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백호] 안 사요. (백업 - 수정 중) *알아줘와 같은 비번!

*포타에 20230827에 올렸던 단편의 백업입니다. 다듬ing 중...

이사 중인 포스타입(행간의 성간)에서 옮겨온 당시 버전의 백업입니다.

양놀/농놀에 2월 즈음 입덕했으니,

첫 연성을 완성하는데 꼬박 반년이 걸렸네요...

이 연성을 완성하던 무렵 아래 '시즌 때의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백 -> 호,

라는 캐해에서 구상한 게 <알아줘>라서,

문득 연원...이랄까, 시초였달까...

에 해당되는 <안 사요>가 생각나서 옮겨와봤습니다.

첫 연성이라 부족한 점이 많아서,

시간 나는대로 조금씩 가필 중인데,

멀티가 안 되는 지옥의 달팽이라 ;ㅁ;

현재 쓰고 있는 것과 동시 진행이 안 되어서 거북이 속도지만요...

*주의*

본문 내에서 cp의 좌우 방향을 특정할 만한 내용이나 암시를 의도적으로 생략 또는 최소화했습니다. 

어차피 낫꾸금이기도 하고요...(...)

읽어주시는 분이 있다면 선호하거나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방식으로 소비하셔도 무방합니다만, 

저는 평소에도 둘의 사이는 둘이 함께 하기를 선택한다는 점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상대만 확실하다면 cp의 방향에 대해서는 큰 선호도 큰 불호도 없습니다. 

처음으로 몸을 맞댔을 때는 그간 농축된 감정의 밀도 + 이런저런 역학 관계로 인해 호 -> 백,  

비시즌 때는 건강 관리의 부담이 다소 덜해서 되는 대로/내키는 대로,

시즌 때는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백 -> 호의 방향이 개연성이 높지 않나, 하고 생각합니다.   

"호열아 저거 봐봐. 저거 진짤까?"

입추가 지난 게 무색하게 찐득거리고 무더운 거리를 아이스바 하나로 견디며 걷던 강백호가 손짓한 유리에는 

손으로 쓴 <머리카락 삽니다/팝니다> 라는 종이가 붙어있었다. 

"글쎄..."

호기심 가득한 백호의 시선이 못박혀 떠나지 않는 걸 흘끔 본 양호열은

"그런데 백호야, 팔기에는 지금 네 머리 너무 짧다는 생각은 안 드냐,"하고 놀렸다. 

입추건 입동이건 계절에 상관없이 하루종일 뛰고 달리는 강백호의 머리는 하루에 최소 세번씩은 물을 덮어쓰고 어푸어푸 빨래하듯 박박 닦였고, 그런 일상에 5mm 이하의 머리카락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왜 산왕 빡빡이들이 빡빡이인지 알았어....강백호의 그런 뒤늦은 한탄에 강백호보다는 조금 길지만 '농구를 위한 결심을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으로' 표현하고 복귀한 정대만은 "...그래도 난 빡빡이는 안 할 거다."라고 중얼거렸다.   

"눗..내가 판다는 게 아니고!" 

"난 안 팔아." 단호한 차단에 찔끔한 백호는 누웃...하고 고개를 추욱 늘어뜨렸다. 

"...왜. 뭐가 먹고 싶어서 그래? 시원한 거 하나 더 사줘?"

"눗! 진짜? 사줄거냐?!" 

다음 골목에 있는 슈퍼를 향해 달음박질치며 "야호! 호열아, 빨리!" 하고 재촉하는 강백호에게 웃어보이며, 양호열은 흘끔 등 뒤를 곁눈질했다. 

- 누군가에게는,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을 사서라도 해야 할 모습이나 사정이 있나보지. 

딱 그 정도의 감상이었다. 


- 사는 거, 정말 알 수가 없네. 

머리카락 매입 안내를 봤을 때도 들었던 감상을 다시 곱씹으며, 양호열은 어깨를 으쓱했다. 

왜 이런 것을 사고 싶어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딱히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왜? 라는 질문이 삶에 있어서 중요한 사람들이 있다. 그 사실을 하나의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과 별개로, 양호열은 그 질문이 중요한 사람들의 동기는 물론이고, 스스로의 동기에조차 관심이 없었다. 양호열에게 중요한 것은 어느날 자신이 이걸 팔지 말아야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을 실천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을 원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꽤 많이)있고, 이것을 원하는 그 열망이 꽤 맹렬하고 확고하며, 그 열망의 정도가 눈 앞에 제시된 금액의 형태로 표현된다는 것 정도였다.  

"네, 팔겠습니다." 

깨알같이 명시된 모든 문구를 주의 깊게 읽은 것과 대비되는 망설임 없는 서명을 휘갈겨 매매 의사를 쾌속으로 날인한 양호열은, 그 즉시로 입금된 대가를 같은 자리에서 확인하는 작업까지 마치고, 문을 나섰다. 그 처리 과정이 너무나 물 흐르듯 막힘없고 지체없어서, 매매의 중개자가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아직 숙려기간이 많이 남아있는데요..."하고 권해볼 정도였다.   

숙려기간? 그런 게 필요했다면 애초에 팔려는 결심도 하지 않았을 거다. 20년 동안 곱씹었으면 웬만한 술도 상한다. 딴에는 술보다 이게 '맛있다'고 열광하는 모양이지만. 

그렇게 20년간의 <이야기>를 팔고 나온 양호열은, 자, 이제 이 돈을 갖고 뭘 해볼까...하는 생각을 했다. 유난히 더위가 늘어지는 33세의 초가을 낮이였다. 

지이잉 - 지이잉 - 지이잉 -    

이쯤 무시했으면 끊길 만한데, 전화기는 지치지 않고 울렸다가, 끊겼다가, 다시 울리기를 반복했다. 

아...제발...좀,...짜증스럽게 일어난 양호열은 비척비척 걸어가 화면을 확인했다. 그래, 이렇게 끈질기게 걸어댈 만한 사람이 예전 회사 사장 아니면 너 밖에 더 있겠냐. 

"네, 양호열입니다."

- 야!!!!!! 호열아!!!!!!!!!

    혹시 몰라서 스피커폰으로 돌려뒀기에 고막이 직접적 충격을 받는 일은 피했다. 그나저나 어쩐 일이람. 

"어, 강백호. 왜."

- 어, 는 무슨! 너 지금 집이냐?! 

"이 날씨에 집이지 그럼 어디야. 왜."

 - 지금 갈 거니까 너 어디 나가지 마! 

뭔 일 있나, 이 녀석. 양호열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곧 알게 되겠지. 어차피 나갈 계획도 없었으니까, 그 녀석 오면 같이 먹을 거나 좀 미리 준비해볼까. 딱 브런치라고 우겨볼 시간대니까 가볍게 단팥죽에 수정과, 수수떡 정도면 되려나. 

...대체 뭐하러 왔던 거야, 저 녀석? 그렇게 쳐들어온 뒤로 일주일이나 별달리 하는 것도 없이 눌러앉아 양호열이 한 달 두고 먹을 식재료를 거덜내며 뒹굴뒹굴거리는 게 전부였던 강백호는 이제 그만 가라는 구박에 입을 댓발이나 내놓은 채 마지못해 돌아갔다. 그러고보니 끝까지 말을 안 했네. 무슨 일 있냐는 질문이 나올 때마다 양호열의 정신을 쏙 빼놓는, 강백호치고는 제법인 솜씨로 강백호는 끝끝내 답을 피했다. 뭐 때문에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전화를 걸고 쳐들어왔던 걸까, 싶지만, 일주일 동안 말 안 꺼내고도 별일 없었으면 생각보다 별 거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시 전화를 걸거나 달려오거나 하겠지. 

어쨌거나 양호열은 강백호의 가장 친한 친구, 전우, ...그리고 가족이니까.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무엇이든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 쪽으로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이상한 세상이었다. 

화성으로 인류가 이주하지는 못했지만 은하 너머로 무인탐사선을 보내 원격 통신을 유지할 수 있었고, 

기후변화를 멈추지는 못했지만 그 격변을 어찌어찌 흘려보내며 살아남는 방법은 생겨났다. 

그 어느 때보다 환히 불밝힌 도시들이 늘어나는데 더 많은 사람들이 광막한 어둠에 잠겨 있는 듯 외로워했고,

외골격 수트가 개발되는 데에 대한 반발심리로 순수한 육체의 기능과 성취에 대한 열광이 더해졌다. 

그런 갈팡질팡 세상 속 어느 시점부터 <이야기>에 대한 열광이 시작됐는지, 양호열은 분명하게 기억할 수 없다. AI가 초침이 한번 똑딱하는 사이에 몇만년 어치의 서사시를 '창작'해낼 수 있는 시대에, 모션 센서와 전극과 카테터 등등을 주렁주렁 달고 특정할 수 있는 화학적 성분을 채집, 분류, 추적한 뒤, 그것이 재확인되는 물리적 형태로 담아내는 것이 그토록 열광적으로 소비되는 것은 역시 시대에 대한 반발의 한 가지 형태일까? 하는 해석을 어디서 보기는 했지만. 

<이야기>의 판매는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다. 많이 번거롭고, 약간의 부작용이 있을 수는 있지만. 

판매 희망자는 자신이 판매를 희망하는 카테고리를 정해서 샘플 제작을 의뢰한다. 샘플 채취는 판매자 개인이 비용을 부담하는 단계라 대체로 수락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뒤늦게 마련되기는 했어도 이런 저런 가이드라인에 위배되지 않는 최소한의 보장이 되어야 하고, 해당 카테고리에 부합하는 최소 요건은 갖추어야 한다. 따라서 샘플 채취를 의뢰할 때 채워야하는 양식에는, 어렵지는 않지만 다소 번거롭게 느껴지는 세세한 설문과 필수 요건이 나열되어 있다. 

