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2차 창작

[정환호장] 키싱 부스 外 단편 모음

이어지는 내용이지만 각각 봐도 무방

01. 키싱 부스

“...뭔 부스?”

“키싱부스(Kissing Booth)라고, 키, 싱, 부, 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호장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아니, 그게 대체 뭔데 나한테 하라는 건데?”

“축제 때 판매하는 키싱부스 티켓 구매한 사람은 부스에 가서  그 안에 있는 사람하고 스킨쉽을 할 수 있는 거지.”

“반에서 한 명씩 하기로 했어. 우리 반은 너야, 전호장.”

“아니, 그러니까 난 한다고 한 적이 없…”

“너가 지난 학급 회의 때 빠진 탓이야. 남는 역할이 이것 밖에 없었다고.”

냉정한 친구들의 말에 호장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좌절했다. 어째서 나한테 이런 일이… 난 그저 농구부 연습에 빠짐없이 참석했을 뿐인데, 부 활동을 열심히 한 죄로 축제에서 그딴 추태를 겪어야 한다는 거야?! 자신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는지, 호장이 친구들을 한 명씩 붙들고 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제발 나랑 바꿔주라, 나 다른 건 뭐든지 잘 할 수 있어!”

“친구야, 그 인형 탈 내가 쓰면 안 되겠니?”

“키싱부스 따위 때려치우고 농구 골대 가져와서 자유투 게임을 하는 건 어때? 일명 ‘전호장을 이겨라!’, …별로야?”

어떤 제안을 해 봐도 반 친구들의 고개는 절레절레 저어지기만 했다. 호장의 얼굴이 점점 울상으로 변했다.

“말도 안 돼… 그럼 축제에서 나랑 키스한 사람들 학교 다니면서 계속 마주칠 수도 있잖아! 민망해서 학교 어떻게 다니란 건데?!”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한 친구가 상자 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호장의 손바닥에 척하니 올려놓았다. 자기 손바닥에 올려진 물건의 정체를 확인한 호장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렸다. 설명이 필요한 얼굴로 호장이 쳐다보자 정작 당사자는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부스 안에 들어가면 안대 씌워줄게.”

“...그래, 존나 고맙다. 너희의 바다 같은 넓은 배려심에 눈물이 다 나네.”


사실 호장이 키싱부스에 이렇게 펄쩍 뛰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호장은 이미 짝사랑 중인 상대가 있었고, 그는 아직 순수한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첫 키스는 좋아하는 사람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의사와 상관 없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한테 첫 키스를 빼앗기게 생겼다니. 신이시여, 수퍼루키에게 왜 이런 시련을…!

농구장으로 향하면서도 호장은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 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터벅터벅 걸어오는 호장의 곁에 누군가 다가왔다.

“왜 이렇게 축 처져 있어?”

“준섭이 형… 저 큰일 났어요…”

농구부 2학년 선배인 신준섭이었다. 준섭은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더욱 커다랗게 뜨며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호장이 준섭을 이끌고 농구장 뒤쪽 구석으로 향했다.

“다음 주 축제 때 저희 반 대표로 제가 키싱부스 나가게 됐어요. 저 어떡해요, 형?!”

“아, 그거? 무슨 문제라도?”

“무슨 문제가 있죠! 제가 생판 모르는 남이랑 첫 키스를 하게 생겼는데!”

준섭의 악의 없는 질문에 호장이 빼액- 거리며 소릴 질렀다. 그런데도 준섭은 정말로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등학교 축제에서의 키싱부스라서 심한 스킨십이 오고 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기껏해야 볼 뽀뽀나 포옹 정도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키싱부스 대표로 뽑히는 건 대대로 그 반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학생인 게 암묵적인 룰이었다. 그러니까 본인이 알게 모르게 인기가 많다는 뜻인데 저렇게 펄쩍 뛸 일인가?

“저… 전… 첫 키스는 좋아하는 사람하고 하고 싶었단 말이에요…!”

“정환 선배랑?”

순식간에 호장의 얼굴이 고구마처럼 붉게 익었다. 그가 잠시 마비 된 사고 회로를 다시 되돌리는 동안 준섭은 여전히 악의 없는 얼굴로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혀… 혀혀혀혀… 혀엉…!! 그거 어떻게 알았어요?”

