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대협백호 카페 글엽서 협력 👟

그 농구화는 7번째 선물이었다.

[안녕, 강백호.]

병실 입구에 서서 그리 인사하던 윤대협을 기억한다. 놀라는 자신을 보고 생긋 웃던 윤대협이 홀로 병실에 찾아온 첫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유달리 흐려 종일 어두운 하늘에 한번도 해를 못 본 날이었다. 그날따라 등이 묘하게 더 아팠고 병실은 더 한가했다. 학교 마치고 종종 오는 군단 애들이 올 법한 시간도 한참 남아있을 때였다. 윤대협은 그럴 때 왔다. 올 사람들 한번씩 다 오고 나서 슬슬 사람들 발길이 뜸해질 즈음에, 다들 한창 학교에 있을 시간에.

[뭐냐,]

[뭐긴, 병문안이지.]

그 하얗고 잘난 얼굴로 뻔뻔하게 답하며 웃는데다 대고 뭐랬더라, 병문안 오면서 빈손으로 오냐고 구박을 했던 것 같다. 그러자 미안하다고 말하며 눈썹이 쳐지는데 위로 올라간 입꼬리는 그대로던 얼굴이 하나도 안 웃기고 잘생기기만 해서 갑자기 할 말을 잊었고.

[미안, 진짜 미안, 내가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어. 미안해.]

그리고 윤대협은 그렇게 답했다. 너무나 순순하게, 또 다정하게. 그래서 이상하게 민망하고 부끄러워졌다. 저도 모르게 우물쭈물대다가 그럼 다음엔 꼭 챙겨오라고 소리나 질렀었다. 하지만 윤대협이 진짜로 다시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로 그랬다. 그러나 일주일 후 예고없이 찾아온 윤대협의 손에는 만화책이 들려져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다른 애들은 학교에서 수업 듣고 있을 시간이었다.

[자, 여기 병문안 선물.]

[…오?]

신기하게도 딱 자신이 보고 싶었던, 농구 하기 전에 한참 열심히 보던 만화책이었다. 어쭈? 싶은 게 기분이다 싶어 칭찬 한번 해주니 윤대협이 활짝 웃으며 좋아하는 걸 보고 저도 같이 웃었다. 그리곤 과일 있는 거 같이 먹으면서 만화책을 보다가 간호사 누나가 이제 면회 오신 분은 가셔야 된다고 할 시간까지 놀았다. 뭔가 특별한 이야기를 한 건 아니었다. 자기가 사와놓고도 만화책 내용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던 윤대협에게 설명만 계속 해줬었다. 윤대협은 별 말도 안 하고 그냥 웃기만 했다. 열심히 설명하는 자신을 보며, 마냥 웃기만 했다. 깜깜해진 바깥까지는 나가지 못 하고 병원 입구에서 배웅만 해주는 자신에게 들어가라고 손을 흔들며, 계속 돌아보면서도 그랬다. 계속 웃었다. 입꼬리 내리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자꾸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처럼.

[뭐냐, 오늘은?]

[그냥, 지나가면서 봤는데 생각이 나길래.]

세번째 병문안이 멀지 않을 걸 알았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나흘 후였다. 이번에 윤대협은 음료수 캔들을 잔뜩 가지고 왔다. 크기도 맛도 전혀 일관성이 없는, 하지만 몽땅 빨간색이던 음료수 캔들을 한가득 가져와선 침대 위에 늘어놓았다.

[백호 네 색깔이잖아.]

거기에 어이없어 하는 자신을 보면서 그 예쁜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데, 처음엔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그게 뭐라고 그런 자신을 보고 되도 않게 좋아하는 티를 숨기지 못하는 윤대협을 보니 결국은 진짜로 웃음이 났다. 둘이 같이 한참을 바보처럼 웃다가 결국 그 많은 음료수 캔을 다 따 마시는 짓거리를 하게 됐다. 딸기 맛이 대부분이었지만 어떤 건 체리 맛이었다. 그리고 어떤 건 토마토맛, 또 어떤 건 심지어 홍삼맛이 났다. 으엑, 하고 캔을 내려놓으니 윤대협이 궁금하다며 자기도 마셔보곤 슬며시 내려놓았다. 둘이 입에서 똑같이 홍삼 냄새가 나서 또 한참 웃었다.