의뢰자가 이것을 성실하게 채워서 제출했더라도, 샘플 채취 후 시료 분석 단계에서 부적합 판단을 받으면 샘플 제작이 반려되거나, 중단되는 경우가, 무사히 샘플 제작 단계로 넘어가는 경우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판매 희망자의 90%가 이 단계를 통과하지 못하고 우수수 탈락했다. 

이 좁은문을 통과해 샘플이 제작되는 것은 기나긴 판매 여정의 첫 단계에 불과했다. 샘플 제작 의뢰가 받아들여지면, 의뢰자는 다시 한번 모션 센서와 전극과 카테터 등등을 주렁주렁 달고 접수한 카테고리에 해당되는 기억과 이야기를 구현하기를 요구받는다. 의뢰자의 선호와 적성에 따라 구현의 형태는 구술, 서면, 그림, 사진, 조각, 춤, 노래...등, 다양한 형태로 이뤄질 수 있으며, 이를 재구성하는 데에도 그에 걸맞는 온갖 첨단 기술 - 과 비용 - 이 투입되었다. 요컨대, 그 재현을 통해, 샘플 제작을 요청한 카테고리의 감정과 그 감정의 뇌파 및 화학적 물질이 활성화된다면 ok. 거듭 말하지만, 뒤늦게 마련되기는 했어도 이런 저런 가이드라인에 위배되지 않는 보편타당한 형태에 한한다.

그렇게 재구성된 이야기는 의뢰자의 주문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샘플로 제작된다. 가장 흔한 형태는 영상물이지만, 글, 그림, 음악이나 향수, 음료의 인기도 만만치 않다. 그 이야기에 가장 최적화된 형태가, 샘플이라는 방식으로 제작되어 시장에 등장하는 것이다.   

샘플 제작은 인증받은 고도의 기술력과 설비를 갖춘 연구제작소에서 이뤄지지만, 그 전까지 90%의 신청자가 제출하는 부적격 서류와 씨름하는 것은 대체로 하청의 하청을 받은 조그마한 중소기업의 몫이다. 3년 전까지, 양호열은 바로 이 샘플 의뢰 제작서를 처리하고 반려 통보를 전달하고 이력을 보관하는 작은 하청업체에서 일했다.   

반려 통보, 라고 쓰면 상당히 우아하게 들리지만, 현실은 그것보다 극적이다. 주로 나쁜 쪽으로. 자신의 이야기가 샘플로 제작되기에 부족하거나 부적합하다는 통보를 받아들이지 못한 일부 의뢰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격분했고, 그 중 일부는 그 격분을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냈다. 해동중 쌈짱, 격동의 청소년기를 보낸 양호열은 때로는 특유의 서늘한 눈초리로, 때로는 혼이 나갈 거 같은 독설로, 때로는...물리적으로 해결했다. 어떤 돌발 상황에도 준비된 것처럼 대응하는 양호열은 좋게 말하면 그 업체의 만능해결사, 나쁘게 말하면...음...  

<이야기>의 시중가는 대체로 높게 형성되어 있지만, 모든 이야기가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사랑 이야기>, 그리고 그 하위의 세부 카테고리는 유난히 비싸게 팔렸다. 

- 대체 댁이 무슨 자격으로 내 이야기가 진정한 사랑인지 아닌지를 판단해!!! 

  이 울분에 찬 멘트는 양호열이 <사랑 이야기>의 하위 카테고리 샘플 제작 의뢰에 대한 반려 통보를 하고 나면 가장 많이 겪은 항의의 전당 부동의 Top 1위였다. 이런 항의에 익숙한 양호열은 거의 척수반사로 보편타당적 사랑의 정의에 따른 윤리적 가이드라인을 읊어주곤 했다. 경우의 차이는 있지만, 보통 가이드라인 1조 2항을 다 넘기기 전에 어떤 형태로든 격렬한 추가적 항의의 표현을 맞닥뜨리게 되는 양호열은, 제압 후 나머지 조항을 속성 랩을 하듯이 마무리해야 했다. 양호열 스스로가 그 항의의 근거에 동조하든 부정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쨌거나 규정은 규정이라. 

  여튼 매일은 느리게 일년은 눈깜짝할 사이에 흘러가던 30대의 어느 날, 양호열은 문득 생각한다. 

'이 정도면 나도 팔겠는데?'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어떻게 양식을 작성하고 접수해야 적격 심사를 받는지 만취 상태에서도 읊어줄 주 있는 양호열은 쾌속으로 샘플 제작, 장터 등록, 샘플 배포, 판매 유료 광고 게재의 단계를 통과했고, 짧은 공고 게시 후, 전설로 기록된 치열한 엎치락뒤치락 경쟁 끝에 성사된 유래없는 낙찰액에 흔쾌히 20년에 달하는 <이야기>를 넘겼다. 듣기로는, 낙찰받은 최후의 승리자가 낙찰의 순간 감격에 포효하다가 입찰 스테이션 벽을 부쉈다나 뭐라나.

판매 대금을 수령한 양호열은, 중개업체에서 조금 신경써준 것처럼 보이는 부작용 경고문 및 부작용 발생 시 받을 수 있는 시술 안내문 등을 이대로 눈에 띄는 쓰레기통에 버릴까 아니면 보는 눈이 있으니 집에 일단 가져갔다 버릴까를 잠깐 고민하다가, 버리더라도 멀리 가져가서 버리자는 결론을 내고 바지 주머니에 처박았다. 그리고 그 길로 미리 봐뒀던 부동산으로 직행해 준비해뒀던 계약을 진행하고, 등기와 서류를 처리하고, 퇴사하고, 인수인계(?)랄까...회식을 하고, 작별을 하고, 이사를 하고...하다가 문득 서류의 존재를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내가 그 안내문을 어쨌더라? 생각해보니 그 날 부동산을 돌아보다가 매너없이 물 웅덩이를 가속해서 튀기며 지나간 전기차 때문에 흙탕물 샤워를 한 양호열은 입었던 옷을 셔츠부터 양말까지 싸그리 버려야 했다. 주머니에서 꺼내지지 못한 채 방치되었던 서류도 그대로 소각장으로 실려갔을 터였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나. 양호열은 어깨를 으쓱했다. 애초에 부작용을 걱정했으면 팔지도 않았을 거라니까?

<이야기>의 샘플은 카테고리에 부합하는 감정을 뇌파와 화학적으로 특정해서 채집한다. 샘플 채취가 진행되는 동안, 샘플 제작 의뢰자는 반복적으로 해당 이야기와 감정을 재현할 것을 요구받는다. 샘플이 장터에 등록되고 거래가 완료된 후, 해당 이야기의 상품 제작을 위해 집중적으로 오로지 한 가지 감정과 이야기에 몰입하도록 강제된 신체는, 이후 간혹 파업 또는 폐업을 선언했다. 

<사랑 이야기>를 예로 들자면, 제작 및 판매가 진행되는 동안 자신의 사랑에 지나치게 압축적으로 몰입해야 했던 판매자가, 이야기의 매매가 완료된 뒤, 후유증으로 사랑의 감각이 둔화되거나 그 이야기의 기억을 잃는 경우가 왕왕 발생했다는 뜻. 

세상의 모든 것에는 정반합이 있다. 이것은 양호열 나름의 삶의 신조였기에 <이야기 판매>의 부작용 역시 그것의 일환이라고 받아들였지만, <이야기 판매>에 부정적인 비판론자들은 이를 유난히 부도덕하고 심각하다고 간주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개인의 역사에 축적된 모든 기억과 이에 수반되는 아픔 역시 인간이 받은 축복이요, 선물이며, 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차별점,'이라고 주장했고, 따라서 이렇게 이야기를 선별, 편집하고 매매하는 행위는 금지되어야 마땅하다고 로비했다. 그로 인해 판매자가 겪는 후유증의 이야기는 비판론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반대 근거였다. 보라, 가장 인간다운 특징을 감히 가위질하기를 선택한 어리석은 인간의 불행한 결말을!

비판론자들의 캠페인은 극적으로 편집된 '후회의 간증'과 비극적인 음악, 경고 문구 등으로 꽤나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 탓에, 한때 <이야기>의 샘플 수가 급감했고, 이로 인해 시중가는 역대급 고공행진을 거듭하며 비판론자들을 격분케했다. 전설로 남을 입찰시작가로 이야기를 판매하기에 나쁘지 않은 환경과 조건이라, 늘 그렇듯 '왜'에 큰 관심이 없는 양호열은 그저 '고객님도 감사합니다, 비판론자들도 감사합니다.'를 되뇌었지만.


 "- 모두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울먹이면서도 환하게 웃는 강백호의 얼굴 뒤로 감동을 고조하는 배경음악과 폭죽, 색종이 등이 어지럽고 화려하게 터졌다. 만 36세, 농구 선수의 평균 은퇴 연령을 훌쩍 넘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눈부시게 불태운 강백호다운 은퇴식이었다. 본능적인 플레이어, 코트 위의 악동, 가장 순수한 농구의 연인, 등등, 등등. 외골격 수트에 힘입어 자신의 몸무게의 5배를 들어올릴 수 있는 세상은, 반작용으로, 타고나기를 그 스포츠에 가장 적합한 육체 조건과 인위적으로 증강하지 않은 피, 땀, 눈물로 갈고닦은 기량에 열광했다. 피지컬의 스포츠라고 불리는 종목은 농구 외에도 배구, 수영...셀 수 없이 많지만, 강백호가 축복받은 육체조건을 갖춘 프로 농구 선수들 중 유난히, 오랫동안 꾸준히도 사랑받은 이유는, 매 경기, 매 순간 다시오지 않을 것처럼 몸을 던지는 자세 때문이었다. 