“그거 농구부에서 모르는 사람이 있었나?”

정환이 형도 아마 알고 있을 텐데? 다행히 준섭은 뒷말은 하지 않았다. 아마 호장이 들었다면 그대로 농구부 퇴부 신청서를 내고 튀었을 지도 모른다.

“네에?! 농구부 사람들이 다 안다고요?!!! 아니, 그걸 어떻게…?!”

“그야 당연히 네가 엄청나게 티를 내서지.”

덤덤한 준섭의 반응과는 달리 호장은 거의 뒤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아무래도 본인은 완벽하게 숨기고 있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실상은 두 눈이 제대로 달린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수준이었는데도.

“형…! 비밀 지켜주셔야 해요. 특히 정환이 형한테는 절대로 말하시면 안 돼요!”

“아니, 내가 말하지 않아도…”

“다른 형들한테도 제가 다 일러둘 테니깐요! 아무튼 정환이 형이 절대 알면 안 된다구요!”

멋대로 소리치더니 호장이 꽁무니가 빠져라 농구장으로 뛰어갔다. 어떻게든 이 사태를 수습하겠다는 생각 밖에 남아있지 않은 듯 보였다. 홀로 남은 준섭이 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정환이 형은 이미 다 알고 있다니까 그러네…


그 날, 호장은 기어코 선배들을 하나씩 불러내어 제발 자기 짝사랑을 비밀로 해달라고 읍소했다. 선배들은 하나같이 떨떠름-이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한 표정이었으나 어쨌든 알겠다고 해주었다. 일단 한시름 놓은 호장이 농구부 연습에 복귀했으나 평소보다 유난히 정환이 의식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호장은 유달리 정환을 피해 다녔고, 눈치 빠른 정환이 이를 모를 리 없는 노릇이었다.

연습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도망치는 호장의 뒷모습을 보던 정환이 옆에서 땀을 닦고 있던 준섭을 불렀다.

“준섭아, 혹시 호장이한테 무슨 일 있어?”

준섭이 살짝 난감한 듯 시선을 돌렸다. 이걸 어쩌나, 호장이가 드디어 짝사랑을 들킨 걸 눈치챘다고 말하면 원망을 사게 될 텐데. 그렇다고 주장이 묻는데 대답을 안 할 수도 없고. 잠시 고민하던 준섭이 입을 열었다. 이 정도는 말해줘도 괜찮겠지.

“사실 이번 축제에서요…”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 어느덧 축제 당일이었다. 키싱부스가 운영되는 시간은 축제에 가장 사람이 많이 몰리기 시작하는 오후 4시부터 6시까지였다. 호장은 체념한 얼굴로 배당받은 부스 안으로 입장했다. 물론 손에는 안대를 꼭 쥔 채였다.

하느님, 부처님, 예수님, 제발 내 티켓 하나도 안 팔리게 해주세요, 제발요!

호장이 두 손을 꼭 쥐며 간절히 빌었다. 그런데 정말 효과가 있었던 걸까? 부스가 시작되고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호장의 부스엔 개미 새끼 한 마리 들어오지 않았다. 뭐야, 진짜 내 티켓 하나도 안 팔렸나? 방금 전까지 그렇게 빌었을 때는 언제고, 호장은 은근 자존심이 상했는지 턱을 괴고 궁시렁거렸다. 

어느덧 시곗바늘은 5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호장의 부스에 들어오는 손님은 여전히 단 한명도 없었다. 처음엔 지루해 미칠 것 같아하던 호장도 이젠 포기한 듯 부스 한쪽 구석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누군가 호장의 부스 안으로 들어오는 듯 발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호장이 손에 들고 있던 안대를 재빨리 썼다.

잠시 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호장은 침을 꿀꺽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피해서 긴장한 티를 내고 싶지 않았는데, 저도 모르게 손이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철컥하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동안 부스 안에서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뭐야, 들어왔으면서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그러나 호장의 생각은 오래 가질 못 했다. 부스에 들어온 사람이 호장의 허리를 휙 낚아채더니 그대로 입술을 부딪혀왔기 때문이었다.

읍, 읍-!