[오늘은 또 뭔데.]

다음은 이틀 뒤였다. 윤대협은 들고 온 무지막지하게 큰 비닐 봉지를 열어서 보여주곤 눈가를 접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 안을 들여다보고 자신도 똑같이 키득대며 웃었다. 이번엔 과자였다. 세상에 있는 빨간색 과자는 다 집어온 것 같았다. 많았다. 정말 너무 많았다. 과자라면 일가견이 있는 자신도 처음 보는 것들이 수두룩할 정도로.

[뭐부터 먹을까?]

[백호 너 먹고 싶은 것부터 먹어보자.]

행복한 고민을 하는 자신의 옆에서 윤대협은 그리 말하며 눈 앞에 있는 것부터 봉지를 뜯어 댔다. 하얗고 길고, 또 아주 곧은 손가락이 빨간 봉지 위를 왔다 갔다 하는 걸 물끄러미 보다가 코 끝에 닿는 매운 냄새에 이 거다! 하고 손을 뻗었다. 그리고 바로 하나 집어서 윤대협 입술에 가져다 댔다. 말캉한 입술 끝에 과자가 콕 닿는 느낌이 들자 윤대협이 잠깐 멈칫했고 이때다 싶어 바로 입 속으로 집어넣다가 손가락이 입술에 스쳤다. 거기에 윤대협이 놀라는 얼굴이 재미있어서 손 닿아 침 묻어서 더럽고 뭐 이런 생각도 안 들고 웃기기만 해서 푸하하하 웃었다. 배를 잡고 웃는 자신을 보고 멍해진 윤대협의 입에서 아삭, 하고 과자 씹는 소리가 난 건 잠시 후였다. 그리고 곧바로 읍- 하고 윤대협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 과자가 원래 그랬다. 엄청 매운 과자였다. 용팔이한테 당해본 적이 있어서 알았다. 그때 자신은 우웩, 하고 입에 있던 걸 그대로 뱉어 냈었다. 하지만 윤대협은 그러지 않았다. 그러면 십년은 놀려줄 작정이었는데 시뻘게진 얼굴로 눈물이 글썽글썽해져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버버거리기만 했다. 그걸 캬캬캬 웃으며 구경하다가 병실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줬다. 그러자 윤대협이 드라마 여주인공 같은 얼굴을 하고선 ‘어떻게 이럴 수가!’ 하는 표정으로 우유를 받아 마셨다. 쪼금 미안해져서 달달한 과자 몇 개 집어 다가 이거 먹으면 된다고 입에 집어넣어주니까 얼굴이 차차 돌아오더니 곧 피식대며 웃길래 같이 막 웃어버렸다. 둘만 아는 나쁜 장난과 바보 같지만 재미있어서 멈출 수 없는 요상한 농담들이 여름 저녁의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 뒤섞여 흘러갔다. 그렇게 둘이서 과자들을 먹어 치웠는데 둘이니까 진짜 먹을 만했다. 이상하게 뭔가 평소보다 더 맛있다는 생각에 정말 엄청나게 먹어댔고 결국은 그 많은 과자봉지를 다 해치울 수 있었지만, 그랬지만 왠지 마지막 봉지는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남겨놓고 싶었다. 손가락에 묻은 과자 가루를 쪽쪽 빨며 파란색과 빨간색이 딱 반반인 마지막 과자 봉지를 바라보다가 윤대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과자 기름이 묻어 번들거리는 윤대협의 분홍색 입술이 보였다. 그걸 가만히 보다가 조금은 충동적으로, 저도 모르게 말했다.

