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빈첸시오의 고백

동오대만

비행중 by 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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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리스천 최동오 x 무교 정대만

  • 크리스마스에 쓰고 싶었는데 지금 올리네요 하지만 아직 나는 크리스마스다

「저 내일이랑 내일 모레 미사회에 못 나가요.」

23일 저녁, 가족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던 중 동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부모로서는 뜻밖의 선언이었다. 그들의 첫째 아들 최동오는 그야말로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다. 다른 동생들이 친구랑 약속이 있다느니, 시험 준비 때문에 바쁘다느니 하면서 번번히 주일기도나 미사를 빠질 때도 동오는 전국체전 시즌 중에도 근처 성당에 들러 예배를 할 만큼 성실했다. 대학생이 된 지금도 가방에 묵주를 달고 다니고, 시합 직전에는 성호를 그었다. 무언가 가슴에 품은 일이 있으면 신부님을 찾아가 고해성사를 올리기도 했다. 중학생 때에는 농구로 바쁜 시간을 쪼개 청소년부 합창단 활동도 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이브와 당일 미사에 불참한다고 말하다니. 최씨 집안 역사상 처음이었다.

동생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오를 쳐다봤다. 팍팍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제 형제가 갑자기 평소 안 하던 짓을 하다니. 둘째가 막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설마 애인 생겼나? 찔리는 게 있는 사람처럼 동오가 다리로 둘째의 다리를 때렸다. 수런거리는 동생들과 달리 부모님은 잠깐 눈만 동그랗게 떴을 뿐 큰 리액션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아들은 이제 더 이상 부모 말을 고분고분 따르는 10대 청소년이 아닌, 하고 싶은 게 많을 20대 청년이었다. 친구와 약속이라도 생겼나 보지. 오히려 너무 규칙을 잘 따라서 남몰래 걱정도 하던 참이었다. 아버지는 고등어구이의 살을 발라내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래라.」

「와, 나 시험 공부 때문에 빠질 때는 잔소리하더니.」

「네가 언제 공부를 하긴 했냐.」

「아 아빠아~.」

동생이 앙탈을 부리며 입술을 비죽였다. 그 버릇에서 내일 만나기로 한 누군가가 겹쳐 보였다. 그러나 이제 다 자라 대학교에 들어가는 동생이 귀여워 보이지는 않았다. 참 신기했다,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건. 괜히 머쓱해져 동오는 그릇에 고개를 처박듯이 하며 식사를 마쳤다.

최 빈첸시오의 고백

약속시간 20분 전, 동오 스스로도 이렇게 해도 괜찮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성탄미사와 성탄밤샘미사에 빠진 적이 없었다. 지금도 부활절 시즌이 되면 성당에 나와 부활절 달걀에 그림을 그린다. 그러네 가장 중요한 날, 짝사랑하는 애를 만나겠다고 거대한 트리 아래에서 서성대는 자신이 문득 한심해 보였다. 예수님과 하나님도 하늘에서 나를 보시면 혀를 끌끌 차겠지. 심지어 너무 긴장해서 20분이나 일찍 나와버렸다. 날이 추운 것이야 오랫동안 철원에 살면서 익숙해졌지만 다른 것이 더 신경 쓰였다. 머리카락이 흐트러지진 않았을까? 목도리는 똑바로 멨나? 역시 패딩보다는 코트가 좀 더 예뻤을까? 구두가 좀 조이는 것 같은데, 털장갑은 좀 유치해 보이려나? 너무 수척해 보이면 어떡하지? 향수 너무 많이 뿌렸나? 결국 동오는 약속 장소를 살짝 벗어나 근처 가게의 쇼원도 앞에 섰다. 흐릿하게 반사되어 보이는 제 얼굴을 보며 동오는 다시 머리카락을 만지고 옷깃을 여몄다.

