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마전(伏魔殿)

[대만준호] 복마전(伏魔殿) 1

구 탐정 정대만

아직 여름도 아니건만 한 낮의 햇빛은 뜨겁기만 했다. 대만은 와이셔츠의 단추를 거칠게 풀었다. 더워죽겠네 정말..하고 생각하며 자신이 올라온 계단을 그리고 앞으로 올라가야 할 계단을 쳐다봤다. 고지대에 다닥다닥 좁게 붙어있는 주택들이 보였다. 대만은 한 손에 들고 있던 자켓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냈다. 거기엔 주소가 하나 적혀 있었다. 

"이 주소대로라면 계단 끝까지 올라가야 하네. 왜 이런데 숨어있어가지고... 의뢰비는 두배로 달라고 해야겠네."

쪽지를 다시 주머니에 구겨넣으며 대만은 중얼거렸다. 정대만, 35세. 직업은 탐정...이지만 하는 일은 흥신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에게 들어오는 의뢰는 주로 누군가를 찾거나 혹은 뒷조사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걸 하려고 탐정이 된 건 아니었지만 아니 애초에 탐정이 되려고 했던 것도 아니지만 이런 거라도 하지 않으면 생활비를 벌 수 없는 입장이니 불만을 표할 순 없었다. 그리고 이 의뢰는 그에게 자주 의뢰를 부탁하는 단골 손님의 의뢰이기도 했다. 뭐... 별로 좋은 인연으로 알게 된 건 아니지만 그건 지금과는 관련 없는 얘기였다. 대만은 가볍게 어깨를 풀고는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르기를 5분, 죽겠네..라고 중얼거리며 지쳐갈 때쯤 그의 눈에 뜻밖의 장면이 들어왔다.

"저건....."

어느 집 문 앞에 쳐진 폴리스 라인. 그걸 보고 대만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집 앞 대문에 붙어있는 번지수는 공교롭게도 대만의 쪽지에 적혀 있던 주소의 번지수와 같았다. 우연...이라고 치부할 순 없겠지.. 대만은 문 근처에 서있는 이들을 쳐다봤다. 형사로 보이는 이가 2명. 그리고 그 중에 한 명은 대만이 아는 사람이었다. 

"어이, 송형사."

"응? 어? 대만 선배 여기 왜 있어요?"

2명 중 키가 작은 쪽이 대만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송태섭 형사, 서부경찰서 강력 1팀의 형사이자 한 때는 대만의 후배였다. 놀란 태섭과 달리 대만은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엇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어쩌다가 이런 데까지 있..."

"들어오시면 안됩니다."

태섭에게 인사를 건네며 폴리스라인 안으로 들어가려던 대만을 저지한 건 태섭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또 다른 남자였다. 단정하게 생긴 얼굴이 연예인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미남에 184cm인 대만보다 큰 장신의 남자였다.

"아니, 나 송형사랑 아는 사이인데"

"일반인은 현장에 들어오면 안됩니다."

"아.. 나 형사였거든. 2년 전까지는 송형사 직속선배기도 했고 그니까... 좀 들어가도 될 것 같은데?"

사람 좋게 웃으며 대만은 다시 폴리스 라인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남자는 대만의 앞을 가로막고 꿈쩍도 안했다. 안되는 건 안됩니다. 라며 융통성없게 구는 남자를 보고 대만은 태섭을 쳐다봤다. 어떻게 좀 해봐 라는 시선을 보내보지만 태섭은 어깨를 으쓱했다.

"서형사 말이 틀린 것도 아니잖아요. 지난 번에 선배 현장에 들어오게 했다가 팀장한테 얼마나 깨졌는 줄 알아요?"

"채치수가? 하여간 그 융통성 없는 녀석... 이 명탐정이 협력하면 오히려 사건이 일사천리로 해결된다고"

"언제부터 명탐정이었는데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하는 태섭을 보고 대만은 저게.. 하고 중얼거렸다. 어쨌든 들여보내줘! 대만은 무턱대고 몸을 들이밀었지만 서형사라고 불린 남자는 대만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녀석 키만 멀대같이 커가지곤..! 대만은 고개를 들어 남자를 노려봤다.

