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만 오른쪽

[태섭대만] 초콜릿의 유통기한은 생각보다 길다 中

태대 태섭대만 발렌타인데이



“미쳤어요? 어떻게 왔어요? 형도 시즌 중이지 않아요?”

“알아, 인마— 우리 이번 주 홈팀 경기만 있다. 그래서 튀어왔지. 지난주에 설날인데 경기 있어서 못 내려갔거든. 짧게 집에 내려갔다가 바로 오겠다고 하니까 허락해주셨다! 다른 선배들도 그렇게 갔다가 오신대.”

“아니 그럼 집에 가야지! 여기가 형네 집이야?! 부모님께는 뭐라고 하고 온 건데요!”

“말 안 했지. 연습하는 줄 아실걸.”

“이 화상.”


정대만은 돌연 송태섭 앞에 나타났다. 심지어 송태섭도, 정대만도 시즌 중이었다. 며칠 전에 그에게 곧 설날이라며 떡국도 못 먹어서 어떡하냐는 편지를 받았는데, 정대만이 더플백 하나 메고 미국에 왔다.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머리가 웅웅 울렸다. 곧바로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제 이름을 부르는 정대만의 목소리에 얼마나 기겁했는지. 샤워도 못하고 그를 끌고 복도로 나와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었다. 처음에는 송태섭을 달래기 위해 정대만이 미리 준비한 것처럼 줄줄 정황을 늘여 놓았다. 그러나 그것마저 기가 찼다. 방금 경기를 끝낸 몸에 뜨끈하게 열이 올랐다. 고개를 숙이자, 코에서 덜 굳은 피가 흘렀다. 유니폼 위로 후드득, 떨어지는 붉은 핏방울에 놀라 송태섭이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정대만 때문에 너무 놀라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어어, 바보야! 고개를 왜 들어!”


굳이 따지자면 정대만이 더 바보인데. 그가 송태섭의 턱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이번에도 준비한 것처럼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피실피실 나왔다. 입술에 맺힌 피가 혀에 닿아 찝찝한데도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머리를 숙인 송태섭에 맞춰 정대만이 무릎을 구부렸다. 그가 어울리지 않게 섬세한 손길로 인중과 입가를 하얀 손수건으로 닦았다. 다행히 피가 더 흐르지는 않았다.

아까 코에 솜 넣고 있었는데. 못 봤겠지. 아니, 손수건을 미리 꺼내둘 정도면 봤을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보는데 코피 나서 코에 솜이나 쑤셔 넣은 모습이라니. 되는 일이 없다. 그 와중에 손수건 챙겨 다니는 정대만이라니.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잘 어울렸다. 은근히 도련님 같은 구석이 있으니까.


“피 잘 안 지워질 텐데요.”

“아이씨, 너한테 쓰는데 내가 그걸 아까워 하겠냐. 오랜만에 보는데 할 말이 잔소리밖에 없냐. 송태섭이. 나 너랑 저녁 먹고 자고 내일 아침 비행기 타야 한다고.”

“내일 아침……?”


머리로는 이해했다. 당장에 왕복 이동 시간만 해도 거의 하루가 날아갔다. 홈경기라서 다른 구단 경기장으로 가지 않을 뿐, 정대만은 한국에 가자마자 또 경기를 준비해야 할 테다. 그것은 송태섭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생각보다 코트에서 오래 뛰었고, 코피도 터져서 다음 경기엔 안 내보낼 것 같지만 준비는 다른 얘기였다. 경기에 못 나간다고 해서 연습과 몸 관리를 게을리했다면, 애초에 미국에 오지도 않았을 테다.

