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환대협/마키센] 맞선 보는 썰

윤대협은 The M 호텔의 카페에 앉아 있었다. 로비에 자리잡은 카페는 고전적이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대협은 자리를 안내해주려는 직원를 마다하고 가장 안쪽의 테이블로 향했다. 괜히 입구 근처나 중앙에 앉아 있다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약속 시간을 일부러 브레이크 타임 근처로 잡은 것도 그래서였다. 빨리 용건만 끝내고 가야지. 그는 입고 있는 와이셔츠의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세개 정도 풀어놓는 게 좋을까? 껄렁거리는 남자친구의 이미지가 좋을지, 아니면 비교적 정중한 남동생의 이미지가 나을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대협은 가슴쪽의 단추를 풀고 의자에 삐딱하게 기대 앉았다. 껌이라도 같이 씹고 있으면 좋을까 싶어서 바지 주머니를 뒤져 보았지만 나오는 건 발레 주차권과 휴대폰 뿐이었다.

"주문 도와드릴까요?"

"아...네...유자 에이드 하나 주세요."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종업원이 멀어지고 대협은 이상한 모습을 들켰다는 민망함에 다시 자세를 바로 잡으며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비싸. 고급 호텔에 있는 카페 아니랄까봐 메뉴 가격대가 말도 안되게 높았다. 입술 안쪽을 한번 꾹 씹은 그는 휴대폰의 화면을 켜고 메신저 앱을 열었다.

- 오늘 나오는 돈 다 청구한다. 두 배로.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과거의 대화 기록을 찾아 스크롤을 올렸다. 시작은 3일 전, 한달 동안 연락이 없던 그의 누나 윤소저(그렇다. 그의 부모님은 무협지 광이었다.)가 보낸 메시지 하나였다.

- 목요일 오후 시간 비워라.

'시간 있냐'도 아니고 '시간 비울 수 있냐'도 아니고 '비워라'다. 윤대협의 선택지는 하나도 고려하지 않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담긴 문장에 대협은 2분 동안 그 문장을 꼬나보다가 답을 보냈다.

- 왜?

- 나 맞선 날짜 그 날로 잡힘.

- 근데 왜 내가 비워야 돼?

- 네가 나갈 거니까.

?

이게 무슨 개소리야. 대협은 양 눈썹 사이가 거의 붙을 정도로 찡그린 채 타자를 쳐 나갔다.

- 무슨 소리야. 누나 맞선을 왜 내가 나가.

- 동생아, 이 누님은 결혼 같은 강제적인 사회적 제도에 매일 생각이 없단다. 너도 알겠지만 결혼이라는 것은......(이하생략)

이후 이어진 대화의 결론인 즉, 뭐가 됐든 결혼 생각은 없으니 맞선을 파투내달라는 소리였다. 그냥 거절하거나 바람 맞추면 안되냐고 묻자 하는 소리가 거절하면 다른 사람으로 또 선 약속이 잡힐 거고, 바람 맞추는 건 좀 불쌍하잖아, 라는 거였다. 남자친구인지 남동생인지 모를 사람을 통해 거절 당하는 건 안 불쌍하고? 죽어도 안 들어줘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이번 한번만 부탁을 들어주면 다음 가족 모임에는 꼭 자신이 참석하겠다는 말에 넘어가고 말았다. 겸사겸사 아무것도 모르고 지옥에 발 들이기 일보 직전인 사람을 구제도 해줄 겸. 분명히 당장은 원망스럽겠지만 나중에 가면 깨달을 거다.

아, 내가 그때 윤소저라는 또라이랑 결혼하지 않기를 정말 잘했구나, 하고.

"주문하신 유자 에이드 나왔습니다."

...역시 건달 남친의 이미지가 좋을까. 대협은 깔끔하게 잠갔던 단추를 다시 풀까말까 고민하며 음료를 홀짝였다. 달콤쌉쌀한 유자향이 혀 끝에 톡톡 튀었다. 맛있다. 그 가격에 맛까지 없었으면 엄청 짜증이 났을 거다.

그나저나 만나는 곳이 호텔 카페라니 되게 고지식하네. 대협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카페 분위기도 그렇고 제법 나이가 있는 사람인가 싶었다. 대협이 알고 있는 맞선 상대의 정보는, 윤소저의 말에 의하면 이랬다.

나이는 네 또래라는데 사진을 보니 사기인 거 아니냐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니까. 이름은 이정학인가 종학인가 그랬고.

그런 추상적이고 매우 개인적인 감정이 담긴 설명 외에 알아볼 만한 그런 객관적인 특징은 없냐고 물었더니 눈 두개 코 하나 입 하나라고 말했다. 정말로 선 보기 싫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짜증도 났다. 왜 아주 이름도 초성으로 알려주지. 그때 카페 입구에 누군가가 도착했는지, 종업원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것이 보였다. 구석의 자리는 입구에서 잘 보이지도 않지만, 자리에서 입구를 보는 것도 어려웠다.

대협은 방금 카페 안에 들어온, 시간을 생각하면 아마도 맞선 상대일 사람의 반응을 상상하며 유자 에이드를 빨대로 쪽 빨아들였다. 자신의 상대가 대리를 보냈다는 사실에 화를 낼지, 당황할지, 아니면 덩달아 안도할지.

대협이 이런저런 시나리오를 떠올리는 동안 새로 도착한 손님은 카운터에서 직원과 꽤 길게 대화를 하는가 싶더니 느긋한 걸음으로 안쪽으로 들어왔다. 검은색 정장 구두 위로 쭉 뻗은 다리가 꽤 보기 좋았다. 윤대협은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점수를 매기며 시선을 올렸다. 걷어올린 셔츠 소매 밑으로 보이는 제법 까맣게 탄 팔뚝이 운동 깨나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남자는 카페 내부가 잘 보이는 곳에 서서 띄엄띄엄 앉아 있는 손님들을 훑어보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그쯤에 윤대협은 그 남자의 분위기가 꽤 익숙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진한 색의 파일럿 선글라스가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윤대협은 95% 확신했다. 저런 턱선을 가진 남자가 세상에 그렇게 흔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남자가 선글라스를 벗을 쯤 되어서는 테이블에 있는 메뉴판으로라도 얼굴을 가릴까 생각했다. 요즘 메뉴판들은 왜 전부 손바닥만한 사이즈지? 이상한 곳에 화풀이를 하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사이, 남자가 그를 알아보고는 이름을 불렀다.

"윤대협?"

"...정환이 형."

대협은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뻣뻣한 손을 들어올렸다. 셔츠 앞주머니에 선글라스를 건 정환이 그를 향해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대협과 마주보는 빈 자리에 앉은 정환은 이미 상황파악이 다 끝났다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윤소저와 윤대협. 그 특이한 이름 두개를 연결하는데는 머리를 오래 굴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

"......"

윤대협은 지금까지 어떤 시합에서도 어떠한 중압감 아래에서도 도망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는 생각했다.

아 x발 도망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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