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츄어리

태섭대만 / 생츄어리 4

센가au

714 by Ha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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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가 부서져 연락할 수단이 없던 태섭의 모는 뛰쳐나가는 아들의 모습에 사태가 심각함을 깨닫고 곧장 따라 나갔지만, 태섭을 따라잡지 못하고 아무도 없는 거리에 덩그러니 남았다. 어쩌지. 어쩌면 좋지. 불안함이 자신을 다 덮쳐서 무너지기 전에 그녀는 전화를 건 대만의 집으로 향했다.

그들의 집에서도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은 아들을 기다리느라 앉아있지도 못하고 서성이고 있었다.

태섭의 모가 절박한 얼굴로 이 집에서 건 전화를 받고는 태섭이 뛰쳐나갔다는 소식을 전하자 그녀를 집에 들였다. 대만의 엄마에게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대만이 병원에서 퇴원 후에 겉돌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최근엔 불량배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 같았는데, 참다 참다 남편이 잔소리했더니 그대로 집을 뛰쳐나갔다고 했다. 사정을 설명하고 나니 대만의 집에 전화벨이 울렸다. 한 번 울리자마자 집 주인이 전화를 받았고, 태섭과 대만이 병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셋이 같이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한 세 사람은 치료실에 앉아있는 두 아들놈의 몰골에 할 말을 잃었다. 태섭은 얼굴이 조금 부었지만, 사람의 몰골을 했지만, 대만은 앞니 두 개가 사라졌고, 코에 솜을 쑤시고 있는 상태로 왼쪽 턱이 찢어져 꿰매고 있었다. 각자의 부모가 온 걸 발견하고 두 사람은 시선을 피했다. 태섭의 모가 먼저 발걸음을 옮겨 태섭에게 다가가 그의 앞에 주저앉아 눈을 마주하려고 했다.

“태섭아…….”

“……제가-.”

“죄, 송해요. 아주머니. ……저 때문이에요. 저 때문에 태섭이가 휘말려서 그만……. 잘못했습니다.”

“말하지 마세요.”

태섭이 말을 하려고 입을 열자 대만이 끼어들며 태섭의 모에게 잘못했다 잘못을 빌었고, 대만의 턱을 치료하던 의사가 대만에게 경고했다. 그가 다시 입을 닫자, 의사는 치료를 계속 이어가며 대만의 부모에게 말했다. 이 학생, 이는 내일 치과에서 다시 정확히 진료받고 치료를 하시면 되고요. 코피가 나긴 했는데, 코뼈는 멀쩡합니다. 지금 치료 중인 여기 턱을 빼고는 크게 다친 곳은 없고요. 의사가 줄줄이 상태를 설명하는 사이에 대만의 치료가 끝나고 턱에 드레싱 밴드가 붙여줬다.

“그쪽 학생은 가벼운 타박상 정도니까 바로 귀가하셔도 됩니다.”

태섭의 모가 태섭과 대만을 번갈아 보다가 자기 아들에게 시선을 뒀고, 태섭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 어머니의 눈을 피했다.

“태섭 어머님.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이걸 어떻게 해드려야 할지…. 우선 치료비는 저희가 지불하겠습니다. 많이 놀라셨겠지만, 우선 태섭이 데리고 집에 가셔서 쉬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조만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대만의 부와 모가 연신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고, 태섭의 모가 여기서 더는 사정을 들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들의 말대로 우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래서 아들에게 그만 가자고 말하자 태섭이 잠시 머뭇거리며 대만을 봤다. 태섭을 지켜보던 대만이 다친 턱으로 가보라는 듯, 제스쳐를 취하자, 태섭이 조금 울상을 하고 몸을 틀어 출구로 나갔다. 그걸 지켜보던 태섭의 모가 대만을 봤고, 대만도 그녀의 시선이 느껴져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그 인사를 받고 나서야 그녀 또한 출구로 향했다.

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태섭과 그의 모는 말이 없었다. 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택시 운전사가 있어서도 그렇고 어디서부터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몰랐다. 대만이 있었던 곳이 어디였는지, 어떻게 찾았는지, 뭐에 휘말린 건지, 전화기는…….

태섭의 모는 태섭이 전화기의 수화기를 부수던 그 순간이 계속 떠올랐다. 눈에 진하게 어린 살기와 괴력이 전혀 인간의 것이 아니라서.

“제가 그랬어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태섭이 그녀에게 한 말이었다. 앞서 걷던 발걸음이 멈추고 태섭의 모가 뒤를 돌아 아들을 마주 봤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태섭이 고개를 들어 어머니와 눈을 마주하고 말했다.