[이거 너 다음에 와서 먹어야겠다. 더 먹으면 우리 둘 다 배 터질 듯.]

[다음에?]

[어, 다음에.]

자신의 말에 윤대협이 작게 자신의 입 안에서 ‘다음에,’하고 중얼거리는 걸 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정말 가까울 거란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쩌면 내일일지도 몰랐다. 정말 그럴 수도 있었다. 꼭 그럴 것 같았다.

그래서 다음날 종일 안 그런 척 윤대협을 기다렸다. 병실 문 쪽을 신경 쓰고 괜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내일 오려나 보다 생각했다. 하나도 불안해하지 않고 내일 오면 남은 과자 같이 마저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잤다. 하지만 그 다음날도 기다리기만 하다가 끝나자, 기분이 좀 이상해졌다. 약간 기분이 나쁜 것 같기도 하고 걱정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럴 수도 있지 싶기도 한 게 혼자 오락가락 했다. 침대 누워서 눈 감고 잠들 때까지 그러는 바람에 제대로 자지도 못해서 다음날은 상태가 좋지 않았다. 오늘은 오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병실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윤대협이 원래 오던 시간이 한참 지나서도, 혹시 엇갈릴까봐 어디 나가지도 않았다. 그리고 저녁 즈음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마침내 병실 문이 열렸다.

[-! 너 이 자식, 윤-]

대협, 하고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들어오던 호열이, 대남이, 규식이랑 용팔이까지.

[백호야! 우리 왔다!]

자주 와도 늘 반가웠던 녀석들을 보고 순간 할 말을 잃고 굳어버리는 바람에 호열이가 백호야? 하고 물었다. 거기다 대고 곧 크하하하 웃고선 짜식들 이 형님이 보고 싶었구나, 라고 말하긴 했다. 그리고 다들 늘 그랬듯이 즐겁게 놀다가 갔다. 하지만 다들 돌아가고 난 한밤의 침대 위에서는 또다시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그렇게 거의 못 자다시피 하고 아침을 맞이하니까 기어이 화가 나기 시작했다. 윤대협 이거 오기만 해봐라, 싶어지는 게 머리 속에 윤대협이 오면 어떻게 화낼지 백 개도 넘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날 오후, 이제 병실 문을 노려보기 시작한 자신에게 간호사 누나가 백호 누구 기다려? 하고 물었다. 그 말을 듣는데 갑자기 울컥하니 입술이 안 떨어졌다. 솔직하게 윤대협이라고 말하고 싶지가 않았다. 뭔가 이상하게 분했다. 진심으로 화가 나면서 눈물마저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라고, 기다리는 사람 없다고 빽빽대며 씩씩거리다가 눈을 동그랗게 뜬 간호사 누나 눈치를 보곤 죄송하다고 하며 괜히 화장실이나 갔다. 그리고 화장실 거울에 비친, 입술이 툭 튀어나온 자신의 얼굴을 보곤 훌쩍 코나 삼켰다. 당연히 그날도 윤대협은 오지 않았다. 다음날도 안 왔다. 그렇게 결국 일주일이 지나고 또 하루가 더 지나고 나서야 땅바닥이 꺼질 듯한 한숨과 함께 이제 안 오나 보다,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래도 병실 문을 몇 번이나 힐끔거리긴 했지만 이제 좀 포기라는 게 되는 것 같았다. 흥, 그래서 뭐! 농구부 사람들도 자주 오고 소연이도 자주 오고 군단 애들도 이틀에 한번 꼴로 오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밥이나 열심히 먹었다. 파랑빨강 반반 과자 봉지는 안 보이게 저 안 쪽 구석에 치워버렸다. 눈에 보이면 왜 안 오지? 하는 생각밖에 안 들어서 그래야 했다. 왜 안 오는지 물을 수 있는 대상이 정작 안 오니 보면 볼수록 답답해지다가 짜증만 나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화해볼까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었다. 근데 전화 번호를 몰랐다. 물어볼 법한 사람도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성질만 나서 에잇, 에잇 하고 애꿎은 베개만 퍽퍽 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한 바퀴 돌고 다시 눕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침대 위에서 몸을 쭈그린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마침 날도 흐리멍텅하니 종일 뿌연 게 기운도 안 나고 계속 밤에 제대로 못 자다 보니 쓸데없이 피곤했던 지라 짧은 낮잠이 깊어져 버린 건 한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꿈결에 이마 위로 바람이 분다고 생각했다. 꽤나 자란 머리칼이 살랑거리는 느낌이 났고 살짝은 간지럽기도 했다. 잠이 깰락말락한 상태로 몽롱해져 눈을 반쯤 뜨자 흐릿하게 병원 천장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로 흐릿하게 지나가는, 눈 앞에 어른거리던 길고 하얀 것들. 그게 누군가의 손가락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점점 선명해지던 시야에 걸리던 게 손가락이라는 걸 알아차린 것도 익숙한 듯 낯선 맑은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였다.

