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리의 춤

송아라, 송태섭 NCP 글

this is x love song by 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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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리의 춤

01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공을 향해 미끄러진다. 공이 아슬아슬하게 손등 위로 떨어질 때는 절로 웃음이 난다. 튀어 오르는 공의 곡선만 봐도 알 수 있다. 나와 연결되는 공을 누가 잡을 것인가. 송아라가 처음 공식전 유니폼을 받았던 날 유리는 자기가 가진 것과 똑같은 디자인의 헤어밴드를 선물로 줬다. 송아라는 헤어밴드를 하고 거울 앞에서 어색하게 웃었다. 선배. 이렇게 쓰는 게 맞아요? 아니, 평소보다 두 배로 못생겨 보이는데? 그러자 유리가 으이구, 하며 아라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뒤에 붙어서자 키 차이가 확연하게 느껴졌다. 머리 한 개 반이 차이가 났다. 유리의 커다란 손이 엉성하게 자리 잡은 아라의 머리카락을 다시 손가락으로 빗어 넘겼다. 헤어밴드를 만지작대는 유리를 거울 속으로 올려다보던 아라가 중얼거렸다.

"나는 언제 선배처럼 크나. 나도 대빵 커지고 싶은데. 우리 오빠도 키가 엄청 작거든요."

"오빠 농구 선수라며."

"맞아요. 근데 작아요. 우리 집 사람들은 다..."

아라의 기억 속 아빠도 키가 큰 편은 아니었다. 준섭은 초등학생 치고 꽤 큰 키를 가지고 있었지만, 얼마나 더 컸을지는 알 수 없었다. 아라가 말을 흐리자 유리가 한 번 더 물었다. 다 작다고?

"아마도요."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닌 거지, 뭘 아마도야. 웃겨."

"아무튼! 나도 선배처럼 키가 엄청 커지고 싶어요. 그럼 나도 세터도 하고, 스파이커도 할 수 있고."

송아라가 배구부를 시작한 지도 이제 일 년 남짓, 포지션은 리베로. 등번호는 7. 리베로 포지션을 선택한 건 아라의 의지는 아니었다. 아라야. 너는 키가 작으니까 리베로를 하는 게 어때? 그 말은 꼭 '키가 작으면 리베로밖에 할 수 없어' 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지금 포지션은 재미없어?"

"음... 그건 아니고요."

글쎼. 리베로가 하고 싶은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 송아라는 머리를 왼쪽으로 기울였다. 마음이라는 건 이상하다. 마음은 내 것인데도 나의 수비 범위 밖이다. 통제를 벗어난 공이 어디로 튈 지 모르는 것이 열여섯 사춘기라고들 하던데.

선배가 말했다. 나도 초등학교 때까지는 리베로였어. 키가 너무 커져서 더는 할 수 없게 되었지만...

가장 밑에서 가장 위로 공을 올려보내는 힘. 팀에게 연결해 주는 힘. 그거 아무나 못 하는 거야. 모든 리베로가 너만큼 할 수 있는 건 아냐. 아라야.

그 말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송아라는 헤어밴드를 손끝으로 쓸어내리며 씩 웃었다. 우리 팀 주장이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할 수밖에 없네요.

전국체전 예선 첫 경기까지 두 달을 남겨둔 때였다.

02

작은 오빠는 퇴원을 하자마자 오키나와에 가겠다고 말했다. 아라는 비상용 약이 들어있던 플라스틱 바구니를 뒤적거리다 그대로 행동을 멈추었다. 윤희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인지 식탁에 앉아 영수증을 정리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송태섭이 스스로에 대해 얘기를 하는 것도 오랜만이었지만, 곧은 눈과 덤덤한 표정을 보니 타협할 생각 따윈 전혀 없어 보였다.