“대만이 형 앞니랑 턱, 거기 있던 양아치 새끼들 다 패고…전화기도 부수고. 낮에 잠깐 마주쳤던 곳에서부터 소리며 냄새로 대만이 형 찾았어요.”

태섭은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녀가 가졌던 의문만 골라서 답을 했다. 모든 대답을 들은 그녀는 갑작스레 던져진 해답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럴 것 같았지만, 직접 듣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다 자신이 했다는 자식의 말을 어떻게 순순히 이해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녀는 이 전에 그런 비슷한 일들로 인해 남편과 첫 번째 아들을 잃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입을 열었다.

“당숙 어르신이 알려준…그 힘으로 한 거니?”

“……네.”

“너를……지탱해 줄 사람이…대만이구나. ”

그녀는 여태까지의 태섭의 행동을 떠올리며 그런 결론을 냈다. 태섭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이 땅에 떨어진 아들을 잠시 바라보던 그녀 또한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아들을 바라보며 그에게 다가가 이제는 자라 저보다 커진 아들의 어깨를 잡고 얼굴을 마주 보며 말했다.

“우선 집에 가자. 태섭아. 괜찮으니까. 나쁜 건 하나도 없으니까. 가자.”

어머니의 말에 태섭은 울기 직전의 얼굴을 했지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녀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그날의 사건은 이상하리만큼 금세 정리되었다. 가벼운 타박상을 입은 태섭은 예정대로 북산 고등학교에 별 탈 없이 입학했다. 지난 1년간 자신을 둘러싸고 괴롭혔던 예민한 감각은 놀랄 만큼 진정되어서 이전과 전혀 다른 세상에 떨어진 것만 같았다. 갑자기 닥친 평온함에 도리어 현실감이 떨어져 기분이 붕 떴다. 태섭은 복도의 창문에 기대어서 근처에 보이는 체육관을 바라봤다. 농구라도 하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자신이 놀라워 태섭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엔 그저 정대만과 더 같이 있고 싶어서였는데. 정대만과 멀어졌을 때도 태섭은 농구에 몰두했다. 계기는 정대만이었지만, 태섭 또한 농구가 좋았다.

‘농구…계속 해도 될까.’

태섭은 잠시 체육관을 보다가 교실에 들어가기 위해 창가를 떠나려고 몸을 틀었다. 뒤를 돌자 없었던 사람이 갑자기 서 있어서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아. 깜짝이야. 뭐-.”

하고 위를 올려보다 보니 정대만이었다. 태섭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시선까지 밑으로 내리깔자, 대만의 무릎이 보였다.

“너. 이제 농구 안 해?”

대만의 질문에 태섭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태섭을 보고 있었다. 표정에 조금 주눅이 들어서 태섭은 다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뭐…딱히.”

태섭의 애매한 대답에 대만의 표정이 조금 더 굳었다. 딱히 뭐? 하고 되물으니, 대답이 없었다. 급격히 답답함을 느낀 대만이 화내지 않으려고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정확하게 말해. 농구 하기 싫어?”

“아. 아니. 그건 아닌데-.”

“아닌데 왜 안 해?”

“그…….”

태섭이 또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걸 보다가 그의 시선이 대만의 무릎을 흘끔거린다는 걸 알아차리고 이를 악물었다. 아 이런 건방진 자식을 봤나.

“내 무릎은 왜 봐?”

대만의 말에 태섭이 놀라 몸을 움찔 떨며 고개를 퍼뜩 들었다. 화가 단단히 난 얼굴로 자신을 보는 대만을 마주하며 할 말을 잃었고, 눈앞이 조금 흔들렸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태섭이 까마득함을 느끼며 대답을 못 하자 대만이 손을 뻗어 태섭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농구가 싫은 게 아니면 농구해. 나도 무릎 제대로 치료하고 다시 할 거야.”

“에?”

“애들한테 너 입부할 거라고 말해놨단 말이야.”

꼬집었던 손을 놓고 말했다.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 샘이냐? 덧붙인 말에 태섭은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업을 시작하는 종은 그때 울렸다. 대만은 그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어깨를 툭툭 치고 걸음을 옮겼다.

“그럼, 입부 신청해. 체육관에서 보자.”

대만은 그렇게 말하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태섭은 숨을 깊게 한 번 들이마시고는 다시 자신의 교실로 돌아갔다.

