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2차 창작

[정환수겸] 그들이 사는 세상

포스트잇 커플에게 고통 받는 정대만

2년 간의 방황을 끝내고 화려하게 북산 농구부에 복귀한 정대만은 그 해의 인터하이를 불태우고 윈터컵까지 성공적으로 마치며 무사히 농구부 추천 전형으로 대학에 안착할 수 있었다. 비로소 제 2의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한 대만은 대학 진학 전에 공백기에 잃어버린 체력을 올리는데 몰두했고, 대학 리그에 입성할 즈음엔 부족했던 체력도 많이 보충하여 이제 그의 대학 생활은 탄탄대로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2년 간의 방황으로 인해 부족한 건 체력만은 아니었다.

“엥, 너 진짜 몰랐어? 이정환이랑 김수겸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었던 거?”

“어… 몰랐는데?”

“야, 너는 어떻게 걔네랑 같은 지역 출신이면서도 모르냐?”

같은 대학 농구팀인 마성지가 머리를 긁적이는 정대만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아이치 출신인 성지는 대만이 어째서 공백기를 가졌는지 몰랐을 테니 저런 반응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대만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둘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귀고 있다는 거지?”

“그건 모르지. 지금은 헤어졌을 수도.”

“뭐야?”

“사귀는 중일 수도 있고.”

아니, 사귀면 사귀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그 애매한 표현은 뭔데 대체?

대만의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 애매한 표현이 의미하는 바를 알게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왜냐면 이정환과 김수겸은 떨어졌다, 붙었다, 떨어졌다, 붙었다를 반복하는 포스트잇 커플로 유명했으니까.

남이사 사귀든 헤어지든 나와는 관계 없는 거 아닌가? 처음에 대만은 이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만과 동갑내기 친구이자 대학리그에서 4년 동안 함께 뛸 선수였기에, 그들의 다사다난한 연애사는 생각보다 주변인들에게 많은 악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어, 이정환! 감독님이 찾으시는데 김수겸 어디 갔는지 알고 있…”

“우리 어제 헤어졌어. 나한테 김수겸 이름 석 자도 꺼내지 마라.”

오우, 싸늘하다. 

살갑게 정환에게 말을 걸던 대만은 순식간에 살얼음판으로 변해버린 주변 공기에 움츠리며 옆으로 물러났다. 사실 대만은 아무 잘못도 없었지만 이럴 땐 눈치껏 조용히 있어야 화를 면한다는 건 잘 알았다. 이때만 해도 대만은 당분간 농구부 분위기 냉랭해서 불편하겠다는 정도까지만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뒤, 김수겸이 성지와 대만을 꼬드겨서 술을 진탕 마신 날에 연락 두절 된 수겸을 찾아서 그들이 자주 가던 술집을 헤매고 다니던 정환을 마주쳤을 때 대만은 사람이 너무 황당하면 사고가 정지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경험했다. 

“김수겸 데리고 술 먹고 있었으면 나한테 언질이라도 줘야 되는 거 아니야? 내가 김수겸 애인인 거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거의 만취 상태로 테이블과 한 몸이 된 수겸을 일으켜 세우면서 새우눈을 뜨고는 성지와 대만을 쳐다본 정환이 이딴 말을 지껄였기 때문이었다. 잠시 말을 잃어버린 대만이 더는 내려갈 수 없을 때까지 내려간 턱 때문에 한껏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 하고 건너편에 앉아 있는 성지를 바라보는데, 마성지 역시 저와 다를 것 없는 표정인 걸 보고 그 역시 선량한 피해자였음을 깨달았다.

너네 대체 언제 다시 사귀었는데???

대만이 그렇게 속으로 억울한 물음을 삼켜내는 동안, 정작 당사자들은 유유히 술집을 빠져나가 버렸다. 결국 그 자리에 남은 두 피해자들만 쓰린 속을 술로 달래며 서로를 위로하곤 하는 게 그들의 일상이었다. 