송태섭의 눈두덩이는 여전히 부어 있었고, 왼쪽 뺨은 피멍이 빠지지 않은 채였다. 생각해보면 태섭이 중학생이 된 이후로 얼굴이 멀쩡한 적이 더 드문 것도 같았다. 수술한 등 부위는 아직 아물지 않아 샤워할 때마다 고통 받는 주제에 오키나와라니. 바구니에 들어있던 거즈와 소독약을 들고 일어나 거실 바닥을 툭 툭 두드리자 눈이 마주친다. 일단 앉아보세용. 아직 대답이 없는 윤희를 힐긋 바라본 태섭이 아라의 앞에 앉아 상의를 어깨까지 들어 올렸다.

"아파?"

"..."

대답할 거라고 생각도 안 했다. 아프지 않을 리는 없고, 아프다는 말은 하기 싫고. 송아라는 어깨를 으쓱하며 솜에 소독약을 묻혔다. 송태섭은 언젠가부터 감정 표현을 거의 하지 않게 됐다. 말수도 적어졌다. 이건 맛있고, 이건 별로고, 파프리카는 싫고. 좋아하는 게 많은 만큼 싫어하는 것도 많았던 송태섭은 학교에선 어떨지 몰라도 집 안에서는 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게 되었다.

아라는 상처를 닦아내며 처음 태섭이 응급실에서 눈을 떴을 때를 떠올렸다.

사실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온 송태섭이 가장 먼저 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린다면.

"오키나와가 보였어-"

오키나와라는 말을 꺼낸 것도, 그립다는 얼굴을 하는 것도 송태섭 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오랜 시간 지켜왔던 송가네의 불문율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윤희가 병실을 박차고 나간 뒤, 송아라는 태섭의 손을 붙잡았다. 온 몸이 부러지고 타박상을 입은 탓에 목도 움직이지 못하니 잡은 손만 움찔거릴 뿐이었다. 오빠. 죽지 마. 송태섭은 그걸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지만, 송아라는 자기 생각만 했다. 나 두고 가지 마.

무얼 가리고 싶든지, 수정테이프를 여러 번 덧칠하면 티가 나기 마련이다. 아무리 꼼꼼하게 숨겨도 종이를 들어 조명에 비추면 그 아래 썼던 글자가 그대로 드러난다.

"어딜 간다고?"

한참 침묵하던 윤희가 물었다.

"오키나와요."

"학교는?"

"정학 기간 남았어요."

송아라는 속으로 생각했다. 엄마. 거기서는 학교 얘기를 할 게 아니고 왜 오키나와에 가고 싶냐고 물어봐야지.

원래도 대화와 교류가 자주 있는 모자 관계는 아니었으나, 사고 이후에는 거의 스카치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여둔 깨진 창문 같았다. 이 창문을 열기 위해서는 해결사 송아라의 힘이 필요하다. 엄마도, 오빠도 내심 아라가 흐름을 바꾸어주길 기대하고 있겠지만 이번에는 한 타임 쉬어갈 작정이었다. 저라고 매일 정상 영업만 하는 건 아니거든요? 아라는 속으로 빈정거리며 소독을 끝낸 상처 부위 위에 새 거즈를 붙여주었다.

03

어느 순간부터 겁을 상실한 것처럼 송태섭은 여기저기서 걸려 오는 싸움을 피하지 않았다. 새벽에 몰래 집을 빠져나가는 걸 아라가 목격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아침에 눈을 비비며 어디 갔다 왔냐 물으면 손가락으로 쉿. 하는 제스처를 한 태섭이 그냥, 근처 바다에. 하고 속삭였다. 다른 무서운 짓은 아무렇게나 하는 주제에 엄마에게 들킬까 무서워 하는 게 우스웠다.

"바다를 왜 몰래 보러 가?"

"몰래 본 거 아니거든? 답답하고 잠이 안 와서 간 거야."

"그러셔..."

아라가 하품을 하며 냉장고에 들어 있던 보리차를 마셨다.

04

송가네의 불문율. 기억 속에 묻어둔 것을 상기시키지 말 것.

티비를 보다 오키나와 뉴스가 나오면 모두 티비에서 시선을 뗀다. 태풍 때문에 어민 두 명이 바다에서 실종되었다는 뉴스였다. 부자연스러운 태도로 리모컨을 돌리는 송태섭과 할 일이 생겼다는 듯 자리를 뜨는 윤희의 뒷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했다. 좋아하는 소세지 볶음을 두 개씩 집어먹던 아라가 마지막 소세지를 두고 눈치를 봤다. 송태섭이 물었다. 근데 너도 이번에 전국체전 나가는 거 아니야?

