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태웅 / 하나루

[백호태웅] 연애 부정기

우린 친구니까

  • 2학년 시점

강백호의 등굣길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느지막이 집을 나서, 삼거리 앞에서 양호열과 만난다. 조금 더 가면 나오는 편의점 앞에서 남은 백호 군단 친구들과 합류한다. 5명이 시끌벅적하게 남은 등굣길을 걸어간다. 그런데 교문에 다 달아서 이변이 생겼다. 서태웅과 마주친 것이다. 자칫하면 지각할 시간. 서태웅은 원래 이보단 빠르게 등교하는 편이었다.

"어엇, 여우!"

강백호가 백호 군단을 뒤로하고 뛰쳐나갔다. 비틀거리던 자전거가 마찰음을 내며 멈추어 선다. 서태웅이 왜 불렀냐는 듯 뚱한 표정을 지으며 자전거에서 내린다.

"몸도 안 좋은데 자전거 타고 오면 어쩌냐! 엉?"

"다 나았어."

"다 낫긴 무슨! 병원 간 게 어제인데! 의사가 무리하지 말고 며칠 푹 쉬라고 했잖냐... 여우 너 어제 열이 38도가 넘었다고!"

"... 이젠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좀 봐봐. 어허, 가만히 있어 봐."

강백호가 서태웅의 앞머리를 조심스레 걷어내었다. 곧 두툼한 손이 이마에 닿는다. 손바닥이 이마 전체를 감싸고도 남아, 눈과 코까지 가려버렸다.

"조금 따뜻한 것 같은데."

"아닌데."

"목은? 기침은 안 나냐?"

"응... 에치!"

최악의 타이밍에 기침이 튀어나와 버렸다. 서태웅이 슬쩍 시선을 회피했다. 진짜 괜찮은데. 목이 좀 간지러울 뿐이었는데.

"여, 여우! 안 되겠다, 보건실 가자!"

강백호가 자전거를 낚아채더니 혼자서 척척 예쁘게 세워놓고 온다. 서태웅은 그 모습을 보며 부루퉁하게 서 있었다.

"가자."

강백호가 손을 내밀었다. 서태웅은 '괜찮은데...'라고 중얼거렸다가 또 괜히 한 소리를 들었다. 손을 맞잡고 둘은 학교로 걸어갔다.

"저게 뭐냐, 호열아...."

남겨진 백호 군단은 어안이 벙벙했다.

강백호는 바빴다. 서태웅을 보건실 침대에 잘 눕혀놓고, 서태웅네 담임을 만나러 갔다. 어제 열이 많이 나서 그 농구 여우가 농구도 못했다느니, 방금 보니까 기침도 해서 쉬어야 한다느니, 구구절절 아주 열성적으로 서태웅의 상태를 토로했다. 허락을 받아내고는 매점으로 달려갔다. 조례가 시작했던 말던 알 바가 아니었다.

"여우야... 괜찮아?"

강백호가 헉헉거리며 보건실 문을 열었다. 서태웅은 포근한 이불에 둘러싸여 가물가물 잠이 들려 하고 있었다.

"담임이 너 계속 자도 된대."

"으응..."

서태웅이 감길락말락 하는 눈으로 강백호를 올려다봤다. 눈썹이 축 늘어져 걱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진짜 거의 다 나았는데. 하지만 잠을 실컷 잘 기회를 거부하고 싶진 않았다.

"자, 여우. 이거 마셔."

강백호가 품에서 두유를 꺼내 들었다. 따끈한 병이 서태웅 손에 쥐어진다.

"늦잠 자서 밥도 못 먹었다며. 이거 마시고, 약 먹고 자라 여우야. 엉?"

강백호가 조심조심 서태웅을 일으켰다. 서태웅은 고분고분 그가 따주는 두유를 받아마셨다.

"점심 때 깨우러 올 테니까, 푹 자! 난 간다."

약까지 먹이자 만족했는지 씨익 웃으며 뒤돌았다.

"그런데...."

