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Love Rockets

2023.03.04

Bass Guitar 

- 저 친구, 저 선수를 잘 봐봐.

네가 꼭 만나야 하는 선배라고 소년의 아버지가 열을 올렸더랬다. 13번을 단 그 선수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돋보이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강호라는 명성답게 3학년 포워드들과 센터의 움직임이 훨씬 더 굉장했다. 아버지가 난리를 치는 것도, 이 친구를 만나면 크게 성장할 수 있을 거라며 스카우트가 장담하던 것도 그리 와닿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의 환성 때문에 눈치챈 점이지만 누가 득점을 하든 그 뒤로 모습이 늘 보이긴 했다. 그건 확실히 신기했다.

경기 내내 꾹 닫혀 있던 두꺼운 입술과 처진 눈썹 때문인지 조금 무심해 보이던 인상. 그 얼굴이 체육관 안에 있었다. 소년의 한 학년 위 선배가 될 사람. 역시 키는 좀 작아 보였지만 비디오에서 본 것보다 체격은 조금 더 탄탄해 보였다. 그 13번은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 있는 조금 더 작은 쪽은 전혀 본 기억이 없는 걸 보니, 주요 경기에는 안 나간 모양이다. 농구를 하기에는 키가 좀 작지 않나? 싶었지만, 그래도 움직임에서는 상당한 안정감이 느껴졌다.

애초에 소년은 코트에 서지 않은 선수에게는 그리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도 13번뿐 아니라 옆사람까지 살펴본 건 체육관에서 조금 의아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던 탓이었다. 작은 쪽이 13번의 등을 퍽퍽 소리가 나게 두들겨 패고 있던 것이다.

- 악, 으악, 아프다베시!

- 아프긴 하냐? 어? 아프긴 해?

- 큭, 학교폭력 반대베시!

- 감독님이 일을 시켰으면! 어? 미리미리 공유를 하라고! 했어, 안 했어!

- 베시! 베시!!

......베시는 뭐지? 잠깐 튀어 오른 궁금증이 곧 둔탁한 손바닥 소리와 함께 날아간다.

이 학교에서 1학년이 심지어 인터하이부터 주전으로 뛰는 건 진짜 드문 일이라던데, 심지어 1학년이면서 15번도 아닌 13번을 받은 선수라던데. 그럼 엄청나게 대단하고 농구부 전체가 주목하는 사람 아닌가? 그런 사람은 원래 좀, 다른 취급을 받는 거 아니야? 존경받는다든가 다들 우러러본다든가. 그게 아니면 좀 거리를 둔다든가 하는, 그러니까...... 미움받는다든가.

그런데 체육관 안에 있는 두 사람은 그냥... 사람 같았다. 말하자면 친구 같은 거. 아담한 쪽의 야문 주먹은 둘 사이의 어떤 관계도 무너뜨리지 않는 듯 보였다. 툴툴대면서도 얌전히 얻어맞는 13번의 입가에는 분노나 체념이 아닌 머쓱한 미소가 있었다. 소년의 심장이 문득 그 사이에서 농구와 더불어 공의 형태가 아닌 것을 발견했다. 소년의 일상에서는 아주 오랫동안 당연한 사실 하나가 흐릿하니 가려져 있었더랬다. 다름 아닌 체육관은 본디 실력 차나 등 번호 따위가 형체 없는 것들을 망가뜨려서는 안 되는 장소라는 사실 말이다. 바로 여기처럼. 가슴속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반짝 피어올랐다.

그때 어깨에 뭔가가 툭 부딪쳤다.

Drum

- 어이쿠, 죄송합니다.

묵직한 목소리. 돌아보니 큰 상자를 여러 개 안아든 사람이 있었다. 상자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소년도 작은 키는 아니다. 중학교 졸업 학년이 되었을 즈음에는 주변에서 소년보다 큰 사람은 몇 없었다. 그러나 뒤에서 부딪친 사람은 눈높이가 못해도 10센티미터는 높았다. 체격도 상당히 컸고. 그것만 봐도 짐작할 수는 있었지만, 체육복 바지에 하얀 티셔츠 차림인 걸 보니 역시 농구부인 게 분명했다. 상자 사이로 티셔츠에 학교 이름을 이루는 스펠링 한두 개가 보였다.