전설로 남은 고교 산왕전 경기 이후, 반반의 확률이라는 재활을 보란 듯이 성공해서 코트로 돌아온 후에도 강백호는 몸을 사리지 않고 농구의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했고, 그것은 비단 40분, 경기의 시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최선의 경기력을 발휘하기 위해 식단을 관리하고, 스태미너를 쌓고, 기술을 연마하고. 시즌 때는 철저히 매분 매초를 경기력 향상을 위해 투입하고, 비 시즌 때는, 최고의 시즌 준비를 위해 스트레스를 풀고 건강진단을 받고 휴식을 취하는 것까지. 농구 선수 강백호는, 그야말로 매 순간 농구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그 열렬하고 한결같은 사랑에 농구 역시 강백호에게 성공적인 프로 데뷔, NBA진출, 셀 수 없는 MVP 선정과 우승컵, 리그 최상급의 계약과 열광적인 팬들로 보답했다. 다른 사람이 속속들이 알지 못할 우여곡절은 있었을망정, 강백호의 일생일대의 사랑은 마지막까지 강백호에게 충실했고 관대했으며 다정했다. 현대 동화의 해피엔딩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야, 강백호. 그만 일어나라니까?"

- ㅇ....흐...여라...십분마아아안...

 

십분만, 좋아하시네! 십분씩 열번 넘게 지났다, 이 자식아!!!!!!!!!!!

인내심을 잃은 양호열은 달걀 프라이를 뒤집은 실리콘 뒤집개의 끄트머리로 엎드리느라 전방 노출된 강백호의 탱탱한 엉칫살을 사정없이 찔렀다. 

"아! 아야! ...으, 야!"

"- 야~?"

"...야, 야..호...호열아..."

"오냐." 

한때 해동중 쌈짱, 전직 '전설의 진상처리대장' 양호열이 말 끝을 조금 올린 것만으로 언제 떼를 썼냐는 듯 얌전히 일어나 이불 정리를 하는 강백호를 거실 쪽에서 기웃거리며 구경하던 매니저 박태경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내어 감탄했다. 

"역시 전설의 조련사..." 스윽 자신에게 향하는 양호열의 곁눈질에, 정면으로 마주친 것도 아닌 박태경은 자기도 모르게 달걀 프라이 접시에 코를 박았다.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어쩜 이렇게 완벽한 반숙에 테두리 그슬림 없는 완벽한 형태에 완벽한 간의 프라이가 다 있을까요. 그야말로 전설의 조리사네요.

"어제까지 들어온 것 중 괜찮은 건 광고 계약 3건이랑, 서바이벌 예능 1건...아! 그리고 사람시네마 다큐 3 ~ 5부작 제작 의사 타진도 있었어요. 그리고 하나 더 있었는데...다음달 방영 예정으로 1000분토론? 패널 출연? 건이요."

"토론 패널 출연? 나한테?" 

박 매니저가 읽어주는 제안들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음, 음, 코대답을 하면서 수정과로 입을 헹궈가며 세번째 달걀 프라이를 숫제 마시고 있던 강백호는 마지막 제안에 "누?"하고 반응을 보였다. 

"주제가 뭔데?"

"두명 두명씩 나눠서 찬반 토론하는 건데, 주제는 그때 그때 다르고요...이번에는 <이야기의 사고팔기, 성배인가 독배인가?> 래요. 찬반 중 어느 쪽이든 백호 형한테 먼저 선택할 우선권을 준다는 조건으로."

 

둘이 편하게 일정 이야기를 하게 자리를 비켜주고 뉴스를 훑고 있던 있던 양호열은 저도 모르게 레이저 휠을 멈췄다. <이야기 사고팔기>의 찬반토론 패널 섭외를 강백호한테? 왜? 귀를 있는대로 세워봤지만 목소리를 낮췄는지 두런거리는 기척 외에 자세한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강백호랑 이야기 사고팔기라니, 대체 무슨 관련이 있다고.  

"아, 호열 씨.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강백호가 샤워하고 외출 준비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를 노려, 최대한 자연스럽게, 마치 그릇을 치우러 등장한 양 거실로 나가자 박 매니저는 찔끔 쫄았던 것을 까맣게 잊고 친근하게 인사해왔다.

"박 매니저 님이 수고 많으십니다. 늘 이렇게 꼼꼼하게 백호 녀석 챙겨주시고." 

"에이, 그거야 제 일인걸요. 호열 씨야말로 저까지 매번 밥 챙겨주느라 수고로우실텐데 제가 감사하죠."

"박 매니저 님 보시기에는 어떤 게 좋아보여요? 오늘 제안 중에.

- 재미있어 보이는 게 있는 것 같아서,"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그냥 궁금해서 물어본다는 식으로. 그릇을 헹구며 양호열은 태연을 가장해서 박태경에게 말을 걸었다. 프로 선수로서의 은퇴 후에도 스타성이 빛나는 강백호에게 에이전시는 새로운 매니지먼트 계약을 제안했고, 전담 매니저로 박태경을 붙여줬다. 은퇴식 이후 양호열의 집에 눌러앉아 뒹굴거리던 강백호에게 이런 저런 일거리를 들고 오고, 일정을 일러주고, 픽업해서 스케쥴을 소화한 뒤 데려다주느라 집주인 양호열과 안면을 트는 것은 필수불가결이었다. 

따라서, 구단이나 기획사에서도 알음알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오래된, 가족에 더 가까운 친우 - 강백호의 일이라면 강백호 자신보다 더 잘 아는 - 일명 '강백호 조련사'로 알려진 양호열에게, 강백호의 일정이나 새로운 일과가 흘러들어가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강백호가 농구에 마음을 빼앗긴 이래 20여 년간, 크고 작은 부상이 발생할 때 구단에서 긴급 연락을 돌리는 것은 양호열이었고, 드물게 찾아오는 슬럼프에 연락없이 잠수탄 강백호의 행방을 수소문할 때 가장 기대를 걸어보는 것도 양호열의 번호였으니까.

요컨대, 강백호에 대해서 양호열이 모르는 것은 없다, 라는 것은 이의제기가 불필요한 명제였고, 박태경 역시 단시간 안에 그 분위기에 익숙해졌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질문에 대답했다.

"앗, 호열 씨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광고 계약이나 예능, 다큐 제작이야 자주 들어오지만, 1000분 토론은 늘 오는 제안이 아니라서 확실히 신선하잖아요! 이야기 사고팔기라는 주제도 요 몇년간 꾸준히 핫한 이슈고."

"그렇죠. 하지만 아무래도 민감한 주제기도 하고, 패널로 등장한다는 것에 부담도 수반되니까, 저는 걱정도 좀 되어서."

"끙...그건 그렇죠..."

매니저로서 출연의 장점과 단점을 저울에 올려놓는 듯, 미간을 좁힌 박경태는 안경테 콧등을 긁적거렸다.

"불법이 아닌데도, 반대하는 사람들은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다 문제다! 금지시켜야 한다! 하고 가뜩이나 난리인데, 유명인인 백호 형이 사는 것도 파는 것도 다 해봤다는 게 밝혀지면 진짜 벌떼같이 들고일어날 수도 있잖아요."


- ...지금 뭐라고? 백호가, 뭘...?

"- ...그럴 수 있죠." 

 기나긴 진상처리대장의 경력이 빛을 발해 부자연스러운 간격이 늘어지기 전에 적당한 대꾸를 만들어냈다. 입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모르게, 어떻게도 해석될 수 있는 무난한 맞장구를 치며 영원같이 느껴지는 시간을 떼운 끝에, 준비를 마치고 나온 강백호와 박태경은 오늘의 일과를 위해 외출했다. 

얼마나 오래 소파에 주저앉아 있었는지 모르겠다. 양호열이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는 것을 전제로, '아는 사람들끼리 다 아는 내용을 얘기할 때' 보이는 지극히 가벼운 투로 넘어간 그 정보값은, 자신보다 머리 두 개쯤 큰 동네 불량배 앞에서든 멱살드잡이를 하고 난동을 부리는 진상 앞에서든 풀려본 적 없는 양호열의 다리를 풀리게 하고 머리속을 새하얗게 태워버렸다. 

- 사는 것도 파는 것도 다 해봤다는 게 밝혀지면, 엄청난 비난을 들을 수도 있다고. 

사는 것도, 

파는 것도

다 

해봤다는 게.

...아무리 가까워도, 허물없이 서로의 집을 드나들고, 서로의 지인과 행동 반경과 일과를 속속들이 알아도, 

네 것은 네 것이고, 내 것은 내 것이기 마련이다. 

서로를 몰랐던 시간보다 알던 시간이 압도적으로 더 길어진 한평생 동안, 양호열은 강백호에게 미리 의사를 확인하지 않고 강백호의 물건을 뒤진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건 강백호도 마찬가지였을테고. 

그렇기에 양호열은 애쓸 것도 없이, 열쇠도 걸려있지 않은, 자신이 내어준 방의 두번째 책상 서랍에서 

흙탕물이 튀고 누래진 안내문 한 부와, 아직 파란 빛이 도는 빳빳한 안내문 한 부, 샘플 채취 의뢰서, 제작 발주서, 샘플 수령 완료 확인증, 외장형 저장 및 재생매체 한 개, 그리고 상품 구입 영수증 한 부를 찾아냈다. 

