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문모음

[명헌준호] 신의 신부

거북신 명헌과 그의 신부로 바쳐진 어린 준호로 명헌준호

* 명헌이가 뿅을 안 씁니다.. 다른 애 같아도 이해해주세요

* 적폐해석 가득하지만 반박은 안 받습니다(뻔뻔





"이건 또 무슨 짓이지.."

짙은 녹색의 두루마기 차림의 남자가 팔짱을 낀 채 제 허리에도 오지 않는 작은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의 옷차림은 매우 단정했다. 누군가 목욕재계를 시키고 하얀 예복까지 입혀놓은 모습이었다. 머리에는 꽃으로 만든 관을 쓰고 있었고 손에도 들꽃으로 만든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아이의 앞에는 의식을 할 때 사용하는 제단이 있었고 그 위엔 고기는 물론이요, 과일과 음식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이는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당신에게 바쳐진...신부에요..."

아이의 말에 남자는 기가 찼다. 신부? 제물을 잘못 말한 거겠지. 아이의 말에 대꾸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노기가 서려있었다. 아이의 행색은 말끔했지만 자세히 보면 제대로 먹지 못해 몸이 또래보다 말라있었다. 옅게 화장을 하긴 했지만 얼굴 역시 또래와 비교하면 야윈 편이었다. 안봐도 뻔하지. 신에게 바쳐져도 아무 탈이 없을 만한 그런 연고가 없는 아이를 신의 신부가 되는 거라며 꼬드겨 바쳤을 게 눈에 선했다. 

"대체 날 뭘로 보고 이런 허튼 짓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역병으론 부족했나봐."

남자는 제단을 향해 손을 저었다. 그러자 올려져 있던 음식들이 순식간에 썩어 문드러졌다. 제단 옆에 치장되어 있던 꽃들도 시들어 힘없이 바닥으로 떨궈졌다. 그 모습에 아이는 겁에 질린 표정을 했지만 도망치진 않았다. 그저 꽃다발을 쥔 손에 더 힘을 주었을 뿐.

"그 인간들은 자기들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군. 그러니 이런 것들로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이겠지.."

남자의 시선이 아이의 얼굴에 꽂혔다. 목소리가 노기를 띄고 있는 것과 달리 시선은 차갑기만 했다. 아이는 동정도, 분노도 없는 시선이 자기가 앉은 제단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보다 무서웠다. 

"돌아가도록 해. 너 같은 어린 것에는 관심 없으니까."

"...자, 잠깐만요."

제단에서 몸을 돌린 남자의 다리를 잡은 건 아이의 가냘픈 팔이었다. 겁에 질린 눈동자를 하면서도 아이는 남자를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노, 노여워 하지 말아주세요. 제가 신부로 온 건 그... 마을에 퍼진 역병을 고쳐주셨으면 해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어요. 그러니까 이 이상 사람들이 죽지 않게 해주세요."

아이의 말대로 이 곳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마을엔 역병이 퍼져 있었다. 역병이 퍼진 이유는 남자 때문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마을에 퍼진 역병은 신벌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신이 거처하는 산의 연못을 더럽혔기 때문에 당연히 받은 벌이었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마을 사람들이 택한 것이 바로 '신부'를 바치는 일이었다. 말이 신부였지 실질적으로 산제물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네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

"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대로 두면 마을이 사라질 거에요. 그건 싫어요. 제가 태어난 곳이니까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노여움을 푸시고 마을에 퍼진 역병을 거둬주세요. 대신 제가 뭐든지 할게요. 당신의 신부로서.

어린 아이가 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말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의 말이 가진 무게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손을 벌벌 떨면서도 남자를 올려다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남자는 아이를 다시 한번 찬찬히 살폈다. 야윈 탓에 나이를 가늠하긴 어려웠지만 많아봤자 열 을 넘지 않았을 것 같았다. 남자는 몸을 숙여 아이와 눈을 맞췄다. 형형하게 빛나는 짙은 녹색의 눈을 앞에 두고 아이는 몸을 움츠렸지만 그 시선을 피하진 않았다.

"너보고 죽으라고 떠민 사람들이 사는 마을인데도 소중해?"

"....네, 그래도 소중해요. 제 가족이 있었고 제가 있었던 곳이니까."

"흐응..."

꽃다발을 쥔 손이 힘이 들어가다 못해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기세였지만 그럼에도 아이는 제 할 말을 다 했다. 건방진 꼬마.. 라며 무시해도 되겠지만 남자는 아이의 올곧은 시선이 제법 맘에 들었다. 어린애를 돌보는 건 내 취향은 아니지만.... 남자는 다시 몸을 일으켰고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썩어문드러졌던 음식들과 시들어 떨어진 꽃들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마치 시간을 다시 되감은 것 처럼. 원래 있던 모습 그대로 돌아왔다.

"용기 있는 꼬마네. 좋아. 널 봐서 이번은 넘어가주겠어."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이는 활짝 웃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뭐가 그리도 좋은 걸까. 마을은 구했다지만 이제부터 너는 그 마을에 갈 수 없게 되는데.. 남자는 기뻐하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부터 너는 내 신부야."