안아든 상자들 탓에 상대는 소년을 제대로 보지 못한 모양이다. 상자 너머로 고개를 몇 번 내밀려 들긴 했지만 시야 확보에 실패했는지, 결국 상자들을 한번 들썩 추슬렀을 뿐이다. 그 순간 상자 사이로 상대의 얼굴이 잠깐 비쳤다. 슬쩍 보인 길쭉한 얼굴은 석상처럼 선이 굵직굵직했고, 짙은 눈썹과 큼지막한 코가 강한 인상을 만들었다. 역시 비디오에서 본 기억은 없었다.

- 앗, 죄송합니다.

자신이 체육관으로 통하는 길을 막았다는 걸 알아채고 소년이 물러났다. 어, 교복 아니네. 앳된 목소리에 상자 뒤 말투가 금세 편하게 풀어졌다. 자리를 조금 옮기자 상대의 시야에 소년의 바지가 들어온 모양이다.

- 그, 중학생이에요. 견학하고, 싶어서......

- 그렇구나? 아팠지, 미안해. 짐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여서. 내가 세게 쳤어?

- 아, 아니요. 괜찮아요.

소년이 아는 어떤 타격에 비하면 방금 상자에 부딪친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그러나 석상 쪽은 소년이 자기보다 어리단 걸 알고 나서도 두세 번을 더 사과했다. 살짝만 몸을 움츠리면 그림자에 소년이 전부 가려질 정도의 체격이건만 무섭게는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저 다정한 성품 탓이리라.

- 근데 지금은 견학 안 돼. 내일이 우리 학교 입학식이거든. 며칠 뒤에 와라. 아직 추우니까 조심히 가고.

아까 상자로 친 거 미안. 굳이 한 번 더 사과를 건네고 석상은 성큼성큼 체육관 안으로 들어갔다. 좀 전의 콤비가 곧 다시 시끄러워졌다.

- 늦다베시.

- 거 물건 만들어서 오시나.

- 이 자식들이, 너희가 나만 가래서 혼자 다 들고 왔잖아!

- 그러게 누가 계속 지래?

- 민첩한 가위바위보 돼라베시.

두 사람과 편히 말하는 걸 보면 이번에도 한 학년 위 선배인 모양이다. 비디오에서 봤던 센터는 확실히 아니었지만. 하긴 이 학교에서는 1학년이 뛰는 일은 교체선수로도 드물다고 했으니까. 그래도 저런 선배가 있다면 여기는 역시 좀 다르지 않을까, 여기라면 공은 비틀림 없이 공으로만 튀어오를 수 있지 않을까. 소년의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가 덜컥 꿈을 꾸고 만다.

내일은 입학식, 농구부 입부는 그보다 며칠 뒤. 얼마 후면 이 체육관에 정식으로 들어오게 된다. 묘하게 술렁거리는 맘을 안고서, 소년은 종종걸음으로 체육관에서 멀어졌다.

Rhythm Guitar

아예 초행길은 아니었지만, 고등학교는 소년이 다니던 중학교보다 훨씬 더 넓었다. 교문에서 헤어진 부모님은 입학식을 진행한다는 건물에 먼저 가 있을 터였다. 식 시작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체육관을 한번 보고 오겠다는 소년의 고집을 두 분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 하지만 입학식이 있는 날이라서일까, 체육관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소년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돌아가려 몸을 돌렸는데 문득 방향이 헷갈렸다. 학교 건물이 복잡하게 연결된 탓에 체육관 뒤쪽으로는 아예 길이 막혀 있었다. 헤매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을 더 뺏겨, 어느새 식 시작까지 15분도 채 남지 않은 시각이 되었다. 초조해졌다. 입학식에 갈 사람들은 이미 거기 가 있는지 체육관 근처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빠랑 같이 오자고 할걸. 소년이 당황한 나머지 우뚝 멈춰 섰다. 그때 뒤에서 깨끗한 목소리가 들렸다. 