[백호야, 깼어?]

[어어…]

그건 대답이 아니라 잠결에 흘린 소리에 가까웠다. 그리고 공기가 찰랑이는 듯한 부드러운 웃음 소리를 들었다.

[응, 괜찮아, 더 자.]

[…어?]

[더 자도 돼.]

그리 말하며 눈가를 가려주던 손가락 틈 사이로 들어오던 가느다란 빛이 가물거렸다. 윤대협 목소리…기분 좋다…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면서 눈이 다시 감기려던 찰나, 갑자기 번쩍 정신이 들었다. 윤대협 목소리…? 윤대협, 윤대협?

[엉?]

그리 외치며 눈을 퍼드득 뜨니 얼굴 위에 올려진 손이 덩달아 놀라서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빛이 밀려들어와 눈이 부셨는데도 벌떡 몸을 일으키니 옆에서 당황하는 소리가 났다.

[백, 백호야?]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돌린다. 윤대협이었다. 진짜 윤대협. 마지막으로 본 날이랑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은 능남 체육복을 입고 멀쩡한 얼굴로 앉아있는 윤대협.

[…너, 너!…너!!]

[??]

[너 왜!!]

삿대질이 먼저였다. 말보다 몸이 먼저 나갔다. 불쑥 나간 손가락이 윤대협의 코 끝에 닿았고 거기에 경기라도 난 것 마냥 뒤로 물리던 윤대협의 몸이 갑자기 아래로 쑥 꺼지더니 우당탕탕 소리가 났다. 뭐라 더 말을 하기도 전에 의자와 함께 넘어져버린 윤대협을 보았다. 엉덩방아를 찧고선 아야, 하고 뒤를 문지르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여전히 고운 얼굴을 보았다. 진짜 화내려고 했는데, 엄청 따지려고 했는데, 그렇게 바닥에 넘어진 채 자신을 향해 머쓱하게 웃는 말간 얼굴에 마음이 순식간에 누그러지는 걸 느꼈다. 황당할 정도였다. 당황스러웠다. 그런 스스로에게 너무 당황해버렸다. 결국엔 빽, 하고 일부러 더 크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너 왜 이제 왔어!]


[미안, 내가 미안해.]

윤대협은 그렇게 사과했다. 그 짙고 길다란 눈썹 끝이 쳐져선 몇 번이나 그리 말했다. 입이 댓발로 나와 끝없이 투덜대는 자신에게 지치지도 않고, 처음과 똑같은 말투로 똑같은 성의를 담아 말했다.

[그러니까, 병문안 선물로 또 뭘 줘야 될 지 모르겠어서 못 왔다고?]

