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마전(伏魔殿)

[대만준호] 복마전(伏魔殿) 2

구 탐정 정대만

"선배, 괜찮으세요?"

"으응, 괜찮아. 조금 휘청거린 것 뿐이니까."

자신을 걱정하는 달재의 물음에 준호는 웃는 얼굴로 답하면서도 대만이 떠난 계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1년만이었는데. 잘 지냈는지 안부 정도는 묻고 싶었는데. 아쉬움이 담긴 눈빛을 거두지 못하는 준호를 보며 치수는 계단을 조금 내려와 준호의 옆에 섰다. 

"그만 가자, 현장에서 다들 기다리고 있다."
"아...으응.. 아니, 네. 얼른 가시죠."

치수의 말에 준호는 그제서야 아쉬운 시선을 거두고 다시 계단을 올랐다. 조금 전 휘청거린 게 맘에 걸렸는지 치수는 준호의 옆에서 그의 걸음걸이 맞춰 따라 걸었고 달재는 준호가 불안해보였는지 그의 뒤에 따라서 걸었다. 괜히 후배와 친구를 걱정시킨 것 같아 머쓱해진 준호는 최대한 빨리 걸음을 움직였다. 계단을 다 오르고 나니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태섭의 모습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송형사님"

"안녕하세요. 검시관님. 달재 너도 왔네."

"안녕, 태섭아. 아침부터 고생하네 너도."

"뭐 늘 그렇지."

태섭은 뒷목을 긁으며 대답했다. 치수와 준호처럼 달재와 태섭도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알아온 절친한 사이였다.

"안녕하세요. 검시관님!"

"안녕하세요."

태섭의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마당에서 대기하고 있던 백호와 태웅도 둘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과 이미 구면인 준호와 달재도 그들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검시관님, 이쪽입니다! 라며 백호는 준호를 집 안으로 안내했다. 뭔가 서두르는 듯한 백호의 태도에 달재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태섭을 쳐다봤다.

"너랑 검시관님 올 때까지 시신 있는 방에는 못 들어가게 했거든. 그래서 저래. 조사하고 싶어서 아주 안달났다."

"네가 막 형사가 됐을 때랑 비슷하네."

"야, 난 저렇게 사고치는 타입은 아니었어."

"송형사, 잠깐 좀 보지."

치수의 부름에 태섭은 애들 좀 부탁하다며 집 밖으로 나갔고 달재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백호를 따라 들어간 준호는 너무 깨끗한 집 안에 위화감을 느꼈다. 깨끗한 걸 너머 사람이 사람이 살았던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나마 사람이 드나들었다 싶은 흔적은 있었지만 살았다 라고 생각될만 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폴리스 라인이 쳐져있는 안 방 앞에 도착하자 준호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이었다. 가구라고 할 만한 건 시신이 앉아있는 의자가 전부였고 의자 주변에는 각목과 과도칼, 밧줄들이 흩어져 있었다. 의자에 앉아있는 시신은 속옷차림으로 손과 발이 모두 묶여있었고 몸에는 누가봐도 고문당했다는걸 알 수 있는 상처들이 수두룩했다. 무언가에 맞은 멍자국부터 칼같은 날붙이로 베인 자국, 그리고 불로 지진 듯한 화상자국까지 시신에 남은 고문의 방법은 다양했다. 

"일단 시신부터 수습하자."

"네, 선배님."

준호는 장갑과 덧신을 착용하고 폴리스 라인을 넘어 시신의 곁에 다가갔고 달재도 준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달재가 시신을 담을 가방을 준비하는 동안 준호는 앞으로 숙여진 시신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몸에도 그랬듯이 얼굴에도 고문의 흔적이 역력했다. 눈가와 뺨에는 멍이 들어 있었고 군데군데 찢어진 상처들도 보였다. 하지만 가장 이상한 건 입에 거품을 물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건..다른 흔적들이랑 결이 달라.. 독극물 반응에 가까운 것 같은데. 

"검시관님... 그... 저희가 할 일은... 뭐 없나요?"