강백호가 나서려는 순간, 나직한 목소리가 발을 붙잡았다.

"친구라서... 챙겨주는 건가?"

서태웅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의중을 알아낼 수 없는, 언제나와 같은 무표정이 강백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그럼! 친구니까!"

강백호는 제가 왜 잠시 망설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어제, 우린 친구 하기로 했으니까.

"그래."

서태웅이 고개를 끄덕이곤 스르르 누웠다. 강백호는 고개를 끄덕이는 찰나의 표정을 봐버렸다. 조금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슬퍼했나? 미묘하게 올라간 입꼬리. 그리고 아주 조금, 평소보다 쳐진 눈매. 잠깐 스쳐 간 표정인데 뇌리에 박혀 떠나질 않았다.


점심 종 소리도 서태웅을 깨우지 못했다. 그러지 않아도 잘 자는 그였지만, 약 기운이 더해져 오전 내내 죽은 듯이 잠만 잤다. 강백호는 한 손에 도시락, 다른 한 손에는 비닐봉지를 들고 보건실로 향했다.

얇은 커튼은 햇빛을 다 막아주지 못하여 서태웅의 얼굴에도 빛이 아른거렸다. 아랑곳하지 않고 얌전히 감겨있는 눈에 시선을 빼앗겼다. 긴 속눈썹이 빽빽이 누워있었다. 강백호는 저도 몰래 조심스레 다가가 한참을 내려다봤다. 자는 모습을 제대로 본 건 처음이었다.

"여우... 일어나."

강백호가 그의 몸을 살살 흔들었다. 움찔. 눈가가 떨리더니 천천히 눈꺼풀이 올라간다. 잠에 취해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절경이었다. 강백호는 침을 꼴딱 삼켰다. 예쁘다. 서태웅을 부정하기 바빠 외면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으... 누구든..."

서태웅이 웅얼거리다 남은 말을 삼킨다. 저를 내려다보는 강백호와 시선을 마주했다.

"... 점심?"

"어... 어! 점심, 점심 먹어야지!"

강백호가 파드득 몸을 떨며 뒤로 물러났다. 허둥지둥 옆에 두었던 도시락을 챙겨 든다.

"여우, 네 도시락도 가져왔어. 가자."

끄덕. 서태웅이 스르륵 일어나 그의 옆에 섰다. 그러곤 강백호에게 손을 내민다.

"아!"

강백호가 제 점심이 든 비닐봉지를 오른손으로 옮긴다. 서태웅의 도시락과 강백호의 비닐봉지가 한 손에 빠듯이 잡혔다. 비어버린 왼손은 당연하다는 듯 서태웅의 손을 움켜쥔다.

"도시락..."

"응?"

"... 아니야."

둘은 조금 늦게 옥상에 도착했다. 이번에도 손을 꼭 쥐고서.

봄바람이 살랑이고 햇살이 내리비친다. 옥상은 따뜻한 봄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백호 군단과 서태웅은 늘 그랬듯 그늘진 옥상 구석에서 식사 중이었다.

"서태웅네 계란말이다! 그리웠다, 정말... 어제 하루 못 먹은 거지만."

"난 제육!"

서태웅의 도시락을 노리는 손길에 강백호가 잽싸게 팔을 뻗어 막았다.

"뭐 하는 거야! 여우는 환자라고! 아픈 사람 밥을 뺏으려 하다니... 이 나쁜 놈들!"

강백호가 제 일인 것처럼 흥분해서 씩씩거렸다. 서태웅은 그런 강백호를 한 번, 도시락을 한 번, 다시 강백호를 한 번 봤다가 슬쩍 그의 팔을 치웠다.

"많아서 괜찮아."

실제로 많았다. 친구랑 먹는다는 말에 도시락 양을 늘인 게 작년이었다. 정말, 새삼스러운 반응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마냥 서태웅이 반찬을 뺏기기만 할 사람도 아니다. 오늘만 해도 이미 이용팔의 감자조림과 양호열의 오징어젓갈을 한입씩 뺏어 먹은 참이었다.

