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태웅 / 하나루

[백호태웅] 친구 부정기

내 여우가 친구일 리 없어

  • 2학년 시점

선배, 원온원 해요.

서태웅이 양손으로 농구공을 쥐고 잽싸게 다가왔다. 졸업한 정대만이 잠시 후배들 보러 들른 이틀간, 서태웅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원온원 귀신이 들린 건지, 눈만 마주치면 원온원, 원온원. 다들 정리하고 집 가는 분위기인데도 서태웅은 어김없이 원온원 요청을 해왔다. 그래, 딱 세 판만. 한판으로는 절대 끝나지 않을 걸 아는 정대만이 제 입으로 절충안을 끄집어내려 할 때였다.

쿵쿵. 땅이 울리는 소리를 내며 이번엔 강백호가 달려왔다.

"만만쓰! 이번엔 나랑 해!"

서태웅이 눈썹을 찡그린다. 늘 무표정인 그가 강백호 앞에서는 유독 감정의 폭이 넓어진다.

"내가 먼저다, 멍청이."

"어제도 했잖아! 욕심쟁이 여우!"

또다. 둘은 질리지도 않고 오늘분의 싸움을 시작했다. 작년 내도록 이 꼴을 봐왔는데 졸업하고도 보게 될 줄이야. 이럴 때 정대만의 대처 방법은 둘로 나뉘었다. 싸우게 놔두기, 대충 말려보기. 오늘의 정대만은 체력이 좀 남아도는 편이었다.

"쓰읍. 친구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정대만의 말에 강백호가 바락 달려든다.

"치, 친구는 무슨! 누가 여우 자식이랑 친구라는 거야 대만군!"

퉁.

과장스레 훈계하는 척하던 정대만도, 왁왁 소리 지르던 강백호도,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둘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서태웅의 손이 비었다. 그 손에 들려있던 농구공은 힘없이 발치에 떨어져 굴러간다.

서태웅은 잠시 강백호를 바라본다. 꿈벅꿈벅. 천천히 깜박이는 눈꺼풀에 긴 속눈썹이 나부낀다. 그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에서 감정이 읽힌다. 혼란. 서태웅은 혼란스러웠다.

서태웅은 별말 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가 라커룸에 들어갈 때까지 묘한 정적이 흘렀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강백호가 입을 삐죽인다.

"뭐야, 여우 녀석. 갑자기 왜 저래."

"표정이 안 좋던데. 뭐, 배라도 아픈 거 아니냐."

정대만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 모든 상황을 한 발짝 뒤에서 지켜보던 송태섭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장의 자리는 무거웠다. 눈치 없는 바보들 분만큼 눈치가 생겨버렸다.

"백호야. 네가 친구 아니라고 해서 상처받았잖아, 태웅이가."

퉁.

이번엔 강백호의 손에서 농구공이 떨어졌다.

강백호는 부정했다. 강백호만이 아니다. 정대만도 함께였다. 서태웅이 그럴 위인이냐, 섭섭이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이다, 후배를 하나도 모르냐, 여우는 그런 거 신경 안 쓴다.

여우가 그럴 리 없다. 강백호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천재님 등장!

1교시 쉬는 시간. 강백호는 옆 반 문을 열어젖혔다. 그의 요란한 등장에도 반 아이들은 힐끔 쳐다보고 말 뿐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강백호가 그 반에 찾아가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강백호는 창가 구석 자리를 힐끔 쳐다봤다. 늘 그랬듯 서태웅은 자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졸거나, 턱을 괸 채 졸기도 했는데 오늘은 피곤했는지 아예 책상에 엎어져 있었다.

학생이 잠이나 자고 말이야.

강백호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 앞앞 자리, 양호열이 턱을 괸 채 강백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백호는 터벅터벅, 다소 힘 빠진 걸음으로 양호열에게 다가갔다.

"음?"

양호열이 의문을 표했다. 강백호가 그 앞에 앉음과 동시였다. 강백호는 다시금 저 뒷자리를 슬쩍 보더니 머리를 벅벅 긁었다.

"있잖냐..."

"백호야,"

둘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눗, 너 먼저 말해. 난, 그 뭐냐. 별거 아니야. 강백호가 허둥지둥 말을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다시 한번 뒷자리를 힐끔거리는 건 잊지 않았다.

"왜 왔어?"

"어어? 왜냐니, 심심해서 호열이 너 보러 왔지. 나 맨날 왔잖냐."

"아니지 백호야."

이번에는 양호열이 뒤를 슬쩍 쳐다봤다.

"매번 서태웅이랑 놀았잖아."

"그, 그건! 여우 녀석 골려주려고 깨운 거지!"

"음... 싸웠나?"

"싸우긴 무슨! 아무 일도 없었거덩!"

