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준호] 복마전(伏魔殿) 5
구 탐정 정대만
기세좋게 시작하긴 했지만 조사는 초반부터 막혔다. 대만 나름대로 뒷세계와는 인연이 있는지라 영걸이에게 부탁한 이후로도 여기저기에 허윤진에 대한 이야기를 물으러 다녔지만 특별한 점은 없었다. 그를 아는 이들은 대부분 잘 죽었다, 내가 죽였어야 했는데 라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산왕의 조직원이라고 폼 잡고 다니더니 꼴좋네. 목에 뻣뻣하게 힘주고 다니는 거 존나 맘에 안 들었거든.'
'그 좆같은 새끼가 클럽에서 마약 뿌리고 다닌 탓에 애꿏은 우리만 피해봤어. 내가 그 새끼 족치려고 했는데 먼저 족친 사람이 있었네.'
'그 녀석은 마약보다 여자에 미친 새끼였지. 아랫도리 간수 못하고 다녀서 여자들한테 머리채 잡히는 것도 봤지. 별 볼일 없어보이는데 까보면 달랐나봐.'
덕분에 별로 알고 싶지 않은 tmi까지 듣게 다닌 탓에 대만의 한숨만 늘어갔다. 하지만 아예 수확이 없던 건 아니었다.
'허윤진이 죽은 거야 내 알바 아니지만... 산왕이랑은 엮이고 싶지 않아. 다른 데 가서 알아보라고.'
'허윤진이란 이름은 모르겠는데? 산왕이라면.......이건 여기서만 이야기지만 최근에 내부 분위기가 살벌하다던데? 내부 분열이라더니만 이제 아예 피까지 보는 모양이야. 댁도 죽고 싶지 않으면 적당히 쑤시고 다녀. 그러다 칼맞아.'
'그 녀석 죽은 이후로 같이 다니던 놈들 한 번도 못 봤는데... 산왕 분위기 안 좋다는 말도 있으니까 어쩌면 다른 놈들도....아, 아니! 난 아무것도 몰라! 방금 한 말은 신경 쓰지마! 난 그쪽이랑 엮이고 싶은 마음 없으니까!'
"허윤진? ......그런 놈 모르니까 딴 데가 가서 알아봐'
이명헌이 찾아갔던 그 날 이후로 산왕으로부터 연락이 온 건 없었지만 그 쪽 역시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모양새였다. 그 탓인지 산왕 자체에 엮이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산왕의 분위기가 그렇다는 건 역시 허윤진의 죽음은 내부 분열의 결과라는 걸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셈이었다. 문제는 그거 말고는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역시 영걸이한테 연락이 오길 기다려야 하나. 오늘도 헛걸음만 한 채 대만은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경찰에서라면 벌써 피해자 부검 결과랑 핸드폰 통화내역까지 조사했을텐데. 부검결과도 결과지만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만 알아낸다면 좀 더 조사가 수월해질 수 있을텐데.. 대만은 자켓 주머니에 들어있는 핸드폰을 힐끗 쳐다봤다.
"..채치수한테 전화해봐..? 아냐, 관두자. 그 녀석이라면 물어보는 순간 바로 의심할거야."
대만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머리를 굴렸다. 치수나 그 녀석 팀말고 정보를 얻어낼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있으면 좋을텐데.라고 생각한 순간 떠오른 건 사건 현장에서 만난 준호의 얼굴이었다.
"...오랜만이었지. 그 사람 얼굴 본 건.."
거리를 걷던 대만의 발걸음이 천천히 느려지다가 이내 멈췄다. 그 때.. 넘어지지 않았겠지. 옆에 치수도 있었고 후배.. 이달재라던가? 송형사라 친구라던.. 그 사람도 있었으니까.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는 살이 조금 빠진 것 같았는데. 다리는... 지팡이를 짚고 서 있던 준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대만은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그 사람을 걱정해... 그 사람에게 상처를 준 건, 그런 모습으로 만든 건.. 꼬리를 물고 이어진 상념의 끝에서 대만은 오래 전 어느 기억을 떠올렸다. 눈이 오던 어느 날의 일을.