송태섭이 깊게 한숨을 내쉬며 정대만을 바라봤다. 짙은 녹음이 깃든 눈동자가 오롯이 그를 담아내고 있었다.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살살 쓸었다. 몸은 커졌는데 지방 커팅이라도 했는지 얼굴엔 살이 더 없다. 젖살은 아직 덜 빠진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작은 머리가 더 작아 보였다. 말없이 얼굴만 만지작거리는 송태섭이 의아했는지, 정대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움직이는 올리브 색의 홍채를 송태섭의 동공이 따라갔다. 그러자 진한 눈매에 쌍꺼풀이 있는 눈이 휘었다. 촘촘히 짙은 눈썹은 오히려 찌푸려지고, 입술이 양쪽으로 시원하게 벌어졌다. 누구도 못 말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송태섭?”

아, 보내기 싫다.


빡!


“야, 미친놈아! 뭐 하는 거야!”


송태섭이 주먹을 들어 본인의 머리를 때렸다. 깜짝 놀란 정대만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제 이를 털었던 짱돌 같은 주먹을 여전히 꽉 쥐고 있었다. 정대만은 조금 두려워졌다. 왜, 왜 이래. 이 또라이. 그래도 놓아주진 않았다. 그렇게 세게 쥐고 있으면서 바들바들 떠는 모양새가 불안했다. 송태섭이 혹여나 또 때릴까 봐, 정대만은 그대로 어린 애인을 끌어안았다. 방금 경기를 뛴 몸은 따끈하고 조금 끈적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으니 이내, 송태섭이 정대만의 허리를 안았다. 그리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천천히 숨을 고르는 숨결이 느껴졌다. 정대만이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제야 주먹에 손이 풀렸다. 이를 확인한 정대만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뭐가 문제냐, 송태섭.’


편지 속의 송태섭과 전화 속의 송태섭은 조금씩 달랐다. 정갈한 어투에 깔끔한 문장으로 미국 생활에 대해 전하는 송태섭은 언제나 가슴을 간지럽게 했다. 그래서 미국에서 제법 잘하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목소리로 전해 듣는 송태섭은 어딘가 불안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한국에서의 정대만의 일상을 궁금해했고, 듣고 싶어 했다. 그러다 자기가 모르는 이야기가 나오면 더 물어볼 법도 하건만, 그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고등학생 때는 대학 생활에 대해 일일이 다 물어보고, 질투하고 화냈으면서.

그래서 정대만은 헷갈렸다. 얘가 지금 내 이야기가 듣고 싶은 게 맞나. 적당히 맞장구도 쳐주고 예전에 했던 말을 다시 언급하면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그뿐이다. 미국에 간 송태섭은 한국에 있는 정대만의 생활에 깊게 간섭하지 않았다. 오래 떨어져 있으면서 익숙해진 걸까. 아니면 좀 신뢰가 쌓인 걸까. 권태기는, 아닌 것 같다. 편지 속의 송태섭은 여전히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으니까. 그래서 불안하지는 않은데, 그 미묘한 간극이 정대만의 신경에 거슬렸다.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했다면, 생기지 않을 의문이기에 더더욱. 녀석은, 제 앞에서 표정을 잘 숨기지 못하니까.


“일단 집에 가자, 태섭아. 씻고 나와.”

“알았어요. 그럼 입구에 있어요. 금방 갈게요.”


정대만의 품에서 나온 송태섭이 곧장 달려 나갔다. 누가 봐도 급한 모양새였다. 그 뒷모습을 보며 킥킥, 웃음을 터트린 정대만이 더플백을 추어올렸다. 괜히 고개를 숙여 제 가방을 보고 웃는 게 수상했다. 결국, 그는 얼굴 하관을 커다란 손으로 가리고 체육관 바깥으로 향했다. 주체하지 못하는 입꼬리를 꾹꾹 누르는 손 위가 조금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


흠집이 많지만 여러 옵션에 빨간 바디가 매력적인 바이크가 멈췄다. 송태섭이 시동을 끄자마자 정대만이 헬멧을 벗었다. 숨을 내뱉으며 짧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까보다 얼굴이 조금 하얗게 질린 것 같기도 했다. 송태섭이 눈썹을 휘며 그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야 바이크를 장만했던지라, 정대만을 태운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힘들어하는 모습에 그가 제 뒷덜미를 주물렀다. 차를 사야 했나. 바이크 위에 있는 정대만을 보니 자연스럽게 그의 긴 머리 시절이 떠올랐다. 그 옆에 있던 친구도. 분명, 그 사람도 바이크를 탔었다. 그래서 정대만도 익숙할 거라 여겼다.