「헉, 야, 최동오! 최동오오오오!」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시내 번화가에서도 그 애 목소리는 선명하게 반짝였다. 동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정대만을 바라봤다. 빨간 체크무늬 목도리를 두른 대만이 헥헥대면서 동오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동오는 어정쩡하게 손을 들어 인사하려다가, 너무 들뜬 티를 내는 것 같아 슬그머니 패딩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많이 기다렸어?」

「어으, 인간들 진짜. 그냥 집에서 쉬지 왜 나와가지고…. 추운데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그 <휴일에 집에서 쉬지 않고 돌아다니는 사람>에 자신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양, 대만은 멀뚱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동오를 보곤 장갑을 벗어 양뺨을 가볍게 감싸쥐었다. 털안감 덕에 따뜻한 장갑 안에 있던 손이 얼어붙은 뺨을 천천히 녹여주었다. 뜨끈한 손이 닿자마자 동오는 불에 데인 사람마냥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좀 어때. 물어보는 말투는 투박해도 목소리는 다정했다. 본인만 모르는 무의식 중에 새어 나오는 다정함이 좋았다. 동오는 멍청이가 된 것처럼 연신 고개만 끄덕였다. 읏추추, 대만이 금방 뺨에서 손을 떼고 도로 장갑을 챙겼다. 그게 어째 아쉬우면서도 아쉬워하는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져 귓가가 달아올랐다. 크리스마스가 겨울이라 다행이다.

「너도 일찍 왔잖아.」

「당연하지. 최동오 항상 약속시간 10분 전에 나오는 거 아는데. 너도 늦을 거 같아서 일찍 나왔냐?」

하여튼 꼼꼼해, 최동오. 아니다,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최 빈첸시오라고 불러야 하나? 대만이 별 의도 없이 뱉은 농담에 애꿎은 동오의 볼과 귀만 더 붉어졌다. 진짜로. 크리스마스가 겨울이라 다행이다.

꼼꼼한 최동오 덕에 그들은 사람이 가득한 가게 안에서 어렵지 않게 예약석에 앉았다. 어찌나 철저한지 무려 두 달 전에 예약을 잡았다고 한다. 그래도 덕분에 자리가 남는 가게를 찾아 돌아다니는 수고를 덜었다. 대만은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동오에게 내밀었다. 나는 아무거나 그럭저럭 잘 먹으니까 네가 골라. 무던한 입맛을 가진 자신과 달리 가리는 것이 있는 동오를 위한 배려였다. 운동선수인 만큼 증량을 위해 고기를 섭취하긴 하지만 비시즌 동오는 육류라곤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 동오는 고민하다가 제 몫으로 토마토 바질 페스토 파스타 하나와 고르곤졸라 피자를 주문했다. 메뉴판을 넘겨받은 대만은 테이블에 마련된 종을 울려 직원을 불렀다. 직원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대만이 속삭였다.

「야, 여기에서 라틴어로 주문하면 알아들을까?」

대체 어떤 엉뚱하고 귀여운 상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애석하게도 동오가 할 수 있는 라틴어는 '태초에 빛이 있었다' 같은 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직원도 이탈리아인이 아니어서 한국어로 주문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머쓱하게 동오의 몫과 제 몫을 주문한 다음 대만이 슬쩍 물었다.

「너 술 마실 거야?」

「어…. 혹시 와인 있어?」

「어…. 아 와인 있다. 레드와인 이거 두 잔이요.」

와인까지 주문을 마친 대만은 메뉴판을 직원에게 건네준 대만이 창가를 보면서 와, 탄성을 뱉었다. 동오도 따라 슬쩍 창문을 보았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거리가 조명으로 환해졌다. 방금 전 동오가 대만을 기다리던 트리는 주홍빛 불로 번쩍거리고, 큰 건물들도 광고판에 크리스마스 영상을 띄웠다. 작은 가게들도 나름 열심히 꾸민 크리스마스 장식을 문 앞에 내놓았다. 어떤 건물은 산타 풍선을 달아 놓기도 했다. 모두가 연말의 가장 큰 휴일을 맞이해 잔뜩 들떠 있었다.

그중 가장 즐거워하는 사람은 연인이었다. 그들은 서로 팔짱을 끼고, 상기된 얼굴로 거리를 돌아다니거나 안절부절못하며 애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추운 날임에도 그들의 발간 뺨은 추위 때문이 아닌 설렘 때문으로 보였다. 방금 전까지 저기에서 똑같이 대만을 기다리던 동오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대만이 거리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확률이 높다던데.」

그러더니 동오를 빤히 바라보며 그를 홀린 올리브색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러면 우리도 눈 볼 수 있을까?」

동오는 다시 상상해본다. 근사한 식사를 마치고 나와 다음 장소로 향하는 그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흰 눈을. 동오는 신실하고 건실한 크리스천이지만 낭만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눈이 오는 거면 눈이 내리는 거지 거기에 별 의미를 부여하진 않았다. 그런데 그걸 대만이와 함께 본다고 생각하니 눈이 어서 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건 참 신기했다. 사람을 완전히 다른 인물로 만들어 버리니까.