너무 갑작스러운 탓에 입을 다물지 못 한 호장의 입 속으로 거침없이 혀가 침투했다. 당황한 호장이 그의 팔을 붙들고 밀어내려 했지만 어찌나 단단한지 꿈쩍도 하질 않았다. 우리 학교에 이런 사람이 있었나? 무슨 몸이 돌덩이야, 아주!

호장이 혼자 낑낑대건 말건, 상대방은 호장의 입술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 손은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다른 손으로 턱을 붙든 채로 호장의 입 속 구석구석을 탐했다. 어찌나 집요하게 부딪혀오는지 호장은 점점 숨이 부족해질 지경이었다.

숨이 가빠오자 눈에서 생리적인 눈물이 흘러서 안대 밖으로 흘러내렸다. 호장이 다급하게 상대방의 가슴을 퍽퍽 때리자 그쪽도 신호를 알아챈 듯 입을 떼고 뒤로 조금 물러났다. 그러나 여전히 허리는 세게 붙든 채였다. 호장이 잠시 숨을 고르며 입 주변에 흐르는 타액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그러다 문득 서러워진 호장이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눈물, 콧물 흘려가며 어린애처럼 끅끅대자 상대방도 몹시 당황한 듯 호장의 어깨를 쓰다듬다가 이내 그를 끌어당겨 품에 안아주었다. 그러더니 익숙한 듯 호장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장의 울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흑, 끄윽. 첫키스는, 훌쩍, 좋아하는 사람하고, 흡, 하고 싶었는데…”

그 말에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멈췄다. 머리 위에서 낮게 웃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호장의 안대가 벗겨졌다. 깜짝 놀란 호장이 반사적으로 눈을 꼭 감았다. 그러자 상대방이 두 손으로 호장의 양 볼을 감싸 올렸다.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하고 첫 키스한 기분이 어때?”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호장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 순간 호장의 눈앞에 보이는 건 그토록 애태우며 짝사랑하던 정환의 얼굴이었다.

뭐지, 이거 꿈인가? 호장은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가 없어서 그저 눈만 끔뻑였다. 입꼬리를 올려 피식 웃던 정환이 호장의 입술에 짧게 입 맞췄다. 호장은 그대로 굳어서 아무 행동도 하지 못 했다.

“혀… 형… 진짜 정환이 형이에요?”

“그럼 나지, 누구겠어?”

“근데 왜 형이 여기에 있어요?”

진짜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호장이 물었다. 정환은 웃으며 호장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내가 좋아하는 후배가 다른 놈들한테 첫 키스를 뺏기게 생겼는데,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있어야지.”

내가 좋아하는 후배가, 내가 좋아하는 후배가, 내가 좋아하는 후배가…?

이거 설마 나 말하는 건가? 나 말하는 거 맞지?!!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들리는 듯 거세게 울렸다. 저도 모르게 눈가엔 눈물이 차올랐다. 호장은 언젠가 정환에게 고백하는 상상을 수도 없이 해봤지만 이런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 했었다. 그런데 이게 현실이라니. 감격스러움에 떨리는 목소리로 호장이 정환에게 물었다.

“형… 저 좋아해요? 진짜로요?”

“그래, 전호장. 널 좋아해.”

“형, 정환이 형! 저도 좋아요! 저 형 좋아해요!”

결국 참지 못하고 정환을 끌어안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그를 귀엽다는 듯 정환도 마주 안아 손으로 머리를 부볐다. 해남대부속고 농구부원 1학년 수퍼루키, 전호장의 첫사랑이 성공적으로 시작 된 순간이었다.


키싱부스 안에서 난리 부르스가 나거나 말거나, 밖에서 호장이 들어간 부스의 티켓을 판매 중인 창구는 매우 한가했다. 다른 부스의 판매 줄은 아직도 줄을 서고 있었는데 반해, 이쪽 줄만 유독 파리만 날리자 바로 옆 창구의 학생이 옆구리를 찔러왔다.

“저기, 그쪽은 왜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티켓 안 팔려요?”

“아니요, 티켓 전부 다 팔렸어요.”

“네? 다 팔렸다고요?”

“아까 판매 시작하자마자 어떤 남자가 부리나케 달려오더니 오늘 판매되는 티켓 전부 다 사 갔거든요.”