“아오, 이건 탈 때마다 적응을 못 하겠다.”

“속 안 좋아요?”

“아니, 그 정돈 아니고. 달릴 때는 꽤 기분도 좋고 괜찮은데. 씁, 내릴 때쯤 되면 이러더라.”

“그럼 냄새 때문인가.”

“됐어. 토할 정도도 아닌데. 신경 안 써도 돼.”


손을 흔들며 바이크에서 내리더니 헬멧을 옆구리에 끼는 모습이 퍽 자연스럽다. 가만히 바라보던 송태섭의 배알만 뒤틀렸다. 역시, 익숙한 것 맞네. 정대만이 직접 운전할 것 같진 않으니 역시 그 사람 뒤에 탔겠지. 그럼 허리도 껴안았을 텐데. 자신이 없던 시절의 정대만은 언제나 미지였다. 사정을 듣는다고 해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었다. 송태섭은 그 사실이 퍽 아쉬웠다. 내가 당신과 동갑이었다면, 무언가 달랐을까. 고작 한 살 차인데, 왜 이리 멀게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다.


“태섭아, 헬멧 꼬박꼬박 잘 써야 한다. 알지?”

“당연하죠. 걱정 마요. 고등학생 때도 멀쩡하게 잘 쓰고 다녔어.”

“그래, 그럼 다행이고. 아, 배고파— 가방 놓고 밥 먹으러 가자. 너도 오늘 경기해서 배고플 것 아냐.”

“그래요.”


송태섭도 헬멧을 벗고, 가방 깊숙한 곳에 넣어둔 열쇠를 꺼냈다. 농구공과 강아지 키링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것을 보고 정대만이 웃으며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귓바퀴가 조금 붉어졌다.


“아직도 잘 하고 다니네.”

“누구처럼 덜렁거려서 열쇠 잃어버린 적은 없거든요.”

“아이씨! 너, 그거 그만 말하라고 했다!”

“형이 먼저 꺼낸 얘기다~”


열 받은 티를 팍팍 내며 정대만이 송태섭의 목을 팔로 조였다. 그다지 힘을 주지 않아 그냥 정대만의 가슴에 등을 기대고 밀착한 꼴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말만 요란하게 하며 송태섭을 위협했다. 그 모습이 웃기고 좋아서 괜히 눈썹만 찌푸렸다. 안 그러면 바보같이 헤벌레 녹아버릴 것 같았다. 송태섭은 겨우 문을 열고 정대만을 뒤에 단 채로 집에 들어갔다.

중고로 구한 TV와 침대, 작은 책상, 조그마한 냉장고가 겨우 들어가 있는 원룸이었다. TV는 정대만이 프로 리그에 들어간 이후에 구했다. 대부분 정대만이, 어쩔 땐 송아라가 먼저 한국 프로 경기 녹화본을 보내주기 때문이었다. 처음 받은 건 송아라에게서였다. 두 사람은 생각도 못 한 것을 그의 여동생이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보내주었다. 이후에 소식을 들은 정대만이 주기적으로 보내주기 시작했다. 덕분에 책상 아래는 비디오만 담아둔 리빙 박스가 차지하고 있었다. 침대 밑은 이미 옷을 넣은 리빙 박스로 가득 차서 어쩔 수 없었다.

송태섭은 괜히 책상 밑의 리빙 박스를 안쪽으로 밀어 넣고 옷을 갈아입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정대만이 가방을 내려두고 곧장 뒤로 누워버렸다. 침대 방향과 거꾸로 누워 신발 신은 발은 바깥에 두고 몸만 누운 게 딱 한국 사람이었다. 송태섭이 급히 고개를 돌리며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 비행으로 피곤해서 누운 것일 텐데. 침대에 누운 정대만을 보자마자 배 아래가 근질거렸다. 아니, 바이크 위에서 그가 제 허리를 안을 때부터 애국가를 외웠다. 네가 짐승이냐, 송태섭. 마음 같아선 짐승이 되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는 1년 넘게 못 만난 애인이 바로 옆에 있었지만, 밥은 먹여야 한다는 마음으로 버텼다.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아— 나 저번에 너랑 먹은 햄버거. 거기 감자튀김이 계속 생각나더라.”