"눗, 안 돼 여우! 많이 먹어야 빨리 낫는다고! 빨리 농구 해야 할 거 아니냐!"

"..."

맞는 말인 것 같았다. 서태웅은 잠시 생각하더니 도시락을 스윽 몸쪽으로 당겼다.

"여우야, 이것도 먹을래?"

강백호가 까만 봉지에서 샌드위치를 꺼내 든다. 샛노란 타마고 샌드의 한쪽을 서태웅에게 건넸다. 계란이 좀 더 많은 쪽이다.

서태웅은 얌전히 받았다. 빨리 나아서 농구. 그 말이 아주 효과적이었다.

"여우 아닌 사람 억울해서 살겠냐...."

김대남이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백호는 실실 웃어대며 서태웅 먹이기에 바빴다.

체육관을 가기 전,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다. 오늘은 부 활동을 꼭 해야겠다는 서태웅과 적어도 오늘까지는 쉬라는 강백호의 의견충돌이었다. 서태웅은 조금 답답해졌다. 감기는 거의 다 나았고 아무렇지도 않은데 자신을 깨질 듯이 다루려는 강백호가 이해되지 않았다.

"괜찮다고 했잖아."

"무리하다 더 아파지면 어떡하냐고!"

"내가 가겠다는데 왜 네가 참견인데?"

짜증이 섞인 말에 강백호가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잠시 씩씩거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 친구잖아. 걱정하는 거야."

"..."

"너한텐 참견이었냐?"

서태웅의 동공이 떨린다. 대답도 못하고 입을 꾹 닫은 채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곤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작게 소리를 낸다.

"무리 안 할게. 가고 싶어."

"... 약속했다?"

"응."

서태웅이 한쪽 손을 내민다. 이번엔 의도가 명백했다. 강백호가 자연스럽게 맞잡아온다.

"늦어서 섭섭이가 뭐라 하겠네."

"너 때문이야. 멍청이."

"흥. 고집쟁이 여우. 지켜볼 거야 오늘! 무리하기만 해봐!"

"그러든지."

지각인데도 둘은 서두르는 기색 없이 천천히 체육관을 향해 걸어갔다. 체육관에선 벌써 공 튕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네..."

지각을 나무라려던 송태섭이 뒷말을 잇지 못한 채 하얗게 굳었다.

"뭐, 뭐냐?"

정신차린 송태섭이 삿대질을 한다. 정작 삿대질 당한 둘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왜 그래 섭섭!"

"아니, 아니! 너네! 그거! 그 손!"

"손?"

강백호가 맞잡은 손을 들어 올린다. 자연히 서태웅의 팔도 함께 들어 올려졌다.

"갑자기 왜 둘이 손을 잡고 오는데! 징그럽게!"

"엑, 뭐가? 그냥 여우가 아프니까... 그런 거지."

"... 서태웅 어디 아파?"

"어제 말했잖아! 감기 걸려서 병원 다녀온다고! 주장이 돼서 그것도 기억 못 하다니, 주장 실격이야!"

송태섭이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친다.

"누가 감기 때문에 손 잡고 다녀... 그게 부축이 필요한 병이었냐."

"섭섭쓰... 매정해! 친구끼리는 원래 이렇게 챙겨주는 거라고!"

서태웅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송태섭은 더 이상 뭐라 할 의지가 사라졌다.

"에휴... 됐다. 들어와. 서태웅, 넌 오늘 운동 괜찮냐?"

"웃쓰."

"여우 아직 아파. 무리시키지 마."

"어어..."

송태섭이 찝찝한 표정으로 먼저 뒤돌았다. 저것들 어제까진 친구니 아니니 거리더니 갑자기 왜 저러지. 쎄했다. 농구부 첫 공식 커플이 탄생해버릴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송태섭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참을 인' 자를 다시 한번 새겼다. 아니, 이제 새길 자리도 없다. 그 놈의 여우. 온종일 여우, 여우, 여우, 여우, 여우... 아주 여우농장이 따로 없다.

