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섭대만] 초콜릿의 유통기한은 생각보다 길다 下(完)
송태섭은 초콜릿을 혀로 녹이며 천장을 바라봤다. 그의 가슴에는 핸드폰이 놓여 있었다. 같은 학급 동창회보다 더 자주 모이는 북산 농구부 덕분에 정대만의 번호가 그대로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초반에 몇 번을 제하고 더는 가지 않았지만, 같이 NBA 선수로 뛰는 강백호나 서태웅이 종종 비시즌에 맞춰 참석하기에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의외로 정대만의 출석률도 그리 높지 않다는 것까지 들었을 때는 입맛이 썼다. 그런 자리엔 빠지지 않을 사람일 텐데. 나 때문인가, 하고 조금 고민하기도 했다. 머지않아 정대만이 연애한다는 소식을 듣고 전부 구겨서 버린 고민이었다.
‘……지금도 연애하려나.’
핸드폰을 쥐고 검지를 세워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헤어진 직후에도 술 마시고 연락한 적은 없는데. 인제 와서 발렌타인데이에 연락하는 전 남친이라니. 심지어 한국은 이미 지났지 않았나. 아무리 생각해도 최악이었다. 송태섭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하지만 궁금했다. 그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수제 초콜릿을 그런 식으로 선물한 건지. 끝까지 말하지 않을 셈이었는지. 물어보는 이유에 사심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헤어진 지 7년 만에 깨달은 8년 전의 비밀은 여러모로 좀 타격이 컸다. 형편 없는 이별을 고했던 탓일까. 잊은 줄로만 알았던 심장 박동이 손가락을 따라 쿵쿵 존재감을 과시했다. 송태섭이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곧 있으면 한국은 아침이었다. 그러니, 지금 메시지를 남기면 정대만이 곧 볼지도 몰랐다. 결정은 빨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건 생각이 길어지면 안 됐다.
형,
ㅎ
메시지를 쓰다가 급하게 다시 지웠다. 숨을 크게 들이키며 불규칙하게 뛰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혔다. 오랜만에 연락하는 거니까, 너무 친근한 호칭은 조금 부담스러울지도 몰랐다. 그러니 천천히, 천천히 하기로 했다. 사람을 워낙 좋아하는 사람이니, 애인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가정을 떠올리면서도 옆에서 기다리다 보면, 어떻게든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사심이 툭툭 불거졌다. 그러니 인내해야 할 때였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건, 그런 거니까. 스스로 떠나보낸 사람이다. 그 값을 치를 때가 왔을 뿐이다.
선배, 혹시 옛날에 나한테 줬던 초콜릿 뭔지 기억해요?
생각나서 사 먹어 봤는데 맛이 달라서. 이게 아닌 것 같은데요.
정대만한테 실수라도 이런 문자를 보내지 않기 위해, 술 마시면 핸드폰부터 꺼버렸던 게 무용해지는 내용이었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송태섭은 핸드폰을 뒤집어 가슴 위에 화면을 덮어버렸다. 그러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어 확인했다. 정대만이 답을 줄지, 읽기는 할지 신경 쓰였다. 손에서 핸드폰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메시지 옆의 ‘1’이 언제 사라질지 지켜보는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아, 언제까지 핸드폰만 보고 있을 건데.’
그러나 일순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이 몰려와 화면을 껐다. 새까만 액정 위로 제 얼굴이 비쳤다. 한껏 휜 눈썹이 오늘따라 꼴사나웠다. 송태섭은 뜯은 포장지와 남은 초콜릿을 정리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핸드폰을 뒤집은 채 카우치의 팔걸이 쪽으로 던져버렸다. 그런데 떨어지자마자 지잉— , 짧게 진동했다. 송태섭은 쏜살같이 다시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화면을 켰다. 정대만이었다.
새끼 그땐 한 번에 다 처먹고 눈길도 안 주더니
인제 와서 궁금하냐
‘그러니까요. 인제 와서 궁금하더라고요.’