"송태섭, 서태웅 뭐하고 있나"

"수사하랬더니 놀고 있었네 섭섭이랑 여우"

"아, 선배님. 그리고..강백호 너는 내가 선배라고 부르라고 몇번을 얘기했냐"

대만이 뒤를 돌아보니 낯익은 얼굴 한명과 처음 보는 인물 한 명이 그들을 보고 있었다. 낯익은 쪽은 둘째치고 처음 보는 인물은 인상이 꽤나 강렬했다. 붉은 빡빡머리에 험상궃은 인상이니 강렬할 수밖에.. 서태웅, 강백호.. 둘 다 처음 듣는 이름이네. 태섭이가 선배인 걸 보며 신입이겠군. 하고 생각하던 대만을 문 밖으로 더 밀어내면서 태웅은 말했다.

"..이 사람이 현장에 들여보내달라고 해서 막고 있었습니다."

"음, 잘했어. 일반인을 함부로 들이면 안돼지."

"일반인이라니 말 서운하게 한다? 채치수.. 동기끼리 이러기냐?"

"서운하면 형사 관두지 말지 그랬냐."

치수의 말에 할 말이 없어진 대만은 쳇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 대만을 보며 치수는 한숨을 쉬곤 폴리스 라인 안 쪽에 있는 태섭에게 눈짓을 했다. 그 눈짓에 뭔가 알아차린 태섭은 치수 옆에 서 있던 백호와 문 앞을 막고 있는 태웅을 불러들였다.

"자자, 일반인은 내버려두고 우린 수사나 하자고. 둘 다 따라와. 과학수사대가 오기 전에 사건현장 보존하고 다른 특이사항 없는 지 찾아야 하니까."

"넌 잠깐 나 좀 보자."

현장지휘를 태섭에게 맡기고 치수는 대만의 팔을 잡아끌고 장소를 옮겼다. 현장에서 몇 계단 내려와서 옆으로 빠지는 작은 골목길에 선 치수는 팔짱을 끼고 대만을 쳐다봤다. 대만은 여전히 뾰루퉁한 얼굴이었다.

"사건 현장에 함부로 기웃거리지 마라. 네가 그러면 송형사는 물론이고 다른 녀석들도 난처해져."
"나 참 내가 들어가서 뭐 현장 훼손을 하길 하냐 증거를 없애길 하냐 아무것도 안하고 얌전히 들어가만 있다 나올건데 너무 뭐라 하는 거 아냐?"

"...2년 전의 너라면 아까 서형사처럼 말했을 거다. 알만한 녀석이 투정 부리긴"
"쳇, 여기서 또 그 얘기냐. 진짜 치사하게 구네."

그 얘기 꺼내면 내가 아무 말도 못한다는 거 제일 잘 아는 놈이.. 대만은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주머니로 다시 집어넣기 전에 치수에게 담배를 내밀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사건 현장 갔을 때 담배 안 피는 건 여전하네."

"그걸 아는 녀석이 담배 피라고 권하냐"

치수의 타박에도 대만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인 그는 한숨과 함께 담배 연기를 토해냈다. 아 여기 금연구역은 아니겠지 아니어도 뭐 형사님이 제지 안했으니까 몰랐다고 우겨도 되겠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치수가 그를 불렀다.

"너 여기 왜 왔냐"

"왜 왔냐니.. 일하러 왔다 왜? 탐정은 일하러 오면 안되냐?"

"그 일이 아까 그 현장이랑 관련이 있냐?"

치수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그를 보며 물었다. 대만은 그런 치수의 얼굴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쪽지에 적힌 주소와 사건 현장 주소가 같을 때부터 느끼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번 의뢰는 간단하게 끝날 게 아닌 것 같았다. 담배연기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관련 없어. 지나가다가 폴리스 라인이 보이길래 뭔 일인가 싶어서 기웃거린 거 뿐이야."
"정말이냐"

"정말이야. 형사한테 거짓말 하겠냐? 난 잡혀가는 거 사양이야."

대만의 쾌활한 어투에 치수는 그럼 됐다 하고 대답했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쉽게 의심을 거두지 않는 건 치수가 형사생활을 하면서 얻은 버릇이었다. 그 버릇에 도움을 받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막상 본인이 의심 받는 상황이 되니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녀석도 형사가 천직이라니까.

"관련이 없는 거라면 더 이상 관심 보이지 마라. 아까 말한대로 다른 이들이 난처해진다. 그리고.."

"그리고?"

"개인이 나서서 될 일도 아니야 이번엔"

라는 말 뒤로 붙은 한숨은 꽤나 심각해보였다. 채치수라는 남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근심을 남에게 쉽게 보이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그가 이렇게까지 대놓고 한숨을 쉬며 자신이 엮여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한다는 건 그만큼 사건의 심각성이 상당하다는 말이었다. 

