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판 센루

점심 식사

슬램덩크 : 센루 (2024)

D-Esper by K.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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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에서 본 대공은 처음의 예쁘다는 인상 뿐 아니라 매사에 진지하고 책임감있는 성정이 매력적인 사내였다.

충동적으로 산맥을 넘을 때만 해도 예쁘기만 한 소년을 사랑만 담뿍 주어 제 품 안에서 아무것도 할 필요 없게 해주어야겠다 생각했으나 대공의 성품에 대한 추측은 얼마나 오만했는가 센도가 절로 반성하게 하도록 다부지고 강단있었다.

학식이나 무공이야 아직은 저에 비할 바 아니라지만 한 살 남짓 어릴 뿐인 대공은 공국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고 제 자리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으며 그 필요 조건을 채우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사내였다. 몸을 쓰고 전술을 익히는 것을 누구보다 좋아했으나 하루의 대부분을 그보다 중요한 것을 익히는 데에 할애하는 것을 아까워 하는 법이 없다. 아직 서툰 공무도 시간은 더딜지언정 성의있게 처리했고, 아침 부터 저녁 까지 틈틈이 이어지는 각종 강의에도 싫은 내색 없이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리며 들었다. 하루 중 한가한 시간이라고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대공에게 센도가 놀란 것은 세 차례의 식사와 다과를 즐기는 사적인 시간을 오롯이 자신에게 할애한다는 부분이다.

젊은 대공과 사교를 맺기 원하는 이들은 셀 수 없다. 친지와 귀족, 상인은 물론이요 공국 밖에서 찾아오는 사절조차 공식적인 자리 외에도 식사 자리 등을 통해 더 가까운 자리에서 직접 내밀한 조율을 원하게 마련이나 센도가 성에 도착한 이후 대공의 공적인 시간 외는 모조리 센도와 함께 지냈으므로 마치 자신이 대공의 사생활을 차지한 셈이 되었다. 측근에서는 그에 대한 불만이 없는 것도 아닌 듯 했으나, 젊은 대공의 태도는 매우 완고했다.

출생 전부터 맺어진 약혼자를 이제야 면대면으로 맞게 되었으니 그동안 마주하지 못한 공백을 메울 필요가 있다는 대공의 고집을 누구도 꺾을 수가 없었다.

대공의 의지가 확고하다보니 센도야말로 대공의 일정에 맞추어 그 앞에 저를 대령해야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그 역시 치밀한 시간분배 아래에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자부했으나 대공의 일정에는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격식 차린 식사를 하기에는 터무니 없이 짧은 시간이 정해진 때에 주어졌다. 초반 며칠, 센도는 성 이 곳 저 곳을 돌아보기도 하고 료난과는 다른 서가의 구성에 책읽기에 몰두하느라 대공과의 식사 시간에 늦는 일이 잦았으나 대공이 센도가 자리에 앉기 전에는 식사를 시작하지 않으며, 다음 일정이 시작 되면 지체없이 식사 자리를 뜬다는 것을 알아차린 후로 반드시 대공의 식사 시간 전 식당에서 대기 하게 되었다.

센도가 신경을 쓰게 된것은 대공의 짧은 식사시간 때문 만이 아니었다. 억지로 끌려와 앉듯 식사를 해야하는 처지에 부담을 느껴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했으나 대공의 식사 속도는 좋게 말해 빠른 편이 아니었다. 모처럼 데워놓은 도자기가 식는 게 아닌가 싶도록 나이프와 포크를 느긋하고 얌전하게 다루며, 가볍게 다문 입은 센도가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도록 하염없이 오물대다 목 울대를 겨우 넘겼다. 대화가 많지 않은 식탁이라 금세 제 접시를 비우곤 한 센도는 대공의 식사 습관을 확인하고는 기겁했다. 그가 타고나기를 적게 먹는 타입이라면 차라리 걱정하지 않았겠지만, 드물게 일정이 이르게 끝나 여유가 있는 저녁식사에는 추가로 요리를 요청해 가며 시간을 들여 배를 채우는 것을 확인해서였다. 한창 나이의 사내가 순전히 ‘바빠서’ 양껏 먹지 못한다는 사실에 센도는 아연했다.

그 이후로 센도는 대공과의 시간을 최우선 순위로 중요히 여겼다. 사실상 그가 이 성에서 할 일이 딱히 정해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정인 셈이었다.


“루카와.”

돌바닥 위를 성큼성큼 걷는 익숙한 발소리에 센도가 문 옆 기둥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켜 똑바로 세웠다. 모퉁이를 돌아온 대공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센도를 바라보았다.

“오래 기다렸습니까?”

“아닙니다. 루카와를 조금 더 일찍 보고 싶어서요.”

“…아….”