'다가오지마! 다가오면 이 녀석 죽여버릴거야!'
'쓸데 없는 짓 하지마라. 그래봤자 네 죄만 더해질 뿐이야. 어서 인질을 풀어줘!'
'다가오지 말랬잖아! 내 말이 우스워?'
'저, 정형사님..!'
인질을 붙잡고 있는 남자와 대치 중인 형사. 둘 사이에 긴장감은 고조됐고 흥분한 인질범의 손에는 칼이 있었다. 형사는 자신이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격에는 자신이 있었다. 인질범이 인질을 해하기 전에 그에게 구멍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인질을 빨리 구하고 싶었다. 자신 때문에 인질이 된 그 사람을 빨리 구해주고 싶었다. 자만심과 조바심이 만나 결국엔...
탕!
최악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하얗게 쌓인 눈 위로 붉은 피가 흩어졌다.
"...."
대만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근처에 있는 건물들 사이로 들어갔다. 쓸데 없는 게 생각났네.. 자켓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배 끝에 붉은 불꽃이 어렸고 희끄무레한 담배연기가 골목에 퍼졌다. 넥타이 없이 입은 셔츠이건만 마치 무언가 목을 조르는 느낌이었다. 갑갑한 기분을 떨쳐내려 대만은 셔츠의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목을 조여오는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하... 한심해 진짜."
대만의 발 밑에는 담배꽁초들이 하염없이 쌓였다. 그 날의 새하얀 눈처럼. 골목을 빠져나온 건 30여분이 지나서였다. 주머니에 들어있던 담배갑은 텅 비어 있었다. 사무실에 담배가 있던가.. 대만은 길가에 놓은 쓰레기통에 담배갑을 던져놓고 다시 걸었다. 오늘따라 유독 사무실이 멀게 느껴졌다. 담배로도 해소하지 못한 우울함을 끌어안은 채 사무실 건물에 도착한 대만은 계단을 오르다 문 앞에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뒷모습만 보고 의뢰인인가 생각했지만 상대가 짚고 있는 지팡이를 보고 대만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형사님."
문 앞에 서 있던 건 준호였다. 치수와의 대화를 끝내고 준호는 부검실로 돌아가지 않고 이 곳으로 왔다. 치수에게 받아서 이미 알고 있었지만 차마 오지 못했던 대만의 사무실로.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외출 중이신 줄은 몰랐어요."
준호의 말에도 대만은 대꾸없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빠르게 계단 위를 올라왔다. 그대로 그를 스쳐 지나가 잠겨있는 사무실 문을 열었다. 바로 옆에 준호가 있음에도 대만은 시선을 그에게 주지 않았다. 며칠 전 그 날처럼 대만은 준호를 모른 척하려 했다. 하지만 준호는 이번만은 그를 쉽게 보낼 생각이 없었다. 가슴 속에 생겨난 불안을 잠재워줄 말을 들어야 했다.
"잠시만요. 형사님"
준호는 대만의 팔을 붙잡았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대만의 발걸음이 멈췄다. 하지만 대만의 시선은 여전히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잠깐이면 돼요. 잠깐만 저한테 시간을 주세요."
"..죄송하지만 저는 할 말 없습니다."
"제가 할 말이 있어요. 제가 묻는 말 하나에만 대답해주세요. 그러면 돌아갈게요."
제 팔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 걸 느끼며 대만은 준호를 향해 몸을 돌렸다. 2년만에 제대로 마주하는 얼굴이었다. 대만과 시선이 마주치자 준호는 잡고 있는 팔을 놓았다. 오랜만에 본 얼굴은 마지막에 본 얼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약간의 피곤함이 묻어나긴 했지만 대만은 그 때 모습 그대로였다. 짧은 머리도, 치수가 제대로 입으라며 잔소리하던 편한 세미정장 차림도, 처음 봤을 때 잘생겼다고 생각했던 얼굴도 전부 그대로였다. 변한 게 있다면, 그가 더 이상 경찰이 아니라는 것과..