방 밖에서 서성이던 백호가 준호를 보며 물었다. 그 옆에는 태웅도 함께였는데 두 사람은 마치 선생님의 말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가만있질 못했다. 안절부절해하는 둘을 보고 준호는 시신 곁에서 조금 물러났다.

"괜찮으시면 두 분, 시신 챙기는 것 좀 도와주실래요? 제가 다리가 이래서 쉽지가 않네요."

"네,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야, 그냥 들어가지마."

준호의 허락 같은 부탁이 떨어지자 백호는 신나서 방 안으로 들어가려 했고 태웅은 그런 백호의 팔을 잡아당겼다. 덕분에 그대로 뒤로 넘어갈 뻔한 백호였지만 바로 다시 균형을 잡고 바르게 섰다.  

"아, 왜! 도와달라시잖아!"
"장갑이랑 덧신은 착용하고 가야할 거 아니야."

"아...."

백호는 그제서야 머리를 벅벅 긁다가 그렇다고 갑자기 잡아당기면 어떡하냐 인마!! 하면서 태웅에게 화를 냈다. 태웅은 그런 백호에게 시끄러우니까 이거나 받으라며 달재가 준 장갑과 덧신을 던졌다. 

"아씨, 왜 던지고 난리야!"

"하하, 두 분 사이가 좋으시네요."

"하나도 안 좋아요!"

"하나도 안 좋습니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같은 대답을 해놓고 서로를 째려보는 둘을 보고 준호는 웃었다. 둘은 좋은 콤비가 될 것 같았다. 자신이 알고 있던 어느 콤비처럼.

'정형사님... 아냐, 정신차리자 권준호. 지금은 그 사람 생각할 때가 아니야.'

준호는 가볍게 뺨을 때리고 태웅과 백호를 향해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나저나 일이 골치아프게 됐네요. 하필이면 마약수사팀에서 찾던 녀석이 시신으로 발견된다니.. 선배도 이미 아는 내용이시겠지만 그래도 한번 보세요. 마약수사팀에서 넘겨준 피해자 신상이에요."

백호와 태웅이 현장 조사를 돕고 있을 때, 치수와 태섭은 집 밖에서 태블릿 pc를 보고 있었다. 태블릿 화면에는 한 남자의 신상정보가 떠 있었다. 사진 속 험악한 인상의 남자는 현장에 있던 시신의 얼굴과 같은 사람이었다. 피해자의 이름은 허윤진. 나이 38세. 국내 현존하는 조직폭력배 중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는 산왕파의 조직원이었다. 치수는 이 자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산왕의 마약유통을 담당하던 녀석이지. 전에 한번 마약수사팀에서 협조요청이 왔었다. 그 때 체포까지 했지만..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지. 그 녀석 대신 다른 운반책이 잡혀들어갔고."

"아주 개씨발새끼라니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한테 알바라고 속여서 마약 운반책으로 써먹질 않나. 그걸로도 모자라서 애들한테 약 주고 중독시켜서 구매자로 만들지 않나. 수사 들어가면 운반책으로 써먹은 애들만 잡혀가게 하고 자긴 숨어버리고 마약수사팀에서 진짜 벼르고 있었는데.. 이런 꼴로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자업자득이라고 해야할지."

태섭은 집 쪽을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원래는 빵에 쳐넣었어야 하는 새끼인데... 치수는 그에 동의하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태블릿을 태섭에게 돌려줬다.

"선배님, 이번 사건 어떻게 보세요? 사망 원인이야 부검해야 된다쳐도 저렇게 몸에 고문 흔적이 많은 건 일반적인 살인이라고 보기 어렵잖아요."

"...."
"피해자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기 위해 한 사이코패스의 살인이라고 하기엔 피해자 체격이 너무 좋잖아요. 거의 선배님만하니까 왠만한 사람은 제압하기 어려울 거에요. 그런 상대를 쾌락살인의 타겟으로 하는 경우는 거의 없죠. 피해자를 제압할 정도로 덩치가 좋고 힘이 있거나 범인이 다수이거나 둘 중 하나일텐데 피해자가 조폭인 걸 감안하면.. .....산왕에서 피해자를 팽시켰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요?"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는 태섭을 보며 치수는 팔짱을 꼈다.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하지만 그런 거라면 이런 방식보단 드럼통에 시멘트 공구리쳐서 바다에 내던지는 게 더 빨랐을 거다."