"아, 네, 네...저 열심히 할게요!"

"뭘 시킬 줄 알고 열심히 한다는 거야?"

아이는 순순히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손을 잡았고 남자는 그 손을 그대로 잡아끌어 품에 안아들었다. 가볍다. 자신이 인간과 다른 완력과 체력을 가진 걸 감안해도 아이는 너무 가벼웠다. 일단 데려가서 뭐부터 먹이는 게 좋겠어. 

"뭐,뭐든 할게요! 청소도 식사준비도 빨래도 그리고  또..."

아이는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읊었다. 하나같이 남자에게는 필요없는 일들 뿐이었지만 스스로 하겠다고 말하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그런 걸 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말을 경청하며 남자는 제단 쪽을 바라봤다. 가볍게 눈짓을 한 번 하자 위에 놓여있던 과일과 음식들이 저절로 허공에 붕 떠올랐다. 마치 누군가가 들고 옮기는 것마냥 허공에 떠서 이동하는 행렬을 보고 아이는 말하는 걸 멈추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이를 다시 한번 고쳐안고 남자는 천천히 제단 반대 편에 있는 숲으로 걸어갔다. 

"생각보다 할 줄 아는 게 많네. 다재다능한 신부라면 나쁘지 않아."

"칭찬 감사합니다. 저.. 신님 마음에 들도록 더 열심히 노력할게요."

"...이명헌이야."

"네?"

어리둥절해하는 아이와 시선을 맞추며 남자는 제 이름을 일러줬다. 이명헌. 이름없던 거북이가 영물이 되고 신이 되면서 얻은 이름이었다.

"신부라면 신랑 이름 정도는 알아야지. 네 이름은 뭐야?"

"제 이름은... 준호에요. 권준호."

"준호라.. 준호,,."

명헌은 몇 번이고 아이의 이름을 곱씹었다. 좋은 이름이네. 그렇게 말하며 아이, 준호의 등을 토닥였다. 숲 속 깊은 곳까지 도달한 두 사람 앞에 보인 것은 맑고 큰 연못이었다. 속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맑고 깨끗한 물에 준호가 감탄하고 있을 때쯤, 허공에 떠서 행렬을 이어가던 과일과 음식들이 연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퐁당, 퐁당, 소리를 내며 들어가는 모양새가 재밌는지 준호는 작게 웃었다. 명헌은 그런 준호를 한번 더 고쳐 안더니 천천히 연못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발자국씩 걸어나갈 때마다 명헌의 몸은 물에 잠겨갔고 준호는 명헌의 어깨를 꽉 잡았다. 

"겁낼 거 없어. 집에 가는 것 뿐이야."

등을 토닥이며 아이를 달랜 명헌은 점점 물에 잠겨갔고 물이 어깨까지 왔을 때 준호는 숨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두 팔로 명헌의 목을 꼭 끌어안은 채 자신에게 밀려들 물을 기다렸다. 하지만 어째선지 숨쉬는 건 물 밖과 다르지 않았고 물에 젖었다는 느낌도 없었다. 뭐지... 준호는 한쪽 눈을 살짝 떴다. 

"우와...."

그러자 눈 앞에 펼쳐진 건 수도에서 볼 법한 거대한 궁궐이었다. 그가 입고 있는 두루마기 색과 같은 짙은 초록으로 칠해진 궁궐의 지붕은 이 곳이 연못 속이 맞는 지 의심케했다. 준호 연못 밖에선 이런 게 안 보였는데.. 라고 생각할 때쯤 먼저 물 속으로 들어갔던 과일들이 두 사람의 앞을 지나갔다. 허공에서 혼자 움직인다고 생각했던 과일들의 아래에는 사람의 형태를 한 종이 인형들이 있었다.

"영차, 영차"

"명헌님께 바쳐진 음식이야"

"궁으로 가져가서 나눠먹자."

"영차, 영차"

과일들을 궁 안으로 옮기던 인형들은 명헌에게 안겨 있는 준호를 쳐다보곤 자리에 멈춰섰다. 명헌의 발 밑에 옹기종기 모여들어 그를 보며 인형들은 물었다.

"명헌님, 명헌님 이 아이도 먹는 건가요?"

"과일이랑 같이 먹을까요?"

"인간은 무슨 맛이에요?"

얼굴 없는 하얀 종이들이 발치에 모여 먹을거냐고 웅성거리자 겁에 질린 준호는 아까처럼 명헌의 목을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명헌은 가볍게 발을 굴러 인형들을 물러나게 했다.

"이 아인 내 신부야. 너희들이 모셔야 할 사람이지."

"신부?"

"정말? 명헌님의 신부래?"

"와아! 명헌님께 신부가 생겼다!"

"경사스러운 일이야. 잔치를 하자! 잔치다! 연회다!"

명헌의 말에 인형들은 소란을 피우며 궁으로 들어갔다. 하여간 다들 시끄럽긴.. 명헌은 안으로 사라진 인형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아직도 제 목을 끌어안고 있는 준호의 등을 토닥였다.

"저 아이들에게 익숙해지는 게 좋을거야. 앞으로 널 많이 도와줄 녀석들이니까. 시끄럽게 흠이지만."

