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환수겸] 김감독의 내 집 마련 프로젝트 02
신혼부부 특별공급 가보자고
정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정작 상대방은 정환의 그런 표정은 아랑곳않고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분명 저쪽은 뭐가 그리 좋은지 웃고 있는데, 정환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연히 그럴 만했다. 김수겸은 그저 이정환의 고교 시절 친구…는 아니고, 동창…이라기엔 같은 학교는 아니었으며. 좋게 말해봐야 선의의 경쟁자…? 정도 되었던, 이정환이 한창 고교 농구계에서 활약하던 시절 라이벌로 불리던 같은 지역 출신 동갑내기일 뿐이었다.
이 정도의 얄팍한 관계는 고교 졸업과 동시에 이정환이 농구를 그만두면서 자연스럽게 끊겼다가, 몇 년 전 열린 지역 동창회에서 건너건너 아는 동창들을 불러 모으다 보니 우연히 마주치면서 겨우 다시 만난 게 다였다.
사실 당사자에게 따로 밝힌 적은 없었으나, 정환은 살면서 종종 수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수겸은 그 후로도 계속 농구를 하고 있었고 정환의 주변 지인들 또한 농구계에 발을 담근 경우가 많았기에, 일부러 찾지 않아도 쉽게 수겸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몰랐지만 사실 정환은 고등학교 졸업 후 끊어진 이 짧은 인연에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동창회 날 우연히 재회한 수겸에게 선뜻 먼저 명함도 건넸다. 그러나 그 후로 그들이 직접 만날 기회는 없었고, 일 년에 한 두어 번 정도 명절이나 새해가 되면 안부 인사차 짧게 연락을 주고받은 게 전부였다.
그랬던 김수겸이 어느 날 갑자기 뜬금없이 회사 앞까지 찾아왔다. 일단 먼 걸음 한 손님을 그냥 내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수겸을 만나러 나서면서도, 정환은 도무지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용건이 뭐야?”
결국 정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의문이 가득 담긴 어조로 물어도 수겸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정환의 불안감이 더해질 무렵 수겸이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너 애인 있어?”
“아니. 없는데?”
“그럼 좋아하는 사람은?”
“…없는데. 왜?”
“너 집 필요하냐?”
“딱히 당장 필요하진 않는데. 근데 왜…?”
“앞으로도 살 생각은 있고?”
“뭐, 굳이 살 필요는 없는 상황이라. 아니, 이런 건 대체 왜 물어보는 거야?”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듣자마자 수겸의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수겸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찾았다! 내 이상형! 드디어 합격이다!
수겸은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눈을 번뜩이며 정환의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너무도 부담스러워서, 정환은 몸을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엄청난 말이 귀를 뚫고 뇌까지 내리꽂혔다.
“이정환. 나랑 결혼하자.”
수겸을 향해 정환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면서 동시에 입이 점점 더 벌어졌다. 너무 충격적인 일이라 뇌가 제 기능을 하는데 잠시 시간이 필요한 듯 보였다. 그러나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오진 못했는지 갑자기 말까지 더듬거렸다.
“너, 너, 너…! 갑자기 그게 무슨…?!”
“내가 지금 결혼할 상대가 필요한데, 내 주변 사람 중에 네가 딱인 거 같아서.”
“아니, 너는 무슨 그런 말을 몇 년 만에 얼굴 본 사람한테 하니?”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고작 몇 년 얼굴 못 본 게 뭐 대수라고.”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도대체 이걸 어디서부터 지적을 해야 하는 건지. 내가 왜 굳이 당연한 소리를 하면서까지 이 이상한 논리에 반박해야 하는 건지. 그리고 저 녀석은 어떻게 저렇게 당당하게 미친 소리를 하면서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건지. 정환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심각한 얼굴로 잠시 이마를 짚고 있던 정환이 힐끔 건너편에 앉은 수겸을 보았다. 지금 김수겸은…. 온 얼굴에 미소를 띠고 눈을 반짝이면서 정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더니. 일단 정환은 따지고 싶었던 생각은 접고 좋은 말로 설득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거절하면 어떡할 건데?”
“그럼 다른 사람 다시 구해봐야지.”
“하아…. 너 진짜 아무나 붙잡아서 결혼할 셈이야? 너 결혼이 장난 같아?”
“아니? 나 지금 완전히 진지한데?”
정환의 미간의 주름이 더 깊게 파였다. 무슨 말이 통해야 설득을 하든지 할 텐데. 지금 수겸의 상태로 봐서는 어떤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정환의 속도 모르고, 수겸은 팔짱을 낀 채로 다리까지 꼬고선 당당한 태도로 말했다.
