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2차 창작

[정환수겸] 김감독의 내 집 마련 프로젝트 03

원래 이혼보다 쉬운 건 파혼이다

이정환과 결혼하게 된 이상 수겸도 어느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다. 길 가다 모르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봐도 백이면 백, 이정환 쪽이 손해를 보는 결혼이었으니 정환의 측근들이 거세게 반발할 거란 예상은 충분히 하고도 남았다. 어쩌면, 아침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우리 아들과 헤어지라며 돈 봉투를 내밀거나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절하면 물세례가 쏟아지겠지.

그러나 이미 사회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김감독에게 그 정도 반발은 우스웠다. 그깟 돈 봉투쯤이야 이걸로 따귀를 맞아도 ‘반대쪽도 때려줍쇼!’하고 내밀 배짱이 있었고. 물세례쯤이야 다 마신 소주잔을 머리에 털어 보이듯이, 컵에 남은 물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줄 용의가 있었다.

그러니까. 차라리 그런 상대면 나았을 거란 뜻이다.

하필이면 지금 수겸을 찾아온 불청객들은 정환의 절친한 후배들로 오랫동안 농구계에 발을 들였기 때문에 수겸과도 한 다리만 건너면 접점이 있는 사이였다. 심지어 둘 다 수겸보다 어린 동생들이니 이렇게 껄끄러울 수가 없었다. 제아무리 독기 빼면 시체인 김감독이어도 사회적 체면을 차릴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이런 속도 모르고. 다짜고짜 쳐들어온 녀석들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수겸과 대치 중이었다. 그러나 대놓고 적대심을 보이던 처음의 패기는 어디에다 두고 왔는지. 막상 자리를 옮겨서 마주하니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참다못한 수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람을 불러냈으면 말을 해야지. 나한테 볼일 있어서 찾아온 거 아니야?”

호장이 대답하려는데 옆에 앉은 준섭이 그를 저지하고 조심스레 말했다.

“정환이형이랑 결혼하신다는 소식 들었어요.”

“그래. 설마 축하한단 소릴 하러 여기까지 온 건 아니겠지?”

“참나. 축하받을 생각이 있어요?? 양심은 어디다 팔아먹었어요!!”

요 녀석이. 슬슬 본색을 드러내는군.

건너편에 앉아 있던 호장이 수겸의 말에 발끈해서는 당장이라도 테이블을 내려칠 듯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예상 그대로의 반응에 수겸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너희가 무슨 생각하는지 짐작은 가는데. 이 결혼, 이정환도 동의해서 하는 거거든?”

“그게 말이 돼요?!! 상식적으로 정환이형이 이딴 결혼을 할 리가 없잖아요!! 그쪽이 무슨 수를 써서 정환이형을 꼬여냈는지 모르겠는데, 착한 우리 형한테 사기 칠 생각 말고 이 결혼 당장 취소해요!!”

“야, 그게 말이 되냐! 이미 양가 식구들한테 허락까지 다 맡았는데. 인제 와서 파투를 내라고?!”

“원래 결혼은 식장 들어가기 전까진 모르는 거라고 그랬어요!! 정환이 형을 생각해서라도 이혼보단 파혼이 백배 낫죠!!!”

“싫어. 내가 왜? 난 이정환이랑 결혼할 건데?”

저러다 턱 빠지겠네 싶을 정도로 대화가 오갈수록 호장의 입이 점점 더 벌어졌다. 옆에서 묵언수행 중인 준섭과는 극과 극인 반응이었다. 

“진짜 기가 막혀서…. 저기요. 우리 정환이형 정말로 사랑하기는 해요??”

“응. 사랑하는데? 완전 사랑하는데?”

“아악-!!! 거짓말하지 말아요!!! 20년 전에 졸업하고 고작 한 번 얼굴 본 게 다면서 사랑은 무슨 개뿔!!!!”

“야. 꼭 오래 만나야 사랑하는 거고, 결혼하는 거야? 어느 날 갑자기 불현듯 사랑을 깨우치고 할 수도 있는 거지. 그리고 결혼은 사랑만 가지고 하는 게 아니야.”

“그럼 뭘 보고 결혼하는데요??”

