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문모음

[대만준호] 대만과 사슴준호

-뒷이야기는 없는 얘기

영물. 신령스러운 물건이나 짐승을 가리키는 말. 본 수명보다 몇배고 긴 시간을 살아간 끝에 신통력을 얻게 된 동식물을 말하지만 현대의 사회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인간의 문명이 발달해가면서 영물들은 점점 인간들과 섞이지 못하게 됐고 자신들이 있을 곳을 찾아 그들은 도원향으로 떠났다. 그들 중에서 극히 일부만이 여전히 인간사회에 남아 그들 사이에 섞여 살아가고 있다. 속세에 남길 선택한 그들은 평범한 인간이라면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간들 사이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가령 이 안경 쓴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의 정체가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 이런 말이었다.



***



"여기도 오랜만이네."

대만은 어깨에 맨 가방을 고쳐메고 역 앞을 두리번 거렸다. 자신이 기억하던 것과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었다. 작은 기차역 대합실을 지나면 길게 가로수가 이어진 산책로가 보이던 한적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앞에 큰 광장이 생겨 사람들이 수없이 지나다니는 북적한 곳이 되었다. 달라져도 너무 달라진 고향의 풍경에 대만은 새삼 놀라며 택시 승강장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어? 정대만 선수...?"

정차되어 있는 택시에 오르니 중년의 택시 기사가 놀란 얼굴을 하고 그를 쳐다봤다. 자신을 알아본 기사를 향해 한 번 더 인사를 하자 기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만나서 반가워요! 이야.. 오늘은 운수가 좋으려나보네. 마수걸이로 유명인을 태우고 말이야."

첫 승객이 대만인 것이 어지간히도 기쁜지 택시 기사의 입꼬리가 귀에서 내려올 줄 몰랐다. 대만은 그런 기사의 반응이 반가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피곤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던 시즌을 마치고 비시즌에 들어간 대만은 혼자 조용히 지낼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굳이 본가가 아니라 어릴 적 잠시 살았던 이 곳으로 온 거였는데 이렇게 오자마자 자신을 알아보는 이와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어이쿠, 내 정신 좀 봐. 그래서 어디로 모셔다 드릴까? 요즘 여기 관광산업이 잘돼서 여행하기 좋아졌어~"

"그랬구나.. 어쩐지 어릴 때 기억이랑 많이 달라서 좀 놀랐어요. 여기 적힌 주소지로 가주세요."

대만은 주머니에서 볼펜으로 휘갈겨 쓴 쪽지를 꺼내 기사에게 건넸다. 어린시절 그가 2년 정도 살았던 집의 주소였다. 기사는 주소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대만을 쳐다봤다.

"으음, 진짜 이 주소로 가는 거 맞아요? 이 주소대로 가면 골프장인데?"

"네? 골프장이요?"

"그게 한 6년 됐나... 이 주소지에 있던 집들이 다 이사를 가서 마을이 빈터가 됐는데 거기에 골프장이 들어왔지. 덕분에 사람들이 많이 오긴 하는데 누가 살거나 하진 않아."

"그래요...."

벌써 20년이 지났으니 그 곳의 모습이 그 때와 똑같은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예 마을이 없어졌다는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침울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던 대만은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그럼 마을 뒤에 있던 산은 어떻게 됐어요? ...다 밀렸나요?"

"산은 그대로야. 그 산이 개인 소유인데 팔라고 해도 안 팔고 버텨서 거긴 냅두고 지었다던데... 거기에 자연보호단체에서도 난리여서 한동안 시끌했지."

산은 그대로... 그러면 혹시... 아니 그래도 말이 안돼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그래서, 여기로 가면 되겠어?"

"...네, 부탁드릴게요."

대만의 말과 함께 택시는 부르릉 소리를 내며 힘차게 출발했다. 목적지로 가는 동안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자신의 기억 속 풍경과 확연히 달랐다. 고즈넉했던 시골풍경은 관광지의 북적거림으로 바뀌어 있었고 금빛을 자랑하던 논밭은 아스팔트 도로가 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 변화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변화를 넘어 아예 다른 곳이 된 것 같은 모습에 대만은 허탈감을 느꼈다. 반가움 대신 느껴지는 상실감에 그는 한숨을 쉬며 한없이 창 밖만 바라봤다. 20분 정도 달려 택시가 멈춘 곳은 기사의 말대로 골프장 앞이었다. 골프장 주차장에 내린 대만은 기사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주변을 살폈다.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고급차들과 골프가방을 메고 안으로 들어가는 중년의 남녀. 간혹 젊은 사람들이 보이긴 했지만 대부분 대만의 부모님 또래의 중년들이었다. 드나드는 사람들을 보고 대만은 골프장이 특정 부류를 타겟으로 한다는 걸 깨달았다. 오래 있으면 귀찮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대만은 발걸음을 돌렸다. 온 지 5분도 안됐지만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택시 괜히 보냈다.."

언제 다시 불러서 돌아가나 라는 생각을 하며 대만은 핸드폰으로 꺼냈다. 어플로 택시를 불러 돌아갈 생각이었다. 택시가 금방 잡히긴 했지만 이 곳까지 오는데 20분 이나 걸렸다. 어디서 시간을 떼워야 하나 라고 생각하던 차에 대만의 시야에 작은 건물 하나가 들어왔다. 골프장 입구 오른 편에 있는 개인 카페였다. 깔끔한 아이보리 색 간판에 '머물다 가는 곳' 이라는 카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딱히 갈 곳이 없으니 커피나 마시면서 택시를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대만은 카페 문을 밀었다. 딸랑- 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고소한 원두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분위기 괜찮은데 라고 생각하며 카운터 쪽을 바라본 순간.

"어서오세요~"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하는 안경 쓴 젊은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대만은 28년 인생처음으로 첫 눈에 반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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