“그래서 나랑 결혼해줄 거야? 말 거야? 빨리 결정해. 나 시간 별로 없으니까.”
막무가내인데 심지어 뻔뻔하기까지.
정환은 지금 말 그대로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수겸은 지금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고 있었고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당연히 거절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대로 거절하고 수겸을 그냥 보내기엔 영 꺼림칙한 구석이 있었다. 정환은 결심을 유보하기로 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심사숙고 뒤 내뱉은 결론에 수겸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이 복잡한 정환과 달리 수겸으로선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그렇게, 김감독의 두 번째 프러포즈(?)는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마무리되었다. 각자 집에 돌아가는 발걸음이 한 명은 엄청나게 무거웠고, 다른 한 명은 무척이나 가벼웠지만.
“형.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어딘가 정신 나간 얼굴로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정환을 보며 전호장이 물었다. 이정환과 신준섭, 전호장은 고교 시절 농구부에서 주전으로 함께 뛰었던 인연으로 졸업 후에도 쭉 만남을 이어오고 있었다. 오늘은 그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날이었는데, 이 날따라 정환의 상태가 좀 이상했다. 따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준섭도 그런 정환의 변화를 눈치채고 내심 걱정하고 있던 차에 호장이 먼저 운을 떼니 그에 동조하며 정환을 바라보았다.
동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자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잠시 내려놓은 정환이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나 프러포즈 받았다.”
“대박! 완전 축하드려요!! 근데 정환이형 애인 있으셨어요? 저희한테 말도 안 하고 언제부터 사귄 거예요??”
“형. 축하드려요.”
우려와는 달리 들려온 좋은 소식에 호장과 준섭이 한결 풀어진 얼굴로 축하의 말을 건넸다. 곧바로 질문 세례를 퍼붓는 호장을 보며 겸연쩍게 웃던 정환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희한테 상담을 좀 받아볼까 싶어서.”
“엥? 상담을 저희한테요? 저희 둘 다 미혼인데??”
나란히 앉은 준섭과 호장이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호장이는 얼굴에 의문이 가득했고, 준섭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정환에게 되물었다.
“혹시 저희가 아는 사람인가요?”
“에엑-? 누군데요?! 누구한테 프러포즈 받으신 건데요???”
준섭의 물음에 깜짝 놀란 호장이 궁금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정환을 재촉했다. 그러나 정환은 쉽게 답하지 못하고 어물쩍거렸다.
말하면 분명 둘 다 놀라겠지.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언제까지 피하고 있을 순 없어서 결국엔 실토했다.
“…김수겸.”
그 순간 하필이면 주스를 마시고 있던 호장은 너무 놀란 나머지 모든 동작이 멈춰버렸다. 그러자 미처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못한 액체들이 그의 입가에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옆에 있던 준섭이 잽싸게 냅킨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준섭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정환이 뭐라 설명을 덧붙이기도 전에 정신을 차린 호장이 먼저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김수겸…이면, 저희가 알고 있는 그 김수겸이요?? 상양고 출신 김수겸?? A 구단에서 뛰다가 은퇴하고 지금 OO대학에서 감독하고 있는 그 김수겸이요???”
“맞아. 그 김수겸.”
“이럴 수가…. 아니, 대체 두 분 언제부터 사귀고 있던 건데요??? 어떻게 저도 모르게 두 분이 그러실 수가 있어요???”
“그게 사실, 우리가 사귀고 있던 건 아닌데.”
“네?? 그치만 프러포즈 받으셨다고???”
끄덕.
정환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러나 호장의 얼굴은 질문을 거듭할 때마다 점점 옆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머리 위로 보이지 않는 물음표가 백만 개는 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평소 그 침착하던 준섭마저도 혼란스러운 얼굴로 정환을 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테이블에 놓여있던 정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뜬 발신인의 이름은 ‘김수겸’이었다.
아니,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문제의 이름 세 글자를 발견한 호장의 입이 벌어지기가 무섭게 준섭이 잽싸게 그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정환에게 턱짓으로 얼른 받으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정환이 그제야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겸의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쏟아졌다.
[이정환! 너 지금 살고 있는 집, 전세야? 아니면 월세?]
“아니. 자가인데?”
[뭐?! 그럼 네 명의야?]
“그건 아니고. 법인 명의인데. 왜?”
[휴, 십년감수 했다.]
“뭐가?”
[아무튼, 네 명의로 된 부동산 자산은 따로 없는 거지?]
“어. 그럴걸?”
[됐어. 그럼 통과.]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잽싸게 끊어진 통화에 정환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휴대전화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난 호장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형, 이거 사기에요-!!! 사기 결혼이 분명하다구요-!!!”