"달재야. 어떻게 생각하냐."

송태섭이 강백호와 서태웅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체육관 구석에 기대앉아 쉬고 있는 서태웅의 옆에서 강백호는 재잘재잘 잘도 떠들었다.

"백호랑 태웅이?"

"엉."

"많이 친해졌지."

"... 그렇지."

너무 많이 친해진 것 같지는 않냐. 송태섭은 차마 그 말은 못 뱉었다. 밖으로 꺼내는 순간 진짜가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대신 착잡한 표정으로 둘을 응시했다. 시시덕거리는 꼴이 굉장히 거슬렸다.

"여우야, 그럼 토요일 말고 일요일은?"

"괜찮아."

"먹고 싶은 거 있냐?"

"...카레. 그런데 주말에 만나면 뭐해?"

"어... 빠칭코?"

"안 가봤는데."

"아, 아니면 영화 좋아하냐? 영화 볼까?"

"...그래."

가관이다. 이제는 아주 데이트 계획까지 세운다. 저게 친구면 난 친구가 없지. 송태섭이 달재를 바라본다.

"달재야. 너는 내가 감기 걸리면 손 잡고 다녀줄 거냐?"

"... 왜 그래 태섭아, 어디 아파?"

송태섭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헛소리였어. 송태섭의 한숨이 깊어졌다. 선배들이 보고 싶었다.


주말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월요일 아침, 강백호의 등교는 평소와 아주 달랐다.

'원래 친구끼리는 등교도 같이 하는 거다, 여우.'

'난 자전거 타고 가는데.'

'내가 특별히 너희 집 앞까지 가줄게. 같이 걸어가자.'

'... 그래.'

그렇게 강백호는 서태웅과의 등교를 쟁취해냈다. 집 방향이 달라, 백호 군단과는 함께 등교하지 못한다는 게 조금 아쉽긴 했다. 하지만 서태웅을 홀로 쓸쓸하게 등교하도록 내버려 두는 게 더 싫었다.

둘은 손을 꼭 잡고 등굣길을 천천히 걸었다. 감기는 진작에 다 나았는데도, 둘 다 그 간지러운 행위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의문을 제기한 건 보다 못한 이용팔이었다. 등교의 의리도 저버린 강백호가 고작 친구 운운하며 서태웅을 챙기려 드는 꼴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야, 백호야. 그냥 빨리 사귀어라."

강백호랑 같은 반이라는 죄로, 이용팔은 총대를 맸다. 쉬는 시간이 되자 서태웅네 반으로 튀어 나가려는 강백호를 겨우 붙잡고 꺼낸 말이었다.

"눗, 무, 무슨 소리냐, 용팔아?"

"서태웅이랑 연애 하라고."

물론 지금도 충분히 둘은 연애 비슷한 걸 하고 있었다. 그러니 차라리 공식적으로 해버려라. 보는 사람 덜 답답하게. 이용팔은 그런 의도를 담아 강백호에게 강권했다.

"내가... 여우랑... 여우랑 연애?"

"그래, 연애!"

"마, 말도 안 돼! ...친구끼리 무슨 연애냐?"

"으아악!"

이용팔이 답답함에 소리를 질렀다.

"야, 너 나랑 손 잡고 다닐 수 있어?"

"내가 왜!"

"서태웅이랑은?"

"그건... 걔가 아프니까..."

도저히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이용팔은 강하게 나가기로 했다.

"백호야... 서태웅이랑 키스할 수 있냐?"

"키..."

강백호가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두 눈을 끔벅끔벅, 천천히 깜박이며 잠시 허공을 바라보더니 곧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할 수 있냐, 없냐가 아니었다. 하고 싶었다.

강백호는 종일 정신이 없었다. 쉬는 시간마다 서태웅을 만나러 가던 것도 마다하고, 제 자리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망했다. 강백호는 서태웅과 친구가 아니라 애인이 되고 싶었다. 서태웅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친구라고 했을 때 기뻐했는데. 진짜 망했다. 강백호는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어떡하지. 고민은 오전 시간 내내 머리에 맴돌았다. 그러나 곧 점심시간이었다. 서태웅을 마주칠 수밖에 없다. 이젠 어떻게든 결판을 내야 했다.

