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하고도 14시간
태섭대만
새해 기념 태섭대만. 두서 없고 짧습니다.
해피 뉴 이어, 송태섭.
갑자기 저녁에 전화를 건 대만이 뱉은 첫마디였다. 아, 거기는 이제 새해겠구나. 태섭은 탁자에 올려둔 두 개의 시간을 보았다. 하나는 서울 시간에 맞추어져 있었고, 남은 하나는 태섭이 살고 있는 샌디에이고의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현재 샌디에이고는 아직 12월 31일 오후 두 시였다. 태평양을 끼고 있는 그들에겐 항상 1년 14시간이라는 시간 차이가 존재했다. 대만은 언제나 모든 것을 태섭보다 1년 14시간 먼저 겪었다. 이번에도 먼저 30대에 들어선 사람은 대만이었고, 먼저 새해를 맞이한 사람도 대만이었다. 인간의 수명이 평균 80세라는 걸 감안하면 별 차이도 나지 않는 간극이었는데, 태섭은 미국에 온 후로 그 열네 시간이 매우 아쉬웠다. 자신은 절대 따라갈 수 없는, 항상 열몇 시간 먼저 내일로 나아가는 대만이. 그 옆에 언제쯤 나란히 설 수 있을지. 아무리 노력하고 미국에서 날고 기어도 태섭은 정대만에게 그저 1년 열네 시간 어린 연하 애인 겸 후배에 불과한 것 같아서. 태섭은 그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까닭없이 초조해졌다.
대만의 이 새해 인사는 다시 태섭의 해소되지 않을 불안감을 자극했다. 와, 형 벌써 삼십이 되었네요. 속을 삭이며 겨우 농담을 하자 대만이 우쒸, 하면서 주먹을 휘둘렀다. 야 넌 아직 스물여덟이고 새해 밝아도 스물아홉이라는 거지? 두고 봐라, 스물아홉에서 서른 되는 거 진짜 한 순간이다. 아홉 수 가위라는 게 괜히 있는 말이 아니야. 연상답게 성을 내며 후배 기가을 잡으려는 꼴이 귀엽기만 했다. 그래봤자 침대에서는 내가 위잖아요, 라는 유치하게 가오 잡는 발언은 꺼내지 않는다. 침대 포지션은 대만에게 별 타격을 주지 못하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마운팅을 할 생각도 없다. 다만 조금, 마음이 싱숭생숭할 뿐이다. 대만의 앞자리 수가 벌써 3이 되었다는 게. 서른 줄따위,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았던 20대 초반 치기 어린 시간을 지나 대만도 중년이 되어간다는 게 느껴져서.
「정대만은 평새 스물일 줄 알았는데.」
그게 못내 아쉽다. 그와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앞으로 더 짧아질 거라는 게. 이제 고작 삼십인데도, 아직 20대인 태섭에게 그 삼십이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숫자였는데, 갑자기 훅 하고 가까워졌다.
평소답지 않은 약한 소리에 대만이 작게 웃으면서 말했다. 새해가 오면 우울해지는 사람이 있다는데, 얘도 그런 게 왔나. 언제나 제 약한 부분은 꽁꽁 숨겨두고 애인이나 가족에게도 말하지 않는 태섭이기에, 대만은 1년 14시간 어린 그가 말랑한 살을 드러내 제게 보여줄 때마다 묘한 승리감을 맛보곤 했다. 하, 여기가 미국이거나 태섭이 한국에 있었다면 갈비뼈 으스러지게 껴안아주는 건데. 아쉬움을 뒤로 하고 대만은 전화를 끊었다.
―그래, 나도 벌써 서른이다. 거기는 아직 31일이지? 내가 거기 시간으로 딱 1월 1일 되자마자 다시 인사하러 온다
「별소리 다하시네. 여기 1월 1일 되면 거기 몇 시인지는 아시고요?」
「어, 음. 몰라! 대충 오후 즈음에 전화하면 되겠지.」
무대포같은 대꾸에 태섭은 웃어버렸다. 롱디를 시작한 게 언제인데 대만은 여전히 시차 계산을 잘 못했다. 고등학생 때 낙제하던 수학 실력이 아무렴 어디 가겠나. 태섭의 탁상시계처럼 대만의 핸드폰 화면에는 항상 시계가 두 개 떠 있었다. 하나는 서울 시간, 다른 하나는 이곳 샌디에이고 시간.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올해는 시리즈 우승 가보자, 선배.」
―물론, 내년엔―아니, 올해는 둘 다 시리즈 우승 가 보자. 그럼 끊는다. 자정이라고 전화 안 받으면 죽을 줄 알아.
습관적으로 죽인다고 협박을 하곤 대만은 전화를 끊었다. 물주먹이면서 뭘 자꾸 죽인대. 그래도 새해 첫 인사를 대만에게 받아서 조금 기뻤다. 전화를 끊고 가족 채팅방을 여니, 아라와 어머니도 이미 새해 메시지를 보낸 참이었다. 태섭은 <여기 아직 새해 아닌데>라고 유치한 말을 쓰는 대신 고맙다는 말을 정성스럽게 눌러 보냈다. 이상하게 대만이랑 이야기를 할 때는 별 거 아닌 것도 트집을 잡고 싶었다. 이게 사랑의 힘인가, 아니면 내가 소중한 사람을 너무 막 대하는 건가. 태섭은 귓구멍을 후비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NBA 리그는 크리스마스 전후로 끝이 난다. 태섭은 27일부터 비시즌에 돌입했다. 말이 비시즌이지 운동은 쉬지 않았다. 시즌이 다가왔을 때부터 몸을 만든다는 건 송태섭 사전에 있을 수 없었다. 별들의 전당에서 170이 겨우 넘는 동양인 포인트가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도때도 없는 연습이 필수였다. 특히나 천재와는 거리가 먼 범재 선수일수록.