그렇구나. 양호열은 너무나도 정직해 거짓말이 서툰 제 친구를 보며 슬쩍 웃었다.

"무슨 말 하려고 했어?"

"엉? 아...."

강백호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면서 또 질리지도 않고 뒷자리를 힐끔댄다. 그 열렬한 시선에도 책상 위로 엎어진 서태웅의 뒤통수는 미동도 않는다.

"여우 있잖냐...."

강백호가 답지 않게 목소리를 낮춘다.

"친구가... 없냐?"

양호열의 입꼬리가 굳었다. 옅은 미소를 띤 채로 박제되어버렸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일까 백호야... 그는 잠시 말을 골랐다.

"아무래도 그런 편이지?"

그의 대답에 강백호의 눈썹이 미묘하게 내려갔다. 외톨이 여우. 홀로 자는 모습이 괜히 쓸쓸해 보였다. 수업 종이 울려도 잠이 든 여우는 깨지 않았다. 아니, 아니다. 저 녀석은 원래 잠이 많으니,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거겠지. 강백호는 마음을 다잡았다.

"느네 반 안 가냐?"

교사의 축객령에 강백호는 교실을 일시적으로 떠났다. 50분 후 재방문 예정이었다.

서태웅은 질리지도 않고 잠만 잤다. 강백호는 쉬는 시간마다 그 뒤통수를 쳐다보며 양호열과 의미 없는 대화나 나누었다.

"저거 어디 잘못된 거 아니냐? 계속 자는데."

"그럼 깨워 봐."

"...아니다. 잠탱이 여우 녀석, 그냥 졸려서 저러는 거겠지."

강백호는 자기 암시에 가까운 말을 양호열에게 중얼거렸다. 양호열은 그저 웃으며 들어줬다. 강백호 친구 5년 차, 이 정도는 별거 아니었다.

"점심엔 일어나겠지?"

"글쎄."

표정을 찡그렸다가 다시 후다닥 평온을 가정한다. 그러더니 흥, 하고 고개를 돌린다.

"알 게 뭐야!"

하하. 양호열은 마른 웃음만 뱉어낸다.

바람이 불고 햇살이 따가운 옥상. 그곳이 백호 군단의 점심 식사 장소가 된 건 작년 겨울부터였다. 아- 그때 추웠지. 그맘때를 회상하던 노구식이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 둘만 왔어?"

"서태웅은?"

김대남이 이어 질문한다. 먼저 와있던 셋의 시선은 모두 백호를 향해있다.

"몰라, 알아서 오겠지!"

왜 저러지. 싸웠나? 그들끼리 수군거린다.

"아아- 서태웅 아버님 표 계란말이 먹고 싶은데."

"그거 맛있지. 오늘 제육 가져올 거랬는데...."

이용팔과 김대남이 아쉬운 소리를 한다. 그에 강백호가 버럭 성을 냈다.

"눗, 걔 걸 왜 뺏어 먹어! 안 그래도 비실한 녀석인데."

소란하던 옥상에 정적이 흘렀다.

"비실?"

김대남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하하... 점심시간 다 가겠다. 밥 먹자!"

양호열이 쾌활한 척 주의를 돌렸다. 백호 군단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하나둘 도시락을 까기 시작했다. 그날 점심, 결국 서태웅은 끝까지 옥상에 올라오지 않았다.

종례를 마치고, 강백호는 누구보다 빠르게 교실을 벗어났다. 서태웅 생각만 하면 마음이 뒤숭숭했기에, 그와 마주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라커룸에 가장 먼저 도착해 옷을 갈아입고 있자니, 송태섭이 곧 들어왔다.

"오, 빨리 왔네? 태웅이는?"

"으으아악! 몰라! 왜 나한테 계속 서태웅 거리는 건데!"

폭발했다. 누적된 열이 발화점을 드디어 넘겨버렸다.

"아 깜짝이야. 항상 같이 왔으니까 그러지. 왜 이래?"

송태섭은 대충 대꾸해주며 태연한 얼굴로 그에게 저지를 휙 던졌다. 강백호가 시끄럽게 구는 일은 하루 이틀이 아니다.

"후눗, 뭐야!"

"태웅이 저지. 어제 두고 갔더라."

"뭐라고! 이 칠칠치 못한 여우가... 추위도 많이 타면서! 요즘 밤바람이 얼마나 찬데!"

"그래, 그래. 그러니까 백호 네가 나중에 좀 챙겨줘."

강백호는 자연스럽게 옷을 착착 접어 제 락커에 넣더니, 뒤늦게 송태섭에게 소리쳤다.

"왜 내가 여우 옷까지 챙겨줘야 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송태섭은 날뛰는 강백호를 뒤로하고 라커룸을 유유히 걸어 나갔다. 그는 강백호의 행동에 하나하나 장단 맞춰주면 끝이 없다는 걸 지난 세월에 이미 깨우쳤다.