스스로 어이없으면서도 한편으론 억울했다. 이건 수제 초콜릿이라고 말 안 해준 당신 탓도 있지 않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정대만은 아직 송태섭이 그 사실을 안다는 것조차 모를 테다. 그는 정대만이 직접 자신이 만든 초콜릿이었다고 말해주길 바랐다. 그렇다면 좀 더 대답을 유도해야 했다. 뭐라고 하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아 핸드폰 화면 위를 꾹꾹 눌렀다가 지우길 반복했다.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게 어렵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송태섭은 오랜만에 정대만 때문에 별걸 다 경험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내가 만든 거다
엄마가 같이 만들자고 해서 한 거야
만들었다는 말 뒤로 빠르게 변명 같은 부가 설명이 따라왔다. 거짓말이든 아니든 상관 없었다. 결국, 어머니와 만든 초콜릿을 애인한테 주려고 미국까지 들고 온 건 정대만이지 않은가. 머리가 지끈거렸다. 카우치에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았다. 허벅지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머리를 모로 숙여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그리고 한 손으로 빠르게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
그럼 포장은요.
맛 없으면 쪽팔릴 것 같아서 상자만 쌔볐다 뭐
당당한 어투에 순간 이런 일이 흔한가, 라는 어처구니없는 의문까지 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헛웃음이 나오면서도, 정대만답지 않아서 조금 설렜다. 아니, 생각보다 더 많이. 송태섭이 팔에 힘이 들어가 핏줄이 솟은 손등으로 입가를 가렸다. 질끈 감은 그의 눈이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누가 수제 초콜릿을 그렇게 포장하냐고. 이걸 심지어 끝까지 속였다고?’
머리가 아득해졌다. 이걸, 사귈 때 알았으면 진짜 가만 안 뒀다, 정대만. 송태섭은 홀로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꽉 쥐었다. 그의 커다란 손에 비해 작은 핸드폰이 덜덜 떨렸다. 후배로서 옆에서 기다린다고? 그게 되겠어? 전력으로 꼬셔도 모자랄 판에? 커다랗게 뜬 눈에 핏줄이 돋았다. 그는 심호흡하며 심기일전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짧은 메시지가 곧장 전송됐다.
그때 맛있었어요
곧장 ‘1’이 사라졌다. 하지만 정대만의 답이 오지 않았다. 송태섭이 입술을 깨물면서 화면을 바라봤다.
그러냐
그는 답장이 왔다는 사실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정대만이 아직 자신과 대화하길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족했다. 송태섭이 핸드폰 액정을 손톱으로 톡톡 두드리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토도독, 하고 빠르게 답을 입력했다.
또 먹고 싶은데
수작질로 보여도 상관 없었다. 아니, 수작질로 받아주길 바랐다. 정대만이 자신을 의식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어떻게 반응할까. 송태섭은 그의 여러 대답을 상상해보았다. 인제 와서 뭔 지랄이냐고 화를 낼까. 아니면 농담하지 말라며 어물쩍 넘어가려고 할까. 뭐든 좋았다. 그에 대한 대응도 몇 가지 떠올렸다. 그러나 개중에 이런 대답은 없었다.
그럼 찾아가
네가 7년 전에 안 받은 거
‘7년 전이면……. 헤어졌을 때잖아.’
허망하게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보기 좋게 그은 얼굴이 어울리지 않게 하얗게 질렸다. 그날, 공항에서 자신이 정대만에게 했던 말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수상하리만치 가방 안을 계속 확인하던 상기된 낯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모든 게, 비수가 되어 뒤늦게 제 가슴에 꽂혔다. 송태섭은 끝내 짧게 욕을 지껄이며 고개를 숙였다. 눈가가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숨이 가빠졌다. 속절없이 눈물이 차올랐다. 그러나 그에겐 울 자격이 없었다. 눈을 크게 뜨고 깜빡이지 않자, 눈 위에 스민 물기가 위태롭게 아롱졌다.
유통기한이 한 2개월 남았던가
시즌 끝나고 오면 줄게
답이 없어 신경 쓰였던 건지. 정대만의 메시지가 연달아 왔다. 흐릿한 시야로 이를 확인한 송태섭이 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액정 위로 끝내 눈물이 뚝, 떨어졌다. 메시지 창을 내리려고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물방울만 번졌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바지에 액정을 닦았다. 그리고 애써 침착함을 얼굴에 두르며 키패드를 눌렀다. 단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는 숫자를 차례대로 입력했다. 짧은 손톱이 통화 버튼 위를 맴돌았다. 바들바들 떨며 꾹 누르자, 화면이 넘어갔다. 그는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남의 속도 모르고 연결음이 느긋하게 이어졌다. 안 받으려나. 이대로 끊어지는 걸까. 심장이 쿵쿵, 너무 크게 뛰어서 속이 메스꺼웠다. 그때. 뚝.