그런데도 그 같잖은 소리는 이해가 안 가서 자꾸 되묻게 됐다. 멋쩍은 얼굴의 윤대협이 망설이면서 꺼낸 병문안 선물이고 뭐고 하는 말에 어이가 없어져서 그랬다. 그러면 윤대협이 다시 미안하다고 하고, 그래도 분이 안 풀려서 꽁하니 있다가 또 되묻고, 그런 도돌이표를 한참이나 돌고 나서야 좀 진정이 됐다. 그래서 겨우 마음잡고 이제 다른 이야기 좀 해볼까 하는데 난데없이 윤대협이 생긋 웃으며 이러는 거다.

[그럼 백호 너 그 동안, 나 기다린 거야?]

[아니,]

저도 모르게, 윤대협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리 답했다. 너무 빨리 답해버리는 바람에 윤대협보다 저가 더 놀랐지만 안 놀란 척했다. 그러면서 아니거든, 하고 재빨리 덧붙였다. 그러니까 윤대협이 이상한 표정으로 입술을 한번 오무리더니 응, 알았어 하고 답하고 잠시 고개를 뒤로 돌렸다. 들릴 듯 말 듯한 묘한 웃음소리 같은 게 났는데 윤대협이 절묘하게 손을 들어 자기 얼굴을 가리는 바람에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윤대협은 곧바로 늘 보던 익숙한 표정으로 들고 온 종이 가방을 들어 보였다. 별로 크지 않았고 무척이나 가벼워 보였다. 뭘까, 생각은 들었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한번 더 말했다.

[그런 거 안 들고 와도 된다고.]

[응, 알았어. 그치만 오늘은 들고 왔으니까.]

그러면서 윤대협은 가방 속에 손을 넣어 안에 있는 것을 꺼냈다. 모자였다. 옅은 분홍빛의 야구 모자, 앞엔 작은 고슴도치 모양의 자수가 있었고 챙은 조금 짧아 보이던, 무척이나 귀여운 모자였다.

[한 번 써볼래?]

[…]

대답하지 않았다. 미소 짓고 있는 윤대협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것이 승낙의 뜻이라는 걸 윤대협은 잘 아는 것 같았다. 환히 웃으며 모자를 씌워주는 손길은 조심스럽고 다정했다.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가락이 이마와 귀와 목 뒤 쪽을 스쳤다. 살짝 서늘하기도 하고 까끌하기도 한 손가락 끝의 촉감이 느껴졌다. 왠지 얌전히 있게 됐다. 꼭 작은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너무 잘 어울린다, 백호야.]

[…그러냐?]

[응, 거울 한번 볼래?]

그렇게 둘이 같이 일어나서 거울 보러 화장실까지 같이 갔다. 세면대 앞에 둘이 서서 모자를 똑바로도 썼다가 뒤로 돌려도 써보고 이런저런 폼도 잡아봤다. 역시 천재라 안 어울리는 게 없었다. 그리고 딱딱해서 모자가 씌워지지 않는 윤대협 머리 위에 한번 얹어 보기도 했다. 진짜 웃겼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곤란한 걸, 하고 말하는 윤대협 덕분에 오랜만에 배가 아플 정도로 웃었다. 그렇게 또 한참 놀다가 갈 시간이 되니까 불안함이 스물스물 올라오는 걸 느꼈다. 갈 기색이 없어 보이던 윤대협이랑 마지막 과자 봉지를 뜯어서 먹다가 충동적으로 말이 나왔다.

[너 또 선물 같은 소리하면서 안 오면 안 된다.]

사실 그런 말 안 하고 싶었다.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또 너무 하고 싶기도 했다. 안 하면 견딜 수 없을 만큼, 마구잡이로 해버리고 싶기도 했다. 진짜 그랬다. 그냥 그랬다.

[…응.]

[…]

[응, 그럴게, 백호 네 말대로 할게.]

[…진짜지?]

한번 더 확인 받듯이 묻자 윤대협은 천천히, 하지만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한번 말했다.

[내가 정말 미안해, 다음부터는 이렇게 걱정하게 안 할게.]