"..건강해보이셔서 다행이네요. 치수한테 잘 지내고 계신다는 말은 들었는데..."
"안부 같은 건 됐습니다. 묻고 싶은 게 뭡니까?"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벽을 치고, 선을 긋는 차가운 말투. 과거의 대만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태도였다.
'검시관님, 뭐 도와드릴 건 없습니까?'
'채형사가 귀찮게 굴면 언제든지 저한테 말씀하세요. 파트너 뒤치닥꺼리하는 것도 제 일이니까요.'
'검시관님은 커피 좋아하십니까? 그게... 근처에 카페가 새로 생겼는데 말이죠. 거기 커피가 맛있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검시관님 취향은 어떤가 해서..하하..'
"하실 말씀 없으면 들어가겠습니다.
"..죄송해요. 잠깐이면 된다고 했는데.."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었는데. 스스로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서 준호는 쓰게 웃고는 대만을 쳐다봤다. 너무나 낯선 시선이었지만 피하지 않고 똑바로 그를 마주했다.
"지난 번에 뵈었을 때, 사건 현장에 계셨었죠?"
"..."
"제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혹시 사건과 연관이 있으신 건가요?"
상관없다고 말했다던 치수의 말을 떠올리며 준호는 조심히 물었지만 대만은 말이 없었다.
"채형사님한테는 상관없다고 하셨다고 들었어요. 정말, 그러신거죠? 위험한 일 같은 건..."
"물어볼 게 그겁니까?"
"예? 네... 그걸 물어보고 싶어서 왔어요. 형사님이 걱정돼서..."
"...쓸데없는 참견입니다. 제가 뭘 하든 이제 그쪽하고는 상관없습니다."
대만은 더 이상 할 말 없다는 듯 몸을 돌리고 다시 문고리를 잡았다.
"..치수한테 말한대롭니다. 그 이상 할 말 없습니다."
"..."
"그리고 전 이제 형사가 아니라 탐정입니다. 그 쪽하고는 더 만날 일 없는 사람이죠. 그러니까 여기 다시 찾아오지 마십시오."
철컥,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닫히는 그 짧은 시간이 준호에게는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돌아서는 대만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닿기를 거부하듯 대만은 안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자물쇠를 거는 듯한 소리가 이어서 들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들리는 거라고는 밖에서 울어대는 매미의 울음소리 뿐이었다. 원하는 대답에 가까운 말을 들었지만 준호에게 싹튼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불안에 가시가 돋아 그의 마음을 아프게 찔러왔다. 준호는 그대로 계단을 내려가려다가 다시 문 앞에 섰다.
"...상관없다는 말 믿을게요. 잠깐이지만 얼굴 봐서 기뻤어요. 앞으로도 잘 지내시길 바랄게요. 위험한 일은 하지 마시고요.. 치수도 걱정하고 있어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준호는 그걸로 됐다는 듯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내딛을 때마다 부상 다한 다리가 욱씬거렸다. 대만은 문 너머로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문에 등을 기댔다.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그대로 무너지듯 대만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왜 이렇게 그 사람한테는 못 보일 꼴만 보이는지. 왜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수 없는지. 꼭 그렇게까지 상처줄 필욘 없었는데.
"젠장, 젠장.. 젠장 나는... 나란 놈은...."
아니, 상처주고 싶지 않았다. 소중히 하고 싶었다. 누구보다 아끼고 싶었는데 또 자신은 준호에게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그 날처럼. 답답했다. 목이 조여오는 것 같았다. 가슴을 누가 짓누르는 것 같았다. 대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찬장을 열었다. 언젠가 선물로 받았던 위스키 병이 보였다. 나중에 마시겠다며 받아두고 한 번도 마신 적 없는 술이었다. 하지만 이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선 뭐라도 해야했다. 무작정 병 뚜껑을 열고 입에 들이부었다. 누가 보면 미친 거 아니냐는 소리가 절로 나올 일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당신 몸이나 걱정하지. 나같은 놈은 잊고...."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엔 괴로움만이 묻어났다.