어휴, 바보 여우. 강백호도 구시렁거리며 라커룸을 빠져나왔다. 슬슬 부원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부활동 시간인데, 서태웅이 오지 않았다. 5분 전까지만 해도 좀 늦네- 하던 송태섭이, 정시가 됐는데도 오지 않자 강백호를 불렀다.

"얘가 무단으로 빠질 애가 아닌데... 백호야 가서 찾아와라."

5분은 무슨, 10분 전부터 안절부절못하던 강백호는 송태섭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뛰쳐나갔다. 역시 여우네 반 들렸다 갈 걸 그랬나. 정말로... 섭섭쓰 말처럼 여우가 상처받은 거면 어쩌지. 농구에는 항상 진심인 녀석이 부 활동 결석이라니, 강백호는 그 모든 게 제 탓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드르륵. 강백호가 뒷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교실은 고요했다. 다들 부실이나 집으로 가버린 지 오래였다. 그 고요함 속에 서태웅만 혼자 묵묵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강백호가 온종일 질리도록 본 그 모습이었다.

"...서태웅?"

강백호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서태웅은 여전히 미동도 없이 책상에 엎드린 채였다. 아직도 잔다고? 강백호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톡톡. 그 답지 않은 조심스러운 손짓이다.

"일어나 봐."

아무 반응이 없자 이번에는 살살 흔들었다. 으응. 작은 신음이 들린다. 곧 서태웅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너... 어디 아프냐?"

"...몰라."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몽롱한 눈이 강백호를 올려다본다. 색색이는 숨소리가 들린다.

강백호는 미칠 것만 같았다. 너무 상심한 나머지 아프기까지 하다니! 그깟 친구가 뭐라고, 그냥 친구 맞다고 하면 될 걸, 그게 뭐라고... 어서 사과해야 한 했다. 어제 그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고, 친구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미...."

"......"

"미, 미친 여우! 아프면 병원을 가야지!"

말이 헛나왔다. 헙. 강백호는 말 다 해놓고선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졸렸어."

"아픈 거겠지!"

"자면 괜찮아 질 줄 알았어."

점심 때 깨웠다면 더 빨리 알았을까. 아니, 1교시 쉬는 시간에 오자마자 깨웠다면. 강백호의 뇌가 후회로 점철됐다.

"추워."

"눗, 잠, 잠시만! 아 옷 여기 없는데... 아니, 섭섭이한테 말하고 병원을! 그, 내가 옷도 가져올 테니까!"

기다려, 여우!

강백호가 뛰쳐나가며 소리쳤다. 곧 정말 믿을 수 없는 속도로 그 모든 일을 해치운 강백호가 손에 저지를 들고 헉헉거리며 들어왔다.

"헉, 자, 여기, 후우."

져지를 어깨에 덮어주며 손을 내민다. 서태웅은 그 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가자, 병원."

"왜?"

시선이 올라간다. 뛰어다니느라 새빨개진 강백호와 열이 올라 붉어진 서태웅. 둘이 눈을 마주했다.

"왜냐니...."

"왜 챙겨주는 건데?"

강백호는 어제오늘의 일로 학습했다. 지금은 뺄 때가 아니다.

"친구... 니까."

서태웅이 눈을 깜박인다. 대답을 듣고도 멀뚱히 강백호를 쳐다만 본다. 곧 손을 내민다. 뜨끈한 손과 따뜻한 손이 포개어진다.

"가자."

강백호가 씨익 웃었다. 역시, 얘랑 같이 다니는 게 마음이 편하다. 내버려 뒀더니 이런 일이나 생기고.

"근데, 여우야... 많이 충격이었냐? 아프기까지 하고..."

"뭐가."

"아니, 어제 말이야..."

"어제 저지 놔두고 간 거?"

"어엉?"

"집 가는데 추웠어. 감기인 것 같아."

후눗, 칠칠치 못한 여우! 강백호가 툴툴거렸다. 그러면서도 꼬옥 쥔 손은 놓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이다, 나 때문은 아니네. 강백호는 조금 안심하며 느려진 서태웅과 발걸음을 맞추어갔다.

"점심 못 먹었겠네! 병원 갔다 밥 먹으러 갈까?"

"응."

"내일은 점심 같이 먹자."

"그래."

"종례 끝나고도 바로 올게. 체육관 같이 가자."

"응."

흐히히. 강백호가 요상하게 웃었다. 멍청이. 서태웅의 타박을 들어도 그 얼굴에선 웃음기가 떠나지 않았다. 병원까지 도보 10분, 지하철 2 정거장. 둘이 맞잡은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사랑 자각까지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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