"그러면...."

"고문하는 게 더 중요했던 거지. 죽이는 건 그 다음이고. 만약 정말로 산왕에서 피해자를 죽인 거라면 피해자의 직전 행보나 피해자가 뭘 알고 있었는지가 중요할 거야. 고문의 이유를 파헤치는 게 핵심이 되겠지."

"하아... 진짜 이번 사건 더럽게 힘들겠네요."

태섭은 한숨을 푹 쉬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배를 꺼냈다. 무심코 담배를 입에 물려다 제 옆에 치수가 있다는 걸 떠올리고 급히 담배를 구겨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아, 그러고보니 아까 대만 선배는 여기 왜 온 거래요?"

"....일 때문이라고 하던데."
"일이요..... 설마 그 선배 이번 사건이랑 엮인 건 아니겠죠? 그, 왜 대만 선배는 뒷세계쪽이랑 은근 연이 있잖아요. 영걸인가 뭐가 하는 녀석도 있고."

"본인 말로는 상관없다고 하더라."

정말 상관없대요? 라고 되묻는 태섭의 말에 치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일단 본인이 상관없다 했으니까 치수도 그 말을 믿고 넘어가긴 했지만 정말로 그런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별 문제 없을 거다. 제 목숨 하나는 지킬 줄 아는 녀석이니까."

"아니 그래도.... 저나 선배는 경찰이라는 공권력이니까 이번 일이 진짜 산왕이랑 연관되어 있다고 해도 어떻게든 비벼볼 수 있다지만.. 대만 선배는 이제 그런 것도 아닌데... 그니까 왜 관둬가지고 그런대요 진짜.. 뭐 마음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태섭은 머리를 벅벅 긁더니 에이, 저 한 대만 필게요. 뭐라 그러지 마세요. 라며 다시 담배를 꺼냈다. 치수는 그런 후배를 외면하곤 하늘을 올려봤다. 멍청한 짓은 하지 말아야 할텐데. 이제 네 목줄은 내 손에 없다 정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올려다본 하늘은 한없이 맑기만 했다.

***

도망치듯 현장을 빠져나온 대만은 그대로 큰 길가로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따라오는 이 하나 없었지만 그는 택시기사에 최대한 빨리 가달라고 재촉했다. 그를 부르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진하게 남아있었다.

'정대만 형사님..!'

마른 세수를 하며 대만은 빨리 조금이라도 빨리 택시가 자신의 사무실에 도착하길 바랬다. 사무실로 가는 십여분의 시간이 대만에게는 지옥과도 같았다. 택시가 멈춰서자 대만은 택시비가 얼마나 나왔는지는 제대로 보지 않고 대충 현금을 기사에게 건네고 차에서 내렸다. 기사는 잔돈을 받아가라며 대만을 불렀지만 대만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2층 사무실로 이어진 계단을 올라가면서 대만은 하나씩 떨쳐냈다.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도, 1년만에 본 얼굴도, 자신을 보며 반가움에 빛나던 그의 눈빛도.

"이제 오냐"

그렇게 마지막 계단을 올랐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대만은 멈춰섰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정장차림의 남자는 대만을 보며 눈짓으로 사무실 문을 가르켰다. 대만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가 오늘 자신을 허탕치게 만든 의뢰를 가져온 의뢰인, 최동오였다.

"네가 없어서 못 들어가고 있었어."

"..마침 잘 됐네. 물어볼 게 아주 산더미거든."

대만은 동오의 옆을 지나쳐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의 사무실은 혼자 쓰기엔 과할 정도로 넓직했다. 경찰을 그만두고 탐정이 된 아들의 기를 살리겠다며 그의 아버지가 마련해준 사무실이었다. 대만은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다고 했지만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다고 했던가. 아들의 말은 듣지도 않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과한 사무실을 해주었다. 동오는 익숙한 듯사무실 중앙에 놓인 소파에 앉았고 대만 역시 그의 반대 편에 앉았다. 

