 뒷담이라든가. 아, ‘…아, 네가 좋아.’ 따위의 연애 거는 문구도 있었던 거 같은데-... 페인트 때문인지, 엉성한 글씨 탓인지, 그 메시지의 수신인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준호는 공연히 손끝으로 그 위를 더듬는다. 가던 길을 나아간다. 그 벽 하나하나를 손으로 읽어내려는 듯이. 삼촌 집의 낡은 전축인 양, 손끝에 닿는 흔적들을 입으로 흥얼거리기까지 하면서. 그렇게 코트로 갔다.

빈 농구코트에 들어섰다. 농구를 할 것도 아닌데 신발을 벗은 것은 일종의 관성 때문이었다. 사뿐. 사뿐. 양말 신은 발로 코트 안에 든다. 불 꺼진 농구장 안, 이른 오후의 햇볕은 스포트라이트처럼 농구 골대를 비춘다. 귓가에는 운동화 밑창이 잘 닦인 코트 위로 마찰되는 소리 따위가 선연하다. 농구공 튕기는 소리, 거친 호흡 소리, 군중의 환호성... 

오래 묵은 농구장은 소라 껍데기와도 같구나.

준호는 눈 감은 채 생각했다. 처음 농구를 시작했던 그 어느 풋내기 시절을 떠올렸고, 어설프기 그지 없던 북산 농구팀과, 그 오합지졸일 것만 같던 팀이 마침내 전국대회에 다다른 그 순간을 회상했다. 손끝이 저렸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었고, 온몸으로 피가 급하게 돌았다. 그건, 좀 벅차고도 버거운 감각이었다. 그리고 권준호는 그 모든 기적 같은 장면 곳곳에 자리한 한 사람을 떠올렸는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문득 그가 보고 싶어졌다.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어쩐지 그와의 조우는 새삼스럽지 않았다. 왜냐하면-

"준호야."

이 농구코트야말로 채치수에게 가장 어울리는 공간이었으니까.

고요 너머로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그를 부르면, 준호를 고개를 돌린다. 농구공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반사적으로 두 손을 날리면 탕! 하는 경쾌한 가죽공 소리가 났고, 그 둥글고 우둘투둘한 표면 너머로 키가 큰 남자가 보였다. 더 헤아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치수였다.

"마침 네 생각을 하던 참이야, 치수야."

권준호는 농구공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다정스럽지만 조금은 쑥스러운 어투였다. 준호가 다시 공을 패스한다. 치수는 그것을 받아들고 섰다. 워킹 바이얼레이션을 범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그러나 그의 얼굴은 파울에 주의하는 선수보다는 평이했다.

"준호야, 너도 양반은 못 되는구나. 왠지 네가 여기 있을 것 같더라니."

"나도 같은 생각을 했어, 치수야. 네가 코트를 밟으러 올 거 같다고."

공을 들지 않은 이가 나아간다. 2미터가 조금 안 되는 치수는 언제나 한참 올려다 봐야 했다. 그의 뒤에 예의 골대가 보였다. 권준호는 그것에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금 오랜 벗을 바라보았다.

"저기, 기억하니? 중학교 때, 내게 농구공에 대해 알려 주었잖아."

준호는 치수가 들고 있던 공 위에 손을 댄다. 손바닥 아래로 오돌토돌한 요철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어울리지 않게 굳은 살 박힌 손은 그 요철과, 매끄러운 고무 선을 따라 가다가 공 든 이의 새끼 손가락을 톡 건드린다. 다시금 귓가에 옛날의 단편이 울린다. 지금보다 조금은 앳되었지만 여전히 진중한 목소리.

'농구공이 대개 주홍색인 이유는 연갈색인 농구 코트에 적당히 어울리면서 눈으로 좆기 쉬워서야.'

'농구공에 요철이 있는 건 손과의 마찰력을 높이기 위해서고-.'

'참, 농구공에는 실내용과 실외용이 있는 것도 아니?'

그렇게 말하는 14살의 치수는 주홍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바스켓맨인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당장 내일이라도 전투에 임하는 병사처럼 그는 시종 진지하게, 그리고 차분하게 그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준호는 그런 치수에게서 농구를 배웠다. 그의 바스켓의 가장 내밀한 곳에는, 얼마쯤 채치수가 있었다.

"내가?"

치수가 되물으면, 준호는 희게 웃으며 북산 농구팀 주장의 그 솥뚜껑만 한 손을 가만히 쥐었다.

"치수야."

"응?"

"졸업 축하해."

어둠과 고요가 감도는 농구 코트 안에서, 준호는 치수의 거친 손등을 보며 주홍빛 농구공과 그 위의 요철을 떠올렸다. 손바닥에에 바투 붙은 그 탄력있는 가죽 공을. 그 안에는 작은 세계가 있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