"뭐길래 그렇게 한숨까지 쉬고 그러냐 어디 보자.. 내가 한번 맞춰봐? ..살인 사건이지?'

"...."
"단순 절도 같은 걸로 형사가 넷이나 와서 수사할 일은 없을테고.."

치수의 왼쪽 눈썹이 조금 움찔거렸다. 빙고, 정답이군.. 그렇다는 건 내가 찾는 그 사람이 피해자.. 라는 소린가. 

"근데 그냥 살인이 아닌거지. 겨우 살인사건 하나 맡은 걸로 우리의 채치수 형사 이렇게 한숨 쉴 사람이 아니니까. 그러면... 죽은 피해자에게 뭔가 있다는 거겠지."

"...너 정말 이 사건하고 관계 없는 거 맞냐?"
"없다고 아까 말했잖아. 두 번 말하게 하지말고 내 추리에 감탄하지 그래?"

"추리는 무슨... 그래봤자 경험으로 다 때려맞춘 거잖아."

거들먹 거리는 대만의 추리에 치수는 가차없는 평가를 내리며 짧은 제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렇긴 해도 네가 한 말은 전부 다 맞아."

"때려맞춰서 이 정도면 그것도 실력이지. 그래서 무슨 일.."

"하지만 그 이상 말할 생각은 없어. 말했지 관심 보이지 말라고."

진짜 채치수 융통성 없는 놈.. 대만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곤 얼마 안 남은 담배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 모습에 치수는 담배 바닥에 버리지 마라 하고 한 마디 했지만 대만은 들은 척도 안했다. 사건 얘기도 안 해주는 놈 말을 들을란다. 라는 유치한 생각을 하며 들고 있던 자켓을 다시 챙겨입었다. 그때였다. 계단 아래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사건현장이 고지대라는 건 들었는데 계단이 많은 줄은 몰랐네."
"그러게요.. 선배님, 다리 괜찮으세요?"

대만은 자기도 모르게 탄식했다. 그러고보니 과학수사대가 온다고 했을 때 생각했어야 했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여기서 치수를 떠보는 짓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거다. 그 사람이 올 줄 알았다면.. 돌처럼 굳은 대만을 곁눈질로 살피던 치수는 골목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치수..아니 채형사님, 현장에서 뵙는 건 오랜만이네요."

"우리 사이에 뭘 존대하고 그래 새삼스럽게."

"새삼스러워도 해야죠. 사석에서 만나는 것도 아닌데."

"안녕하세요 채형사님."

치수를 보고 안경을 쓴 쪽이 반갑게 인사했고 그 옆에 함께 있던 청년도 그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권준호와 이달재, 두 사람은 국과수의 검시관으로 대만은 준호와 깊은 인연이 있었다. 좋은 인연...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될 수 있었을 거라고 얘기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 날 전까지는.. 도란도란 들리는 말소리에 대만은 주먹을 꽉 쥐었다. 1년만에 듣는 목소리는 건강해보였다. 다행이다 라는 생각과 동시에 가슴 속에서 치미는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그리움과 애틋함 그리고 죄책감. 

"근데 현장은 여기가 아닐텐.....아..."

"...."

골목에서 나온 대만을 보고 준호는 놀란 표정을 지었고 이내 얼굴에 반가움이 번졌다. 대만은 준호의 시선을 피한 채로 그의 오른손에 들린 지팡이를 바라봤다. 자기도 모르게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형사님, 오랜만..."

자신을 보고 반가워하는 준호를 보고도 대만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저기 잠깐.. 하고 대만의 팔을 잡으려했지만 그는 준호에게 잡히기 전에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정대만 형사님..!"

"아, 선배님 위험해요!"

"준호야!"

자신의 뒤에서 다급히 들리는 목소리에도 대만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조금 움찔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발을 멈추진 않았다. 아마 별 일 없을테지. 치수 녀석도 있고 후배라는 달재라는 사람도 같이 있으니까. 자신을 붙잡으려고 하다가 휘청거렸을 거다. 어딘가 어설픈 구석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옆에 있어주고 싶은 사람이니까.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그럴 자격이 없다. 그 사람을 망친 내가 무슨 염치가 있어서.. 

"씨발..."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누군가 그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처럼. 마음 속 깊게 남은 미련이 진흙이라도 된 것처럼 그의 발목을 잡아끌었다. 큰 길로 이어지는 계단의 끝이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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