“호장아. 여기 레스토랑이야….”
순간 레스토랑의 모든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는 게 느껴지자 정환은 차마 얼굴을 똑바로 들 수가 없었다. 결국 이번에도 준섭에게 연행된 호장이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아직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런 호장과 정환을 번갈아 보던 준섭이 조용히 물었다.
“형 생각은 어떠신데요?”
준섭의 물음에 정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번만큼은 호장도 차분하게 기다렸다. 본인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듯 낮게 웃으며 정환이 대답했다.
“이렇게 갑자기 결혼하는 게 말도 안 되는 상황이긴 하지.”
“맞아요!! 사귀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결혼하자고 하는 게 어딨어요!! 분명 어떤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게 분명하다구요!!!”
“근데 막상 거절하자니 마음에 걸려서….”
“네? 저기, 정환이형? 아니, 대체 뭐가 마음에 걸려요???”
호장은 자신에게 어떤 동물적인 육감이 있다고 자부해왔다. 그 육감이 지금 말하고 있었다. 나 지금 불안하다. 이거 위험하다. 정환이형이 위험하다.
그리고 그의 육감은 이번에도 정확했다.
“김수겸이 그랬거든. 내가 거절하면 다른 사람 아무나 잡아서 결혼할 거라고.”
“아악-!!! 정환이혀엉-!!!! 그딴 말에 속아 넘어가면 안 돼요!!!!!!!!”
“아니, 진짜로 그럴 것 같은 뉘앙스였어. 그리고 나한테 이러는 거 보면 충분히 모르는 사람한테 결혼하자고 할 법도 하고.”
이 형 진짜 큰일 날 사람이네.
호장은 정환을 오랫동안 알아 온 후배로서, 정환이 겉모습과는 달리 잔정이 많고 의외로 무르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20년 전에도 자신이 조르면 다른 지역에 있는 시합에 데려가기도 했고, 심지어 가는 길에 다른 학교 후배까지 주워서(?) 갔던 사람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사람 본성이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아무리 가장 좋아하는 선배라지만, 이번만큼은 절대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이건 정환이형의 남은 인생이 걸린 문제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형이 무슨 자원봉사자예요?? 결혼이 무슨 적선이에요?? 불우이웃돕기에요???”
“아니, 호장아…. 그렇게 말하면 김수겸이 진짜 불우이웃 같잖아.”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형 지금 그쪽 사정이 딱하다고 거절 못 하는 거잖아요!!! 이런 사람이 대체 사업은 어떻게 한 거야?!!”
“이번엔 호장이 말이 맞아요, 정환이 형.”
가만히 듣고 있던 준섭까지 동조하자 호장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정환을 돌아보았다. 사실 정환도 동생들이 이렇게까지 나오는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정환에게도 나름의 속사정이란 게 있었다.
“물론 김수겸이 걱정되기도 하지만. 내가 그 이유 하나만으로 고민하는 건 아니야.”
“네?? 그럼 뭐요?? 무슨 고민이 또 있는데요???”
“하하…. 아직은 말 못 해.”
“아, 정환이형!! 저희한테 못 할 말이 뭐가 있는데요-!!!”
그날, 호장은 그들이 헤어지는 순간까지 정환을 달달 볶았지만, 정환은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정환이 수겸과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 지난 후였다.
만나자는 연락을 받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온 수겸이었지만 막상 얼굴을 마주하고 나니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번엔 안 되면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긴 했으나, 사실 정환에게 거절당하고 나면 수겸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한 손바닥을 바지에 슬쩍 문질러 닦으면서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는 수겸에게 정환이 먼저 입을 열었다.
“김수겸.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 나랑 결혼하려는 이유가 정확히 뭐야?”
“정확히…?”
“그래. 구체적으로. 내가 납득 할 수 있게.”
시작부터 정곡을 찔렸다.
수겸은 가슴 속에 있는 자신의 양심이 아우성치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엄청나게 빨리 뛰었다. 그러나 피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정면으로 부딪쳐야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대답 대신 수겸은 주섬주섬 가방을 열더니 그 안에서 한 종이 뭉치를 꺼내 테이블 위에 탁 소리가 나게 올렸다. 정환이 물끄러미 보고만 있자 보기 좋게 반 바퀴 돌려서 그의 앞으로 밀어 넣었다. 자신의 앞에 내민 종이를 집어 든 정환이 그 위에 적힌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 < 더퍼스트로얄센트럴시티앤리버팰리스 > ? 이게 뭐야?”
“뭐긴 뭐야. 아파트지.”