"응. 맞아."

그 틈에 마지막 소세지도 아라의 입으로 들어갔다. 송태섭은 여전히 티비에 얼굴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엄마는 오신대?"

"얘기 안 했어."

윤희는 이사를 온 이후로 한 번도 태섭의 경기를 보러 간 적이 없었다.

"...내가 갈까?"

여전히 무의미하게 채널을 바꿔대는 송태섭의 옆얼굴을 보았다. 우리가 좀 더 어렸을 땐 오빠의 속이 좀 더 투명하게 보였는데, 지금은 알 듯 말 듯 하다. 어차피 예선에서 탈락할 게 뻔하니 딱 하루만 오면 된다. 그런 한심한 꼴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과 그런 꼴이라도 지고 나서 날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함께 존재한다.

"올 수 있어?"

허락의 말에 송태섭의 고개가 황급히 아라쪽을 향한다. 진짜 가도 되냐는 표정이다. 아라는 답지 않게 입을 가리고 중얼거렸다. 뭐... 오고 싶으면 와도 돼. 근데 예선 1차전에서 떨어질지도 몰라. 아라의 말이 길어진다. 왜냐면 우리랑 1차전에서 붙는 팀이 엄청 세. 작년에 우승할 뻔했던 팀이래. 우리는 후보 선수도 거의 없고...

"겁 나? 못할 거 같아?"

태섭이 물었다. 아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고 하기엔 자존심 상하고, 아니라고 하기엔 겁이 나는 건 사실이고.

"겁이 나는 건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해야지."

"..."

나도 무서운 게 많거든. 아라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입을 삐죽였다.

말하지 않아도 송태섭이 겁이 많다는 건 진작 알고 있다. 태섭을 걱정했던 준섭과 어머니가 생각난다. 이렇게 숫기가 없어서 어떡하냐고. 특히 송준섭은 그런 송태섭이 걱정이었는지, 태섭에게는 훨씬 엄격하게 굴었다. 배 타는 일을 했던 아버지는 사고에 휘말려 돌아가시기 전에도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바다에 있는 시간이 길었다. 송태섭에게 송준섭은 형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장례식에서 아라와 태섭이 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낯가림이 심해 동네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던 송태섭은, 준섭이 학교에 다녀오면 준섭과 시간을 보냈고, 준섭이 집에 없을 땐 아라가 노는 걸 지켜보거나, 아라의 미용실 손님이 되어 머리카락이 쥐어뜯기거나 했다.

그런 작은 오빠가 농구부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아라는 마음속으로 얼마 못 갈 거라고 생각했다. 준섭 오빠가 농구부 주장이니 함께 하고 싶은 거 뿐이고, 농구 같은 팀 스포츠는 작은 오빠에게는 그닥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러나 엄마와 아라의 예상과는 달리 태섭은 정말로 농구가 재미있는 것처럼 보였다. 준섭이 하교하기 전까지 마당에서 혼자 공을 들고 드리블 연습을 했다. 아라가 그림일기를 그릴 땐 형의 방에 있던 농구 잡지를 가져와 읽기도 했다. 잡지에 완전히 빠져든 태섭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특별한 형제'와 송아라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한 줄 더 그어진 기분이 들었다. 송태섭은 밥 먹고 나면 농구공을 들고 뛰어나가기 바빴고 준섭은 그런 태섭을 따라 나가려 신발을 신다 아차, 하고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집에 올 때 아라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사올게. 준섭이 사다 주는 아이스크림은 달콤하고 맛있었다.

사실 송아라는 오랜 시간 농구를 미워했었다. 아이스크림이 맛있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05

준섭이 해주던 일을 태섭이 대신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건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면서였다.