동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볼 수 있으면 좋겠네.」

「좋겠다~.」

대만이 아이처럼 히, 웃으면서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동오는 말없이 대만을 바라보았다.

음식도 좋았고, 같이 본 새 영화도 대만의 취향에 잘 맞았다. 영화관에서 나오며 대만은 배우와 영화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쉼없이 쏟아냈다. 동온느 대만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솔직히 말해, 영화의 장르 자체는 동오의 취향이 아니었다. 시놉시스도 조금 아쉬웠고. 마지막에 두 주인공이 서로의 마음을 고백하지 못한 채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다.

어쩌면 그들의 결말이 저와 대만의 이야기처럼 보여서 괜히 몰입했는지 모른다. 최동오는 기독교인이고, 대만도 그것을 안다. 그러니 최 빈첸시오는 고백할 수 없다. 이미 대만을 좋아하기로 한 시점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배신하기로 한 것인데, 그 마음만은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니 밖으로 나오지만 않는다면, 평생 나만의 비밀로 한다면. 그러면 이 관계는 친구라는 얄팍한 껍데기 안에서 안전하게 유지될 수 있다. 서로 마음을 알면서 전하지 않는다면 다 해결되는 일이다. 그런데 그러다가 사이가 멀어져 버리면? 그냥 옛날에 친했던 친구로만 남아버린다면? 동오는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대학생 때부터 대만의 옆에는 늘 사람이 넘쳐났고, 다들 대만의 절친이 되고 싶어 안달을 냈다. 거기엔 약간의 셈이 있었겠지만, 그것을 차치하고서라도 대만이 매력적인 사람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동오는 운 좋게 그 옆을 꿰찼지만, 반대로 말하면 언제든 그 자리에서 멀어질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니 친구보다 더 확고한 관계를 원한다면 고백을 해서 애인이 되는 수밖에 없는데 동오에겐 종교라는 걸림돌이 있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십여 년간 지켜온 종교를 버리기엔 동오는 신앙이 깊은 청년이었다. 마치 무너지기 일보직전인 외나무다리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제 처지가 한심하기만 했다.

「어, 눈 온다.」

대만이 하늘을 바라보면서 탄성을 뱉었다. 동오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새까만 하늘 위로 하얀 눈이 성성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고요한 세상이 더 고요해진 기분이었다. 그들은 잠시 눈을 구경하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잡고 다시 걸었다.

대만이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가로등 앞에 섰다. 동오는 몇 걸음 앞서가다가 의아함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대만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고, 주변은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었다. 크리스마스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따뜻한 카나가와의 길에 눈이 천천히 내렸고, 깜빡이는 주홍불 아래 대만은 말없이 주머니 안에 손을 넣은 채 아무 말도 없었다. 비뚤어진 목도리가 먼저 눈에 들어와 동오는 고쳐 메주기 위해 다가갔다. 그는 서슴없이 손을 내밀었고 대만도 그를 쳐내지 않았다. 그러나 얼굴은 선물을 못 받은 아이처럼 뚱했다. 오늘 뭐가, 지금 내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두려움에 손이 서서히 떨렸다. 마침내 목도리로 리본을 묶어주었을 때, 대만이 멀어지는 손을 붙잡듯이 동오를 불렀다.

「뭐 할 말 없어?」

대만이 기회를 주었다. 동오가 고개를 들었다. 첫 만남 때 엇비슷했던 눈높이는 이제 대만이 조금 더 높아졌다. 몇 년 사이 3센치가 더 큰 대만과 달리 동오는 고등학교 3학년 때와 키가 똑같았다. 마치 마음을 자각했으면서도 고백하지 못하는 자신처럼. 그런데 대만이 먼저 고개를 살짝 숙여 대만을 바라보면서 그런 말을 했다. 무슨 할 말 없어? 다그치는 말투보다는 서운해하는 말투였다. <올해는 산타 안 와?>하며 서러워하는 어린애처럼.

신을 향한 믿음보다 강한 것이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일 거라고. 동오는 생각했다.

결국 그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키스해봐도 돼?」

멍청한 질문에 대만이 맑게 웃었다.

「너는 무슨, 사귀기도 전에 키스부터 하려고 하냐.」

하고 싶으면, 해. 키스. 대신 나랑 사귀자. 동오의 허리를 껴안으며 대만이 속삭였고, 동오는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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