- 저기, 오늘은 이쪽에 오면 안 되는데요.

소년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이다. 약간 두드러진 광대뼈와 반듯한 눈썹이 눈에 띄었다. 무표정한 얼굴이 조금 냉정해 보여서, 반사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곧 시작해버릴 입학식, 무서워 보이는 선배, 닫힌 체육관 문. 갑작스레 서러움이 폭발하듯 솟아올라 울고 싶어졌을 때였다.

소년 쪽을 빤히 쳐다보던 학생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마치 뭘 깨닫기라도 한 듯 눈이 동그래지더니 미소를 지은 것이다.

- 너, 그 신입생이구나.

입을 다물고 있을 때는 차가워 보이더니, 눈이 가늘어지고 입술이 휘자 느낌이 확 달라졌다. 이쪽을 쳐다보는 눈빛에도 반가움이 섞여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주변에 다른 사람이 하나도 없기도 했지만, 타인에게 쉬이 다가가지 못하는 소년이 초면인 상대에게 덜컥 매달린 건 그 탓이었는지 모른다.

- 저, 오늘 입학하는데요, 잠깐 체육관을, 그런데, 저리로 돌아가니까 막혀서, 어느 쪽인지, 시간 다 됐는데, 어떡해야......

초조하고 급한 마음에 무작정 주워섬기다 보니 말끝이 축축해진다. 애처럼 눈물이 터질 것 같아 황급히 입을 다무는데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상대가 가볍게 웃은 것이다. 달래는 듯한 다정한 미소가 소년을 조금 진정시켰다. 교복 차림을 한 학생은 팔을 쭉 뻗어 왼쪽을 가리켰다. 정신 없는 와중에도 그 학생이 팔을 뻗는 움직임이 무척 깔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여기 빨간 테두리 건물 모퉁이를 돈 다음에 그대로 쭉 가면 돼, 그럼 현수막이 보일 거야. 그 건물로 들어가. 얼른 뛰면 안 늦을 수 있겠다.

감사합니다! 비명처럼 감사 인사를 던지고 내달리려는 소년을 목소리가 불러세웠다. 저기, 잠깐만! 엉거주춤 돌아서자, 상대는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 ......잘 부탁한다.

이유 모를 인사에 응해 일단 고개를 꾸벅 숙이긴 했지만. 마음이 급한 소년은 더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입학식장으로 내달렸다.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찾아 아버지가 건물 앞까지 나와 서성이고 있었다. 입학식 시작을 겨우 2분쯤 남겨두고서야 소년은 자기 몫으로 준비된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그 선배도 키가 크고 머리를 밀었으니 농구부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건 입학식이 시작되고 나서도 한참 후였다.

Lead Guitar

키 덕에 제일 뒷자리를 받은 소년은 수업에는 금세 흥미를 잃었다. 지루하기도 했거니와, 애초에 농구 말고는 소년의 관심을 끄는 것도 없는 까닭이다. 따분함에 눈을 여기저기 돌리고 있노라니 창밖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위 학년 중 어느 반이 체육 시간인지, 축구를 하는 모양이었다.

십 대 남학생들이니 체육 시간에 무리를 짓다 보면 과격해질 수밖에 없다. 모르고 보면 거의 패싸움처럼도 보인다. 그런 식으로 몰려다니는 활동을 소년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좋은 기억도 없고. 그러나 창 너머 운동장에서는 한 명도 빠짐 없이 소란스럽게 웃고 있었다. 모두가 즐거워 보였다.

그중에서도 유달리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뿐인데도 저 중 누가 무리의 중심으로 보이느냐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꼽게 될 사람. 자연스레 손짓 한 번으로 모두를 모으고 호탕한 웃음소리로 주변의 호응을 끌어낸다. 존재감은 물론이거니와 덩치도 압도적이었다. 위에서 내려다봐도 키가 상당히 커 보인다. 키뿐 아니라 근육도 굉장했다. 분명 열심히 단련한 몸이다. 파르라니 바짝 깎은 머리에 큼직큼직한 외모가 더해지니 분위기가 제법 위압적이다. 저 정도 키에 체격인데도 비디오에서 본 적이 없다는 건 농구부는 아닌 걸까. 아쉽다, 속으로 무심코 중얼거리던 그때 상대가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 오, 너, 신입생!

