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or Fati
송태섭
태섭이 생일 기념, 약 태섭대만
초초초초초 단문
현대 철학 부분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명언 ‘신은 죽었다’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아모르 파티’라는 명언 또한 그가 남겼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Amor Fati’는 ‘네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뜻이다. 얼핏 보면 운명론 같은 이 말은 니체의 주요 사상인 ‘영원회귀’를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영원회귀는 영원히 같은 것을 반복한다는 의미다. 만일 이 세상이 에너지 보존 법칙에 의해 일정한 힘과 수에 의해 움직인다면, 그에 따라 나오는 조합은 한정적이므로 최소 한 번 이상 이전과 같은 결과값이 나올 것이다. 이것이 무한한 시간 속에서 반복된다면 결국 모든 조합과 결과는 되풀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가정한다면 결국 결과는 정해져 있다는 비관론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결과가 나왔는가’가 아니라, ‘무엇과 무엇이 만나 이런 결과를 만들었는가’라는 과정이다. 거짓말을 예시로 들어보자. 보통 사람이라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과 거짓말의 내용에 집중해 잘잘못을 따질 것이다. 사실 거짓말은 상호 신뢰를 무너뜨리는 행위이므로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니체는 거짓말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게 된 경위, 즉 동기와 목적을 생각해보자고 말한다.
그러므로 인생은 결과가 아닌 과정, 인생의 목적을 찾고 그 목적에 다다르기 위한 여정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모든 것이 영원히 되풀이 되는 세상에서 주체적으로 과제를 찾고 달성하기 위해 끝없이 움직여야 한다. 설령 그 결과가 좌절감과 절망을 주더라도 그것에 닿기 위한 발버둥은 결코 헛되지 않았기에, 인간은 그 과정을 진심으로 즐기고 행복해하며 때로는 현실을 망각하고 순수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삶을 긍정하고 미화시키며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아모르 파티이다.
태섭이 이런 어려운 철학 논리를 알고 있는 것은 그가 현대 철학에 큰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과제였기 때문이다. 2학기가 시작하자마자 윤리와 사상 선생님은 2학년 전체에게 수행평가 과제를 주었다. 현대 철학자 한 명의 사상을 분석하고 레포트를 제출하는 것. 죽어도 하기 싫었으나 기말성적에는 수행평가 과제까지 포함되므로 낙제를 피하기 위해선 반드시 C 이상을 받아야 했다. 태섭은 선생이 칠판에 적어둔 철학자들 이름을 하나하나 훑었다. 벤담, 밀, 베버, 엥겔스, 쇼펜하우어, 그리고 니체. 칠판 앞에 모여든 학생들 몇 명이 수근거렸다.
“야, 니체면 그 사람 아니야? 니는 죽었다.”
“신은 죽었다겠지 멍청아.”
“넌 인터넷 좀 작작 해라.”
신은 죽었다라, 그 비관적인 태도가 태섭의 마음을 자극했다. 한때 신을 찾아본 적 있는 사람으로서 저렇게 당당하게 신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게 재밌었다. 태섭은 바로 자리로 돌아가 수행평가 과제 계획서에 니체의 이름을 당당히 적었다. 한나가 태섭의 계획서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말했다.
“정말 니체를 할 거야? 생각보다 어려울 텐데.”
“뭐, 어떻게든 되겠지. 신은 죽었다고 말하는 양반이라며? 왠지 마음에 들어.”