눈앞에서 날뛰는 저 꼬마 원숭이를 약 올리고 싶어진 수겸이 일부러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다 조건 보고 하는 거지.”

“이거 봐-!!! 이제야 슬슬 본색을 드러내시는구만!!! 역시 우리 형이랑 결혼해서 거하게 한 몫 챙겨보려는 거 맞죠?? 순진한 정환이 형을 꼬여내서 가지고 놀고, 형 재산도 축내려고!!! 그러다 나중에 쓸모없어지면 팽하려는 거죠?!! 이 사기꾼!!!”

그래. 김수겸. 이만하면 많이 참았다.

안타깝지만 한참 어린 후배가 버릇없이 구는 걸 그냥 두고 보기엔 수겸의 안에 있는 꼰대력이 가만히 있질 않았다. 결국 사회적 체면은 벗어던지고, 수겸은 자리에서 일어나 눈앞에서 날뛰는 원숭이의 머리를 있는 힘껏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아악-!! 왜 때려요!!!”

“이것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사람을 이정환 등쳐먹는 꽃뱀 취급을 해?!”

“그럼 아니에요?!!”

“당연히 아니지! 야, 나도 번듯한 직장도 있고, 차도 있고, 돈도 벌 만큼 벌었다고! 다만….”

집이 없을 뿐이지. 

생각하니 또 입이 말랐다. 다시 자리에 앉아 테이블 위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데 귓가에 어떤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집은 없고요?”

뭐지.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나왔나? 하지만 그건 수겸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고개를 돌리니 동그란 눈을 한 준섭이 보였다. 잠시 말을 잃은 수겸과 시선을 맞추더니 준섭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역시 집 때문에 그러신 거 맞죠?”

“…이정환한테 들었어?”

“아뇨. 저번에 정환이형과 통화하실 때 얼핏 들었는데, 부동산 소유 여부를 꼼꼼히 확인하시길래. 설마설마했는데 역시 맞았네요.”

“뭐요?? 그럼 고작 집 하나 사겠다고 정환이형을 이용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한대 얻어맞고 움츠러들었던 호장이가 다시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 김감독에겐 가소로웠다. 수겸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삐딱하게 들고선 호장에게 물었다. 

“너 지금 사는 집 어떻게 구했어?”

“네? 저는 뭐. 부모님이 구해주셨는데요? …악! 또 때렸어!!!”

호장의 대답이 나오기가 무섭게 수겸이 그의 머리에 다시 꿀밤을 먹였다. 이런 건방진 도련님 같으니라고. 이렇게 세상 물정 모르니 고작 집 하나 사려고 이러냐는 소리가 잘도 나오는구나. 

“너는 나한테 뭐라고 할 자격 없어, 인마! 이 험한 세상에서 나 홀로 자립해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집을 구해본 자만이 나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다. 한 마디로, 넌 자격 미달이야!”

“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어쨌거나 지금 정환이형한테 사기 치고 있는 거잖아요!!!”

“내가 이정환한테 사기 친 건 아니지. 걔도 나한테 동의했는데? 굳이 말하자면 우린 공범이야.”

“착한 우리 형 끌어들이지 말아요. 이 사기꾼아!!!”

옆에서 호장이 으르렁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준섭이 다시 수겸에게 말했다.

“요컨대. 감독님은 지금 정환이형과 결혼해서 청약 당첨을 노리시는 거죠?”

“…너 어디 돗자리 깔았니?”

설마 옆에서 그 난리를 치는 동안 조용히 대화를 듣고만 있었던 건,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리기 위한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나? 이래서 눈치 빠른 애들은 상대하기 어려웠다.  

수겸이 눈에 띄게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자 준섭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청약을 넣었다고 쳐요. 하지만 당첨되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이번에도 제대로 크리티컬. 역시 도내 최고의 3점 슈터답게 쏘는 것마다 제대로 명중이었다. 