“좋지.”

“거기 맥주도 맛있었는데.”

“내일 아침에 간다는 사람이 무슨 술이에요. 시즌 중이잖아. 안 돼.”

“나도 그냥 해본 말이다, 인마. 미국 와서 맥주도 못 마시고 가네.”


그냥 해본 말이라고 하지만, 아쉽긴 한지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픽, 웃은 송태섭이 재빠르게 머리를 정리했다. 학교에서 급하게 나오느라 머리를 감기만 해서, 새로 왁스를 발라 머리를 올렸다. 옆태까지 꼼꼼하게 확인한 후, 밖으로 나왔다. 정대만이 아직 누워 있었다. 눈까지 감고 있어서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손을 뻗어 그의 짧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안색도 멀쩡해졌는데, 이렇게 누워 있으니 조금 걱정되었다. 차라리 그를 조금 재운 후에 나가거나 포장을 해올까 싶었다.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이 더욱 부드러워졌다. 만약 정대만이 눈치 보듯 한쪽 눈만 뜨고 깜찍한 소리를 하지 않았다면, 송태섭은 얌전히 그를 재웠을 것이다.


“오랜만에 봤는데. 뽀뽀 안 해주나. 이러고 있으면 해주던데.”

“누가?”


귀엽긴 한데, 말투가 마음에 안 들었다. 이미 누구한테 받아본 것 같은 뉘앙스이지 않은가. 송태섭의 눈썹이 산을 그렸다. 그것을 보고 정대만이 킥킥 웃음을 흘렸다.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그 시절의 소년을 닮은 미소였다. 삐죽거렸던 마음이 금세 풀렸다. 그래도 대답은 궁금했기에 그를 재촉하는 것처럼 가슴에 턱을 올리고 바라봤다. 근처에서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부풀었다가 가라앉는 가슴을 따라 숨을 쉬었다.


“당연히 송태섭이지. 너 고등학생 때 했었잖아.”

“……깨어 있었어요?”


송태섭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사귀기 한참 전의 이야기였다. 인터하이가 막 끝난 시점이었던가. 파김치가 되어서 다른 부원들이 샤워하는 사이에 잠깐 졸고 있던 정대만의 입술을 탐한 게.


“응.”

“그땐 우리 사귀지도 않았는데.”

“맞아.”

“형도, 그때 나 좋아했어요?”

“음……. 그랬나.”


심장 소리가 커졌다. 그에게 들릴까 무서워 숨을 참았다. 그리고 정대만에게 들키지 않도록 천천히 숨을 내뱉고서야 말을 이었다.


“뭐야. 무슨 대답이 그래요.”

“그전까지는 딱히, 생각을 안 해봤던 것 같거든. 연애는 관심이 없었으니까.”

“…….”

“근데 네가 딱, 그때 뽀뽀하고 튀는 거 보니까 심장이 막—”

“됐어요, 그만 말해요.”


역시 바보는 정대만이다. 그래서 좋았다. 여전히 바보 같고, 송태섭을 보면 소년처럼 웃는 정대만이, 사랑스러웠다. 송태섭은 그가 바란 대로 입술을 맞붙였다. 오랜만에 닿은 입술이 그 무엇보다 달았다. 그간 느낀 갈증을 씻어내려 주는 단비였다. 그는 필요할 때 시원하게 내리치는 소낙비를 닮았다. 난데없이 나타나 짧은 시간에 전신을 차갑게 적셔버린다. 그렇게 내린 소나기는 한 번에 채워봐야 우물 정도일 것이다. 거대한 바다는 되지 못할 테지. 그래서 두려웠다. 갈증에 허덕이다 너무 빨리 마셔버리면 그가 고갈되지 않을까.