***
새벽의 고요함을 깬 건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였다. 소파에 누워있던 대만은 몸을 뒤척였다. 소파 밑에는 빈 위스키병에 가득 찬 재떨이 그리고 빈 담뱃갑과 핸드폰이 굴러다녔다. 지난 밤, 대만의 괴로움을 말해주는 물건들이었다.
"..으...시끄,러..."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숙취를 느끼며 대만은 겨우 눈을 떴다. 사무실 창 밖의 풍경은 아직 어둡기만 했다. 이런 새벽에 누가.. 끊길 줄 모르는 벨소리에 피곤함을 느끼며 그는 소파 아래로 손을 뻗었다. 더듬거리며 주워든 핸드폰에 뜬 건 익숙한 이름이었다.
"..영걸이냐"
"대만아, 밤 늦게 미안하다. 하지만 꼭 얘기해야할 일이 있어서."
핸드폰 너머로 영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지만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목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대만은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아니.. 괜찮아. 무슨, 일인데? .....혹시 허윤진 관련해서 뭔가 알아,낸 거라도 있어?"
"어... 방금 전에 애들 연락이 왔는데 허윤진 죽기 전 날에 만난 사람이 있다더라."
"죽기 전 날에?"
영걸의 말에 대만은 정신은 번쩍 든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누군데? 만나서 뭘 했대?"
"그거까지는 못 알아내서.. 네가 만나서 직접 듣는 게 좋을 것 같아."
".....알았어. 그래서 어떤 사람인데?"
"그게.... 그 너도 들은 적 있을지 모르겠다. 박철이라고."
박철.. 대만은 둔한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분명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인데... 머릿 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몽롱했다.
"...두바이 라는 이름의 큰 룸살롱이 하나 있는데 거기 운영하는 조폭이야. 나랑은 전에 좀 인연이 있어서 얼굴 정도는 아는 사이야. 한 때는 주먹깨나 쓰는 걸로 유명했고.. 최근까진 크게 소란 피운 적 없이 그냥 룸만 관리하고 있다 들었는데."
"그래? 너처럼 개과천선...이라도 한 건가"
"설마... 그랬으면 허윤진하고 만나지도 않았겠지. 자리는 내가 만들어볼게. 옛 정이 있으면 한 번은 만나주겠지."
"고맙다, 영걸아. 최대한 빨리 부탁할게. 아니면 지금이라도.."
"됐어. 지금 이 시간에 가서 뭘하게. 그리고 너.. 지금 상태 안 좋은 것 같다. 말하는 것도 어딘가 어눌하고... 술마셨어?"
영걸의 말에 대만은 입을 다물었다. 전화 너머인데도 귀신같이 상태를 아는 영걸이가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을 많이 봐서 그런가..
"...미안, 그래도 가급적 빨리, 얘기 나누고 싶으니까.. 내일 중으론 만날 수 있게 해줘.."
"알았다. ..얼른 쉬어라. 나도 빨리 다시 들어가야 하니까. 약속 잡히면 건물 주소랑 시간 문자 남길게."
"어, 그래.. 고생,해."
대만은 테이블에 핸드폰을 내려놓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드디어 뭔가 알아낼 수 있는 건가. 허윤진이 뭘 했는지. 뭘 하다 살해당했는지. 그러면 누가 죽였는지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역시 믿을 건 영걸이 밖에 없네. 지금의 나한테는..."
깊은 한숨과 함께 대만은 다시 몸을 눕혔다. 지금은 아무 생각 말자. 아무것도. 다시 자신을 끌어들이려는 우울감을 뒤로 밀어둔 채 대만은 눈을 감았다. 아직 해가 밝기에는 일렀다.
댓글 0
추천 포스트