사실 수겸은 이 결혼이 어렵게 얻은 기회인 만큼 안 되면 될 때까지 청약을 넣어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인생엔 항상 만일이라는 게 있는 법. 준섭의 말대로 모든 청약에서 다 미끄러질 수도 있는데 언제까지 붙들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고심 중인 수겸의 속을 박박 긁으려는 모양인지, 호장이 답을 재촉하듯 테이블 위를 손바닥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저 얄미운 녀석. 한 대 더 쥐어박으려는 걸 꾹 참고 수겸이 고심 끝에 답을 내놓았다.

“일단 신혼부부로 특별공급 받을 수 있는 요건은 혼인신고 후 7년 이내니까. 7년 안으로 청약에 당첨되지 않으면 깔끔하게 이혼해줘야지.”

“7…, 7년? 7년이나요?!! 아니, 지금 제정신이에요?!!!”

“진짜 귀청 떨어지겠네! 그래. 7년이다! 그때까지 안 되면 나도 깨끗이 포기할 거야.”

“말도 안 돼요!!! 7년이면 우리 정환이형 마흔이 넘는데!!! 그 나이에 이혼남 딱지까지 붙게 될 텐데. 이게 말이 돼요??? 누구 혼삿길 막으려고 작정했어요?!!!”

상상만 해도 분하다는 듯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치는 호장이를 보자 진짜 두통이라도 오는 것만 같아 수겸은 이마를 짚고 눈을 감았다. 호장이 던진 마지막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저 바닥까지 꺼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제서야 수겸은 자신이 저지른 행동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었다. 

들릴 듯 말듯 짧게 한숨을 쉰 준섭이 수겸을 향해 말했다.

“이제야 본인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아시겠어요?”

“그래…. 젠장. 내가 생각이 짧긴 했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이 결혼 당장 물러요!!!”

“전호장, 넌 좀 조용히 해 봐. 가뜩이나 지금 골 아픈데 너 때문에 머리 울린다!”

발끈하는 호장을 바로 눈빛으로 제압하며 주먹을 쥐어 보이자 호장이 눈에 띄게 움찔하며 반사적으로 이마를 가렸다. 그러나 그런 모습도 지금 수겸의 눈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정말이지. 수겸은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시간을 되돌리고만 싶었다.

가만히 수겸의 동요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준섭이 조용히 그를 불렀다. 수겸이 돌아보자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준섭이 입을 열었다.

“이미 어느 정도 진행이 된 거로 알고 있지만, 그래도 정환이형을 생각해서 재고해주셨으면 해요.”

차분한 목소리지만 단호한 어조였다. 그 말 속에 담긴 진심을 수겸도 모를 수가 없었다. 저 두 사람은 이정환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더 부끄러웠다. 수겸은 자신이 저지른 짓이 정환의 입장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끄럽게도 이 순간 깨달았다. 어쩌면 지금이 되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란 것도.


준섭과 호장이 돌아가고 난 후 수겸은 그날 오후 정환의 퇴근 시간에 맞춰서 그를 만나러 갔다. 좀 더 생각을 정리하고 어떻게 말을 하면 좋을지 정해서 가는 게 더 좋을 테지만, 그러기엔 지금 수겸의 마음이 여유롭지 못했다.

할 말이 있다며 다짜고짜 회사 앞으로 찾아갔는데도 정환은 귀찮은 내색 하나 없었다.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하자고 하더니 수겸을 데리고 근처 돈가스 가게로 향했다. 이 집이 맛집이라 점심엔 엄청나게 붐빈다며 정환이 메뉴판을 건넸다. 정작 수겸은 딴생각에 정신이 팔려서 본인이 무슨 메뉴를 시키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어딘지 이상한 수겸을 보며 정환이 먼저 말을 걸었다.

“우리 예식장 말이야.”

“응?”

“소규모로 진행할 거니까 하우스웨딩 위주로 알아봤는데. 어때?”

“어, 어. 그래 뭐…. 난 상관없어.”

정환의 입에서 나온 예식장이란 단어는 수겸이 오늘 정환을 만나러 온 이유를 상기시키기에 충분했다. 작게 심호흡하며 테이블 밑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가 하며 떨림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말해야 한다. 이정환에게 파혼하자고 말해야 해. 

“고구마 돈가스. 먼저 나왔습니다.”

“네. 여기요.”