여기까지 들었을 때 이정환이 문제인가 싶겠지만 사실 김수겸도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진 않았다. 

“저번에 나한테 소개팅 들어왔다던 거 있지? 그거 할 테니까 주선해 줘.”

“뭐? 이정환은?”

“헤어졌어.”

이렇게 대뜸 나타나선 수겸이 소개팅을 요구하면 대만은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으니 흔쾌히 수락했다. 어차피 김수겸 정도면 주변에 소개 한 번 해달라는 사람들이 차고 넘쳐서 소개팅 하나 잡는 건 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소개팅 당일에 벌어졌다.

“맞다, 나 이정환이랑 다시 사귄다. 말 하는 거 깜빡함.”

“야, 이 미친 놈아! 오늘 소개팅은 그럼 어떡하고!”

“미안. 네가 잘 둘러대 줘. 나 이정환 만나러 가야 돼서 먼저 간다.”

그렇게 폭탄만 투척하고 사라지면 그 후폭풍은 물론 뒷수습까지 온전히 대만의 몫이었다. 이게 몇 번 반복되다 보니 대만의 주위 평판 또한 추락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두 사람의 사랑놀음에 놀아나는 것도 지긋지긋해서 제발 우리는 끌어들이지 말라고 해봤자 그들은 대학 생활 내내 깨지고 다시 붙는 걸 반복했고 주변인들의 피해는 한도 끝도 없었다. 한 마디로 아주 지랄이 풍년이었다.

그렇게 포스트잇 커플과 함께 해를 거듭할 수록 대만과 성지에게 늘어난 건 두통과 더불어 어느 정도 생긴 요령이었다. 

“오늘 술 먹자.”

“잠깐, 미리 확인부터. 너 이정환이랑 지금 사귀는 중이냐, 아니냐?”

“헤어졌어.”

“진짜지? 저번처럼 다시 사귀기로 했는데 깜빡했단 소리 지껄이는 거 아니지?”

“아니라고 이것들아!”

첫째, 김수겸과 술자리에 동행할 땐 먼저 현재 연애 상황 확인부터 할 것. 그래서 이번처럼 ‘헤어졌다’는 답이 돌아올 경우 일단 이정환한테 보고할 필요 없이 술집으로 직행하면 되었다. 한껏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세 사람은 단골 술집으로 향했다.

공통으로 눈치 보는 존재가 없어서인지, 그들은 절제란 단어는 모르는 것처럼 서로 술잔을 부딪혔고 얼마 안 가 가장 주량이 약한 수겸이 먼저 고꾸라졌다. 사실 수겸은 그 성질머리에 비해 주사는 얌전히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배터리가 나간 로봇처럼 잠드는 거라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두 번째 수칙이 발동된다. 

김수겸이 인사불성으로 쓰러졌을 때 이정환에게 연락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건 수없이 반복했어도 좀처럼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라 대만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테이블과 한 몸이 된 채 널브러진 김수겸의 갈색 뒤통수를 가만히 보던 성지가 먼저 대만에게 물었다.

“이정환한테 연락해야 되는 거 아니야?”

“너 아까 김수겸이 한 말 못 들었어? 둘이 헤어졌다잖아.”

“야, 넌 김수겸 말을 믿냐?”

“…백 프로는 못 믿지.”

“거 봐!”

순순히 믿기엔 그들은 너무나 많은 뒤통수를 맞았다. 한참을 머리를 맞대며 씨름하던 두 사람은 결국 이정환에게 연락을 해보기로 결정했다. 이대로 무시했다가 연락 두절 된 김수겸을 찾아온 정환의 분노를 고스란히 마주하느니, 차라리 헤어졌는데 뭐 하러 연락하냐며 쿠사리를 먹는 쪽이 나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둘 중 누구도 이정환한테 먼저 연락하는 중책을 떠맡고 싶지는 않아서 테이블에 놓인 전화기를 서로에게 밀어내기 시작했다.