샘플 제작 날짜는 3달 전, 구입 영수증의 날짜는 3년 전 가을이었다. 


"야~호, 다녀왔습니다...으헉, 깜짝아!!!"

불꺼진 거실창을 밖에서 흘끔 봤었던 강백호는 당연히 양호열이 2층에 있겠거니 생각하고 들어온 캄캄한 거실에 미동없이 앉아있는 양호열을 보고 과장 좀 보태서 천장에 머리를 쿵 찧을 정도로 펄쩍 뛰었다. 

"어우, 씨, 놀랐잖아. 뭐하냐, 호열아, 불도 안 키구..."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누르자 딸깍, 들어온 불이 양호열의 창백한 낯, 꾹 다문 입술, 그리고 소파 테이블에 이리 저리 널린 물건들을 비춘다. 양호열은 손에 들고 있던 재생매체의 재생 버튼을 눌렀고, 화면이 달린 그것은 곧 강백호에게도 익숙한 영상을 재생한다. 

 영상은 아주 크지도, 아주 작지도 않은 한 남성을 담은 정교한 모델링 영상이다. 3D모델링과 판매자가 지정한 외모로 조형된 남자가 진짜 사람이 아니라는 힌트는 애니메이션에서나 등장할 법한 오묘한 파란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정도. 영상은 지극히 실사에 가깝게 구현된 남자의 일생을 연속되지 않은 필름처럼 재생한다. 영상 속에서 남자는 때로는 스쿠터를 타고 가다가 뒤를 돌아보고, 때로는 화면 너머로 세로로 눕혀서 얼린 생수병을 건네며, 밤새워 편지를 쓰고 졸음이 가득한 얼굴로 전화를 받는다. 트렁크가 큰 사륜구동 차에 뭔가를 가득 싣고 급히 어디론가로 운전해서 가기도 하고, 공항 전면 유리 너머로 뜨고지는 비행기를 오랫동안 바라보며 서 있는다. 그러다 화면 너머로, 눈을 마주치면, 어김없이, 눈꼬리가 내려가고 눈매가 가늘어지며, 고른 치열이 드러나는 미소가, 입술이 움직여 하나의 이름을 부른다. 

'백호야.'

상품명 <사랑하는 시선>

"...이걸 왜 네가 샀어?"

강백호는 머리를 벅벅 긁다가, 일단 소파에 털썩 앉았다. 

뭐라고 말해야할지 모르겠다.

천재는 말로 하지 않아도 알지만, 자신 안에서는 분명한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호열이 납득할만한 '말'로 바꿀 수 있을지를 몰랐다.

"...음, 그게, 말하자면 좀 긴데. 

호열아, 혹시 화났냐."

"...왜 내가 화났을 거라고 생각해?"

"누, 웃....너, 나 지금 쳐다도 안 보고 있잖냐...눈도 안 마주치고. 웃지도 않고..."

"...눈. 하...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얗게 굳힌 석고 표면같던 양호열의 눈가에 미세한 금이 가더니, 고른 앞니가 아랫입술을 파고들었다. 어찌나 악물었는지 입술 표면은 하얗게 질리고 이 끄트머리 사이로 천천히 흘러내리는 피를 본 강백호는 벌떡 일어나 양호열의 잇새에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야, 호열아! 하지마, 너 피 나!"

탁! 

몸이 반쯤 돌아갈 정도로 거센 반동에 순간 휘청 균형을 잃은 강백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한 발 늦게 시차를 두고 이해했다. 

2미터의 신장이 자칫 바닥에 나동그라질 뻔할 정도로 강한 힘으로 손을 쳐낸 양호열은, 한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강백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악다문 턱과 목에는 시퍼런 핏대가 솟았고, 꽉 쥔 주먹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피가 천천히 턱을 타고 흐르는 동안 실핏줄이 터진 눈에 넘실대던 눈물이 곧 중력을 따라 또옥...똑,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귀에 크게 울렸다.

   붉게 충혈된 흰자위 위로 눈물이 차오르고, 넘치고, 다시 솟아오르는 내내, 한번도 본 적 없는 - 분노, 슬픔, 수치심 같은, 호열의 얼굴에서 보는 것이 너무나도 낯선 - 감정들이, 조각조각 재생되던 영상처럼 호열의 눈동자 안에서 아른거리다 점멸하는 등불처럼 사그라졌다.

"...강백호. 

저걸 샀으면, 너도 다 알 거 아냐. 

봤잖아. 20년 동안, 내가 너 어떤 눈으로 봤는지.

그걸, 사서, 봤으면서. 

네가 본 거, 내가 이제 아는데, 

너를 왜 안 보냐고...?"

여태 온 몸 털 끝 하나하나까지 힘이 들어가 떨던 양호열은, 불시에 명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숙였다기보다는, 쏟아지듯, 상체를 테이블 위로 무너뜨리며, 죽어가는 짐승처럼 헐떡헐떡 울었다.   

"...xx,...팔려고, 내놓은, 거 보면 뻔, 하잖아.

할 수만 있으면, 그런 눈깔 같은, 거, 파,버렸을 거라고. 

그, 렇, 허억, 게 못하니까...흑...판 거잖아.

네가 볼 줄, 알았으면, 안 팔았어. 차,차라리 파내버렸을 거,라고!" 

  


"눈은 영혼의 창이요, 

마음의 거울이니" 

<작자 미상>

    

"어. 양호열 왔냐."

이제는 제법 친근해진 송태섭이 수돗가로 향하려다, 손을 흔들었다. 까딱, 짧은 눈인사로 답을 대신한 양호열은 발치의 이온음료 한 통을 들어 흔들어보인 뒤, 손목에 적당히 스냅을 주어 송태섭에게 던졌다. 

"오, 나도 주는 거냐. 땡큐." 

사양하지 않고 뚜껑을 따서 보는 사람이 시원할만큼 거침없이 꿀꺽꿀꺽 음료를 삼킨 송태섭이 유니폼 자락을 들어올려 땀을 닦았다. 체육관 안에서는 아직 농구화가 미끄러지는 끽, 끼긱 하는 소리와, 미니 게임 중인 부원들간의 맹렬한 기싸움 몸싸움이 한창이었다. 완전히 부활했을 뿐더러 이제 기량에 물이 올랐다는 칭찬을 받은 백호는 쉬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이 펄펄 날아다니고 있었다. 잠시 그 모습에 눈길을 주던 양호열은 혹시라도 문가의 움직임에 주의력이 흐트러질까봐, 한발짝 더 가장자리로 물러났다.

"혹시 생각해봤냐? 매니저 입부."

고개를 돌리자, 송태섭이 손부채질을 하면서 시선을 마주해온다. 백호의 1년 선배인 이 사람은 시야가 넓고 눈치가 빨랐다. 게다가 문득문득, 나이가 고작 한 살 더 위라는 게 믿기지 않을만큼 어른스럽다. 대답을 하기도 전에, 어깨를 으쓱한다. 

"보는 눈이 제법 날카로운데 아까워서 권해봤다. 뭐, 진지하게 받아들여주면 좋지만."

  어깨를 툭, 치고 다시 체육관으로 돌아가는 송태섭과 교대하듯, "야호! 호열아!"하는 백호의 쩌렁쩌렁한 목청이 양호열을 향했다. 

"오늘도 열심이구나, 백호야." 

그래그래, 이 시원한 포*리스웨*가 반갑지? 안다 알아.


"호열아, 너 혹시 강백호랑 친척이야? 나이 차이 거의 안 나는 사촌형이라든가?"

"뭐?" 

밑도 끝도 없이 엉뚱한 여자친구의 말에 양호열은 푸핫, 하고 웃음이 터졌다. 

"무슨 소리야, 백호랑 내가 어디 닮았어? 

아하하, 일단 키부터가 다르잖아. 아아~ 백호랑 유전자가 반만 같았어도 나도 170cm는 넘겼으려나~" 

내심 자학 유머를 친 양호열은 뜻밖에도 심각해보이는 여자친구의 얼굴에 슬그머니 입꼬리를 내렸다.

"그럼 형도 아니고 가족도 아닌 거지?" 

"...뭐 일단 혈연 관계는 없는데." 

- 가족이나 다름없긴 하지만, 덧붙이려다 만 말을 입 안으로 꿀꺽 삼켰다. 왠지 그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이해가 안 돼. 혈연 관계도 없고 나이가 더 많은 것도 아닌데 호열이 네가 왜 그렇게까지 강백호를 챙겨?" 

- 네가 강백호한테 웃으면서 챙기는 거 보면 가끔 강백호 형 같아. 아무리 친한 친구라지만 여자친구인 나보다 강백호를 더 자주 보고 더 신경쓰는 것 같아서 서운하다구.

데이트를 위해 2시간 넘게 세팅한 머리를 못 알아보는 것이 서운했던 여자친구와 말다툼하다가 헤어지게 된 결정타가 

'강백호 머리는 5mm보다 길어지면 귀신같이 눈치채고 직접 밀어주면서!'라니, 

백호의 50번째 실연 사유보다 더 믿기지 않는 이유다...


"이야기 많이 전해들었어요. 백호 씨랑 가장 친한 친구시라고요.

...초면에 실례인 건 알지만, 혹시 백호 씨랑 친척이라든가, 혈연 관계신가요?"

- ...음, 기시감이.   

 "가족이나 다름없는 친구긴 하지만 제가 아는 혈연 관계는 없어요. 백호랑 제가 닮았나요? 

반만 닮았으면 저도 180cm는 넘겼을텐데, 하하~...."

- ...또냐.