근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인생 살 만큼 살아본 어른이어도 사과는 항상 어렵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뱉은 말을 번복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다. 

수겸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입을 달싹이며 망설이는 사이, 정환은 자신 앞에 놓인 돈가스를 가로세로로 열심히 자르고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의 칼질이 지나가자 어느덧 커다란 돈가스가 작고 네모나게 조각나 있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정환이 들고 있던 나이프를 내려놓더니 다 자른 돈가스를 접시째로 수겸에게 내밀었다. 그제야 수겸은 먼저 서빙된 돈가스가 자신이 시킨 메뉴였음을 깨달았다.

눈앞에 놓인 예쁘게 조각 난 돈가스가 담긴 접시를 보자 수겸은 말을 잃었다. 누가 부탁한 것도 아닌데 상대방 메뉴를 먼저 받아 손수 칼질까지 해서 먹으라고 넘겨주는 사람이 진짜로 있구나 싶었다. 이런 녀석한테 사랑받는 사람은 정말로 행복하겠지. 아마 결혼하면 좋은 배우자가 되겠지.

그러니까 더더욱 안 된다. 이렇게 나 때문에 억지로 결혼해서 어쩌면 인생에서 다신 없을지도 모르는 한 번의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리기엔, 이정환은 너무 좋은 사람이었다. 수겸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말해. 당장 말해. 지금이 이 미친 짓을 되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이정환….”

“응?”

“너 정말 이대로 결혼해도 괜찮겠어?”

무슨 소릴 하냐는 듯 정환이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저번에 얘기 다 끝난 거 아니었나. 갑자기 왜?”

“그땐 내가 좀 성급했어. 이렇게 급하게 밀어붙일 일이 아니었는데.”

“이제 와서 번복하겠다고?”

그렇게 묻더니 오른손을 들어서 새끼손가락을 거는 모양을 만들어 흔들어 보였다.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는데?”

“너는 지금 그게 중요하냐! 네 남은 인생이 걸렸는데!”

“내 남은 인생이 뭐? 너랑 결혼하면 누가 내 인생이 무너지기라도 한데?”

그 말 한마디에 수겸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어졌다. 이런 반응을 보이면 정환도 눈치를 챌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요 며칠 새, 정환이 모르는 무슨 일이 수겸에게 일어난 것 같았다.

때마침 정환이 시킨 메뉴가 서빙되었고, 옆에 놓인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사각사각 썰면서 눈을 내리깐 채로 정환이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이유가 나와 관련된 거라면 말을 해줬으면 좋겠어. 혹시 내가 모르는 오해가 있다면 나한테도 해명할 기회는 줘야지.”

“…오늘 낮에 네 후배들이 찾아왔었어.”

“내 후배? 설마 준섭이랑 호장이가?”

“그래. 아주 충직한 후배들을 두었더구나.”

“하하. 뭐라고 했을지 안 들어도 알겠다. 내가 대신 사과할게.”

“아니, 뭐….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어.”

풀이 죽어있는 수겸에겐 미안하지만, 정환은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수겸에게 따지러 간 준섭과 호장의 모습이 어땠을지 눈에 선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 후배들이 반대한다고 해서 이 결혼 포기할 거야? 고작 그 정도 각오로 나한테 프러포즈한 건 아닐 텐데?”

“장난해? 난 충분히 각오가 돼 있어. 다만, 내가 너한테 거절할 기회를 충분히 주지 않은 것 같아서 다시 한번 더 묻고 싶은 거야.”

 

그제야 정환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려 목을 잠시 가다듬고, 수겸이 다시 말했다.

“진짜 마지막으로 묻는 거야. 나랑 결혼하고 싶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거절해. 그럼 나도 깨끗이 물러날 테니까.”

빨리 거절해.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도망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정환은 잠시 생각하는 듯 말이 없었다. 수겸은 일부러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시간이 몇 배는 느리게 가는 것만 같았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걸 멍하니 보고 있는데 드디어 정환이 침묵을 깼다. 

“생각이 바뀌었어.”

“그래. 잘 생각했….”

“우리 결혼 소소하게 하지 말고 성대하게 하자.”

“…뭐?”