강백호는 점심 종이 치자마자 서태웅의 반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정작 교실에 들어서서는 긴장감에 몸이 굳어버렸다.

"여, 여우..."

서태웅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왜 안 왔는데?"

"엉?"

"놀러 온댔잖아."

"아... 아. 미안. 아, 근데... 여우야."

강백호는 잠시 숨을 골랐다. 긴장됐다.

"할 말이 있어."

"뭔데?"

부들부들 긴장에 몸을 떠는 강백호가, 서태웅 눈에도 조금 이상해 보였다. 강백호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겹쳐오는 손을 꼭 쥐고는, 앞서 걸었다. 서태웅은 강백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고는, 그냥 따라가 주었다.

학교 뒤뜰. 서태웅은 이 곳에 제법 자주 불려 나갔다. 특히 학기 초에는 심했었다. 여기 오는 이유는 항상 같았다. 고백받기. 그 고백들은 다 거절했으니, 서태웅에게 뒤뜰은 이를테면 거절의 장소였다.

강백호의 발이 멈추고, 서태웅도 멈췄다. 둘은 마주 보았다. 그러면서도 서로의 한 손은 연결되어있었다. 후우. 강백호는 긴 한숨을 내뱉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있잖냐... 너는 나랑 손 잡는 거 좋냐?"

서태웅은 물끄러미 잡혀있는 손을 내려다봤다. 손이 덜덜 떨린다. 손바닥이 촉촉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런 것 같은데."

서태웅은 강백호의 손이 마음에 들었다. 크고 두툼한 손이 가득 잡히면 따뜻하고 기분 좋았다.

"그, 그럼... 어제 같이 영화 보고, 밥 먹고, 그거는?"

"재밌었어."

서태웅은 가만히 강백호를 기다려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뜸들이는 강백호가 답답했다. 얼굴을 조금 찡그리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재촉한다.

"뭔데.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혹시 키, 키스는 안 하고 싶냐?"

강백호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었다. 서태웅은 그 얼굴을 묵묵히 바라봤다. 한참을 답이 없자 강백호가 횡설수설 입을 연다.

"미, 미안. 아니다. 역시 너무 갑자기..."

"몰라."

"어엉?"

"안 해봐서 모르겠어."

"... 그럼?"

"해보면 알 것 같은데."

서태웅의 귀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강백호는 천천히 얼굴을 맞댔다. 긴 속눈썹이 나풀거리는 모습이 아주 가까이서 보였다.

쵹. 둘의 입술이 맞닿았다. 눈을 꾹 감고, 손도 꼭 잡은 채로 둘은 한동안 입술을 붙이고 있었다. 강백호는 용기를 내어 입을 살짝 열었다. 따끈한 혀가 살며시 입술을 핥자, 서태웅이 파드득 떨며 뒤로 물러났다.

예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백호를 바라본다. 양 뺨이 불그스름하고, 작은 입술이 놀란 듯 벌어져 있었다.

"아... 미안해."

"..."

"싫었어?"

도리도리. 서태웅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놀랐을 뿐, 싫지는 않았다.

"다, 다시 해."

서태웅이 손을 꾹 당겨온다. 강백호는 순순히 당겨지다, 멈춘다.

"그런데, 여우야... 키스는 사귀는 사람끼리 하는 거야."

"......"

"아니면 못 하는데, 서태웅."

서태웅이 입을 달싹거린다. 잠시 고민하나 싶더니, 늘 그렇듯 빠르게 답을 낸다.

"그럼 사귀자."

강백호가 해맑게 웃는다. 또 다시 쵹. 둘의 입술이 살포시 겹쳤다. 이번에는 서태웅이 먼저 입을 열었다.


부정기 시리즈.

계획은 일단 4편 완결이에요.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