농담이랍시고 덧붙인 말에 웃는 시늉도 하지 않는 눈빛과 딱딱한 입매를 보니 (또) 망한 것 같았다. 다음이라는 게 있다면 아예 단답형으로 답하리라...

"백호 씨도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혈연 관계가 없다기에는 양호열 씨가 백호 씨 보는 게 꼭 막둥이 동생 재롱보는 형이나 친자식이라고 나서지는 못하면서 눈에서 꿀 떨어지는 생부 같아서 백호 씨는 모르는 출생의 비밀이 있나 했지 뭐예요."

아하하..하...네...그러셨군요...

 


"어, 이게 여기 있었네.

오랜만이네~아직 재생은 되려나."

혼잣말을 하며 양호열은 비디오 테이프를 캠코더에 끼우고 재생을 눌렀다. 

엉망진창인 자세로 이만 번의 슛을 던지며 땀을 흘리는 백호가 있었고, 낄낄 웃으며 백호를 놀리고 응원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강백호 선수에게 이런 생초짜 시절이 있었다고요? 하면 증거물로 당당히 제시될 그 뜨겁고 놀랍고 폭발적인 성장의 여름이 손바닥만한 화면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뭐야, 나도 찍혔었네.

- 몰랐다."

합숙 당시에는 백호의 자세에 집중하느라 찍힌지도 몰랐고 비디오를 되감아 돌려보고 뜯어보고 하면서도 인식 못 하고 넘어갔었는데, 막상 눈에 들어오고 나니 제법 여기저기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백호군단과 저의 모습에 양호열은 저도 모르게 어, 여기도 있다, 저기에도 있었네, 하하 나 뭐하고 있었던 거냐...하며 숨은 그림 찾듯 오래된 비디오에 빠져들었다. 

이제 꽤 오래 전이지만 어제인 것처럼 생생한 기억이 눈 안에서 재생된다. 민소매 티셔츠조차 벗어던진 맨 등근육이 꿈틀거리며, 활시위처럼 당겨졌다가, 확 펴지던 곡선, 체육관 바닥에 흘린 땀에 바나나 껍질 밟은 만화 캐릭터처럼 훌러덩 미끄러져 찧던 엉덩방아, 슛이 들어갔을 때 찢어져라 시원스레 웃으며 활짝 벌어지던 입매...

자신이 기억하는 영상은 그런 모습이었는데, 지직거리는 테이프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허리를 접어가며 웃는 백호와 자신, 이게 마지막이다, 힘내라 백호야! 하고 외치며 패스해주는 자신의 얼굴, 슛이 림을 통과하자 얼싸안고 기뻐하는 모습 등을 보여줬다. 

"...꿀 떨어지는 눈이라라니, 나 참."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은 정작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는지 알 일이 없지 않나. 영상에 찍힌 자신을 봄으로써,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표정은, 눈빛은, 이렇구나, 라는 것을, 다른 사람의 관점에 업혀 엿본 느낌이었다.  

 

"뭐, 합숙도 그렇고, 반쯤은 우리가 업어키운 거 아니야? 이 정도면 나름 강백호 명예가족이라고."  

조금 겸연쩍어진 양호열은 괜히 듣는 이 없는 변명을 몇 마디 중얼대며 비디오 테이프를 제자리에 돌려놨다. 


"xx...."

여간해선 할 일 없는 욕설을 위액과 함께 잇새로 흘려보내며, 양호열은 변기 뚜껑 위로 쏟아지듯 몸을 기댔다. 

텅 빈 위장에서는 이제 위산과 쓸개즙만 역류하는데, 눈을 감아도 조금 전에 본 장면은 마치 눈알 안쪽에 영구히 새겨진 듯 알아서 다시 재생됐다.

  

송태섭도 지원받은 장학 재단의 도움을 받아 미국 유학을 간 백호가 기어이 NBA 드래프트 지명을 받는 데 성공했을 때, 백호군단 모두가 얼싸안고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환호하긴 했어도, 정작 계약금으로 백호가 백호군단의 왕복 비행기, 호텔과 관광 코스까지 일사천리로 결제하고 

"첫 경기는 가족들이 다 와서 응원한다고 했단 말야. 그러니까 너네가 와줬으면 좋겠다구..." 라며 입을 쑥쓰럽게 삐죽이는 걸 보니, 정말 그간 육아(?)의 고됨이 한방에 보상받는 기분이 들어서 감격스럽고, 뿌듯하고...자랑스러웠다. 고등학교 내내, 대학교 가서도 2년간, 비 온 뒤 죽순처럼 쑥쑥 자란 백호가 기어이 2미터 신장을 찍어서 무리라지만, 마음 같아서는 다 같이 헹가래를 쳐주고 싶을 정도로. 백호군단 네 명이 힘을 합쳐도 어려울 테니 아쉬운대로 다들 손바닥이 얼얼해지도록 머리를 복복 쓰다듬어주는 것에 그쳤다.

오랜만에 고등학교 때로 돌아간 것처럼 즐겁고, 분주하고, 행복했던 짧은 여행은, 모든 방학이 그렇듯, 너무나 빨리 흘러갔다. 회포를 풀고, 함께 관광을 즐기고, 대망의 강백호 NBA 데뷔전을 마지막으로 각자의 생업에 복귀하기 위해 귀국할 대남, 구식, 용팔과 달리, 정비기사 시험을 막 끝내고 미국에 놀러온 양호열은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잠깐 한숨 돌릴 여유 시간이 있었다. 미국에서도 정비기사는 엄청 인기 있다던데, 비자도 잘 나온댔구...하는 백호의 말에, 

'...그래? 그럼 시간 여유도 있는데, 온 김에 현지 정비기사 정보나 좀 알아보고 갈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은 전혀 계획에 없었지만, 곱씹어보면 그렇게 썩 나쁜 아이디어도 아닌 것 같았다. 어차피 왕복 비행기는 백호가 다 끊어뒀겠다, 계약금으로 마련한 백호의 첫 마이홈이 아무리 작다고 해도 미국 기준이라 방과 공간 남아돌겠다,...효도 받는 거 까짓꺼 풀코스로 받으면 좀 어때? 이래 봬도 나 양호열, 자칭타칭 백호 명예가족인데?

진지하게 미국 현지에 정비기사로 자리잡아 볼까 하는 생각은 사실 해본 적 없었다. 

다만, 짧게 귀국해서 금방 또 공항에서 아쉬운 발걸음을 떼면서도, 미국에서 얻은 낯설고 새롭고 황당하고 재밌었던 경험들을 쏟아내는 백호의 얼굴이 즐거워보였기에, 매번 다녀가고 다시 만날 때마다 고1 여름 때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성큼 또 성큼 자라서 오는 게 손에 잡힐 듯 보이기에, 조금은 부러웠고, 조금은 궁금했고,

...또 조금은, 서운했다. 

형이나 아빠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누구보다 진심으로 백호를 응원할 자신이 있는데, 정작 백호는 이제 시선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먼 곳보다도 먼 곳에서 다른 사람들의 환호를 한 몸에 받으며 낯선 성장의 기록을 쌓고 있다. 

백호 말대로 기술직 비자가 잘 나오는 편이면, 새로운 경험도 쌓을 겸 미국에서 정비기사 경력을 시작해도 괜찮지 않을까? 농담으로 크으 우리 백호 정말 다 컸다, 이제 형님들은 걱정이 없다 하며 과장해서 눈물을 닦는 백호군단에게 세상 씩씩한 표정으로 

"응! 여태까지 키워줘서 고마웠다 얘들아! 이제 이 천재가 받은 거 백배 천배로 돌려준다! 두고보라구!" 하고 장담하는 바람에, 시늉만 하려던 눈물을 정말 닦아야 했으니까.

갑작스러운 발상이지만 썩 나쁘지 않았던 듯 했던 그 얼레벌레 미국 이주 계획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사되지 않았다. 더 자세히는, 실천에 옮겨보기도 전에 영구 폐기됐다. 

백호랑 가장 친한 동료 중 하나라던 선수가, 양호열과 마찬가지로 연습경기를 구경하러 관객석에 앉아있던 남자를 발견하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팔을 크게 휘두르자, 그를 향해 마주 웃어보이던 그 남자의 눈빛을 보고, 화장실에서 먹은 것도 없는 빈 속을 게워내다 결국 제대로 경기를 보지도 못하고 집으로 도망친 양호열이 온갖 구실을 내세워 서둘러 귀국해버렸기 때문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해 빠질 것 같은 눈을 감아 시야를 차단해봐도, 굳이 비디오를 돌려보거나 거울을 꺼내 틈틈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이제 양호열은 안다. 보송보송 병아리 솜털같은 머리카락이 5mm를 넘겨 자랐을 때, 이만 번째 슛이 림을 통과했을 때, 언제 다쳤냐는 듯 날아올라 꽂아넣은 덩크슛이 백보드를 부서져라 흔들 때, 출국장 너머로 빨간 머리꼭지가 어른대다가 더 이상 안 보일 때, 낯선 언어가 애정을 담아 레드티라노라는 별명과 미국식으로 발음한 이름을 환호할 때,

양호열이

어떤 눈으로 강백호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홀씨로 날아와 뿌리를 내리더니 싹이 되고 꽃송이로 피어나듯 조금씩 모습을 바꾸며 자리잡은 사랑, 흘끗 본 사람은 중이 제 머리 못 깎듯 정작 양호열 자신은 못 보는 양호열의 눈빛에서 어렵잖게 그 마음을 읽어냈던 것이다.