수겸이 내민 종이는 조만간 새로 분양 예정인 아파트 단지의 홍보 팸플릿으로, 오늘 수겸이 해당 아파트의 모델 하우스에 다녀오면서 받아 온 것이었다.
손에 든 팸플릿을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보고 있던 정환이 다시 수겸과 눈이 마주쳤다. 이 정도면 정환도 눈치를 챘을 법하니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나 이 아파트 청약 넣을 거야. 그런데 당첨 확률을 올리기 위해선 ‘신혼부부’여야 하거든?”
“하아, 너 진짜…. 진짜로 이것 때문에 나랑 결혼하자는 거야? 고작 이런 아파트 하나 때문에?”
“뭐? 고작이라니! 이 아파트는 그런 아파트가 아냐!”
정환의 말에 수겸은 거세게 반발했다. 마치 자기가 욕이라도 먹은 듯한 태도여서 정환이 어안이 벙벙한 사이, 정환의 손에 들려있던 팸플릿을 뺏어 든 수겸이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기며 이 아파트의 엄청난 스펙을 술술 읊어대기 시작했다.
“이 아파트는 무려 지하철 노선 3개가 인접한 트리플 역세권이고! 1,000세대 이상 대규모 단지를 구성하고 있으며! 여느 공원 부럽지 않은 단지 내 경관과 시설물이 조성될 예정이야! 그리고 입주민에게 제공되는 단지 내 공용시설 또한 수영장, 골프연습장, 헬스클럽, 카페, 편의점 등 다양하지. 게다가 반경 2km 안에 종합병원, 대형쇼핑몰, 공공기관 등이 있는! 한 마디로 생활 인프라가 끝내주게 갖춰진 노른자 땅 위에 자리 잡고 있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잠시 말을 멈춘 수겸이 갑자기 팸플릿을 뒤적거리더니 어느 한 페이지를 찾아내고는 씨익 웃으며 해당 페이지를 활짝 펼쳐서 정환에게 내밀었다.
“짜잔-! 바로바로 한강뷰! 서울에서 부의 상징인 한강뷰가 보이는 고층 아파트라고!”
“…그래. 이 정도면 그런 요란한 이름이 붙을 법도 하네.”
프레젠테이션을 만족스럽게 끝낸 수겸이 뿌듯하다는 듯 팸플릿을 고이 접어서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정환은 그런 수겸을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다.
“너 정말 그 퍼스트 어쩌고 아파트 때문에 나랑 결혼하자는 거야? 다른 이유 없고?”
“다른 이유도 있어.”
“뭔데?”
“넌 이 아파트에 욕심 안 낼 거 같아서. 너 돈 많잖아.”
그렇지? 이 법인 명의로 부동산 사는 도련놈아.
얼른 그렇다고 대답하라는 듯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탁탁 치고 있는 수겸을 보며, 정환은 결국 참고 참던 웃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풉-! 푸웁-! 아, 미안…. 근데…. 크흡…. 설마 했는데 진짜, 진짜로 상상도 못 할 이유여서…. 풉.”
“넌 지금 웃음이 나오냐? 사람이 이렇게 진지한데.”
“미안, 미안. 그럼 나보고 그 로열 어쩌고 아파트를 사달라는 소리야?”
“너 미쳤냐? 이게 얼마짜린데 그런 걸 쉽게 사준다는 소리가 나와!”
“그럼 아니었어?”
“야! 너 날 뭐로 보고! 매매 비용은 전부 내가 낼 거야. 대출까지 이미 다 알아봤어.”
물론 은행 대출 절반 끼고, 앞으로 평생 이 엄청난 원금과 이자를 갚으며 뼈 빠지게 일해야겠지만. 요 며칠간 이 아파트 분양받겠다고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렸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자, 수겸은 다시 또 속이 쓰렸다. 그런 수겸의 속도 모르고, 정환은 이젠 배까지 부여잡고 소리 내서 웃고 있었다.
“푸하하하! 아, 진짜! 너 정말 골때리는 놈이야.”
“허? 너 실성했냐?”
“아니, 그렇잖아. 보통은 있는 재산을 노리거나 새로운 걸 뜯어내려고 접근하지 너처럼 결혼만 해주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내 집에 욕심내지 말라고는 안 한다고.”
“아무리 그래도 양심이 있지. 어떻게 돈까지 내라고 하냐! 그리고 난 처음부터 네 재산엔 관심도 없었어.”
