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열백호] 소금을 떼어주는 관계는 뭐라고 불러야 해?

2023.06.11

-넌 도대체, 강백호랑 무슨 사이냐?

 

“나도 모르겠어.”

 

투둑, 툭, 툭.

“소금을 떼어주는 사이인가…….”
“뭐?”

 

툭, 후드득.

양호열이 칼등으로 소파를 긁어낸다. 흰 미련이 눈꽃처럼 떨어졌다. 슥, 슥, 사각사각, 툭, 후드득, 투둑, 툭. 아름다운 이별이란 뭘까? 슥, 슥, 사각사각, 툭, 후드득, 투둑, 툭. 해도 해도 끝이 안 나네. 그치, 백호야.

 

너 나 되게 좋아하는구나.

있잖아,

 

 

소금을 떼어주는 관계는 뭐라고 불러야 해?

호열백호

w. 녀녀(@10veN1ike)

 

 

오전 여섯 시. 강백호가 눈을 번쩍 뜬다. 잠의 여파가 크지 않은 그는 단번에 몸을 일으켜 알람을 끄고 이불을 개어놓았다. 하얗고 거칠거칠한 알갱이들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의자에 걸쳐두었던 옷을 팡, 팡 털어 끼워입고 따끔하게 발바닥을 찌르는 바닥을 피해 가지런히 놓인 슬리퍼를 신었다. 

실내용 슬리퍼를 신는 강백호. 살다보면 진실같지 않은 이 문장이 진실이 되는 날도 있다. 양호열과 헤어진 강백호에게는 이런 불가피한 습관이 생겼다. 발소리가 적게 나는 장점이 있지만 불편하고 번거로운 습관.

 

백호는 집안을 둘러보았다.
온 집안이 바닷가였다.

 

익숙해져 짠 내음도 나지 않는 거실을 가로질러 커튼을 열어젖힌다. 해도 뜨지 않아 어두운 주변을 둘러보다 창문까지 밀어 열면 찬 바람이 정신을 차리라고 채근하듯 밀려들어왔다. 문을 열어놓은 강백호는 그대로 거실과 주방의 불을 켜고 쌀독에서 쌀을 퍼 담았다. 밥솥에 물을 받아 하얗게 쌀뜨물이 나오도록 쌀을 씻자 차가운 물에 손가락이 따끔하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우선 밥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해. 쌀들은 백호의 손아귀에서 바깥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들어갔다가 하며 깨끗해졌다.

 

밥을 안쳐놓은 강백호는 깨끗하게 세수를 하고선 소금이 붙지 않은 수건을 골라 얼굴을 닦았다. 전부 버리고 새로 사면 되는데 미련한 짓을 한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팔팔이네 부대찌개 개업식, 10월 12일. 파란색 글씨로 새겨진 며칠 전 날짜를 바라보다 수건걸이에 수건을 대충 걸어놓았다. 거실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바람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벽에 걸린 트레이닝 재킷을 집어든 강백호가 창문 밖으로 그것을 내밀고 몇 번이나 털었다. 소금들이 허공에서 춤을 추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깨끗해진 옷을 끼워입고 그는 동네를 뛴다. 백미 밥이 알맞게 지어질 때까지 뛰다 들어오는 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다.

 

오늘은 휴일이었고, 강백호는 대청소를 할 예정이다.
더 이상 집안 꼴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팔팔이네 부대찌개, 토요일 오전 10시. 

너는 무슨 대낮부터 소주를 찾아. 용팔은 투덜거리면서도 하나 뿐인 손님에게 수저와 물병, 소주 한 병에 소주잔을 가져다 주었다. 역시 의자를 편한 것으로 잘 고른 것 같다며 사소한 칭찬을 한 호열이 받은 컵에 물을 가득 따르고 소주 뚜껑을 따 잔을 맑게 채우며 물었다. 용팔아, 주말인데 장사가 너무 안 되는 거 아냐?

 

“넌 아르바이트도 해본 녀석이 왜 그런 말을 하냐. 지금 오전 열 시다, 이 부지런한 놈아.”