그 후로 윤대협은 자신의 말을 지켰다. 거의 매일 왔다. 오지 못하는 날은 꼭 이유를 미리 말했다. 그리고 올 때마다 농구잡지를 한 권씩, 딱 한 권씩만 가져왔다. 처음엔 안 가져와도 된다고 말했지만 북산 농구부 애들이 가져오는 거랑 다르기도 했고 둘이서 같이 보면서 농구 이야기하는 게 너무 즐거워서 곧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게 됐다. 함께 다시 코트에 설 날을 생각하곤 했다. 잡지 사진이나 기사를 함께 보다 보면 그렇게 됐다. 내가 이렇게 덩크를 할 거라고 하면 윤대협은 저렇게 패스를 해줄 거라고 했다. 윤대협 너 슛이 안 들어가면 내가 다 리바운드 해주겠다는 말에는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돌파와 드리블에 대해서는 진지한 태도로 대단히 쉽고 재미있게 말해줄 때도 많아 조금은 넋을 잃고 듣곤 했다. 그러다 보면 깜빡이며 흔들리는 윤대협의 속눈썹에 시선을 뺏길 때도 있었다. 자신의 형태가 비치는 검은 눈동자를 한없이 바라보게 될 때도 있었다. 그 작은 속눈썹 가닥이, 그 작은 동그라미가 뭐라고, 아무리 봐도 지겹지가 않았다. 신기할 만큼 그랬다. 그 모든 시간들이 좋았다. 정말 좋았다.


그리고 그날, 윤대협은 늦게 왔다. 늦게 온다고 말도 안 하고 늦게 왔다. 기다리다가 졸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의외로 오래 자는 바람에 눈을 뜨니까 밖이 어두울 정도로 시간이 흘러 침대 맡 의자에 앉은 윤대협을 바로 볼 수 있었다. 불도 안 키고 있었지만 웃긴 머리 때문에 윤대협인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어, 왔냐.]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인영이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자 익숙한 웃음 소리가 들렸다. 하품을 하는 자신을 보며 웃는 걸 어두침침한 실내에서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자신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는 커다란 손을 느꼈다. 기분 좋게 미지근한 손에 으응, 소리를 내며 머리를 부비적대자 웃음소리가 커진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전등 스위치가 있는 곳까지 간 윤대협의 손에서 탁, 하는 소리가 났고 곧 안이 밝아졌다. 병실의 하얀 벽과 하얀 바닥 위 우뚝 서있는 윤대협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그렇게 서있는 윤대협이 무척이나 크고 또렷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잘 잤어?]

다가오는 윤대협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손을 뻗어 자신의 머리를 정리하듯 매만져주는 손길이 있었다. 그 손길은 머리에서 끝나지 않고 턱까지 내려왔다. 입가를 간단히 닦아주는 손길에 뭔가 축축한 게 묻었다는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엉?]

자신의 입가에 묻은 침을 닦아낸 윤대협이 아무렇지도 않게 휴지로 손을 닦는 걸 보면서 그런 소리나 냈다. 태연히 자리를 잡은 윤대협은 저녁은 먹었냐고 물었다. 그리곤 니가 늦게 오는 바람에 아주 이른 저녁을 먹고 한숨 잤다고 답하는 자신에게 그러냐고 답하더니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거기에 왜 저러냐 싶어 한 마디 할 때쯤에 입을 열었다.

[다음주면 퇴원한다며.]

책망하는 듯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냥 묻는 거였다. 그래서 더 당황했다. 어디서 들은 거지 싶었다. 자신은 말한 적이 없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함께 있다보면 재미있는 다른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서 그런 말을 할 틈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사실, 윤대협과 함께 있을 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어떻게든 웃는 얼굴로 시작해도 울적한 마음이 종종 드는 걸 막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를 기쁨만으로 충만한 둘만의 시간에 끼워 넣고 싶지 않았다. 어어, 하고 바보 같은 소리만 낸다. 갑자기 뭔가 잘못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뭘 잘못했는지는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그런 것 같았다. 그러더니 언제나처럼 웃고 있는 윤대협의 얼굴이 순간 알쏭달쏭하게 보여서 표정 관리가 안 됐다. 그리고 윤대협이 말했다.