물론 뭘 하더라도 좀 엉성하긴 했다. 아침 일찍 일을 나가는 윤희 대신 아라를 깨워 밥 먹이고, 책가방을 챙겼다. 가방에 붙은 시간표 보고 책 챙기다 하나씩 빼먹는 건 일주일에 한 번 꼭 있는 일이었고, 체육복 빼먹어서 아라 혼자 교실에 남는 경우도 있었다. 학교에서 유행하는 방울 머리 끈으로 양 갈래머리를 해달라는 아라의 리퀘스트에 맞춰 머리를 묶으면 아라의 눈이 ㅡ ㅡ 이런 모양으로 관자놀이를 향해 쭉 찢어졌다. 자기 머리는 기깔나게 만지면서, 나도 예쁜 머리 하고 싶은데. 투덜거리면 태섭은 다른 곳을 보며 딴청을 피웠다.

정규 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송아라는 늘 학교에 한 시간 넘게 머물렀다. 선생님은 아라와 같은 처지에 놓인 아이들을 모아 한 반에 모아놓고 문제집을 풀게 했다. 가끔은 피구를 하게 해주기도 했고 아이스크림도 얻어 먹을 수 있어 나쁘지는 않았다. 다섯 시가 넘어가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간다! 그러면 가장 친한 친구 윤영이 부럽다는 듯 울상인 얼굴로 손을 흔든다. 윤영을 데리러 오는 건 네 살 터울의 고등학생 언니라 시간이 더 늦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걷다 보면 교문에는 근처 중학교 교복을 입고 교문을 서성이는 키 작은 남자아이가 있다. 매일 데리러 오면서 뭐가 그렇게 민망한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발장난을 하던 태섭을 보던 아라는 이유 없이 그를 골탕 먹이고 싶어졌다. 그냥 심술이었다.

송아라는 교문쪽에 붙어있는 별관을 올려다보았다. 공사 중 이라는 표시와 함께 노란 테이프가 붙어있는 건물은 원래는 학생들이 쓰던 교실이었지만 작년부터 출입이 통제되었다.

거기 2층이라면 아라는 태섭을 볼 수 있지만 태섭은 아라를 찾을 수 없다. 부끄러움이 많은 작은 오빠라면 절대 학교 안으로 들어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발이 잠시 기우뚱 기울다가, 방향을 바꾼다. 아주 나쁜 일을 하는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조심스럽게 별관 계단을 올라 태섭이 가장 잘 보이는 오른쪽 교실 문을 열었다. 묵은 먼지가 우수수 떨어져서 기침이 났다. 퀴퀴한 냄새가 났다. 교실 뒤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던 의자들 중 하나를 창문 쪽에 붙이고 그 위에 올라섰다. 태섭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내가 없어지면 오빠는 어떻게 할까.

*

깜박 잠이 들었다 일어난 아라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어떡해! 교실 안은 이미 깜깜해져 있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적은 양의 빛으로 사물의 실루엣이 구분되는 정도였다. 창문 밖을 보니 당연하게도 거기에 태섭은 없었다. 조금 골려 주려고 한 것 뿐인데... 황급히 별관 건물을 나와 주변을 살펴보다가 막막해져서 주저앉았다. 집으로 혼자 가야 하나. 가면 엄청 혼나겠지. 운동장 시계탑을 올려다보니 벌써 저녁 7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송아라는 늘 걷던 길이 이렇게 낯설었나 싶어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렸다. 작은 오빠 걱정 많이 했을까, 화 많이 났겠지. 엄마에게 혼나는 것도 무섭지만, 송태섭이 화가 났을 생각을 하면 그게 더 무서웠다. 지금보다 더 어릴 적엔 서로 싸우기도 많이 싸웠는데, 준섭이 죽은 이후로는 한 번도 다퉈본 적 없이 없었다.

어른이라도 된 것처럼 양보하고, 화가 나도 꾹 참고. 그게 싫어서 골려주고 싶었던 것 뿐인데...

"송아라!"