표정 변화가 명확한 편은 아니어도 표현이 인색한 것은 아니어서 센도는 대공이 겸연쩍어 한다는 것을 금세 알아챘다. 잠시 그 모습이 귀엽다고 여겼으나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어 센도가 반걸음 물러서 시종보다도 먼저 식당의 문을 열었다. 의아해 하면서도 대공은 센도가 이끄는대로 문 안으로 들어섰고 센도가 가볍게 어깨를 미는대로 식탁 상석으로 가 센도가 의자를 빼어주는대로 얌전히 앉았다.

“음식이…”

“예법에는 약간 어긋나도 나와 단 둘이 보내는 시간이니 괜찮지 않을까 싶어 이리 준비했어요. 한 접시씩 드시려면 오늘도 디저트 구경도 못하고 일어날 테니.”

“하지만…”

“저와 식사 할 때만으로 어떠십니까?”

익숙치 않은 식탁에 당황한 듯 한 대공을 달래어보려 급히 눈을 굴린 센도가 디저트 접시를 발견했다. 평소 짧은 식사시간을 느리게 보내는 덕에 디저트까지 맛보는 일이 거의 없던 것 또한 기억해내어 말을 얹었다.

“점심 디저트인 자두 파이는 유난히 맛있어 보여 대공이 꼭 맛을 보았으면 했습니다.”

“……”

대공은 순서 없이 제 앞에 늘어진 접시들에 어찌 할 바를 모르는 듯 했으나 센도가 제 의자에 앉아서는 아무렇지 않게 접시 하나를 골라 제 앞에 놓는 것을 보고 엉겁결에 같은 접시를 집어들었다.

“전채와 수프부터 라고들 하지만 저는 생선 요리를 좋아해서요. 루카와도 생선, 좋아하나요?”

“…좋아합니다.”

정성들여 손질된 생선살을 크게 자른 센도가 포크로 집어 입에 옮기는 것을 본 대공이 급히 똑같이 생선을 작게 썰어 입에 넣었다. 대공이 입술을 오물대는 것을 확인한 센도는 미소만 짓고 이번에는 채소 샐러드 접시를 냉큼 집어들었다. 접시를 채 비우지도 않고 바꾸는 센도의 모습에 대공이 놀란 듯 바라보았으나 센도는 개의치 않고 다시 생선 접시, 스테이크 접시로 대중 없이 접시를 바꾸어 가며 식사를 계속했다. 처음에는 센도가 고르는 대로 접시를 따라 잡으려던 대공도 어느새 센도의 속도를 따라잡는 것은 무리라 파악한 듯 느긋이 제 속도대로 눈앞의 접시들을 손 가는 대로 맛보기 시작했다. 예법대로 순서에 따르던 식사와는 전혀 달라 혼란스럽기는 했으나 전채부터 후식까지 짧은 시간 안에 모두 먹어볼 수 있다는 점은 대공으로서는 신기할 뿐이었다.

감자수프를 삼킨 대공이 물끄러미 디저트 접시를 바라보았다. 조금전 센도가 말 한 자두 파이가 평소 보던 것보다는 작은 크기로 구워져 있었다. 다른 접시들이 함께 있는데도 디저트의 새콤한 향이 새삼 식욕을 돋우었다. 윤기 나는 갈색으로 잘 익은 파이 생지와 그 틈으로 열에 익어 붉은 빛이 진해진 자두의 과육이 탐스럽게 보였다. 대공이 디저트 접시를 들고 포크만으로 파이를 잘라내어 입에 넣었다. 혀 끝에 닿은 새콤함과 비강을 채우는 과실 특유의 상큼한 향에 대공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설탕이 제대로 녹아 과육에 스며든 단맛이 그의 입 안 전체로도 스몄다. 바삭한 파이와 말캉한 자두의 식감을 느긋이 어금니로 뭉개며 대공은 자신이 디저트를 제법 좋아했구나 생각했다.

“말씀하신대로 맛있습니다.”

“……”

갑작스러운 감상에 센도는 식기를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대공을 보았다. 다른 이들 기준으로 애매할 지 모르나 대공은 분명 옅게 웃음을 띠고 있었다. 입술이 오물대는 것도 이전 보다는 삐르게 느껴졌다. 그 천진한 얼굴은 분명 사랑스러웠으나 센도는 조금 난처해져 제 디저트 접시를 쳐다보았다. 기대된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는 제 접시를 전부 비우지 않았다. 분명 공을 들인 요리였으나 이 곳의 기후 탓인지 자두에 단맛이 충분히 들지 않은데다 신선하지 않아 센도는 떫게까지 느껴서였다. 다른 접시들과 달리 끝까지 디저트 접시를 앞에 두고 비우는 대공을 보며 센도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이 곳 과일에 입맛이 익숙한 것일 테지.

센도는 자신에게 납득시키듯 주억거리며 애써 대공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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