“여보세요.”
“…….”
“……말 안 하면 끊는다. 이거 국제전화잖아.”
정대만이 전화를 받았다. 자신이 전화를 걸었음에도 놀란 송태섭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그를 안다는 듯이 정대만이 덧붙여 말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것처럼 그가 입을 뗐다.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뺨을 따라 눈물이 흘렀다.
“잘못, 했어요.”
멋 없게도 당장 입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말이 그것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생각나서 전화해 본 척, 괜찮은 척 해볼 기회도 없이 튀어나왔다. 다른 손을 들어 눈가를 덮었다. 열이 오른 얼굴이며 손이며 뜨겁지 않은 데가 없었다.
“오냐.”
“그땐, 내가 실수했어요. 생각이 짧았어요.”
“그러냐.”
정대만의 대답은 짧았다. 무언가를 묻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그를 밀어내지도 않았다. 송태섭은 그것만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볼의 눈물을 닦아내며 코를 훌쩍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입안에서 헤맸다. 이걸, 말해도 될까. 그래도 되나. 생각만으로 염치 없는 말이다. 하지만 정대만이라면, 지금이라면 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솟아올랐다.
“……보고 싶어요.”
“난 꼴 보기 싫어, 인마.”
“정말?”
진짜 꼴 보기 싫었다면,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을 테다. 아니. 애초에 메시지에도 답하지 않았겠지. 적어도 송태섭이 기억하는 정대만은 그랬다. 한 번 아니라고 생각하면 미련이 남더라도 단호하게 눈을 돌릴 줄 알았다. 그 미련에 발목 잡혀 돌아오지 않는 이상, 영영 떠나버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송태섭은 간절하게 바랄 수밖에 없다. 정대만이, 송태섭에게 그만한 미련을 품고 있길. 계속 눈에 밟히고 신경 쓰여서 어쩔 수 없이 발을 돌릴 만큼 사랑했길. 정대만이 송태섭의 오만을 한 번쯤은 눈감아주겠다고 할 만큼 그리워했길.
“여전히 싸가지 없는 새끼……. 전화로 퉁치지 말고 와서 말해.”
“……알겠어요.”
“오랜만에 전화해서는, 쯧.”
됐다. 됐어. 정대만이, 송태섭에게 미련이 남았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제야 목이 트여 숨을 쉴 수 있는 것처럼.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저 다행이란 생각만 들었다. 간간이 훌쩍거리는 소리를 듣고 정대만이 짧게 혀를 찼다. 하지만 그 이상 타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송태섭이 진정하길 기다려주며, 그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가 더 듣고 싶은 송태섭으로선 조금은 아쉬운 배려였다.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어서야, 정대만이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또 할 말 없냐.”
짧고 투박하지만 무언가를 기대하는 어투였다. 은근히 재촉하는 그의 목소리를, 송태섭은 알고 있었다. 고장 난 것처럼 눈물이 그치질 않는데, 웃음이 나왔다. 분명 많이 바뀌었겠지. 자신이 변한 것처럼, 정대만도 송태섭이 없는 사이에 많이 달라졌을 텐데. 고작 전화로 느낄 수 있는 그는 과거와 그리 다르지 않아서. 안심되면서도 조바심이 났다. 내가 모를 당신을 어서 만나고 싶다.
“사랑해요.”
“재수 없어, 송태섭”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입술을 비죽 내미는 얼굴이 당연하게 연상됐다. 송태섭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카우치에 몸을 한껏 기댔다. 긴장이 풀린 것처럼 전신이 쉽게 늘어졌다. 고른 숨소리가 천천히 이어졌다. 핸드폰에서 후련해 보이는 가벼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곧이어 정대만이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보다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법 위협적으로 굴려는 것 같았지만, 그 말을 듣고 송태섭은 오히려 열이 올라 따뜻한 귓바퀴를 만지작거렸다.
“한 번만 더 그러면 미국까지 쫓아가서 가만 안 둘 거야.”
“응, 나도 사랑해요.”
언제나 그렇듯, 정대만이 송태섭의 정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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