일은 안 하고, 돈은 잔뜩 벌고. 저희 반만 완전 노났죠, 뭐. 호장의 부스를 담당하던 학생이 싱글벙글 웃었다. 다른 반 부스 담당들의 부러움의 시선을 한 눈에 받으면서.

그렇게 해남대부속고의 축제는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02. 이 엉덩이는 이제 제 겁니다.

축제가 끝나고 집으로 귀가하는 길은 평소와 같은 길이었으나 그 위를 걷고 있는 두 사람은 평소와는 달랐다. 물론 전에도 항상 호장은 정환의 오른쪽에 찰싹 붙어서 걸었지만 지금처럼 서로 손을 꼭 붙들고 걷지는 않았으니까. 그렇게도 좋은지, 호장은 정환에게 깍지 낀 손을 쥐었다가 풀었다가 하며 발그레한 얼굴로 계속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닳겠네. 그렇게 좋아?”

“네, 너무 좋아요. 저 진짜 꿈꾸는 것 같아요…”

정환의 질문에 호장이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보여서 정환은 손을 잡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호장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신이 난 얼굴로 호장이 재잘거렸다.

“형, 우리 이제 사귀는 거잖아요. 그럼 매일 같이 등교하고, 같이 하교하는 거죠?”

“그래, 그러자.”

“와, 진짜 너무 좋아요! 그리고 주말에도 만나서 데이트해요! 저 형 서핑하는데 따라갈래요. 구경만 해도 좋으니까 같이 가요!”

“알았어, 같이 가자.”

“우리 농구 경기도 같이 보러 가요! 아, 이건 원래 하던 건가? 그래도 이것도 같이 하고, 우리 커플 농구화도 사는 거 어때요? 어어, 이것도 이미 있네…?”

결국 참지 못하고 정환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옆에서 호장은 제법 진지하게 정환이 형과 데이트를 하면 하고 싶었던 버킷리스트들을 하나씩 떠올리고 있었다. 어느덧 호장의 집 앞까지 도착했지만 호장은 헤어지기가 싫은지 가로등 아래에서 미적거렸다. 결국 정환이 먼저 잡고 있던 손을 풀었고 호장은 아쉬운지 떨어지는 손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호장아, 이제 들어가야지.”

“...형, 가는 거 보고 들어갈래요.”

“그래,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올 게.”

작별 인사를 하며 정환이 호장의 이마에 입 맞췄다. 호장의 얼굴은 물론 귀까지 붉게 물들었다. 정환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떼고 먼저 돌아가는데 뒤에서 호장이 손을 붕붕 흔들며 소리쳤다.

“형, 좋아해요!! 내일 봐요!”

동네에 우리 사귄다고 다 소문낼 작정인지 큰 소리로 외쳐놓고선 내심 민망했는지 호장은 괴상한 소리를 내며 집으로 쏜살같이 들어가 버렸다. 혼자 집으로 돌아가면서 정환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 했다. 저게 귀여워 보이다니 나도 참 중증이라고 생각하면서.

방으로 뛰어 들어온 호장은 그대로 침대 위로 슬라이딩했다. 그리고 애꿎은 베개를 팡팡 때려가며 흥분한 몸과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한결 진정되자 베개를 끌어안고 똑바로 누웠다. 아, 오늘 정말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였어.

처음 키싱부스에 들어갈 때만 하더라도 이런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 했었는데, 내가 지금 정환이 형이랑 정말로 사귀고 있는 게 맞나? 궁금한 마음에 볼을 있는 힘껏 꼬집어 보았다. 역시 존나 아픈 걸 보니 사실이 맞군. 호장이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히죽히죽 웃었다.

정환이 형은 잘 들어갔을까? 전화 통화하면 좋을 텐데. 앞으로 자기 전에 매일 통화하자고 해야지. 벌써 보고 싶다. 목소리 듣고 싶어. 형은 언제부터 날 좋아했을까? 나는 처음 봤을 때부터 형이 좋았는데.