주먹을 들어 눈가를 비비던 아라를 부르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송아라가 뒤를 돌자 경찰 한 명과 송태섭이 서 있었다. 그들의 뒤에 반짝이는 간판에는 '지구대'라고 적혀 있었다. 경찰이 태섭에게 물었다. 찾던 동생 맞아? 태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죄송합니다. 고개를 여러 번 숙인 태섭을 내려다 보던 경찰이 이번에는 아라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송아라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입을 열면 그대로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그럴 수가 없었다. 송태섭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송아라를 내려다본다.

동네에서 오래 일했던 경찰은 그 모습을 보고 어떤 일인지 짐작한 뒤 태섭의 어깨를 두드렸다. 동생 잊어버리지 말고 얼른 가 봐. 늦었는데 태워다 줄까?

"걸어갈 수 있어요.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손을 뻗는다. 송아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라의 손을 태섭의 손이 감싸 쥐었다. 차가운 손이 이끄는 곳으로 걸었다. 조금 앞서 걷는 송태섭의 등을 보면서 언제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지 때를 기다렸다. 말 한 마디 건네지 않고 걷는 걸 보니 화가 엄청 난 것처럼 보이는데 차라리 화를 내지, 입 꾹 다물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아라는 눈물 자국이 말라붙어 거칠어진 피부를 문지르며 코를 훌쩍였다.

"...태섭 오빠."

"..."

"미안해."

미안하다고오.... 다시 울기 시작한 송아라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맨션 단지 앞에 다다랐을 쯤에야 태섭이 손을 놓았다. 꽉 잡힌 손에 피가 다시 흐르듯 찌르르했다.

"내가 데리러 가는 게 싫으면 말을 해."

"..."

"앞으로 안 갈 테니까."

그러고는 휙 돌아서서 계단으로 간다. 송아라는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사람의 마음은 정말 이상하다. 왜 가족일수록 자꾸 못된 말을 하고 싶어지는지, 이해받고 싶어 하는지, 사랑할수록 상처를 주고 싶은지.

"왜 자꾸 준섭오빠인 척 구는데? 그게 짜증 나서 그랬어."

어른도 아니면서, 고작 나랑 두 살 차이인 주제에 자기는 다 큰 것처럼 구는 게 싫어서 그랬다고.

악다구니를 썼다. 송태섭은 계단을 오르다 말고 뒤를 돌았다. 노란 조명 아래에 선 송태섭의 얼굴이 인제야 훤히 보였다. 송아라의 얼굴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얼굴이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 밑은 벌겋고, 눈물 자국을 달고 있는 어린애 같은 얼굴에 송아라는 그럴 상황도 아닌데 웃음을 터트렸다. 송태섭만 왜 웃는지 몰라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송태섭이 화를 내는 것도 더는 무섭지 않았다.

06

준섭이 돌아오지 못했던 날 밤을 아라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해가 지고 동네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그런 적이 없던 엄마는 양말도 신지 않은 채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소란스러운 바깥에 잠이 오지 않아 뒤척거리다 태섭의 방문을 두드렸다.

"오빠. 나 잠이 안 와. 무서워...."

방 문 너머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혼자는 싫어. 아라는 눈을 감고 문에 등을 기댔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평소보다 더 크게 들린다. 찌르르 우는 풀벌레 소리 사이로 어른들의 고성이 오간다. 우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태섭과 아라의 집은 마을 입구에 있는 집이라 바다와 멀지 않았다. 밤이면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곳이었다. 밀려오는 물소리, 멀어지는 물소리. 하지만 오늘은 익숙한 파도 소리 대신 무언가 우당탕 넘어지는 소리와 사람들의 어수선한 발소리만 담장 너머로 오가고 있었다. 낯선 소리에 귀를 틀어막고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

"넷, 다섯, 여섯, 일곱...“

악몽을 꾸고 다시 잠이 들지 못할 때마다 준섭이 알려줬던 방법이었다. 천천히 숫자를 세 봐. 숫자를 100까지 세고 기다리면 내가 꼭 아라 옆에 있어줄게. 부르면 꼭 올 거지? 아라는 준섭의 말이라면 뭐든 믿었다. 그건 태섭도 마찬가지였다.

그날은 아라가 알고 있는 숫자를 끝까지 세어도, 준섭은 오지 않았다.