그날의 유혈사태로부터 이틀 후에 대만과 그의 부모가 태섭의 집을 찾아왔다. 다시 한번 사죄를 전하고, 대만의 아버지가 보상을 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태섭과 그의 어머니는 그들을 앞에 두고 눈빛을 주고받다가 태섭의 모가 말했다.

“보상은 정말 괜찮습니다. 다만…이 일로 두 사람이 어색해지는 일 없이 친구처럼, ……형제처럼 오래 같이 잘 지내줬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

그녀가 대만을 보며 그렇게 말했고, 대만은 단호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대답을 들은 태섭의 모는 옅게 웃어주었다. 양쪽 어른이 웃으며 화기애애하게 다른 대화를 하는 동안 태섭과 대만은 서로를 마주 봤다. 한동안 바라보던 대만이 씨익 웃자 태섭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태섭은 책상 위의 농구부 입부 신청서를 빤히 바라봤다. 이미 펜을 들고 신청서에 가까이 갖다 댔다가 다시 펜을 내려두고 팔짱을 끼고 노려봤다가 또 다시 펜을 들기를 여섯 번 정도 반복한 시점이었다. 자신의 무릎을 보던 태섭을 내려다보며 대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복도에서 대만의 질문에 머뭇거리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건 부상을 입고 도망쳤던 그에게 농구하느니 마니 쉽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가 농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정대만은 태섭이 이성을 잃고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곁에 있어 주겠다고 한 사람이다. 자기 일로 귀찮게 하거나 질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농구 한다고. 무릎도 제대로 치료받을 거고. 태섭은 팔짱을 풀고 다시 펜을 들었다. 정대만과 농구할 수도 있다고. 태섭의 표정이 순간 부드러워졌다가 결의에 찬 얼굴을 하고는 입부 신청서에 제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코트를 누비는 농구화 소리가 체육관 전체에 울렸다. 기합 소리와 농구공이 튕기는 소리 또한 가득했다. 태섭은 숨을 고르고 체육관 안으로 들어갔다. 중학교의 체육관 보다 더 크고 낡은 체육관에 스물 남짓의 고등학생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태섭이 들어오자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태섭은 곧장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자신이 있을 곳을 살펴봤다. 신입? 키가 작네. 쟤가 정대만이 말한 그 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 척하며 몸을 움직이는데.

“송태섭!”

대만의 호명이 체육관에 가득 울렸다. 태섭의 시선이 바로 그 목소리로 향했고,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손을 흔들며 이리로 오라는 대만의 행동에 태섭이 입을 꾹 닫고 눈썹을 치켜뜨며 대만이 부른 곳으로 향했다. 대만의 앞에 서서 태섭이 작게 말했다.

“뭐예요. 설마 오늘 훈련하는 거예요?”

“아까 체육관에서 보자고 했잖냐. 너 때문에 온 거야.”

나? 태섭의 표정이 한껏 의아해지자, 대만이 피식 웃으면서 태섭의 머리에 손을 올려 이리저리 흔들었다. 태섭이 하지 말라며 대만의 손을 잡아 내리려고 했지만, 이리저리 흔들리는 탓에 쉽게 손을 낚아채지 못했다.

“정대만.”

태섭과 대만의 실랑이는 대만을 부르는 제삼자의 목소리 때문에 멈췄다. 이름이 불린 대만이 태섭이 머리에서 손을 내리고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키가 190은 족히 넘어 보이는 단단한 인상의 남자가 태섭과 대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채치수. 얘야. 내가 말한 녀석.”

“흠.”

대만의 말에 채치수라고 불린 남자가 태섭에게 시선을 뒀다. 살면서 위압감을 느낀 적이 별로 없는데, 키도 그렇고 남자가 풍기는 고압적인 분위기는 여태껏 태섭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치수가 천천히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녀석의 친분으로 편하게 할 생각은 하지 마라.”

“야. 그런 애 아니거든?! 그리고 만약에 그러면 내가 가만 안 둔다. 알았냐?”

“그럴 일 없거든요? 멋대로 단정짓지 마세요.”

태섭이 이를 갈며 하는 말에 치수는 놀란 얼굴을 했고, 대만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징그럽게 뭘 네 녀석이 흐뭇해하고 있나. 훈련 방해하지 말고 돌아가.”

“말 안 해도 갈 거거든.”