한나가 눈썹을 들면서 열심히 해보라고 어깨를 두드렸을 때 알아채야 했다. 실제로 니체의 이론은, 무지막지하게 어려웠다. 한나에게도 까다로울 정도니 머리에 뇌 대신 농구공 모양 돌덩이가 들어있는 태섭에게는 곱절로 힘든 것이 당연했다. 이 사람은 무슨 말을 다 이렇게 써놨냐. 문장 하나에 달린 해석이 두 세 개씩 되었다. 인생에서 이만큼 책을 많이 읽은 적이 없었다. 농구부 연습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가 인터넷을 뒤져 니체의 사상을 정리하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 12시가 되어 잠들었다가 여섯 시에 일어나 아침을 대충 입에 쑤셔 넣고 학교로 가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나 그의 사상을 하나씩 뜯어볼수록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보였다. 그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냉정하면서 동시에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의 힘을 믿는 이였고 제 인생에 당당한 인간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것이 삶인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이라는 글귀를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신은 죽었다’라는 말도 이와 같은 맥락이었다. 신이라는 절대적인 가치가 사라진 현대에 인간은 스스로 가치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도, 타인을 짓밟지 않고 그저 경쟁하면서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한다는 의미를 압축한 말이었다. 아니 그러면 자세히 풀어서 설명하든가. 왜 이렇게만 던져 놔서 해석을 하게 만들어. 태섭은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대면서도 그의 철학이 마음에 들어 매일 곱씹었다.
이것이 삶인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나는 그럴 수 있을까? 누군가 지금의 삶을 되풀이하고 싶느냐고 물었을 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아홉 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열 살, 형이 실종되었다. 실종된 형과 비교당하면서도 농구를 계속했다.
열세 살, 처음으로 어머니와 싸웠다. 낯선 곳으로 이사 와 괴롭힘을 받았다. 그리고,(태섭은 서태웅에게 붙잡혀 강제로 삼점슛 강의를 하고 있는 대만을 흘겨봤다. 아니 너 충분히 잘하고 있구만 왜 나한테…, 대만이 계속 구시렁댔다) 저 사람을 만났다.
열여섯 살, 쇼호쿠에 들어왔지만 주전 기회도 못 받고 문제아 취급 당하고. 정대만이랑 싸우고. 교통사고를 당하고.
열일곱 살, 지금.
아주 많은 일이 있었다. 일단 고향에 다녀왔다. 형의 유품을 가져왔고, 재활을 했다. 개학했더니 정대만이 농구부에 복귀했다. 강백호와 서태웅이 들어오고, 드디어 팀의 모습을 갖추었다. 꿈에 그리던 전국대회에 나갔고, 산왕을 이겼다. 물론 바로 그 다음에 떨어졌지만.
아직 그는 많은 시간을 살지 못했다. 지금보다 더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승승장구할 수도 있다. 무엇 하나 아직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태섭은 여전히 길 위에 있었다. 주사위는 여전히 굴러가고 있다. 니체의 영원회귀에 따르면 결국 언젠가 나왔던 결과가 나올 것이다. 태섭은 또 좌절할 것이고, 어쩌면 뜻밖의 수확을 얻을지 모른다. 동료와 싸울 수 있지만 최고의 파트너를 찾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삶이라면.
“야, 송태섭. 주장되었다고 벌써 뺀질거리기냐? 너도 와서 슛 연습 해.”
대만이 성질을 부리듯이 태섭을 불렀다. 태섭은 허, 하고 한숨을 쉬면서 상념을 지웠다. 그는 문제의 눈썹을 또 짝짝이로 세우면서 딴지를 걸었다.
“이 사람 또 사람 귀찮게 하네.”
“얌마, 너 슛 없다는 거 이제 전국에 있는 선수들이 알 텐데 새깅당하고 싶냐?”
전직 양아치라고 사람 긁는 데 아주 도가 텄다. 아 알았어요, 태섭은 투덜거리면서도 알 수 없는 승부욕에 꿈틀거리며 골대로 다가갔다. 누가 누구를 새깅해? 절대 안 되지. 태섭은 자유투 라인 앞에서 농구공을 튕기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옆에서 대만이 자꾸 쫑알쫑알 잔소리를 했다. 자세 잡고, 어 그래 왼손에 힘 빼고. 어허, 지금 짝다리 짚고 있다. 똑바로 서! 아 진짜 시끄럽게 구네. 그러면서도 태섭의 입가에 작은 호선이 걸려 있었다.
좋을 것 같다. 몇 번을 반복하더라도.
결국 나의 답은 농구일 테니까. 나는 결국 농구를 택할 테니까. 그리고 농구를 하면서 좋은 사람들을 만날 테니까.
태섭이 팔을 들어 슛을 쏘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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