*


하룻밤은 너무나도 짧았다. 하지만, 송태섭이 결정을 내리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다. 차라리 고민할 시간이 짧아서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지난한 시간을 보냈을 테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더플백을 맨 정대만이 여권과 티켓을 손에 쥐고 가방 안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곧 비행기를 탈 시간이었다. 송태섭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내뱉었다. 그리고 한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굳이 보지 않아도 꼴 사납게 덜덜 떨릴 게 뻔했다.


“형, 나 할 말 있어요.”

“어? 어, 그래. 뭔데?”

“우리, 헤어지는 게 좋겠어요.”


가방을 계속 살피던 정대만이 송태섭의 말에 휙, 고개를 돌렸다. 예쁘게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곤두박질쳤다. 저런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는데. 나 때문에 정대만이 저런 표정을 할 줄 몰랐는데. 눈가에 열이 올랐다. 송태섭은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마시고 내쉬었다.


“……갑자기 왜? 우리 아침까지만 해도 좋았잖아. 아니, 아침만이냐. 너 방금까지 나랑 바이크 타고 여기까지 와놓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송태섭의 말이 아직 얼떨떨한지, 정대만은 생각보다 흥분하지 않았다. 아니면, 또 그가 모르는 사이에 변한 정대만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올리브 색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여권과 티켓을 가방에 대충 쑤셔 넣은 그가 송태섭을 똑바로 쳐다봤다. 당장 소리치고 싶은 얼굴로 어금니를 꽉 깨무는 게 뻔히 보였다. 그런데도 그는 끝까지 먼저 큰소리를 치지 않았다. 무얼 바란 걸까. 그가 화내길 바랐나?


“나 진지해요. 허튼소리도 아니야. 작년부터 계속 생각했던 거예요.”

“왜? 똑바로 얘기해. 도대체 뭐 때문에 헤어지자는 건데. 그리고 넌, 1년 동안 나랑 얘기도 안 하고 혼자 결정했어? 송태섭, 이 자식아. 제정신이야?”


아, 화낸다. 말하다 보니 계속 열이 올랐는지 말이 점점 적나라해졌다. 그러면서도 목소리 크기는 안 높인다. 지금쯤 제 멱살쯤은 잡아야 했는데 말이다. 한결 같다가도, 훌쩍 어른이 되어버린 당신을 볼 때면 항상 홀로 뒤떨어진 것 같다.


“응, 나 제정신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그래요. 내가 보기에도 이상해. 당신이 보내준 경기 영상 보면서 매번 생각했어. 당신과 함께 하고, 성장할 사람들을 매번 질투해. 내가 나한테 질릴 만큼.”

“너…….”

“그러면서 무슨 생각하는 줄 알아요? 정대만이 다 버리고 송태섭 따라 미국에 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 말고 나랑 농구 해줬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당신한텐 당신의 농구가 있고, 난 내 욕심으로 미국에 온 건데.”

“태섭아.”

“그래서 말하는 거예요. 내가 정대만 끌고 미국으로 오거나, 한국으로 못 가게 붙잡기 전에.”


스스로 뭐라고 말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바닷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귀가 먹먹했다. 제 이름을 부르는 정대만의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정대만을 자신에게서 떼어놓을 말만 고르기 위해 혀를 열심히 굴렸다. 이 정도로 말하면 정대만도 알아듣겠지, 싶었다. 어차피 그나 나나 농구를 포기하지 못할 사람들인데. 그러니 상대에게서 농구를 빼앗겠다는 말을 하면, 정 떨어지지 않을까.


“너, 진짜 미쳤구나.”


