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st Stars (1)

삽질하는 탱백썰 지옥불버전 / 백업

재앙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강백호는 아파트 화단에 주저앉아 길지 않은 스스로의 인생을 복기하다가 갑자기 울컥하여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저 멀리서 한 여성분이 아파트먼트 현관으로 다가오시다가 멈칫하시더니 눈에 띄지 않는 움직임으로 뒷걸음질하셨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강백호 또한 지금은 그 여성분의 마음을 살필 여력이 없었다. 학창시절에 아무나에게 고백을 하고 다녔던 천벌을 받는 걸까. 미국에 오고서 강백호는 그 어떤 강한 상대팀과 맞붙더라도 그게 지는 싸움이라고 생각하며 경기에 임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사랑에서 만큼은 달랐다. 중고등학교에서의 50번에 이르는 고백들이 모두 거절당하고 조금쯤 철이 들 무렵 스스로의 사랑고백이 얼마나 얄팍한지 깨닫고선 운명의 상대를 만나기 전까진 누구에게도 사랑고백을 하지 않겠다 마음먹은 참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얄미운 여우놈을 이기겠다는 일념으로 고등학교 3년을 있는 힘껏 맞부딪히느라 그럴 시간이 나지도 않았다. 그리고 여우를 따라 미국에 건너온 지 2년째 되는 오늘, 강백호는 지구상에 남은 오직 단 한 사람이 되더라도 절대 사랑해서는 안 될 상대, 즉 망할 놈의 여우자식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국에 온지도 2년이 되었고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난 여우자식과 인연을 이어온지도 5년째. 학생 신분으로 값비싼 미국의 주거비용을 충당하기엔 무리가 있었고, 서로의 대학이 비슷한 지역구에 속해 있다는 우연과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 무슨 악연인지 미국까지 와서 여우자식과 동거인이 됐다. 종종 송태섭을 귀찮게 하며 여우자식이 얼마나 재수 없는지 토로하기는 했지만 실은 여우자식과 함께 살아가는 건 나쁘지 않았다. 상대는 의외로 예민하지 않고 무던했으며 집안일을 곧잘 해내지는 않았지만 시키는 일은 군말 없이 했다. 투닥거리는 일상이었지만 2년 동안 같이 지낸 게 헛은 아니었는지 요즘은 서로의 사이도 대체로 평화로웠다. 지금에 와서는 어린 시절에는 여우자식의 무엇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잘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문제는 여우자식의 농구선수 치고 조금, 아주 조금 잘난 얼굴에서 시작된다. 소연이를 꼬신 그 여우같은 얼굴 때문인지 서태웅은 고작해야 대학 농구선수인 주제에 크고 작은 스캔들이 나고는 했다. 원치는 않았지만 서태웅과 붙어다니는 생활이 이어지고 있는 백호는 이 스캔들이 거짓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1년 365일 중 함께 지낸 날이 350일이었고 나머지 15일은 태웅의 부모님 오셨을 때 떨어져있던 때다. 사람을 사귀기엔, 서태웅의 시간은 절대적으로 강백호에게 귀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강백호는 같은 대학의 여자친구들이 서태웅의 스캔들을 입에 올릴 때마다 마음이 술렁이는 걸 느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울렁임에 강백호는 일단, 모르는 척을 해보기로 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런 강백호가 확실하게 이 마음을 정의내릴 수 있게 된 건 서태웅과 유명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기 위해 서태웅의 차를 몰아 대학 정문에 차를 대고 최신 유행 락을 틀어놓고 서태웅의 취향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을 때였다. 스캔들의 두 주인공 중 하나였던 대학 퀸카가 서태웅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나누더니 갑작스럽게 키스하는 걸 목격한 건. 쿵-하고 가슴에 내려앉는 그 기분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아무렴, 암만 풋풋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나름 고백만 51번을 한 남자였는걸. 강백호는 제 인생에 고난이 없다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착하게 살아왔으니 이제쯤 신이 자길 도울 때가 되지 않았을까 하고 기대하고 있었다. 언젠간 제가 좋아하는 토끼 같은 여성과 단란한 가족을 이뤄 그녀를 닮은 토끼 같은 아이를 원하게 될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하면 때때로 심장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농구를 시작한 이후로는 나름 일이 잘 풀려 제 희망이 이뤄질 날이 머지않았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건,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하필 여우자식이라니!!!!!!