"네에... 열심히..할게요."

익숙해지는 것도 열심히 하겠다는 건가. 정말 쓸데없이 성실한 꼬마야. 명헌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와 함께 궁 안으로 들어갔다.


***


"신부를 데려왔길래 역병을 거둘 줄 알았는데...아니었나보지?"

남색의 두루마기를 걸친 남자가 절벽 아래로 보이는 마을을 보며 물었다. 마을에선 시꺼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역병이 돌아 죽은 이들을 태우며 나는 연기였다. 검게 피어오른 연기는 하늘을 타고 올라가다 그대로 흩어졌다. 남자의 이름은 신현철. 명헌처럼 동물에서 영물로, 영물에서 신으로 우화한 존재였고 그 시간만큼 명헌과 알고 지낸 몇 안되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잘 알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보름 전, 명헌에게 바쳐진 어린 아이가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아이가 지금은 명헌의 저택에서 집안일을 하고 있다는 것도. 솔직히 그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땐 의외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바친 이유를 모르지 않을텐데 그 얄팍한 수에 넘어갈 명헌이 아니었다. 적어도 현철이 아는 명헌은 그랬다. 하지만 명헌은 현철의 예상을 뒤엎고 아이를 신부로 맞이했다. 숲에 사는 이들은 모두 명헌이 변했다고 입을 모았고 그걸로 끝날 일인 줄 알았다. 그런 그들의 예상과 다르게 명헌은 마을에 퍼뜨린 역병을 거두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신께 제발 살려달라 애원하다가 모두 병에 걸려 죽었다. 생존자 같은 건 없었다. 지금 마을에서 시체들을 정리하는 건 외부에서 온 자들이었다. 명헌은 팔짱을 낀 채 답했다.

"그래, 난 준호에게 이번은 넘어가주겠다고 했지만.. 그건 불손하게도 자신들이 아이를 제물로 바치면 신이 화를 풀거라는 생각을 가진 것에 대한 것이었지. 연못을 더럽힌 일에 대해 분노를 풀겠다고 한 적은 없어."

"...뭐냐 그건 결국 말장난인 거 아니냐."

"그건 아니지. 장난이라면 저 자들이 한 것이 장난이지."

신성한 연못을 더렵혀놓고 반성은 커녕 아무 죄없는 것을 희생시켜 용서를 구하는 저들이야말로 나를 우습게 여기고 장난을 치는 것이지. 현철은 명헌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팔짱을 꼈다. 명헌의 분노는 이미 신을 업신 여긴 것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자신의 신부를 함부로 대한 것에 대한 분노. 평소의 그를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지간히도 신부가 맘에 들었나보군."

"방금 뭐라 그랬나?"

"아니, 아무것도."

현철은 어깨를 으쓱이곤 마을에서 시선을 거뒀다. 그들의 잘못으로 분노한 것은 명헌이었으니 그가 무엇을 하든 자신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었다. 딱하다. 라는 생각이 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신의 분노를 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가 알면 꽤 충격 받을텐데 괜찮나"

"모르게 하면 그만이야."

"모를 수가 있나. 저긴 여기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야. 지금이야 모른다쳐도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 거다. 괜찮겠어?"

정곡을 찔렀는지 명헌은 대답이 없었다. 옛날부터 저랬지.. 불리한 말에는 입을 다물어버리는 거. 현철은 대답없는 명헌의 옆으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랜 벗으로서 충고 하나 하자면 신부에게 미움 받을 짓은 자제 하는 게 좋아."

어린 인간일수록 사소한 것에 상처받는 법이니까. 그 말을 남기고 현철은 명헌에게서 멀어져 숲 속으로 사라졌다. 

"참.. 지적하지 않아도 될 걸 지적하네."

이제는 보이지 않는 친구의 뒷모습을 보며 명헌은 중얼거렸다. 절벽 아래에서 올라오는 검은 연기를 바라보던 명헌은 몸을 돌려 연못으로 향했다. 여느 때와 같이 맑고 투명한 물을 간직한 연못에는 명헌의 신부, 준호가 서 있었다.

"명헌님!"

명헌을 보고 준호는 반갑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자신의 옆으로 달려온 준호를 보고 명헌은 그의 손을 잡았다. 

"다녀오셨어요? 현철님은 잘 만나셨나요?"

"그래. 그런데 어째서 이런 곳에 혼자 있어? 궁에 다른 이들이랑 있지."
"그게..."

명헌님이 언제 오시는지 궁금해서요.. 준호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명헌은 그런 준호를 안아들고 준호의 턱을 들어 눈을 마주했다.

"내가 말했지. 내 앞에선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된다고.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렇게 바른 눈으로 날 봐. 날 그렇게 볼 수 있는 건 내가 신부라고 인정한 너 하나 뿐이니까."

"...네, 그럴게요."

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명헌을 끌어안았다. 준호는 명헌에게 안겨 있는 걸 좋아했고 명헌 역시 준호를 안고 있는 걸 좋아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이대로 자라지 않으면 좋을 텐데'

아이가 들으면 싫어할 생각을 하며 명헌은 연못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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