양호열은 강백호의 이해자. 친구, 전우, 그리고 가족. 하지만 이제 그 뒤로, 입 밖에 자랑스럽게 낼 일 없는 하나의 명칭이 슬그머니 줄을 서본다. 너를 남몰래 사랑하는 사람. 사람의 마음이란, 자 이제부터 사랑! 하고 선언하고 시작되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인데도 언제부터 사랑이었고 어떤 게 사랑이었는지, 양호열은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것은 강백호를 바라보는 자신의 눈에서 사랑이 줄줄 새고 있다는 것 뿐.

몰랐으면 모르되 아는 이상, 의식하고 있는 이상, 조금은 꾸밀 수 있지 않을까? 아닌 척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강백호와 눈을 맞추거나 바라보는 모든 순간을 카메라로 찍어 눈빛이 제대로 거짓말을 하는지 검열할 자신이 없었던 양호열은, 거짓말을 해야하는 시간을 최소화하는 쪽을 택했다. 

강백호는 한동안 끈질기게 "아~ 미국 정비기사들 근무시간이 그렇게 짧고도 고수입이라던데~ 세상에 온갖 차는 다 미국에 있어서 매일매일 새로운 차를 만지는 재미가 그렇게 좋다던데~ 마침 천재 강백호도 미국에서 잘나가서 미국에서 정비기사로 일하면 생활비가 하나도 안 든다던데~"하며 수동적 요구를 지속했지만, NBA에서의 치열하고 보람찬 시간이 쌓여갈수록 비례해서 올라가는 인기와 분주함에, 그 이야기가 자취를 감추는 순간은 오고야 말았고, 곧 지나갔다. 

오래 전부터 조금씩 수면 위로 떠오르던 <이야기 사고팔기>가 본격적으로 유행을 타기 시작했던 것도 그 무렵 즈음이었다. <이야기>에 부여된 명확한 감정의 정의. 그 중에서도 인기 카테고리인 <사랑>. 사랑의 감정을 전기신호와 화학적으로, 어떨 때 사랑이고 어떨 때 아닌지 분명하게 감지하고 명쾌하게 나눌 수 있다는 자신감. 

당사자 - 양호열 - 동의도 없이 시작된 사랑을 덮어숨기기에 급급하고, 기만의 의도 없이 덧대어야 하는 거짓말의 무게에 지쳐가던 양호열은 하다못해 다른 사랑들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고 명명되는지라도 알고 싶었다.

하청의 하청에 해당되는 중소기업에서 일한다는 것은, 규모는 작아도 업무범위는 넓으며 일은 안하는 것 빼고는 다 해야하는 나날의 연속이다. 샘플 채취 의뢰서를 전산화하고 전송되어온 시료 분석 결과를 대조한 뒤, 제출된 제작 신청서에 접수된 카테고리와 시료 검증 결과가 일치하는지 확인하고, 확인 결과를 시스템에 입력하며, 부적격 판정이 내려진 의뢰서에 반려 통보를 돌린다. 

사랑 이야기는 인기가 많은만큼 접수도 많았고, 반려 횟수도 많았고, 수요도 많았다. 양호열은 내 이야기는 사람들이 앞다투어 원할만큼 흥미롭고, 독특하고, 진실하다고 자신하는 천종만화(千種萬話)의 세부 카테고리를 전부 다뤄봤고, 90%에 해당되는 샘플 제작 의뢰들을 돌려보냈다. 살아남은 10%의 샘플들은 다시 지난한 복기와 구현, 혹독한 대조와 상품성 평가를 거쳐 비로소 적절한 분류, 상품명, 구성과 홍보문구로 완성된다.   

      

    90%에 해당되는 반려 사유를 작성하고 통보를 전달하며, 양호열은,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스스로가 받아들이는 감정과 화학 분석의 결과가 가리키는 감정이 일치하지 않나보다, 생각했다. 살아남은 10%의 샘플처럼, 머리와 가슴이 언제나 일치하기에 스스로에게 의구심을 품을 필요가 없는 몇몇 천재들을 제외하고.


양호열은 생각했다. 강백호는 그 극히 적은 천재에 해당되지 않을까? 고등학교 때까지 생초짜였다는 게 부풀려진 과장이겠거니 싶은 NBA의 총아, 천재 악동 강백호는, 50번 실연당했었던 북산고 강백호와도 다른 사람인 것만 같다. 강백호는 항상 주저없이 사랑에 몸을 던졌다. 포물선을 보고 쫓아서 뛰어야할지 말아야할지를 본능적으로 알 듯, 자신을 향한 호감도, 자신이 느낀 호감도 놓치지 않고 곧게 내달렸다. 필요하다면 100번 리바운드해서라도 손에 넣었다. 누가 봐도 눈부신 사람들이, 더없이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반짝거림으로 강백호를 바라보며 앞다투어 몰려들었다. 

삶의 특별한 순간들에는 어김없이 백호군단을 초대하는 바람에 몇번 더 밟게 된 미국 땅에서, 지난번과 다른 사람에게 눈꼬리에 경련이 나도록 웃어주며, 얘기 많이 들었어요, 백호의 새로운 가족이나 다름없는 분이시라지요...하고 미리 연습해본 영어로 말하는 것도, 길게는 3주일, 짧게는 5일 정도라면, 그럭저럭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은 느리게 일년은 눈깜짝할 사이에 흘러가던 30대의 어느 날,

하이재킹처럼 온갖 화면들을 차지한 <특! NBA의 총아, 천재 악동 강백호 선수, 국내 리그 합류 임박?>이라는 뉴스에, 몇년 전 스타디움 화장실에서 그랬듯이, 

1년 중 5일이 아니라, 1년 중 5일을 뺀 360일 동안 강백호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꼴을 바로 옆에서 눈 번히 뜨고 봐야한다면, 눈 안의 사랑이나, 사랑을 숨기지 못한 두 눈이나, 둘 중 하나는 파내버리고 싶다고, 

선택하지 못한 시작 대신 끝이라도 정하고 싶은 사랑을 토해내듯 헛구역질하며, 양호열은 울었다.

"드물게 보는 고밀도의 <순애> 카테고리, 키워드 '청매죽마', '바다같은 사랑' '영원불멸' 뽑혔어요!"

게다가 20년 어치라니! 전형적인 괴짜 과학자처럼 뱅글뱅글 도수높은 안경을 낀 수석 연구원이 흥분으로 두 손을 쥐어짜며 무슨 백년근 삼을 본 심마니처럼 심봤다!를 연신 외쳐도, 양호열은 카테고리 판정 자체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 최종적으로 '시선'을 대상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영상으로 샘플과 본품 구성, 특전으로 '사랑하는 시선'이 전환될 때마다 최종 구매자가 설정하는 이름을 부르며 페이드아웃되는 커스텀 옵션을 추가하는 것으로 정해지고,

수백 개의 모션 센서와 카메라 렌즈 밑에서 백호를 바라봤던 기억들을 끄집어내고, 곱씹고, 순간 느꼈던 감정들을 설레임과 뿌듯함과 행복 등등으로 이름붙이는 것은,    

어제처럼 생생해서 사랑스럽고, 

반복해서 꿔야하는 악몽처럼 괴로워서, 

이 모든 게 끝날 때쯤, 정교하게 재구성된 레플리카 대신, 이 기억이 뿌리째 완전히 뽑혀나가기를, 

하다못해 감각 기관 몇 개를 영 못쓰게 되어 두번 다시 이런 마음을 느끼지 않아도 되기를, 빌었다. 

공개된 티저의 조회수가 하루만에 몇백만 뷰를 찍었다더라...배포된 샘플이 오픈 몇초컷으로 완판됐다더라...   백년에 한번 볼까말까한 '세기의 사랑'이라고 커뮤니티에서 난리라더라...세계 유수의 콧대높은 옥션하우스들이 경매 주관 신청을 넣었다더라...하는 업데이트들을 남 일처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양호열은 강백호의 국내 새 소속팀 연고지와 훈련시설에서 가장 먼 도시의 부동산 매물들을 부지런히 검색했다. 


테이블 위에 눌린 양호열의 뺨 아래로, 잠겨서 익사할 수 있을 것 같은 크기의 눈물 웅덩이가 고이는 것을 바라보던 강백호는 무릎을 굽히고 쭈그려앉아, 유리와 양호열의 뺨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서 고개를 돌려주려 했다. 어깨가 빠질 것 같이 강한 밀쳐냄은 이번에는 예상했기 때문에 꿈쩍도 안 하고 버틸 수 있었다. 소매를 길게 빼내어 끊임없이 웅덩이에 보충되는 눈물 줄기를 닦아주려 하자, 이번에는 반동에 팔꿈치가 나갈 것 같은 거센 뿌리침이 반격한다. 몇번 똑같은 패턴으로 주고받은 공방전의 승리는 (구)스포츠맨의 차지였다.

웅덩이를 쫙 빨아들인 소매를 둥둥 어깨까지 걷어붙인 강백호는 숨죽은 시금치처럼 테이블 유리에 얼굴을 납작하게 처박은 양호열 옆 마루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호열아. 있잖아. 

<사랑하는 시선> 설명서에, [20년어치 검사 필증! 품질보증서!] 라는 게 붙어 있었그등."

테이블 유리에 뭉개진 입가에서 불분명한 웅얼거림이 들려왔는데 언뜻 듣기로는 '므츤 슴므니가...' 뭐 비슷한 소리 같다. 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  

"사려는 사람이 엄청 많고 인기도 엄청 높아서 경매로만 살 수 있고 입찰 시작가도 ~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안내문 나왔을 때도 난 솔직히 잘 몰랐그등.

<사랑하는 시선>은 <이야기 사고팔기> 역사상에도 흔치않은 불후의 명작이라고들 난리였잖아? 근데 듣다 보니까 궁금한거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홀딱 반한 사랑 이야기의 주인은, 왜 그 이야기를 팔려고 내놨을까 하고. 