그래도 역시 새해 하루 전이니, 조금 쉬어도 괜찮지 않을까. 태섭은 아까 전부터 시끌벅적한 채팅창을 열었다. 백호와 태웅이 각자 가고 싶은 레스토랑 이름을 대면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우성은 그 가운데 껴서 어디든 다 좋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우성에게 저 맹수들 목줄을 잡고 컨트롤하길 바라면 사람이 아니다. 애초에 우성에게 리더로서의 카리스마를 바라면 안 된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심지어 저보다 두 살 어린 애들보다 더 막내 같았다. 외동이라서 그렇다기엔, 대만은 그래도 사람을 다루는 데에 재능이 있었던 거 같은데. 주장도 해 봤고. 그런 개난리를 쳤음에도 후배들은 대만을 잘 따랐다. 때문에 태섭이 주장일 때 대만은 그와 대거리를 하다가도, 후배들 앞에서는 태섭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고 따랐다. 그 덕분인지 후배들도 고분고분하게 태섭의 지시대로 따라와 주었다.
또 습관적으로 정대만을 떠올렸다. 아니, 습관적으로가 아니라 습관이다. 롱디를 10년 동안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몸에 배기는 버릇이었다. 태섭이 채팅창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건 다 됐고, 무조건 당일 예약 가능한 데로 가자.
송꼬마~ 연말에 당일 예약이 가능한 데가 어디 있어~!
그러면 그냥 우리 집에 오든가.
정우성 집으로, 라고 쓰려다가 황급히 우리 집으로 고쳤다. 새해가 되자마자 연락하겠다는 대만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정우성 집에서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 마셨다가 대만의 전화를 놓치는 것보다야 놈들 소리 지르고 날뛰는 거 진정시키다가 전화 받는 게 낫지. 태섭은 바로 집을 치우기 시작했다. 겸사겸사 장을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두 시간 만에 전원 송태섭의 집 앞에 모였다. 하여튼 행동력 하나는 기가 막힌 새끼들이라고 속으로 감탄하면서도 태섭은 집주인으로서 손님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했다. 말 그대로 광란의 밤이었다. 넷플릭스로 영화 세 편을 보고, MLB 통합 리그 결승전 재방송을 보면서 환호하다가, 이번 시즌에서 누가 제일 못했냐고 서로 트집을 잡다가 멱살잡이도 한 번 할 뻔하고. 장장 여섯 시간을 어떻게 보냈나 기억이 안 날 지경이었다. 서태웅이 먼저 뻗어버리고, 그 뒤를 이어 백호와 우성이 차례로 쓰러졌다. 그들은 카우치와 손님방에 나란히 뻗었고, 대만의 새해 전화를 받아야 한다는 의무감에 정신 말짱히 깨 있는 태섭만 슬슬 지끈대는 머리를 붙잡고 한숨을 쉬고 있었다. 이 대형종들은 어떻게 옮기지…. 고민하던 태섭은 제 힘으론 도저히 무리인 백호는 카우치에 방치하고(방치는 안 했다. 베개와 담요를 쥐어주긴 했으니까) 정우성의 겨드랑이에 냅다 손을 넣어 손님방으로 질질 끌고 갔다. 그래도 침대 위로 던져 넣는 건 무리라 사정사정해서 깨운 다음 제 발로 기어들어가게 만들었다.
이거 내일 근육통 생길 거 같은데. 어깨를 통통 두드리며 탁상시계를 보니 어느 새 1월 1일이 되기 30초 전이었다. 지금쯤 미국 전역에서 새해 카운트다운 생방송을 하고 있으리라. 그 방송이라도 틀어놓을까 하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누가 이 야밤에 초인종을, 옆집인가? 태섭은 경계심도 없이 현관문으로 향했다. 30초는 벌써, 5초로 줄어들어 있었다.
「누구세….」
말을 마치기도 전에 상대를 알아본 태섭의 얼굴이 굳었다. 한국에 있어야 하는 대만은 그 반응을 기대했다는 듯 팔을 활짝 벌리며 외쳤다.
「해피 뉴 이어!」
그 순간 아파트 단지에서 떨어진 시내에서 불꽃이 터졌다. 불이 켜진 집마다 해피 뉴 이어, 라며 서로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태섭은 새해가 되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1월 1일. 해피 뉴 이어라는 말을 제때 전해주기 위해 정대만이 날아왔다. 열네 시간 전에 한국에서 샌디에이고까지. 그들 사이에 있던 1년 14시간 중에, 14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하, 하고 태섭은 헛웃음을 지었다. 더 욕심내지 말아야지, 생각할 때마다 대만은 그 결심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이런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당신이 나를 두고 나아가는 1년 14시간을 내가 어떻게 아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째 조금 화가 난 듯한 태섭의 반응을 보고 대만은 바로 안절부절못하며 말을 더듬었다.
「어, 아니. 우리 1월 1일에 같이 있었던 적이 별로 없잖냐. 그래서 나 이번에 일정 다 빼고 일부로 1월 1일에 호텔이랑 비행기랑 다 예약했는데….」
「아니이, 연락한다길래 나는 그냥 전화하는 줄 알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애들 다 오지 말라고 했지이.」
「뭐? 걔네 너네 집에 있어? 헐. 정대만 선견지명 대박. 호텔 잡아두길 잘했다.」
「빨리 가요. 아, 잠시만. 저 옷 먼저 갈아입고.」
태섭이 허둥대며 도로 안으로 들어갔다. 대만은 그 새를 못 참고 조용히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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