호장은 키싱부스 안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안대를 쓴 채로 정환의 키스를 받았던 그 느낌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한 번 떠올린 순간 도저히 머릿속에서 그 장면이 떨쳐지지가 않았다. 저도 모르게 다리를 배배 꼬다가 한참을 뒤척이며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날이 밝기도 전에 호장은 찝찝한 기분이 들어서 눈을 떴다. 그리고 아래가 축축한 느낌에 설마설마하며 이불을 걷었다. 그리고 젖어있는 속옷과 바지를 발견하곤 호장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속으로 절규했다. 미쳤다, 전호장!


아침 일찍 집 앞으로 마중 나온 정환이 보기에 호장의 상태는 어딘가 얼이 빠져있었다. 어제 헤어질 때 방방거리던 걸 생각해보면 좀 이상하긴 했지만 워낙 피곤해서 그렇겠거니 하고 넘겼다. 사실 호장은 간밤에 정환을 상대로 몽정한 게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도저히 정환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이날 호장은 정신이 가출한 채로 수업을 들었다.

집 나간 정신은 방과 후에 있는 상양고와의 연습 시합 때나 돌아올 수 있었다. 지난 인터하이 때 부진하긴 했으나 상양은 여전히 농구 강호였고 상대가 해남인 만큼 그 김수겸도 초반부터 주전으로 뛸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호장은 상양과의 경기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겠단 다짐을 하며 호장이 머리에 헤어밴드를 꽉 동여맸다.

잠시 후 해남고 농구장에 상양의 선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장이자 감독인 김수겸을 필두로 장신의 선수들이 위풍당당이 입장했다. 등 번호 순서대로 정렬한 양측 선수들이 마주 보는데 김수겸이 눈을 빛내며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었다.

철썩-

그 다음 벌어진 장면에 호장이 입을 다물지 못 했다. 아니, 김수겸이 찰진 스냅으로 정환이 형의 엉덩이를 때릴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냐고! 흥분한 호장이 튀어 나가려는 걸 옆에 있던 동식이 간신히 붙들었다.

“오랜만이다, 이정환. 어디 인터하이 준우승팀 실력 좀 볼까?”

“연습게임이라고 봐줄 거라 생각은 마라, 김수겸.”

그러나 호장을 더 당황하게 한 건, 자신 빼고는 농구장 안에 어떤 사람도 그 행동에 신경조차 쓰지 않는단 사실이었다. 심지어 엉덩이 때리고, 맞은 당사자들조차 아무렇지 않다는 듯 굴었다. 이게 뭐야, 내가 지금 비정상인가?

선수 정렬이 끝나고 시합 준비를 위해 벤치로 돌아가는데 호장이 동식을 붙잡고 물었다.

“동식이 형! 저걸 그대로 냅둬요? 이건 우리 해남을 향한 도발이라구요!”

“그런 거 아니야, 호장아. 저 두 사람 1학년 때부터 저랬어. 엉덩이 때리는 게 김수겸 버릇이야.”

무슨 그딴 나쁜 손버릇이?! 김수겸 선수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이상한 사람이었네! 동식의 설명을 듣고도 호장은 분을 삭히지 못 했다. 아니 근데, 정환이 형은 왜 엉덩이 맞고도 가만히 있는 거지?! 이거 형 애인으로써 화내야 되는 거 맞지? 기분 나쁜 게 당연하잖아! 나도 아직 못 만져본 정환이 형의 엉덩이를…!

그렇게 파렴치한 인간으로 호장에게 단단히 찍혀버린 수겸은 연습 경기 내내 호장의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그러나 수겸은 농구 말고는 눈치가 제로인 인간이라 호장의 열렬한 시선을 받아도 그저 1학년 루키의 치기 어린 투지 같은 걸로 치부했다. 어찌 됐든 자신이 무시 받고 있단 느낌에 호장은 더욱 이를 갈았다.

인터하이 진출에 실패한 후 지옥 훈련을 강행했다는 말이 허세는 아니었는지, 상양과의 경기는 연습 게임이란 말이 무색하게 격렬했다. 어느덧 경기 종료 시간이 가까워졌고 양쪽 선수들 모두 눈에 띄게 지쳐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호장은 수겸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

철썩-?!

수겸의 손이 또다시 정환의 엉덩이로 향하는 걸 보고 부리나케 달려 나간 호장이 공중에서 수겸의 손을 쳐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농구장 안에 모든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김수겸조차도 허공에 내쳐진 손을 거둘 생각도 못 하고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있었다. 옆에 있던 정환이 기겁하며 호장의 앞을 막아서곤 수겸에게 대신 사과했다.