미소 짓고 있는 대만에게 치수가 그만 돌아가라 했고, 그 일갈에 대만도 인상을 쓰며 말대답했다. 대만이 돌아간다는 말에 이번엔 태섭의 시선이 대만에게 향했다. 태섭과 시선이 맞은 대만이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가 태섭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난 병원에 갈 거야. 선배들한테 인사 잘하고 훈련도 힘내라.”

“훈련 끝나고 저도 병원으로 갈게요.”

“엉? 아니 안 와도-. ……아니다. 그럼, 병원 말고 그 야외 코트로 와. 간다.”

대만은 오지 말라고 하려다가 태섭의 표정을 보고 말을 거둔 후 평소 봤던 야외 코트에서 보자는 말을 하고는 체육관을 나왔다. 태섭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집합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부 활동이 끝나고 태섭은 곧장 대만의 집 근처 야외코트로 향했다. 다급한 걸음으로 걷다가 뛰어가다가 반복했다. 그가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괜히 마음이 불안했다. 혼자 코트에서 연습하고 있을까? 가만히 있을 위인은 아닌데. 기다리다 돌아갔을지도. 또 이상한 녀석들하고 어울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만 계속하며 코트에 도착하니 정대만은 코트 바깥에 설치된 벤치에 가만히 앉아 농구공을 손으로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태섭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아무 표정 없이 손안에서 농구공을 굴리다가 잡고는 머리 위로 공을 올려 슛을 쏘는 폼을 잡았지만, 던지진 않고 그대로 공을 내려 다시 손으로 굴리기 시작했다. 태섭은 그 전보다 천천히 대만에게 다가갔다. 조급함은 어느새 사라졌다. 가까이 다가오는 태섭을 알아챈 대만이 공을 굴리던 손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을 들고 태섭에게 다가와 이윽고 마주 봤을 때, 대만이 씨익 웃었다.

“연습 잘했냐?”

“네.”

“난 아마 한동안은 참관만 할 것 같지만, 잘해보자. 우리 우승해야 해.”

“……잘 부탁드립니다.”

태섭이 정중하게 건넨 인사에 대만이 잠시 놀랐다가 피식 웃었다. 대만이 웃는 모습에 태섭이 입을 비죽이며 물었다.

“왜 웃어요?”

“왜 갑자기 존대해?”

“그야……. 같은 학교고, 농구부 선배고…….”

“오 선배 대우 해주는 거야?”

“해야죠. 운동부의 원칙 같은 거잖아요.”

“……그렇긴 하지. 그래도 좀 아쉬운걸.”

“뭐가요?”

“송태섭의 친한 형으로 있는 게 재밌는데 말이야.”

태섭은 대만의 말을 듣고 눈을 끔벅이며 이해하려고 문장을 곱씹었다. 나의 친한 형. 얼마 지나지 않아 이해한 태섭의 얼굴은 불만스러운 듯하면서도 싫지 않은 눈을 하고 있었다. 친한 선배 해요. 그럼. 뚱하게 한 태섭의 말에 그건 당연한 거고. 라며 대만이 대답했다. 먼저 걸음을 옮기는 대만의 뒤로 태섭 또한 따라갔다. 앞서간 대만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날, 대만이 병원에 데려가라며 제 품에 떨어졌을 때, 정신이 서서히 들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기절한 불량배들이 땅에 널브러져 있는 사태를 보고 태섭은 모든 결과가 자신이 원인이라는 걸 알았다. 그대로 대만을 업고 도망치듯 달리기 시작해 그곳을 벗어났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등에 업힌 그의 심장 고동을 느끼면서 끝없는 불안으로 몸서리쳤던 태섭이었다.

이 사람이 깨어나면, 나를 싫어하면, 나를 두려워하면, 더는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면, 그러면 어쩌지.

이젠 그 어떤 것도 당신을 대신할 수 없는데.

태섭의 이런 두려움을 지금 대만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날려버린다.

“대만이 형.”

한참을 말없이 걷던 태섭이 앞서 걷던 대만을 불렀다. 호칭에 놀란 대만이 뒤를 돌아봤다. 태섭은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바로 대만과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형이 필요해요.”

“어엉?”

태섭의 말에 대만이 벙찐 얼굴로 멍청한 소리를 냈다. 당황스러워하는 대만을 보고 태섭은 계속 말했다. 곁에 있어 주겠다고 말한 대만에게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신의 곁에 있어야 내가 멀쩡할 수 있어요. ……평범할 수 있어요.”