“정대만, 네가 연락해라.”

“싫어! 지난주에도 내가 연락했었잖아!”

“아, 나는 그동안 너무 많이 이 녀석들한테 시달렸었다고!”

“그건 네가 이놈들이랑 너무 오래 어울렸던 탓이야. 그리고 이정환하고도 네가 훨씬 친하잖아!”

“그러니까 더 안 되지. 너무 친한 사이엔 오히려 말이 험하게 나오거든. 너처럼 적당히 친해야 예의 차려가면서 말 한다니까?”

이정환이 나한테도 예의 안 차리기 시작한 지 꽤 된 거 같다고 생각했으나 결국 대만은 눈앞에 내민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번 하고선 주소록에서 이정환의 번호를 찾아 눌렀다. 곧이어 신호음이 울리기 시작하자 속으로 빌었다. 제발, 제발, 받지 마!

[여보세요.]

“아, 정환아. 나랑 성지랑 수겸이랑 셋이서 술 먹고 있는데 지금 수겸이가 많이 취했거든?”

[…그래서?]

“아니, 뭐… 그냥 그렇다고…”

[확실히 말해두는데, 나 지금 김수겸이랑 안 사귀니까 나한테 데리러 오라는 소리 하지 마라. 끊는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종료 버튼을 눌러버린 탓에 용기 내서 걸었던 통화는 그렇게 맥아리 없이 끊어졌다. 대만은 짜증이 치밀어올라서 그 화살을 애꿎은 성지에게 돌렸다.

“야, 둘이 헤어진 거 맞대잖아!!! 마성지, 너 때문에 괜히 창피만 당했어!!!”

“미안. 그래도 확인하니까 마음은 편하지 않냐?”

끄덕. 대만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어쨌든 이제 그들이 할 일은 남은 술을 착실히 비우고선 파김치가 된 수겸을 얌전히 택시에 태워서 귀가시키면 되었다. 두 사람은 다시 흥겹게 술잔을 부딪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흥은 테이블 위에서 무섭게 울리는 벨 소리 탓에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화면에 뜬 발신자의 이름 세 글자를 확인한 두 사람은 동시에 아연실색하였고, 대만이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

[김수겸 많이 취했냐?]

“어…”

[얼마나?]

“글쎄 뭐… 몸도 못 가눌 정도?”

맞은 편에 있던 성지도 어느새 대만의 옆으로 와선 전화기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대며 통화 내용을 엿들었다. 전화기 너머로 이정환의 한숨 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거기 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 게.]

“그래 주면 고맙지! 여기 XX역 앞에 OO호프집이야.”

이러나 저러나 미운 정이 무섭다고, 전 애인이 신경 쓰이긴 한 모양이었다. 대만과 성지가 서로를 마주 보며 쾌재를 불렀다. 오늘은 김수겸 뒤치다꺼리 안 해도 되겠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호프집 문을 열고 익숙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발견한 대만과 성지가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갑게 손을 흔들며 반겼다.  

그러나 정환은 자신을 반기는 친구들의 얼굴엔 눈길만 한 번씩 주고선 그의 두 눈은 곧장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수겸에게로 향했다. 순간 정환의 얼굴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와 정환의 분노한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자 대만과 성지는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김수겸, 너 또 이렇게 술 먹으면 내가…! 아니다, 됐다… 일단 가자.”

“응? 당신 뭐야? 뭔데 남의 팔을 함부로 붙잡고 난리냐고오…!” 

아뿔싸! 하필이면 김수겸은 지금 바로 앞에 있는 사람도 구분을 못 할 정도로 취해 있었다. 순간 그들은 만취한 김수겸이 피아식별을 못 하고 이정환의 멱살을 잡는 바람에 술집 한 복판에서 싸우기 시작해서 저 망할 커플을 온 몸으로 뜯어말렸던 아찔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그 짓을 다시 또 겪는 건 절대 안 된다!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서 대만은 수겸을, 성지는 정환을 붙잡고 그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으나 곧바로 수겸의 입에서 나온 상상도 못 한 말에 그대로 얼어붙고야 말았다. 