 

젓가락을 테이블에 톡 치더니 하얀 반찬 접시에 가득 올라온 콩나물 무침을 집어먹은 호열은 역시 이용팔이 식당을 하도록 도운 것은 잘 한 선택이었다고 웃었다. 후라이도 해 주랴? 호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팔은 후라이팬에 기름을 둘둘 두르고서 후라이 두 개를 바짝 구운 완숙으로 해 들고 나왔다가, 감사 인사를 전하기도 전에 부대찌개를 준비하러 주방으로 돌아갔다. 호열은 가게에 흐르는 청춘 시절 추억의 노래들을 흥얼거리며 후라이를 잘라먹었다. 용팔은 간 맞추는 걸 정말 잘 한다. 거의 모든 음식에서.

 

주방에서 냄비 하나를 들고 나오며 이용팔이 물었다.

 

“야, 혹시 후라이 싱겁냐?”

 

테이블에 냄비를 올리고 가스 불을 켜는 용팔에게 호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딱 맞는데. 네가 그런 질문을 하다니 의외네. 넌 간 맞추는 실력에 자부심이 엄청나잖냐. 왜, 진상이라도 왔어?

 

“아니. 전에 강백호가 와서는 나보고 후라이가 싱겁다는 거야. 소금을 하나도 안 쳤냐고 말이다.”
“……백호가?”

 

용팔은 헤어진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전 애인 이름을 듣는 것이 썩 달갑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후라이를 세 개나 먹어놓고 그러는 거야, 소금 치는 거 깜빡했냐고.”
“그런 말 자주 안 하는데.”

“그러니까 말이야. 나는 분명 쳐서 줬거든, 내가 했으니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지. 그래서 하나를 더 해서 나도 먹어보고 걔도 줬어.”
“응.”

“내 입엔 딱 맞는데 강백호 걔는 엄청 싱겁다는 거다. 그놈 자식, 입맛이 바뀌었나.”
“희한하네.”

 

양호열은 마지막 남은 후라이 조각을 입 안에 집어넣고 맛을 의식하며 씹는다.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맛이었다. 보글보글 끓으며 좋은 냄새를 내기 시작하는 부대찌개에 시선을 두고 호열이 턱을 괴었다. 용팔은 앞치마 차림으로 맞은편에 앉더니 젓가락을 한 쌍 꺼내들어 자신이 만든 반찬들을 조금씩 집어먹어보았다.

 

“나머지도 전부 싱겁다고 그러더라. 짜게 먹나, 요즘?”
“이게 전부? 멀쩡한데.”

 

강백호는 입맛이 평범했다. 조금 짜거나 싱거운 것은 잘 알아채지 못하고 맵거나 단 것도 가리지 않았다. 기껏해야 계란 후라이에 소금을 깜빡했을 때나 한 마디 하는 놈이 멀쩡한 음식을 싱겁다고 했으니 정말 간이 하나도 안 된 줄 알았던 것일테다. 헤어진 남자친구의 근황을 궁금해하는 것, 내키지 않지만 걱정은 걱정이다. 

그와 강백호는 오랜 친구였다. 백호군단이라는 이름의 친구 무리가 생기기도 전부터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며 지낸 소꿉친구 사이. 소중한 사람을 잃은 강백호를 호열은 몇 번이나 봐왔다.

그리하여, 자만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양호열은 강백호에게 중요한 존재다. 그가 백호와의 이별을 1년간이나 고민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아무도 믿지 못할 법한 말. 더는 백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 강백호는 그 누구보다 소중했다. 헤어짐을 가장 아프지 않게 전하기 위해 1년이나 고민을 거듭할 정도로. 우리 3주년이야. 대단히 시끄럽게 알리지 못할 연애에서 기념일 데이트는 거창한 적 없었다. 데이트 명소를 찾아다니기보다는 서로의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고 각자의 집에 부족한 물건을 채워넣느라 헤어진 후에도 흔적을 지우기 위해 오랜 시간이 필요한 연애를 했다. 

아는 사람만 아는 연애.

 

아는 사람만 아는 이별. 
양호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대찌개는 한 숟갈도 뜨지 못한 채로.

 

“얼마야?”
“이 새끼가 밥을 버리고 가네.”