"일단 내 용건부터 말하지."

동오는 정장 자켓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척 봐도 꽤나 두툼해보이는 돈 봉투였다. 

"원래 의뢰비의 2배다."

"...."

"그 사람은 더 이상 안 찾아도 되니 그만 손 떼."

대만은 테이블에 놓여진 흰 봉투를 한 번 그리고 시선만 들어 동오의 얼굴을 한 번 쳐다봤다. 그리고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안 찾아도 된다? 왜 뒤지기라도 했나보지?"
"..."

"내가 말했지. 물어볼 게 산더미라고."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은 대만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들어 그대로 봉투 위에 비볐다. 흰 봉투에 담뱃불로 그을린 자국이 점점 번져갔고 그 아래 있던 현금뭉치에도 그을린 자국이 생겼다.

"이딴 걸로 무마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이미 이건 내가 물었거든. 알텐데 내가 미친개라고 불린 거."

서부경찰서 강력 1팀의 미친 개 정대만. 한 때 그에게 붙여졌던 별명이었다. 한 번 물면 상대가 넉다운 될 때까지 물고 늘어져서 질리게 만든다는 의미로 붙은 별명이었다. 뒷세계에 몸을 담그고 있는 이라면 한 번쯤 그 이름을 다 들어봤다. 자신을 노려보는 대만을 보고 동오는 피식 웃었다.

"알지. 너 미친 개인 거. 그래서 사리분별 못하고 일반인한텐 총 쏜 것도, 그거 수습한다고 채치수가 사람 죽인 것...."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에 있던 재떨이가 아래로 굴러떨어졌고 대만은 맞은 편에 앉은 동오의 멱살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그를 쳐다보는 대만의 눈빛에 살기가 실렸다.

"닥쳐, 개새끼야.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지마."

"개새끼는 너겠지. 너야말로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하는데.. 네가 지금 상대하는 게 누군질 알아야지. ..산왕이 우습게 보이냐? 너같은 탐정 나부랭이가 뭘 할 수 있다고 자꾸 끼어들려고 지랄이냐고"

"뭐?"
"그간에 정을 봐서 좋게 말하는 거야. 개죽음 당하기 싫으면 여기서 손 떼."

동오는 멱살을 잡은 대만의 손을 밀쳐내며 말했다. 역시 산왕이 엮여있나. 아니 엮여있지 않는 쪽이 이상한 거겠지. 최동오, 산왕의 행동대장 중 하나인 그가 그저 심심풀이 삼아 자신에게 의뢰를 하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뭘 할 수 있는지는 해봐야 알지. 계속 끼어들겠다고 하면 어쩔건데?"

"정신 못 차리고 기어오르는 새끼는 칼빵 좀 맞아봐야 정신차리지."

대만의 도발에 동오는 지지 않고 응수했고 둘은 서로 살기 어린 시선을 주고받았다. 어느 쪽도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없어보였다.

"분위기가 살벌하다뿅. 이래서 손님이 오다가도 도망가겠어"

살얼음 같은 침묵을 깬 건 동오도, 대만도 아니었다. 목소리가 들린 사무실 문쪽에서였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대만과 비슷한 체격의 남자와 그보다 훨씬 더 큰 남자 둘이 사무실 문 앞에 서 있었다. 

"명헌..."

"보스다뿅."

뿅? 아니 근데 저 녀석이 보스? 아니 그런 것치고는 너무 젊은데? 대만은 동오가 명헌이라 부른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자신과 또래 정도거나 많이 쳐줘도 두세살 연상으로 밖에 안 보이는 남자는 자신을 보스라고 칭했다.

"..네, 보스. 근데 여기까지 어쩐 일로..."
"그냥 한번 들러봤어뿅. 미꾸라지가 개울물 다 흐리고 다니는 건 아닌가 싶어서뿅"

두 사람 쪽으로 명헌이 다가오자 동오는 옆으로 물러났다. 명헌은 대만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생각보다 평범하네뿅 라고 말했다.