말을 마친 태섭의 고개는 다시 바닥으로 향했다. 누가 들어도 이상한 말이었다. 하지만, 조상이 요괴의 힘을 받고 대물림 됐다느니 하는 말로 미친놈 취급을 받을 수는 없었다. 어디까지 이해했을까? 조금 더 자세히 말할 걸 그랬나. 대만은 저 할말만 내지르고 입을 다문 태섭을 내려다보고 그의 말을 곱씹다가 문득 든 의문을 입에 올렸다.

“너 멀쩡하잖아.”

“에?”

태섭이 고개를 들고 대만을 올려다봤다. 정말 이해 못 한다는 표정으로 태섭을 보고 계속 말했다.

“너 정도면 평균 아니야? 특출난 면은 딱히 없어 보이는데. 조금 날티나게 생긴 얼굴에 주먹 센 거 빼고는 특이한 건 없지 않냐?”

어디서부터 대만의 이해를 바로잡아 줘야 할지 막막하기도 했고, 그가 하는 말이 조금 열받기도 했다.

“그게 아니라. 그때, 양아치들 죄다 팼을 때, 그렇게 된다고요. 당신이 없으면.”

“그때……. 뭐 열받으면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거 아니야?”

“뭐라고요?”

“앞뒤 분간 안 될 정도로 화나면 그럴 수 있다고. 그 아드레날린? 뭐 그런 거 있잖냐. 그런 게 나온 거지. 응.”

태섭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앞니 두 개가 날아가고 턱이 깨진 인간이 정말 저렇게 생각했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대만에게 더 설명할 수가 없었다. 절대 그렇게 보였을 리 없었다. 지금과 비교하면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범주의 행동이었는데. 기절하면서 기억이 왜곡된 건지, 정말 그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워 보이는 태섭을 두고 대만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좋아하면 좋아한다. 솔직하게 말해 필요하니 마니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고.”

“……아.”

태섭의 얼굴이 점점 새빨개졌다. 대만은 의기양양하게 태섭을 보며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아, 아, 아니! 아니 그건 아닌!”

대만을 앞에 두고도 심장이 거세게 뛰고 당황스러움에 말도 더듬던 태섭은 눈앞이 핑 돌았다. 좋, 좋아? 좋아한다니? 내가? 정대만을? 아니 물론. 안 싫은데. 절대 싫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좋, 좋아한다고 말한 건 아닌데. 그런 의미가 아니라! 태섭이 눈에 힘을 주고 대만을 봤다. 그런 태섭의 얼굴을 보고 대만은 웃지 않으려고 애썼다. 너무 놀렸나. 울기 직전이네. 대만이 태섭의 어깨에 팔을 두르면서 말했다.

“크크. 우리 태섭이가 나를 너무 좋아하네.”

“……닥쳐요.”

“걱정 마라 태섭아. 적어도 앞으로 2년은 지지고 볶고 학교도 같이 가고 부 활동도 할 거고, 합숙도 할 거니까 오히려 좀 떨어지고 싶을걸?”

어깨동무를 한 대만을 봤다. 환히 웃은 얼굴을 보고 2년이라는 시간을 떠올리고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2년 후에는요?”

이번에는 대만이 태섭을 봤다. 뭔 기분이 이렇게 롤러코스터처럼 날뛰는 거야. 대만은 다른 손을 들어 태섭의 머리에 얹고는 어깨동무를 했던 팔로 헤드락을 걸며 머리에 얹은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악! 하지 마!”

“머리통도 쬐깐한 게 머릿속에 왜 이렇게 생각이 많아. 니가 우리집 전화번호를 모르나, 주소를 모르냐? 우리 부모님도 알고 있는 녀석이 왜 자꾸 헤어지는 생각을 하는 거야? 같이 있어 달라는 거 맞아? 아 뭐 지겨우니까 꺼지라는 거야?”

“아, 아니에요! 그! ……얼마 전까지는 영원히 안 볼 것처럼 그랬으니까.”

대만은 천천히 태섭의 머리를 놔주고는 그의 앞에 마주 섰다. 그랬지. 몇 주 전까지는 이 녀석을 다시는 안 보고 싶었지. 병실에 앉아서 대회 우승이라느니 같이 놀아주겠다느니 하는 말을 하나도 지킬 수 없게 되어버리고, 자신의 거짓말을 들어버린 녀석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땐, 그랬다.

“이제 안 그래. 진짜로.”

대만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진중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태섭이 웃었다.

“네. 알겠어요.”

“……알겠으면, 2년 후던 5년 후던 계속 네 옆에 있을 거니까. 벌써 지겨워하지 마.”

“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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