 

쌀쌀한 바람에 코트를 동여매며 호열은 전 애인의 집으로 향하는 골목을 지난다. 둘의 이별은 백호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사귀는 것도 백호의 집에서, 헤어진 것도 백호의 집에서였다. 양호열은 그것을 못내 다행이라 여겼다. 자기 집에서 사귀거나 헤어졌다면 그 기억의 흔적이 이곳저곳에 남아있을 것이 분명했다. 백호의 집은 넓으니까, 미련이 그렇게 짙지는 않을 거야.

 

호열은 그와 자신의 이별이 제법 어른스러웠다고 자부한다. 백호와 하는 모든 것을 근사하게 기억하고 싶었다. 연애는 그렇지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아름답지 못했다. 걸핏하면 싸웠고 하나부터 열까지 맞는 취향이 없었다. 백호에게 맞추고 싶은 양호열의 취향을 알아내고 싶어하는 강백호와 식탁 앞에 마주앉아 진지한 대화를 몇 번이나 했는지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연애를 하기 전에는 전부 들어맞았던 취향과 성향이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졌다. 그는 고집스럽게 ‘너만의’ 취향을 궁금해했다. 내가 좋아하는 거 말고, 네가 좋아하는 거. 내가 싫어하는 거 말고, 네가 싫어하는 거. 양호열은 그게 어려웠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 찾기도 어려웠다. 다양한 이유로 싸우고 다양한 이유로 화해했지만 연애를 계속 이어나가고 싶은 마음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우리의 연애는 평생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특별할 것이라고, 우리는 다를 것이라고.

평범한 두 사람이 만나 평범하게 하는 연애에는 평범한 결말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이별만큼은 근사하게 하고 싶었다. 너와 내가 연인에서 친구로 돌아가는 일. 우리 헤어져도, 친구로는 지낼 수 있는 거지? 호열은 그게 될 것만 같았다. 되지 않으면 헤어지자는 말도 꺼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백호네 집 지붕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들의 이별은 함께 지붕을 올려다보며 이루어졌다.

 

벨을 누르려는데 대문이 열려있었다. 현관문도 조금 열려있어서, 호열은 이름을 부를 생각도 하지 못하고 현관문 손잡이를 잡으려다 멈춰섰다. 손잡이에 소금을 닮은 하얀 결정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손끝으로 쓸자 파스스 부서져 바닥으로 떨어지는 가루에서는 바닷물 맛이 났다.

 

십여 년 사이 낡아버린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래서 호열은 평소 백호네 현관문을 열 때는 손잡이를 꽉 쥐어 살짝 들어올린 채 열었는데, 오늘은 소금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그러지 못하는 바람에 녹슨 경첩이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특대형 빨간색 고무장갑을 팔뚝까지 당겨끼고 식칼을 든 강백호가 누구세요? 물으며 현관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잠시 눈만 껌뻑이던 백호가 바닥에 꿍 주저앉는 것을 보며 그의 전 애인은 신발을 벗고 들어왔다.

 

“윽. 백호야, 이게 다 뭐야.”

 

양호열은 넋을 놓아 조금 찌푸린 표정을 했다. 바닥이며 벽이며 가구들이 온통 염전 같았다. 심한 곳은 소금결정이 꽃처럼 피어나 있기도 했다. 예쁘다기보다는 지저분하고 기괴했다.

 

“왔냐.”

 

하던 일을 잠시 멈출 심산으로 백호가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았다. 백호의 주변은 갈린 소금이 흩어져 온통 하얗고 어수선했다. 더러운 것은 둘째치고 짠내가 지독하게 났다. 도심 한복판에 바다가 생긴 것도 아닌데 그랬다. 고무장갑을 낀 손등으로 얼굴을 긁던 백호는 넋이 나간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호열에게 말했다.

 

“대청소를 하고 있어.”
“네가 닿았던 자리가, 전부 이래.”

 

 

집안은 쌀쌀했다. 