커다란 몸에 비해서는 높고 카랑카랑하게 울리는 목소리. 약간 험상궂은가 싶던 얼굴은 환한 웃음이 번지자 의외로 친근감 있는 느낌으로 변했다.

- 수업 중이냐? 열심히 들어라!

덩치는 활짝 웃으면서 1학년 교실을 향해 팔을 쭉 뻗으며 검지로 소년을 가리켰다. 득점의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제스처였지만, 그런 교유는 소년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오히려 눈에 띄었다는 두려움이 먼저 덮쳐왔다. 초반부터 선배들의 관심을 끌어서 좋을 일은 없다. 소년의 경험으로는 더더욱 그랬다. 덩치 큰 위 학년의 고함소리에 이쪽을 눈치챈 선생님이 호통을 치기도 해서, 소년은 황급히 창문에서 떨어졌다. 그날 그 손짓에 커다란 반가움이 담겨 있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되는 건 몇 달 뒤의 일이다.

교단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큰 키를 살짝 움츠린다. 내일은 드디어 농구부 입부식이 있는 날이다. 어쩔 수 없는 설렘에 소년의 가슴이 들썩거렸다.

and. Vocal

운동을 하는 남자애들답지 않게 단정하고 매끈한 이목구비. 위쪽에 비해 옆뒷머리를 짧게 쳐서 투블록처럼 보이는 머리를 보며, 쟤는 아무래도 제법 고집이 있겠다고 다들 수군거렸다. 고집 부분에서는 맞는 말이었지만, 머리를 그렇게 친 이유가 멋을 부리려는 게 아니었음은 꽤 나중에 알게 된 일이다. 신입생이라 처음에는 다 비슷하게 깎아줬다는데, 좀 뛰어보니 짧은 머리가 생각보다 효율적이더라고, 그래서 다시 가서 수건으로 자주 닦게 되는 아래쪽 머리를 더 짧게 쳐달라고 했다고. 하지만 그날에는 아무도 그 사실은 알지 못했다.

고집스러운 첫인상과 달리 알고 보니 농구 말고는 도통 서툴기만 한, 하지만 농구에 대해서만은 그 누구보다 진지한, 그리고 농구부의 모두가 바로 그 이유로 무척이나 아끼게 될, 그러나 그런 그 애도 아직은 첫인상이 전부였던 날. 당연하지만 다들 관심을 기울여 지켜보고 있었다. 저 신입생이 누군지는 여기 선 사람 전부가 알고 있었으니까.

도진우 감독 앞으로 농구부에 새로 입부한 1학년들이 나란히 섰다.

감독과 3학년 매니저 뒤로는 2, 3학년이 열을 맞춰 서 있었다. 첫 줄 한가운데에 선 사람은 지난 겨울 주장을 이어받은 3학년이다. 이미 1년 가까이 주전으로 뛴 이명헌은 한가운데 선 주장 바로 옆자리였고, 신현철의 자리는 그 줄 제일 가장자리였다. 뒷줄에는 정성구와 최동오, 김낙수가 차례로 자리 잡았다.

신입생들의 자기소개가 이어진다. 이어 도 감독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렸다.

- 다음!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아닌 척하고는 있어도 분명 바짝 굳어서는, 불안과 긴장에 더해 아직은 이유 모를 미약한 경계를 몸에 두른 채로, 그런 주제에 근본은 제법 건방진 시선을 선배들 쪽으로 던지면서, 마침내 그 신입생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 정우성입니다. 키는 181cm. 포지션은, 다 잘할 수 있습니다. 

곧 여기저기서 작게 웃음과 탄성과 수군거림이 터졌다. 도진우 감독은 슬쩍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반걸음 뒤에서, 곧 산왕을 떠받치게 될 또 다른 인재들 역시 기대감에 숨을 들이켜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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