"미친 개라고 해서 좀 더 제정신이 아닌 느낌일 줄 알았는데. 뭐, 말 안듣는 녀석이라는 건 예상했던 범위였다뿅"

"뭐라고?"

명헌은 옆으로 물러난 동오를 쳐다봤다. 동오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이미 상황파악을 끝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명헌은 산왕의 그 누구보다 판세를 읽고 제 쪽으로 흐름을 가져오는 것에 능했다. 그것이 전 보스에게 후계자로 지명받은 이유이며 동오를 비롯한 조직원들이 명헌을 따르는 이유이기도 했다. 동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명헌은 말했다

"동오야, 너는.. 애가 참, 착해서 탈이다뿅."

명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움직였다. 대만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그에게서 멀어지려 했지만 남자 쪽의 움직임이 그보다 빨랐다. 남자는 그대로 대만의 뒷통수를 잡아 테이블에 얼굴을 내리눌렀다. 그리고 비어있는 다른 손으로는 대만의 두 손목을 등 뒤로 잡아 결박했다. 순식간에 일어났지만 남자의 움직임은 군더더기없이 완벽하고 빨랐다. 이런 일을 한 두번해본 게 아닌 듯 익숙한 솜씨였다. 이거 안놔? 라며 몸부림치는 대만의 움직임에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몸부림칠수록 남자는 대만을 강하게 압박해왔다. 명헌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대만에게 다가와 주름이 진 대만의 미간에 총구를 들이댔다.

"그냥 머리통을 날려버리면 되는데뿅."

명헌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걸렸지만 대만은 기죽은 기색없이 그를 노려봤다. 순순히 머리통을 날리게 둘 것 같아? 대만은 자신을 결박한 남자의 왼쪽 무릎을 걷어찼다. 자신의 공격에 남자의 몸이 잠시 휘청거린 틈을 대만은 놓치지 않았다. 힘이 잠시 풀린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대만은 테이블에서 일어나 제 미간에 겨눠졌던 총구를 잡아 명헌의 팔을 비틀어 총을 빼앗았다. 그리고 조금 전 자신에게 명헌이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대만이 명헌에게 총구를 겨눴다.

"자, 이제 누구 머리통이 날아갈 차례지?"

"명헌아!"

총구가 자신을 향하는데도 명헌은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동요하는 건 동오 쪽이었다. 다급하게 명헌의 이름을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난 동오를 보고 명헌은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보였다. 대만에게 공격당한 남자는 조금 놀라긴 했지만 의외로 침착한 얼굴로 명헌을 보고 있었다. 이 녀석.. 어째서 이렇게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지?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대만은 긴장을 풀지 않은 채 명헌을 계속 노려봤다.

"쏴봐라뿅."
"뭐?"
"쏠 수 있으면 쏴보라는 거다뿅."

할 수 있다면 말이지. 라는 명헌의 말에 방아쇠에 걸린 대만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새끼가 누굴 우습게 보고..! 대만은 입술을 깨물며 방아쇠를 당겼다. 파열음과 함께 피가 흩뿌려...질거라고 생각했다. 분명 그럴거라고 생각했는데... 총구에서 나온 건 총알이 아니라 작은 깃발이었다. 축하라고 적힌 깃발과 함께 바닥에 피 대신 종이조각이 흩뿌려졌다.

"경찰이었다더니 진짜 총이랑 가짜 총도 구분 못하냐뿅"

"...하"

대만은 기가 막혀 들고 있던 총을 바닥으로 내던졌고 총은 가벼운 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마치 플라스틱병이 바닥에 떨어진 것처럼 한없이 가벼운 모습이었다. 기가 막힌 건 동오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긴장이 풀린 얼굴로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냐?"

"장난은 아니고. ..그냥 훤한 대낮부터 피보기 싫어서 그런거지뿅."