양호열은 집안 전체가 소금 투성이임을 금방 알게 되었다. 천장은 거의 깨끗했지만 형광등 끄트머리에 소금이 붙어있었다. 작은 거실 시계와 벽걸이 액자, 티비다이와 서랍장, 소파. 뭐 하나 멀쩡한 게 없다. 강백호가 신은 바닥이 도톰한 슬리퍼만 멀쩡했다. 

실내용 슬리퍼를 신는 강백호. 이상해, 어색해. 호열은 백호의 발을 빤히 내려다봤다.

 

“내가 닿았던 자리마다, 라니.”

 

양호열은 다시 큼지막한 식칼의 칼등으로 테이블을 긁어내기 시작하는 백호를 보며 흔들리는 눈을 하고 물었다. 언제부터 이랬는데?

우리가 헤어진 날부터.
아침 조깅을 하고 왔을 때, 네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그 날부터.

백호의 말에 소금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잔뜩 붙은 소금을 떼어낼 생각도 못 하는 것 같았다. 양호열은, 싱크대 서랍을 열어 고무장갑을 꺼냈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미련을 함께 긁어 떼어냈다.

 

 

“밥 먹고 가.”
“그럴까.”

 

……그래. 

헤어진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전 애인의 식사 준비를 어디까지 도와줘도 괜찮은지 알 수 없어 호열은 식탁 앞에 앉아있기만 했다. 숟가락 정도는 놔도 되는 거 아냐? 그런데 어쩐지 의식하는 것도 좀. 냄비에 가스불을 올리며 소분해놓았던 밥을 데운 강백호가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반찬을 꺼내다가 식탁에 늘어놓았다. 잠시 눈치를 보던 호열은 반찬통 뚜껑을 하나하나 열어 옆으로 밀어놓았다. 

국 끓는 내가 났다. 데운 밥을 자리에 하나씩 놓은 백호는 국그릇 두 개를 들고 냄비 앞에 섰다.

 

된장국이었다. 두부를 송송 썰어넣은 된장국. 의자를 꺼내앉은 백호가 숟가락을 드는 것을 보고서야 호열도 숟가락을 쥐어 국을 한 숟갈 떠먹었다. 그 첫 입에 이용팔의 걱정이 이해되었다. 국은 뱉고 싶을 정도로 짰다. 된장국이 맞나 싶어 국물 색을 확인해본 호열은 고개를 들어 강백호를 봤다. 백호는 아무렇지 않게 국그릇을 들어 국물을 꿀꺽거리며 넘기고 있었다. 강백호.

 

“국 그만 먹어. 간 맞춰줄게.”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백호에게서 국그릇을 빼앗은 양호열은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끓였다. 한 순간에 된장국을 빼앗긴 그가 떨떠름한 눈으로 호열에게 물었다. 많이 짜냐?

 

“용팔이가 걱정하더라. 입맛이 바뀐 것 같다고.”
“그릉가.”

“많이 짜. 여기 공기까지, 전부.”
“그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

“백호야, 짜게 먹지 마.”

 

끓인 물을 국에 넣고 숟가락으로 휘휘 저은 호열은 조금씩 간을 본 뒤 식탁 위에 다시 내려놓았다. 말 없이 양호열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백호가 대답했다. 나는 몰랐어. 몰랐지. 민망해져 뒤통수를 긁었다. 다시 마주앉은 그들은 드문드문 근황 이야기를 하며 밥그릇을 비웠다. 쌀알 하나 남기지 않고 싹, 싹 긁어먹었다. 설거지도 자기가 하겠다는 강백호 때문에 호열은 더 남아있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소금이 가득 담긴 쓰레기봉투를 세 개나 들고 당부했다.

 

“또 이러면 불러.”
“그리고 백호야, 짜게 먹지는 마.”

 

너, 나 되게 좋아하는구나. 

호열은 백호의 눈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네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우리는 다시 절친한 친구가 될 수 있을텐데. 내가 돌아가기만 한다면, 우리가 다시 연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구나. 

이 미련은 네 것이야. 내가 있던 자리마다 사랑의 흔적을 붙잡고 싶어한 너의 미련. 나는 네가 너무 소중해서, 미련마저 함께 긁어주고 있어.

 

양호열은 도대체, 강백호와 무슨 사이야?

백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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