그래서 잘 아는 사람들한테 물어봤그등? 이유에 대한 의견이 다들 제각각이더라. 근데 만만..아니, 누가 그랬어.

어떤 이유에서든 한 마음을 끝내고 나니, 그 시간이 너무 아프고 후회되서 없었던 일로 하고싶은 거 아니냐고.

...나 그래서 너한테 물어보고 싶었어. 

호열아. 나 사랑한 거, 후회하냐?

없었던 일로 하고 싶어?"

한참동안 죽어있던 시금치는 느리게, 아주 느리게 처마에 걸은 조기처럼 고개를 들었고, 곧이어 불어터진 미역이 안 다듬은 수세미같이 꺼칠한 목소리로 답했다. 

"...너 사랑한 걸 후회하진 않아, 강백호.  

다만 더 진작 그만두지 못한 건 후회해."

어깨를 구부정하게 말고 양호열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강백호는 뒷머리를 북북 긁고,

"음, 그르냐."

하고 입맛을 쩝 다시더니, 벌떡 일어나 휘적휘적 자기가 쓰는 방에 들어갔다가, 양손에 까만 뭔가를 들고 금방 다시 나왔다. 

부시럭 부시럭, 달칵, 드르륵, 탁, 한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다른 손에 든 것에 끼우는 소리가 나고, 

"자,"하고 불쑥 내밀어진 손바닥 위에 놓여있는 것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오래 전 방식의 재생매체다.

"...이게 뭔데." 

"뭐긴 뭐야, 천재 강백호의 이야기 샘플이지. 들어봐라."


- xx, 지금 뭐하자는 거야.

일찍부터 박태경의 입이 몰고온 태풍에 휩쓸리고 ...네가 왜 거기에서 나와..? 처럼 강백호 서랍에서 맞닥뜨린 3년 전 흑역사의 우중충한 그림자에 썩어들어가고 자신이 한 것은 아닌 게 분명한 제작 발주서의 충격파에 두들겨맞은 양호열은 안 그래도 간당간당한 정신줄에, 설상가상으로 깨워도 깨워도 안 일어나는 강백호 때문에 식은 걸 제가 처리하느라 밀어넣은 열 개의 달걀 프라이 말고는 하루종일 쫄쫄 굶은 위장, 격렬한 분루로 인한 탈수와 퉁퉁 부은 눈, 쉬어버린 성대, 급 치솟은 혈압으로 꽉 막힌 뒷목 등, 차례차례 쇄도하는 몸의 항의에 맞닥뜨리자, 불현듯 17:2로 둘러싸였던 혈기왕성한 청소년기의 '와볼테면 와봐,'하는 기백이 되살아나는 기분을 맛봤다.  

사람 놀리냐? 내 20년 짝사랑의 구질구질한 기록 전문을 받아놓고, 지는 까리하게 (농구인지)(아니, 설마 직전 환상의 커플이라고 칭송받던 S인가)(...아니 가불기가 있잖아. 채소연이라고...) <최고의 사랑> 카테고리로 접수해서 당당하게 적합 판정받은 샘플을 나보고 들어보라고? 하라면 내가 못할 줄 알고? (xx 나 양호열이야!!!!!!!!!!)

오냐 어디 한번 들어보자. 거창하게도 <최고의 사랑>이라니 얼마나 대단한지 누가 살지 어디 한번 봐보자고. 

탁, 지직....

야호~! 호열아!!!!

 탁,.

...이게 끝?

손톱 끝까지 두툼한 강백호의 손이 옆에서 불쑥 튀어나오더니, 카세트 플레이어의 되감기 버튼을 눌러서 드르르륵 감은 뒤 다시 재생 버튼을 탁, 누른다. 

야호~! 호열아!!!!

 드르륵, 탁. 

야호~! 호열아!!!!

 드르륵, 탁. 

야호~! 호열아!!!!

 드르륵, 탁. 

- ...뭔데 이거??????????

 


"섭섭아.....대체 뭐가 문제일까아아아.....킁..."

강백호는 2m의 장신에 걸맞는 기럭지를 구기듯 말고 자신보다 머리 3개쯤 작은 남자의 어깨에 매달려 훌쩍훌쩍 눈물을 짰다. 

"난 우리 엄청 잘 맞는다고...이번에야말로! 라고 생각했는데...우흑, 헝....쉴라가, 내 사랑은 자기가 아닌 것 같다고(쿨쩍), 더 시간낭비하지 말고 그 사랑 찾아 가래....후앵...."

"...또?"

덩치는 더 좋은 주제에 절대 강백호의 애착인형 역할을 거들지 않는 점이 조금 얄미운 (구)산왕고 2학년 에이스, (현) 한 세트로 묶여서 '아시아 출신 NBA사천왕' 뭐시기로 불리는 정우성이 반만 채운 맥주를 홀짝거리다가 무심코 튀긴 불똥이 안 그래도 꿀렁꿀렁 차오른 슬픔을 폭발시켰는지, 강백호는 오랜만에 듣는 "후누우우우!!!!" 하는 괴성을 섞어가며 꺼이꺼이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쯧쯧, 혀를 찬 송태섭은 나이가 지긋하고 노련한 바텐더에게 강백호 앞의 잔을 치워달라고 눈짓으로 사인을 보내고, 시나몬 스틱과 얼음을 잔뜩 넣은 무알콜 진저에일을 강백호 앞으로 밀어주었다. 앞선 4번의 이별 후에도, 만취하고 나면 꼭 이걸 마시고 싶다고 훌찌럭훌찌럭 울어서 이젠 아예 미리 주문해두는 게 편했다.  

"...강백호야. 지금은 몸...아니 마음이 좀 힘들지라도...예전에도 그랬듯이 언젠가 괜찮아질거다. 시간이 해결해준다고 하잖아?

- 술마셨는데 여기서 더 울면 너 내일 머리 깨진다, 임마."

"후누우우! 섭섭아~!!!"

그리고 송태섭이 경고한대로, 스스로 불러온 숙취에 짓눌려, 강백호는 바다 밖으로 끌어올려진 생선처럼 등을 구부리고 신음했다.  

"누우우.....머리 아파...."

끙끙 울부짖어봤자 여기에는 수정과도 쌍화차도 식혜도 없다. 아쉬운대로 꿀물을 타서 조금씩 마시며 강백호는 두통에 특효약인 양호열 특제 수정과 맛을 떠올려 보려 애를 썼다. 섭섭이가 챙겨준 진저에일은 시나몬 스틱을 꽂아서 그나마 비슷하긴 하지만, 여러 번 걸러 곶감과 달지 않게 조린 견과류로 맛을 내 맵쌀함과 달콤함이 기가 막힌 균형을 이루는 호열의 수정과에 댈 바는 아니었다. 그러고보니 어제도 섭섭이에게 계속, 이거 아냐...호열이 수정과 먹구 싶다....하고 칭얼댔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그런데 강백호야. ...정우성 저 녀석이 좀 얄밉게 말하긴 했지만, 쉴라 전의 애인이랑 전전 애인도 그 비스무리한 말 했다고 하지않았냐."

"뭐였더라...<당신은 나를 이미 정해둔 답에 끼워맞추려 하는 것 뿐이야!>...랬었나." 

"전전전 애인은 아마...<나한테 자꾸 다른 사람을 겹쳐보고 있는 것 같아.>"

아니라고, 그런 생각 한 적 없다고, 열심히 항변하면, 어떨 때는 어이없다는 '그래, 그렇다치자,'하는 눈빛이, 어떨 때는 '...너 정말 그렇게는 생각 안 해봤구나.'라는, 약간 측은하게 보는 시선이 돌아왔다. 매사에 거침없던 강백호도 이렇게까지 여러 번 비슷한 말을 들으면 '...정말 그런가(근데 뭐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몇 번의 이별을 겪든, 몇 번의 실연을 겪든, 기죽지 않고 다음 사랑에 또 몸을 던지는 게 강백호인데. 평소보다 서둘러 잔을 비워봤지만, 취기로도 유독 가라앉는 기분은 끌어올려지지 않았다.  

울적해진 강백호는 눈을 감고 등을 둥글게 말고 웅크렸다.  

차여서 울고 있으면 사방에서 둘러싸고 배꼽 빠지게 웃어대고, 정신사납게 색종이를 뿌리고 나팔불며 놀림당해서 어느새 우울한 것도 까먹던 시절이 있었는데. 머뭇거리며 돌아보면, 똑바로 눈을 마주보며 멋드러진 또다른 질문으로 그 어떤 확답보다 커다란 확신을 안겨주는 사람도 있었고. 머리 아플 때 마시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싹 내려가는 수정과랑, 서두르다간 입 안 홀랑 까지는 뜨끈뜨끈한 메밀전병, 그리고...

"...돌아갈래." 

우연이지만 때마침 재계약 논의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재계약의 의사가 없음을 알리자, 소문을 입수한 국내 구단들이 열렬히 접촉해왔다. 조건이야 어떻든, 농구를 계속 할 수 있으면 큰 상관은 없다. 언제나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언제 끝난다 해도 미련없었다. 농구는 그렇게 단순하고 명확했지만, 밑도 끝도 없이 '이게 아닌데...,'라는 막연한 불안을 안겨주는 감각은 강백호를 초조하게 했다.

"그거 뭐시냐...그거 거시기 해보는 건 어때? <나도 몰랐던 내 잠재의식 속 취향은?> 성향 테스트 같은 거."

"누? ...그게 뭔데, 만만군?"