명헌은 대만을 지나쳐 그가 던진 총을 주웠다. 음, 안 망가졌네. 총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명헌은 대만을 공격했던 남자를 보고 현철아, 이거 챙겨라뿅. 하고 그에게 던져줬다. 현철이라 불린 그는 장난 좀 그만 치시죠. 보스. 라고 대꾸하면서도 그가 건넨 총을 자신의 자켓 안쪽 주머니에 챙겼다. 저 녀석...장난감 총이라는 걸 진작에 알고 있었던 거네. 어쩐지 쉽게 틈을 준다 싶었지. 총을 뺏을 때 바로 내 쪽으로 오지 않는 게 이상하긴 했는데. ...완전히 놀아났군. 

"좆같네 진짜."

대만은 신경질적으로 테이블의 다리를 발로 걷어차곤 뻔뻔한 얼굴로 동오의 옆에 앉은 명헌을 쳐다봤다. 대만이 그러거나 말거나 명헌은 자리에 앉아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총을 챙긴 현철은 소파에 앉은 명헌의 등 뒤에 서서 대만을 쳐다봤다. 그는 아무 말도 안했지만 큰 키와 체격에서 나오는 분위기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명헌에게 손 대는 순간 아까처럼 봐주는 건 없을 거라는 걸. 

"그렇게 이번 사건에 끼어들고 싶냐뿅?"

"뭐?"

"너랑은 아무 상관 없는 일인데 끼어들어서 개죽음 당하고 싶은 거냐고 묻고 있는거다뿅."

명헌은 소파에 등을 기대 앉아 대만을 쳐다봤다. 표정 없는 얼굴이었지만 그 시선만은 대만을 제 아래로 보고 있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대만은 헛웃음을 지으며 맞은 편에 앉았다. 

"난 생명선이 길어서 말이야. 쉽게 안 죽거든. 쉽게 죽을 놈이었으면 미친 개란 별명도 안 붙었겠지."

"음, 그건 그러네뿅. ...네가 그렇게 궁금해하는 이번 사건의 주연은 총 셋. 첫번째는 우리, 두번째는 우리와 적대하고 있는 녀석들 그리고 세번째가 경찰이다뿅."

"...."
"사건에 끼어들 생각이라면 셋 중 하나가 되는 수밖에 없다뿅. 셋 중 하나라고 해도 너한테 있어선 우리 쪽에 붙느냐 경찰 쪽에 붙느냐 라는 2개의 선택지 뿐이겠지만."

한 마디로 말해서 자기들 밑으로 들어와라. 지금 이런 소리인가. 진짜 좆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웃기고 있네. 주연이 셋이라고?"

대만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그의 눈빛이 조명을 받아서인지 순간 노란 빛을 띄며 빛났다.

"미안하지만 난 누구한테 묻어갈 생각 없어. 이번 사건 주연은 셋이 아니라 넷이다. 니들이 나한테 사람 찾아달라고 의뢰한 시점에서 난 이미 사건의 주연이라고."

"...."
"난 나대로 움직일거야. 그 쪽이랑 한패가 될 생각은 없어."

"그러면 그쪽이 궁금해하는 정보는 못 얻을텐데뿅."
"무슨 그런 섭한 소릴... 내가 이렇게 끼어들게 된 건 너희 책임이잖아? 안 그래도 어지러운 판에 주연 하나 더 만든 만든 책임은 져야지."

"궤변이네뿅."

"궤변이라도 틀린 말은 아니잖아?"

명헌은 팔짱을 낀 채 대만을 쳐다봤다. 눈이 이미 돌아갔네. 자신의 얼굴을 뚫어버릴 맹렬한 기세로 쳐다보는 대만을 보며 명헌은 생각했고 그리고 떠올렸다. 저런 눈빛을 한 이들에겐 그 어떤 최후가 기다리고 있는지를.

"...좋다뿅."

"보스..."

"죽고 싶어서 환장한 새끼 설득해봤자 의미 없다는 거 잘 안다뿅. 설득이 먹힐 녀석이 아니라는 것도 알겠고.. 그렇게 뒤지고 싶다면야 하게 해줘야지뿅."

명헌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있는 대만에게 손을 내밀었다.

"복마전에 온 걸 환영한다. 정대만 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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