마지막 숫자를 세고 난 뒤 서러운 울음이 터졌을 때,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방문도 열렸다. 미닫이문이 열렸는데도 빛은 들어오지 않았다. 송태섭은 깜깜한 방에 서 있었다. 유난히 밝은 여름의 달빛이 태섭의 얼굴 왼쪽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리와. 꺼질 듯한 목소리로 아라를 불렀다. 올려다본 태섭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중학생이 되어 그 얼굴을 다시 떠올려보자면.

꼭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실종 처리가 된 준섭을 송아라는 오랫동안 그가 인사도 없이 잠시 멀리 떠났다고만 알고 있었다. 누가 그렇게 알려준 것도 아닌데 그랬다. 동네 사람들이 집에 자꾸 안 좋은 일이 생겨서 어쩌냐고 물을 때마다 아라는 올바른 정보로 정정해 주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니에요. 우리 오빠는 멀리 있는 섬에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 동네 어른들은 모두 웃으면서 화제를 돌리거나, 흩어졌다.

그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다가, 하루는 윤희가 화가 난 얼굴로 아라의 손목을 잡아챘다.

"아라야. 대체 누가 너한테 그런 말을 했어?"

"뭐가?"

"준섭이가 먼 섬에 있다고. 누가 그래?"

"..."

아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을 했다고 혼날 것 같았다. 윤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왜 그래? 왜 그런 말을 해서 사람을. 사람을. 뒷말을 잇지 못하는 엄마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라는 이유도 모르고 윤희의 처음 보는 얼굴이 무서워 울었다.

"알려준 적 없어요. 근데 오빠 먼 섬에 있는 거 같은데. 바다를 보고 있으면..."

바다가 그렇게 말하는 거 같아서 그랬다고. 송준섭은 유난히 바다를 좋아했다. 아버지가 뱃일로 돌아가신 뒤에도 준섭은 배를 타고 저 멀리까지 낚시를 가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준섭은 윤희의 눈치를 정말 많이 보는 편이었는데도 바다 낚시 만큼은 제 고집을 꺾지 않았다. 태섭과 아라가 준섭을 찾을 때도 가장 많이 가는 곳이 바다였다.

아버지가 그리워.

송태섭과 송아라에게는 와닿지 않는 말이었다. 아라가 두 살, 태섭이 네살, 준섭이 일곱살이었던 무렵부터는 바다에 있는 기간이 집에 있는 기간보다 길어졌기 때문이다. 세 남매가 받은 사랑은 똑같았을 텐데도 아버지의 얼굴과 표정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하다.

준섭은 그래서 아마 바다로 갔을 것이다.

송아라도 송태섭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그리움을 찾아.

07

여자배구 중등부 지역 예선 1차전 경기, 배구는 남자 배구보다 여자 배구가 인기가 많은 편이라지만, 지역 예선인데다 1차전 경기를 보러 오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송아라는 관중석에서 익숙한 브로콜리 머리를 찾아냈다. 손을 붕붕 흔들자 송태섭도 따라서 손을 흔든다. 옆에서 물을 마시고 있던 유리가 고개를 쭉 내밀었다. 오빠야?

"넹. 저랑 안 닮았죠."

"...쌍둥인 줄 알겠다."

어디 가서 오빠 잃어버릴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툭 튀어나온 윗입술을 유리가 톡, 손가락으로 건드리고는 스트레칭을 한다. 쭉쭉 뻗는 팔과 다리가 시원하다. 스타팅 멤버가 아닌 송아라는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하고 벤치로 돌아갔다. 공식 경기라는 거 너무 오랜만에 출전해서 그런가... 아라가 답지 않게 말이 없자 옆에 앉아있던 선배들이 말을 걸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나... 긴장하나 봐요."

