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만약

대만준호

어?

준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방금 체육관 2층 문 앞에 누군가 서 있지 않았나? 언뜻 목발을 짚고 돌아서는 뒷모습을 본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 목발을 짚은 사람이라고 하면, 준호가 떠올릴 수 있는 건 당연히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정대만.

준호는 바로 옆에 앉은 다른 친구들을 두리번거렸다. 모두가 눈앞에 펼쳐 지고 있는 농구 시합에 푹 빠진 탓에 2층에 잠깐 서 있다 사라진 그림자를 본 것은 준호 자신 한 사람뿐인 것 같았다. 준호는 혹시나 싶어 바로 옆에 앉은 친구에게 "방금 대만이 못 봤어?"하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친구는 "정대만? 걔가 여길 왜 와?"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 넘길 뿐이었다.

준호는 다시 고개를 들어 조금 전, 그림자를 보았던 2층 문을 쳐다보았다. 목발의 흔적 같은 건 당연히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아주 잠시 스치듯 본 게 전부이기도 했다. 권준호는 시력이 나쁜 편이었고, 운동할 때 쓰는 안경은 도수가 높은 편이 아니었으므로 교정 시력도 그렇게 좋지는 못한 편이었다. 그러니까...

「정대만? 걔가 여길 왜 와?」

그래, 그 말이 맞았다. 혹시 경기 보러 올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병원에 전화했을 때에도 대만이네 어머니께서 수술 받은 직후니까 그렇게 멀리까지 가진 못 할 것 같다고 대신 대답해 주셨다. 그러니까... 대만이가 체육관까지 왔을리가 없잖아.

준호는 입술을 말아물었다. 지금은 경기가 한창 진행 중이었고 함부로 자리에서 움직여선 안 됐다. 안 그래도 깐깐한 2학년 선배들에게 찍힐 만한 행동을 하고 싶진 않았다. 이제 이번 경기가 끝나면 3학년 선배들은 다 은퇴할 테니까. 그래, 역시 내가 잘못 본 거겠지. 기분 탓일 거야. 그리고 제대로 본 것도 아니었잖아? 준호는 스스로에게 되뇌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그래도 계속 눈이 문가로 돌아가는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몇 번이나 문가를 힐끗거리던 준호는 치수가 리바운드를 잡아내는 순간, 벤치에서 터져나오는 함성에 끌려 비로소 코트로 다시 눈을 돌렸다. 그리고는 최대한 경기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치수가 오늘 이 경기에서 활약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누구보다 준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친구로서 이 경기를 잘 지켜봐줄 의무가 있잖아...

하지만 결국 준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같은 1학년 친구들은 준호가 서서 응원을 하려는 줄 알고 덩달아 일어섰다. 다같이 목청껏 "북산 화이팅!"을 외치는 가운데, 준호는 옆자리 친구에게 다시 귓속말을 건넸다.

"나 화장실 갔다올게."

친구가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

"지금?"

친구가 선배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더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준호는 "나 너무 급해서! 빨리 갔다올게!"하고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준호는 문을 향해 달려가는 내내 누군가 자신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절대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뛰었다. 선배들의 날선 얼굴과 눈이 마주치면 그 순간 마음이 약해져서 벤치로 돌아가 앉고 말, 겁쟁이 같은 자신을 준호는 너무 잘 알았다.

체육관을 나선 준호는 방향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생전 처음 온 체육관이라 복도가 낯설었다. 선수용 락커룸이 있는 1층으로 가는 길 말고는 전부 초행길이었다. 준호는 무작정 2층으로 가는 계단을 뛰어오르다가 퍼뜩 걸음을 멈췄다. 생각해보니 대만의 그림자를 보았던 게 꽤 한참 전이었다.

그럼 지금쯤이면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지 않았을까? 대충 시간을 계산해보면 지금쯤 대만은 정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고 있는 중일 것 같았다. 준호는 다급하게 몸을 돌려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순간, 계단 가장자리에 발끝이 걸렸다. 마음이 너무 앞서서 상체가 잔뜩 기울어진 탓이었다. 계단 위에서 중심을 잃은 준호는 그대로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나마 높이 올라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서너 계단을 구르는 것에 그친 준호는 아파할 틈도 없이 벌떡 일어섰다. 계단 모서리에 찍힌 무릎에서 피가 비치는 걸 언뜻 본 것도 같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준호는 정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모든 사람들이 경기를 보러 가서 한적한 복도에서 준호의 발소리만 요란하게 울렸다. 화장실을 갔다 오느라, 아니면 각자의 사정 때문에 체육관에 늦게 도착해서 복도에 있던 사람들은 쿵쾅거리며 뛰어오는 준호를 보고 화들짝 놀라 벽으로 몸을 붙였다. 준호는 "죄송합니다!"하고 사과의 말을 던지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만 달렸다.