“…존나 잘생겼네.”

“뭐?”

“그쪽 존나 잘생겼다고오.”

이건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패턴인데?

대만과 성지가 허공에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나 둘 중 누구도 뚜렷한 해결책을 떠올리진 못 하는 사이, 김수겸이 꼬부랑거리는 혀로 삿대질까지 해가면서 정환에게 입을 놀렸다.

“내 남자친구랑 닮았네?”

야, 이거 좆된 거 아니냐?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으나 성지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대만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 동조했다. 이제 그들은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도망칠 타이밍만 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정환은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수겸에게 되물었다. 

“당신 남친이 잘생겼어?”

“응. 완전.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몸도 좋고오… 또… 또… 목소리도 좋다? 근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말이지이…”

김수겸의 비틀거리는 손 끝이 정환의 얼굴에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윽고 그의 왼쪽 눈 아래의 눈물점에 정확히 콕 찍혔다. 그리곤 배시시 웃더니 말했다. 

“이거… 제일 좋아해.”

아주 지랄 염병들을 하세요…

졸지에 친구의 애정행각을 바로 앞 1열에서 직관하게 된 대만과 성지는 당장이라도 먹었던 술이 그대로 역류할 것 같은 기분이었으나 그들을 이 지경으로 만든 저 지긋지긋한 포스트잇 커플은 이미 그들만의 세상에 빠져있었다.

“그럼 나랑 사귈까?”

“안 돼…”

“왜?”

“내 남친 이정환이야… 아무리 닮아도… 넌 안 돼…”

야, 쟤네 며칠 전에 헤어졌다고 하지 않았냐?

그러게 말이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어느새 대만의 곁에 다가온 성지가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로 도출해 낸 의문을 표했으나 대만은 이제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성지도 곧 체념한 듯 테이블 위에 놓인 강냉이를 한 움큼 쥐어서 입 속에 털어 넣으며 절친 커플의 도합 nn번째 재결합을 실시간으로 관람하기 시작했다.

수겸의 마지막 발언이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정환의 얼굴에 싱글벙글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정작 김수겸 본인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두 눈이 끔뻑 잠기더니 정환의 어깨 위에 무거워진 머리를 내려놓고 그대로 축 늘어진 몸을 기댔다. 익숙하게 수겸을 받아든 정환이 그의 한쪽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두르게 한 뒤 상체를 붙들어 세웠다. 그러면서도 눈에선 꿀이 뚝뚝 떨어졌다.

아오, 저 화상들이!

도저히 닭살이 돋아서 맨정신으론 볼 수가 없었다. 대만은 잔에 남아있던 술을 전부 들이키고 테이블 위에 탕-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 소리에 수겸을 부축해서 밖으로 나가려던 정환이 멈춰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도 수겸이 챙기느라 고생했다. 술값은 내가 내고 갈 게.” 

“넵, 들어가십쇼. 형님!”

“형님, 잘 먹었습니다. 살펴 가십쇼!”

그들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정환을 배웅했다. 그리고 카운터에서 정환의 지갑이 열리는 광경을 지켜보며 웃는 얼굴로 열렬히 그에게 환호했다. 잠시 후 정환과 수겸이 술집을 벗어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에 만연했던 미소는 사라져 있었다. 대만이 정색하며 성지에게 말했다.

“...다시는 저 둘 중에 한 명만 있어도 나 부르지 마라.”

“그건 내가 할 소리다, 이 새끼야.”

그러나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대략 20년 뒤, 카나가와 농구부 동창회 하루 전날에 이정환과 김수겸이 아직 이혼 유지 중인지 아니면 재결합을 했는지 확인하는 연락을 사방팔방으로 돌리고 있을 줄은 이때의 정대만은 미처 알지 못 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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