수겸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너 지금 제정신이냐고 소리치려는데 정환이 먼저 선수를 쳤다. 

“양가 부모님만 모시지 말고 동네방네 소문내서 있는 지인, 없는 지인 다 초대해서 하자. 예식장도 다시 알아봐야겠다. 하우스웨딩 말고 호텔급으로.”

“야, 이정환!”

“이 정도 규모면 우리끼리 준비하긴 어려울 것 같은데. 웨딩 플래너 고용해서 하는 게 어때?”

“너 진짜 제정신이야? 더는 돌이킬 수 없다니까!”

“그래. 난 한 입으로 두말 안 해.”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오죽하면 지금 앞에서 돈가스나 먹고 있는 저 녀석의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정환 쪽으로 상체를 바짝 기울인 수겸이 다급히 말했다.

“내가 청약 순위 올리려고 결혼하는 건 맞는데, 사실 우리가 결혼한다고 해서 반드시 당첨되리란 보장은 없어.”

“그건 그렇지.”

“만약에 청약에 계속 미끄러진다면. 나는 집도 못 구하면서 네 시간만 축내게 되는 거라고!”

“그렇겠네.”

“야, 너는 이런 말 들으면 화 안 나냐?”

“뭐 그런 거로 화까지야.”

“아니, 억울하지도 않아? 누구 때문에 억지로 결혼했는데 시간만 잔뜩 흐르고. 남는 건 이혼남 딱지밖에 없을 수도 있는데?!”

“일단 난 억지로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시간은 어차피 흐르고, 이혼남 딱지 하나쯤 붙어도 상관없고. 이러면 됐나?”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가며 능청스레 대답한 정환이 수겸의 앞에 놓인 손도 안 댄 고구마 돈가스를 포크로 하나 콕 집어서 수겸에게 쑥 내밀었다. 얼른 먹어. 다 식는다. 그 말에 얼떨결에 받아먹었더니 정환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번졌다. 입안에 돈가스를 우물거리며 수상쩍다는 표정을 하고선 수겸이 물었다.

“너 나랑 왜 결혼하냐?”

그 순간 이정환의 입에서 바람 빠진 풍선 같은 소리가 나더니 급기야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선 끅끅거리면서 웃기 시작했다.

“허, 지금 웃음이 나와?”

“아니, 너무 웃기잖아. 그 질문은 저번에 진작 해야 하지 않았어?”

“그땐 내가 집에 눈이 멀어서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래서 지금 묻는 거잖아. 너 진짜 나랑 왜 결혼하냐?”

“우리 이혼하는 날 알려줄게.”

“에이씨…. 이제 나도 몰라!”

나 진짜 할 만큼 했다. 난 분명히 도망갈 기회를 몇 번이나 줬는데 쟤가 그냥 눌러앉은 거라고.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마친 수겸이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나 진짜 너랑 결혼한다? 나 정말로 마지막으로 물어보는 거다?”

“그래. 너야말로 이제 무르기 없기다. 그나저나 저번에 말한 그 퍼스트 어쩌고 아파트 청약은 넣었어?”

“응. 오늘 넣었지.”

“뭐야. 청약도 넣어놓고선 도대체 왜 파혼하자고 한 거야? 너 그거 당첨됐는데 포기하면 페널티 있는 거 몰라?”

“야, 내가 오죽했으면 그랬겠냐! 네 동생들이 와서 나한테 우리 형 인생 망치려고 작정했냐고 따지는데 내가 양심에 찔려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만약 진짜로 파혼했는데 나중에 당첨되면 어쩌려고?”

“그러면 네 바짓가랑이 붙잡고 매달렸겠지. 제발 다시 결혼해달라고.”

“푸하하하-! 아, 너 진짜 또라이야.”

“너도 만만치 않거든?”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수겸은 어느샌가 또 정환이 집어다 주는 돈가스를 넙죽 받아먹고 있었다. 마음이 편해지니 그제야 돈가스 맛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달고 맛있었다.


다시 한번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그 날 이후, 그들은 결혼식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이제 반대하는 사람들도 없겠다, 아주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 같았으나 이 사회에서 남들 다 하는 만큼 결혼하려면 거쳐야 할 관문이 생각보다 너무 많았다.