사실은 실전에 약한 타입인가 봐. 송아라는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오늘 컨디션은 '꽝'이었다. 전날 9시부터 잘 준비를 끝냈는데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한 시간은 잤을까, 속이 울렁거리고 가슴은 쿵쿵 뛰었다. 아침도 거의 먹지 못했다. 집을 나왔는데 햇살이 너무 눈부셔서 기분이 좋아졌다가, 마른하늘에 소나기가 내렸다. 덕분에 속옷까지 쫄딱 젖어 근처 편의점에서 속옷을 샀다. 유니폼 안에 입을 속바지는 가방에 넣고 온 채라 멀쩡해 다행이었다. 경기장에 도착한 뒤부터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화장실을 다녀오긴 했던가? 물은 마셨나? 물을 너무 많이 마시지는 않았나?

"오늘 내가 나가면 실수할 거 같아요."

눈을 질끈 감고 말하자 선배 하나가 등짝을 때렸다. 힘을 거의 빼고 친 다독임에 가까웠지만, 배구하는 사람의 악력은 상상 초월이다. 아라가 저도 모르게 아얏, 하고 소리를 내니 상대 팀에서도 벤치를 힐끔거렸다.

"송아라 최대 장점이 뭔 줄 알아?"

"귀여운 거?"

"아니. 못해도 일단 시작하자는 마음."

배구부에서 제일 성실하고, 농땡이도 안 피우고, 매일 연습하고, 힘든 티도 안 내고. 그게 어디 쉽니? 너를 믿어봐 아라야.

"아라야. 네가 노력한 시간을 믿어."

"그래. 믿어!"

"믿음!!"

선배들 셋이 파도타기를 하듯 일어나 믿음, 믿음, 믿음. 을 외쳤다. 비장한 얼굴이다. 아라는 그제야 미안한 마음에 따라 일어섰다. 주먹을 불끈 쥐고 믿음! 하고 외쳤다. 사실 누구보다 긴장되고 걱정되는 건 선배들일 거다. 마지막 전국체전이 될 수도 있는 경기였다. 상대 팀은 너무 강한 상대고, 우리는 작년 선배들이 빠진 뒤 아직 전력이 베스트가 되지 못했다. 송아라도 주전이 된 지 고작 2개월밖에 되지 않은 햇병아리다.

아라는 다시 정좌하고 벤치에 앉아 관중석에 있는 태섭을 찾았다. 아라의 팀을 보고 있던 태섭은 눈을 마주치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작게 주먹을 쥐어보인다.

*

송아라가 투입된 건 3세트 후반, 숨 막히는 랠리가 이어졌다. 유리 선배가 공을 쳐서 날려 보내면 상대 리베로가 바닥을 향해 다이빙한다. 리베로 치고 꽤 길쭉한 장신이라 수비할 수 있는 범위도 넓은 편이었다. 아라는 이를 꽉 깨물고 마음속에 '믿음' 두 글자만 남겼다.

나도 잘 하고 싶어, 선배들에게 보탬이 되고 싶어, 같이 오래 코트에서 뛰고 싶어.

그때, 상대 팀이 가장 잘하는 특기인 백A 속공이 시작되었다. 세터가 뒤를 돌아 공을 잡는 것과 동시에 스파이커는 이미 상공에서 대기 중이다. 체공시간이 꽤 길었다.

"아라!"

유리가 소리를 지른다. 평소에는 무슨 말을 해도 조곤조곤, 주장 치고 목소리도 작은 편이라 팀원들이 대화를 하다 유리의 말이나 지시를 듣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럴 때면 늘 한숨을 쉬며 두 번, 세 번 같은 말을 반복하고는 하지만 코트 내에서는 다르다. 유리의 목청이 경기장 전체에 쩌렁쩌렁 울리고, 송아라는 생각할 틈도 없이 공을 향해 달렸다.

기본 대기 장소보다 훨씬 앞으로 달려 나가는 아라를 유리가 저지했다. 뒤! 그러나 송아라의 예감은 좀 달랐다. 이 스파이커, 원래보다 팔꿈치 각도가 너무 높아요.

네트를 향해 슬라이딩한 아라의 손등에 아슬아슬하게 공이 닿았다. 튀어 오르는 공을 받은 건 아라의 팀 세터였다.

페인트일거라 생각했지롱. 아라가 씩 웃자마자 세터가 공을 토스한다. 긴 랠리의 끝이었다.