근데, 진짜 그런 상황이 오니 가슴이 좀 찢어질 것 같았다. 각오했는데도 그랬다. 그냥 좀 더 버텨볼 걸 그랬나. 정대만 못 보는 건 아쉽지만, 경기 영상 좀 덜 보고 덜 연락하고. 오래 사귄 연인들처럼 그렇게 서서히 서로를 뒤로 미루면서도 끈질기게 곁에 둬 볼 걸 그랬나? 그럼 다른 사람에 의해 변하는 당신이 좀 익숙해졌을까?

이미 말을 던진 이상, 앞으로 영영 모를 가능성이었다. 후회한다고 한들, 송태섭은 이미 던진 말을 무르진 않을 테니. 침을 꼴깍, 삼켰다. 정대만의 표정이 궁금한데 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는 보지 못했다. 엉망진창으로 새빨개진 정대만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혹해서 쳐다볼 정도로 빨개진 정대만이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송태섭이 알았다면, 땅을 치고 후회했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게 진짜 헤어지자고 하는 거냐. 이 미친놈은. 프러포즈 하면서 헤어지자고 하는 놈은 난생처음이다, 개새끼야…….’


정대만은 실감 나지 않았다. 지금 당장에라도 자기가 껴안으면 허리에 팔부터 감을 녀석이 헤어지자고 한다는 게. 성격 같아선 당장에 욕하며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대학교를 거쳐 구단에 입적하면서 어엿한 사회인이 정대만은 그럴 수 없었다. 내가 형이잖아. 형이니까. 속으로 그리 되뇌며 그는 깊게 숨을 마셨다가 내쉬었다. 그 모습이 제 앞의 어린 연인과 제법 닮은 줄을 꿈에도 모르고.


“내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아? 네가 그런다고 내가 얌전히 휘둘릴 줄 아냐고. 내가 막으면 되잖아. 너 지금 실수하는 거라고,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해주면 되잖아. 응?”


처음에는 잘 달래보려고 했다. 단순히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서 혼란스러워 그런 거라 여겼다. 당연히 헤어지잔 말도 거둘 줄 알았다. 어리광이나 투정 같은 것이길 바랐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송태섭은. 언제나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놈이라서.


“아니, 정대만은 못할걸.”

“뭐?”

“이번에 보니까 알겠던데. 정대만도, 나를 너무 좋아하거든요.”


이렇게 제 가슴에 대못을 박더라. 앞니로는 부족했나.

 

“자신만만하네. 그렇게 말하는 놈이 지금 나한테 이러는 거냐? 개새끼야.”

“내가 당신 망치는 것 보단 훨씬 나으니까.”

“안 망가져. 넌, 날 도대체 뭐로 보고—”

“송태섭한테만 쉬운 정대만을, 내 성격에 가만둘 것 같아요?”


정대만은 할 말을 잃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꼴값 떤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조금, 그의 말을 이해하고 말았다. 누가 송태섭을 이런 겁쟁이로 만들었겠는가. 답은 정해져 있었다. 입안이 텁텁해졌다. 아주 쓴 초콜릿을 억지로 삼켜야 하는 것 같다. 언제나 뭐든 뚫고 나갈 것 같던 놈을 천하의 겁쟁이로 만든 게 정대만이라. 한숨이 나왔다. 내가 얘를 망치고 있는 건가. 근데, 내가 뭘 했는데. 난 사랑한 것밖에 없는데.


치사한 새끼.

내 사랑마저 잘못된 걸로 만드는 못된 새끼.


정대만은 대학교를 다니며 터무니없는 변명과 함께 이별하던 인간들을 많이 봤다. 그중 가장 최악은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놈들이었다. 적어도 자신은 그러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농구든 사람이든, 사랑한다면 이 한 몸을 다해 사랑할 테니까. 송태섭도 당연히 그럴 거라 여겼다. 오만이었던 걸까. 인제 와선 모를 일이었다. 저 애가 무슨 생각으로 고백하고, 여태 자신과 사귄 건지. 하지만 단 한 가지는 명확했다. 송태섭은 지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새끼였다. 그래서 정대만은 고이 담아온 제 마음을 그에게 전해주지 않았다. 이기적인 송태섭에게 지금 당장 그가 줄 수 있는 유일한 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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