애초에 ‘나랑 결혼해서 내 청약 순위 좀 올려다오.’라고 요구하는 것부터가 양심 없는 행동이었으나. 훨씬 심각한 상황을 예상했던 정환에게 지금 수겸이 하는 소리는 깜찍한 수준이었다. 아무튼, 이 귀여운 사기꾼 덕에 정환은 간만에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그래서 내가 너랑 결혼했다고 쳐. 그러면 그 센트럴 어쩌고 아파트에 청약 넣고, 만약에 당첨이 되었다고 치자. 그리고 나서는 어떻게 할 건데?”
“그럼 목표 달성했으니까 적당히 때를 봐서 이혼하는 거지. 서로 일말의 미련도 없이. 깔끔하게.”
수겸은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으나, 그 말을 들은 정환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별안간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정환이 갑자기 고민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당황한 수겸이 아무 말이나 지껄이기 시작했다.
“야, 야! 요즘 세상에 이혼이 뭐 흠이냐! 너 정도면 한 번 갔다 왔다고 해도 상관없다는 사람들이 줄을 설….”
“하자. 결혼.”
뭐지? 내가 잘못 들었나??
수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환을 바라보았다. 정환은 언제 심각했냐는 듯 다시 미소를 띠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놀란 수겸이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정말?!!”
“응. 대신 서류상으로만 하는 결혼 말고. ‘진짜로’ 결혼하는 거야.”
그러나 정환의 입에서 나온 말이 좀처럼 예상치 못했던 것이라, 수겸은 조금 전 신나서 일어섰던 것이 무색하게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정환에게 물었다.
“ ‘진짜로’라면 어디까지를 말하는 건데?”
“주변 사람들이 다 속을 만큼 완벽하게. 양가 부모님께 정식으로 말씀드리고, 주변 지인들한테 말하고. 물론 결혼식도 올리고. 이후에도 필요할 때마다 부부인 척 연기하고.”
이게 대체 무슨 소린지. 수겸은 저런 말을 하는 정환의 의중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려는 거야? 그냥 조용히 서류상으로만 혼인신고하고 끝내야 나중에 이혼하고 나서도 깔끔하지 않겠어?”
그래서 직구를 던졌다. 수겸은 궁금하고 찝찝한 건 못 참는 성미라 이런 건 바로바로 물어봐야 했다. 수겸의 물음에 정환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서류상으로만 남으면…. 나중에 내가 억울할 것 같아서?”
억울하다고? 대체 뭐가?
수겸은 정말이지, 잘 사는 놈들의 사고방식이란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어때? 못 하겠어?”
수겸이 고민에 빠지자 이번엔 정환이 되물었다. 그렇게 묻는 정환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데 딱히 어떤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수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니. 할 수 있어. 까짓거 하자, 결혼. 제대로.”
그래. 이 녀석도 무슨 말 못 할 사정이 있겠지. 어차피 수겸으로선 손해 보는 장사는 아녔다.
수겸에게서 긍정적인 대답을 듣자 정환이 또다시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엄지손가락과 새끼손가락만 빼고 나머지 손가락들을 손바닥에 닿도록 접은 모양새가 뜻하는 바는 수겸도 잘 알았다. 이제는 둘 다 웃음만 나왔다.
그들은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손가락을 맞대며 앞으로의 미래를 약속했다.
이렇게까지 일이 잘 풀려도 되는 걸까?
정환에게서 결혼하자는 승낙을 받아낸 이후부터 모든 일이 너무도 순탄히 흘러갔다. 가장 큰 난관이지 않을까 싶었던 양가 부모님은 네 분 모두 허탈할 정도로 흔쾌히 수락했고, 양측 합의하에 양가 가족과 친지들만 초대하여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그리고 수겸은 오늘 그 리버 어쩌고 아파트에 청약을 넣었다. 신혼부부 특별공급으로!
마지막 제출 버튼을 누르고 나서 신청 완료 화면이 뜨자 수겸은 모니터 앞에서 양손을 부여잡고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제발, 제발. 당첨되게 해주세요. 이것만 되면 열심히 살게요. 원래도 열심히 살았지만 앞으로 더 열심히, 착하게 살겠습니다.
수겸의 간절한 기도는 요란히 울리는 전화기 소리에 중단되었다. 전화를 받아보니 행정실인데 학교 앞에 수겸을 찾아온 손님이 있다고 했다. 누가 온다는 소리는 전혀 들은 적이 없었으나 수겸은 일단 밖으로 나섰다.
그 정체 모를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입구 쪽으로 나섰더니 멀리서 낯이 익은 두 사람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점점 가까이 가니 확실히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수겸은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갑자기 찾아온 이 불청객들이 어떤 이유로 자신을 찾아왔는지 너무도 뻔했으니까.
아무래도 일이 너무 잘 풀린다 싶었더니. 어쩌면 이 결혼 최대의 난관이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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