*

5세트의 접전 끝에 아라의 팀이 졌다. 상대 팀 선수들은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승부였다며 악수를 청해왔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졌다. 선배들은 울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럴 줄 알았다며 한탄하는 사람도 없었다. 2회전은 오후에 시작하지만, 1회전에서 진 아라의 팀은 경기장에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입고 있던 유니폼 위에 바람막이를 걸치고, 짐을 챙겼다.

배구부 고문 선생님과 코치, 그리고 3학년들이 남아 이야기를 나누었고 아라는 그들이 마지막을 잘 끝낼 수 있도록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브로콜리 머리를 하고 송아라와 쌍둥이처럼 닮은 송태섭이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송아라는 머리를 긁적이며 태섭에게로 갔다. 사실 그다지 창피하지 않았는데, 창피하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송태섭은 여기 근처에 맛있는 만둣가게 있다니까 먹고 가자며 앞서 걸었다.

"있잖아. 나도 7번이 좋아."

송아라가 말했다.

"오빠랑 같은 번호잖아."

송태섭은 7번에 대해서도, 경기 내용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만두를 먹다 말고 다음에 또 와도 돼? 하고 묻는 얼굴이 어쩐지 후련해 보였다.

08

송태섭은 아마 송아라가 그들의 비밀 기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아라가 엄마가 소중하게 여기는 컵을 깨고 무서워서 둘째 오빠가 했다고 거짓말을 했을 때, 송태섭은 억울하고 분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아라는 숨죽여 태섭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엄마에게 아라가 했다고 사실대로 말할까봐. 오 분이 넘게 혼난 태섭은 끝내 울지 않았다. 준섭이 보고 있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준섭은 책상 의자에 앉아있다가 윤희가 방을 나간 뒤에야 태섭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사실은 아라가 깬 거지?"

"응..."

동생 대신 혼난 태섭이 기특하다는 듯 준섭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태섭은 맞아. 아라가 혼나는 건 불쌍하니까, 내가 대신 혼난 거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문밖에 서 있던 아라는 미안함에 침만 꼴딱 삼켰다. 곧 태섭이 집을 나갔다. 놀다 올게! 쾌활하고 밝은 목소리였지만 송아라는 송태섭이 어딜 갈지 알고 있었다.

작은 몸이 해변을 따라 달린다. 그보다 더 작은 몸이 숨이 차도록 뛰었다. 뒤를 돌아보면 바로 들켰겠지만, 송태섭은 뒤를 돌아보는 일이 거의 없다.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말이다. 바윗길을 기어 올라가는 태섭을 보다 아라는 몸을 숙였다.

송아라만의 비밀 기지는 동굴 옆, 가장 바다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아라 딱 하나만 들어갈 수 있는 좁고 작은 틈은 송태섭도 송준섭도 모르는 공간이었다. 눈앞에 투명한 빛을 머금은 해파리가 보였다. 곧 태풍이 오려나, 해파리가 자주 보이는 곳은 아니었지만, 종종 파도가 높게 일거나, 태풍이 오기 전 해파리가 떠밀려 오는 경우가 있었다. 해파리의 다리가 하나 둘, 셋, 넷, 다섯. 너울을 따라 일렁인다.

해파리는 혼자서도 춤을 춘다. 그게 퍽 외로워 보여서 찔끔 눈물이 났다.

아라의 비밀 기지는 중학생이 된 지금까지도 아는 사람이 없다. 송태섭과는 대부분의 비밀을 공유하는 편이었음에도 동굴 밑에 만든 그 작고, 조용한 공간만큼은 얘기하지 않았다.


어른이 된다는 건 부끄러워 하던 일이 소중한 추억이 된다는 걸까? 송아라는 어제보다 조금 키가 큰 것 같은 몸을 내려다보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건 아라의 발과 그보다 조금 큰 송태섭의 발이다. 하얀 스니커즈를 신은 태섭이 몸을 일으킨다.

"다녀올게."

"응. 도착하면 연락해."

새벽 일찍 오키나와로 떠나는 송태섭이 고향에 돌아가는 사람 치고 너무 비장한 얼굴을 하고 있어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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