복도를 가로지르는 동안, 준호는 넘어진 것이 무색하게도 다리가 평소보다도 더 가볍다는 생각을 했다. 농구부에서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코트를 반복해서 뛸 때는 그렇게 무겁고 느리던 다리가 지금은 마치 깃털 같았다. 사슴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준호는 복도를 겅중겅중 뛰면서 재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목발을 짚은 그림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준호는 거침없이 유리문을 열고 체육관 밖까지 박차고 나왔다. 체육관 안에서만 신는 농구화 차림으로 외출이라니. 평소의 권준호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 어떤 것도 준호를 막을 수 없었다. 준호는 체육관을 빠져 나와 아스팔트 도로를 위를 달리면서 열심히 주변을 살폈다. 어느새 가빠진 호흡 속에서 준호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마치 딸꾹질처럼 대만의 이름을 토해냈다.

"...대만아."

입술 밖으로 이름이 톡 한 번 튀어오르자 물꼬가 터진듯이 목소리가 커졌다.

"대만아! 정대만!"

준호는 목청껏 대만의 이름을 부르며 달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 어디에도 목발을 짚은 그림자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준호는 체육관 건물 앞에 있는 작은 화단과 경사로까지 모두 내려온 뒤, 체육관 이름이 적혀 있는 커다란 비석도 지나쳤다. 이제 준호는 체육관 주차장까지 전부 지나쳐 완전히 바깥에 도착해 있었다.

길을 지나던 행인들은, 갑자기 숨을 헐떡이며 뛰쳐 나온 고등학생을 힐끗 쳐다보고는 한두 걸음쯤 빙 돌아서 지나쳐 갔다. 준호는 가쁜 숨을 헥헥 몰아쉬며 주위를 다시 두리번거렸다. 모두가 자신만의 생각에 잠긴 채 앞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그 어디에도 목발을 짚은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놓친 걸까?

아니, 어쩌면 대만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목발을 짚었다고 해서 다 정대만일리도 없었고, 애초에 누군가 목발을 짚은 모습조차 명확하게 보았던 게 아니었다. 그냥 내가 혼자 멋대로 착각하고 기대했던 걸지도 몰라. 괜히 혼자 멍청한 짓을 한 셈이었다. 돌아가면 선배들에게 혼나겠네. 준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체육관 방향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목발을 짚고 서 있는 대만과 눈이 마주쳤다.

"...대만아."

대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준호는 대만의 시선이 자신을 아래에서부터 찬찬히 훑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신경쓰지 않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준호는 쑥스럽고 민망해졌다. 언제나 깨끗해야 하는 농구화에 묻은 흙먼지도, 체육복 바지 너머로 피가 배어나기 시작한 무릎도, 땀에 절어 번들거리는 목덜미와 뺨, 헐떡이느라 벌어진 입술,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까지 전부 다.

준호는 황급하게 소매 끝을 당겨 얼굴의 땀을 닦아냈다. 대만이 온 것 같아서 뛰어나오긴 했으나 막상 만나면 무슨 말을 할지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제서야 떠올랐다. 바보 같은 권준호. 준호는 스스로를 비난하며 죄없는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어쨌든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이렇게 헐레벌떡 뛰어나와서 찾아놓고 아무 말 안 하는 거야 말로 진짜 바보 같아 보일 테니까.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아까 넘어지면서 뇌를 어디다 흘리고 온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래서 그냥 대만을 빤히 쳐다보던 준호가 겨우 내뱉은 말이라곤,

"나랑 농구 같이 보자."라는 말이 전부였다.

준호는 입밖으로 내뱉고 난 뒤에야 아차 싶었다. 아니, 이게 무슨 멍청한 소리야. 안 그래도 농구 경기 같이 보자고 전화했다가도 어머니를 통해 거절당했는데. 심지어 대만이는 지금 농구 경기를 보다가 나온 참인데. 이제 와서 농구를 같이 보자는 게 무슨 말이야. 준호는 자기자신이 너무 바보 같아서 얼굴을 찡그렸다.

역시 대만이 보기에도 영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목발을 짚은 대만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절뚝절뚝 돌아서는 게 보였다. 준호는 자신을 등지고 멀어져 가는 대만의 뒷모습을 멍청하게 바라보고 서 있었다. 배웅이라도 해야 하나? 아니, 근데 뭔가 이상했다. 지금 대만이 가는 방향은 바깥이 아니라 체육관 쪽이었다. 준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그때 앞서 걷던 대만이 뒤를 돌아보곤 핀잔을 던졌다.

"안 오고 뭐 하냐?"

…아!

준호는 활짝 웃으며 "응, 지금 가! 같이 가!"하고 대만을 향해 뛰어갔다. 대만을 부축해서 같이 경기장으로 가는 내내 준호는 또다시 사슴이 된 것처럼 다리가 가벼워졌다. 마음은 더더욱 가벼웠다. 옆을 힐끗 쳐다보자 대만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돌아가면 분명히 선배들에게 혼날 것을 아는데도 준호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대만이를 찾아 나오길 잘했어. 만약 안 나왔으면 난 평생 후회했을 거야. 준호는 경기장으로 돌아가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 지금 나오지 않았다면 나는 남은 인생 내내 이 순간을 곱씹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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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딩하는 북극여우

    너무 아름다워요.. 그리고 정말 만약 그랬으면 어땠을까 싶어서 가슴이 아파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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