[괜찮아.]

그러면서 다가왔다. 손을 잡았다. 한번 더 말했다.

[괜찮아, 백호야.]

뭐가 괜찮다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그렇게 말하는 눈앞의 얼굴을 보니 안심이 되는 게 이상했다. 울컥하는 기분이 드는 게 이상했다. 울상이 되어선 윤대협을 바라보니 다정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웃으며 손을 들어 뺨을 쓰다듬어 준다. 살짝 바스락거리던 손바닥이 뺨 전체에 닿았다가 뒷목까지 스치고는 떨어졌다.

[그래서 퇴원 선물 가져왔지.]

평소보다 좀 더 밝은 목소리였다. 윤대협은 일부러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알 수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들어올린 종이 가방은 늘 보던 것보다 좀 더 컸다. 그 안에서 나온 것도 그랬다. 꺼내서 내려놓은 농구화 상자를 침대 가운데에 내려놓는다. 둘이 빤히 내려다본다. 그리고 윤대협과 겹친 손으로 상자를 연다. 드러난 안 쪽에 너무나 익숙한 색과 모양을 한참 더 내려다본다.

[역시 이게 제일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윤대협은 그리 말하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 그 얼굴을 보는데 진짜 눈물이 좀 날 것 같았다. 이미 조금 흐른 것도 같아서 허겁지겁 눈가를 닦고 다시 내려다보았다. 산왕전까지 신었던 소중한 조던은 더 이상 신을 수 없는 상태이긴 했다. 그 조던이 처음 봤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상자 속에 예쁘게 담겨 있었다.

[한번 신어볼래?]

거기에 코를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고 다리를 침대 아래쪽으로 뺐다. 그러자 윤대협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으로 몸을 내리곤 자신의 발목을 조심스레 쥐었다. 그리곤 어, 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드러난 맨발에 신발을 신겨주더니 끈까지 매주기 시작했다. …부끄럽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맨 살에 닿는 게 아닌 데도 이상하게 발 안쪽이 간지러웠다. 아래에 있는 윤대협의 정수리와 코끝을 번갈아 보다가 그 아래를 보면 까만 부분 위로 까만 끈을 끼워 묶고 있는 하얀 손가락이 보였다. 익숙한 듯 낯선 듯, 크게 서두르지도 망설이지도 않는 손가락들이 까맣고 빨간 바탕 위에 선명했다. 계속해서 보면 춤이라도 추는 듯 흘러가며 움직이는 길고 하얀 손가락을 어느 순간부터는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둘 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서로의 숨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신발끈끼리 스치는 소리가 몇 번 있었다. 그렇게 양쪽 발에 모두 신발이 신겨지고 끈마저 단단하게 매어질 때까지, 눈을 뗄 수 없었다. 주문이라도 걸린 것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다 됐다.]

그리곤 위를 올려다보는 윤대협의 얼굴이 눈 앞을 가득 채웠다. 눈을 몇 번 깜빡였던 것 같다. 시야에 꽉 찬 윤대협의 얼굴에서 어디를 봐야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결국은 눈이 마주쳤다. 윤대협의 눈동자 속에 병실 형광등의 길다란 불빛이 비쳐 흔들리고 있었다. 그걸 보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눈동자에는 무엇이 비칠까 생각했다. 아마도 바로 이 눈빛이, 이 검은 눈동자가, 지금 내 눈 앞의 윤대협이 비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은 순식간이었다. 자신만 그런 게 아니란 것도 알 수 있었다. 서로가 점차 가까워지는 걸, 서로의 숨결이 서로의 입술에 닿는 것 느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눈을 감은 순간, 희미한 웃음 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끝끝내 닿은 입술의 황홀함이 결국 모든 것을 잊게 했다.



2024 대협백호 카페 글엽서 협력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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