"아니 넌 MBTI도 한번 안 해봤냐...심심풀이로 하는 무료 테스트들도 많은데. 잠깐 기다려봐라,"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낸 만만군이 이런저런 앱을 쓱 뿅 눌러대자 알록달록한 팝업창들이 연달아 뜬다. 

"설문조사 형태로 하는 것도 있고 매쉬업이나 토너먼트처럼 A vs B 하면 올라가는 것도 있고...아니면 아예 연애 컨설턴트가 붙어서 심층 1:1분석해주는 데도 있고..." 

설문조사? 그거 도를 아십니까 에서 사람 낚는 수업이라고 호열이가 절대 답해주지 말랬는데...? 

...만만군 암만 우리가 농구선수래도 사랑조차 토너먼트로 깨부수고 올라가야 하는거야...?

과부하 걸린 강백호의 입이 이 사태의 발단이 된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아닌 것 같아...'라는 문장을 내뱉기 직전, 태블릿 화면 상단에 옅은 푸른색 알림창이 뿅! 떴다가 스르륵 사라진 것과, 

(광고) 248 <오해/방황/후회> 카테고리 신상 알림! 지금 바로 확인해보세요!  

정대만이 "어!!!!" 하고 돌고래 같은 비명을 지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미친, 미친...! 와씨, 하필 지금 신상 뜨냐, 앱캐시 충전도 안 해놨는데, 아오!"

 "뭐, 뭐야? 뭔데?, 만만군?"

"아, 와, 제발! 아! 미친! 3초컷인데 벌써 품절 떴어!"

으아악!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절규하던 정대만이 잠시 후 해탈한 얼굴로 보여준 <248>이라는 숫자로 이뤄진 이름의 앱은 요즘 핫하다는 <이야기 사고팔기> 장터 중 하나라고 했다. 

"...야 생각해보니 MBTI나 사주팔자나 타로점이나 4*타입이나 248이나 다를 것도 없잖아? 차피 이렇게 된 거, 248 사랑 카테고리 정주행이 더 나을 수도 있어. 248 사랑 카테고리 100선 비급 책갈피만 있으면 네가 바로 연애의 마왕이고 남산의 장문인이다. 내가 베오베 리스트 만들어둔 것도 있으니 공유해줄게."

"...누, 눗? 어, 어어? 땡큐..."


비록 정대만이 방언처럼 읊조린 각종 자아성찰 수단 중 반도 못 알아들었지만, 결론적으로 강백호는 정대만이 열어준 지름길을 통해 행복한 개미지옥이라는 별명이 있는 <이야기 사고팔기 역대 베스트 오브 베스트> 리스트에 숨참을 새도 없이 박치기 입문을 했다.

준비되지 않은 속성 개안을 당한 셈이지만 원체 벼락치기에 재능있는 강백호는 단기간에 초고속으로 yay or nay radar라는 것을 각성해냈다. 이젠 카테고리 + 키워드 두어 개만 눈으로 찍먹해도 맛의 유무를 때려맞추는 경지까지 압축성장한 강백호의 최애픽은 <순애>, <우정에서사랑으로>, <영원한사랑>, <짝패>, <운명> 등등. 

키워드는 호불호도 있고 때로는 키워드를 보고 상상했던 이야기와 느낌이 조금 달라서 실망할 때도 있지만, 몇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순애> 카테고리 최상단 고정 노출 샘플이라면 실패는 없다! 라는 결론에 도달한 강백호는 틈만 나면 두근두근 맛깔난 새 이야기를 기대하며 상시로 띄워둔 <순애>카테고리를 새로고침했다. 그리고 마침내, 썩 친숙해진 용어 중 머리로만 대충 알아들었던 덕통사고라는 것의 예시로 대대손손 무수히 인용될 전설의 티저를 영접하고야 만 것이다.

머리가 아닌 가슴이 가장 먼저 부르짖었다, 

이거다! 순도 100%, 확신의 취향직격 덕통사고! 

 

가로수길의 나무 둥치에, 귀와 뺨, 목과 비스듬히 오른쪽 몸선이 보이는 남자가 기대어 있다. 오른손은 엄지손가락만 주머니에 걸친 채, 다른 쪽 손에는 눈높이로 작은 문고본을 들고 있다. 소리는 없지만, 팔랑팔랑 화사한 벚꽃잎이 간혹 소용돌이칠 때마다, '사아아...'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힌다. '나'의 시점에서 정면으로 다가갈수록, 동그란 광대 주변에 돋은 보송한 솜털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진다. 이윽고 '나'를 알아챈 듯, 오른쪽 손은 주머니에서 빠져나오고, 온몸이 완전히 빙글 돌아서며, 오목한 뺨의 곡선이 둥글게 올라오고, 처진 눈은 한껏 좁아지는 반면, 입술은 커다란 미소와 함께,...

<네가 부를, 나의 이름은?>    

"...

<백호야>...

...맞지?" 

- ...그치? 

호열아.


"너의 목소리가 들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 하는데도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 해도 

너의 목소리가 들려 너의 목소리가 들려."

- 델리스파이스, <챠우챠우 -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 보려 해도 너의 목소리가 들려>

"<사랑하는 시선> 티저 뜬 거 보고 나서 바로 용병? 도우미? 까지 여럿 구했는데도 샘플은 못 샀어. 

3초가 뭐냐, 0.01초? 만에 닫힌 것 같더라. 

근데, 뭐...샘플, 나 말고 다른 사람이 갖는 게 싫어서 사려던 거지, 

티저만 보고도 이미 본품 살 마음 먹고 있었그등.

...근데 막상 입찰 준비하고 있으니까, 섭섭...아니 이 사람 저 사람이, 그러는 거야. 

'양호열이, 네가 볼 걸 알고 장터에 이야기를 내놓은 건 아닐텐데, 강백호 네가 그걸 사는 건 반칙 아니냐,'고.

그 말 듣는데, 바로 '맞다,'고 느꼈어. 섭섭이 말은 대충 잘 맞그등. 

근데 호열아.

네가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고,

화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고, 

후회하거나 없던 일로 하고싶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다 들었는데. 

그래도, 

네가 20년 동안 나 사랑해준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가져가는 거, 

'이게 제일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고 너무너무 싫었어."

팔꿈치 아래부터 두툼한 손톱 끝까지 발갛게 물들곤 하는 강백호의 손, 뭐든지 쥐면 장난감같이 보이게 하는 손이 워크맨째로 양호열의 손을 감싸서 천천히 오므렸다. 

"호열아, 248에서 사랑 이야기 샘플 만들어달라고 하면 검사해서 이거 사랑 맞다 아니다 땅땅 도장 찍어주잖냐. ...물론 나는 천재니까 그런 거 없어도 다 알지만.

근데 248에서, 이몸의 샘플은 <최고의 사랑>이 맞대. 

혹시 아니랄까봐 10대 제작소에서 다 하나씩 만들어봤그등. 근데 10군데 다 100% 맞댄다.

...어때...?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이야기일 거 같지 않냐?"

고개를 들었을 때 기다리고 있던 시선이 바로 따라온다. 2미터를 찍은 백호가 마루바닥에 앉아서도 어깨를 둥글게 접어야 소파에 앉은 자신과 얼추 맞을 앉은키, 나란히 걷는다면 절대로 맞을 수 없는 낙차인데 이뤄진 눈맞춤. 

침묵이 길어져도 부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우리가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 전우, 가족이니까, 그리고...

"...백호야. 양심적으로. 팔기에는 지금 이 샘플 너무 짧다는 생각은 안 드냐?"

"누, 눗??? 시험삼아 하나만 녹음해봐서 그래! 당장 가서 더 만들 수 있다!"

"...오? 물량 공세로 내 주머니도 털고싶냐? 설욕전 뭐 그런 거야?

벼룩의 간을 내먹어라, 셀레브리티의 셀레브리티 씨."

"이익, 야!"

"- 야~?"

"야..아앙....호열아....아니이...그게 아니구...

그..그럼...나도 <사랑하는 시선>만큼 분량 만들어오면...사줄거냐?"

푸핫, 웃음이 터졌다. 얼굴은 터진 두부, 눈탱이는 밤탱이, 입술은 흡사 볶음고추장, 얼룩덜룩 콩자반같은 손끝을 말아쥔 주먹 안에 저를 보면 활짝 피어나는 사랑의 소리를 받아들고, 양호열은 마음껏 웃었다. 배꼽이 빠져라, 눈물이 나고 허리가 접히도록 웃어젖혔다. 

 

"- 아니, 그래도 안 사."

"누우웃~!!! 왜에!!!"

- 왜긴 왜야. 

똑바로 맞춘 시선에 사랑을 넘치도록 담아, 웃음으로 활짝 벌어진 하나의 입술은 너의 입술 모양 위로 겹쳐진다.

"- 너 어차피 그 음성파일 매일 무료 배포하잖아?"

화르륵 불타오른 토마토가 된 강백호가 누,..누..눗...눗 하고 말을 거세게 더듬다가 빽 소리를 질렀다.

"와! 양호열이! 완전! 너 완전!"

 "뭐. 나 뭐."

"자린고비! 노랭이! 예전에는 아이스든 포*리든 다 사줬으면서! 짠돌이! 스크루지! 대머리!"

"뭐 임마?"


"단 한 번의 판매로 248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의 경매최고가 등극! 

부동의 1위를 굳건히 지키는 불후의 스테디셀러! 

이 이야기의 주인인 사랑하는 시선과, 

사랑하는 목소리는, 

매일매일 서로를 바라보고 부르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지 않았을까나?"

- 양떤남자의 행복을 비는 월하노인 삼신할미, <THE H(APP)Y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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