“미안하다, 김수겸. 우리 후배가 아직 시합 중에 흥분이 안 가셔서 실수를…”

“그런 거 아니에요, 정환이 형! 그리고 이건 정당방위라고요!”

아직도 분이 안 가시는지 농구코트 바닥을 발로 쾅쾅 두드리며 호장이 소리 질렀다. 그럴 수록 정환의 안색은 파리해져 갔지만 호장의 입은 멈출 줄을 몰랐다. 농구장 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호장이 정환을 뒤에서 끌어안고 옆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말했다.

“정환이 형은 제 애인이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정환이 형 엉덩이는 제 겁니다! 함부로 손대지 마시라구요!”

호장의 선전포고가 끝나자마자 눈을 질끈 감으며 이마를 짚는 정환의 앞에 선 수겸이 농구코트가 떠나가랴 배꼽을 잡으며 웃어댔다.

해남고는 물론이고 다른 학교에까지 이정환에 대한 소유권을 확실히 공표해버린 수퍼루키였다.



03. 너와 결혼까지 생각했어

정환과 처음으로 주말에 바닷가에서 데이트를 하기로 했을 때, 호장이 상상했던 데이트는 이런 것이었다. 

먼저 둘이 손 잡고 모래사장을 좀 걷다가, 그늘진 파라솔 아래에 자리를 잡고 정환이 형이 멋지게 서핑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거지. 앉아서 구경만 하면 안 심심하냐고? 상의 탈의하고 파도를 가르는 정환이 형이 눈앞에 있는데?! 상상만 해도 존나 즐거운데?! 아무튼 그러다가 정환이 형이 바다에서 나오면 형 어깨에 비치타월도 걸쳐주고, 나란히 앉아서 시원한 음료를 마시면서 주변 경치를 구경하는 거야. 해가 지면 테라스가 있는 근처 식당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고 좀 더 산책을 하다가 지는 노을을 배경으로 키스도 하겠지. 정말 끝내주는 데이트 아니겠어?

…그런데 나는 지금 왜 바다에 코를 박고 다리로 물장구를 치고 있는 걸까.

“전호장, 허리 쭉 펴고 다리 일자로!”

“형, 푸웁, 우리, 어푸, 좀 쉬었다가, 후아, 하면 안 돼요?!” 

호장은 서핑보드를 양손으로 짚고 엎드린 채로 한 시간째 양다리로 수면을 걷어차고 있었다. 호장이 수영을 못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정환이 반강제적으로 수영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호장은 물 속에 고개를 처박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생각한 데이트는 이런 게 아니었다고, 이럴 거면 그냥 수영 강습을 등록했지!

잠시후 기진맥진한 호장이 간신히 바다에서 빠져나와 파라솔 밑으로 기어갔다. 물 속에 있다가 나와서 그런지 쌀쌀하게 느껴지는 날씨에 얼른 비치타월을 몸에 두르고 파라솔 밑에서 덜덜 떨었다. 반면 정환은 익숙한 듯 서핑보드를 옆에 끼운 채 바다에서 걸어 나왔다. 호장이 울상인 얼굴로 말했다. 

“형, 온몸에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아요…”

“처음엔 다 그래. 엎드려 봐봐.”

엄살을 잔뜩 부리며 호장이 엎드리자 정환이 그의 허리와 팔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어때, 이제 좀 괜찮아? 정환이 다정히 물었다. 그 모습에 호장은 방금까지 정환을 원망했단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좋다고 헤벌레했다. 

정환이 형 너무 자상해. 결혼하면 진짜 좋은 남편 되겠다…

응? 결혼?

형이랑 내가?


정환이 다시 바다에 들어가서 서핑을 하는 동안 호장은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호장의 성격상 정환과 결혼하는 핑크빛 미래만 상상할 거라 생각하겠지만 호장도 의외로 현실적인 구석이 있었다.

예전에 민구 형과 준섭이 형한테 들은 적이 있는데, 정환이 형네 집이 엄청 잘 산다고 했었지. 할아버지가 무슨 기업 총수고, 친척들은 무슨 재단 이사에 국회의원이고 어쩌고. 그런 집에선 보통 대를 잇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역시 남자랑 결혼한다고 하면 엄청나게 반대하겠지?