한동안 주말마다 웨딩 플래너의 손에 이끌려 이 예식장, 저 예식장을 돌아다녀야 했으며 그들이 원하는 날짜에 식장을 잡고 예약까지 마치고 나니 웨딩 촬영 준비부터 시작해서 하다못해 예식장 꽃은 뭐로 장식할 건지, 식순은 어떻게 되는지, 피로연은 어떤 코스로 준비할 건지, 하나하나 다 의논하고 결정해야 했다.

그러면서 틈틈이 주변 사람들에게 결혼 소식을 알리고 청첩장까지 전달하다 보니 진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휴대전화는 종일 온갖 메시지로 알람이 울려댔다.

[ J : 우리 턱시도 어떻게 할까? 검은색? 아니면 흰색?]

쏟아지는 결혼 축하 문자들 사이로 정환이 보낸 메시지를 찾아낸 수겸이 답장을 보냈다.

[ S : 그런 것도 우리가 다 정해야 해?]

[ J : 응. 색깔, 디자인 통일해도 되고 다 다르게 해도 된대.]

[ S : 한 명은 흰 턱시도 입고, 다른 한 명은 검은 턱시도면 이상하지 않냐? 무슨 바둑돌도 아니고.]

[ J : ㅋㅋㅋ 그럼 통일하자. 흰색? 검은색?]

[ S : 검은색이 무난하지.]

[ J : 오케이. 검은색으로 한다.]

대화를 끝내고 피곤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내려놓은 수겸이 다시 일에 집중하는데, 잠시 후 또 문자 알림이 울렸다.

[ J : 플래너가 그러는데 계절감을 고려하면 흰색 턱시도가 좋겠다는데.]

[ S : 그럼 바꿔.]

답장을 보내자마자 전화기를 뒤집어 버렸다. 이젠 휴대전화 불빛만 봐도 노이로제가 걸릴 것만 같았다. 멀쩡히 사귀던 커플들도 결혼 준비만 하면 싸운다더니. 진짜 힘들어서 두 번은 못 할 짓이었다. 설마 이정환 이 자식이 날 엿먹이려고 정석대로 결혼식 올리자고 한 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냥 시간이 빨리 흘러서 결혼식 따위 얼른 해치워버리고 싶단 생각을 하고 있는데 또다시 휴대전화 알림이 울렸다. 신경질적으로 방금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하는데 수겸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렸다. 그리곤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린 채로 그대로 굳어버렸다.

다시 정신을 차린 다음, 수겸은 제일 먼저 정신없이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 시각, 이정환은 퇴근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이제 막 건물 로비를 벗어나려던 참이었다. 

“정환아-!!!”

출입구의 회전문을 정신없이 밀고 들어온 수겸이 때마침 그 근처에 있던 정환을 발견하고 소리쳐 불렀다. 그러자 정환은 물론 로비에 있던 모르는 사람들까지 전부 그쪽을 돌아보았다. 다른 시선은 안중에도 없는 듯 신이 난 수겸이 방방 뛰면서 두 팔을 벌려 정환에게 달려갔다.

“당첨됐어! 당첨됐다고!”

그리곤 폴짝 뛰어서 정환에게 안겼다. 얼떨결에 그를 받아든 정환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당첨되다니, 뭐가? 설마 그 리버 어쩌고 아파트?

그러나 정환은 물어볼 새도 없었다. 이미 도파민 과다로 잔뜩 흥분해버린 수겸이 양손으로 정환의 얼굴을 붙들더니 온 얼굴에 뽀뽀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주변의 웅성거리는 소리까지 더해지자 정환은 그대로 굳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정신없이 입술을 찍어누르던 수겸이 무언가 떠오른 듯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서로 숨소리도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시선을 마주친 채로 수겸이 속삭였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우리…. 뭐? 

정환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서로 맞닿을 듯 바짝 붙어있던 수겸의 얼굴에 싱긋, 웃음이 번졌다.

“혼인신고 먼저 하자. 나 혼인 관계증명서 제출해야 돼.”


* 축, 김감독 3회만에 유주택자 되다!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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