강백호는 부정해보기로 했다. 미친 게 아닌 이상 여우놈을...?? 좋?? 차마 마음으로도 끝까지 완성시킬 수 없는 문장이었다. 세상사람 다 괜찮아도 저놈만은 안 돼. 왜 안 되느냐면 그냥 안 돼. 이유는 백만 가지라도 얘기할 수 있었지만 그냥 이 말이면 됐지. 누군가가 본다면 그렇게 싫어하는 상대면서 왜 미국까지 쫓아왔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상황이었지만 강백호는 진지했다. 게다가 스캔들 난 상대랑 키, 키, 키스까지 했을 정도면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생각해보니 저와 사적인 시간을 거의 같이 보내기는 했지만 대학은 다르니 제가 모르는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 강백호 자신은 제 마음을 깨달은 순간 차인 셈이다. 다시 술을 벌컥 들이킨 강백호는 멍하니 보도블락에 그어진 빗금을 바라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일단, 서태웅과 떨어지자. 그러다보면 무언가 해결되지 않을까? 세간에서는 이런 걸 두고 회피성향이라 부른다지만 강백호는 저의 애착기제에 대한 깊은 탐구심을 가질 생각은 없었다. 아무래도 미국에서 타인과 깊게 관계 맺을 틈도 없이 서태웅과 너무 가까운 거리를 유지해서 그렇다는, 북산 고등학교 대표 낙제생으로서는 나름의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한 강백호는 집을 나가기로 한다. 그래, 내가 서태웅을 좋아할 리가 없잖아. 불가능해.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는 점은 선수로서 타고난 좋은 기질이었으나 애정 전선에서 만큼은 도저히 긍정적으로 발휘될 일이 없었다.


[나 집 나간다.] 그 짧고도 강렬한, 영문 모를 문자메세지를 보면서도 서태웅은 담담했다. 오늘 같이 밥을 먹기로 한 멍청이가 건물 코앞까지 차를 대고선 얼굴도 잘 모르는 여자가 제 목을 덥썩 잡아채곤 입맞춤을 시도하는 걸 목격하더니 갑자기 차에 시동을 걸고선 도망갔다. 그리고 이런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정말 알기 쉽군. 요즘 뭔가 이상하더라니, 드디어 깨달았나. 집까지 나가버릴 줄은 몰랐지만, 뭐 강백호라면 있을 법하지. 서태웅이 강백호의 마음을 깨달은 건 예전 일이었다. 고백해오는 사람은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았기에 어린 시절부터 성별 따위로 애정을 가려본 적이 없는 태웅은 강백호의 오랜 집착을 받으며 미미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후, 미국행이 결정되었을 때 취한 척 강백호에게 물었다. 저를 좋아하느냐고. 멍청이는 머리색만큼 새빨개지더니 골목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그럴 리가?!?!!?! 음, 맞군. 서태웅은 눈치가 빠르진 않았지만 머리가 안 좋은 건 아니었다. 강백호의 반응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이의 그것이었고, 서태웅은 그걸 모르는 척해주기로 했다. 사귀면 헤어질 수도 있지 않나. 강백호와의 농구는 재미있었고, 서태웅은 앞으로도 강백호와 농구를 하고 싶었다.

1학년 때는 눈뜨고 못 봐줄 꼴이었던 주제에 재활까지 하고서 나름 이름 날리는 실력을 갖춘 게 흥미로웠다. 서태웅은 이런 놈은 제 인생에 다신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제 뒤를 바짝 추격해오는 멍청이의 그림자는 고등학교 3년, 그리고 기어코 미국까지 따라와 동거를 한 이 2년 동안 서태웅의 기분을 들뜨게 했다. 그걸 고작 연애 따위로 잃을 순 없지. 강백호는 앞으로도 제 뒤를 쫓을 거고, 확실하진 않지만 누군가가 말해주지 않는 한 자신이 라이벌을 좋아하는 줄은 꿈에도 모르는 멍청이고, 그럼 앞으로도 변하는 건 없을 테니. 강백호와 농구만 할 수 있다면, 뭐든 상관없었다. 불행한 일은 서태웅 또한 생각이 그리 깊지는 않다는 것. 지난 몇 년을 저만 쫓은 녀석이니 영영 없어질 생각은 아닐 테다. 길어야 일주일 아니겠나. 그리 생각하며 서태웅은 언제나와 같이 잠에 들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강백호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지 2주째 되는 날 서태웅은 폭발했다.

[언제 들어오는데] [집 나갔다니까] 그 메시지를 뚫을 듯 바라보다가 탁-하고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덮어버리곤 책상에 턱을 괴었다. 일반인의 두 배 굵기는 되는 농구선수의 두꺼운 검지손가락이 목재로 된 책상을 툭, 툭하고 반복적인 소리를 내며 두드렸다. 그러고선 드르륵-하고 교실에 있는 이들의 이목을 끌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잠자는 일을 제하고는 대부분의 관심을 오롯이 농구에만 집중하는 서태웅은 의외로 스포츠교양 과목을 성실히 수강하는 편이었고, 서태웅을 거진 자신의 수제자로 여기기까지 하는 유명 농구팀 출신 교수는 서태웅의 형편없는 꾀병연기를 흔쾌히 넘어가주었다. 덕분에 서태웅은 오늘 남은 유일한 수업을 제끼고 강백호를 잡으러 떠날 수 있었다. 가까운 타교를 다니고 있는 멍청이가 갈 만한 곳이라고 해봐야 손바닥만큼이나 뻔했다. 놈의 수강과목은 죄다 꿰고 있었고, 수업 뒤엔 무조건 훈련을 한다. 놈은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빠지지 않았다. 서태웅은 오늘 기필코, 강백호를 집에 데려다 놓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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