여기까지만 생각했다면 비교적 현실적인 고민이라 볼 수 있었으나, 이다음에 호장은 갑자기 학교 앞으로 찾아온 정환의 어머니에게 찬물 세례를 맞으며 우리 아들과 헤어지라는 소리를 듣는다는 막장 스토리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이마를 부여잡은 호장이 우리 사이에 장애물이 너무 많다는 헛소리를 남발하고 있을 무렵 서핑을 마친 정환이 밖으로 올라왔다.

파라솔 밑으로 들어온 정환이 호장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호장이 잽싸게 음료수 뚜껑을 따서 정환에게 내밀었다. 고맙다고 말하며 정환이 음료수를 마시는데 호장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근데요, 형. 역시 형네 집에선 애를 낳을 수 있는 며느리를 원하겠죠?”

푸웁-

마시던 음료를 그대로 입에서 내뿜어버린 정환이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못 하고 경악스런 얼굴로 호장을 쳐다보았다. 처음엔 이건 무슨 재미없는 농담인가 싶었는데 호장의 얼굴이 제법 진지해 보여서 정환은 당황스러웠다.

“아니,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렇잖아요. 정환이 형네 집 엄청 잘 사는 집이고, 애를 못 낳거나 결혼 상대가 마음에 안 들면 돈 봉투 던지면서 그만 꺼지라고 할 거 같…”

“...너 이제 아침드라마 그만 봐라.”

더는 못 듣겠다는 듯 정환이 손바닥으로 호장의 입을 틀어막았다. 비록 말은 끊겼지만 호장은 눈빛으로 자기 말이 맞지 않냐는 표현을 충분히 하고 있었다. 정환이 살짝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호장아, 나한테 형이 두 명이나 있다고 내가 얘기했었나?”

“네? 정말로요? 정환이 형은 날 때부터 형 아니었어요?”

그럴 리가 있겠니… 정환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게 다가 아니야. 우리 아버지도 오형제셔서 삼촌들도 넷이나 있고, 그 밑에 또 줄줄이 다 아들만 낳아서 사촌 형제도 엄청 많아. 심지어 사촌 중에 여자는 딱 한 명이고, 나머지는 다 남자.”

호장의 입에서 순수한 감탄사가 흘러 나왔다. 그냥 부잣집이 아니라 아들 부잣집이었네. 호장이 중얼거리는 소릴 들은 정환이 손을 뻗어 호장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네가 그런 걱정할 필요 없어. 나 아니어도 우리 집안 대를 이을 사람 많다고.”

그제서야 자신이 괜한 걱정을 하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은 호장이 정환의 손바닥에 머리를 비비며 헤헤 웃었다. 그 모습을 보자 정환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형, 갑자기 왜 웃어요?”

“아니, 생각해보니까 귀여워서.”

정환이 웃으며 호장의 어깨를 감싸고 끌어당겼다. 호장이 정환의 품속으로 들어오자 정환의 목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네가 벌써부터 나랑 결혼할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싶어서.”

“딱히 결혼을 하고 싶다기 보다는… 음…”

얼굴이 홍당무가 된 호장이 우물쭈물 말했다. 

“저는 형이랑 같이 살고 싶어요… 그럼 집에 갈 때 안 헤어져도 되잖아요.”

쑥스럽다는듯 고개를 숙이는 호장을 보며 정환은 집에 바래다 줄 때마다 헤어지기 싫다며 칭얼대던 모습을 떠올렸다. 혼자서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진짜 얘를 어떡하면 좋을까. 심장이 간질거렸다.

“근데요, 형…”

호장이 뭔가 말하려다가 이내 말꼬리를 흐렸다. 정환이 빤히 쳐다보자 호장이 그런 정환의 시선을 회피했다. 무슨 말인데 이렇게 뜸을 들이나 싶을 때쯤 호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환의 가슴에 비수로 꽂혔다.

“저는 저희 집에서 삼대독자인데… 저희 부모님이 허락 안 해주시겠죠?”

그건 제아무리 이정환이어도 확실히 쉽지 않은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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